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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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 | → | 쉰들러 리스트 | → | 포레스트 검프 |
1998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 100대 영화 9위 선정
2007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 100대 영화 8위 재선정
IMDB 탑 250에서 5위[1]. 로튼 토마토 97% LIKE의 명작.
"탈무드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더 살릴 수 있었어, 더 살릴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좀 더 구할 수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할 수도……."
"당신 덕분에 천백 명이 살았어요. 보세요."
"돈을 좀 더 벌었더라면……. 난, 난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네. 자넨 상상도 못해. 내가 만약……."
"사장님 덕에 많은 후손이 태어날 겁니다."
"충분하지 못 했어."
"그 이상을 하셨어요."
"이 차, 괴트가 사줬을 텐데……. 왜 팔지 않았을까? 열 명은 더 구했을 텐데……. 열 명, 열 명이나 말이야……! 이 핀[2]은 두 명……! 이건 금이니까 두 명은 구했을 거야. 아니, 적어도, 한 명은 더 구했을 거야……. 한 사람……! 한 사람은 더 구했을 거라고…. 한 명은 더……. 한 사람을 말이야. 슈텐, 이거 하나로……! 더 구할 수 있었는데……! 내가 안 한 거야! 내가……!"
영화 말미, 종전날 밤에 이슈자크 슈텐과의 대화중 쉰들러의 절규.[3][4]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리엄 니슨 주연의 전쟁 휴먼 드라마 영화이다. 1993년에 개봉했다.
제목 "쉰들러 리스트"는 주인공 쉰들러가 유대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서 작성했다는 명단 아홉 개에서 따왔고, 자기 이익을 위해 유대인들을 고용했던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1,100여 명[5]의 유대인들을 구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룬 대작이다.
1 원작 소설
원작은 호주 작가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가 쉰들러의 일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이다. 로스엔젤레스의 베벌리 힐스에서 가죽제품 사업을 하던 리어폴드 페퍼버그(Leopold Pfefferberg)가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했다. 페퍼버그는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쉰들러 유대인(Schindlerjuden)' 중 한 사람이었고, 쉰들러의 이야기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 그에 대해 알리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페퍼버그는 가게에 온 토머스 케닐리에게 쉰들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케닐리는 쉰들러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소설화 작업에 착수했다. 소설은 1982년 출간되었다. 한국에는 영화가 개봉한 1994년경에 영화 제목인 "쉰들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고, 2014년 현재 모든 판본이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다.
2 판권 구매부터 제작까지
스티븐 스필버그는 우연히 '쉰들러의 방주'를 읽게 되었고, 큰 감명을 받았다. 스필버그는 1983년에 바로 유니버설을 통해 판권을 사들였고, 리어폴드 패퍼버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당시 언제 영화를 만들 것이냐는 페퍼버그의 질문에 스필버그는 10년 후에 만들겠다고 했단다... 영화는 1993년에 개봉했다.
스필버그를 중심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려 시도가 많았다. 영화 제작을 위해 여러 사람을 거쳐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스필버그 본인은 감독직에는 아무래도 부담감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다른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려고 했다. 고심 끝에 스필버그는 마틴 스콜세지에게 연출을 맡기려고 했는데, 스콜세지는 이탈리아계인 자신보다 유대계 감독이 연출해야 할 프로젝트라며 거절했다. 이후 어머니를 홀로코스트로 잃은 로만 폴란스키에게 연출을 부탁했지만, 폴란스키는 스필버그와는 달리 본인이 직접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이라서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내게는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라며 객관적인 연출이 불가능할 것 같다며 거부했다.[6] 마지막으로 스필버그는 빌리 와일더를 찾아갔고, 와일더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를 원했다.[7] 하지만 와일더는 스필버그에게 직접 메가폰을 잡으라고 독려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다. 무엇보다 스필버그가 직접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짓을 저지르는 네오나치들에 대해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걸 보고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스스로 영화를 만든 것.
