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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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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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基

원나라말, 명나라초의 인물. 는 백온(伯溫), 고향이 절강성의 청전이었던 까닭에 유청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달, 이선장과 함께 명나라의 개국 3대공신으로,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책사이다. 주원장이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라고 평하였으며, 당대 사람들은 제갈공명과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하였다. 그 때문인지 야사에서는 제갈공명과 자주 엮이며 제갈공명 앞에서 데꿀멍하는 모습이 많다(…)

2 생애

2.1 원 정부 시절

23세에 원나라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원나라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사실 원나라에서 그리 좋은 대접은 못받던 중국 남부 지역출신인데다가, 가뭄에 콩나듯이 치뤄지던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1]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췄던 인물로 평가된다.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해적 방국진이 발호하였을 때 원수부도사(쉽게 설명하면 사령관 밑의 작전참모)에 제수됐을 때이다. 이 때 유기는 각종 계책을 짜내서 방국진의 세력을 깎아내어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자 당황한 방국진은 원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귀순을 약조하면서 용서받았고 원 조정에 방국진에게 관직을 내렸다. 그러자 유기는 "방국진 그 새퀴, 도적질하고 정부에 반항하던 나쁜 놈인데 왜 관직주나효!"라고 꼬장꼬장 대들다가 높으신 분들의 미움을 사서 일반 행정직으로 좌천크리. 결국 빡쳐서 관직 다 내팽개치고 낙향하였다. 이 와중에 죄인으로 몰리고 붙잡혀서 목이 날아갈 뻔 하기도 했는데 어찌어찌 잘 풀려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유기를 아끼던 관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서서 다른 죄인을 처형한 후에 거짓보고를 올려 살려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홍건군의 일부를 이끌고 있던 주원장은 명망 높은 유기가 낙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당시 여기저기서 준동하던 도적 무리나 다름없다고 판단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기 PR을 계속했고, 유기도 생각을 바꿔 주원장과 만나게 됐고 주원장의 밑으로 들어갔다. 이 때 시무 18조를 올려 주원장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진언했는데 주원장이 크게 감명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2.2 주원장의 휘하에서

당시 주원장이 이끌던 홍건군은 원나라 조정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 기반이 되는 세력이었다. 그 때문에 쌈질 잘하는 장수들은 많았을지 몰라도 전략적 식견이 높은 참모는 전무한 수준이었는데 이는 홍건군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당시 주원장은 이선장의 보좌를 받고 있었지만 이선장은 군사(軍師)라기 보다는 내정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유기의 합류는 주원장의 세력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 유기는 방국진 토벌 시기에서 활약한 진퉁 전략가였던 까닭에 주원장은 유기가 내놓는 의견을 귀담아 들었으며, 유기의 의견에 따라 군대를 움직였다.

당시 난징을 거점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주원장은 남부의 유력군벌이었던 진우량, 장사성과 대립하고 있는 관계였다. 따라서 노선 잘못탔다가는 진우량과 장사성에게 다구리맞고 박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유기는 강대한 진우량을 공격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 주장했다. 장사성은 틀림없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만 자기 세력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인물이기에 알아서 자멸할 것이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평했다.

유기의 진언대로 진우량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주원장은 이 사실을 간파한 진우량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진우량의 군세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주원장의 수하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서 항복과 도주를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기만은 이 때 오히려 노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중에 주원장이 따로 불러 의견을 청하자 항복과 도주를 주장한 제장들을 처형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겉보기에 강한 세력이니 깊숙히 끌어들인 후 힘이 빠졌을 때 역습을 가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란 진언을 올렸다. 주원장 역시 유기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여 작전을 펼쳤고 진우량의 침공을 무사히 격퇴시킬 수 있었다.

예상 외의 대승에 기뻐한 주원장은 유기에게 큰 포상을 내리려 하였으나 당장의 논공행상보다는 기세를 몰아 진우량을 박살내야 된다고 주장했고 즉시 주원장은 병력을 이끌고 진우량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이후 계속되는 전투마다 시의적절한 계책을 내놓아 주원장이 진우량을 격파할 수 있도록 했고, 결국 파양호의 결전(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이 전사했고 그의 세력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다.

그 이후 중국 남부의 판도는 유기의 예상과 일치했다. 장사성은 결국 스스로 자멸했고 나머지 반란군들도 강대한 주원장의 밑에 앞다투어 복속해오는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 남부를 평정할 수 있었고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서달을 총대장으로 임명하여 북원을 공격하게 하고 중국에 한족 왕조를 복원시키기에 이르렀다.

