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김태균(1982)
목차
1 데뷔와 초창기(2001~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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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고 시절 김태균 |
풋풋했던 신인 시절. |
명문 천안 북일고의 3루수 김태균은 1학년부터 팀의 중심타선에 들어간 초고교급 선수였다. 흔히 말하는 천재. 타치바나 히데오 생각하면 될듯(...). 지금 꼴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얼굴까지 잘 생긴 미래의 슈퍼스타였다.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WBSC U-18 야구 월드컵을 재패한 황금 세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3학년 시즌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한화 이글스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김태균을 1차 지명했다. 2001 시즌 초반엔 1군에 자리가 없어 2군에 머물렀으나 5월에 승격 후 주로 대타로 기용되며 날카로운 타격을 보였고, 곧 대선배 강석천의 3루를 빼앗아 버렸다.[1] 김태균의 놀라운 활약에 고무된 이광환 감독은 김태균을 4번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연소 4번 타자였다. 시즌 내내 기복없는 활약을 보여주며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4강에도 올려 놓았다. 준 플레이오프에서도 4번으로 출장,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홈런포를 뽑아내며 큰 경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믿었던 송진우 등 베테량들이 부진하며 2패로 스윕당해 광탈했지만, 10대 4번 타자 김태균의 흔들림 없는 활약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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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끝냄 턱선 살아있는거 봐라
시즌종료 후 성적은 타율 .335와 20홈런, 이것이 대타 출장을 포함하여 1군 88경기 출장으로 이뤄낸 기록이었다. 이 압도적인 활약에 준수한 성적으로 풀 타임을 소화한 삼성의 박한이는 김태균에 밀려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그치게 된다. 데뷔 시즌의 20홈런은 풀 타임 기준으로는 절반을 약간 웃도는 245타수에서 기록된 것으로, 풀타임을 뛸 경우 40홈런을 칠 거포로 다들 기대했다. 3루 수비는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원래 3루수였던 강석천의 수비가 과히 좋지 않았고, 마땅한 대안도 없어서 한동안 주로 3루를 맡았다.
그렇게 기대감 속에서 등번호를 10번으로 바꾸고 2002 시즌을 맞이하였으나, 소포모어 징크스로 거하게 말아먹어 모든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본인 말로는 시즌 전에 한 라식 수술이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결국 시즌 후 52번으로 돌아왔다.그리고 오른손 강타자의 상징과 같은 번호가 된다
3년차이던 2003년에는 데뷔 시즌에 버금가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문제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40홈런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 더군다나 2001년부터 2003년 사이는 어느 괴수가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홈런을 날리는 시대였다.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뒤에는 투고타저시대가 찾아옴과 동시에 프로야구의 흥행이 저조했고, 무엇보다도 김태균 본인이 한결같이 괜찮긴 하지만 리그를 씹어먹는 수준은 아닌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대중과 언론의 관심 밖에 있어야만 했다.[2] 또한 이 당시 팀의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던데다 전통의 비인기 구단이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한편 한화 구단은 그렇잖아도 장종훈이 2000년대에 들어와 부진하던 차에 김태균이 등장하여 착착 성장해가자 장종훈을 은퇴시키기로 한다. 결국 03년 이후 장종훈은 출장횟수가 크게 줄었으며 매년 구단의 은퇴 권유를 받게 되었다. 결국 05년도에 장종훈이 은퇴하게 되었으며, 구단은 최대한 모양새 좋게 보이도록 언론 홍보작업을 하였다.[3] 뭐 장종훈 본인은, 시간이 지난 뒤 농담 섞어 아내는 몇 년 동안 TV에서 김태균을 볼 때마다 채널을 돌렸다는 얘기를 했다만... 어쨌든 이후로 김태균에게는 "포스트 장종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되었다. 팬들 역시 김태균을 장종훈의 후계자로 여기며 전성기 장종훈 만큼의 임팩트 있는 성적을 기대했지만...
