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민당(2000년)

상위 항목: 대한민국/정당
1949년에 창당한 동명의 정당에 대해서는 민주국민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한글민주국민당
한문民主國民黨
창당일2000년 3월 14일
해산일2004년 4월 20일[1]

1 개요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창당되어 정확히 4년 존속한 정당.

2 역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이회창 총재는 윤여준 전 장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중진급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정치신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단행한다.[2] 이 때 공천탈락자들 중에는 바로 이회창 총재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김윤환 전 당대표와 한승수 의원같은 민정계 일부, 그리고 신상우 의원, 문정수 전 부산시장, 김광일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한 구 민주계 일부, 조순 전 총재와 이기택 의원을 위시한 옛 민주당 인사 여기에 1997년 대선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겨뤘던 이수성 전 국무총리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수두룩했다. 그외에도 현역의원 공천탈락자가 수십여명으로 공천학살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공천탈락에 반발해서 조순, 이기택, 김윤환, 신상우 등 중진급 인사들은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여기에 당시 여당새천년민주당의 공천에서 밀려난 김상현[3] 의원, 대구에서 2회 내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던 서훈 의원, 원외에서 독자행보를 하고 있던 박찬종과 꾸준히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고 있던 재야운동가 장기표 등의 인사들까지 합류하면서 세를 키웠다. 거기다가 막판에는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허화평까지 참여했다. 창당을 선언한지 불과 19일만인 2000년 3월 8일 조순을 당 대표로 추대하고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그러나 현역의원만 수십여명이 참여할 것이란 호언장담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천탈락자들이 지도부의 설득으로 당잔류를 선택하면서 한나라당에선 지역구 7명, 전국구 2명만이 탈당해서 민국당에 합류하였다. 그나마 정당법에 따라서 전국구 2명은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직 상실. 이러면서 많이 위축되었고, 최대50석까지 노린다던 기세도 사그라든다. 그래도 창당초기에는 영남권을 중심으로 현역 의원만 10명에, 인지도가 높은 전직 의원, 장관, 지자체장급들이 다수라서 제법 여론조사에서 우위에 나오는 결과도 나왔다. 여기에 한나라, 민주 양당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나름 지역기반이 있는 정치지망생들을 대거 공천해서 전국 227개 지역구 가운데 161곳에 후보를 내면서 전국정당의 모양새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반호남지역감정을 폭발시켜서 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가담했던 정치인들의 성향이 워낙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관계로 여러가지 난맥상이 불거지면서 시망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쨌든 당장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영남권에서 워낙 인지도가 높은 인사들이 있기 때문에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그런 거 없었다.

수도권이야 애당초 경쟁력있는 후보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살아남을 줄 알았던 영남권에서 한나라당에게 완전히 털린 것이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 구미시에서 이 동네의 킹왕짱이자 민정계의 거두 김윤환 후보가 듣보잡 한나라당 후보에게 털린 것, 전직 국무총리이자 유력 대권후보였던 이수성 후보가 고향 칠곡군에서 한나라당의 정치 신인에게 패한 장면이었다.[4] 즉, 2000년 16대 총선에서 보여준 것은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영남권에서 2등 낙선도 있고 표도 긁어모아서 지역구 후보들의 전국 득표율 합계는 3.7%.[5] 이걸로 전국구 1번 강숙자 후보가 금배지를 달았고, 춘천시에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출신의 한승수 후보가 당선되며 2석 짜리 정당으로 생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30석을 장담하던 초반의 기세에 비하면 망했어요.

그 뒤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한테 국회의원까지 꿔주면서 다시 손을 잡았는데도 국회 과반수에 2석이 모자라자 민주국민당에도 손을 내밀었다. 이 과정에서 이기택, 장기표 등 반 DJ를 표명했던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세가 줄었지만 어쨌든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생존에 성공. 3당연합의 대가로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념이나 정책 등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이 당장 눈앞의 금뱃지만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라 선거결과가 안좋자 대부분 흩어져 버렸다. 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윤환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인사들은 명패만 걸어두는 수준이다가 지방선거와 대선이 예정된 2002년이 되자 각자 자기 갈길을 가버렸다.

