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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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1]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 및 사형선고[2] 사건[3]

위의 사진은 1심에서 전두환씨는 사형, 노태우씨는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을 당시의 신문이다.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김영삼,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1 개요

199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존재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청산하겠다라는 공약과 언급에서 나오게 되어서 과거 12.12 군사반란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범으로 지목된 대한민국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조사하여 각각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서울구치소가 왜 서울에 없는지는 묻지 말자안양시에 있는 안양교도소에 모두 구속수감한 사건.

대한민국 정부 수립 47년과 광복 50년을 맞이하여 최초로 일어나게 된 초유의 사건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주목까지 받게 되어서 1995년 당시 최대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시 두 정권에 의해 세상에 밀폐되었거나 가려졌던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사건과 그 동안 숨겨졌던 새로운 사실까지도 공개되는 등 이러한 과거사를 뿌리뽑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가겠다는 공약을 내건 문민정부 시절의 최대사건이기도 하였다.

2 배경

1995년 11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그동안 제5공화국노태우 정권 시절에 의해서 가려져왔던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때 새로운 사건들을 널리 공개하고 과거사 청산의 작업으로 사실상 5공 및 6공의 수장이기도 하였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서 검찰을 통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하게 된다.

이 무렵,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이 5,000억여원의 비자금을 모 사업가의 계좌를 통해서 보유하고 있었음을 폭로한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차명계좌가 금지되었으나 권력층의 힘이 당시까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발휘해서 차명계좌인 상태로 남아 있던 것. 그러나 차명계좌의 명목상의 주인인 모 사업가가 자신의 명의로만 되어 있지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자금 때문에 엄청난 현금보유에 대한 재산세 납부 등의 관련 문제들을 처리할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박계동 의원에게 사실을 알렸고, 박계동 의원이 결국 이것을 폭로한 것. 당시의 자세한 정황은 추가바람

결국, 1995년 10월 전직 대통령 노태우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노태우 자신이 노태우 정권 통치 시절 거대의 비자금을 가진 적이 있었고 거래도 한 적이 있었다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을 실토하여 세간의 논란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비자금을 쓴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단지 정치자금과 공적자금으로 활용하였고 이러한 사건에 대해 국민 여러분들께 면목도 없고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며 눈물까지 훔치면서 자신의 진상을 밝혔다. 그리고 11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에 직접 출두하여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에는 구속수감이 결정되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를 떠나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동년 12월 5공의 수장이었던 전직 대통령 전두환검찰 소환이 결정되어 검찰청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12월 2일 연희동 자신의 사저 입구 골목#에서 "대통령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5공과 6공에 대해서 과거사 청산이라는 근거도 없는 술책을 통해서 왜곡하려고 하였고, 나는 검찰소환에 절대 응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서초동 대검찰청이 아닌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가서 5분간 참배한 후 곧바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상남도 합천군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검찰에서는 전두환의 이런 행동을 도주로 간주하고 12월 3일 새벽 합천군으로 내려온 대검찰청 수사차량과 검사들, 그리고 합천경찰서장과 합천군수 등이 전두환의 고향집을 찾아와서 전두환의 소환을 독려하게 되었다. 결국 전두환은 검찰 호송차량을 타고 합천군을 떠나 곧바로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안양교도소로 직행하여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구속수감되었다.

3 왜 全, 盧 두 사람인가?

정치경제적으로는 비자금 조성과 거래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사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은 과거 12.12 군사반란을 통해 내란을 일으키고 군대를 서울특별시 도심에 배치시켜서 긴장감을 높였으며 5.18 민주화운동 때는 운동 참가자들을 폭도 및 불온 선동을 일삼는 민족반역자라고 지목하여 잇따라 학살과 살육 등을 일삼았던 과거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언론통폐합과 7년 간의 독재, 그리고 두 사람이 사적으로도 친한 관계에다가 군대 동기라는 점에서 연관이 있었고 당시 문민정부가 과거사 청산운동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국민들에게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아픈 기억을 청산시키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취지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였다. 그나마 덜 폭압적이었다는 노태우 정권조차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을 통해 친위 쿠데타를 통한 독재정권 수립 시도가 있었음이 드러나면서 전두환,노태우가 있는한 언제든 군부의 위험앞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위기의식도 생겼다,