2 까임의 시기(2006~2007)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덕분에 프로야구가 갑자기 다시 흥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 때 한화의 감독은 김인식. 미디어와 팬들은 한화를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기대에 걸맞게 투수들을 갈아먹어서 2006년 2위, 2007년 3위라는 좋은 성적을 내게 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김태균은 커리어로우를 기록한다. 특히 2006년에는 2할9푼대와 13홈런이라는 추락으로 인해 김똑딱이라는 오명을 쓰고 미디어의 차디찬 관심을 받게 된다.[4] 그나마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두 개의 홈런을 쳐 낸 덕에 시즌 종료 후 한화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지는 않았지만, 시즌 도중 김태균이 받은 까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2007년 시즌 성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좋은 성적이었긴 했는데, 2007 시즌 자체가 워낙 투고타저의 극을 달렸던 한해였던 탓에 다른 년도, 다른 선수들의 기록과 비교했을 때 그리 대단치 않게 보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한마디로 잘하긴 잘하는데 뭔가 불만족스러운 성적. 그 오랜 기간동안 '포스트 이승엽'내지 포스트 장종훈을 꿈꿔온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 신인시절 좋은 기억을 갖고있는 팬들에게 김태균 이란 타자는 3할 30홈런이 기본으로 요구되는 선수였다.
야구 커뮤니티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간 바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질 일이었지만,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 있어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는 김태균이란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2005년 장종훈 은퇴 당시의 각종 언플들까지 있었으니... 그러한 팬들의 기대를 날려버릴 정도로 2006~2007 시즌의 김태균은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여담으로 2007 시즌 개막전에서 김태균은 길이길이 회자되는 몸개그를 시전했다(...).[5] 또한 그해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 이후 후반기 성적을 대폭 깎아먹으며 오질나게 욕을 먹었다.
구단 역시 팬들과 마찬가지로 실망했었는지, 결국 2008 시즌을 앞두고 연봉을 삭감하기에 이르렀다. 팬들의 반응은 올 것이 왔다. 다음해는 더 잘하겠지...라는 기대감도 어느새 곧 10년, 김태균은 결국 저 정도의 타자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김태균 본인도 결국 항복하고 도장을 찍어야 했다. 어쨌든 이 2년간의 성적도 다른 평범한 선수들에 비하면 준수한 것이긴 했다. 문제는 이 당시 크보 역사상 최고의 슈퍼루키가 같은 팀에 등장했던 탓에 언론의 관심은 김태균에게서 빗겨나 있었다는 것.
하지만 한화팬들은 그에게 주목했다. 어쨌든 팀에서 가장 중요한 타자는 김태균이었고, 한화의 성적 또한 그의 타격에 일희일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언젠가부터 '김태균은 까야만 잘한다' 라는 공감대가 한화이글스 팬 커뮤니티에서 형성되어, 홈런이나 안타를 쳐도 잘했다는 축하보다 까는 글이 더 많이 달리기 시작한 전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샌가 다들 김태균을 까기 시작했다. 겉으론 욕하지만 속으론 한방날려주길 기대하며.
결국 팬들은 김태균을 욕하고 구단을 욕하면서도, 제발 내년에는 김태균이 이승엽 내지 장종훈 정도의 대선수가 되길 기원하며 희망고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어쨌든 준수하지만 최고는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그렇고 그런 한화표 선수의 한 명으로 남는가 했는데...
3 폭풍같은 스타 등극(2008~2009)
2008년 시즌에 들어서, 갑자기 SK 와이번스를 넘어 최고의 스포테인먼트를 몸소 실천하는 야갤의 대스타이자 별명 제조기가 되어버렸다. 성 뒤에 뭐든지 갖다붙이면 별명이 되는 사나이.[6] 결국에는 별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별명이 되어버린 무시무시한 사나이. 그 수많은 베리에이션은 김별명 참조. 본인은 김고자(...)라는 별명을 가장 싫어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은 김질주와 김국민이라고.[7] 하여간 저 덕분에 한 시즌 타점보다 한 시즌 생산되는 별명이 더 많았으며 성적은 늘어나는 별명과 반비례하면서 하락세를 달렸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사실 따지고 보면 단순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팀의 주축선수였기 때문에 집중적인 팀의 홍보대상이었고, 그만큼 인터넷에 쌓인 자료가 많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성적 자체는 좋긴한데 최고는 분명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놀림거리가 됐던 것. 그런데, 2008년 갑자기 관심 받은 만큼의 성적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이것이 단순한 놀림거리가 아닌 하나의 팬덤현상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동갑내기 친한 친구라는 점과 맞물려 어느새 이대호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 리그를 이끌어가는 두 명의 타자 중 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일본 진출 전까지는 통산 성적이 이대호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김태균이 일본에서 한 삽질과 더불어 2010~2011년 시즌 이대호의 뛰어난 성적 때문에 이대호 쪽이 앞선다. 또 이대호의 리그 사상 2번째의 타자 트리플 크라운 기록 때문에 여론의 주목을 이대호보다 조금 덜 받았었다. 재밌는 것은 커리어 전체를 봐도 꼭 이대호와 김태균은 어느 한 쪽이 잘나가면 어느 한 쪽이 정체되는 시기가 많았다는 것. 해당 문서 참조.