신상우영남 출신 옛 민주계 인사들은 노무현 후보캠프로 들어갔으며, 신상우는 노무현 후원회장이 되었다. 애초에 민주당 출신이던 김상현도 민주당으로 복당해서 2002년 7월 재보선에서 광주 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야 출신 장기표도 이때 민주당 후보로 영등포 재보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6] 당의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하면서 의석수도 1석으로 줄었다. 이외에 다른 한나라당 출신들도 대부분 원대복귀하였고, 월드컵 열풍으로 정몽준의 인기가 치솟자 국민통합21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당 창당의 주역인 김윤환은 2003년 별세.

비례대표 강숙자 의원과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일단 원내정당이라 이름만으로 2004년까지 존재했지만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망하면서 정당 등록 인가가 취소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의 인사들은 새천년민주당으로 입당하였다. 더구나 이 당의 비례대표로 금뱃지를 달아서 2004년까지 이 당을 원내정당으로 유지시켰던 강숙자 의원은 금뱃지는 커녕, 오히려 별을 다는 바람에 범죄자로 전락해버렸다.

3 유사정당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잠깐 있었던 국민생각이 이 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여당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급조한 정당이었고 결과가 참담했다는 점에서. 다만 결과는 이쪽이 훨씬 양호했다. 국민생각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광삭 크리. 재미있게도 둘 다 장기표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정통민주당 역시 이 당과 행보가 거의 유사했던데다[7][8]결과도 참패였다는 점에서 민주국민당 및 국민생각이 보여줬던 한계를 재확인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16년안철수-천정배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이 이 당과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으라는 예상이 있[9]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20대 총선 항목 참조. 하지만 이 당이나 국민의당이나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뭉쳐 만든 정당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에 국민의당이 앞으로도 계속 성공가도를 달릴지는 지켜 볼 일이다.
  1. 17대 총선 비례대표 득표율 2% 미만으로 선관위 등록취소.
  2.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에 집권세력의 의원빼가기, 1998년 지방선거 패배, 외환위기책임론 등으로 극도로 위축되있던 한나라당은 2000년 총선도 패배가 유력했는데, 윤여준이 제시한 대규모 물갈이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기사회생하였고 윤여준은 이때부터 보수의 전략가, 보수의 장자방이란 칭호를 받으면서 급부상한다.
  3. 당시 김상현은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고 호언장담했다.
  4. 여담으로 당시 김윤환 후보를 꺾은 김성조 후보와 이수성 후보를 격침시킨 이인기 후보는 그 후 연달아 같은 지역구에서 18대 국회까지 내리 3선에 성공한다.
  5. 당시는 1인2표제 도입이전으로, 각 정당 후보들이 지역구에서 얻은 표를 모두 합쳐서 전국구 의원을 배분했다. 헌법재판소가 2002년 지역구 후보자 득표로 전국구 후보자 당선을 결정하는 것은 '이중투표'에 해당한다면서 위헌판정을 내리자, 여야 합의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다.
  6. 그리고 바로 탈당했다.
  7. 새천년민주당의 한광옥 전 대표가 동교동계 일부를 긁어모아서 창당했으나 현실은 영 좋지 못했다. 결국 한광옥은 새누리당으로 갔다.
  8. 참고로 장기표는 여기에도 손을 댔다. 국민생각 창당대회 하루 전날에 탈당해서 정통민주당에 합류했다.
  9. 당내 주도권 갈등으로 인해 탈당한 거대 정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주도해 창당한 정당이라는 것과 선거를 앞두고 거대정당을 탈당했거나 무소속이었던 의원들을 영입해 세를 불렸던 것, 당시 제1야당의 텃밭에서 선거 전 지지율 돌풍을 일으켰던 것,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존재했던 정당명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 등 닮은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