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팍 샤커

(그러니까 남자들은에서 넘어옴)

1 프로필

Tupac Amaru Shakur(Lesane Parish Crooks) 1971년 6월 16일 ~ 1996년 9월 13일

"How many brothas fell victim to tha streetz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이 거리 위에 희생되었나
Rest in peace young nigga, there's a Heaven for a 'G'
편히 잠들어, 갱스터들을 위한 천국도 있으니까
be a lie, If I told ya that I never thought of death
만약 내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 안 해봤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my niggas, we tha last ones left but life goes on....."
친구들아, 이제 우리만 살아남아 있구나 하지만 삶은 계속돼"
2Pac - Life Goes On 中

The Notorious B.I.G.와 더불어 힙합계의 양대산맥[1]

서부 힙합의 대부 a.k.a Makaveli

1996년 2pac의 To Live & Die In L.A. 뮤직비디오에서 2pac의 모습이다.

투팍의 엄청난 위치를 간접적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날고 기는 래퍼인 나스와 에미넴도 투팍에게 리스펙을 표한다. 물론, 리스펙을 표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실력이 무조건 엄청나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스와 에미넴은 본토 래퍼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괴물급 래퍼들이다. 그런데, 그 정도 실력의 에미넴과 나스가 뭐하러 실력도 없는 래퍼를 리스펙하겠는가? 여담으로, 나스의 경우는 투팍이 인터뷰에서 깐 적이 있다(...). 그는 특히 존 레논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자신이 만든 노래에 사상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등 마치 사회운동가[2]와도 같은 음악 활동으로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뒤 이른 나이에 총탄의 이슬로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투팍이 가정폭력범은 아니다.

1971년 6월 16일 뉴욕 브루클린 출생으로, 1996년 9월 13일, 라스베가스에서 총격에 의해 살해당했다. 본명은 투팍 아마루 샤커(Tupac Amaru Shakur). 가끔 2pac에서 2(투)를 ''로 잘못 읽어서 실수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팍 친형은 모프림 샤커.

그의 이름은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투팍 아마루에서 따왔다. 예명도 본명의 Tupac을 변형시킨 것이다. 본토에서는 아직도 Tupac이라고 불린다. 더불어 '마카벨리'라는 예명도 있다. 이 예명은 그가 데스 로우에 영입된 후 마키아벨리즘에 심취하여 지은 예명이다. 뉴욕에서 랩하던 시절엔 MC New York이란 예명으로 활동했다.

래퍼와 프로듀서 및 영화배우를 겸함으로서 7편의 영화와 한 편의 시트콤에 출연했었다. 그중 대부분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데뷔작 Juice는 '힙합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1.1 생애

투팍은 뉴욕 브루클린의 한 결손가정에서 태어나 친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일 없이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60년대 말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며 폭탄 테러 등의 투쟁을 하던 블랙 팬더의 멤버였고, 재판 과정 중 그를 임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판이 끝나고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그녀는 일정한 수입이 없어 그들은 투팍이 12살이 되기까지 부랑자 수용소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3년부터 투팍 어머니의 옛 남자 친구가 그들과 같이 살게 되면서 어느 정도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투팍을 할렘의 연기 전문학교에 입학시키고, 투팍은 '분노의 포도'에서 첫 역할을 맡는다. 15세 때 메릴랜드로 이사하면서 볼티모어 예술고에 입학하고, MC 뉴욕이란 이름으로 투팍은 랩을 시작하는데, 1988년 양아버지가 강도 혐의로 감옥에 간 후 돈을 벌기 위해 고등학교와 랩을 그만두고 길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일을 했다.

이후 투팍은 마약상으로 일하다가, 여러 번 그의 노래 속에서 밝힌 것처럼 '누군가의 충고를 따라' 랩계에 뛰어들게 된다.[3] 1990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친 후에 투팍은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백댄서 겸 로드매니저, 객원 래퍼로서 디지의 순회공연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디지는 인기 있는 그룹이었으며 특히 라이브에 강하다는 평을 받았고, 투팍은 그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하며 착실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여기서 그는 노토리어스 B.I.G.를 만나게 되는데 투팍은 그를 마치 친동생처럼 여겨 비기에게 몇 분 안되던 그의 공연 시간마저 나누어주며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다

1.2 데뷔앨범 2Pacalypse Now

1991년 2Pacalypse Now로 데뷔를 했을 때 투팍은 아직 19살이었고 상당히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래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앨범에서 싱글 "Trapped"와 "Brenda's Got A Baby."가 성공을 거두고, 또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로서 부른 노래 "Same Song"이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는 등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이 시기의 하나의 큰 사건은, 텍사스에서 경찰을 쏜 어떤 소년이 투팍을 기소한 것이었다. 그는 투팍의 앨범이 그에게 '경찰을 쏘게 할 동기를 주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사건은 점점 확대되기 시작하여, 부통령인 댄 퀘일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투팍을 비난하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부통령이 갓 데뷔한 래퍼를 공격한 것은 곧 팬들에게 인상 깊이 남았다. MTV를 위시한 다른 미디어들도 투팍이 문제를 일으키길 바랐고, 앨범 소속사도 마찬가지였으며, 대중들은 모두 만들어진 이미지로 그를 보며, 어떤 이들은 그를 과격함의 화신으로 존경하고, 부모들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동료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건드려선 안될 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즈음 투팍은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3 두번째 앨범Strictly 4 My N.I.G.G.A.Z...

