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독일연방공화국 총선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이후 실시된 연방하원 선거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 문서이다.

1 초대 총선

1949년 8월 14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독일당사회민주당바이에른당공산당기타
139석(115석+24석)52석17석131석17석15석31석

2차 대전 종전 이후 처음 수립될 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각 주에서 5% 이상 씩 득표한 정당에 의석을 배분했기 때문에, 지역 정당이나 군소정당 후보도 당선되었고 무소속 당선자도 있었다.
당초 쿠르트 슈마허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됐지만,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1]과 기독교민주연합 소속의 관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주도한 경제개혁에 힘입어서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이 원내 1당의 자리를 차지한다.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이 자유민주당, 독일당과 연정을 이루는데 성공하였고[2] 초대 연방 대통령으로는 자유민주당의 테오도르 호이스가, 총리로는 기독교민주연합의 콘라트 아데나워가 선출된다. 이렇게 구성된 초대 연방하원에게는 신생 서독의 민주주의 정착[3]과 경제 회복 및 국제 지위 상승이라는 어려운 임무가 맡겨졌다.
이 선거 이후 독일공산당은 위헌 판정을 받아서 사라진다. 안습

2 제 2대 총선

1953년 9월 6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독일당사회민주당전후이주자연합[4]중앙당
249석(197석+52석)53석15석162석27석3석

초대 총선에서 각 주 별로 5% 이상 득표한 정당에게 의석을 배분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적으로 5%를 득표한 정당에게만 의석을 배분하는 걸로 바꾸었다.[5][6]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에 고취된 독일 국민들은 기독교민주/사회연합에게 다시 한 번 압도적인 대승을 안겨주었다. 호이스와 아데나워는 연방 대통령과 총리로 재선출된다. 사회민주당 망했어요

이 총선 이후 독일이 연합군으로부터 실질적인 주권을 모두 회복함에 따라 연방하원은 좀 더 많은 책무를 지니게 됐다. 2대 연방하원이 이룬 주요 업적은 로마 조약을 통해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설 및 연방군 건설을 통한 서독 재무장 등이 있다.

3 제 3대 총선

1957년 9월 15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독일당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277석(222석+55석)17석181석43석

시간이 지날수록 군소정당이 줄어드는 것이 보이는가?
독일의 경제 성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이러한 경제 성장에 매우 만족했고,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다시 한 번 표를 던졌다. 결과는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의 압승.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립 이후, 총선에서 특정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데나워는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사실 기독교민주연합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 했던지 총선 당시에 독일당을 밀어주었고[7],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음에도 독일당과 연정을 꾸렸다. 계속된 콩라인선거패배에서 활로를 찾기 시작한 사회민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 정당에서 사민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한편 1959년에 테오도르 호이스가 대통령 3선을 포기함에 따라, 하인리히 뤼프케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4 제 4대 총선

1961년 9월 17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
251석(201석+50석)67석203석

이 때부터 독일 연방 하원은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만이 당선자를 내는 상황이 1980년 총선까지 이어진다. 1957년 총선에서 독일당이 후보를 낸 지역구에는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독일당을 지원했던 기독교민주연합은 단독 과반수 획득에 자신감을 얻어 독일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기독교민주연합의 도움 없이는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 할 것이 뻔한 독일당은 총선에 불참해버린다.[8] 그리고 상상도 못 한 일이...[9]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를 무렵 베를린 장벽이 동독 당국에 의해 세워진다.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가 의연한 대처로 독일 국민 사이에서 인기를 크게 높였던 것과 달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여서 인기를 크게 잃는다. 이를 기회로 빌리 브란트는 야심차게 총리직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석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지난 1957년의 선거와 비교해서 사회민주당은 20석 가량을 더 얻었고 기독교민주연합은 20석 가량을 잃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기독교민주연합의 패배라고도 볼 수 있는 선거였다.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의 단독과반은 붕괴됐고, 아데나워는 다시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정국에서 자유민주당의 입김이 커진 것은 당연지사. 이 때 이미 85세의 고령이었던 아데나워는 결국 2년안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줄 것은 약속해야만 했다.[10]

1962년 국방장관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11]가 언론사 슈피겔을 상대로 벌인 언론탄압[12] 사건이 특히 유명한데, 이 사건을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로, 살인의 공소시효를 놓고 의회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5 제 5대 총선

1965년 9월 19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251석217석50석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빌리 브란트의 대결에서, 독일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에르하르트의 손을 들어줬다. 50년대 고도성장의 기적을 이끈 에르하르트가 독일을 더더욱 번영시킬 것이라는 신뢰를 보내주었던 것. 덧붙여서 에르하르트의 소득세 절감과 사회복지 확대 공약도 승리에 한 몫 했다. 하지만 기민당 내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전임 총리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의 발목을 집요하게 잡은 데다가, 1966년 예산문제를 놓고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반발해 내각에서 총사퇴하자 에르하르트는 총리직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에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기민당의 총재에 오른 쿠르트 키징어가 선택한 연정 파트너는 놀랍게도 사민당.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이루어진 케이스이다.