이전에도 대통령 김영삼8월 15일에는 일본이 만든 수탈기관인 조선총독부 본청건물도 철거하며 전노 두 사람보다 더 오래된 일제강점기에 대한 과거사 청산도 병행하였고 경복궁 복원을 지시하는 등 그로 인해서 대국민 지지를 압도적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이런 자신감을 전, 노 두 정권에 대한 과거사로까지 연계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4 全, 盧의 반응

전직 대통령 노태우는 비자금 연관설 등으로 인해서 이미지가 추락한 터에 12.12 군사반란 내란개입 등으로 인한 과거사 문제까지 겹치게 되자 대통령 김영삼에게 별다른 불만이나 이의 등을 제기하지 않고 곧바로 검찰소환에 응하여 조사까지 받은 뒤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구속수감된 전직 대통령 1호라는 불명예까지 안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전두환은 노태우가 검찰에 소환된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더니, 오히려 자신도 검찰소환이 확정되자 뻔뻔하게 일명 골목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과거에 이미 사과라는 사과는 다 했고 검찰소환 따위에도 응할 이유도 없으며 급기야는 대통령 김영삼좌파적인 사고력에 의해서 전직 대통령의 씨를 말리려 한다"고. 그리고 곧바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가서 참배하자마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남 합천에 있는 생가로 가면서 대정부 선전포고를 선언하며 칩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결국 하루도 못가 합천에 내려온 검찰 호송차를 타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됨에 따라 구속수감된 전직 대통령 2호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청와대는 전두환이 자신들에게 선전포고격인 골목성명에 대해서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고 대꾸할 가치도 없다면서 특히 대통령 김영삼이 민주정의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서 전두환 자신과 노태우 그리고 민정당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것이지 전, 노씨나 민정당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것은 절대 아니다, 대통령을 배은망덕하게도 배신을 했다느니 어쩌구하는 것은 과거 자신이 통치했던 시절의 망상에서 나온 것이라며 일축했다.

5 국민들의 반응

국민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동시에 구속되었다는 점에서 독재 정치의 최후라는 인상을 받고 짜릿해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때 학살과 살육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두환의 검찰소환 불응과 합천으로의 귀향에 대해서는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냈던 자가 어찌 저렇게도 뻔뻔할 수 있는가? 7년간 독재적으로 그 자리에서 썩도록 앉았더니 이제는 물러나서도 왕노릇한다. 독재로 대통령 오래해 먹더니 이제는 국민도 눈에 안 보인다!!"는 등 분노가 가득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4]

6 이후의 현황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이 선고되었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2,628억 원이 선고되었다.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뇌물). 그러나 8개월 뒤 1997년 외환 위기가 한창이던 와중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결론적으로 내란목적살인의 댓가가 겨우(?) 8개월 감방생활로 끝.

전두환노태우 이 두 사람은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15대 대선 김대중 당선자와 합의하여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여 교도소 생활을 종식하고 현재까지 있다. 그러나 노태우는 현재 소뇌위축증으로 인해서 병고(病苦)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서 일부 행사에도 불참하는 등 존재조차 희미해져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일생담을 담은 회고록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2013년 9월, 추징금 2,628억을 모두 완납하여 그래도 전두환보다는 적은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전두환은 사면 이후에도 2006년2012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열병식 참석과 거수경례 사건 그리고 사저 경호처에 대해서 서울특별시가 세비(貰費)를 부가하라는 요구 등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29만원 논란 등 몇몇 발언들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고 지금도 제왕적 행태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두환은 여야를 막론하고, 노소(나이)를 막론하고 세대를 막론하고 현재 가장 비판을 받고 있는 전 대통령이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논란 거리지만,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비판을 받고 있는 경우는 전두환이다. '노태우는 추징금을 완납하기라도 했지! 통장에 29만원이 왠말이냐!'라면서 많이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1.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킨다는 것은 정부나 법원 및 검찰에도 굉장한 부담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2. 비록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긴 했으나 1심에서 사형선고, 그것도 전직 대통령이란 신분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사건이다.
  3. 사실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지는 않다. 당장 프랑스만 해도 전 대통령 앙리 필리프 페탱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바 있고, 비록 이번 일 이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아르헨티나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등과 마찬가지로 역시 최고형을 선고한 사례가 있다.
  4. 후에 1998년에는 시민들에게 2번이나 계란세례를 받는 굴욕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