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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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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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ipede(센티페드)
زين العابدين بن علي(자인 알아비딘 빈 알리)

1936년 9월 3일 ~

튀니지정치가. 독재자. 1987년 11월 7일부터 2011년 1월 14일까지 튀니지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초년 생애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는 1936년 9월 3일 튀니지 함맘수스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식민지 통치 시절 벤 알리는 학생 신분으로 당시 부르기바가 이끌던 신헌정당의 연락원으로 일했으나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프랑스 경찰에 검거되었다.

한편 튀니지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벤 알리는 석방되었고 독립후 그는 쌍씰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군인이 되었고 군인이 된 이후 튀니지 육군 참모총장, 군사 안보국장 등을 거쳐가며 1977년 국방장관, 국가 안전국 장관이 되었다.

3 대통령 집권

이런 벤 알리의 능수능란한 추진력은 당시 부르기바 대통령에게까지 인정 받아 1987년 국무 총리가 되어 사실상 부르기바의 후계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1987년 11월 벤 알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부르기바를 몰아냈고 쿠데타를 일으킨 벤 알리는 그가 더 이상 노령이어서 더 이상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며 그의 나이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고 이후 벤 알리는 부르기바의 뒤를 이어 튀니지의 두번째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한편 대통령이 된 벤 알리는 부르기바가 1975년에 만들어놓은 종신 대통령 임기제를 없앨 것을 공언했고 대통령의 임기 제한과 다당제 도입 등 일단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 도입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한편으로 벤 알리 대통령은 1988년 아랍국가 최초로 고문 금지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범들도 사면시켰다. 그리고 부르기바 정권 시절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었던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정당들과 단체들의 정치활동도 합법화하여 사실상 자신의 정치 권력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포괄적인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한편으로 벤 알리는 1990년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군사 개입을 비난하며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에 튀니지군을 참전시키지 않았고 아랍 국가들의 국경을 서구 열강들의 침탈 이전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며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쿠웨이트 침공을 사실상 옹호하기까지 했었다.[1] 그리고 미국과 국제 사회의 이라크, 리비아 재제에 반대하면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리비아 무아마르 알 카다피 국가 원수와 민간 차원에서 교류하는가 하면 한편으론 미국, 서방 국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외교 정책에서도 크게 성공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벤 알리는 점차 권력의 단맛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는 점차 헌법을 수정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지속적으로 연장하면서 대통령에 연속적으로 집권하면서 점차 권위주의적 정치가의 성격을 드러냈다. 그러던 1992년 치뤄진 총선에서 엔나흐다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현 정권을 위협하기에 이르자 벤 알리는 그간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들에 대한 유화책을 거두고 비상사태를 선포해 엔나흐다에 대한 정치적 활동을 불법화하였고 군대와 경찰 등을 동원해 엔나흐다를 비롯한 튀니지 내 여러 이슬람 정당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벤 알리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이외에도 세속주의적 반대파 세력들까지 탄압하였고 그 결과 라세드 간누치 엔나흐다 당수등 수많은 튀니지의 야권 정치 인사들이 유럽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알 카에다 주도의 9.11 뉴욕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고 9.11 테러를 목도한 벤 알리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 등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집단들에 대한 공포감과 혐오감이 더욱 강해졌다. 9.11 테러 이후 벤 알리는 미국의 재정적 원조를 요청하여 미국 부시 행정부의 원조를 받게 되었고 벤 알리는 미국 이외에도 프랑스, 영국, 독일, 덴마크 등 다른 서방 국가들의 원조를 받으며 자국내 여러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대략 대통령의 정책에 불만이 있다 싶으면 알 카에다로 몰아 그 명분하에 탄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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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알리의 아내 트라벨시

그리고 이듬해인 2002년 벤 알리는 사실상 종신제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헌법 조항을 수정하여 사실상 영구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벤 알리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 서방 국가들의 경제 원조를 악용하여 경제 재건에 쓸 돈, 최신예 무기 구입비로 쓸 돈 등 원조금 상당수를 착복하여 그의 가족들과 측근들은 온갖 부정부패비리를 자행하고 온갖 사치를 즐겼는데 특히 아내였던 레일라 트라벨시 여사는 온갖 호화스런 사치를 즐기며 온갖 부정부패에 개입하여 23년간 집권하는 동안 트라벨시는 형제 10명을 요직에 앉히고 남편의 내정에 간섭하여 '아랍의 이멜다'로 불리게 되었다.[2] 전직 미용사였던 트라벨시는 벤 알리 전 대통령보다 스무살 가량 어지만 그녀는 뒤에서 대통령을 움직이는 실력자로 일명 ’카르타고의 섭정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게다가 2009년 벤 알리가 전립선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말을 했지만 트라벨시가 반대해서 실패했다고.

