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점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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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일에 대응 방비하기 위하여 본국의 수사관(水師官)에게 대조선국 남쪽의 작은 섬인 영어로 해밀턴(port Hamilton, 원본에는 '합미돈 哈米𥫱')이라고 하는 섬을 얼마동안 차지하고 대조선국 정부에 비밀리에 이러한 내용을 통지하라.’

1 개요

1885년 4월부터 대영제국 해군조선 전라도거문도(영국명 포트 해밀턴)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으로 1887년에 영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약 2년간 계속되었다.

2 배경

2.1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프랑스미국이 각각 병인양요신미양요로 조선의 문을 두드렸던 것과 달리, 인도 제국 경영과 청나라에서의 상업적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던 영국조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1876년 조선이 개항하고 미국과 조선이 수교하자 뒤를 이어 수교하여 어느 정도의 관심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 탓에 관심을 아주 배제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영국이 느닷없이 약소국 조선을 침탈했다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거대한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 입장에서 거문도 점령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크림 전쟁, 영일동맹과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1853년 이래 1907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냉전에 버금가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치 상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1] 특히 발칸 반도로의 남하가 좌절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의 남하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차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2.2 고종의 인아거청

이런 상황에서 1884년에 러시아와 조선이 직접 수교를 하고,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여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조선은 일본을 대신해 러시아와 힘을 합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근거는 있었다. 당시 고종은 인아거청(引俄拒淸),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였다.[2]

고종은 김용원(金鏞元)·권동수(權東壽)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金玉均)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조약 추인과 육로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한편 다음해인 1885년, 갑신정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徐相雨)·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외아문독판 김윤식(金允植)은 청의 총판상무(總辦常務) 진수당(陳樹棠)과 일본대리공사 곤도 신스케(近藤眞鋤)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했다. 1885년 7월 묄렌도르프는 이런 행보가 들통나자 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과 러시아의 연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확인한 영국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러시아의 행보는 영국에게 조선을 통해 극동-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행보로 여겨졌던 것이다.[3] 깜짝 놀란 영국이 러시아 해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유사시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일종의 중간보급기지 및 해안포 진지로서, 자기들이 붙이기로는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해밀턴 항), 바로 거문도를 골라 점령했던 것이다. 이 때가 1885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이었다.

2.3 영국의 거문도 점령

비록 점령군인 영국 해군이 관대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했긴 하지만, 상황은 조선 영토에 대한 명백한 불법점령이었다.[4] 조선은 관련 당사국 -러시아, 청, 일본, 조선- 중에서 가장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고,[5] 뒤늦게 항의를 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것은 청나라였다. 영국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 청의 조선 종주권을 지지한다는 유화적 제스쳐에 나섰으나, 청의 이홍장 역시 조선에게 내가 당해봐서 아는데 "한번 조차시켜 주면 끝이 없다"라며 영국의 조차를 막으려 나섰다.

귀국의 제주(濟州)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문도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 섬이라고 부릅니다.[7] 요즘 영국러시아아프가니스탄[阿富汗] 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톡[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인들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香港]을 침략할까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에 속한 것으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水軍)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인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인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인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편 흥양(興陽)에 파견되어 갔던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穆麟德(목인덕) : Möllendorf, Paul George von]역시 영국의 수군 제독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나라 대군주(大君主)께서는 아세아(亞細亞) 동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귀국의 병선이 우연히 우리나라 거문도(巨文島)에 이르렀다는 소식과 아울러 귀 제독이 해도(해당되는 섬, 該島)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대군주께서는 중국의 제독 군문(軍門) 정여창(丁汝昌)이 2척의 군함을 가지고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나라 대군주께서는 군문 정여창에게 우리나라에 특파한 관원들을 데리고 섬에 가서 정형(情形)을 조사하여 보라고 특별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해도에 당도하여 즉시 귀국의 병함(兵艦) 6척과 상선 2척이 해도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해도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들이 곧 귀국의 비어선(飛魚船)에 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선주(船主)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귀 제독의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 제독이 현재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관들은 다시 군문 정여창과 가부를 토의하고 장기도에 가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임금의 윤허를 받아 이달 5일 아침에 장기도에 도착하였고, 본관들은 그 즉시로 귀 제독을 면회하였습니다. 면담한 여러 가지 건은 다 주상의 명령을 받은 것이므로 귀 제독의 대답을 청합니다. 이미 우의(友誼)를 맺은 나라인데 벗이 된 나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으며,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본관들은 귀 제독이 즉시 처리하여 조약 관계가 있는 각 나라들로 하여금 해도가 본국의 땅이라는 것을 모두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살펴보고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