1993년 앨범 Strictly 4 My N.I.G.G.A.Z...는 이런 사정들로 인해 전작과 비교해 훨씬 더 폭력적인 이미지로 완성되었고, 싱글 "Keep Ya Head Up"이나 "I Get Around"가 히트하게 된다. 아이스 큐브, 아이스-T, Naughty by Nature의 Treach, 스눕 독등과 만나게 된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자넷 잭슨과 공연한 영화 Poetic Justice도 흥행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투팍은 영화계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게 되나, 힙합계에서의 이미지 악화 때문에 거대 메이저 영화사들이 그를 더 이상 고용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투팍이 출연했던 Juice의 감독은 압력 때문에 신작에서 투팍을 빼야만 했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영화들 또한 취소되었으며, 한동안 영화를 쉬게 되는 동기가 된다.

예술적인 면을 제외하고 가장 큰 사건은, 애틀랜타에서 비번이었던 두 명의 경찰을 총으로 쏜 것인데, 투팍은 당시 그들이 다른 흑인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주장해, 이 사건은 기소도 되지 않은 채 넘어가게 되지만, 결과적으론 전국의 모든 경찰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강간 미수 사건으로, 22살 의 여자가 투팍을 상대로 고소한 것인데, 다음해 까지 판결은 유보된다.

94년은 투팍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Thug Life란 그룹을 발족시키고, 그의 배에도 같은 문신을 새겨 넣는다. 이건 여태까지 보다 더 강경히 과격한 갱스터의 입장을 지키겠다는 것이고, 또 투팍이 어떠한 의미에서 진정한 친구들을 찾았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이 멤버들은 앞으로도 투팍과 같이 하게 되고, 후에 여러 멤버들은 Outlawz로 바뀌면서도 투팍의 곁에남고, 그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된다. 94년 초 그는 영화 'Above the Rim'에 마약상인 'Lucky'로서 출연하게 되고, 그와 Thug Life가 부른 "Pour Out a Little Liquor"도 OST에 실려, 2백만 장을 넘게 팔리게 된다. 이것은 그의 이미지 때문에 'Higher Learning'이나, 'Menace II Society'에 출연하지 못한 그에게 다시 배우로서 유명세를 얻게 해 주고, OST의 유례없는 성공으로 투팍은 다시 주목받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1994년 여름 두 명의 소년이 또 경찰관을 죽이고 투팍의 노래 "Souljah's Story" 가 그들을 부추켰다고 말해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11월 30일에는 총격 사건에 휘말려 총을 복부에 세방, 머리에 두 방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간 투팍은 수술 후 단지 세 시간만에 퇴원을 한다. 투팍은 이날의 사건에 관련된 노래만도 10여 곡이 넘게 썼으며, 마카벨리 앨범의 마지막 곡 'Against All Odds'에선 많은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투팍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를 지목했으나, 그들은 이를 부인했다.

게다가 총격사건이 벌어진 다음날에는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1.4 총격

"Fuck Mobb Deep, Fuck Biggie Fuck Bad Boy as a staff record label and as a motherfuckin crew And if you wanna be down with Bad Boy Then fuck you too!" - Hit' Em Up중에서[4]

1.4.1 주요사건인물

  • 지미 헨치맨 (a.k.a. Booker) - 헨치맨 프로덕션의 사장. 릴 숀을 시켜 2Pac을 불러냄.
  • 잭커스 애그넌트 a.k.a. Hatian Jack - 이 사람은 나중에 총격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음을 사복 경관에게 말하는 실수를 범한다.
  • 월터 '킹 텃' 존슨 a.k.a. Trevor - 잭커스의 친구. 13번의 체포 경력이 있으며, 배드보이 레코드에 돈을 출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릴 숀 - 헨치 멘 프로덕션 소속의 래퍼. 헨치맨의 명령을 받고 투팍을 직접 불러냈다.
  • 릴 시저 - 비기 스몰즈의 친한 친구이며 래퍼.