3.1 2008년: 홈런왕 김태균
홈런&장타율 커리어하이 시즌
리그 최고의 강타자로 군림하다
2007년 시즌 종료 후 연봉 파동 때문인지, 혹은 '종훈매직'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2008 시즌에는 남다른 타격감을 선보여 부상에도 불구하고 맹타를 휘둘러, 결국 자신의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인 31홈런을 기록함으로서 자신과 치열하게 홈런 경쟁을 하던 롯데 자이언츠의 카림 가르시아를 제치고 2008 시즌 홈런왕을 확정지었다. 데뷔 8년만에 드디어 홈런왕 등극. 데뷔 첫해 포스트 이승엽 소리를 듣고, 그 이후 기나긴 시간을 김태균이 최고의 타자가 되리라 기대하며 기다려웠던 올드팬들에겐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일.
사실 김태균이 그 동안 성장하지 못했던 큰 이유 중 하나가 끊임없는 잔부상 때문이었는데, 2008년에는 잔부상 - 복귀후 맹타 - 잔부상 - 복귀 후 맹타의 사이클로 드디어 부상과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약한 부상 때보다 부상이 조금 회복된 후에 더 나은 타격 감각과 홈런 생산력을 보여주었고, 하필 팀도 치열한 중위권 싸움을 하면서 팬들은 그의 컨디션에 일희일비해야 했다.
3.2 2009년: 국대 4번 김태균
2009 WBC 예선 한일전(승자전)에서 그야말로 눈물나는 14:2 콜드게임 패배때 유일하게 투런 홈런(1회)을 때려 2점을 가져온 사나이. 그리고 3월 9일 있었던 재대결(순위결정전)에선 귀중한 1타점 결승타로 한국에 승리를 가져다줬고, 이후에도 홈런을 뻥뻥 터뜨리면서 제2의 국민타자가 되어버렸다. 김승엽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은 건 옵션. 2009 WBC의 활약에 힘입어 이대호로 기울던 여론을 순식간에 자신으로 넘어오게 했다. 반쯤 공식적으로 '김해결'이라는 별명 추가. 2009 WBC 당시 김태균의 성적은 타율 0.345, 3홈런(공동 1위), 11타점(1위), 9득점(1위)로 WBC 1루수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009년 두산과의 경기중 포수 최승환과 부딪힌 후 헬멧이 벗겨진 상태로 뒤통수를 땅에 박아서 뇌진탕 후유증으로 부진중. 이 후유증으로 인해 당분간 경기를 출전하지 못하게 되어, 별명도 추가되려면 좀 시간이 걸릴듯 했다. 결국 시즌 말 부활은 했지만... 시즌은 다 끝났고 한화는 8위인데 뭐.
어쨌든 2008년에 드디어 재능을 만개했다는 점, 2009년 WBC에서의 맹활약, 젊은 나이라는 점 때문에 리그 최고의 타자로 대접받았다. 무엇보다도 시즌 종료 후 FA 신분을 획득한다는 점 때문에 시즌 내내 언론과 팬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아야 했다.
4 일본 진출(2010~2011)
2009시즌 종료후, 결국 한화를 떠나 치바 롯데 마린즈와 3년 계약을 맺었다. 본인이 워낙 일본행을 원했던데다가 치바 롯데 마린즈의 신임 감독인 니시무라 감독이 우타 거포 보충을 요청하였고, 무엇보다 구단주인 신동빈씨가 직접 데려오라고 지시를 해서 그 덕분에 프론트가 재빨리 움직여 우선 협상이 바로 끝나자마자 계약을 해버렸다.