5월 조선의 사신이 거문도에 도착했을 때, 영국 해군은 외교 교섭과는 별도로 거문도 기항(임차) 대가 연간 5천 파운드를 지불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측으로부터 명분 상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거문도 기항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일단 영토 점령(임차)자체가 부당한 일이므로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극동에서 영-러의 긴장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것은 청이었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을 내심 지지했지만, 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드는 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서서, 러시아의 남하는 없을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의 밀약도 헛소문이라고 확인시켜줘서 영국을 안심시키려 했다. 영국은 조선 측이 보낸 속국 인정 전문을 받아들여, 청을 통해 러시아에게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과 조선의 현상유지를 요구했다.

한편 청은 러시아에게 영국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하며 두만강 하류, 즉 연해주 끄트머리의 영유권을 회복하려고 들었고[8], 그 덤으로 자그만치 청한 종속관계를 러시아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렇게 청이 두 열강 사이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사이 거문도 점령은 1886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은 그해 7월에 러시아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했으며,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하려는 건의까지 올린 상황이었다. 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조선이 속국이므로 외교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회답하는 나라는 없었지만 거꾸로 이를 반대하는 나라도 없었다(...)

영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동북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거문도는 흡사 세계각국의 군함 전시장처럼 변했다고 한다.

결국 1886년 12월에야 협상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조선을 보호국화 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나, 청과 영국 역시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확인했다.

2년의 점령 끝에,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고, 동시에 거문도가 생각보다 요새화하기 어려워서 이를 시행하려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랬기에 청의 중재를 담보로 합의 3개월, 점령 22개월만인 1887년 2월 5일 거문도를 말그대로 도로 뱉어나고 철수했다. 또한 점령 시작 때처럼,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철수 소식을 가장 늦게 접했다.

3 결과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이 세계 열강의 주요한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조선에서는 열강의 대립으로 인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 독일 영사 부들러와 유길준이 중립국안을 제기하였으나 당연히 호응은 받지 못했다. 청은 1887년 조선의 공사 파견을 제한하고, 프랑스와 미국의 차관 역시 무효라 주장하는 등 우세권을 계속 주장하였다.

4 후일담

청의 우세는 일본이 서서히 교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약화되었고, 결국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뒤이은 청일전쟁으로 청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영국은 거문도가 별로 쓸모없다고 판단해 물러나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여전히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는 러시아에 부담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는 거문도 점령으로 말미암아 태평양 함대가 대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 차단되어 극동에서 해군의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러시아는 육군을 극동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이에 따라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서두르고, 1896년 만주에서 동청철도 부설권을 따냈으며,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확보한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도록 한 뒤 1898년 자기가 집어삼켰다. 이 사이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고종의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절영도를 조차한 것이 이때.