1.4.2 사건개요

11월29일 - 이틀뒤로 예정된 선거공판을 맞아 오랜만에 뉴욕에 도착한 투팍은, 자신의 옛친구인 스트레치 및 Live Squad의 멤버, 여동생의 남자친구 등과 만나 행동을 같이 했다.
11월29일 저녁 - 역시 친구인 DJ Ron G와 레코딩작업을 하는도중, 헨치맨에게 전화를 받았다. 헨치맨은 릴 숀의 앨범에 쓰기위해 투팍의 리듬을 사고싶다는 뜻을 밝히고, 투팍은 승락한다. 곧 스튜디오에서 만나기로 하나, 다른 일들 때문에 투팍은 스튜디오에 늦게 가게된다. 그사이 헨치맨과 릴 숀이 계속 전화를걸어 재촉을 했다.
11월30일, 00:20 - 투팍과 그의 옛친구 스트레치를 포함한 네명은 타임스퀘어 빌딩에 들어선다. 입구를 지날때, 경비원 의자 근처의 세명이 그들을 따라오고, 투팍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만 , 릴 시저가 멀리서 그들을 부르자, 투팍은 그곳에 비기가 온것을 알고 그들의 보디가드려니 하며 그냥 엘레베이터로 향한다. 투팍이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뒤돌아선 순간, 따라오던 셋이 권총을 빼들고 모두 엎드리고 몸에 차고 있는 보석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그에 따라 다른이들은 모두 엎드리지만, 투팍은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듯 경고를 무시하고 총을 꺼내다 머리에 두방을 포함해 다섯방의 총을 맞는다. 그리고 그들은 투팍의 보석들을 빼앗아 달아나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그들을 쫓아가자 투팍은 엘리베이터에 탄 후, 스튜디오로 올라간다. 스튜디오엔 비기와 퍼프 대디를 포함한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투팍은 이 순간이 얼마나 이상했었는지 인터뷰에서 밝힌다.
11월 30일, 04:45 -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투팍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게 되고, 약 세 시간에 걸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후, 그의 목숨을 아직도 노리는 자가 있어 병원도 안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곧 퇴원하게 된다.
12월 1일 - 총에 맞은 뒤 약 30여시간뒤에 투팍은 자신의 재판이 진행되던 법정에 출두한다. 휠체어를 탄 그의 곁엔 미키 루크와 보디가드들이 있었고, 그날 투팍은 유죄 판결을 받고 4년 2개월 형을 선고받지만, 상처 관계로 보석금을 내고 회복될 때 까지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투팍은 비기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투팍이 수감되기 전에 녹음한 앨범 'Me Against the World'엔 비기나 배드보이를 비난하는 내용이 없다. 1995년 2월, 투팍은 상처가 나은것으로 간주되어 수감되게되는데, 감옥안에서의 얘기는 많이 밝혀진 게 없지만 후에 인터뷰에서 감옥에서 그를 쏜것이 다름아닌 비기의 친구들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약 8개월간의 복역뒤 투팍은 데스 로우의 사장 슈그 나잇이 제안한 딜을 받아들이고 형무소에서 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리고 LA로 돌아오자마자 가진 MTV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배드 보이 레코드가 자신을 죽이는 걸 도왔다" 라고 주장했다.

1.5 세번째 앨범 Me Against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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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2월14일, 투팍은 성희롱 사건 혐의가 인정되어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뉴욕에 있는 라이커 교도소에 가게된다. 이로서 그가 첫앨범을 통해 쌓은 이미지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나중에 젊은 흑형흑인남자로서 성공의 길을 걸을 때의 많은 유혹들을 견뎌내지 못한것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 사건에서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것들과는 관계없이 그의 음악은 성공을 거듭한다.

아직 투팍이 감옥에 있던 4월1일, 투팍의 세번째 솔로앨범인 Me Against the World가 발매되고, 싱글 'Dear Mama'등의 히트에 힘입어 앨범은 곧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앨범이 발매될때와 맞추어 투팍은 Vibe지와 옥중 인터뷰를 가졌는데, 투팍은 자신의 여태까지의 삶이 불행했던 어린시절에 너무 지배받고 있었으며, 마약과 술에서 벗어난 감옥안에서의 날이 자신을 되돌아 볼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총을 다섯방맞은뒤에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느낄수 있었고, 앞으로의 삶은 그가 무언가를 이룰수있게 하기 위해 신이 내려준 기회일것이라고도 말했다.

같은해 8월,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등의 배드 보이 레코드 관계자들은 같은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투팍이 총을 맞은 일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주장한다.

1.6 Death Row와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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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수록된 전성기의 데스 로우.[5]

1995년 10월, 슈그 나잇은 140만 달러를 보석금으로 지불하고 투팍을 교도소에서 빼내, 자신의 데스 로우 레코드에 소속시킨다. 계약조건은, 보석금으로 지불된 돈을 계약금 삼아, 투팍이 세장의 앨범을 데스 로우에서 발매 한다는 조건이었다.
사후 발매가 되었던 앨범들도 대부분 이즈음 구상된 것이다 대략 150여곡정도.[6]

1.7 네번째 앨범 All Eyez On Me 그리고 마지막 레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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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Eyez On Me가 1995년 10월에 레코딩되어 1996년 2월에 발매된다.
두 장으로 이뤄진 이 앨범은 발매 후 두 달만인 1996년 4월에 5번의 플래티넘을 달성하고 1998년까지 무려 9번의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싱글로 발매된 "How Do U Want It" 의 "California Love"가 빌보드 1위를 달성한다. 참고로 8월에 발매된 이 싱글에 Hit 'Em Up이 처음 공개되었다.
All Eyez On Me는 솔로 래퍼가 발매한 역사상 첫 두장짜리 음반이었으며, Me Against The World에 이어 두번째로 빌보드 200 및 Top R&B/Hip-Hop Albums 차트 정상에 올라간다.
발매 첫주만에 566,000 장 전량이 매진되었으며 1996년말엔 5백만 장이 팔려나갔다.

1.8 사망

1996년 9월 7일 밤 투팍은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보러가기위해 슈그 나잇과 같이 라스베가스에있는 MGM 호텔로 향한다. 경기후 호텔 로비에서 투팍 일행은 크립스 멤버인 올랜도 앤더슨을 발견한다. 올랜도 앤더슨은 연초에 데스 로우가 투자한 신발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전과가 있었다. 이에 그를 발견한 투팍이 먼저 그를 공격했고 뒤이어 일행전체가 그를 집중구타했다. 이 상황은 당시 호텔 CCTV에 촬영되었고,[7] 이 영상은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상이 되었다.

