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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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相佑
1937년 5월 20일 - 2012년 1월 16일 (향년 75세)

x50px KBO 역대 총재
박용오
(12대~14대)
신상우
(15대~16대)
유영구
(17대~18대)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8~11대와 13~15대 국회의원(7선)이다. 호는 범중(凡中). 종교개신교이다. 1937년 경상남도 양산군(현 양산시)에서 태어났다.

2 정치계 입문 전

1960년 고려대학교 시절 이기택[1]과 함께 4.19 혁명을 주도하였다. 그 뒤 약 10년 동안 부산일보 기자로 재직하였다.

3 정치인생

3.1 신민당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고, 그 선거에서 경상남도 동래군-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민주공화당 노재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0월 유신으로 이뤄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양산군-김해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영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택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초창기에는 김영삼의 비서를 지냈지만 10월 유신 이후에는 신도환 계보인 신우회에 속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있을 때의 지도노선 등을 비판하여 왔다.

3.2 민주한국당의 가오 실세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고 나서도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았다.[2] 이듬해인 1981년 관제 야당민주한국당 소속으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장성만 후보와 무투표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농촌지역 선거구 관리가 도시지역 선거구 관리보다 어렵다는 점, 당 사무총장으로서 당 운영에 좀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는 점, 어릴 적 양산에서 부산으로 이주하였던 점, 양산 출신인 민주정의당 이재우 후보가 출마할 예정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신설 선거구인 부산직할시 북구에 출마하였다. 사무총장을 거쳐 1985년 민주한국당 부총재로 사실상 유치송을 대신할 수 있는 막후 실세나 다름없었다. 물론 관제 야당의 진보스는 따로 있었겠지

그러다가 그 해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으로부터 신한민주당 입당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국가안전기획부 서울분실장 방준필의 협박으로 인해 김영삼의 제의에 응하지 못하였다. 만일 민주한국당을 탈당하면 구속시켜 버리겠다는 경고를 받았다고.[3] 특히 숙부인 신달수 경남버스 사장의 사업까지도 방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4].

결국 신한민주당 돌풍으로 인해 득표율 3위[5]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어느 정도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어쨌거나 민주한국당에 있었던 이력 때문에 상도동계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다. 방준필 때문에 본전도 못 건졌다 그래도 문민정부시절에 1980년대 당시 안기부 사실상의 공천명단을 넘겨주었고 그에 따랐을 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등의 반성행보를 보였다. 1986년 민주한국당 시절을 회고하고 참회하는 고독한 증언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3.3 보수 본류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는 이른바 3당 합당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해 민주자유당 소속 정치인이 되었다. 합당에 반대한 소수파 김정길/노무현과 행보를 달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계속 YS계, 속칭 (통일)민주계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렇게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 계보로 당직으로는 부총재, 행정직으로는 장관(해양수산부), 국회에서는 부의장[6]을 지내는 등 보수정당 내 민주계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영달을 누렸다.

3.4 민주국민당의 실패와 노무현 지지

그러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계 대표 인사라는 이유로 이회창 후보에 의하여 공천에서 탈락("숙청")하였다. 그러자 왕년의 고등학교, 대학교, 정치 동지이자 꼬마민주당계의 수장이었던 이기택, 민정계이자 왕년의 라이벌(...) 김윤환민주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권철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7]

이후 다른 여러 보수정치인들과 다른 행보를 보여, 2001년 9월, 자신의 고교(부산상업고등학교) 후배이자 통일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8] 노무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 소식을 듣고 그의 부산지역 후원회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형편을 생각하면 신상우의 보는 눈, 즉 정치적 감각은 비슷한 연배의 거물들 중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9] 2002년 노무현이 경선 승리를 거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문민정부 때보다도 더 강력한 원로가 된 신상우는, 이듬해인 200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맡았다.[10] 장관급의 꽤 괜찮은 간판을 얻은 셈이었다.

200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병문안을 하는 데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함께 막후에 힘을 쏟았다.