러시아 제국은 또한 1900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뒤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고 점령을 지속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점령, 조차, 개항함으로써 한국 역시 영향권 하의 완충국이나 보호국으로 만들 의향을 보였다(1903년용암포 사건).[9]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은 러시아의 남하와 팽창을 경계하던 영국과, 신흥국으로 부상한 일본에게 커다란 걱정거리가 되었고, 결국 1902년 양국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영일동맹). 그리고 2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는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러시아는 현실을 인정하여 영국, 미국과 협상을 맺고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5 거문도의 사정

당시의 일화가 재미있는데, 영국 해군은 엄밀히 말해 침략군으로서 들어왔지만 마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민 물의를 최소화하려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주민들 거주 구역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과의 충돌이 있을까봐 빨래터 근처를 지날 때는 각별히 주의를 가해 여자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주둔군과 주민이 함께 찍은 드문 사진 # 영국군 사진

오히려 주민들이 영국 해군을 반기기까지 했다. 이유는 거문도를 거점으로 삼은 영국 해군이 진지보수나 포대 설치 작업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을 고용하여 작업에 동원했는데, 보수는 물론이고 식사까지 챙겨주고 아픈 사람은 군의관이 치료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영국 화폐(파운드 스털링)는 조선인들에게 쓸모가 없어서 통조림이나 등의 물건으로 지불했다고. 당시 조선은 관의 착취 등으로 민초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상태였는데, 일은 일대로 죽어나게 시키면서 백성들 등처먹는 지방관아들의 행태와는 달리 갑툭튀한 덩치 큰 유럽인들은 일을 시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 주니 오히려 주민들이 영국 해군을 물심양면 도와줬다고 한다. 그래서 2년 후 철군할 당시 주민들이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한 예로 청일전쟁러일전쟁 때도 일본군은 민중들에게 "왜놈들이 우리 땅에서 설치는 게 기분은 나쁘지만, 그래도 뭐 주는거도 없이 무작정 시키거나 뺏어가는 관군과 달리 뭐라도 쥐어주더라."라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환심을 사서 길들인 주민들을 이용해서 나중에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할 때 그들을 앞잡이로 활용하거나 인근 다른 지역, 정부군을 상대로 분쟁을 유도하게 해서 손 안쓰고 코푸는 격으로 쉽게 점령하거나 노동력과 물자를 충족하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에 영국은 전략적, 외교적 차원에서 거문도에 상륙했기에 영구 점령이 목적이 아닌만큼 괜히 주민들을 부정적인 방법 또는 물리적으로 건드렸다가는 러시아가 제대로 개입할 수 있는 구실만 제공해서 문제가 커질 수 있기에 우선은 주민들의 호의를 살 필요가 있었다.

웃긴 건 이런 일을 숱하게 벌였던 영국조차도 그보다 훨씬 이후인 2차대전 당시에 독일군채널 제도를 점령할 때 본토와 멀리 떨어진 벽지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적극적인 방어도 제대로 못했으며 독일 점령군이 섬의 주민들에게 나름 호의적으로 대했다는 사실. 역지사지

야사에 따르면, 거문도에 살던 젊은 여자 무당에게 반한 한 수병이 몰래 수영을 해서 만나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니면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더라. 물론 실제로 그런 사건은 없었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나 이런 야사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국군과 거문도의 백성들이 친밀했다는 이야기의 반영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날에 축포를 쏘기로 했는데, 주민들에게 함포 소리에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뒀었다. 주민들은 대포 터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는데 문제는 이때 들이 포 소리에 놀라 다 산으로 도망갔고, 영국 해군에서는 외교 문제를 고려하여 해병대원들을 풀어 개 수색에 나섰다 카더라. 그 밖에도 조선에서 최초로 축구 또는 테니스를 했다거나, 통조림을 먹었다거나 하는 일화도 있는 섬이다.[10]

하지만 영국 해군을 경계하기 위해 들어왔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은 대체로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해군은 군기가 문란하여 행패를 자주 부려 주민들과 자주 충돌했고, 프랑스 해군은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하겠답시고 지붕 위로 뛰어다녀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네덜란드 해군은 "주민들의 곱게 테를 두른 모자가 인상적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깃발을 많이 휘날렸다~고 회고했다. 뭔가 네덜란드만 평이 후하다?

