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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한길(金한길[1]) |
출생일 | 1953년 9월 17일 |
출생지 | 일본 도쿄 도 |
본관 | 김해 김씨 |
정당 | 국민의당 |
배우자 | 최명길(배우) |
자녀 | 2남[2] |
형제 | 형 故 김밝힘[3] 남동생 김누리[4] |
약력 | (전)제15,16,17,19대 국회의원 (전)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전)국민의당 상임선대위원장 |
1 소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 소설가. 방송에서도 잠시 활동하였고, 연기자인 최명길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
2 경력
2.1 정치인이 되기 전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5] 당수를 지낸 혁신계[6] 정치인 김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소설 '바람과 박제'로 등단하였다. 그 해 이민아와 결혼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다.[7] 이 이민 생활을 1984년 '미국일기'[8]로 써내기도 했다.
처음엔 둘 다 어렵게 살다가 곧 한국일보 미주지사에 기자로 취직하였고 이후 중앙일보 미주지사장을 지낸다. 또한 아내 이민아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1987년 이혼했다. 김한길 본인은 이에 대해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로'라고 회고했다.
이혼 직후 귀국하여 소설가, 기자, 방송인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1991년 발표한 소설 여자의 남자는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9] 1995년에 배우 최명길과 재혼,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뒀다.
나중에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를 작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었다.
2.2 정치 이력
1991년에 소설가로 성공하자 민주당에 입당해 서울 동작구 을 지구당 위원장이 되지만, 공천에서 탈락하자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으로 이적했다. 부대변인을 맡아 서울 동작을에 출마하지만 14대 총선에서 21.8%의 득표율을 얻어 3등으로 낙선했다. 그리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보복으로 공중분해 되면서 김한길의 당적도 초기화 됐다.
그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건 <김한길과 사람들>이라는 토크쇼의 진행자로 활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지금의 새누리당)의 분당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다.# 김한길 자신은 본인이 신청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최종 공천 단계까지 갔음에도 공천 신청을 취소하지 않아서 그 주장은 신뢰하기가 어렵다. 신한국당의 최종 공천 단계에서 현직 국회의원과 경선을 벌이려 했지만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가 전국구(비례대표) 영입을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됐다.
김한길 본인은 새정치국민회의의 정적이었던 신한국당에 들어가려 했다는 일화가 약점이라 생각했기에 소설가의 자질을 살려서 다른 일화를 주장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신뢰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아버지를 잡아다 고문하고 괴롭혔던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일화를 살리며 김대중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모양.
김대중 총재의 TV 방송 분야를 맡아 정권 교체에 가담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한솔그룹 조동만 부회장으로부터 1억 원에 달하는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아 여론조사에 활용하였는데, 2004년 이 사실이 드러났을 때 검찰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불기소 처분을 한 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미디어 분야를 맡아 정권 재창출에 가담한 바 있다. 참여정부 당시, 2006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내며 참여정부의 2006년 지방선거를 주도했다. 2004년 17대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동영계의 일원으로 당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 지지를 표방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당*정 분리 원칙에 소외감을 느껴 갈등이 시작되었다. 정권 말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노선으로 입장을 바꿨다.
실용주의를 주장한 정동영계 안에서 강봉균과 함께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중도파를 이끌었다. 2004년 17대 총선,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둔 전당대회에서 김근태계를 누르고 승리했기에 정동영계를 열린우리당의 최대 계파로 키우는 일에 기여했다.
원내대표 취임시 사학법 재개정 양보 의사를 밝혔으나 당내 반발을 맞아 물러섰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과의 교착 상태에서 국정 운영의 어려움에 봉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여야 원내대표였던 김한길, 이재오를 청와대로 불러 관련 여당의 양보를 권유하면서 어려움에 빠졌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당의 반발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지만 결국 승낙했다.