당시 투팍과 슈그는 가석방 상태 중이었기 때문에 투팍이 만약 죽지 않었어도 슈그처럼 중징계를 피할순없었을 것이다. 총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슈그 나잇은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에서야 출소했다. 폭행사건 후 호텔을 나온 투팍 일행은 검은색 BMW 세단을 타고 자신들의 클럽인 662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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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7일밤 팬에 의해 촬영된 총격직전의 모습

오후 11:00~11:05, 그들은 자동차 내에서 볼륨을 너무 크게 틀었다는 이유로 라스 베가스 교통경찰에게 단속되었다가 풀려난다.

오후11:10, 맥심 호텔 앞에 위치한 코발 레인과 플라밍고 로드 사이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에 차를 정지한다. 이때 여자 두명이 탄 차량이 왼쪽에서 서서 슈그와 투팍에서 말을 건네 시선을 빼앗는다. 투팍은 차량의 선루프 위로 몸을 일으켜서 여자들에게 클럽 662로 오라고 초대한다.

오후 11:15, 여자들이 말을 걸어 시선이 쏠린사이 우측으로 흰색 캐딜락이 조용히 다가와 차량의 창문을 열고 투팍이 타고있던 BMW 오른편에 정차해 투팍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한다. 발사된 11발중 9발이 투팍에게 집중되어 겨눠졌고 한발은 운전중인 슈그 나잇의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투팍은 그중 4발을 신체에 맞았으며 두발은 가슴에 한발은 팔에 그리고 나머지 한발은 대퇴부에 명중된다. 가슴에 맞은 두발중 한발은 그의 오른쪽 폐에 꽃혀 치명적인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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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당시 차량사진

총격사건후 경찰은 슈그 나잇과 투팍을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한다. 그는 7일동안 혼수상태로 호흡기에 의지하게 된다. 데스 로우의 아티스트이자 투팍과 절친했던 대니 보이는 당시 투팍이 있던 병실에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살해 위협에 대해 증언했다.[8]

1996년 9월 13일 오후 4:03, 투팍은 결국 사망한다. 투팍의 시체는 다음날 화장되었다.

두달뒤 그의 5번째 앨범 The Don Killuminati : The 7 Day Theory가 발매되었다.

1.9 사후 밝혀진 사실들

1.9.1 슈그 나이트가 계획했다?

범인의 발사한 총알중 대다수가 투팍에게 겨눠져있었고 슈그가 멀쩡했다는 이유와 사고후 멘붕상태의 행동[9]으로 인해 투팍 사후 공범이라는 루머가 생겨났다. 그러나 후에 이하 내용들을 통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 사후 다큐멘터리에서 투팍의 보디가드는 Before i wake에서 투팍 사고후 슈그가 데스로우 레코드 내에서 스태프를 모아놓고 이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소회한다.

2) "The killing of Tupac Shakur"의 저자 저널리스트 케이티 스캇도 슈그 공범설에 대해 부정하였다.

3) 1996년 당시 사건을 담당하고 조사했던 라스베가스 경찰 소속 브렌트 베커도 슈그의 공범 가능성은 없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슈그가 투팍을 죽일 타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
저작권료 때문에 죽였다? = 어차피 투팍 사후 저작권은 전부 투팍의 어머니였던 아페니 샤커에게 돌아갔다.
무서운 중징계를 받을 수 있는 가석방 상태에서 살해에 동조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슈그 공범설은 틀렸다고 봐도 무방한 것.

범인은 격투극의 올랜더 앤더슨이 소속된 크립스 갱 멤버들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 범행에 동조한 건 데스로우를 경호하던 사설 보안업체의 사장 레지 화이트 주니어이다.
그는 부패한 전 로스앤젤레스 경찰이였으며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데스로우의 지저분한 돈 관계에 관련이 있으며 크립스와도 관계가 있던 확정 용의자였다.

1.9.2 그의 죽음의 조력했던 내부의 적 Reggie Wirght Jr.

생전 2pac에게 가장 가까운 사이이자 그의 보디가드로 고용되어있던 Frank alexander는 생전 Pac이 가족처럼 대해주는 몇 안되는 이였고 Pac이 죽기전 그가 겪었던 당시 Death Row내의 어수선한 분위기와[10] 사망당시 느꼈던 이상한상황들로인해 그의 총격사건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다수의 Death Row 관련자들의 목격담으로 Pac의 죽음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된다 프랭크는 Pac과 거의 매순간 동행하면서 Death Row내의 속사정을 아주 잘알고있는 주요 목격자중 한명이었고 Pac이 총격을 받을당시 프랭크는 Outlawz 멤버들과 함께 그현장에 있었다 .

사건현장의 주요 목격자였던 그는 2Pac 사망의 배후에 누군가 조력자역할을 한 내부의 적이 있는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그는 이에 근거해 자서전 "Got You Back"을 발간한다 그리고 이를 기본으로한 "Before I Wake"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 .