한화에서도 엄청난 양의 금액을 제시했지만 결국 꿈+돈을 쫓아서 간 셈이니.[8]
4.1 일본 진출 첫 해(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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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에 간바로 닛폰이 붙어있는걸 보니 2010년이 아닌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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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돼지
일본 진출 첫 시즌 시범경기에서는 .342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희망을 알렸지만 정작 시즌 개막 경기 세이부전에서는 52년만에 4타수 4삼진이란 굴욕을 겪었다. 본인은 크개 개의치 않는다고 했지만 다음날 호아시 가즈유키의 팜볼에 농락당하여[9] 6연타석 삼진에 이어 1사 1, 2루 득점찬스에서 폭풍 병살. 마지막 타석에서는 그나마 중견수 플라이. 공이 외야로 나갔다. 9타수 0안타 6삼진. 미스터 제로. 그리고 더욱 양산되는 별명
그런데 이후 연속 홈런을 치는 등, 5월이 오자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본 롯데리아에 김태균김치버거(…)라는 메뉴도 있는걸 보면 현지에서의 인기도 대단한 듯. 덧붙여, 김태균의 홈런 영상을 보면 공이 넘어감과 동시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문 밖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김태균이 홈런을 치면 저 김태균김치버거를 선착순 몇명 한정으로 52엔에 팔기 때문이다. 배번이 1번이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치바롯데에는 자기이름걸고 음식내면 부상 혹은 부진이라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 올스타에 선발되었다. 같은 시기에 임창용도 올스타에 선발되었지만 임창용과 김태균은 서로 상대 팀. 홈런레이스에서는 한국인 최초 1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던 2010년 8월 2일, 돌연 김석류 아나운서와의 결혼을 발표하였다. 2010 시즌 후반기 부진속에 갑작스런 발표와 슬럼프 시기와 김석류 아나운서의 일본체류시기가 겹쳐서 야갤에서는 온갖 개드립 양산했다. 야구계의 연정훈 결혼 발표후 4경기 연속 무안타였다가 8월 7일에야 19호 홈런을 때려냈다. 이때 한 말이 석류 덕분이다라고.
하지만 일본에서 맞이한 첫시즌인 10 시즌 김태균의 성적은 타율 0.268에 21홈런 92타점으로 일견 괜찮은 성적(특히 타점은 리그 6위다)으로 보이나 득점권 타율 0.236로 사실상 꼴지에 랭크되어 있고, 병살이 24개로 단연 선두에 랭크되어 있다. 삼진 역시 1위에 7개 뒤진 140개로 2위. 리그 최고 테이블 세터진의 롯데에서 4번을 치면서 타점이 92개밖에 되지않는 이유가 이거다. 게다가 1루수이면서 실책이 8개나 된다. 치바 롯데 팬들이 김태균을 깔 만하다.
물론 진출 1년차니 이 정도의 성적도 완전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무개념 팬들이 김태균 타점, 홈런 스탯만 들고와서 마치 리그 최상급 클린업인듯 우기는게 문제. 첫 시즌 김태균은 김득병, 김삼진, 김찬물이었지 김홈런, 김영양이 아니였다.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는데, 6월까지 18홈런 65타점으로 상당한 성적을 보여줬지만 이후 3달동안 3홈런 27타점에 그치면서 후반기에는 6번으로 타순이 밀리게 될 정도였다. 92타점도 오히려 이 시즌의 팀 타선을 생각하면 좀 부족해 보이는것이 1번타자인 니시오카가 일본야구 타석수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공격 기회가 많았던 것이 이 시즌의 지바 롯데였다. 4번인 김태균의 앞을 친 3번 타자 이구치의 출루율도 .412였으니... 김태균에게 돌아온 만루찬스가 23회나 됐다고 하니 이런걸 감안하면 오히려 92타점은 적어보일 정도. 후반기 들어서 안그래도 떨어지던 성적이 김석류와의 결혼발표 이후로 더 눈을 썩게 만드는 성적이 나와서 김석류는 더불어 까이게 되었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활약을 했다. 7경기 모두 선발 출장해 29타수 10안타 타율 .345 2타점. 장타는 단 한개도 없었으나 똑딱질은 열심히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번도 못한 우승의 한을 일본에서 풀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만전에 출전, 1타수 무안타 4볼넷(...)을 기록했다. 당연히 '김볼넷'이라는 별명이 추가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후 지독한 부진으로 팀 타선의 구멍으로 자리매김했다. 결승전까지 4번으로 출장하며 테이블세터진과 추신수가 만든 팀의 찬스를 전부 날려먹었다. 최종 타율은 9푼.
