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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 ||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1 개요
고조선의 시대적 구분 중 하나로, 국성을 따라 위씨조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자조선을 개발살내고 그 자리에 생겼다고 하는 국가의 이름. 하지만 기자조선의 실존은 불분명하며, 단군 → 기자 → 위만조선 설은 부정되고 있다.
시조인 위만은 중국 연(燕)나라 사람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사기에서는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노관의 수하였던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조선에 투항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통째로 꿀꺽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신채호는 기자조선을 번조선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에 위만조선 역시 같은 관점으로 보았다. 이에 관해서는 삼조선을 참조.
위만이 본래 조선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그 증거라는게 "상투를 틀었다"와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가 전부다. 교과서에 따라 '조선인의 옷'이나 '흰 옷'이나 '만이복'으로 나오기도 한다. 원문은 오랑캐라는 기록 두 줄 뿐이라서 아마 투항할 때 조선에서 안 받아줄 거 같으니까 코스프레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남월을 다스린 조타 역시 중국 혈통이지만 의관을 이민족의 것으로 바꾸었다. 사기를 보면 기자나 위만이나 중국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저 상투 틀었다는 한 줄 덕에 국사책에서 삭제되는 일은 면했다. 현재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의견은 공식 학계에서는 많이 수그러든 편이다.
요즘의 위만-조선인설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정설인 요동->평양 중심 이동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사방 2000리를 뺏기고 나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 이 이동설을 기본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고조선이 개발살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연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지배 하에 요동 지방에서 지냈는데, 위만이 그들 중 하나였고, 요동 지방의 고조선인들을 이끌고 평양에 귀순했다고 설명한다. 그 근거로 고조선~삼한 시절처럼 왕권이 약할 때는 듣보잡이 왕위에 오르면 쫒겨나거나, 내분이 일어나거나 하기 쉽기 때문에 자기 수족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강화시키려 할 텐데 현지인들이 높은 관직에 많이 올랐다는 기록도 있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위만을 중심으로나 유이민 세력과 고조선의 결합이 너무 자연스러웠다는 것. 진짜 연나라 사람과 그 일동이었다면 옷이 문제가 아니라 언어부터 너무 다르다. 그래서 위만-조선인설을 부정하는 측에서도 이 이동설을 토대로 연나라 출신이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과 접촉하여 어느 정도 조선의 문화에 동화된 상태였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위만이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다거나 중국에서 수입해온 따끈따끈한 철제 무기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기록이나 유물, 유적이 더 나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2 의의
보통 이때부터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기문화란 단조철기의 사용을 말하는 것로서 초기철기시대에 틀에 부어 만드는 철도끼와 같은 작은 공구류가 아니다. 즉 철제장검, 철제투겁창, 철제괭이와 같이 두들겨 만든 철기를 사용한 시기를 말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이 효혜~고후(B.C 195~180)대에 병위재물(兵威財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근거해 비로소 한반도에도 철기문화가 수입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위만조선대에는 위의 철기문화와 관련한 유적이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다.[1]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낙랑군 유물/유적으로 보고 있는 일부 유적의 연대를 끌어올려서 위만조선대의 유적이라고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근거가 부족하고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보류 상태라 할 수 있다.
위만의 아들은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손자인 우거의 대에 이르러 중국 서한과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한나라에서는 그 자리에 4개의 군을 신설했는데, 이것을 한사군이라고 한다.
3 역대 국왕
순서 | 왕명 | 휘(이름) | 재위기간 | 생몰년도 | 비고 |
1대 | 위만 | 위만 | BC 194 ~ BC 2 | ? ~ ? | 1대 국왕 |
2대 | ? | ? | ?~? | ?~? | 2대 국왕, 단 한줄의 기록[2]외엔 자세한것은 알수 없다. |
3대 | 우거왕 | 우거 | BC 2 ~ BC 108 | ?~BC 108 | 3대 왕이자 마지막 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