3 제작과정
감독과 배급사 양쪽에서 걱정을 굉장히 많이 했다. 일단 스필버그 본인이 촬영 기간 내내 심각한 멘붕을 겪었다.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전까지 글자로만 홀로코스트를 알고 있던 스필버그는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 사건의 심각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고, 어렸을 때부터 시달려온 유대인으로서의 위치와 정체성 문제가 겹치면서 이성을 유지한 상태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에 엑스트라 중 누군가 밤 10시 30분에 칼퇴근해야겠다고 투덜거리자 뛰쳐나와 누가 그랬냐고 불같이 화를 냈을 정도로 히스테릭해지고, 절친한 친구인 로빈 윌리엄스에게 전화해서 날마다 나를 좀 즐겁게 해주게! 제발…….이라는 식으로 하소연했다고 한다.로빈 윌리엄스은 뭔 죄 스필버그의 아내[8]와 아이들과 부모님까지 촬영장에 함께 있었고 심지어는 랍비까지 한 명 대동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드라마 '세인필드' 방영분 VHS를 미국에서 폴란드로 수시로 배송했다고 한다.
진작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낀 배급사 유니버설은 이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으로 딱 하나를 내걸었다. 쉰들러 리스트 찍기 전에 쥬라기 공원부터 끝내라. 사장은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면 쥬라기 공원은 못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1992년 8월 쥬라기 공원의 촬영을 시작해 11월에 촬영을 끝냈고, 임시편집본은 촬영이 끝난 지 1주만에 나왔다. 이게 다 끝나고 나서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은 다음 해 3월에 시작되었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상당히 바뀐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예지력 상승.
94.03.27-정성일-쉰들러 리스트 정은임 라디오 #2
배급사에 문제가 된 또 하나는 바로 흑백 촬영. 컬러 영화가 당연해진 시기에 흑백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희한한 요청이었다. 일단 흑백으로 극장 개봉까지는 받아준 것 같은데, 사장이 돈을 더 벌어볼 생각으로 '영화를 컬러로 찍어서 나중에 VHS 발매할 때 컬러 버전도 내보자.'는 식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거절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게 현장에서 아무도 흑백 영화 촬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컬러 영화를 찍던 식으로 세트를 만들면 면과 면의 명암차가 크지 않아서 화면이 뭉개진다든지 하는 문제들을 사전에 발견한 제작진은 인위적으로 페인트를 칠해 세트의 명암을 조절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 영화의 흑백 부분에서 유일하게 색이 칠해진 것은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Girl in the Red Coat) 하나뿐으로, 개봉 후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맨 처음 컬러로 진행되다가 흑백으로 바뀌며 본 내용이 시작되고, 맨 마지막에 시점이 현재로 바뀌며 다시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기법도 고전적이지만[9] 관객에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장치다. 이런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 희한한 흑백 영상을 함께 만들어낸 촬영감독 야누쉬 카민스키(Janusz Kamiński)[10]는 이후 나온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지금도 일하고 있다.
당시 뉴스위크 지 보도에 따르면 전부 폴란드에서 찍었다고 하는데 촬영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스필버그를 알아본 폴란드 노인이 촬영현장에 다가오더니만 스필버그를 죽일듯이 쳐다보며 "나는 히틀러 새끼가 싫지만, 유대인은 더 싫어. 왜냐면 네놈들은 히틀러는 악마, 유대인은 불쌍한 버러지. 이 따위로 떠벌리는 영화나 찍고 자빠졌잖아? 그렇게 너희는 언제나 자기들 유대인만 가엾다고 생각한다고! 당장 나가! 구역질 나는 놈들아!"라며 마구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 말에 스필버그는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배우인 리암 니슨이 화를 내면서 반론했지만 끝내 노인을 억지로 떼어내야 했다고 한다. 아직도 반유대주의가 잔존해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4 흥행 및 비평
스필버그는 이 영화가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과는 예지력이 주것슴다 --;; 엄청나게 호의적인 비평 속에서 예산의 10배를 거둬들이며 스필버그에게 아카데미를 안겨준 영화가 되었다. 그전까지 스필버그를 상업 영화 만드는 감독으로 낮춰보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시작으로 스필버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개봉 첫 날 표가 매진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우리나라도 이 영화와 관련된 특이한 기록을 하나 세웠는데, 쥬라기 공원보다 이 영화가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한다. 다만 이것은 확실치 않다. 당시 서울 관객 집계에서 쥬라기 공원은 106만 관객이 관람했지만, 쉰들러 리스트는 84만 7천 명으로 나와 있다. 전국 관객에서 앞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2000년 초반부터야 전국 관객 집계가 이뤄진 탓에 자세한 전국 관객 집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배급사인 UIP 한국 지사가 이렇게 주장했기 때문(알다시피 쥬라기 공원이나 쉰들러 리스트 모두 UIP에서 직배)인데 배급사가 멋대로 부풀리던 것도 허다하므로 이게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극장 개봉 당시, 영화 앞뒤의 나레이션 자막(번역 자막 말고)을 모조리 한글로 바꿔 넣을 정도로 배급에 공을 많이 들였다. VHS 출시본까지는 이 한글화가 살아있었지만 이후 TV 방영 시에는 원래의 영어 자막 버전이 나왔다.