6 제 6대 총선

1969년 9월 28일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기독교민주/사회연합
237석31석250석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 문제를 놓고 사민당과 기민당은 격렬한 충돌을 빚었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와의 외교 방안을 놓고도 대립을 빚게 된다. 1961년, 1965년에 이어 세번째로 총리직에 도전한 빌리 브란트는 68 혁명의 시대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큰 호응을 얻게 되고, 4년전의 총선보다도 20석 가량을 더 얻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원내 제 1당은 기민당이었다.[13]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브란트는 놀라운 협상력을 발휘해서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의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사회민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반대로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밀려나게 된다.

7 제 7대 총선

1972년 11월 19일[14]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기독교민주/사회연합
242석42석234석

새로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콘라트 아데나워가 기초를 다진 서독의 외교정책인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동방정책을 내세우면서 많은 논란을 빚게 된다. 이중에서도 가장 결정타는 2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의 영토였던 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을 사실상 포기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외교노선은 연정 파트너 자민당은 물론이거니와 사민당 안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수의 자민당 의원과 사민당 의원들이 탈당하여 기민당으로 소속을 옮기는 사태까지 이루어진다. 이에 1972년 4월 기민당은 내각불신임결의를 통해 브란트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행했지만 단 2표가 모자라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브란트의 의회 장악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명확했기에 브란트 역시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다. 전 국가적 행사였던 1972 뮌헨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여당인 사민당을 움직여 셀프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것. 이후 브란트는 의회 해산을 대통령에게 요청하고, 의회가 해산됨에 따라 총선이 한 해 앞당겨져 열리게 됐다.

기민당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경제정책을 맹비난하면서 승리를 자신했지만, 뚜껑을 열고보니 사민당의 압승이었다. 68혁명 이후 대동단결한 좌파지식인과 학생운동가들의 힘이 대폭발한 것. 덧붙여서 중도성향의 시민들도 1971년 빌리 브란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전반적으로 빌리 브란트 정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사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15] 이 총선 이후 브란트는 연임에 성공했지만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터진 귄터 기욤 사건으로 수상직에서 사임하게 되고 헬무트 슈미트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편 기민당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나 42세의 젊은 정치인 헬무트 콜이 당수직에 오르게 된다.

8 제 8대 총선

1976년 10월 3일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기독교민주/사회연합
224석40석254석

빌리 브란트와 달리 새로 독일의 수상이 된 헬무트 슈미트는 비교적으로 우파적인 성향을 지녀서 연정파트너인 자민당과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 즉 사민당과 자민당 사이의 연정이 틀어질 요소가 적었다는 의미이다. 헬무트 콜의 지도하에 기민당은 49%의 원내 좌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지만, 이 1%가 부족하여 아쉽게 여당자리에 복귀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9 제 9대 총선

1980년 10월 5일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기독교민주/사회연합
228석54석237석

슈미트는 3선에 도전했고 기민당 측에서는 바이에른의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총리 지명자로 등장했다. 슈트라우스는 기사당 출신이었는데, 기민당이 아니라 기사당 출신이 총리후보로 나선 것은 이 때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62년 슈피겔 지가 국방부의 비리에 대해 폭로하자, 슈피겔 편집인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하였던 전례에서 보이듯이 정치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이는 그의 열렬한 표밭이던 바이에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했다.[16] 결국 기민당은 4년전에 비해 무려 26석을 잃는 대참패를 당하며 이번에도 데꿀멍해야 했다.[17]

하지만 이렇게 수립된 슈미트 내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982년 슈미트 내각은 부자 증세를 놓고 연정파트너였던 자민당과 대충돌을 빚는다. 그리고 이 틈을 기민당이 놓치지 않았다. 기민당은 자민당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1982년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슈미트 내각은 붕괴한다. 슈미트 내각의 후임으로 의회에서 선출된 사람은 바로 기민당의 당수 헬무트 콜.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1979년 창당한 녹색당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해서 1.5%를 득표했다.[18]

10 제 10대 총선

1983년 3월 6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녹색당
255석35석202석28석