시간이 흘러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의원과 당대표 경선에 나섰을 때 사학법을 양보해준 건 김한길이라는 공세에 처했는데 김한길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는 편. 다만 김한길 의원 본인도 두 번의 대선에서 김대중 캠프와 노무현 캠프의 선거 전략을 총괄했던 이해찬보다 확실히 중요성이 더 떨어지는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마치 자신이 대선 승리의 주역인양 포장한다거나, 이해찬의 연대는 나쁜 담합이고 김한길의 연대는 착한 연대라는 이분법식 선거 운동을 벌였기에 딱히 선거 운동이 정당했다고 보기 어렵다.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매우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떠나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다시 민주당과 합쳐 '중도통합민주당'의 공동대표가 되었지만 중도개혁통합신당계를 이끌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대선 이후 민주당계 정당이 통합된 상태에서 정권 재창출을 이뤄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는 뜻에서 2008년 1월 6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광진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직후 초대 당대표 경선에서는 이해찬 의원에게 지역별 대의원 선거에서는 이겼으나 모바일 투표 및 현장 투표에서 2위로 밀려 낙선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4일 당대표 경선에서는 이용섭 의원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민주통합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권의 분열이 예견되던 상황에서 안철수가 이끄는 새정치연합과 '제3지대에서 통합 신당을 창당한다'는 의견에 합의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킨 뒤 안철수와 공동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세월호 대참사 정국에서 열린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광주시장 전략공천 문제로 호남의 어그로를 끌었고,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였는데도 새누리당과 거의 무승부 밖에 내지 못하는 바람에 불안한 입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 불안한 입지는 여전히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뜨거웠던 정국에서 치러진 역대 최대 규모의 재보궐선거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선거 전략의 부재와 잘못된 전략공천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새누리당에게 11:4로 완패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결국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김한길 대표는 안철수 공동대표는 대표직에 남겨두려고 했었지만 안철수 대표도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지방선거 및 7.30 재보선 항목이나 안철수/정치 항목을 참조.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였던 부친과는 달리 정치 성향이 민주당 계열 안에서는 보수 쪽에 가까운 중도온건파로 여겨지고 있으며 민주당내 중도온건파인 김한길계를 이끌었다.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에는 당내 친노 진영을 일컬어 "밀실에서 당권을 나누는 반칙 정치", "오만과 독선의 노무현 프레임" 같은 발언으로 표현하는 등 친노 진영과의 갈등을 지속해왔다. 그래서 친노 성향 지지자들에게 평이 대단히 좋지 않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한 경력이 있음에도 이제는 비노계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아이러니가 있다.
7.30 재보선 참패 이후 한동안 뉴스에 오르지 않다가, 성완종 리스트 사건 당시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아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가는 바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검찰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돈으로 다루었고, 여야 인사 모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을 받았던 성 회장이 자살하기 전날 제1야당 대표이기도 했던 김한길 의원을 냉면집에서 불러내 만날 만큼 서로 친한 사이였으니 당연히 검은 돈도 오갔을 거라 본 듯하다. 그러나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정권 실세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야권의 대표적 인사에 대해서는 의혹 수준에 머무른 이야기를 통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려 한 것은 야권 탄압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립서비스 발언에 대해 립서비스는 박 대통령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일침을 가했다. #
2015년 12월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자, 그와 공동 창업 주역이었던 김한길과 김한길계의 입장이 중요해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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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6년 1월 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기자회견문 질의응답
2월 2일, 국민의당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3월 11일, 더민주의 새로운 수장이 된 김종인 대표가 새누리당에 맞서서 현 야권이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여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야권 통합에 대해선 학을 떼는 안철수 상임대표와 심한 갈등을 겪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강수를 뒀다.# 만약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 VS 더민주 후보 VS 김한길' 이런 3자 구도로 가게 되면 그야말로 낙선은 확정이고 심하면 정계 은퇴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본인의 이해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렇듯 야권 통합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야권 통합론에 대해서 같은 입장을 펴는 천정배 공동대표, 한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최재천 의원과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만나 회동을 갖고 나오는 모습이 언론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3월 17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런데 2016년 4.13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더민주와 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8석을 얻어내는 큰 성과를 거두는 바람에 더민주와 손을 잡지 않는다면 필패한다고 역설한 그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다. 게다가 이때 더민주와 손을 잡느냐 잡지 않느냐를 놓고 안철수 측과 강한 알력 다툼을 벌였던 탓에 안철수 측과도 많이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2016년 8월 24일, 김한길 전 의원의 형인 김밝힘 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철수 의원이 빈소를 방문해 김한길 전 의원과 오랜만에 대면했다고 한다. 분위기는 많이 어색했었다고 전해진다. 민감한 정치 이야기는 삼가고 그냥 짧게 근황 이야기와 건강 관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10분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2.2.1 제2의 피닉제? 정당 분쇄기?
위에 서술되어 있지만, 최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김한길 의원의 잦은 당적 변경 이력이 화제가 되었다. 피닉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경우 소속되어 있던 정당이 당명 교체/합당 등과 같이 타의적 당적 변경이 아닌 자의적 당적 변경(탈당)만 셌을 경우 8회(무소속 포함)이고 같은 기준을 적용했을 경우 김한길 의원 역시 8회이다.