2011년 KIA로 국내 복귀한 이범호의 행보 때문에 한화 팬들 사이에서는 김태균이 국내에 복귀할 때 반드시 한화로 돌아와주길 바라는 여론이 강했다.
4.2 충격의 중도퇴단(2011년)
이전 해인 2010년 아주 좋지는 않지만 썩 괜찮은 성적을 올린 관계로 2011년은 보다 적응한 모습으로 더 나은 성적을 올릴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전력난이 심해지면서 대폭 늘어난 낮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손목 부상까지 겹치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몇경기 만에 1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중 7월 27일, 김태균이 부상 장기화와 지진의 여파로 인한 심리적 충격 등을 이유로 치바 롯데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FA 자격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떴다.# 8월 7일 야구장에 방문하신 회장님이 복귀를 인증하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김태균의 복귀를 비난했다. 김지진 김도망 김비겁 일본언론은 당연히 김태균을 비꼬면서 맹비판했고,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 등지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이미지가 덤으로 안 좋아졌다. 국내에서도 역시 김태균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이 나왔는데, 김성근 감독은 김태균의 정신력이 너무 나약하다며 비판했고# 심지어 장훈은 김태균의 복귀를 보며 “한국 남자로서 부끄러웠다”라고 까지 말했다.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 역시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조금 아프면 아프다고 빠지고, 뭐가 무섭다고 가 버리고"라고 디스했다.
김태균의 복귀로 인해 안그래도 이승엽이 MVP만 5번 수상했는데 일본 8시즌 통합으로는 처참한수준이라, 2006년을 합쳐도 평균시즌은 2010년 김태균이랑 비슷하다 이승엽과 2012년 복귀하는 것은 일본 야구계에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아진 것이 향후 일본 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임창용의 경우 싼 값에 활약을 했더니 야쿠르트에서는 단지 좌완이면서 특이한 폼을 가졌을 뿐인 이혜천을 영입한 경우도 있었다.
그의 중도포기로 인해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김태균 김구라되다.[10][11]
구단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시즌 도중 퇴단했다고 하지만 본인은 구단과 좋게 헤어졌다고 하니 너무 강도높은 비난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당해년도 계약금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그냥 다 줬다고. 이후 김태균은 "팀도 동료도 없었다... 난 한낱 용병이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미 2010년에 일본 야구의 분위기에 절반쯤 마음이 떠났던 모양.
2011년 11월 28일 한화가 김태균에 베팅한 금액이 최소 연 10억에 육박할 것으로 보도되었다. 12월 12일 한화에서는 기존 매체들에 알려진 것과 달리 10억+a가 아닌 계약기간 1년에 옵션 없이 순수연봉만으로 15억 계약을 했다. 연봉 15억은 국내 스포츠 선수 사상 최고액이다. 팬들은 계약금 없이 1년 15억이기 때문에 FA로 따지면 4년 60억이라 크게 비싸지 않다는 의견과, 그래도 일본에서 죽 쑤고 왔는데 15억은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다. 보통은 이면계약으로 옵션처리하는 금액을 이렇게 한꺼번에 줘버리는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아마도 박경완의 금지된 이면 다년계약 파문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12][13]
하지만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상황에서 김태균과 비슷하기라도 한 클래스가 한화에 존재하지 않으며, 2013년 이후의 FA 몸값이 폭등한 상황에서 2015년 후 김태균 FA시 타팀에서 김태균을 데려가려면 2년치 연봉(30억)+보상선수 또는 3년치 연봉(45억)을 한화에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타당한 계약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김노예
12일 입단식에서 자신에게 15억은 과분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으며, 야왕의 해결사 별명을 갖고 싶다고 했다. 김해결
그리고 치바 롯데 퇴단에 대한 의혹을 담은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으나 수많은 입단식의 기사에 묻혔다.#
