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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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徹
1912년 4월 6일 ~ 1993년 11월 4일

1 소개

대한민국승려이자 돈오돈수로 잘 알려져있는 인물.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출신이며 속세 성씨는 이씨(李氏), 이름은 영주이다.

한국 현대불교의 가장 유명한 고승. 학구열과 함께 평생 철저한 수행으로 큰스님으로 일컬어지며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 큰스님은 시공불교사전에 따르면 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은 승려에 대한 존칭.

홈페이지는 [1]

2 생애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나 영주(英柱)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진주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졸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17세의 나이에 불가(佛家)에 입도(入道)하여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해인사에 들어가 대종사(大宗師) 아래에서 득도(得道)하였고, 이어서 법명인 '성철(性徹)' 을 얻었다.[1]

당시 고승이던 동산 스님이 거두어 계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동산 스님은 용성 스님 제자인데 용성 스님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며 당시 한국 불교계 최고의 고승. 이로 인해 '용성 - 동산 - 성철'이라는 한국 선종의 대표적 흐름이 생겨난다. 훌륭한 스승 덕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항상 다른 스님은 '선생'으로 부르는 용성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제자의 제자라지만 존경스러워서라고.

불가 입도 이후로는 영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활동하였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위해 불가의 구도에만 전념하였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성전암에서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2]를 하였던 사례를 기록하여 불면(不眠)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계종 종단의 분규 와중에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해인사에서 구도에 힘썼으며 속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종정이 되어서 조계종을 이끌었다.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병고(病苦)를 앓다가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향년 82세(법랍 58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다비(화장)한 뒤 사리는 해인사의 사리탑에 안치했다. 당시 110여과의 사리가 나와 세간의 이목을 이끌었으며, 1994년 충청북도 고입선발고사 1번 문제에 등장하기도 하였다.[3]

2.1 비판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할 당시에 남긴 법어가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다. 산은 산이요 푸스는 푸스로다. 이 법어는 이후 <s>티벳여우를 통해 재조명받게 된다.</s> 다만 이 말은 성철의 창작이 아니고, 중국 송나라 때 발간된 불교서 <오등회원>에 나오는 중국 승려 청원유신 선사가 남긴 말이 원본이다.*

그러나 이 법어는 한편으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10.27 법난이란 큰 사건을 겪은 당시 불교계의 커다란 위기의식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침 당시 종교계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자 종교를 넘어선 친구였던 가톨릭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것과 대비되어서 이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석가탄신일의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법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을 샀다. 당시 시국 탓에, 사탄이라면 전두환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탄과 부처는 모두 허망하다' 같은 고명하신 말씀을, 과연 사람들이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올 김용옥은 이런 점을 들어 성철을 수준 낮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현실과 타협해선 안되는 것이다. 종교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방향을 돌리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낙태문제를 생각하면 쉽다.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가르침을 바꾼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라 정치다.(...). 그렇다고 도올 김용옥 선생이 특별히 정치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것은 아니고, 영향을 줄 수 없으면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성철 스님을 비판한 것.

고승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서 돈오돈수를 제시하기도 하여 불교 세간에 논란과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고승이 제시한 것을 후대 승려가 비판하고 새로운 것으로 고치려 하는 것에 불교계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조계종의 정체성을 성철이 간화선으로 놓으면서 지눌의 저서 <수심결>을 지눌이 간화선을 접하지 않은 초기 저작으로 분류하고 나중에 대해어록을 보고 돈오돈수로 선회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수심결 안에 간화선과 관련된 내용들(대표적으로 대오지심待悟之心. 간화선에서 쓰는 표현이다.)이 등장하여 학술적으로 성철의 주장은 맞지 않다.[4][5][6]

또한 생전에 석가모니가 그토록 경계한 근본주의 움직임을 보였으며,[7] 심지어 한국 불교의 법맥을 연구하면서 자신이 옹호하는 태고법통설을 옹호하기 위해 자료의 변조와 왜곡을 가했다는 비판이 있다. *. 선 수행과 학술을 두루 겸비한 승려로서 학술적인 연구와 성과가 많지만, 부족한 부분 또한 많다는 게 성철스님의 오점.