5 유대인의 피해의식?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고, 스필버그가 유대인이라서 그런지 유대버그라면서 까거나 유대인의 피해의식이라 반응하기도 하는데, 유대인들의 피해를 다뤘다기보다는 휴머니즘과 나치의 폭력이 주제로 다뤘다는 반론이 있다.
실제로 비평가에 따라서는 이 영화는 유대인보다는 나치의 폭력성에 더 중점을 뒀다고도 말한다. 영화 안에서 쉰들러는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나치에게 사악함을 느꼈을 뿐이라는 것. 실제로 쉰들러는 후반까지 공장의 유대인들과는 그다지 교류를 하지않고, 나치의 고위층과 더 교류를 한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딱히 유대인들이 착하다거나 하는 묘사는 없다. 그보다는 나치의 폭력을 보여줄 뿐. [11]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에 앞서 제3제국이 천인공노할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이를 유대인의 피해의식으로 치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미국 영화들이 유대인에 유리한 것도 사실이고 너무 유대인의 피해만 많이 영화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홀로코스트를 다뤘다고 유대인의 피해의식이라는 것은 편견이다. 똑같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라도 나치의 폭력을 이 영화만큼 그대로 다룬 작품도 그리 흔하지 않다. 영화로는 피아니스트, 만화로는 쥐 정도뿐.
또한, 스필버그의 다른 영화 뮌헨을 보면 스필버그는 적어도 피해의식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6 논란거리
영화사에 남을만한 작품이지만 당시 일부 영화계층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바로 수용소 가스 장면 때문인데 이 장면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서스펜스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기능의 하나인 카타르시스와 이 영화와 같은 역사적인 고증으로 슬픔을 이루는 작품의 경우에 드러나야 하는 고발성이 서로 상충하여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할 쉰들러 유대인들이 행정착오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던 사실 자체는 실제로 있었고, 이들은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쉰들러가 협상을 통해 구해냈다. 단,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자로 분류되어 아우슈비츠로 갔었기에 가스실에 들어간 게 아니라 진짜로 소독 처리를 받고 막사에 수용됐으며, 영화에서처럼 가스실로 끌려 가는 사람들과 교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영화에서는 끌려갔던 쉰들러 유대인들만 구해낸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들 외에도 노동수용소에 있던 건강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유대인 150명 정도를 노동자 파견 명목으로 더 구해냈다. 그러나 이렇게 추가로 구한 유대인들은 쉰들러 유대인들보다 영양상태가 매우 나빴던 탓에, 아우슈비츠에서 쉰들러의 공장으로 오는 동안 열차 안에서 7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수용소장 볼드모트아몬 괴트 SS소령의 최후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는 "Heil Hitler"라고 외치며 죽었지만, 이것은 허구다. 재판 내내 자신의 죄를 죽은 하인리히 힘러 장군이나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에게 몰아세우고 이어 자신의 죄가 들통 나자 "사실 어린 자식들과 아내가 있었어. 나 죽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라면서 니가 죽인 사람들 가족들은? 변명만 하였다. 사형도 영화에서처럼 바로 집행되지 않고 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세 번째에서야 제대로 매달려 죽는다. 유튜브에 영상이 있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주의를 요한다.
