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왕

(을불에서 넘어옴)
"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14대 봉상왕 고상부15대 미천왕 고을불16대 고국원왕 고사유
시호미천왕(美川王) / 호양왕(好壤王)
고(高)
을불(乙弗) / 우불(憂弗) / 을불리(乙弗利)
생몰년도음력281년? ~ 331년 2월
재위기간음력300년 9월 ~331년 2월 (30년 5개월)

고구려의 제15대 .

미천한 왕이 아니다 다만 잠시 미천해졌을 뿐이다
미친왕은 더더욱 아니다 미친왕은 그 전의 봉상왕이다.

1 비운의 유소년기

왕족에서 머슴으로 인생의 밑바닥까지 갔다가 다시 왕으로 인생 역전한 인생의 승리자.

인지도는 낮지만 미천왕은 창작물(사극)에서 써먹을 떡밥을 고루 갖추고 있는 지닌 블루 오션(…)임에도 불구하고 사극화가 되지 않고 있다. 인지도 때문인가? 陰牟의 이름 때문인가?

봉상왕의 동생인 돌고의 아들로써 왕족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봉상왕이 왕권강화를 빌미로 친족들을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숙신격파의 공을 세운 삼촌 안국군 달가는 물론, 자신의 친동생인 돌고까지 역모로 몰아 처형하기에 이르면서 드라마틱한 유년, 청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겨우 촌구석 수실촌으로 도망가 신분을 숨기고 음모(陰牟)란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죽어라 고생만 했고, 특히 여름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잔다고 들들 볶아 밤을 새면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고된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1년 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서 소금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하기로 한다. 음모에서 재모로[1] 소금장수가 되었지만 안습한 생활은 마찬가지였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思收村)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의 노파는 한 번 공짜로 소금을 얻어갔다. 그러나 숙박비로 준 소금을 더 달라는 것을 미천왕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고 관가에 도둑으로 고발했다. 압록강변의 재(宰)[2]는 노파의 말을 믿고는 현행 절도범 누명을 씌우고 미천왕의 소금을 모조리 압수하고 태형을 내렸다. 이런 갖은 고생을 한 미천왕은 골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험한 꼴까지 보니 누가 이자를 왕족으로 생각할까...? 같은 꼴을 당한 재모 안습

2 왕위에 오르다

하지만 봉상왕의 폭정이 날로 더해가자 국상 창조리는 포악한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부하들을 비밀리에 파견해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게 했다. 비류강가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애써 부인하는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에게 데려 왔다. 창조리가 을불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해 반정을 일으키면서 봉상왕이 폐위되고 을불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봉상왕은 얼마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자살했다. 그리고 막 부려먹은 음모와 도둑 누명 씌운 집주인 할머니, 곤장 때린 재는 고구려표 장국한 뚝배기 드셨다 카더라. 믿으면 곤란하다.[3][4]

왕이 된 뒤에는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고 313년에 낙랑군, 314년에 대방군을 정복하면서 한반도로의 진출을 시도했고, 315년에 현도군을 공략하고 선비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서 고구려가 뒷날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 되는데 기반이 되었다. 319년 진의 평주자사 최비의 아이디어로 우문선비, 단선비와 짜고 모용선비를 분할점령하는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작전은 실행에 옮겨저 고구려군은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으나 모용선비의 군주 모용외의 계략에 걸려들어 물말아먹고 끝났다. 고구려가 요동진출을 100년 앞서 실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작전이 실패한 덕분에 모용선비는 전연이 되어 요동은 물론 화북까지 석권하는 강대국이 되어 고구려를 괴롭혔다. 결국 고구려는 미천왕대로부터 약 100여년이 흐른 뒤인 증손자인 광개토대왕대에 가서야 요동을 완전히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 작전이 실패한 이후로도 모용외와 미천왕은 서로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공방을 계속하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한편 다른 업적으로는 낙랑군을 점령한데에 있다. 당시 낙랑을 차례로 공략해서 세력을 갉아 먹었는데 야설로는 이때 마지막 남은 낙랑성을 공략하면서 썼다는 고인드립?방법으로 세균전... 몇일동안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진전이 없었고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한것. 그러자 미천왕은 투석기에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실어서 성안으로 던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중년에서 할머니의 초상화를 실어 날렸는데 군사들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시키기 위해서라고... 결국 성은 함락됐다.

