레이테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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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レイテ沖海戦, 比島沖海戦, フィリピン沖海戦, 捷一号作戦(しょういちごうさくせん), キングⅡ作戦
영어 : The Battle of Leyte Gulf, The Second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Operation KING Ⅱ

레이테 만 해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
1944년 10월 23일 ~ 1944년 10월 26일
장소
필리핀
교전국미군
미국
일본군
일본 제국
지휘관 윌리엄 홀시
토머스 킨케이드
제시 올덴도르프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구리다 다케오
오자와 지사부로
니시무라 쇼지
시마 기요히데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패망
전력정규항공모함 8척
경항공모함 8척
호위항공모함 18척
전함 12척
순양함 12척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 166척
다수의 어뢰정 및 잠수함
항공기 약 1500기
정규항공모함 1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9척
중순양함 14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약 35척
항공기 약 300기
피해 규모경항공모함 1척 침몰
호위항공모함 2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호위구축함 1척 침몰
항공기 약 200기 손실
2,800여명 전사
정규항공모함 1척 침몰
경항공모함 3척 침몰
전함 3척 침몰
순양함 10척 침몰
구축함 11척 침몰
항공기 약 300기 손실
약 12,000명 전사

파일:Attachment/레이테 만 해전/MAP.jpg
4번이 바로 연합함대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던 구리다 턴이다.

파고다 마스트[1]가 보이고, 제가 본 가장 큰 전함가장 큰 미트볼 깃발이 보입니다!

- 윌리엄 C. 브룩스 소위, 사마르 해전 당시 일본군 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하면서

1 개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해전

미드웨이 해전이 일본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전투였고, 필리핀 해 해전이 일본 해군의 등뼈를 부러뜨린 전투였다면, 이 레이테 만 해전은 이미 부러진 등뼈를 완전히 조각내 버린 전투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4년 10월 22일에서 27일까지 벌어진 수리가오 해전, 엔가노 곶 해전, 사마르 해전, 시부얀 해 해전을 통틀어 말하는 독소전쟁쿠르스크 전투와 궤를 같이하는 인류사상 최대의 해전. 양측 함대의 총 배수량은 약 250만 톤이었다.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정작 레이테 만에서는 해전이 없었는데도 레이테 만 해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자.

2 원인

미국은 이제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함을 확신하게 되었고, 전쟁 초반에 잃었던 필리핀 탈환을 원하고 있었다. 만일 필리핀이 미군의 손아귀에 떨어질 경우, 일본이 아직 점유하고 있는 남방지역과 본토가 완전히 나누어지게 되므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도 그에 대응해서 미군필리핀 탈환전을 저지하려 했으며, 동시에 잔존한 해군전력 전체를 동원해서 미국의 필리핀 상륙부대와 미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서 추가 침공을 방지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군의 상륙지점인 레이테 만을 공격할 계획을 짜게 된다. 실사판 네이비필드

일본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구리다가 이끄는 부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과해 사마르 섬을 돌아 레이테 만의 상륙 부대의 후방을 공격하고, 니시무라가 이끄는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쪽을 통과해 후방을 치는, 이른바 과거 시대의 함포 위주의 해전을 떠올리게 하는 작전을 짰다. 일본 해군의 항공력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탈탈 털렸고, 육군 항공대도 연합군에게 완전히 털리고 있던 상황이라 사실 이런 전술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함대를 그냥 보내면 미군에게 걸려서 전멸할 게 분명하므로, 미군을 꾀어내기 위해 미끼로 항모전단을 던지기로 한다. 태평양 전쟁의 주역이 항모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미련한 짓이지만, 이미 일본의 항모는 함재기가 없는 빈 깡통에 불과했기에 이런 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아니,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 미끼 함대의 지휘관은 오자와 지사부로가 맡았다.

또한 일본군이 함대를 너무 잘게 나눈 것도 문제였는데, 이는 작전을 너무 세밀하게 나누는 일본군 특유의 뻘짓근성도 한 몫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사방에 흩어진 함대 세력을 한곳에 모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국에서 출격하는 함대 따로, 남방지역에 있는 함대 따로 식으로 개별적인 접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통합된 작전이었지만 무선송신 일치등의 기본적인 조치도 제대로 하지 않아, 서로간의 통신에도 큰 지장을 일으켰다. 이놈들은 반성이라는 걸 모른다. 그 전에 이 시점에 오면 무전기도 개판이다.

3 전투

3.1 전초전

구리다 제독 휘하의 중앙함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 전함 5척.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미끼),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
  • 중순양함 10척.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아타고(기함)와 마야와 초카이,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 모가미급 중순양함 스즈야쿠마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
  • 경순양함 2척.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와 야하기.
  • 구축함 15척.

브루나이를 출발한 구리다 함대는 레이테 만으로 향하지만, 10월 23일 0시 16분에 미국 잠수함 다터(USS Darter)에게 발각되었다. 다터는 동행하던 잠수함 데이스(USS Dace)와 함께 일본 함대를 추적했고, 새벽 5시 24분에 구리다 함대의 기함 아타고에 4발의 어뢰를 명중시킨다. 이후 다터는 중순양함 타카오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켰고, 데이스는 중순양함 마야에 4발의 어뢰를 먹인다. 아타고와 마야는 침몰했지만 타카오는 살아남았고, 타카오를 추적하던 다터는 실수로 좌초하는 바람에 추적에 실패하고 만다. 타카오는 싱가포르로 도망쳤고, 다터의 승무원들은 전원 데이스에 구조되어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다. 정원초과로 다터의 승무원 2명은 데이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잠수함 위에 앉아서 가야 했다.

구리다 사령관은 물에 빠졌다가 구조되어 전함 야마토로 옮겼지만 숙련된 사령부 통신요원들은 옮겨타지 못했는데, 이게 엔가노 곶 해전에서 전황을 바꾸는 큰 문제를 일으켰다.

3.2 전투 초기(시부얀 해전)

일본어 : シブヤン海海戦
영어 : Battle of Sibuyan Sea

10월 24일 오전 8시에 구리다 함대는 미국 정찰기에 발각되었고, 홀시는 제3함대를 동원해서 구리다 함대를 공습한다. 구리다 함대는 대비책으로 무사시를 탱커로 내세웠는데, 무사시는 크고 아름다운 덩치를 자랑하는 데다 함체를 기존의 일본 해군 함선보다 밝은 회색으로 조금 다르게 칠했기에 미군 함재기들은 무사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무사시는 이에 대응하여 주포에 3식탄[2]을 장전하고 일제사격을 하는데, 이 일제사격으로 무사시의 대공포가 개박살난다. 주포 발사의 충격이 너무 커서 대공포의 조준기가 맛이 가 버리고 대공포 사수들도 충격을 받아 맛이 갔다고(...)[3][4] 덕분에 대공사격을 못하게 된 무사시는 수십 발의 폭탄과 어뢰와 기타등등을 얻어맞았다. 그 다음 공습에서는 무사시의 주포가 가만히 있었기에 대공포가 제대로 작동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무사시는 결국 침몰하게 된다. 대공포 사수들은 주포 사수들을 엄청나게 욕했고, 주포 책임자는 나중에 함장 앞에서 잘못했다고 사과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도 무사시가 탱킹을 잘한 덕분에[5], 구리다 함대의 추가 피해는 중순양함 묘코가 큰 피해를 입은 걸 제외하면 없었다.