1960년대에 그때까지 살아있던 거문도의 90대, 100대 노인들에게서 영국군의 지배가 어땠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노인들은 영국 해군들에게 배운 영어와 요들송을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문도에 머물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11]가 남아있는데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거문도를 방문하여 묘소를 참배하고 가려고 했지만, 한국 내에서 어찌됐건 거문도는 불법 점거였기 때문에 참배를 하되 분명하게 관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고, 엘리자베스 2세의 일정이 바뀌어 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또한 여수시와 영국 내의 도시 중 하나와 자매결연을 하려고 했었고 영국 대사관 측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일정덕에 거문도 방문이 취소되면서 한편으로는 자매결연은 문제없이 긍정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밝혔고 6.25 당시 영국의 글로스터 대대가 공산진영에게 맞서 싸웠던 파주시와 영국 글로스터 시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리고 종종 주한 영국대사도 참배하곤 하며 해당 지역의 학교에 장학금을 주기도 한다. 물론 자신들의 조상 용사들에게 참배하는 게 당연할 듯 싶지만, 어쨌거나 주권국 영토에 대한 침범에 대해 사죄나 유감의 표현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한국인 입장에선 그리 곱게 볼 수는 없는 일이긴 하다. 다만 한국에서도 이 사건이 여러가지 이유로 별로 주목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2년간의 단기간 점거, 현지 주민과의 우호적 공존, 사건 자체에 대한 낮은 인식 등)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이는 많지 않다. 일단 침략을 했다 해도 당시 민간인들은 나름 괜찮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법적으로는 국가에 피해를 끼친 게 맞는데, 실질적으로는 피해를 입었다 할 만한 게 없었고 오히려 현지인들에게 이득이였으니...

2005년부터 주한영국대사관 명의로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관련기사
  1. 아니, 사실 냉전 자체가 러시아 대 서구 열강들의 2차전이나 다름 없었다.
  2. 미국, 영국과 조선의 수교는 청의 알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은 청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청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 조선이 다른 국가와 연대하려 하니 당연히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운 것.
  3. 정작 러시아는 일관 되게 조선의 요구에 시큰둥 했었고, 부동항보다는 만주의 패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물론 떡을 준다는데 싫다는 측이야 없으니 받아들인 거지만.
  4. 사실 거문도 사람들은 대놓고 영국군을 환영했는데, 본토의 탐관오리들과는 달리 백성을 마구잡이로 착취하지 않고 물건을 사거나 장소를 사용하는 데 언제나 정당한 비용과 보상을 지불한데다가 식량 배급과 의료 혜택까지 무료로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5. 이는 전신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청에서 정보가 건너오느라 직통으로도 6일간의 차이가 있었다. 양력 4월 28일 조선으로 전문이 갔지만, 조선이 전문을 받아본 것은 주 조선 영국 대사관의 직원 스콧에 의해서 전달된 양력 5월 16일이었다.
  6. 사실 '거문도'라는 엄연한 명칭을 두고(혹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붙인 'Hamilton-합미돈(哈米𥫱)'이라는 명칭을 들이밀었으니 조선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7. '哈米𥫱'과 달리 '哈米敦'으로 쓰여 있다.
  8. 이때 훈춘에 8만 대군으로 무력시위를 했으나 러시아는 씹었다(...)
  9. 이는 고종황제 역시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 영, 일의 반대로 조차를 개항으로 변경했다.
  10. 물론 조선 최초의 통조림 시식(?)자는 신미양요 때나 그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11. 영국의 경우 해외출정이나 주둔 중 전사한 군인은 그 땅에 묻는 전통이 있다. 대영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전사한 것을 기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흥왕 순수비처럼 새로 점령한 지역에 비석을 세워 기념하는 것과 같다(단지 그게 그냥 비석이 아니라 묘비란 점이 다를뿐). 반면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고국에 묻히는걸 당연히 여겼었고, 이러한 장례 전통의 차이 때문에 당시 주민들이 "고향 땅에 묻어야지, 왜 시신을 그냥 두고 가냐"고 일종의 문화충격을 경험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함상에서 전사 혹은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수장한다. 시신을 본토까지 가져온 넬슨 제독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