30년동안 재위했으나, 미천왕의 내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3 사후 고인드립(받은대로 돌려주기)

그의 아들 고국원왕 대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 모용황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 국내성을 함락시키고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수레에 실었으며 미천왕의 왕후였던 태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만명이 잡혀가는 굴욕의 세월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몇 달 뒤 반환되었으나, 주 태후는 십수년이 지난 뒤에야 고구려로 귀환하였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태자가 잠시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다. 다만 이 태자도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4 안악 3호분의 주인공?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군면 유설리[5]의 재령강 북쪽구릉 서편에서 농리 정리 중 우연히 발견된 안악 3호분[6]의 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안악 3호분은 고고학자 도유호가 발견했는데 비록 도굴당해서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잘 보존된 벽화들이 있었다. 도유호와 월북 미술사가 김용준 등은 이 무덤의 주인으로 전연의 장수로 모용황의 아우 모용인의 쿠데타에 참가했다가 모용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장수 '동수(冬壽)'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는 진서와 자치통감 등에 동수가 난을 피해 망명왔다는 것과 무덤 내부에 있는 주인공의 초상 옆에 동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도 동수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무덤 내부에 기록된 묵서명[7]에 의하면 서기 357년에 축조된 무덤이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에서는 여러 근거를 들어 왕릉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동수라는 글자가 '장하독(帳下督)'[8]의 머리 위에 씌워 있는 점[9], 주인공의 행렬 벽화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임금 깃발이 그려 있는 점, 주인공 초상화에 고구려 왕의 왕관인 백라관(白羅冠)으로 추정되는 흰 비단 모자를 쓰고 있는 점[10] 등이다. 문제는 어느 왕릉인지를 밝히지 못하다가 1963년 주영헌 등의 학자들이 미천왕설을 주장했다.

이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에는 국내성 인근에 미천왕의 무덤이 있었는데[11]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 갔다가 돌려받은 시신을 다시 묻은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수가 기록된 것은 시신 반환 또는 무덤 축조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박진욱 교수는 고국원왕설을 주장했는데 고국원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 평양'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박진욱 교수는 이를 해석하기 나름이라 그것은 '고구려의 남쪽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지방이던 황해도 근처'에 있던 '남평양'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였던 이 안악의 언덕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안악 3호분 자체가 철저하게 도굴되어 유골은 물론 부장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매우 힘든 상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불분명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측에서 주장하는 동수설은 묘지명의 위치가 왜 장하독 머리 위에 있는지,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천왕설은 왜 시체반환에서 무덤 축조까지 13년이나 걸렸는지, 고국원왕설은 왜 무덤이 갑자기 호화 분묘로 바뀌었는지 설명을 못하고 있다.[12]

5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미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누런 안개가 끼다
一年冬十一月 강한 서북풍이 불다
一年冬十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秋九月 현도군을 침략하다
十二年秋八月 서안평을 점령하다
十四年冬十月 낙랑군을 축출하다
十五年春一月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다
十五年秋八月 대방군을 축출하다
十六年春二月 현도성을 공격하다
十六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年冬十二月 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해오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요동을 침략하다
三十一年 후조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春二月 미천왕이 죽다

6 창작물

알고보면 한국에서 제왕을 영웅화하여 다룬 사극의 전형적인 구조인 왕실에서 쫓겨남→바깥을 방황→왕위 찬탈→정치싸움과 정복전쟁의 전형적인 구조를 그대로 살아간 인물이다. 또 한국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픽션을 위한 무리수들을 모두 고증 가능하게 가지고 있다.

  • 역적드립 : 국내 사극에서는 역적을 너무 남발하여 주인공이 역적 집안 신분을 기본적으로 장착하는 경우가 많다. 없는 역적 드립도 만들어내는데 대표적으로 이순신에게 역적드립을 선사한 불멸의 이순신이 있다. 일단 미천왕이 역적으로 취급되었다는 기록 자체는 없지만, 그 처지는 역적과 같이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3]
  • 고생담 만들기 : 주인공의 고생을 연출하기 위해서 고증에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억지 고생담 만들기가 남발된다. 대표적으로 선덕여왕 타클라마칸 사막 보내기가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미천왕은 텔레비전 앞에 앉은 시청자들이 '아이고 어떡해' 하며 눈물을 질질 짤 학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머슴일 하며 주인집에서 학대도 당하고, 누명을 써서 곤장도 맞는다!
  • 상단 입단 : 상도의 영향으로 주인공을 한 번쯤 상단에 입단시키는 사례가 많은데, 실제로 소금장수 일을 했으므로 상단에 넣어도 무방하다. 재모 같은 인물은 '친구'나 '멘토' 쯤으로 재해석 하면 그럴듯 할 듯.
  • 적대 인물은 무리수까지 둬서 왜곡하며 악역 만들기 : 봉상왕은 일단 여러 모로 보아서 악당에 가까우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도 암군 혹은 폭군의 평가를 받고 있는 왕이기도 하고.
  • 일단 외세는 악역 만들고 닥치고 기록에 맞든 안맞든 정벌하고, 근거없는 대영토 드립과 정복왕 만들기 : 일단 정복 군주이며, 상당한 영토를 넓힌 것은 사실이다.