2.3 명 건국 후

명 건국 후에는 어사중승, 태사령 등을 역임하면서 명의 기틀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권을 잡고 정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는 축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 주원장이 중용하려 하였으나 유기 본인이 워낙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라고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나서려고 했지만 이선장이나 다른 총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주원장에게는 탁월한 내정참모셔틀인 이선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개국공신들은 대부분 회서지방 출신이었는데 반해 유기는 절강성 출신이었다.(다른 이들로는 송렴, 섭침, 장일 등이 있다.) 게다가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고 해도 특유의 꼰대성격 탓인지 자연스럽게 비주류파로 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류 세력이던 회서출신 귀족들의 독주를 견제하려고 했던 주원장은 유기를 중용하려 하였기에 매우 위험한 인물로 지목된 상태였으며 유형무형의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굳이 유기가 전면에 나설 수 없었던 사정이란 분석이다.

어쨌든 회서출신 귀족들과는 아웅다웅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의 영수였던 이선장과는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사적으로도 친분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사적으로 친했다는 거고 공적으로 까야되는 건 서로 까고 보는 사이(…).

한편 주원장은 전한 고조 유방 못지 않게 수많은 공신들을 숙청한 황제로도 유명한데 유기만큼은 크게 처벌당한 기록은 없다. 당시 대립구도상 유기에 대한 참소도 많이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받아든 주원장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잠시 관직이나 녹봉을 박탈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곧 관직과 농복을 다시 내려 옆에 두는 등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 이는 주원장이 경계했던 것은 회서출신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로 인해 회서출신 귀족들로부터 더더욱 공격을 받았으며 이런 시궁창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사직하여 낙향했는데, 오히려 더 큰 모함을 받아서 귀경 후에 죄를 청해야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튼 지속된 공격으로 인해 말년에는 그나마도 없는 녹봉 싸그리 삭탈당해서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될 정도(…)였다.

야인으로 지내던 와중에 병을 얻어 죽었는데 일설에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실제 유기의 와병소식을 들은 주원장이 좌승상 호유용에게 시켜 실력있는 의사를 보내 진맥을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문제는 이 의사가 다녀간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호유용이 일부러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 외에 주원장이 호유용에게 넌지시 독살을 지시했다는 견해도 있고, 주원장은 순수한 의도에서 이야기를 한건데 호유용이 확대해석하여 독살했다는 견해도 있는 등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이다.

말년이 참 안습한 편. 토사구팽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명나라의 개국공신 중에 말년이 안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선장처럼 대놓고 죽였다는 게 티가 안 난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여담으로 유기가 죽었을 때 그와 대립하고 있던 귀족들은 너무 기뻐서 축배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는 고인드립도 서슴치 않았는데 일부 기록에는 유기의 관이 운구되는데 그 위에 폭죽을 터뜨려가며 즐거워했다고도 한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주원장은 진노했다고 하며 당장은 침묵을 지켰지만 회서귀족들을 대거 숙청할 때 배로 되돌려줬다고 한다.

3 성격

강직하고 사심없는 성격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원장이 공을 세워서 포상 좀 하려고 하면 본인은 안 받으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면모는 명나라 개국공신의 논공행상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많은 공신들이 수천 석의 녹봉에 높은 작위와 관직을 제수받았는데도 모자라다고 찡얼거리다가 주원장에게 걸려 쳐맞기 일쑤였는데(...) 유기는 고작 240석의 녹봉과 백작 정도의 작위에 머물렀음에도 큰 불평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야사에는 유기가 직접 찾아와서 따지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낮은 관직과 녹봉을 내렸는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삐진 주원장이 오히려 유기를 불러다가 지금 나하고 장난하는 거냐고 따지기도 했단다(…). 이런 솔직하지 못한 양반 같으니

그 외에도 주원장이 유기를 내정분야의 높은 관직을 내리려고 했을 때 옆에서 보좌하던 이선장이 "백온은 내정에 관해서는 능력이 부족합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주원장은 유기와 만난 자리에서 그 자리의 적임자 한 명 추천해달라고 하면서 이선장의 견해를 슬쩍 들려줬는데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여 주원장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주려던 자리가 꽤 높은 자리였고 만날 때마다 넌지시 "너님이 원하면 언제든지 제수하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본인이 계속 사양했다고 한다.

주원장 앞에서도 직언을 하면 했지 절대 사탕발림을 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첨꾼들을 싫어했던 주원장이 굉장히 아꼈으며, 뭔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은 후에도 좋은 말만 계속 늘어놓는 신하들의 의견은 참고만 하고 유기를 따로 불러 구체적인 조언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대체로 이 자리에서 들은 의견을 채택하거나 자신의 견해에 덧붙이는 식으로 국정을 펼쳐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주원장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발언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완곡하게 돌려서 한 축에 속하는데, 공신들 때려잡던 시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일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자가 된 주원장이 낚시를 떠났는데, 물고기를 하나도 낚지 못해 심통이 났다.