그러나 오니시 다키지로 일본 해군 중장이 이끄는 일본 해군기들이 미군 항모전단을 기습했고,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프린스턴(USS Princeton, CVL-23)은 폭탄에 맞고 화재 진화 중 탄약고 폭발로 침몰, 경순양함 버밍햄(USS Birmingham, CL-62)이 프린스턴의 화재 진화 중 폭발에 휘말려 손해를 입어 2개월 정도 전선에서 이탈하게 된다.

어쨌든 구리다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보고 함대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한다. 미군은 이걸 보고 구리다 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고 간주했지만, 미군의 정찰기가 사라지자마자 구리다는 함대를 다시 돌려 밤 사이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과해 목적지로 향한다.

3.3 오자와, 홀시낚다

한편 오자와 지사부로는 항공모함까지 포함한 본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항공전력이 부실한 상태에서 항공모함은 그저 크고 무장한 수송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찌됐건 항공모함은 상당히 전략적인 요소였고, 진주만 공습 당시 참가해서 미국의 격침우선순위에 든 즈이카쿠도 있었다. 오자와는 이를 이용해 미군의 기동부대를 유인하려 하였다. 전략적 가치가 없어진 아군 항모를 미끼로 미군의 항모를 꼬셔낸 뒤, 전함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주력부대간의 함대결전 한판 승부를 노렸던 것. 그래도 이길 것 같진 않다만

한편 미 해군을 지휘중이던 윌리엄 홀시는 구리다 함대가 격파당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구리다의 함대는 비록 피해를 보기는 했어도 무사시의 탱킹으로 인해 실제로 기타 함선들의 피해가 거의 없는 등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 조종사들은 격침 보고를 과장해서 하는 편이었고 상관들도 대부분 눈을 감고 넘어가주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스프루언스 제독의 경우 전과보고를 대폭 깎아서 봤을 정도다. 게다가 구리다의 부대에 포함되어 있던 무사시같은 대형 전함은 더더욱 성과가 부풀려지는 효과를 만들었다. 의외로 이런 점에서는 무사시가 야마토보단 밥값을 한 걸지도...

여하튼 오자와는 홀시의 3함대 후방에서 계속 유인 작전을 벌였다. 사실 오자와 함대는 항공모함에 함재기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 크게 위협이 되지는 못했지만, 뒤통수에서 소수의 함재기로 계속 깔짝대니 3함대 입장에서도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또한 일본 해군의 항공전력이 이미 폭삭 망했다는 사실은 아직 미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해상전의 주력으로 떠오른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깔짝거린다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또한 미 항모전단은 오자와 함대의 아웃레인지 전법, 즉 출격한 함재기들이 필리핀 제도의 루손 섬이나 다른 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에 착륙해 보급을 받고 재폭격에 나선다면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필리핀 해 해전 당시 오자와는 이런 전술을 쓰다가 탈탈 털렸었다. 전술 자체가 삽질은 아니고, 숙련된 조종사와 나름대로 우위를 가진 항공대가 있어야 성립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내의 일본군 비행장은 아직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며, 앞서 말했듯이 일본 해군 함재기 세력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미국이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방의 오자와 함대는 당연하게도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홀시의 대결전을 원하는 성향도 낚시의 성공에 기여했다. 홀시 성격이면 낚시인 걸 알고도 갔을지도 모른다.

결국 홀시는 더 이상 구리다의 함대는 위협이 못 되며 오자와의 함대가 위험하다고 판단, 휘하 부대를 이끌고 오자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3함대의 고속전함 기동부대를 이끌고 있던 윌리스 A. 중장전함들만이라도 남아서 호위를 계속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홀시는 오자와의 항공모함들을 완전히 격침시키기 위해서는 전함의 함포도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냥 씹어버렸다. 또한 마크 미처 제독은 전속력으로 북방부대를 전멸시킨 후 즉시 중앙부대를 막는 걸 제의했으나 무시되었다. 이렇게 반대를 묵살한 이유는 홀시가 야전을 벌이기 껄끄러웠던 것도 있었다. 한편 상황을 정확하게 눈치챈 사람도 있었다. 일본 함재기의 지나치게 소소한 공격을 주목하고, 일본군은 이미 아웃레인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자와 부대는 미끼라고 분석한 사람이 바로 알레이 버크 제독이다. 참고로 스프루언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기라면 함대를 북상시키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을 거라고 했다고.

어쨌든간에 오자와를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홀시는 3함대 전력을 몽땅 이끌고 추격에 나섰으며,[6]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제7함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모두 3함대 전체가 추격에 나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니미츠 제독이나 킨케이드 제독은, 홀시 제독이 고속전함들은 산 베르난디노 해협에 놔두고 항공모함만 이끌고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항공모함 대 항공모함의 전투에서는 함재기들이 전투의 주축이 되고, 수상함들은 전투가 다 끝난 다음에 침몰 직전으로 표류하는 적함 몇 척을 정리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에 굳이 전투에 필요하지 않고, 수상함으로 구성된 적의 다른 함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수상함 전력의 일부라도 해협에 놔두고 북상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긴 했다.

하지만 홀시는 이 참에 일본 항모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수상함 전력도 반드시 필요했다. 원래 항공폭탄의 경우에는 위력은 강하지만 함선의 상부구조물만 파괴하므로 전투능력을 상실시키지만, 배 자체는 살아남으므로 추진력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해전에서는 패배하더라도 살아 돌아가서 다시 수리받고 전력을 재건하는 일이 많았다. 문제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확실하게 선체에 물구멍을 뚫어놓어야 할 어뢰의 품질이었다. 개전 초반에 작동불능에 조기폭발, 제멋대로 항주 등 각종 사고와 문제점을 일으킨 미국 어뢰는 문제점이 해결되고 성능이 향상된 레이테 만 해전 시점에서도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라, 뇌격기철갑탄을 달고 적을 폭격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타는 적 항공모함을 적 수상함의 방해를 뚫고 끝장내려면 반드시 고속전함세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때 태평양 함대 사령부와 3함대 사령부가 서로에게 날린 전문을 보면 서로 애매한 표현을 해대서 그냥 저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심정으로 넘어간 듯 하다. 결국 양측이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감에 따라, 절묘한 타이밍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은 텅 비어버렸다.

3.4 수리가오 해협 해전

일본어 : スリガオ海峡海戦
영어 : Battle of Surigao Strait

3.4.1 헬게이트로 들어가다

10월 24일, 후소급 전함 야마시로를 기함으로 하여 같은 후소급 전함인 후소, 모가미급 중순양함 1번함 모가미, 시라츠유급 구축함 2번함 시구레, 아사시오급 구축함 미치시오, 아사구모, 야마구모의 7척으로 구성된 니시무라 함대가 남쪽에서 접근했다. 이들은 낮에 공습을 받았지만 그 피해는 대단치 않았기에 예정대로 수리가오 해협의 남쪽 입구로 진군했다. 이들의 계획은 레이테 만에서 구리다 함대와 합류하는 것이지만, 무선통신을 함부로 쓸 수 없었기에 구리다 함대나 시마 함대와의 협조체제가 결여되어 있었다.

중순양함 나치(기함)와 아시가라, 경순양함 아부쿠마, 그리고 구축함 4척으로 구성된 시마 함대도 니시무라 함대와는 별도로 진격해왔지만, 이들은 니시무라 함대와는 별도로 행동했기에 아직 수리가오 해협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3.4.2 최후의 포격전

수리가오 해협을 방어중이던 올덴도르프 함대는 니시무라 함대의 접근을 알고 즉각 단종진으로 T자 대형을 치고 해협을 넘어가려는 일본 해군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갔다. 우선 미군의 어뢰정들이 후방에서 어뢰를 쏘고 도망치며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성과는 없었고 일본군의 자신감만 드높였다. 그래도 어뢰정들이 전해준 정보는 미군에 전해졌다.