이후 2002년 LA Times 사고 전문 리포터 Chuck Philips에 의해 "Who Killed Tupac Shakur?"라는 두편짜리 방송이 방영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2Pac의 사건케이스가 재조명된다.이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Richard Bond가 Frank alexander의 증언과 더불어 사건 당시 주요 주변인물들의 인터뷰와 Death Row내의 비리, LAPD와 갱들간의 유착관계등을 토대로해 2Pac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과 여러 증거들을 모은 숨겨진 진실이 담겨진 2pac: Assassination이 만들어지면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11] youtube에서 검색해도 볼수있다
2010년 12월 12일에 미국 다큐멘터리 케이블 전문방송 VH1의 Famous Crime Scene에서도 해당사건을 다룬적이있다 [1]]


2Pac: Assassination의 한 장면.
앞에는 리드카(평상시는 Suge가 운전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왼쪽옆에는 Travon Lane (Death Row 사업관련인물)
가운데엔 Suge와 2Pac이.
뒤로는 Frank Alexander 및 Outlawz멤버들이 따라오고있었다
이상황에대해 한 프로파일러는 차로 둘러싸인 Sitting Duck상황이라고 표현한다

1.9.3 투팍과 Snoop의 불화

알다시피 Snoop Dogg은 생전 투팍과 불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온 사건이 1996년 5월 4일에 방영된 Saturday Night Special[12] 방송이었다.

이 방송 이후로 투팍은 스눕과 그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13] 이 날 이후로 둘의 관계는 악화되고 악화되어간다.

방송 PD가 말하길 스눕은 투팍과 함께 America's Most Wanted을 열창하기로 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둘은 함께하지 않았다. 투팍은 리허설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나 스눕은 어디에도 없었다. 투팍은 이날 방송에 나타나지 않은 스눕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꼈으며 스눕은 투팍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는 데스 로우와 Suge에게 불만을 가지고있었다.[14]

이 방송 이후로 투팍과 스눕은 9월 3일에 있었던 MTV와의 인터뷰때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 인터뷰도 투팍만이 인터뷰를 주도할 뿐 스눕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인다.[15] 스눕과 함께한 이 인터뷰에서 투팍은 East vs West와의 전쟁은 미디어가 만든 허상일뿐 비기와 나의 문제일뿐이라고 사태를 무마하려는 태도를 보인다.이 인터뷰즈음 그는 동부 레이블 래퍼들과의 합작품인 One Nation이라는 앨범을 제작하고있었다, 둘의 불화는 Danny Boy 및 그의 보디가드였던 프랭크 알렉산더등 다양한 당시 주변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16] 이외에도 유튜브에 Snoop 2Pac Beef라고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하지만 2012년 스눕독과 함께 The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에서 사후앨범 The 7 Day Theory 수록곡 "Hail Mary"와 4집의 "2 of Amerikaz Most Wanted"를 홀로그램으로 부활[17]해 불렀다. #[18] 이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고갔으나 공연 반응은 괜찮은 듯 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투팍 사후 스눕독은 그에 대한 앙금이 모두 사라졌나 보다.

2 출연영화

2.1 1992년 "Juice" 국내미개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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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993년 "Poetic Justice" 국내명:포이틱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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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994년 "Above the Rim" 국내명:할렘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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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96년 "Bullet" 국내명:블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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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96년 "Gridlock'd" 국내미개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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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996년 "Gang Related" 국내명:갱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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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1997: Tupac Shakur: Thug Immortal
1997: Tupac Shakur: Words Never Die (TV)
2001: Tupac Shakur: Before I Wake...
2001: Welcome to Deathrow
2002: Tupac Shakur: Thug Angel
2002: Biggie & Tupac
2002: Tha Westside
2003: 2Pac 4 Ever

3.1 2003: Tupac: Resur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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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팍의 목소리와 비슷한 나레이션의 성우를 캐스팅해 작업한 그의 전기영화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중 가장 유명하다

2004: Tupac vs.
2004: Tupac: The Hip Hop Genius (TV)
2006: So Many Years, So Many Tears

3.2 2007: Tupac: Assassination

그의 사망사건에 대해 진실을 폭로함으로서 세계적인 이슈를 몰고온 다큐멘터리
2009: Tupac: Assassination II: Reckoning

3.3 2016: All Eyez on Me

2016년 9월 15일 현재까지는 밑에 영상 3개 정도가 나와있는 듯 하다. 후에 영화와 관련된 더 자세한 정보가 나올시 추가바람.
[2] [3]
[4]

4 싱글

4.1 빌보드 1위

  • California Love (1995)
  • How Do U Want It (1996)

4.2 빌보드 3위~10위

  • Dear Mama (1995)

4.3 빌보드 11위~20위

  • I Get Around (1993)
  • Keep Ya Head Up (1993)
  • Thugz Mansion (2002)
  • Runnin' (Dying to Live) (2003)

5 앨범 리스트

'2pacalypse Now'부터 'All eyez on me'까지는 투팍이 생전이 발매한 스튜디오 정규 앨범이고 그 다음부터 나오는 앨범은 거의 미수록곡을 짜깁기해서 나온 곡이다. 2006년 이후 사후 앨범도 나오지 않고 있다. 2016년 현재까지는 이제껏 존재한 모든 래퍼 들중 에미넴과 더불어 총 2장의 다이아몬드 앨범[19]을 가지고 있는 단 2명의 래퍼중 한명이다.[20] 참고로 전세계적으로 음반 시장은 계속 줄어들고 음원 시장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니, 아마도 다이아몬드 앨범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달성하기 힘들것으로 보인다.