환경문제를 들고 나온 녹색당이 급부상한 총선이었다. 녹색당의 부상은 사민당으로써는 뼈아픈 점이었는데, 녹색당이 전통적인 사민당의 지지층을 상당부분 흡수했기 때문. 덧붙여서 녹색당은 1961년의 총선 이후 20년만에 원내 진출에 성공한 기민/사민/자민당 이외의 정당이다. 한편 선거는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11 제 11대 총선

1987년 1월 25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녹색당
234석48석193석44석

전년도였던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덕에 녹색당이 다시 한 번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 선거를 기점으로 녹색당은 전국 차원의 정당으로 확실히 안착하게 된다. 제2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당 내의 계파 싸움과 녹색당의 표 잠식으로 인해 이번에도 기독교민주/사회연합에게 힘없이 여당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기독교민주연합 역시 지난 선거와 비교해서 원내 의석을 꽤 많이 잃었지만, 잃은 표의 상당 부분이 자유민주당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에 재집권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러한 의석수 양도는 연정 파트너 자유민주당이 녹색당에게 밀려서 그 세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기독교민주연합이 의도적으로 유도[19]한 부분이기도 하다.

12 제 12대 총선

1990년 12월 2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민주사회당동맹 90/녹색당
319석79석239석17석8석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총선이다.[20] 전통적으로 동독지역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사회민주당의 아성과 같은 곳이었고, 실제로도 처음 여론 조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앞서나갔다. 하지만 기독교민주연합 측이 통일의 조속한 시행과 화폐교환비 1:1 지정과 같은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기독교민주/사회연합과 자유민주당이 도합해 원내 좌석의 60%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어서 헬무트 콜의 3선이 성공한다.

한편, 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과 "모두가 통일을 얘기한다. 우리는 환경을 얘기한다."던 녹색당은 봉쇄조항을 넘지 못 했다.[21] 원래대로라면 의석을 배분받지 못 할 상황이었으나, 이번 선거에선 동독 지역에서 5%를 넘는 정당에 의석 배분이 가능하도록 하여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22]

13 제 13대 총선

1994년 10월 16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동맹 90/녹색당민주사회당
294석47석252석49석30석

통일 이후 최악으로 치닫던 경제상황으로 인해 기민당과 헬무트 콜에게 독일인들이 보냈던 지지는 빠르게 식어버렸다. 그렇지만 헬무트 콜은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기민당의 원내 1당 자리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고, 다시 한 번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4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90년의 총선과 비교해서 기민/자민당의 연정의 위상은 곤두박질쳤기에 어디까지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한편 녹색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정권에 참여할 의사[23]를 밝혔고, 실제로도 49석을 차지하면서 선방했지만 아쉽게도 내각 참여는 무산되고 만다. 한편 민주사회당의 경우 5% 미만의 득표율을 얻어서 원래대로라면 원내진입이 무산될 처지였지만, 다행히도 지역구에서 4석을 차지하면서 기사회생[24]할 수 있었다.

14 제 14대 총선

1998년 9월 27일
사회민주당동맹 90/녹색당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민주사회당
298석47석245석43석36석

1998년 시점에서 독일의 경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실업률은 10%에 근접해갔고 많은 이들은 헬무트 콜 정부와 여당이었던 기민/자민당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에 98년 총선을 앞두고 헬무트 콜이 총리직에 출마하지 않고 볼프강 쇼이블레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이러한 소문을 비웃기라고 하듯이 98년 4월 헬무트 콜은 5선 도전을 선언했다. 한편 사민당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여론조사에서는 기민+자민 연합과 사민+녹색 연합이 오차범위 내의 접전인 것으로 보였지만 개표결과는 좌파정당의 압승[25] 이었고,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정으로 게르하르트 슈리더가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헬무트 콜은 16년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한편 민주사회당은 처음으로 봉쇄조항을 충족하면서 당당하게 의회에 진출하게 된다.[26]

15 제 15대 총선

2002년 9월 22일
사회민주당동맹 90/녹색당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민주사회당
251석55석248석47석2석

지난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헬무트 콜을 '실업 총리'라고 부르면서 경제 문제에 화력을 집중하여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슈뢰더의 집권 후 4년이 지난 2002년의 총선에서 경제 문제는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여전한 불황과 유로화의 도입으로 인한 혼란등에 대해 기민당이 맹폭을 가했던 것. 하지만 슈뢰더 내각은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대중의 지지를 어느 부분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선거 결과, 양측이 초접전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나마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신승을 거두었고 슈뢰더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난 선거에서 동독 지역 만의 득표로 봉쇄조항을 충족했던 민주사회당은 이번 선거에서 동독 지역의 유권자들이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바람에 봉쇄조항을 넘지 못 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지역구 당선자도 2명 뿐이라 봉쇄조항[27]의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 하여, 정당명부 당선자가 단 한 명도 없이 지역구 당선자 2명 만으로 연방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민주사회당은 구 서독 지역 내 세력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구 서독 지역의 파트너를 찾게 되었고 2005년에 사회민주당 탈당파가 조직한 좌파당과 연대하게 되었다.