어뢰정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자, 곧바로 미군 구축함 부대가 어뢰를 날렸다. 이 어뢰는 후소와 야마구모를 격침하고 미치시오와 아사구모[7]를 항해 불능 상태로 만든 외에 야마시로에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니시무라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으나, 방어진의 후방에서 순양함과 현대화 개수를 받은 14인치 및 16인치급 구형전함 6척으로 구성된 단종진이 엄청난 포탄을 레이더 관제사격으로 날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대로 된 매복에 걸린 셈이다. 야마시로와 모가미도 응전했지만 화력의 차이가 너무 컸고, 결국 야마시로는 불덩어리가 되어 침몰했으며 모가미 역시 불바다가 된 채로 후퇴했다. 그 외에 탈출에 성공한 건 구축함 시구레 한 척뿐이었다.

여담으로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수상함들로만 이루어진 마지막 해전이자, 전함들끼리 포탄을 교환한 마지막 해전이며, 여기서 가라앉은 일본 전함 야마시로는 전함 주포에 가라앉은 최후의 전함으로 기록된다(같이 활동한 전함 후소는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로 인한 화약고 유폭으로 침몰했다). 그리고 올덴도르프의 전함 6척 중 USS 미시시피를 제외한 USS 펜실베이니아, USS 테네시, USS 캘리포니아, USS 메릴랜드, USS 웨스트버지니아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침몰 내지 피격되었던 전함들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피의 복수에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그러나 제대로 사격한 것은 최신 사격통제장치를 갖춘 웨스트버지니아, 캘리포니아, 테네시 3척 뿐이며, 나머지 세 척은 구식 사격통제장치의 저성능 때문에 제대로 포격하지 못했다. 메릴랜드는 남들의 포격으로 일어나는 물보라를 보고 대충 포격이라도 했고, 미시시피는 마지막 순간에 적을 발견하고 일제사격이라도 한 번 해봤지만 펜실베이니아는 대상을 찾지 못했고 사격 선상에 아군 함정이 있어서 결국 제대로 쏘지도 못했다.

어쨌든 일본군의 함대는 올덴도르프 함대의 견고한 방어진을 뚫지는 못했다. 시마와 니시무라의 협력이 전혀 없어서, 니시무라 함대가 먼저 돌입해서 개박살 난 후 시마 함대가 돌입한 것도 패인이었다. 다만 일본 해군의 전력 대부분, 특히 전함 두 척이 니시무라 함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미 해군 전함열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인 상황[8]이어서 시마 함대가 협력해서 같이 진입했다고 한들 돌파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3.4.3 시마의 도주

뒤늦게 도착한 시마 함대는 니시무라 함대의 전멸을 알고 후퇴하기로 결정하지만, 미군 어뢰정의 공격으로 경순양함 야부쿠마가 손상을 입고 행동불능이 된다. 게다가 불바다가 된 채 후퇴하던 모가미를 중순양함 나치가 들이받는 충돌사고까지 일어났다. 모가미가 움직이지 못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충돌해버렸다고(...) 결국 모가미는 이후 행동불능이 되어 뇌격처분되었고, 최종적으로 니시무라 함대의 생존함은 구축함 시구레 하나뿐이였다.

사실 시마 함대가 살아남은 건 올덴도로프가 수비적인 자세를 고수하였고 사마르 해전이 시작되는 바람에 시마 함대를 추격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일본 해군은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3.5 사마르 해전

일본어 : サマール沖海戦
영어 : Battle off Samar[9]

실전최강 전투기대전 시즌1 야마토 전함과 세기의 공중전 - 사마르해전을 다룬다

10월 25일 오전에 벌어진, 레이테 만 해전의 백미. 영문 위키 사마르 해전 참조. 한글로 된 내용은 # 참조.

우연의 일치로 명량 해전과 날짜가 같다. (양력 기준)

3.5.1 아이고 맙소사 우린 이제 죽었어

산 베르난디노 해협의 감시가 약화...된 게 아니라 완전히 없어지면서 잔존해 있던 구리다 함대는 무사히 해협을 통과해 남하하던 중에 미 항공모함 함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구리다 제독은 이 함대를 홀시가 이끄는 3함대라고 판단하고,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불덩어리가 되기 전에 항공모함을 벌집으로 만들어 수장시키기 위해서 즉각 교전에 들어갔다.

미군 태피3 전력일본 구리다 중앙군 전력[10]

하지만 구리다 제독의 판단과는 달리 이 함대는 C.A. 스프레이그 소장이 지휘하는, USS 갬비어 베이호 등 호위항공모함 6척, 구축함 3척, 호위 구축함 4척 등으로 이뤄진 일명 '태피3'라는 소규모 함대였다. 당시 구리다 함대와 태피3의 전력은...야마토와 공고를 비롯한 전함만 4척에다가 중/경순양함과 구축함을 합치면 27척. 사실 태피3의 모든 함정의 배수량이 야마토 한 척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구리다 함대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갑작스럽게 적과 조우했기에 포격전에 적합한 진형을 만들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돌격한 것이다.

한편 스프레이그 호위항공모함부대는 이런 예측하지 못한 사태를 맞게되자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을 받은데다가 실제 전력상으로도 일본 전함은 항공모함 코 앞에 있는데 남아있는 미군 전함은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수리가오 해협에 있었던 상태라 킨케이드 휘하의 다른 호위항공모함 부대의 항공 지원을 제외하고는 우세라는 게 없었다.

최초로 접촉사실을 보고한 스프레이그 제독의 호위항모부대는 킨케이드 제독에게 7함대가 있는 곳으로 철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렇게 되면 강력한 적을 상륙지로 끌고 들어오는 셈이라 상륙부대의 안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인근의 다른 호위항모부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호위항모부대와 일본함대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스프레이그 제독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우선 함대를 원형진으로 재편성하며 구축함과 호위구축함은 연막을 쳐서 항모를 가리고, 항모는 전 함재기를 긴급발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위항공모함에도 일본 함대에 유효한 대함용 철갑탄이나 어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장을 탑재하거나 교체할 시간이 없으니[11] 무장이 있든 없든 일단 전부 띄우고 보자는 것. 스프레이그의 빠른 상황판단 덕분에 단시간 내에 함재기들은 한 기의 피해도 없이 전부 무사히 발함에 성공했다. 그리고 호위항모가 보유하고 있는 함재기용 무장은 유폭의 위험이 있으니 전부 바다에 버리라는 과감한 명령을 내렸다.[12] 그렇다곤 해도 실제적인 전력 차는 너무나 확연했다. 구리다 함대는 스프레이그의 호위항공부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고, 스프레이그는 훗날 "그 때는 30분 버티면 잘 버틴 거라고 생각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그 와중에 태피3 소속 구축함 7척 중 호위 구축함 USS 사무엘 B. 로버츠와 플래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 및 USS 히어만, USS 호엘로 구성된 구축함 전대가 구리다 함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야마토의 주포탑 하나 무게가 2774톤인데 USS 존스턴의 만재배수량이 2700톤이었다. 문자 그대로 다윗 대 골리앗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3.5.2 다윗 대 골리앗

급히 요격에 나선 함재기들도 무장을 탑재한 기체는 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탑재한 무장도 함정에 유효타를 먹일 수 없는 육상공격용 폭탄이나 폭뢰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기총 탄약조차 없는 기체가 상당수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호위항모의 함재기들은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무장이 탑재된 기체는 폭뢰든 고폭탄이든 일단 최대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폭격을 개시했고, 그 와중에 중순양함 스즈야가 육상공격용 폭탄을 지근탄으로 얻어맞고 기관에 손상을 입었다. 무장이 없는 기체는 기총사격을[13] 가하거나 텅 빈 무장창을 연 채로 마치 뇌격을 하려는 것처럼 접근해 일본 함대가 회피기동을 펼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초반에 성급하게 접근하느라 제대로 대열을 짜지 못했던 일본 함대는 이런 속임수 공격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함재기들은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이런 공격과 거짓 공격을 반복한 다음 육상기지로 향했다[14]. 착륙 과정에서 손상된 기체는 몇 있었지만 태피 3의 파일럿들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무사히 대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태피1,[15] 태피2에서도 함재기들이 지원에 나섰다.