5.1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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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2pacalypse Now (1991년)

투팍의 데뷔 앨범이며 약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사회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노래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여성이나 경찰을 비꼬는 가사가 나온다. 이 앨범을 들은 한명이 경찰을 쏘거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 실제로 한 소년이 경찰에게 총을 쏜 후 3번 트랙곡인 'soulja's story'가 그에게 '경찰을 쏘게할 동기를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로 인하여 일부 정치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당시 부통령이였던 댄 퀘일은 공중파방송에서 투팍을 비난했다. 심지어 불매운동까지 벌일 정도로 사회의 파장을 일으킨 앨범이다. 그리고 1년 뒤...전설이 된 그의 데뷔작이긴 하지만 사회작 파장에 묻혀 대중의 인지도는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이 앨범이 알앤비 차트 13위에 오른 적 있으며 싱글인 'BRENDA'S GOT A BABY'이 3위를 차지한 적 있다. 대부분 국내 리스너들에게도 별로 언급되지 않는 앨범이기도 하지만 매니아에서는 호평을 받는 앨범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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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Strictly 4 My N.I.G.G.A.Z... (1993년)

1집보다 더 과격하게 변해서 돌아온 노래. 1집의 노래들이 경찰과 백인들을 비판하는 한편 '흑인들이 이대로 가난하고 무식하게만 살 수 없다. 우리 스스로 변하자.' 같은 메세지를 전하는 것에도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2집의 노래들은 사회를 까는 과격한 가사 자체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도 어느 부분에서는 1집보다는 많이 순해진 앨범. 수록곡 중에선 1집의 메시지가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흑인 여성들에게 힘을 내라고 전하는 'Keep Ya Head Up'과 파티송인 'I Get Around'[21]가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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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집 Me Against the World (1995년)

'All Eyez on Me'와 함께 투팍의 최고 명반 중 최고로 꼽힌다. 투팍이 가진 서정성을 가장 잘 표현한 앨범으로 1, 2집이 사회적인 분노를 담았다면 3집의 경우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dear mama' 같이 시적인 내용이 주가 되고 있다. 특징이라면 앨범의 전곡에 샘플링이 사용되었다. 앨범은 차트에서 장기간 머무르며 수백만장을 팔았지만 정작 투팍은 앨범이 나올 쯤에는 감옥에 있었다. 별다른 활동 없이 앨범만 수백만장을 판 것이다. 흠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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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집 All Eyez on Me (1996년)

투팍의 첫 다이아몬드 앨범

데스 로우 레코드보석금을 내고 투팍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투팍과 계약한 뒤 투팍이 그곳으로 소속사를 옮기면서 발매한 앨범이다. 힙합 앨범 사상 최초의 더블시디로 제작되었다(이로 인하여 더블앨범 제작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톱스타 반열에 올라서 투팍의 위치를 대변해주는 앨범으로 닥터 드레 같은 최고의 프로듀서가 만든 비트와 조지 클린턴이나 로저 트루먼 같은 전설적인 뮤지션들까지 참여해서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피쳐링진도 스눕 독독 파운드 같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서부 힙합 뮤지션과 더불어 메소드 맨 & 레드맨 같은 동부 힙합을 대표하는 래퍼들까지 참여하였다. 상업성과 작품성 모두를 겸비한 앨범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지금도 최고의 힙합 앨범을 꼽을 때 베스트 5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앨범이기도 하다. 투팍의 앨범 중 2000년에 와서 재발매되는 앨범이기도 하다.

5.2 사후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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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aveli - The 7 Day Theory(1997년)
투팍 사후 2달만에 발매된 앨범이다. 원래 발매 예정이었으나 앨범 발매 직전에 투팍이 사망하였다(...). 특이하게 투팍이 아닌 아웃로우즈 시절 예명인 마카벨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으며 'All Eyes on Me' 같이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예전의 과격함을 부각시킨 앨범이다. 자신의 크루인 'Outlawz'를 제외하고는 다른 뮤지션의 참여도 없었지만 앨범 자체의 평가는 상당히 좋다. 동부 힙합을 디스하는 듯 나스에 대한 디스곡도 존재한다.[22] 참고로 나스는 이걸 듣고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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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U Still Down? (1997년)

투팍이 데스로우로 소속을 옮기기 전에 녹음해뒀던 미발표곡 모음집이다. 앨범에 수록곡들이 예전 앨범보다 못하더라도 'Do for love'[23]와 같이 명곡이 있어서 들을 만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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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Hits (1998년)

투팍의 두번째 다이아몬드 앨범

사후에 나온 베스트 앨범 미발표곡 중 하나였던 'Changes'가 대히트를 쳤다. 아마 투팍의 대박을 친 곡들은 여기에 다 수록되어 있으니 베스트 앨범 중에서 입문자에게나 매니아에게도 소장가치가 상당히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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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ac & Outlawz - Still I Rise (1999년)

그의 크루인 'Outlaws'와 함께 합작한 앨범. 투팍의 전담 프로듀서나 다름없는 Johnny J가 대부분을 프로듀싱하였다. 이 중에서 'Keep Ya Head Up'의 후속곡 격인 'Bady Don't Cry'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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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l The End Of Time(2001년)

역시 미발표곡 모음집. 평가는 그저 그렇고 프로듀싱을 전부 다시 했지만 사람들의 평가는 이전곡들이 더 좋았다고... 그러나 투팍의 이 사후 앨범은 계속해서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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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Dayz (2003년)

미발표곡 중 이때부터 음악 퀄리티가 하락하기 시작... 그냥 이전 곡이 낫다. 투팍의 앨범이면 무조건 사겠다는 열혈팬이 아니라면 소장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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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ixx Klazzics (2003년)

