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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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5)
엔니오 모리코네
(헤이트풀 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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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파일:88년 만이다!.jpg
Ennio Morricone. 1928년 11월 10일 ~

이탈리아작곡가이자 지휘자. 영화 음악 거장 중 존 윌리엄스한스 짐머하고 더불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거장[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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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력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마리오 모리코네는 재즈 트럼펫 연주자이기도 해서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아홉 살 때 이미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개인적으로 트럼펫 레슨을 받을 정도였고, 열두 살 때 공식적으로 같은 음악원에 등록해 일종의 예비 과정인 하모니 프로그램과 트럼펫 전공 본과정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 기간 동안 트럼펫 외에 작곡과 지휘도 배웠고, 특히 작곡 지도 교수였던 전위파 성향의 작곡가 고프레도 페트라시(Goffredo Petrassi)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와 전쟁의 공포를 겪으며 매우 힘들게 공부해야 했고, 이 때의 현시창 경험은 이후 영화음악가로서 작곡한 작품에도 반영되었다. 1946년에 트럼펫 전공으로 학위를 따서 졸업했지만, 작곡을 제대로 배워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해 페트라시에게 계속 배웠고, 이 기간 동안 가곡을 비롯한 소위 '순수음악'에 속하는 곡들을 작곡했다. 동시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방송음악 작/편곡으로 전후의 생활고를 타개하려고 했으며, 1954년에 작곡 학위를 따서 두 번째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인 1955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음악 분야에 뛰어들었는데, 다만 이 뉴비 시절에는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본명을 쓰지 않고 이런저런 가명을 썼다. 동시에 이탈리아 국영 방송(RAI)의 경음악단에서 트럼페터와 작/편곡가로 활동하면서 대중음악 분야의 경험도 쌓았다. 하지만 순수음악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았고, 당시 이탈리아 전위음악의 선두 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랑코 에반젤리스티가 주축이 되어 1964년에 결성한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Gruppo di Improvvisazione di Nuova Consonanza)'이라는 연주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영화음악 분야의 통속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음악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 북부독일방송에 의해 제작된 이 그룹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평소 영화음악가로만 언급되는 이 아저씨의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2분 15초부터 트럼펫으로 괴상하게(...) 즉흥 연주를 하는 모리코네와 여타 그룹 멤버들의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 모리코네는 세기를 넘긴 현재까지도 영화음악 외에 협주곡이나 오라토리오, 관현악곡, 실내악을 비롯한 '진지한' 음악도 계속 작곡하고 있으며, 영화음악의 후광에 가려있던 이들 작품도 재조명을 받고 있다.

1.2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뜨다

1964년에 동향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 감독 세르조 레오네에게 발탁되어 《황야의 무법자》의 음악을 맡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 영화음악가를 푸대접하는, 그리고 지금도 왠지 모르게 남아있는 인식 때문에 댄 새비오라는 이탈리아계 성씨이긴 하지만 영어권 거주자 느낌을 주는 가명을 써야했다. 이후에도 리오 니컬스 같은 여러 가명을 쓰기도 했다. 하여튼 이 영화음악으로 알려진 명성으로 레오네와 맺은 인연은 《황야의 결투》,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와 유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까지 이어졌다.

마카로니 웨스턴 전성시대였던 1960년대 동안에는 레오네의 영화 외에도 여타 비슷한 계열의 영화들에서도 음악을 맡았고, 그 외에 전쟁 영화나 멜로 영화, 느와르풍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엘리오 페트리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처럼 이탈리아 영화계 거장을 위한 곡들도 써줬다.[2] 음악을 잘쓰기로 유명한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영화 음악으로 실제로 모리코네의 음악을 여러번 썼으며 여러번의 간청 끝에 《장고 : 분노의 추적자》에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됐지만 모리코네는 이후에 타란티노가 자신의 음악을 쓰는 방법과 그의 영화의 폭력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는 그와 작업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 후 타란티노 감독의 후속작 헤이트풀 8에서 다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영화를 위한 테마곡도 만들었다는데, 엔니오 모리코네의 입장에서는 약 40년만에 서부 음악을 맡게된 셈.

1.3 아카데미 시상식의 불운, 그리고..

스파게티 웨스턴이 쇠퇴한 뒤에도 영화음악가로서의 명성을 발판으로 여타 할리우드 작품의 음악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엑소시스트 2》, 《햄릿》 같은 작품을 맡았다. 할리우드 진출 후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천국의 나날들》(1978)으로 시작하여, 《미션》(1986),[3]언터쳐블》(1987), 《시》(1991), 《말레나》(1971)를 후보에 올렸지만 수상에 실패하였다. 《시네마 천국》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아예 음악상 후보에도 들지 못하였다. 결국 2007년 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4]

이 점을 두고 그가 이탈리아계라서 차별한다는 소문이 계속 돌고 있다. 밑에 언급한 영화음악 거장들에서 고인인 3명 모두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받았으며(그것도 이들은 이미 1960~1970년대에 받았다.) 5번이나 받은 존 윌리엄스는 물론 모리코네의 아들 또래인 젋은 한스 짐머도 이미 30대 나이로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받았기에 이런 말이 나올만 했다. 항간에는 이러한 수상 불운이 그의 음악이 영화음악의 기능을 뛰어넘어 영화 자체보다 음악에 더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2016년 2월 28일(미국 현지시각),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헤이트풀8의 음악감독으로 드디어 88년 생애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88세이셔서 88회 때 아카데미에서 노리고 준 듯

2 기타

2007년 10월에 서울에서 내한공연을 개최하였으며, 2011년 5월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한번 내한공연을 가진다.

2007 부산국제영화제 때 주최측이 높으신 분들에게만 신경 쓰다보니 시간 없다고 폭우 속에서 우산도 없이 모리코네 부부를 끌고가다시피 하며 홀대하는 흑역사가 있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던 내한공연과 홀대를 만회하는 듯한 예우로 한국에 인상이 좋은 것 같다.##2 내한공연에 추억이 있으신지 다시 내한을 오고싶어 하는 것 같다.

2010년 LG전자의 의뢰를 받고 LG 제품 벨소리를 작곡해주었다. 그러나 벨소리만으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고...

3 대표적인 작품

메탈리카 공연 오프닝

  1. 빠삐용을 비롯하여 그렘린, 오멘, 원초적 본능, 오! 인천 같이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제리 골드스미스(1929~2004), 007 시리즈, 늑대와 춤을,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사랑의 은하수 같은 음악으로 유명한 존 베리(1933~2011), 닥터 지바고, 콰이 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모리스 자르(1924~2009) 같은 거장들도 유명했지만 이젠 모두 세상에 없기에...
  2. 특히 엘리오 페트리랑 죽이 잘 맞았는지, 페트리가 감독하고 그가 음악을 맡은 '노동 계급은 천국에 간다'이나 '완전 범죄' 사운드트랙은 지금도 모리코네 단골 레퍼토리기도 하다.
  3. 이 영화 OST에 있는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란 곡이 바로 〈Nella Fantasia〉라는 유명한 곡의 원곡이다. 90년초반 라디오 영화음악실 방송을 진행하던 성우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서도 미션 음악이 아카데미상을 놓친건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나올 정도였다.
  4.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그는 수상소감을 이탈리아어로 말했는데, 통역을 준비하지 못해 다들 뭐라는건지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오랜 동료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급히 통역을 해주었다.
  5. Ennio Morricone - City of Joy (OST from 'City of Joy')네이버 영화 - 시티 오브 조이 (City of Joy,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