한편 태피3의 플레처급 구축함 3대인 존스턴(DD-557), 호엘(DD-533), 히어만(DD-532)과 사무엘 B. 로버츠(DE-413)[16]가 돌진,[17] 일본 순양함들의 주포 부앙각이 못미치는 거리까지 접근해 5인치(12.7cm) 함포로 그나마 피해를 줄 수 있는 구조물들을 공격하고 어뢰를 쏴대는 무용을 펼쳤다.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이 이끄는 구축함 존스턴은 우선 지그재그로 접근,[18] 포격을 가하여 모가미급 중순양함 4번함 쿠마노의 함교를 박살내고, 뒤이어 발사한 어뢰로 쿠마노의 함수를 날려버렸다. 뒤를 따르던 모가미급 3번함 스즈야는 쿠마노를 피하려고 속도를 줄이며 선회하다가 태피3 함재기들의 공습을 당해 폭탄 2발을 맞고 전열에서 이탈한다.[19] 그러나 존스턴도 7시 30분쯤에 전함 공고의 14인치 주포 3발, 야마토의 6인치 부포 3발을 맞아 큰 피해를 보았고 스콜 안으로 숨어 수리에 들어갔다.

이때 존스턴의 뒤를 이어서 싸움판에 끼어든 배가 바로 사무엘 B. 로버츠(DE-413). 사무엘 B.로버츠는 처음에는 타카오급 중순양함 4번함 초카이를 향해 돌진했는데, 초카이가 반격을 가했으나 역시 부앙각의 사각으로 들어간 덕분에 포격은 모두 빗나갔다. 그렇게 접근하여 초카이에게 뇌격을 가한 후,[20] 곧바로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 접근, 포격전에 들어간다. 치열한 근접전 끝에 치쿠마의 8인치 포탄 6발에 5인치 포탑 중 1기를 잃었지만 나머지 5인치 포 1문으로 반격을 가하여 치쿠마의 3번 포탑과 함교를 날려버렸다. 그 뒤,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의 14인치 포에 치명타를 입었고 9시 35분에 퇴함 명령이 떨어졌고 30분 후 침몰했다. 하지만 이 활약상으로 전함처럼 싸운 호위구축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1]

아모스 T. 해서웨이(Amos T. Hathaway) 함장이 지휘한 구축함 USS 히어만(DD-532)은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게 포격을 가하며 묘코급 중순양함 하구로와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를 향해 어뢰를 날렸고, 곧바로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에 접근해서 어뢰를 발사한다. 이 어뢰들은 전부 빗나갔지만, 그 중 2발이 바로 뒤에 있던 일본 함대 기함 야마토를 향해 돌진했다. 야마토는 이 어뢰를 피하려다가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진행하는 어뢰들 사이에 끼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회피기동을 취하다보니 그만 전장에서 벗어나버렸고, 이는 구리다가 정확한 전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영문위키 나가토에 따르면, 이 어뢰는 야마토와 함께 있던 전함 나가토도 전장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히어만은 혼자서 일본 최강의 전함 2척을 물리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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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전투 상황도

영문위키와 일본어 위키 레이테 만 해전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설도 있다. 야마토와 나가토가 구축함대의 어뢰 회피를 위해 변침하다 조타 실수로 어뢰 항주가 끝날 동안 같은 방향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미함재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뢰를 회피한 방향과 같은 방향에 형성된 스콜속으로 대피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변침에 소요한 시간은 8분으로, 긴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전함 콩고 또한 미함재기의 공격 받아 측거의가 파손되어 스콜속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라면 야마토는 공습을 당하면서도 진격하는 구리다 함대의 다른 배들을 버리고, 기함의 임무까지 방기한 채 도주했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일본군에서 가장 대공화력이 막강한 전함이 말이다. 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 그리고 위에 링크된 한국어로 된 해전 관련 내용도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에게 쫓겨서 도망쳤다고 기술하고 있으므로, 이쪽 설은 참고만 하자.

이후 히어만은 사무엘 B. 로버츠와 함께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를 양쪽에서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순양함들과 전함 공고, 그리고 어뢰에 쫓겨 도망가던 야마토와 나가토의 집중포화를 뒤집어쓴 끝에 포탑 하나가 날아가고 이물이 침수되고 3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히어만은 태피2의 함재기 4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계속 포격했고, 함재기의 어뢰 1발이 치쿠마의 고물을 파괴한다. 대파되어 조종불능이 된 치쿠마는 뒤이은 공습으로 침몰했고, 토네가 히어만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역시 공습을 당해 쫓겨난다. 구리다 제독이 후퇴명령을 내리면서 해전은 막을 내렸고, 히어만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4척의 미군 군함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해서웨이 함장은 이 공적으로 해군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히어만은 미국과 필리핀 정부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여담으로 이 해전에서 히어만이 낸 전사자는 6명 뿐이었다.

히어만과 함께 돌격한 호엘(DD-533)은 공고를 정면에서 틀어막고 하구로에게 어뢰를 날리며 분전했지만, 일본군에 포위당해 40발이 넘는 포탄을 얻어맞고 8시 55분, 돌격을 감행한 4척의 미군 군함 중 첫번째로 침몰했다. 그리고 호위항공모함 갬비어베이(CVE-73)가 8시 20분쯤 치쿠마의 포격에 전방엔진룸이 파괴 되었으며, 히어만(DD-532)이 쏜 어뢰를 피했다가 다시 복귀한 야마토가 접근하면서 포격을 하여 적중당하고, 상당한 양의 포격을 당해 야마토가 직사거리에 도달시엔 갬비어 베이가 침몰직전의 상태였다.[22][23][24]

존스턴은 때마침 드리운 스콜에 숨어서 기관부와 포탑 2개를 복구하는데 성공했고 다시 아군을 지원하던 와중에 아가노급 경순양함 야하기가 구축함 4척을 이끌고 호위항모에 공격을 가하려고 접근하자 다시한번 이들을 단신으로 가로막고 나섰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 함대는 급히 93식 어뢰를 발사했지만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부 빗나간다. 이어진 포격전 끝에 존스턴은 2번 포탑과 엔진이 파괴되었고, 오전 9시 40분에 전원 퇴함, 10시 10분에 침몰하고 말았다.