4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이 정도까지면 그냥 평범한 왕년의 정치원로뒷방 늙은이의 삶으로 끝날텐데, 위키러들이 보기에그의 가장 중요한 경력이 이 때부터 시작된다. 2005년KBO 총재에 내정되었으며, 2006년 1월 취임하였다. 참여정부 임기를 불과 2년 남짓 앞둔 시점에서 참여정부의 실세 정치인이 비록 퇴직 직업이긴 하지만 KBO 총재에 취임하는 것은 전형적인 낙하산 보은 인사라는 비난이 많았으나(사실 맞지만), 신상우 총재는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일본, 미국 등을 꺾는 등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정치적 위치를 활용해 선수들의 병역특례라는 성과를 내면서 논란이 잠재워갔다. 2008년 시즌에는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500만 관중 돌파 등 프로야구의 중흥기를 가져오는 등 운이 좋은 시대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는 이 시점부터 그는 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이후 제8구단의 창단을 둘러싼 과정에서 미숙한 대응과 서울 히어로즈의 창단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일 처리, 히어로즈 장원삼 투수의 삼성 라이온즈로의 현금 트레이드 논란, 일부 프로야구 선수들의 도박 파문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하일성 사무총장과 더불어 비난을 받았다. 결국 2008년 12월 KBO 총재를 사퇴하게 된다.

5 별세

2012년 1월 26일 향년 75세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6 여담

한국여자프로농구(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의 김원길 총재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막판에 자신이 있었던 정당에 반대되는 후보를 지지한 점, 은퇴 후 스포츠 인사로 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단 김원길 총재의 경우 이회창 후보를 지지해 이후 정계 은퇴로 내몰린 상황에서 스포츠 인사로 훌륭한 성과를 남긴 반면, 신상우 총재는 정치적으로나 스포츠 쪽으로나 모두 '영전'되어 성공했으나 마지막에는 사퇴로 쓴 뒷맛을 보게 되었다.

군사정권 때문에 정치판이 독재 대 반독재, 민주 대 반민주의 극단으로 흐른 채 지속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1. 고려대학교뿐만 아니라 부산상업고등학교(현 부산 개성고등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하였다.
  2. 정치계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않아서 그랬던 것.
  3. 제5공화국 드라마에 의하면 방준필은 "저희는 이 세상 누구든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공권력이 아주 많으니, 부총재님 본인은 물론이고 사돈에 팔촌까지 약점은 만들면 되는거 아니겠어요?"라는 섬뜩한 말을 곁들여가며 협박했다고.
  4. 정작 신달수는 전두환 정권 당시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이었음에도 이철승과의 인연으로 신한민주당 전국구 1번 국회의원이 되었다.
  5. 당시는 중선거구제라서 2위까지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1위 민주정의당 장성만 후보, 2위 신한민주당 문정수 후보.
  6. 사실 여소야대에 야당 중 최다선(7선)이었지만 자유민주연합박준규(9선) 의원이 여당 의원으로서 국회의장을 맡으면서 제15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98~00)에 그친 것이었다. # 사실 정권도 바뀐 마당에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가 미쳤다고 국회의장을 내줬겠냐만은..
  7.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기 전에 담배를 피우며 인터뷰했던 발언이 나름 압권. "한 가지 대한민국이 좋다고 느끼는 거는, 정당 창당에 대한 특허가 없다는 점이오." 당시 인터뷰
  8. 인연이 하나 더 있다면 해양수산부 초대 장관으로서도 선배이기도 하다.
  9. 물론 자신을 내친 이회창에 대한 복수심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부산 출신인 이기택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다만 이기택의 경우 이후에는 지지철회. 공교롭게도 이명박 정부에서 수석부의장을 맡았다. 2000년에 같이 팽당했던 민정계의 대표주자 김윤환 역시 이회창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영남 후보론'을 구상했으나 건강 악화로 대선 무렵에는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10. 참고로 의장은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