참고로 성철이 옹호하던 태고법통설과 이와 경쟁하던 나옹법통설은 전부 실제 역사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도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조선 시대 억불정책 하에서 조선의 불교계가 일반적인 종파 중심이 아닌 불교 문중을 형성해 법을 전하는 문중불교 체계로 가면서 생겨난 혼란이 문제다.[8]
참조:각 법통설 비교글

성철은 당대 대선사였던 만공스님에게 배웠는데 인가를 못받았고 셀프 인가에 가깝게 인가를 한 후, 만공, 경허를 부정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동영상

본인이 설법한 녹음집을 그대로 책으로 옮긴 법어집인 <영원한 자유>를 보면, 초능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리겔라를 초능력자라 말한다. 이 당시의 사회는 유리겔라를 마술사가 아닌 초능력자로 믿는 시기였다. 하지만 "본인이 수행을 하여 깨우치면 자기 손바닥 위에 보이듯 모든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런 것 하나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과연 진정 큰스님이자 깨우친 자이며 돈오돈수가 옳은 것이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3 그 외

  • 1980년대 조계종 최고지도자인 종정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속화되는 종단의 분규[9] 등을 멀리하며 해인사의 말사인 백련암에서 기거했다. 역설적으로 고승으로 점차 명망이 높아가자, 정치인과 재벌 등 여러 유력자들이 해인사를 찾아 성철스님을 뵙고자 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아예 백련암 근처에 몇 년 동안 가시덤불을 쳐놓고, 수행하는 스님 두어 명 외에는 들이지도 않았다.
  • 성철스님 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는 기워 입은 누더기 승복이다. 그러나 입적 후 그려진 탱화입상 같은 건 죄다 어째 번쩍번쩍하다(...) 심지어는 꾀죄죄한 말사였던 백련암도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포장하고 높은 누대를 쌓아 웬만한 사찰 규모로 키워버렸다. 현재는 백련암 오두막 뒤편에 스님의 좌상을 모신 커다란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 마찬가지 맥락으로 입적 당시 다비를 거창하게 하지 말고 사리를 뒤지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다비식을 거창하게 열었다. 사리도 방송 카메라 앞에서 대대적으로 수습했다. 다비식 당일에는 지상파 3사에서 모두 출동하여 다비식을 생중계할 정도였다. 이 때 이례적으로 많은 사리가 나와서 모여든 신도들도 "역시 큰스님"이라며 안도했다고 한다. 사리항목 참조. 사리탑은 해인사 경내에 있는데 상당히 현대적인 형태이다.
  •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는 성철스님을 보필했던 원택스님이 저술한 <성철스님 시봉 이야기>와, 성철스님의 딸인 불필스님의 회고록인 <영원에서 영원으로> 등이 있다. #불필스님 인터뷰
  •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있는 스님의 생가는 성철 스님이 입적한 뒤 복원해 겁외사(劫外寺)란 이름의 사찰을 창건했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지나가다 산청 즈음에서 강 건너로 보면 바로 보인다.
  • 성철 스님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성철 본인도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아들이 출가하자 아버지는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라면서 집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그물을 치도록 했다고 한다. "내가 살생하는 것이 불살생을 원칙으로 하는 석가모니에게 복수하는 것"(...)이 이유였다고. 물고기는 무슨 죄야 물론 나중에 가서 아들이 깨달음을 얻은 고명한 고승이 되신 보고 나서는 마음을 풀고, 15년 만에 강 앞에 쳐두었던 그물을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 생전에 스님과 만날 때는 독특한 조건이 필요했는데, 누구를 불문하고 부처에게 3,000배를 올려야 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어린이는 절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나머지 "스님, 다시는 백련암에 안오겠습니다. 다시 오면 제가 개새끼입니다."라고 내뱉어 버렸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화내기는커녕, 그 어린이가 간 뒤 "그래도 그 놈 대단하다. 지 할 소리는 다 하고 갔제."라며 감탄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그 어린이가 부모님 손에 이끌려 백련암에 다시 오자 "니 그때 안 온다던 그 개새끼 아이가?"라며 반갑게 맞이했다고. 어린이를 대단히 좋아해서 격의없이 함께 신나는 장난을 칠 때가 많았다고 한다.