7 기타
톰 행크스와 함께 자타공인 할리우드의 네임드 밀덕인 스필버그의 작품인 만큼 고증도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다만 한가지 고증오류로 영화 초반 폴란드 거리를 행군하는 독일군 사이에서 MG42를 들고 있는 군인이 나온다. 물론 마이웨이에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MG34와는 달리 MG42/3이 2010년대까지 현역으로 사용된 만큼 MG34의 레플리카보다 구하기 더 쉬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영화 중반에 아몬 괴트 휘하의 SS 부대가 게토를 쓸어버릴 때 독일군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버젓이 MG34가 거치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 레스토랑씬에서 오스카 쉰들러가 SS 장교들과 한창 친목질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들 장교의 소매부분을 잘 보면 SS 특유의 커프 타이틀 위에 "SD"라고 적힌 패치가 붙어 있는데, SD(Sicherheits dienst의 약칭, 보안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제국중앙보안성(RSHA) 소속이다. 자세한 것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항목 참조. 또한 장교들과 부르는 노래 중에 '즐거운 방랑자'라는 노래도 나오는데 이 역시 고증오류.[12]
여느 2차대전 영화처럼 본 영화의 주요 악역도 당연히 독일군이나,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SS와 비교해서 깨끗했던 독일 국방군이라는 이미지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인지[13] 작중 친위대의 행적과 비교하면 국방군은 정말로 깨끗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서 작중 친위대는 실제로도 그랬지만 지나가는 유대인들을 둘러싸고 조롱하거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거나 사냥하고 학대하는 등 천하의 개쌍놈들로 나오지만, 국방군은 비중도 별로 없고 나와봤자 스쳐 가는 장면이긴 하지만 장교가 어린애들과 공원에서 공놀이까지 한다.
2004년작인 호텔 르완다와 전개가 유사하다.
- ↑ 순위는 위로 쉰들러 리스트 - 다크 나이트 - 대부 2 - 대부 1 - 그리고 쇼생크 탈출이다.
- ↑ 금으로 만든 나치당원 뱃지
- ↑ 자기 공장을 나서다가 자신이 살린 유대인들에게 탈무드 글귀가 새겨진 금반지를 선물받자 오열하며 자책한다. 참고로 이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었기 때문에 쉰들러를 너무 영웅화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 ↑ 조금 차갑게 해석해 본다면, 선행을 한 사람은 정작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그 악행을 한 사람들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살아간다고 해석 할 수 있다. 특히 쉰들러가 나중에 당한 일을 생각하면 말이다.
- ↑ 정확히는 명단에는 1,100명이 기록되어 있고 150여 명을 더 구했기 때문에 1,200여 명이 된다. 이 때문에 쉰들러의 묘비에도 1,200명이라고 적혀 있다.
- ↑ 모두 알다시피 폴란스키는 기어이 '피아니스트'로 자기 버전의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하고 만다.
- ↑ 빌리 와일더 역시 유대계로, 1933년까지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가 나치가 집권하자 미국으로 도망쳐온다.
- ↑ 인디아나 존스 2편 여주인공이다. 영화 제작이 끝나자마자 결혼하여 아직도 같이 살고 있다.
- ↑ 이미 오래전인 1939년 오즈의 마법사가 썼던 기법을 반대로 적용한 것이다.
- ↑ 폴란드에서 태어나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즉 폴란드계 미국인.
- ↑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쉰들러는 자기 일에서는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 특별히 나치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아는 사람들을 죽게 둘 수 없다"라는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고자 했던 것. 물론, 당시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것만 해도 넘치도록 대단한 것이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면서까지 1,100여 명의 사람들을 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 ↑ 독일어로는 'Mein Vater war ein Wandersmann'. VALDERI~ VALDERA~ 라는 후렴구가 유명하다. 흔히 독일민요로 착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문에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실제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곡으로 만들어졌다.
- ↑ 사실 이는 진짜 국방군이 깨끗했다기보다는 전후의 국제정세 때문에 그런 인상이 형성된 부분이 크다. 자세한 것은 독일 국방군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