김승연 회장이 시즌 중 영입을 천명했을 정도로 모그룹 차원에서 프랜차이즈 스타인 김태균의 친정팀 복귀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그에 따른 기대 또한 대단하다.[14] 노재덕 단장은 김태균을 믿기 때문에 처음부터 옵션계약은 생각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정승진 사장은 언젠가는 김태균의 등번호도 영구결번이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할 정도.#
국내 입국 시 '팀에서 동료인 니시오카 츠요시 선수가 자신에게 다가와 둘이 있을 때 자신이 한국계임을 고백했다'는 말을 해 까였다.[15] 12월 26일 조선일보에 퇴단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지진과 방사능 문제 때문이며 서로 좋게 헤어졌다는 이전 기사와는 달리 팀에 제대로 적응을 못해 그만뒀다고 제 입으로 밝혔다. 성적만을 요구하는 팀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당연히 폭풍처럼 까이고 있는 중. 김태균의 해명을 반박할수 있는 내용이 들어간 기사도 나왔다. 여기 니시오카는 정말 김태균 한대 패고 싶어할지도
5 복귀 이후: 까임의 시기 2
5.1 2012년: 타격왕&출루율왕 김태균
비난과 싸늘한 반응 속에서 시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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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억 명품수비
2012시즌 개막전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5타수 2안타(2루타1) 1타점을 기록. 그 다음날엔 3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했으나 4회말 1사 1, 3루에서 손아섭의 평범한 1루 땅볼을 1루 베이스도 밟지 않고 2루로, 그것도 악송구를 하는 수비를 작렬시키며 한화팬들을 멘붕시켰다. 이후 선발이었던 안승민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4회에만 7실점, 결국 팀의 5:10 패배로 이어졌다. 한화 팬덤에서는 그따위로 할거면 15억 도로 토해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 경기 이후 한대화 감독이 인터뷰에서 "잠깐 귀신이 씌여 그랬을 것"이라며 감싸 안아주는 모습을 보였다.
4월 13일에는 테이블세터의 부진으로 타점을 챙기지 못했으나 14일에는 4타수 4안타로 시즌 초이긴 하지만 6할을 찍었으며 통산 1,100 안타를 달성했다.
4월 22일 삼성전에서 드디어 시즌 첫 홈런을 때려냈다! 무려 50타석만에 터진 귀중한 홈런. 그리고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최진행은 삼진 하나 추가
4월 29일 넥센전에서 브랜든 나이트를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1:1 동점을 만드는 값진 홈런.
팀이 막장이 되어버린 것과 일본 복귀 때 저지른 만행 탓인지 팬들의 관심은 싸늘했다. 일부 팬들은 김태균의 역대 전적을 고려해볼때 6월 이후 반드시 DTD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마다 찾아오는 잔부상이 어김없이 또 찾아왔다. 타격 시에 손가락이 울리며 통증이 오는 상황이라고. 이로 인해 6월 후반기부터 결장이 잦아졌다. 대타로 출장해보기도 했지만 되려 타율만 갉아먹고 어느샌가 타율이 4할 밑으로 추락한 상태. 허나 중요한 것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팀은 막장이고 김태균 본인에게는 아무도 별 관심을 안 가진다는 것(...).
6월 24일 두산과의 경기에서는 선발로 나선 류현진이 3이닝 4실점으로 조기 강판된 상황에서, 상대 선발투수인 니퍼트를 상대로 추격의 불을 당기는 3점 홈런을 날렸다. 이 홈런으로 니퍼트는 그대로 강판되었고, 팀은 기어코 8회말 역전에 성공하며 시리즈를 스윕하는가 싶었는데.. 9회초 박정진이 경기 종료까지 아웃카운트 단 두개를 남겨둔 상황에서 폭투로 주자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결국 연장 승부 끝에 7:8로 경기를 내 주고 말았다.
7월 7일 SK 와이번스 전에서 시즌 10호 홈런과 더불어 결승타[16]를 기록하며 팀의 연패를 끊는데 일조했다.
다음날 열린 7월 8일 SK 와이번스 전에서도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200홈런(역대 18번째)을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개인 통산 600득점과 2,000루타를 동시에 달성했다. 집중력을 발휘해 연이틀 3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타율도 0.398까지 끌어올렸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개인 기록 달성도 기쁘지만 무엇보다도 팀이 연패를 끊은 것과 더불어 류현진에게 승을 챙겨줄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히며, 4할 타율에 대한 것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012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 참가하여 예선에서 홈런 14개[17]를 쏘아올려 1위로 결선에 출전하였고, 결선에서 예선 2위를 차지했던 박용택을 6:3으로 꺾고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개인적으로 3번째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기록으로, 이는 양준혁, 박재홍에 이은 역대 3번째 기록이다.