호위항공모함과 돌격하지 않고 남아 있던 호위구축함들도 도망치면서도 포격을 가했다. 1문밖에 없는 5인치 포로 세인트 로가 구축함에 1발, 칼리닌 베이가 묘코급 중순양함에 2발을 명중시켰으며[25], 화이트 플레인스(CVE-66)는 5인치 포의 최대 사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초카이에 6발을 명중시킨다. 물론 중순양함 상대로 5인치 포를 명중시켜봤자 포탑을 부수는 정도였겠지만, 이 일격은 초카이의 산소어뢰를 유폭시켜서 엔진과 방향타를 날려버린다! 결국 초카이는 키트쿤 베이(CVE-71)의 어벤저 뇌격기가 투하한 철갑탄에 맞고 행동불능이 되어 뇌격처분당했다[26].

그러나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숫자와 화력의 차이로 인해 호위구축함 데니스(DE-405), 호위항공모함 칼리닌 베이(CVE-68), 팬쇼 베이(CVE-70) 등 피격 당하는 함선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USS 갬비어 베이(CVE-73)는 격침당하고 말았다. 갬비어 베이는 1940년 노르웨이에서 독일 해군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에게 격침당한 영국 항모 HMS 글로리어스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격으로 격침당한 항공모함이라는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치쿠마,야마토,초카이,노시로 등 워낙 많은 일본군 군함들이 갬비어 베이에 집중포화를 퍼부었기에 다수의 일본군 군함들이 공동격침을 기록하긴 했지만, 가장 공이 큰 함선은 치쿠마다. 치쿠마의 포격으로 갬비어베이의 전방엔진룸이 파괴 되었으며, 야마토는 접근하면서 포격해 명중을 확인하였고, 상당한 양의 포격을 당해 야마토가 직사거리에 도달시엔 갬비어 베이가 침몰직전의 상태였다.[27][28][29] 그리고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CVE-63)는 이 전투직후 카미카제 공격에 침몰하였다.

3.5.3 일본군은 왜 고전했는가?

상식적으로 봤을 때, 스프레이그 제독의 함대는 구리다 함대의 적수가 될 리가 없었다. 다른 전력 다 빼고 그냥 야마토가 주포로 즈려밟기만 해도 산산조각날 수준이다. 스프레이그 제독이 30분만 버티면 다행이라고 본 게 그래서다.

다만 스프레이그 제독 휘하의 호위항공모함부대가 미친듯이 연막을 뿌려대고, 어뢰를 난사하고, 긴급출격한 전투기들이 폭탄을 장착하지 않았지만[30] 폭격을 가하는 척 훼이크성 움직임을 보이고 기관총이라도 난사하고, 총알이 다 떨어져도 계속 주변을 맴도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여기에 구리다의 함대가 철갑탄을 장착한 상태로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장갑판이 상대적으로 얆았던 호위항모 입장에서는 명중한 포탄이 아예 관통해 버렸는데, 심지어는 포탄이 신관작동으로 폭발하기도 전에 갑판과 선체를 다 뚫고 지나가서 그냥 바람구멍만 뚫리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결정적인 손상을 입지도 않았다. 더욱이 당시 구리다 제독 역시 홀시 제독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있었는데, 항공모함을 보고서는 스프레이그 함대를 홀시의 3함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이런 오판 때문에 '빨리 못 잡으면 함재기가 날아와서 우릴 고깃밥으로 만들거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전투 대형을 짜지도 않고(못하고) 항해하던 대형 그대로 전투를 시작했기에 압도적인 화력을 충분히 살릴 수도 없었다. 여기엔 스프레이그 함대의 분전도 영향을 끼쳤다. 빈약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교전에 임하다 보니, 구리다 입장에선 상대를 과대평가하게 된 것이다.

USS 존스턴을 비롯한 용감한 미군 구축함들의 돌격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돌격이 없었다면 구리다 함대는 단숨에 태피 3을 분쇄하고 레이테 만에 돌입했을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도 백미는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으로, 히어만이 일본군 기함 야마토와 전함 나가토를 전장에서 쫓아냈기에 구리다 제독은 효과적으로 함대를 지휘할 수도 없었고, 전황 파악도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최강의 전함 2척을 전열에서 몰아냄으로서, 구리다 함대의 펀치력을 대폭 약화시킨 것도 중요하다.

이때 일본 해군은 모든 상황을 눈으로 직접 관측하는 상황이다 보니 스프레이그 함대의 이동속도를 실제 이동속도보다 훨신 더 빠른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추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내가 그때 겁먹긴 했지만 그정도로 급하진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 격전중에 구리다 앞으로 한 통의 통신이 들어오는데...

3.5.4 구리다 턴

"저 망할 놈들이 도망간다!!"

- 스프레이그 소장

구리다 함대에 (구리다)함대의 후방에서 적함대를 발견했다는 통신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는 확실한 오보로, 이미 미국 3함대는 오자와에게 제대로 낚여 저 멀리 필리핀 북쪽에 있었고 당시 구리다 함대의 후방에는 미군함대든 일본함대든 어떤 함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기묘한 점은, 구리다 함대가 받은 이 '후방에 적이 있다'는 무전은 당시 일본군의 그 어떤 발신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아 누가 날린 무전인지 모른다. 이를 두고 구리다 함대 수신기록 중에도 이 통신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던 구리다가 착란에 빠졌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지만, 당시 이러한 무전은 구리다 함대뿐만이 아니라 인근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항공대, 심지어 도쿄에 있는 해군사령부까지 받은 상황이었다.[31]

거기다 구리다는 오자와의 낚시 성공을 모르고 있었다. 오자와는 홀시의 3함대를 낚으면 무전으로 이 사실을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고, 낚시가 성공하자 오자와 제독은 구리다 제독에게 사실을 무전으로 몇 번이나 날렸는데 이 무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무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여기에서도 한 가지 절묘한 상황이 있었는데, 위에 언급된 것처럼 시부얀 해전 당시 구리다 제독의 좌승함 아타고가 격침되면서 구리다 제독과 고위 참모진들만 야마토로 옮겨 탔고 숙련된 사령부 통신요원들은 야마토에 타지 못했기 때문에 전황 파악은 더더욱 쉽지가 않았다.

결국 전황도 불분명한 상황에, 오자와는 연락이 없고, 후방에 적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까지 날아드니, 구리다는 홀시 함대가 자기네 뒤통수까지 찾아왔으며 즉 '오자와 함대의 미끼 작전은 실패했고, 지금 우리는 포위당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구리다 함대는 뱃머리를 180도 돌려 철수하기 시작하고, 덕분에 요단강 익스프레스 탈 위기에 처했던 태피 3 함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마르 해전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교전이었으며, 이 기회를 놓친 일본군은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근성을 보여준 한판이었다. 당장 스프레이그 제독부터 던질 수 있는 것은 문고리까지 던질 지경이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미군 참전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진짜 이제는 죽는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일본 해군이 퇴각하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쟤들이 갑자기 왜 후퇴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한다. 수병중 일부는 포 사정거리안에 있을때 그냥 보내지 말고 쏴서 격침시키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리다의 철수 명령은 후세에 구리다 턴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마디로 정말 구린 턴

3.5.5 미군의 피해

In no engagement of its entire history has the United States Navy shown more gallantry, guts and gumption than in those two morning hours between 0730 and 0930 off Samar.

