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태/선수 경력

1 개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활약했던 현대 유니콘스 소속의 투수였다. 그의 전성기는 곧 현대 유니콘스의 전성기였다. 실제로 본인의 커리어 로우 2004년과 팀이 해체 수순을 밟던 2005년 ~ 2007년을 빼면 정민태가 잘할 때 1996년부터 2003년도까지는 팀도 잘했으며 그가 못할 때는 팀도 못했다. 또한 2000년까지 탄탄대로를 걷던 현대 팀이 정민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진출한 2001년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나중에 가서 비참하게 맞이한 결말까지 똑같았으니...이쯤되면 아예 팀과 인생을 같이한 수준. 야만없이지만 현대가 재정난을 겪지않고 지금까지 존속했다면 그의 등번호 20번은 영구결번으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현대하면 투수 중 서열 No.1이다, 역대 현대 투수 중 가장 기여도가 높은 선수와 에이스 1선발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 선발 투수 역대 최다 승리 투수 역시 정민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자 1999년 이 후 한국인 토종 투수 20승도 유일한 기록 투수 90년대 후반기 이 후 투수 분업화 이 후 한국시리즈 단, 한 명뿐인 3승 투수 선동렬과 함께 억대연봉 투수 중 기록을 갈아치운 투수이다.[1]

에이스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췄던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강속구와 슬로우 커브[2], 체인지업,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5년 연속[3]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투수이다.[4] 당연히 역대 최강 우완 떡밥에 항상 끼는 대투수이다. 마! 3년연속 EX 받아봤나!

통산 전적은 290경기 등판, 270번 선발로 등판해 124승 98패 평균 자책점 3.48, 투구이닝은 1,831이닝이며,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21경기 등판, 18번 선발로 등판해 10승 1패 평균 자책점 2.11, 115.1 이닝투구, 한국시리즈 성적은 6승 1패를 기록, 큰 무대에 강한 선수 기질을 보였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포스트시즌에서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선수라는 것도 주목할만한 사실. 그 외에도 포스트시즌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이며 가장 많이 선발투수로 등판한 선수이며 한국시리즈에서도 유일하게 두자릿수이상 선발로 등판한 투수이다.[5] 큰 경기에서 새가슴이었던 스승님과 다르다.

2 상세

2.1 아마추어 시절 1992년 ~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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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부터 정민태, 구대성, 양준혁

한양대 시절에는 구대성과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리며 대학 야구를 평정했다.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고 쌍방울 전 데뷔했으나 그 해 겨울 병역비리로 인해 65일 간 경찰서 정모유치장에 갇혀 버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결국 몇 경기에 등판하지도 못하고 수술을 받게 된다. 이때 한국프로야구 선수 중에는 최초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이 때 재활을 담당한 코치가 은퇴한 후 막 태평양이 투수코치로 영입한 김시진이었다.

2.2 1994년

25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45.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5.8), ERA 3.72 / FIP 3.01 (ERA+ 103.4 / FIP+ 127.6)
탈삼진/9 : 볼넷/9 : 피홈런/9 5.64 : 2.35 : 0.43, sWAR 3.23.

기나긴 재활에서 복귀한 시즌이었다. 당시 수준높았던 태평양 돌핀스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8승 9패를 기록한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1승을 기록했으며 LG 트윈스와 벌였던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 투수로 나서 5이닝동안 퍼펙트 투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에 나온 방화범 때문에 졌다.

2.3 1995년

리그 최다 패의 위엄

28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88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6.7), ERA 3.63 / FIP 3.08 (ERA+ 103.4 / FIP+ 120.4)
탈삼진/9 : 볼넷/9 : 피홈런/9 5.51 : 2.78 : 0.38, sWAR 3.60.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88이닝을 던지며 8승 14패를 기록했고 동산고 후배 위재영과 방위복무 중인 안병원, 최창호[6], 김홍집[7]함께 팀 마운드를 지탱했다. 본격적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했으나 태평양의 아름다운(?) 쉽게 말하자면 2015년판 KIA 타이거즈 실사판 득점력 덕에 리그 최다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최종 팀 순위는 꼴찌. 그 후 현대그룹이 돌핀스를 인수한다.

2.4 1996년

30경기 중 29경기 선발로 출장, 210.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 ERA 2.44 / FIP 3.13 (ERA+ 150.5 / FIP+ 117.1)
탈삼진/9 : 볼넷/9 : 피홈런/9 5.43 : 1.93 : 0.64, sWAR 5.87.

현대의 에이스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그룹현대 유니콘스의 꾸준한 지원과 김재박 감독, 하기룡 투수코치의 지원이 한 몫해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 내 최다 15승 9패를 기록했고 2 선발위재영, 마무리정명원[8]과 함께 팀 마운드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8이닝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1차전 승리를 안겨주었고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쌍방울 레이더스 경기에서는 다른 경기에서는 활약이 뚜렸하지 않았으나 마지막 5차전 활약이컸다. 사상 최초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서 리버스 스윕으로 이겨 한국시리즈 맞상대인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2차전(8.1이닝 투구승리x)과 5차전(패배)에 선발 투수로 나서기도 하였다.

2.5 1997년

평범한 그의 성적[9]

31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219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7.1), ERA 3.33 / FIP 3.08 (ERA+ 119.9 / FIP+ 129.6)
탈삼진/9 : 볼넷/9 : 피홈런/9 6.53 : 2.10 : 0.62, sWAR 5.53.