하지만 이후 체력탓인지 점차 부진하면서 4할에서 한참 떨어진 0.363으로 시즌을 마감했다.[18] 그래도 타율 1위와 출루율 1위를 타이틀을 가져갔다.
5.2 2013년
김태균(1982)/2013년 문서로.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12시즌과는 달리, 2013년에는 장타력 없이 영양가 없는 똑딱질만 일삼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다가,[19] 야구 내외적으로 구설수를 만들어 내어 한화 이글스 팬들은 물론이고 타팀팬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고있다.
심한 경우는 암흑기인 팀에 도움이 안된다며 LG 트윈스 시절의 조인성(...)과 비교당하기도 했지만, 9월 중반에 부상에서 돌아오더니 3개의 홈런을 치며 두 자릿수 홈런타자가 없었던 팀에 유일한 두 자릿수 홈런타자가 된다.[20] 그러나 김태균은 2002년, 2006년에 이어 세 번째로 커리어 로우 시즌을 기록한다.
시즌 최종성적은 101경기 .319 110안타 52타점 10홈런(...) 73볼넷 67삼진 1실책 .444(출루율 1위) .475 .920인데... 2013시즌 한화타선이 기대와는 다르게 08 김기아(...) 뺨치는 소총타선이 되어버렸다 하더라도 누적 스탯이 참...
전반적으로 기대보다 못한, 그것도 스탯관리만 주구장창한 시즌으로 평가된다. 3할 1푼치고 욕먹는 김태균 다만 이게 정말 까일 스탯인지는 다소 논란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를 참조.
5.3 2014년
김태균(1982)/2014년 문서로.
2008년 커리어하이에 버금가는 성적(?)을 기록한 해. 개인 통산 최고 타율(0.365)이었지만 200안타를 친 서건창덕분에 타격왕 달성에는 실패하고 출루왕 타이틀을 가져가는데 만족해야했다. 그리고 한국 복귀 이후 최다 홈런(18홈런), 최다 타점(84타점)을 기록했지만 극악의 타고투저 시즌임을 감안한다면 4번타자로서 뭔가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 성적으로도 까이는 김까임 그리고 병살 1위
6 김성근 감독 시기, 까임의 시기 3?
6.1 2015년
출루의 신
만루 악마
득점권을 움켜쥐는 독수리의 발톱
그러나 현실은 전반기 GOD태균, 후반기 JOT태균(...).
김태균(1982)/2015년 문서로.
간만에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면서 한국 복귀 이후 최다를 기록했지만 전반기의 맹활약에 비해 후반기의 부진이 아쉬웠던 시즌. 똑딱이는 탈출했으나 타율을 엄청나게 희생했다. 순수 출루율은 엄청나게 높았지만 결국 4년 연속 출루왕 도전은 실패했고 OPS 1.00도 지키지 못했다.
파일:G4ribkN.jpg
2015년 최고의 별명 김돗돔
김태군은 김듯듬인가
6.2 2016년: 한 시즌 최다 출루 기록 작성, 커리어 하이
김태균(1982)/2016년 문서로.
초반에는 먹튀였으나...중반 이후에는 2016년 KBO 현역 최고를 넘어 역대급 우타자
커리어하이급 성적 달성, 잃어버린 장타력을 되찾다
KBO 역사상 최초의 300출루 달성&역대 최연소 10번째 3000루타 달성!
출루의 신 장효조를 제치고 출루율 역대 1위 달성
KBO 리그를 정복하고도 남을 성적을 달성했으나, 최형우에 밀려 콩라인으로 남고 만 사실상의 커리어하이 시즌.
- 2012년이나 14년 때의 선구안과 정교한 컨택트를 유지하면서 전성기 당시의 장타력을 그대로 보여 준 역대급 시즌. 해당 문서로.
84억 값은 충분히 했다홈런과 장타력만 커리어하이였던 08 시즌보다 부족했지만 그 외 기록 대다수의 부분에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커리어하이 시즌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