한편으로 벤 알리 대통령은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무지함을 드러내어 튀니지 사회에 만연했던 경제 문제와 빈곤 문제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벤 알리와 그의 가족, 측근들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의 원조를 악용하여 온갖 사치와 부정부패를 누리고 있을 때 일반 청년층들은 대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실업자가 되었고 경찰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일자리조차 얻을 수 없을 정도로 튀니지의 경제사정은 악화되어가기 시작했다.

4 몰락

이런 벤 알리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한으로 치닫던 2010년 12월 튀니지 중부 소도시 시디 부사이드에서 부아지지라는 이름의 한 사내가 몸에 불을 질러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본래 부아지지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무허가로 과일 장사를 하던 노점상이었는데 이를 발견한 단속 경찰이 부아지지를 구타하고 물건을 압수했다. 단속 경찰에 걸려 물건과 과일, 돈을 빼앗긴 부아지지는 시청으로 달려가 빼앗긴 물건을 돌려달라고 항의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결국 부아지지는 시청 건물 앞에서 몸에 불을 질러 분신자살을 시도하여 병원으로 옯겨졌으나 이듬해인 2011년 1월 숨지고 말았다. 한편 이런 부아지지의 분신자살은 정부의 억압과 높은 물가 상승, 실업난에 허덕이던 튀니지의 민중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에 전국적으로 정부를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가 튀니지 전역에서 일어났다.

초기 시위는 부패한 정부 규탄에 일자리를 요구하는 수준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예 벤 알리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시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한편 사태가 악화되자 벤 알리 대통령은 2014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와 부패인사 경질, 민간 일자리 창출 등으로 분노한 민심을 달래려고 했으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아예 정권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사태가 극에 달하자 벤 알리 대통령은 군부에게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부 역시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 대통령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면서 군부의 지지마저도 잃게 된 벤 알리는 1월 14일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면서 결국 튀니지의 반정부 시위 사태는 튀니지 혁명으로 이어져 벤 알리 정권이 붕괴되면서 막을 내렸다. 벤 알리 부부가 도망간 후 튀니지 외곽의 대통령궁에서 2700만 달러 규모의 보석류와 공금 등이 발견되었다.

이 과정에서 벤 알리의 부인은 그의 막대한 비자금 정보를 새 정부에 알려주는 대가로 법의 심판을 피해갔을줄 알았겠지만 사이 좋게 35년 형을 선고 받았다. 또 벤 알리 전 대통령에게는 5000만 디나르(약 386억7050만 원), 그의 부인에게 4100만 디나르(약 317억2969만 원)의 벌금형을 함께 선고했다. 감옥안에서 음독 자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5 기타

그리고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은 다른 중동 국가들로 확산되어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어째 튀니지 빼면 다 지옥이 되었다.[3]
  1. 그러나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이 중동 지역을 침탈을 하기 전 원래 한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 항목 참고.
  2.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서 돈과 명품, 보석, 호화로운 집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진짜다. 현재 기준으로 아랍의 봄을 겪은 아랍 나라들 중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민주주의가 돌아가고 있는 나라는 이 튀니지 뿐이다. 이집트무바라크 축출 후 군부 쿠데타가 벌어져 다시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섰고, 리비아내전으로 카다피 축출에 성공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나 이후 들어선 정부가 국가 통제에 실패하여 부족, 정파 세력간의 대립으로 내전이 재발하여 IS까지 끼어들면서 엉망이 되다가 최근 유엔의 중재하에 각자 내전을 치르던 여러 정파 세력들이 전쟁을 중단하고 새로운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IS와 리비아 정부군과의 충돌이 이어지고 있고(비록 최근에는 IS가 장악하던 시르테 등 리비아 영토 상당수를 리비아 정부군 측에서 탈환하여 많이 줄어들긴 했다.), 바레인은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결국 바레인 정부군에 의해 강경 진압당했으며, 예멘 역시 반정부 시위로 독재자 살레를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살레 퇴진 후 시아파수니파의 갈등이 점화되어 시아파 후티 반군과 수니파 정부군간 내전이 일어났으며, 시리아와 이라크는 시아파와 수니파가 대립하고 시아파 출신인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누리 알 말리키 전 이라크 총리가 수니파들을 억누르다가 이로 인해 종파 간 내전과 내분으로 폭발하여 그 틈을 파고 IS라는 최악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집단들이 이라크와 시리아 내륙 지역을 장악하면서 아예 21세기 중동 최악의 헬게이트가 되어 버렸다. 하다 못해 튀니지는 최소한 우리나라 국민이 여행 방문을 해도 사망할 확률은 없지만, 시리아와 이라크는 아예 방문객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여행금지국가이다(물론 튀니지도 민주화 혁명 이후 벤 알리 독재 정권 시절에 비해 치안, 정국 사정이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라크, 시리아 등보다는 안전한 편이다. 오히려 이라크, 시리아와 동급에 올리기엔 튀니지한테는 굴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