16 제 16대 총선

2005년 9월 18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좌파당/민주사회당[28]동맹 90/녹색당
226석222석61석54석51석

2003년 무렵부터 슈뢰더가 감행한 복지 및 연금 개혁은 슈뢰더 내각의 인기를 축소[29]시켰고, 2005년 지방 선거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이 기민당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전통적으로 사민당의 아성이었던 이 지역이 기민당에게 넘어간 것은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고, 슈뢰더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내각불신임결의을 통과시켜 총선을 조기에 치르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기민당이 슈뢰더의 맞상대로 지명한 인물은 앙겔라 메르켈.

선거운동 초기에 사민당의 인기는 바닥을 기었지만 9월 4일 펼쳐진 슈뢰더와 메르켈의 생중계 토론에서 슈뢰더가 메르켈을 박살낸 이후로 양상이 급반전되어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지율은 오차 범위 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투표 결과도 그러했다. 기민당과 자민당이 도합해서 47% 가량의 득표를 거두었고, 사민당과 녹색당이 도합해 43% 정도의 득표를 거두었다. 즉, 전통적인 연정 구성으로는 어느 쪽도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오랜 불황에 실망한 구 동독 지역이 구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민주사회당에게 막대한 지지[30]를 보낸 것에서 기인했다.[31]

메르켈과 슈뢰더 모두가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는 대혼돈의 상황. 사실 사민당은 기존의 연정 파트너 녹색당에다가 같은 좌익 계열의 좌파당까지 연정에 포함시켜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총리 슈뢰더와 좌파당 당수 오스카 라퐁텐의 사이가 원쑤[32](...)였다는 것. 그렇다고 기민당이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는 좌파당과 연정파트너를 맺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민/사민/자민/녹색당이 협상에 협상을 거듭한 가운데 마침내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에 오르는 것을 조건으로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이루어진다. 1969년 키징어 내각 이후 무려 36년만에 세워진 대연정 내각이었다.

17 제 17대 총선

2009년 9월 27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좌파당동맹 90/녹색당
239석93석146석76석68석

전반적으로 지루한 선거전이 이어졌다. 양 당의 당수였던 앙겔라 메르켈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언변 능력을 갖춘 정치인도 아니었을 뿐더러 기민당과 사민당이 모두 정권에 참가했던 원죄(..)가 있던 터라 상대방의 실정에 대한 일방적인 공세가 힘들었기 때문. 연대책임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민당의 현상 유지 / 사민당의 몰락 / 군소정당의 약진.' 특히나 사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역대 최저 득표율을 받는 굴욕[33]을 감내해야만 했다. 또한 비록 원내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또다른 대안정당으로 해적당이 등장하여 꽤나 인기를 끌기도 했던 선거였다.[34]