미 해군 역사를 통틀어 미 해군이 사마르 앞 바다에서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아침 2시간 동안 보여준 용맹, 배짱, 진취성보다 더한 것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사무엘 엘리엇 모리슨,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ume XII, Leyte

용감하게 돌격했던 미군 구축함들은 USS 히어만 단 한 척을 제외하고는 죄다 대파당하거나 격침당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일본군의 카미카제하고도 대비되는 게 이건 전적으로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아예 첫 개돌을 감행한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의 존스턴은 명령도 받지 않고 돌진했다. 이 행동은 일본군이 평소 강조하던 근성과 정신력과 일치했으며, 그걸 빼더라도 어찌나 용감해 보였는지 USS 존스턴 같은 경우 침몰해서 수병들이 바다에서 표류할 때는 일본 수병들이 찾아와서 경례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출은 해주지 않았다.[32]일본군의 포로 대접을 생각해보면 놔두고 가는게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경의였을지도?[33]

한편 태피 3 모두가 겁먹고 도망만 다녔으면 오히려 몰살당했을 것이며, 레이테 섬에서 한참 전투 중인 미 육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과 일본군 모두 우연히 만난 상황에서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이 과감하게 나서지 않았으면, 구리다가 먼저 전투 준비를 마쳤을 것이고 당연히 압도적인 화력에 하나하나씩 사냥 당했을 것이다. 과감하게 나선 4척의 구축함 중 3척과 갬비어 베이의 희생으로 인해 나머지 인원들은 살았다.

구리다 함대가 퇴각한 뒤, 태피3은 역사상 최초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34]가 격침당했다.

3.6 엔가노 곶 해전

일본어 :エンカノ岬沖海戦
영어 : Battle of Cape Engaño

1944년 10월 25일, 오자와 중장의 북방함대에 소속되어 미끼로 쓰이다가
결국 미 함재기의 공격을 받고 기울어진 즈이카쿠 위에서 마지막 경례를 하고 있는 즈이카쿠의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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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반자이를 외치는 즈이카쿠의 승무원들

10월 24일 오후 4시 40분에야 오자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낸 홀시 제독의 제3함대는 25일 아침, 대대적으로 오자와 함대를 개발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25일 아침이 되자, 구리다 함대가 사마르 해협에 출몰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니미츠 제독과 킨케이드 제독이 길길이 날뛰면서 홀시에게 무전을 때려댔다. 하지만 무선은 그 자체가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았고, 직접 보내거나 혹은 직접 보낼 수 있어도 마누스 섬을 경유해서 가느라 늦게 도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무선의 혼란성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탓에 홀시는 킨케이드가 보내는 무전에는 그냥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무전이 계속되자 조금은 난감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추격에 나선 홀시의 3함대는 엔가노 곶에서 오자와 함대와 교전에 들어가 큰 피해없이 항공모함 4척(즈이카쿠, 즈이호, 치토세, 치요다)을 격침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이 때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6척의 일본군 주력 항모들 중 미드웨이 해전 때 가라앉은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이후 필리핀 해 해전 때 가라앉은 쇼카쿠를 빼고 마지막인 즈이카쿠가 가라앉음으로써 일본 항공전대는 사실상 붕괴됐다.야마토급 3번함인 시나노를 부랴부랴 개조했지만 그건 논외로 하자[35]

그러나 홀시는 오자와 함대를 완전히 전멸시키지는 못했다. 니미츠까지 사마르 해전으로 돌아오라고 독촉했고, 이때 그 유명한 "38기동부대는 어디 있나 반복한다 온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라는 무전을 받은 후 함대를 되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까지도 홀시는 여전히 구리다 함대의 전력을 오판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미 돌아오기엔 너무 늦을 정도로 멀리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귀환 요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돌아가기로 한다.

어쨌든 홀시는 함대 일부를 추격을 위해 남겨두었고, 이들은 계속 일본군을 계속 추적했지만 추가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돌아온다.

3.7 마무리

홀시가 북쪽에서 다시 돌아오자, 남아있는 일본함대는 더 이상 미군 함대를 공격할 수 없었다.

결국 오자와, 시마, 구리다 등은 휘하 함대를 이끌고 미군 함대의 추격을 피해 필리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홀시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빠져나가는 구리다를 막는답시고 체급도 가볍고 빠른 소수의 함선들을 먼저 보내는 삽질을 저질렀으나, 다행히도(?) 구리다 함대는 매우 빨리 움직여 미군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다 빠져나갔고, 해협에는 구조 작업중인 구축함 노와키만 남아있었다. 미군은 노와키를 다구리놓고 침몰시키는 것으로 현장 상황을 마무리지었는데, 사실상 천운이 따랐던 셈.

이후로도 일본 함대는 미군의 추격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여하튼 대부분의 함선은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4 결과

일본군은 이 해전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함선이란 함선은 다 동원해서 미군을 공격했으나, 미군은 이미 쇼미더머니 파워로 인해 더이상 일본군이 상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있었다. 특히 미군은 압도적인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일본군은 그렇지 못해서, 함포사격시대를 방불케 하는 구시대적 함대결전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도박조차 실패하고 이제 일본군은 미군을 막아낼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군의 도박이 성공해서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만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더라도 일본 해군이 모든 것을 날려먹는다는 결과에는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는 미 해군이 아니라 레이테 만의 상륙부대였고, 해상에서의 교전 역시 미 해군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 연합함대는 모든 가용 전력을 동원해도 미 해군 격멸은 고사하고 미군 상륙부대에 포격 한 번 하기에도 모자란 상태였던 것이다.[36] 홀시 역시 이런 점을 생각해서 해협 방비를 7함대에 맡겨도 된다고 봤었다. 물론 이것은 니미츠가 내린 기본 명령에 위반되며, 이 일로 평생까임권을 당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인명경시사상을 상징하는 카미카제도 이 전투에서 처음 등장했다. 사실 이건 그 정도로 일본군의 항공전력이 미군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지만, 도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합리적인 정책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는 이런 광경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4.1 지휘관들의 운명

홀시는 오자와에게 낚인 것 때문에 두고두고 씹히게 됐다. 같이 작전을 벌였던 킨케이드와 니미츠는 홀시의 예상치 못한 전장 이탈에 당황했고 특히 3, 4함대가 뚫릴 경우, 상륙병력을 지원하느라 무방비상태인 7함대의 지휘관 킨케이드 제독이 몇 번이고 무전을 보내면서 홀시를 닥달했으며 니미츠도 홀시에게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종용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지만 그 때는 이미 상황 종료였으므로(...)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 후에 홀시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해역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비전투 손실로 배와 비행기를 좀 깨먹어서 더더욱 씹혔다(…). 전후, 홀시는 여생을 이에 대한 합리화와 반론으로 보내게 된다.

일본에서는 구리다 역시 오판으로 일찌감치 철수한 것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그 때 너님이 상륙부대 있는 곳까치 처들어갔으면 더글러스 맥아더를 고기밥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임!"이란 이야기를 들으며 두고두고 씹혔다. 물론 제공권이 미국에 있는데다가 맥아더도 그런 상황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니, 맥아더를 물에 빠뜨릴 수 있었더라도 레이테 만 내에서 일본 함대는 전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리다의 오판은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군은 지휘관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할 뿐 정작 그러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는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본영은 내게 무당이 되라 하네. 레이테에서의 구리다는 일본군의 다른 함대와의 통신도 두절되었고 미군의 상황을 정찰할 수단도 없었으므로 신내림이라도 받지 않는 한 올바른 판단만을 내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전으로 명성을 얻은 지휘관은 단연 사마르 해전에 참전한 태피 3의 스프레이그 제독이다. 그는 사마르 해전에서의 전공으로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미 해군이 물량만으로 전쟁에 이긴 게 아니라는 산 증인이 되었다. 또한 자발적으로 가장 먼저 돌격하고 격침 되기 전까지 지휘하다가 전사한 USS 존스턴의 함장 어니스트 에반스미군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이 추서됐다.

