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범

오서 「주치주연여범주환전(朱治朱然呂範朱桓傳)」
주치주연여범주환

呂範
(? ~ 228)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의 관료, 여거의 아버지. 자는 자형(子衡).

2 정사

여남군 세양(細陽) 출신으로 일찍부터 현의 관리로 임용되어 일하고 있었고 젊었을 적 용모와 자태가 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리로 있던 지역의 부자 유씨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장모님이 여범을 탐탁치않게 여겨 반대하였으나장모 거세게 반대라스 장인어른께서 수락하여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거 보통 반대 아닌가?

이후 수춘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때 원술의 세력 밑에 있던 손책과 만났다. 손책도 여범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고 여범 역시 손책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여범은 자신을 따르는 식객들과 함게 손책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 강도(江都)에 머무르고 있던 손책의 어머니를 맞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서주목 도겸이 이를 정탐행위로 간주하였고 즉시 여범을 체포하여 심문하였으나 여범의 식객들이 나서서 구출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무렵 손책은 이렇다할 세력없이 원술의 밑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였는데 손하(孫河)와 여범 만이 손책을 수행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게했다. 그렇기 때문에 손책은 여범을 친척이나 다름없이 대우했다.

이후 손책이 여강 토벌을 위해 나설 때 종군하였고, 원술에게서 병마를 빌려 강남지역 평정에 나섰을 때도 종군했다. 이 때 장강을 건너 횡강(橫江)·당리(當利)까지 가서 유요의 수하인 장영과 우미를 격파하였으며, 소단양(小丹楊)과 호숙(湖孰) 지역을 점령하는 공적을 세웠다. 손책은 여범의 공로를 치하하고 호숙의 상으로 임명했다. 이후 손책은 말릉(抹陵)과 곡아(曲阿)를 평정했고, 여범에게 완릉현의 현령직을 겸임하게 했다. 그리고 여범은 단양에 발호한 도적들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 도독으로 승진했다.

손책이 엄백호를 토벌하러 나섰을 때 역시 종군하였으며 손책이 엄백호의 본진을 공격하는 동안 서일(徐逸)과 함께 해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자칭 오군태수 진우(陳瑀)를 토벌하였다. 그리고 이후 태사자를 공격할 때도 참전하였고 오군 지역이 완전이 평정되자 정로중랑장에 임명되어 강하 공격에도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지는 못하였고 대신 돌아오는 길에 파양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손책이 숨을 거두자 그 뒤를 이은 손권에게 충성하였다. 사실 손책이 살아있을 적에 손권과 여범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손권은 자기가 꼴리는대로 감놔라 대추놔라 요구하였고 공금을 멋대로 사용하는 안좋은 버릇이 있었다. 다른 관료들은 그 때마다 손권의 요구를 들어주고 빵꾸난 공금을 땜질해주었다. 하지만 여범만은 항상 손책에게 사실대로 고하여 꾸중을 듣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손권을 여범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손책의 뒤를 이어 세력을 물려받고 스스로 잘잘못을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여범의 행동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중용하였다.

이후 손권이 손가의 원쑤 황조를 때려잡기 위해 강하로 출병했을 때는 장소와 함께 본국에 잔류하여 지키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조조가 적벽에 진을 치고 강동을 위협하자 주유와 함께 군을 인솔하여 조조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로로 비장군 평택태수로 임명되었으며, 평택, 시상, 역양 지역을 봉토로 받았다.

이 무렵 손권과 유비는 동맹 관계였고 유비가 손권을 만나러 왔을 때 여범은 유비를 붙잡아둬야 된다고 상주하였다. 하지만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았는데 나중에 유비가 성장하고 형주를 놓고 대립하는 사이가 되자 땅을 치고 후회하며 "그때 자형의 말을 들었어야 됐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그리고 형주공방전이 벌어져 관우를 공격하러 갈 때 여범에게 건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손권이 칭제건원을 하자 여범은 건위장군으로 임명하여 단양태수를 겸하게 했고, 관소를 건업에 두어 부주 아래 바다까지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율양, 회안, 영국을 봉토로 수여하였다.