투팍의 리믹스 앨범. 그러나 원곡을 너무 망치고 리믹스도 좋은 편이 아니라서 까이고 있는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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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rrection (2003년)

영화 투팍의 OST라고 하지만 투팍의 목소리를 갖다 붙인 곡도 있다. 평판은 좋지 못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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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ac Live (2004년)

투팍의 라이브 앨범. 정식 라이브도 아닌데 짜깁기로 발매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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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yal to the Game (2004년)

미발표곡. 에미넴이 프로듀싱를 했지만 투팍이 랩한 것에 그냥 음악 덧붙인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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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s Life (2006년)

미발표곡 모음 앨범. 투팍의 열렬한 팬이 아니라면 듣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참고로 이 앨범에 수록된 'Pac's Life'는 E스포츠 팬이라면,[24] 한번쯤 들어봤을텐데 바로 단군의 명곡(...) 청춘부재의 MR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6 그러니까 남자들은 여자를 멀리하고 자위행위를 하는 게 낫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단은 이 긴 문단명을(를) 멀리하고 그러니까 남자들은(으)로 들어오는 게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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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you need to stop checking these bitches and keep your dick in. Niggas need to go back to the OG[25] penitentiary days and start jerking off.[26]

짤방(...)의 주인공 되시겠다. 원본 플짤(자막 있음)

위 짤방은 2pac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위 장면은 투팍이 강간죄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직후 인터뷰 장면. 여자랑 클럽에서 원나잇을 했다가 낚여서 구속되고 법정 싸움에다가 합의금까지 물어준 상황이니, 그야말로 억하심정을 토로하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사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매우 진지하며 2pac 본인은 비극적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므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7 여담

이 시대, 그리고 서부 힙합이 늘 그래왔듯이 가사에는 폭력과 마약 그리고 섹스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흑인의 인권에 대한 내용, 여성 보호에 대한 내용들을 다뤘다. 실제로, 투팍의 무덤에는 "I'm not saying i'm gonna change the world.but I guarantee that I will spark the brain that will change the world."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이를 해석해보면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세상을 바꾸는 생각에 불을 붙일 수는 있다고 장담한다."라고 적혀있는데, 투팍이 살아있을 때 뿐만 아니라 투팍이 죽은 후부터 지금까지도 래퍼뿐만이 아니라, 이 문서의 상단에 적혀있듯이 사회운동가와도 같은 평가 역시도 받는다는 걸 생각해 봤을 떄, 투팍은 결국 자신의 말을 지킨 셈이 되었다.

그의 슬로건인 '깡패 같은 삶(Thug life)'라는 말 자체가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자신 같은 사람을 일컫는다. 험난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상당히 시적인 가사를 써서 이 분야에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평을 받는다.

사후에도 앨범이 계속 나오고 있다. 생전에 이미 수백 곡을 녹음해놨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계속 앨범이 나오고 있다는 것. 이쯤 되면 생존설이 생길 만도 하다. 미스터리 갤러리의 유명한 고인드립 꾸준글 중에는 '투팍은 살아있다'라는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꾸준글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곡들은 앨범에 발매되지 않을 만한 퀄리티라는 점, 같이 껴서 나오는 기존 곡들의 리믹스가 개판이라는 점 등에 의해 사후 앨범은 계속해서 까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래퍼라는 위상에는 변함이 없을 듯하다.

죽어서도 이지 이와 더불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더 게임 같은 베테랑이나 켄드릭 라마, 스쿨보이 Q 등의 최근 뜨고 있는 신인들에게도 상당한 리스펙을 받으며[27], 극단적인 경우는 이분의 스타일을 말 그대로 벤치마킹한 소위 짝퉁 투팍 래퍼도 있을 정도. 대표적으로 자 룰 등이 있다. 이 작자는 아예 뻔뻔하게 팍의 랩 자체를 모창했다. 심지어는 인터뷰에서 자기가 투팍이랜다.

이걸 투피에이씨로 혹은 투팩으로 투팍 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힙덕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골라낼 수 있다. 일단 본인이 자기 이름을 '투팍'으로 읽었으니 그렇게 불러주는 게 맞지만, 제이지도 지적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투팩'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tupac' 이라는 스펠링을 보면 '투팩'이 자연스럽고, '투팍'이라고 읽는 것은 서부식 미국 흑인 영어 발음이다. 그러니 헷갈릴 밖에. 사실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름 읽는 사람이 없는 리한나도 그렇고 비욘세도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비욘스'라고 불렸다.

문제는 한국 힙찔이들에게 '투팍을 투팩이라고 발음하는 건 힙알못'이라는 일종의 밈이 생겨버린 것. 더 콰이엇의 '그것은 힙합 혹은 발라드'라는 곡에도 '2PAC 그건 투팩으로 읽지'라는 구절이 있다. 참고로 이 곡은 음악으로 부심부리며 X문가질 하는 사람들을 까는 곡이다.

아무리 그래도 안전벨트는 잘 매고 다녔다고 한다[28]

음악에 입문하기 전에 투팍의 시를 담아낸 '콘크리트에 핀 장미'라는 책도 발간되었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해결 힙합 살인사건 탑 10중 1위에 올랐다.

디지털 언더그라운드 소속 시절 때 방일한 적이 있다.

그가 생전 직접 찍은 마지막 뮤비는 Toss it Up이다.