18 제 18대 총선

2013년 9월 22일
기독교민주/사회연합사회민주당좌파당동맹 90/녹색당
311석193석64석63석
자세한 내용은 제18대 독일 연방하원 총선거 항목을 참고.
  1. 서독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측이 의도적으로 기독교민주/사회연합을 밀어준 감도 없지 않아 있다.
  2. 처음에는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상했지만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쿠르트 슈마허가 강경하게 기독교민주/사회연합과의 대연정을 거부한데다가, 아데나워 본인도 사회민주당과의 불편한 동거보다는 중도우파계열이었던 자유민주당, 독일당을 더 선호했다.
  3. 바이마르 공화국의 황금기 5~ 6년을 제외하고는 독일에서는 이 때까지 제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4.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출신의 실향민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5. 제2대 총선이후 일부 지역에 만 출마하면서 봉쇄조항을 충족(5%이상 득표)하는 정당은 기독교사회연합이 유일하다.
  6. 다만 독일당과 중앙당은 지역구 당선자가 있어서 정당 명부 의석을 얻었는데, 이 때 중앙당은 지역구 당선자 1석에 정당 명부 2석을 얻었다.창조한국당? 봉쇄조항에 지역구 3석 이상이라는 조항은 제2대 총선 이후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7. 독일당이 후보를 낸 곳에는 기독교민주연합이 후보를 내지 않았다.
  8. 독일당은 이후 지방선거에서도 점점 밀리다가, 1964년에 그 때까지 남아있던 브레멘 주 의원 4명을 주축으로 독일국가민족당이라는 극우정당을 창당해버린다. 당시 주 의원 4명 중 1명이 당 대표를 맡았으니 연방 내각에도 참여하던 독일당이 이렇게까지 몰락한 것이다. 그 뒤에도 1970년대 이후 지방의회에서도 전멸했다가, 지금은 몇몇 지방의회에서 당선자를 내는 수준이나, 그마저도 어느 정당도 연정파트너로 삼지 않는 왕따 신세.
  9. 아울러 이 선거부터 자유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전멸하고 정당명부로 만 당선자를 내는 상황이 이어져 오다가 2013년 총선에서 5%를 확보하지 못 하면서 전멸(...).
  10.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무척 싫어해서 어떻게든 에르하르트가 총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꼼수를 썼다. 이 둘의 악연에 대해서는 콘라트 아데나워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항목을 참조하자.
  11. 기독교사회연합 소속이다.
  12. 국방부의 비리 스캔들에 관해 슈피겔이 폭로하자,슈피겔의 편집진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해버렸다.
  13. 서독의 정치구조상 뾰족한 수가 없기도 했다. 바이에른을 비롯하여 바덴-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와 같은 남부일대는 기민당의 표밭 그 자체였다. 전통적인 사민당의 표밭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을 제외하면 동독으로 넘어가 버렸고....
  14. 보면 알겠지만 3년만에 이루어진 조기 총선이었다. 조기 총선이 이루어진 이유는 밑의 내용을 참조.
  15. 1949년 이후 최초하는 건 나치 독일 이전에 만년 원내 제1당이었기 때문이다.
  16. 신사적이고 온건했던 슈미트의 행동거지와 달리 슈트라우스는 거친 막말로 정적들을 공격하곤 했다.
  17. 결국 1980년의 총선 이후 슈트라우스는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기민당의 헤게모니는 헬무트 콜에 의해 확실히 장악된다.
  18. 당시 기타 정당의 합계 득표율이 2%를 넘지 않았으니, 기타 정당 득표 대부분이 녹색당에게 간 것이다.
  19. 방법은 간단하다. 자당 지지자들에게 지역구는 기독교민주연합을 뽑되, 비례대표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을 지지할 것을 부탁하면 되니까.
  20. 이전 문서에 이 선거가 동독 지역이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57년 만에 실시하는 자유 선거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동독 지역 최초의 자유 선거는 1989년 동독 민주화 이후 실시된 총선이다.
  21. 동독 지역에선 5%를 초과했으나, 동서독을 합친 전체 득표율이 5%를 넘지 못 했다.
  22. 이 때 동독 지역 녹색당은 구 동독의 정치연대였던 동맹90과 선거연대했고, 이후 동맹90이 동서독의 녹색당과 정식으로 합당하여 동맹90/녹색당이 된다.
  23. 다만 사민당만을 연정파트너로 수용할 것임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
  24. 득표율이 5% 미만이더라도 지역구에서 의원을 3인 이상 배출하면 득표율에 맞추어서 비례대표 좌석이 배당된다.
  25. 사회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이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자유민주당이 확보한 의석을 더한 것보다 많았다!
  26. 동독 지역에서 20%를 득표했을 뿐 서독 지역 득표율이 1%라서 문제(...).
  27. 정당득표 5% 이상, 지역구 당선자 3명 이상
  28. 이 때는 좌파당과 민주사회당이 선거연대하는 상태로, 두 당이 좌파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한 것은 2007년이다.
  29. 이 와중에 오스카 라퐁텐을 위시한 일련의 당원들이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좌파당을 결성한다.
  30. 동독 지역에선 민주사회당이 사회민주당과 맞먹을 정도로 득표했고, 서독 지역에선 민주사회당과 연대한 좌파당이 5% 가까이 득표했다.
  31. 선거연대가 승리함으로써 민주사회당은 정식으로 좌파당과 합당하여 좌파당이 된다.
  32. 오스카 라퐁텐의 탈당이 없었다면?
  33. 동독 지역에선 좌파당보다도 득표율이 낮았다. 안습
  34. 처음으로 참여한 총선에서 2%를 득표했다. 녹색당이 처음에 1.5%를 득표했던 걸 생각하면 전망이 밝아보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해적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