이후 조비가 촉오동맹을 응징하기 위하여 조휴, 장료, 장패를 파견하자 여범은 서성, 전종, 손소와 함께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동구에서 조휴 등에 맞서 요격에 나섰다.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고 사람들은 물에 빠졌는데, 익사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군대를 돌렸다.
여범은 전장군으로 승진했고, 가절을 받았으며, 남창후(南昌侯)로 바꿔 봉해졌다.
승리한 전투는 아니었고 악천후로 인해 오나라 군대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위군 또한 결국 회군을 하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침략을 저지하는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고, 손권의 총애를 받는 숙장이었기에 승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범은 위엄있는 모습을 좋아하였는데 이를 반증하듯 여범이 관할하는 주에는 육손, 전공을 비롯한 대갓집 자제들이 많았는데 이들 모두 여범을 공경하고 정중하게 대하였으며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다. 더불어 여범은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항상 부지런하며 법령을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손권에 대한 변함없는 충심을 보였기 때문에 손권은 여범이 과하게 사치를 부려도 질책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신하들이 여범의 사치를 까면서 "이거 뭐 왕보다 더 사치롭게 사네요. 처벌 좀 하셔야 될 듯"이란 참소를 올리곤 했지만 그 때마다 무시했다. 더불어 엄준이 "왜 여범을 그렇게 총애하시나효? 지금 신하들 차별하시나효?"라 따지자 여범을 오한에 비견하면서 그 능력을 칭찬하여 엄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황무 7년(서기 228년), 손권은 여범을 대사마에 제수했지만 공교롭게도 대사마 인수를 받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은 크게 슬퍼했으며 여범에게 내린 대사마 인수를 거두지 않고 그대로 추증하였다.

여범의 장남이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차남 여거가 뒤를 이었다. 여거도 오에서 많은 공을 세워 표기장군까지 올랐지만 손침의 전횡에 반발하다가 모반자 낙인이 찍혀 체포되기 전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거는 멸족되어 결국 여범의 직계는 멸족당했다.

그가 손책과 대국한 바둑 기보가 오늘날까지도 현존하고 있는데, 이 기보는 현존하는 바둑 기보 중 가장 오래 된 기보이다.(손책 항목 참고) 바둑의 역사에서는 제법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책이 강남을 평정하던 시절에 여범이 잠시 등장하지만 이후로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2대에 걸쳐 손가에 충성하고 여러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연의에서 부각되는 손가의 인물은 군사분야에서는 주유, 노숙, 육손 정치 및 외교분야에서는 장소제갈근 정도(…). 더불어 정사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군을 이끌고 손가의 주요 전투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지휘관으로써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연의에서 이러한 모습은 거의 묻혔고 문관으로써의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어 삼국지연의의 피해자가 되었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연의의 영향인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여범은 장군으로 보기는 어려운 스탯이다. 그러나 최근 작부터 통솔은 보통 70은 넘기고 무력이 50대 지력,정치는 70대으로 나온다. 그냥 만능으로 굴릴수가 있다.

삼국지 1의 시나리오 1에서는 뜬금없이 원술의 부하로 설정되어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4/61/73/74. 무력이 나름 올라서 부족하게라도 장군으로 굴릴 수 있다. 연사, 투함, 매도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55/74/73/67로 특출나진 않지만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평시에는 상업,기술 특기가 있어 내정요원으로도 무난하고 전장에선 통솔 73인데 군사특기가 있는 이상 휘하에 다른 에이스급 장수가 있다면 가치가 배로 뛰어오른다.

삼국지 11에서는 전작과 능력치는 비슷한데 특기가 조선... 안습

삼국지 12의 전법은 방어약화에 병종이 궁병이란지 좀 쓸만하다.

여담으로 아내인 유씨가 진삼국무쌍 블라스트에 참전 하였다. 정작 본인은 나오지도 못했는데... 아니 나오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