현지시각 2016년 5월 3일 22시 30분에 투팍의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2016년 03월 30일에 투팍의 전기인 '투팍 샤커'가 출판사 1984에서 출간되었다, 번역자은 국내의 1세대 힙합 가수인 UMC/UW이다.

네이버 웹툰인 연애의 정령 75화에서 힙제이가 주인공에게 방해되는 사람들을 쓰러트리면서 "투팍의 곁으로!"라고 한다.캐릭터 이름이랑 위 말을 보면 알겠지만, 약간 힙찔이스러운 면이 좀 있다.

힙합 비둘기 데프콘이 힙합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투팍의 음악을 듣고나서부터였다고 한다.[29]
AOMG에서 사이먼 도미닉과 공동으로 수장을 맡고 있는 박재범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래퍼가 투팍이었다고 한다.

래퍼 나플라의 경우에는 투팍의 대표곡 중 하나인 'Changes'를 듣고 음악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됬다고 한다.
  1. 그것도, 긴 시간도 아닌 데뷔한 1991년에서 사망한 1996년까지 겨우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힙합 분야에서 이 정도의 칭호를 얻어냈다.
  2. 실제로, 투팍을 래퍼이면서 사회운동가,시인이었다고 평가를 하는 이들이 꽤 많다.
  3. 동기에 대해선 논란이 많지만, 아마 샷건을 맞아 죽을 뻔한 일이 있은 뒤부터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총알들은 투팍의 머리 위 5cm 정도 스쳐 지나갔다고(...)
  4. 밑에 자세하게 나와있듯이 오해가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가사다.
  5. 왼쪽부터 투팍, 데스 로우의 CEO인 슈그 나잇, 스눕 독
  6. 사후앨범들은 저작권때문에 대부분 비트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완성도가 형편없다. 2pac이 직접 부른 버전은 유튜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7. [5]
  8. [6]
  9. 슈그는 총격받자마자 멘붕이와서 차를 유턴해 2km 떨어진 E.하몬 애비뉴까지 도망쳤다, 이로 인해 현장보존에 실패하고 말았다.또 차량 안에서 출동한 경찰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며 경찰과 대치하는 바람에 또 시간을 소요했다. 그동안 조수석의 투팍은 서서히 뇌사하고있었다
  10. Outlawz를 비롯한 다수의 Death Row의 아티스트들의 증언에 의하면 Pac은 Deathrow를 떠나 Makaveli 레이블을 세우려했었고 이로인해 Suge의 트러블을 가지고있었다.
  11. 이 다큐멘터리의 줄거리를 보고싶다면 이곳으로 [7]
  12. [8]
  13. Snoop은 당시 The Notorious B.I.G로 대변되는 East Side 'Badboyz"레이블과 투팍으로 대변되는 Deathrow Records 레이블의 다툼인 East vs West 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한 라디오방송에서 이러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14. 닥터 드레가 쫓겨 나가게 되면서 불만이 시작된듯하다. Snoop Dogg, Doggpound, Nate Dogg드레가 데려왔다.
  15. [9] 사망3일전 MTV와의 인터뷰영상. 매우 유명한 영상이다.
  16. [10]
  17. 여담으로, 이를 두고 한 외국 네티즌이 "이날 투팍은 살아났지만, 당시 관객들은 죽었다."고 평했다.(죽었다는 표현은 아마도 투팍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시원찮은 걸 보고 죽은 거 같은 걸 비유해서 죽었다고 표현한 듯 하다.)
  18. 2Pac 홀로그램을 제작한 회사는 Digital Domain으로 타이타닉,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같은 유명 영화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나, 현재 파산했다.
  19. 앨범 판매량 천만장 이상이 다이아몬드 앨범의 조건이다.
  20. 다이아몬드 앨범을 한장 가지고 있는 래퍼는 찾아보면 좀 있지만 다이아몬드 앨범을 두장 가지고 있는 래퍼는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까지는 에미넴과 투팍뿐이다.
  21. 디지털 언더그라운드 멤버들이 피처링해줬다.
  22. 12번 트랙 Against All Odds라는 곡이다.
  23. 투팍의 몇 안되는 러브송.
  24. 특히 나이스게임TV를 한번이라도 봤던 이라면
  25. Original Gangster. 그냥 갱스터와의 차이는 한국에서 음지인들이 본인들을 양아치보다는 건달이라 칭하는것과 비슷한 맥락.
  26. "그러니까 친구(흑인)들은 걸레년들 그만 쫓아다니고 똘똘이는 가만히 둬. 친구들은 오리지널 갱스터의 수감 생활 시절처럼 딸이나 치는 게 낫다고."
  27. 그래서인지,투팍을 보고 '래퍼들의 래퍼'라고 하기도 한다.
  28. 코난 쇼에 나온 케빈 하트와 아이스 큐브가 카쉐어링을 하게 되면서 차에 탓다가 케빈이 Thug life라면서 벨트를 안매자. 큐브가 2pac은 내가 만난 최고의 상남자(Thug guy)였지. 그리고 그는 항상 벨트를 차고다녔지라고 말하자 닥치고 맨다. 물론 농담이다.
  29. 여담으로, 투팍이 죽은 건 당시에 워낙 큰 이슈여서 한국의 라디오에도 투팍이 죽었다는 소식이 간간히 흘러나왔다고 한다.그리고 데프콘은 알바를 하다가 투팍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