  • 제자인 원택 스님이 출가하기 전, 친구와 처음 성철 스님을 찾아갔을 때다. "좌우명 하나 얻으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성철 스님은 "절돈 3천원 내놓아라"라고 했다. 원택 스님이 주섬주섬 3천원을 꺼내자 "그 돈 말고!"란 호통이 떨어졌다. 그제야 절을 3천배 해야 준다는 말임을 깨닫고서 "스님! 출가하면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500계, 보살은 48계를 받는다고 하는데, 저희는 고작 한 말씀 얻어가는데 3천배 씩이나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니는 불교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니는 만원 내라"(만배) 했다 한다. 원택 스님은 그 첫만남에서 만배를 다 했고, "속이지 말라"는 좌우명을 얻은 뒤 그 뒤 몇번을 더 방문해 25년을 끝까지 모신 상좌가 되었다.
  •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선문답(?)도 꽤나 유명하다. (대화록이 출판되었다. 참고 : 설전 2016 / 책읽는섬 출판 )
  1. 출가하기 전에 혼인해서 딸이 1명 있는데, 훗날 이 딸도 출가해서 성철스님에게 '불필(不必)'이란 법명을 얻었다.
  2. 오랫동안 앉아서 눕지도 않았던 것을 말한다
  3. 당시 문제는 "얼마 전 입적하신 성철 스님의 몸에서 110여 과의 ( )가 나왔다." 선택지는 구슬, 다비 등등
  4. 이 때문에 학술적으로 수심결의 성립 연대는 지눌이 1198년 41세의 나이로 대해어록을 읽고 3번째 깨달음을 얻은 시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실 성철의 주장과 달리 지눌이 남긴 저술들은 정혜결사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간화선을 접한 이후의 저작물들이라는 게 정설이다.
  5. 물론 성철의 지눌 비판이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국 조계종은 다양한 수행을 하던 여러 불교 문중들이 몰리면서 생겨났기에 정체성 문제 해결이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고, 실제로 지눌의 저술에는 간화선 외 다른 선종 종파나 화엄 계통의 영향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서 성철의 곡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리고 성철이 애써 간화선으로 종단의 정체성을 잡은 조계종은 2000년대 들어서 남전불교와 염불선의 대중화와 그동안 지속되어 온 간화선 중심주의에 대한 학계/승가/재가자들의 비판 등으로 성철이 꿈꾸던 방향과는 반대로 가고 있고, 오히려 "간화선의 위기다"라는 말이 나오는 실정이다.
  6. 그리고 선종 자체가 좋든 싫든 화엄종보다 나중 나타난 후발주자인데다 원래부터 사상/교학 등의 측면에서는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은 종파다.
  7. 성철이 임제종의 간화선을 조계종의 정체성으로 놓은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는 당시 한국 주류 선승들의 생각이던 간화선=정통불교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고, 전술하였듯 이는 실제 불교사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8. 다만 이는 비슷한 시기 중국성리학이 관학을 차지하면서 불교에 대한 취급이 영 좋지 좋지 않은 편이었기에, 비슷한 문제현상을 보인다.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경우에도 여진족 자체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고 중시한지라, 중국 전래의 종파들은 생각만큼 잘 나가진 않았다.
  9. 단순히 세속화된 종교의 내부 갈등이라고 단순화시킬 순 없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사실과 정치권력, 그리고 종단 내부의 인맥과 이권까지 얽히고 섥혀 있다. 지금도 잊을 만 하면 터져나오는 조계종 내부의 각종 분란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시절까지 연결된다. 조계종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