4.2 양측의 피해

사실 이 전투의 의의는 홀시가 낚였느냐, 구리다가 오판을 했느냐 정도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전투로 인해서 일본군은 해상전력이 사실상 와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아래와 같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프린스턴
  •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 세인트 로[37]
  • 플래처급 구축함 호엘, 존스턴
  •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

일본해군은 그 동안 누적된 피해외 더불어 이 해전으로 인해 받은 치명상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고, 이후 제대로 된 해상 작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물론 전함 6척, 경/중순양함 10척을 포함한 일본의 일부 수상함들은 미군 지휘관 홀시의 오판에 힘입어 격침되지 않고 퇴각하는데 성공했으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의 수상함 전력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 제독이 전후 미군 조사관에게 한 다음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만일 일본이 필리핀을 상실하게 되면, 일본 본토와 남방의 자원지대는 완전히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함대가 본국에 있는 경우 연료를 공급받을 수 없고, 남방 해역에 있을 경우 본토로부터 탄약 및 기타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리핀을 상실하면서 함대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살아남은 일본 함정 대다수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상태에서 차례차례 미군의 공격으로 파괴된다. [38] 또한 미군은 더 이상 일본 해군의 활동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전투는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막지 못한데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일본군의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그런데 연합함대는 (전투에 참가한 부대원들의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믿고) 자신들이 7척의 미군 정규항모를 격침시켰다고 발표하고는,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 수송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일명 오르독 만 전투(다호작전)으로, 이 작전에 참가한 함선들은 당연히 살아남은 미군의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피해자 1호인 아오바(중순양함) 항목 참조.

