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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潤煥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이다. 호는 허주(虛舟). (1932년 6월 7일 ~ 2003년 12월 15일)
2 일생
2.1 출생 ~ 신문기자 시절
경상북도 구미시(당시에는 선산군) 장천면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와 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을 거쳤다. 이 시절에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 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78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2.2 정치인 시절
고등학교 동창인 보통 사람노태우가 아니다의 권유로[1] 민주정의당 창당 멤버로 들어갔다.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아래 청와대와 집권당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정치권을 주무르는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한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느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2]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1986년 8월 개각 때 허문도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87년 7월 김정렬 내각이 출범하자 박영수의 뒤를 이어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퇴임한 뒤 민주정의당으로 복귀했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군위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개원한 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최형우,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김용채와 함께 4당 체제를 이끌어가는 원내사령탑으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다. 3당 합당 이후에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정무제1장관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에서 활약했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4선에 성공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윤환은 당대의 킹 메이커(King Maker)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올랐다. 김영삼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구 민정당(군사독재정권) 출신 민정계 인사들을 설득해서 강력한 김영삼의 지지세력, 일명 신민주계를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환은 민정계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군부 출신 민정당 인물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일단 김영삼을 세워서 정권을 이어가고, 그 다음에 우리(TK+민정계)가 주도하는 보수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윤환은 전두환 밑에서는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옹립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노태우 밑에선 김영삼을 후계자로 지원해서 역시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의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와 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김영삼은 김윤환을 통해 당과 범여권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낀다. 이에 김윤환은 다시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민자당 대표위원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하게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도 김윤환은 대표위원으로 유임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김윤환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 메이커'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내 민정계와 영남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대선후보로 옹립한 김윤환은 3회 연속으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정작 이회창은 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자신이 밀었던 이회창 총재에게조차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팽당해 공천을 못받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난다.[3] 이후 조순, 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등 3김 정치 + 이회창에게서 팽당한 정계의 옛 거물들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2000년)을 차렸다. 재야의 장기표나 심지어 신군부 출신 허화평도 있었다! 이렇게 거물과 명망가만으로는 상당히 그럴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조한 정체성이 불문명한 정당으론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당 구도에 밀려 지역구에선 춘천시의 한승수 전 경제부총리, 전국구에선 후보1번이던 강숙자 등 총 2명 당선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본인 역시 자기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를 상대로 10% 차의 패배를 당했다.(41.7%:32.1%)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민국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연합(혹은 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10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4] 이 시기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 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구도를 구상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노무현이 기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5]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
이후 신장암 치료를 위해 국립암센터에 입원했고 미국까지 가서 투병했지만, 결국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2003년 12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화와 협력을 명분으로 실제론 막후 밀실에서 정치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야합하는 일본식 정치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으로서[6] 당선된 것이나, 홀로 여러 계파를 다룬 점 등 정치공학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김윤환이 속해 있던 민주정의당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어 김윤환을 만난 다음 "그래도 김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장내에서 민주주의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고, 언론계 인사들 역시 "허주는 순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물흐르듯 한다."는 평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정치적 능력은 역대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수 있을 만큼 대단했던 사람이다. 죽기 직전에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회창이 용서의 뜻을 표했으나 공식적 화해는 없이 세상을 떴다.
3 기타
2003년 그가 죽자 그의 호인 허주(虛舟), 즉 빈 배처럼 갔다고 해서 권력은 무상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의 친동생인 김태환은 17대, 18대, 19대(한나라당 -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다. 지역구는 구미시 을인데, 이 곳은 15대 국회의원 시절 김윤환의 지역구였다. 16대에도 구미시(단일 지역구)로 출마했으나 이 때는 김윤환이 2위로 낙선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안전행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사후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의 오상중고교 뒷편에 안장됐다. 오상중고교는 김윤환의 아버지인 김동석 전 국회의원이 세운 학교다.[7]
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경북대학교 정문과 학생주차장 사이에 새롭게 단장한 KNU 센트럴 파크에 그의 시비가 있다.[8]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선여부 | 비고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선산군) | 무소속 | - | 낙선 |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국회의원) | 민주정의당 | - | 당선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선산군-군위군) | 민주정의당 | - | 당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선산군-군위군) | 민주자유당 | - | 당선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시 을) | 신한국당 | - | 당선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시) | 민주국민당 | - | 낙선 |
- ↑ 사석에선 전두환, 노태우와 서로 반말하면서 술 마시는 사이라고 한다.
- ↑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
- ↑ 이 당시 이회창의 참모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공천은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 ↑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
- ↑ YS에게 팽당한 5공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
- ↑ 개혁성향의 영남후보를 세워서 영남표를 잠식하고 수도권의 개혁성향 야당표를 결집시켜야 한나라당의 호남포위 구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 천하삼분지계가 제갈량만의 독창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주요 책사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던 것처럼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도 정치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던 내용이다. 노무현이 여론조사에서 불과 2~3프로 나올때도 일단 민주당 후보경선만 통과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으론 가장 높을 것이란 평가가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지배적이었다.
- ↑ 칠곡3번 경운대행이 장천시외버스터미널에 정차하기 전에 오상중고교를 지나지만, 무정차 통과한다.(상장1리에는 정차한다.) 칠곡3번을 탔다면 장천터미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
- ↑ 경북대학교에서 잠깐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 작품인 "꽃"도 KNU 센트럴 파크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