미천왕은 저 모든 것을 집어넣어도 고증에 문제가 없을 만한 충분한 근거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소금장수 떡밥은 엉뚱하게도 논란이 많았던 모 사극에서, 그것도 이웃나라의 왕에게 써 먹었다.

사실 딱히 각색 없이 그냥 써도 충분히 한 편의 한국식 RPG 사극 드라마가 될 수 있는 판이라, 왜 아직도 작가들이 주목을 하지 않는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미천왕의 인생역정에 영감을 받고, 이 훌륭한 소재를 이름만으로 주목을 부를 수 있는 군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 덧씌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사극계의 주적(...)

관련 작품으론 그 유명한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 박창화의 "을불대왕전"이 있다. 독자들에게 호평을 사고 있긴 한데, 박창화 특유의 화랑세기틱(...)한 취향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야설(...)

물론 박창화는 화랑세기처럼 나름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까지 낚아낼 정도로 정교한 역사물을 창작하던 사람이라 역사적 고증에 상당히 충실한데다, 수십 년 전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편이다.

근래 여기에 처음으로 주목한 작가는 하필이면 김진명. 김진명이 쓴 작품이다보니 을불대왕전과 비교하기가 영 민망하다. 을불대왕전은 그래도 창작이라고 확실히 명시했기 때문.
  1. 머슴살이를 하면서 번 돈으로 장사 밑천을 댔을 것으로 여겨진다.
  2. 조선시대의 사또와 비슷한 직책일 것이다.
  3. 그런데 저 일화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걸 보면 진짜로 집주인 할머니가 거열형급의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자업자득. 실제로는 기시(棄市)라는 형벌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책형 문서 참고. 하지만 역사만화에 따라서는 미천왕이 금의환향해서 대인배스럽게 용서하고 "그런 시절도 있었지..."하는 식의 해피엔딩 결말도 있다?
  4. 김용만의 <그 많던 고구려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에서는 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그린 픽션이 들어갔는데, 젊은 시절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지만 남편이 징집됐다가 전사하고, 다행히 전쟁에서 이겨 나라에서 어느 정도 보상이 나왔지만 과부로 억척스럽게 살다가 을불에게 그리 대하고, 나중에 즉위한 미천왕이 왔을 때 자기 일생 얘기를 하고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나오자 미천왕이 관대하게 용서해주었다는 결말로 그렸다.
  5. 현재는 북한 행정구역 마개조로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다.
  6. 안악 1호분과 안악 2호분도 있으나, 이 두 무덤은 도굴로 훼손이 심한데다가 안악 3호분이 비교적 벽화 보존 상태가 잘 되어 유명한 것이다.
  7. 먹물로 기록한 문장
  8. 이름이 아니라 임금 또는 고위 장군 아래에 있던 군사 지휘관을 의미한다.
  9. 즉, 동수가 모신 왕이라는 점이다.
  10. 신당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이라는 관을 썼다고 한다.
  11. 실제로 중국 집안 근처에 거대한 규모의 무덤이 도굴당한 채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게 모용외가 도굴한 서천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미천왕의 원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12. 참고로 무덤 내부 벽화에는 그 유명한 행렬도 외에도 무덤의 주인과 부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따라서 고분주인의 얼굴은 알 수 있지만 오히려 이름을 모른다...오히려 벽화와 초상화는 없고 부장품이 온전하게 발견된 무령왕릉과 비교해보면 굉장한 아이러니.
  13. 미천왕의 아버지 돌고는 자신의 친형인 봉상왕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당했다. 웬만한 범죄로는 처벌받지 않는 고대왕족 그것도 왕의 친동생이자 혈통상 직계왕족을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실은 반란 즉 역모죄가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죽이기도 쉽고 그 자손들을 죽이거나 신분을 강등시켜 왕위계승권 자체를 박탈시키기에도 적합하기 때문, 미천왕의 사례 말고도 동서고금을 통츨어 자신의 왕권을 위해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역모죄를 구실삼아 숙청을 한 왕은 셀 수도 없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