심심해진 주원장은 옆에 있던 유기에게 지금의 상황을 시로 써보라고 명했다.
물고기 하나 못 낚고 있는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쓰면 주원장이 불쾌해할 것이 뻔한 상황.
현명하게도 유기는 이 상황을 이렇게 시로 풀어내어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천 길 못 속에 있는 물고기는 도통 나오지 못하니, 이는 감히 천자를 뵐 수 없기 때문일세.'

굽혀야 되는 시점은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주장할 때에는 황제고 뭐고 없는 꼬장꼬장한 양반이었다고 한다. 실제 이것 때문에 원 시절에 좌천당하고 목이 날아갈 뻔 했다.

일례로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한 후 도읍지 남경에서 수도 정도를 고려할 때 봉양(鳳陽) 임호(臨濠)[2]가 앞에는 회수와 뒤에는 양자강을 끼고 있어 도읍지로 알맞다고 하면서 제 2의 수도인 중도(中都)를 건설하려 하자공밀레 유기가 중도는 황제의 고향이지만 수도의 요지가 아니라고 끝끝내 간언하여 결국은 중도에서 무산되었다. 만일 주원장의 천도가 이루어졌다면 중국의 중심부는 남경이나 북경이 아니라 안휘성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그외

천문학주역에도 능하였다고 하며, 실제 명리학 분야에서는 굵직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당시 전해져오던 육효점을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가탁에 불과하다), 주원장도 이 육효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외에 적천수란 책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저자라기 보다는 그 책에 최초로 주석을 단 인물이란 의견이 더 지배적이다. 유기가 단 주석은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주석을 달았다고 하지만 아직 확정된 견해는 아니다.)

실제 명리학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진우량과 파양호에서 대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유기가 갑자기 당장 다른 로 옮겨타야 된다고 주원장에게 진언을 하였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히 독촉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주원장이 그 의견을 쫓아 다른 배로 옮겼는데, 그 순간 원래 타고 있던 배가 불붙은 에 맞아 파괴되었다.

당시 주변 지형이나 날짜, 주변 분위기를 점치고 주원장의 위기를 예측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이건 명나라 정사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그 외에 중국이나 세계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단적인 예로, 파자(破字)에 능해 주원장이 파자점을 보았다고 한다. 그 때 주원장은 '순(順)'이라는 글자를 골랐는데, 유기는 그것을 보고 명은 306년 간다고 예언했다. 왜냐하면 '순'이라는 글자에는 三+百+六 이 세 글자가 들어있기에. 결국 그의 예언대로 명은 300년 뒤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다[3]. 그리고 이자성이 세운 국호는 (順). 주원장은 식겁하여 수를 거꾸로 뒤집어 603년 간다고 자위했으나, 유기는 한 번 나온 결과는 번복할 수 없다고 말렸다나. 여담으로, 603년으로 해서 1368년 + 603년이 되면 1971년, 즉 UN 총회에서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에게 권리를 상실한 해다. ㅎㄷㄷ

주원장에게 동쪽에 위치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나아지고 군대의 힘을 기르면 언제라도 요동을 넘볼 수 있을 것이니 방비를 해야된다고 진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야사나 설화에서는 제갈량에게 발리는 역할이 많지만, 나관중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을 표현하며 유기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제갈량이 천기를 읽고 동남풍을 불어오는 등의 천문에 능한 부분은 확실히 유기에서 따왔다는 것. 그러니, 적벽대전의 모티브가 파양호대전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명건국에 성공한 유기는 성도에 행차하여 무후사를 방문했고, "제갈량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나는 성공했다. 고로 내가 더 대단하다."는 말을 하며 묘에 가보니 막상 제갈량의 묘 자리 더 뒤쪽에 제왕급의 명당이 있고 그 앞의 좀 못한 자리에 제갈량 묘가 있기에 "제갈무후는 땅도 못보는구나"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조롱조의 발언을 하면서 의례상 절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안떨어지자 놀라는 가운데 마치 제갈량의 음성이 들리는듯이 "충신은 죽어서도 제왕을 모시려 하는 법"이라는 말이 귓가에 들렸다고 한다.[4] 한동안 제갈량에게 크게 혼나고서야 겨우 일어서서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내려서 무후사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1. 원 제국의 과거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몽골 황제가 내키는 대로 시행하였고, 그나마도 몽골인과 색목인에게 매우 유리하고 남송 지역 인사들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그래서 송나라 사대부들이 과거를 포기하고 소설이나 희곡 창작에 몰두하여 대중 문학이 융성했을 정도이다. 한족 차별이 매우 심했던 원나라의 그런 과거에 옛 남송 지역의 선비가 합격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2. 안휘성 저주 봉양으로 다름아닌 주원장의 고향(...)
  3. 억지로 306년에 끼워맞춘다면 주원장이 곽자흥이 죽고 지도자로 추대된 해가 1355년, 남명이 망한 해가 1661년이니 306년 맞다. 다만 즉위 기간만 보면 1368~1644의 276년.
  4. 무후사 뒷편엔 한소열의 릉인 혜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