특히 2007년 열린우리당 대붕괴 시기 6개월 간 총 4개의 당적(열린우리당(2007년 2월 탈당) - '중도개혁통합신당'(2007년 5월 입당, 6월 탈당) - '중도통합민주당'(2007년 6월 입당, 8월 탈당) - 대통합민주신당(2007년 8월 입당))을 보유했던 것이# 이인제와 타이 기록(...)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김한길 의원이 당을 옮긴 이력은 다음과 같다(당명 변경이나 합당 등 타의적이 아닌 탈당 등을 통한 자의적 당적 변경엔 - -표시를 했다)
꼬마 민주당 → 통일국민당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 무소속 → 중도개혁통합신당 → 중도통합민주당 → 대통합민주신당 → 통합민주당 → 민주당 →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 국민의당
물론 진보 정당을 제외한(...) 모든 당에 소속된 적이 있는 이인제와는 달리 김한길은 (통일국민당을 제외하면) 민주당계 정당 이내에서 당적을 옮겼지만, 그 복잡한 민주당계 정당 계보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당에 몸담은 적이 있고, 특히 그 자신이 민주당계 정당의 이합집산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은 점으로 인해 더불어민주당 지지자에게 비판을 받고 있다.
2016년 3월에는 더민주의 김종인 대표가 현 야권이 하나로 뭉쳐 새누리당과 경쟁하자는 '야권 통합론'을 던지자 이에 찬성하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안철수 상임대표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천정배 공동대표와 입장을 같이하는 걸로 보여 이번에도 국민의당을 깨고(...) 다시 더민주로 컴백해 '탈당 경력'에 한 줄을 더 추가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3월15일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가 더불어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을 경우 탈당하겠다는 기사가 떴다.# 이렇게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다시 더불어민주당으로 돌아오게된다면 피닉제의 기록을 깨는 1인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정배가 야권 통합론에서 물러나고 20대 총선에서 야권 분열이 오히려 야당 쪽에 유리하게 흘러가게 되면서 애매해진 상황이 되었다. 20대 총선에 대해서 연대를 했다면 180석도 가능했을 것이라 발언했지만 주요 정치계 인사들도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 예상했던 상황에 기적처럼 야당이 제 1당이 된 것임에도 180석을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리가 먼 발언. 관련뉴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구 갑) | 통일국민당 | 22,424 (21.8%) | 낙선 (2위)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번) | 새정치국민회의 | - | 당선 | 1999.3.3 사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임명)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3번) | 새천년민주당 | - | 당선 | 2000.9.20 사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입각) |
2001 | 200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서울 구로구 을) | 새천년민주당 | 23,411 (42.8%) | 낙선 (2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구로구 을) | 열린우리당 | 48,673 (53.4%) | 당선 (1위) | 2007년 당적 변경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후 대통합민주신당 합류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광진구 갑) | 민주통합당 | 44,334 (52.1%) | 당선 (1위) |
- ↑ 우리말 이름이 매우 드물었던 세대이기도 하고, 어감 역시 순우리말 같지 않은 탓에 金漢吉이라는 한자 표기로 소개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실제로는 한자 자체가 없는 순우리말 이름이 맞다. 형제들의 이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순우리말 이름인 "밝힘", "누리"라고. 그래서 중국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표기할때, 순우리말 이름이라서, 과거 우리나라 언론이 임의로 한자 표기를 했던 金汉吉(간체)으로 표기한다.중국어 위키백과의 김한길 문서.
- ↑ 원래는 3남이지만 장남은 사망했다. 여담으로 사망한 큰아들은 전처 이민아 소생이다.
- ↑ 2016년 별세
- ↑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정치성향은 중도좌파/진보 계열로 과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으며, 이후에는 진보신당쪽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중앙대 분회장과 중앙대 독어독문학과장을 지냈다. 박사학위가 없는 진중권을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로 꼽아준게 바로 김누리 교수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유시민, 진중권과 친분이 있다고.
- ↑ 두 정당 모두 본 위키에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 ↑ 1970년대까지 진보는 지금의 발전의 뉘앙스로 통했고, 진보 세력은 보통 혁신계라고 불렀다.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의 공약에 보면 "반공계 혁신 야당 허용"이 들어있다.
- ↑ 김한길의 전 부인 이민아(1960~2012)는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장녀다. 미국에서 검사로 활동하다가 2009년에 목사가 되었다.
- ↑ 개정판의 책 이름인 '눈뜨면 없어라'가 더 유명하다.
- ↑ 대통령의 딸과 기자의 사랑 이야기인데, 소설의 주인공인 기자에게 자기 자신을 이입해 쓴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