5 기타 이야기

  • 홀시는 이 일로 평생까임권을 받았다. 그의 회고록은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 그 자체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회고록에서 책임은 킨케이드에게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바람에 킨케이드가 격노, 절친이었던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서 서로 제대로 말도 섞지 않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 서정주의 대표적인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제. '레이테 만 그 곳에서 영미귀축 항공모함을 깨부수고 장렬히 산화했는가 아아 마쓰이 오장이여 자랑스러운 그 이름이여...' 이런 식. 근데 정작 문제의 조선인 인재웅(마쓰이 히데오) 씨는 종전 후 미군 포로수송선을 타고 인천항을 통해 귀향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오보였다고 한다#
  • 1990년대 유명 미니시리즈인 전쟁과 추억 원작에서 이 해전을 아주 꼼꼼히 재현하고 있다. 극화판은 제작비의 문제로 그냥 넘어갔지만 안개낀 바다에서의 풍경은 CG 없이 잘 재현했다. 주인공은 홀시의 전함군을 이끌고 있으며 홀시가 안 들을거 같아서 넘어가지만 홀시의 선택을 아주 비판하고 있다. 역시 원작 대사에서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경기병대의 돌격일이군이라는 말이 나온다.
  •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이 홀시 제독의 전기를 쓴 걸로 붉은 10월에서 묘사된다. 여기서 홀시 지지파, 나중에 라미우스 함장이 붉은 10월호에서 나도 당신의 책을 읽었소. 하지만 홀시의 선택은 잘못 된거요라고 평한다. 잠깐이지만 이 대사가 영화에도 나온다...[39]
  • 통신을 보낼 때는 도청 방지를 위해 아무 문구나 집어넣어서 보내게 된다. 이는 문장 전체의 길이를 일정하게 맞춤으로써 문장의 길이로 내용을 추측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문제는 하와이에서 체스터 니미츠 총사령관이 홀시에게 보내는 킨케이드를 구원하라는 전문에 하필 온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 문구는 발라클라바 전투의 경기병대의 돌격을 다룬 테니슨 경의 시구이며, 마침 그 날이 경기병대의 돌격 기념일이라 해당 문구를 골랐는데... 통신장교가 그 문장이 디코이가 아닌 줄 알고 그대로 올려서 홀시가 노발대발 했다. 홀시가 들은 해석은 <홀시 너 이새끼 어딨음? 빨리 와서 7함대를 구원하기 바람. 온 세상이 다 궁금해하는데...>이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궁금해하는데 너 지금 어디에서 삽질하고 있냐? 라는 뜻이 되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담당 장교는 짤렸다(…). 이게 상당히 심각했던게, 본래 니미츠는 부하 지휘관들의 행동은 크게 존중해 주었고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니미츠가 이런 과격한 통신을 한 격이니 홀시가 황당해했을 수밖에 없다.
  • 카미카제 첫 격침 전과인 세인트 로를 격침시킨 사람은 일본 해군에서도 굴지의 에이스로 이름높았던 세키 유키오 대위였다. 그러니까 에이스라서 가능했던 전과인데, 여기에 감명을 먹은 대본영조국을 위하여 산화한 구국의 영웅 세키 대위의 행적을 따라간다 따위의 기획 기사를 신문에 실으면서 카미카제 대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게 된다.
정작 유키오 대위는 상부의 특공 제의(=명령)를 듣고, 하루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특공을 한다고 했지만. 이런 걸 남기고 특공을 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댁들이 특공을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그건 댁들같은 머저리를 위한 게 아니고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한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 행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언제나처럼 살아남았지만, 사마르 해전에 참전했음에도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레이테 만 해전을 언급할 때는 별로 거론되는 일이 없다.
  • 구리다 함대가 사마르 해전에서 행한 요인불명의 반전은 후세에 구리다 턴이라는 단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용되는 곳은 주로 태평양전쟁 관련 게임. 특히 후자의 경우, 나침반땜에 보스한테 못가거나 보스 바로 앞에서 나침반 장난으로 반대방향으로 간다거나, 맵에 따라서는 실제의 구리다 함대의 반전 마냥 180도 회전해서 이동하는 경로까지 있기에 엄청난 빈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나침반은 돌리는게 아니다
  • 사마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승리하고 구리다턴을하지 않았어도 결국은 전멸했을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상술된대로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일본 함대를 아작내버린 올덴돌프 함대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많은 포탄을 소모했지만 구리다 함대와 마주쳤으면 화끈하게 한판 뜰 정도의 포탄은 남아있었을거로 추정되고 [40] 전함의 수도 더 많았다. 게다가 맥아더의 육군도 어떻게든 저항을 했을테고, 이런식으로 계속 시간을 끌게 되면 오자와의 미끼 함대를 아작낸 홀시의 3함대가 돌아왔을 테니 결국 어떻게 해도 현실적으로 일본이 이길 가능성은 제로였다는거다.
  •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실제 역사와 달리 1946년 여름에 이 전쟁이 발생하였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미국 해군이 독일과 꼬붕 일본 해군에 의해 박살난다. 무려 미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이 이 전쟁에서 손실되었다. 이 승전 이후 독일은 태평양을 휘젓는 것은 물론, 대서양에 대해서도 우위를 점하게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 작전을 개시한다.
  •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현대에서 타임슬립한 주인공 쿠루스의 조언으로 야마구치 다몬[41]과 오자와 지사부로의 활약으로 일본군이 승리한다. 하지만 곧바로 윌리엄 홀시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대패하고 오자와는 전사한다.
  1. 후소급 전함으로 대표되는, 일본군 특유의 가느다랗고 높게 쌓여 있는 적층식 함교.
  2. 그 3식탄이란 놈이 명량에 나오는 것처럼 거대한 구경의 포에 자탄을 가득 담아 일제사 해서 한방에 적 항공기들을 괴멸시킨다는 물건이다.
  3. 근데 거기다가 영점을 잘못맞춘 덕분에 명중탄은 거의 없었다고...
  4. 사실 조종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공사격이 구름 사이로 들어갔을때 날아오지 않았다는 말이 있어 레이더가 아니라 육안으로 조준했다고 봐도 될것이다.
  5. 여러 이유가 있는데, 야마토급 전함을 참조하면, 양쪽으로 고루 어뢰를 맞은 탓에 탱킹이 약간 길어진 것이 그 중 하나다.
  6. 그러나 전문은 그래도 몇 척은 남기겠다는 투로 보냈다(...).
  7. 미치시오는 추가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고, 아사구모는 이후 항해 능력을 일부 수복하여 표류하면서 퇴각을 시도했으나 느린 속도로 인해 실패하고 최종적으로 격침되었다
  8. 올덴도르프 함대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소속의 2척을 포함해서 79척, 이에 대해 니시무라, 시마 두 함대를 합쳐도 14척, 별도 행동중이던 시마 함대 휘하의 21구축대까지 포함시켜도 17척
  9. of의 오타가 아니다. 사마르섬 바깥의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10. 출처는 이곳.
  11. 미드웨이를 생각해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12. 이것이 후의 포격전에서 호위항모가 피해를 입으면서도 한 척만 격침당하는 데 그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13. 출격한 파일럿들은 적함에 최대한 손상을 입히기 위해 어뢰발사관이나 기총 사수, 기총 총좌를 노렸다고 한다.
  14. 가라앉을 게 뻔한(것처럼 보이는)호위항모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15. 이 부대의 지휘관 또한 스프레이그인데, 앞서 언급한 태피3의 스프레이그와는 다른 인물이다. 골때리게도 둘 다 미국해군사관학교 1917년에 졸업한 임관동기인데, 둘 모두 태평양 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며 이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하는등 동선이 상당히 겹치는데다 군생활도 똑같이 중장까지 달고 전역했기 때문에 라이트 밀덕들에게는 왠지 동일 인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실제로는 고향도 다르고 중고딩 시절도 다른 동네 다른 학교 졸업한 생판 남남이다(...) 흔히 '지기(Ziggy)'라는 별명의 태피3 사령관 스프레이그 제독이 그나마 더 자주 언급되는 편.
  16. 존 C.버틀러급 호위구축함. 미 해군은 수송선단 호위용으로 대량의 호위구축함을 건조했다. 대잠임무가 주목적이었기에 존 C.버틀러급을 비롯한 호위구축함은 만재배수량이 2,000톤도 안되어 '깡통 구축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7. 가장 먼저 돌진한 것은 존스턴의 어니스트 에반스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돌격했다.
  18. 적함에서 발사된 포탄이 만든 물기둥을 향해서 접근했다. 적함이 똑같은 곳에 다시 쏘지는 않을테니.
  19. 하지만 태피2 함재기들의 공습을 피하지 못하고 격침당한다.
  20. 초카이의 대파 원인은 밑에서도 설명하겠지만 포격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뇌격은 빗나갔고 후에 기술할 유폭을 어뢰의 명중으로 착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당시 수병들은 이 어뢰가 명중한 것으로 여겨서 환호했고...
  21. 그 뒤 기어링급 구축함 DD-823,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FFG-58이 그 이름을 계승한다. 그리고 3대 새뮤얼 B.로버츠는 페르시아 만에서 기뢰 접촉으로 대파된다
  22. Aircraft Carriers: A History of Carrier Aviation and Its Influence on World Events: 1909-1945. Potomac Books, p.434
  23. Reynolds, Clark G (1982). The Carrier War. Time-Life Books
  24. Yamato (Battleship, 1941–1945) in the Battle of Leyte Gulf
  25. 심지어 이때 칼리닌 베이의 함포는 거리측정장치가 고장난 상태였다.
  26. 화이트 플레인스에서는 한 장교가 곧 40mm 보포스도 적에게 쏠 사거리에 들어오니까 기대하라고 농담까지 했다고 한다.
  27. Aircraft Carriers: A History of Carrier Aviation and Its Influence on World Events: 1909-1945. Potomac Books, p.434
  28. Reynolds, Clark G (1982). The Carrier War. Time-Life Books
  29. Yamato (Battleship, 1941–1945) in the Battle of Leyte Gulf
  30. 중후반때에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옆에 붙어서 폭뢰를 떨구긴 했다.
  31. 다만 정확한 위치를 가리키는 좌표는 제각각 모두 달랐다.
  32. 그러나 엄연히 일본군이 도망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구조를 안 한 것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상대편 해역에서 후퇴하는 경우엔 아군조차 버리고 가는 경우가 흔했다. 애초에 구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으면, 아마도 나머지 미 함대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33. 이 부분은 이설도 있어서, 많은 생존자들이 일본 함대가 지나가면서 단장기총으로 자신들을 쏘았다고 회고했다. 이는 일본 해군 측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회고이며, 다만 대부분의 배에서 함장이나 포술장이 착란과 복수심에 빠져 생존자에게 난사하는 수병들을 제지하는 식으로 중단되었다. 적어도 유키카제와 야하기 전우회에서 출간한 책에서는 일관되게 같은 이야기, 즉 수병들이 사격하는 것을 사관들이 제지하는 내용이 나온다.
  34. 원래는 '미드웨이'였는데 이번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그 이름을 신형 항공모함에 붙이기 위해 배 이름이 갑자기 바뀌었다. 열받은 수병들은 "배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무식한 놈들이 어디 있어! 그러면 마가 낀단 말이야! 배는 분명히 2주안에 침몰할거야, 내가 장담한다!"라면서 분노했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 건지, 진짜로 마가 낀 건지 그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다만 같은 카사블랑카급의 CVE-57은 원래 이름이 산호 해였는데, 이것도 그 이름을 신형 항공모함에 붙이기 위해서 세인트 로 보다 먼저 함명을 안지오로 바꿨었다. 이 배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살아남았다.
  35. 참고로 이때 급조된 항공모함인 시나노는 항모로 취역하고 개장 마무리 및 함재기 인수를 위한 첫 출항(취역 9일 후)에서 오판과 불운이 겹쳐 울프팩도 아닌 단 한 척의 잠수함에게 발각되어 단 네 발의 어뢰를 맞고 17시간만에 격침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36. 거기에다 오래 얼쩡거렸다가는 상술한 수리가오 해전을 끝낸후 도우러 오고있는 올덴도프의 전함 함대에 모두 고기밥이 되었을듯
  37. 카미카제 특공으로 인한 격침
  38. 예를 들면 이 해전에서 겨우 살아돌아간 묘코급 묘코와 타카오급 타카오는 싱가포르까지 견인받았지만 수리하러 본토로 귀환할 수가 없어서 부양방공포대업무만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39. TV 더빙판에서는 방송사마다 번역이 약간 다르다. 예로 당신이 틀렸소, 홀시는 어리석었소 라던지.홀시 까는건 다 마찬가지 국내 번역된 모 출판사 판 붉은 10월에서는 일본어판 중역 때문에 하루제 제독으로 나와버렸다...
  40. 이렇게 됐다면 밀덕들이 간절히 바라던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전함 함대 vs. 미국 전함 함대 의 드림매치가 성사되었을듯.
  41. 미드웨이 해전에서 쿠루스의 설득으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