1997년에는 219이닝을 던지며 13승 13패 평균 자책점 3.33을 기록했고 호투 하고도 워낙 팀타선이 터져주지 못해서 아쉬운 해가 되겠다. 하지만 그 땐 김현욱, 이대진, 정민철 이 3명의 기록도 장난이 아니었다. 팀은 6위로 추락하고 포시에서 탈락한다.

2.6 1998년

에이스로 거듭나다.

1998년에는 200.2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2.89, 리그 다승 2위인 17승 9패를 기록하며 2선발 팀 선배 정명원도 14승 8패 평균자책점 1.86[10] 을 기록했으며 현대 유니콘스의 정규리그 1위와 한국시리즈 직행을 이끌었으며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에 선발투수로 나서며 승리를 거두었고 6차전 끝을 맺는 경기에서 도합 2승 1세이브 방어율 0.61 무시무시한 호투로 기자단 선정으로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다. 여담으로 우즈에게 42호 홈런 제물이 되어버렸다 그 해 김용수를 제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받는다.[11] 또한 정규리그 MVP는 타이론 우즈에게 마저 밀렸다, 당시 우즈는 41홈런을 기록한 종전 장종훈의 기록을 1개차이로 따돌리고 95년 같은 팀 OB 베어스 김상호에 이어서 2번째 잠실구장 홈런왕이 탄생하였다. 얘도 논란거리가 있는데 골든글러브는 이승엽에게 강탈당했다. 자세한건 골든글러브 항목을...

2.7 1999년

그의 최고절정으로 달아왔던 리즈시절

1999년에는 230.2이닝을 던지며 20승 7패 3세이브 평균 자책점 2.54[12]를 기록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가 커리어 하이를 찍은 시즌은 바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극강의 타신투병시즌이었다.[13] 즉, 타신투병 시대에 혼자 투고타저 놀이한 선수라는 것. 흠좀무 그 시기의 리그 평균 자책점은 4.98이었다.

그리고 토종 투수로는 마지막으로 20승을 거두었으나 54홈런을 때린 이승엽에게 밀리는 바람에 정규리그 MVP 수상에는 실패한다. 20승 중에 구원 1승이 있다고 까는 인간들이 있는데 위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5이닝 이상 던진거니 이 정도면 선발 수준... 참고로 순수 선발승으로만 20승 고지에 오른 마지막 투수는 이상훈이다. 2007년에도 있었지만 약쟁이니 빼자 그리고 2014년에 유니콘스의 후신격인 팀에서 선발로 20승을 했던 혜자같은 외국인 선수가 나왔다. 아아 밴혜자니뮤ㅠㅠㅠㅠㅠㅠㅠ 그렇게 그는 일본으로 갔습니다

팀 투수진이 승리를 잘 지켜줬다, 타선빨로 20승을 했다라는 말이 모두 먹히지도 않던 시즌이다. 당시 야구보던 사람들이라면 그딴 말 못한다. 애초에 팀은 드림리그 3위, 종합 5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 실점은 2위를 기록하였지만, 정민태의 공이 컸었으며 그를 제외하면 모두 무너진 시즌이었다. 그나마 잘버틴 선수가 김수경이었는데, 김수경은 2년차 징크스로 기복이 좀 심했다. 나머지 투수들은 모두 98년에 비해 몰락하였으며, 타고투저였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잘 쳐야 평범한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준이다. 위재영은 시즌 중 부상+병역비리 의심으로 인해 경찰행으로 드러눕고, 최원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뒤에 제대로 박살나버렸고, 마무리로 복귀한 정명원은 노쇠화로 구위 저하가 현저히 드러났었다.

현대는 당시 10명의 선수들이 세이브를 번갈아 가면서 획득했다. 애초에 정명원은 선발에서 계투 마무리까지 좌천하다 중간에 선발로 복귀를 하고 셋업 김홍집.조웅천,이경호 등등은 얼마안가 털리다 싶으면 2군에 들락날락했다.

당시 타고투저 시즌이었기에 묻혔지만 팀 타선은 더 심각했다. 팀 득점은 쌍방울 다음으로 낮은 7위에 불과하였다. 작년도 좋은 성적을 낸 이명수김경기는 규정타석도 소화하지 못한 채[14] 그대로 고꾸라졌고 전준호는 그나마 규정타석은 소화했으나 타격성적이 전년도 보다 3푼이나 급락했다. 이숭용 마저 성적이 조금 떨어지고 만 것 나머지 선수들도 모두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였다. 가중출루율(wOBA)이 4할 이상인 선수가 15명이나 있었던 시즌이었으나 현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wOBA 순위를 상위 25위로 범위를 넓혀야 박재홍(19위, .391) 박종호(24위, .370)만 이름을 보인다. 피어슨은 wOBA 리그 28위(.365)로 쿨바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현대 스카우트의 실수인데 피어슨이 1루와 3루를 볼 수 있다는 걸 말했으나 그 의 덩치와 옷 사이즈 땜에 수비는 커녕 주루도 시망이었다. 지명타자로만 소화 그래서 이듬해 시즌 시작 전에 방출을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버틴게 투수조 에이스 정민태였다. 시즌이 끝나고 일본 진출을 하려했으나 규정상으로 1년 더 있어야 하는 KBO의 조항에 따라 2000 시즌을 한번 더 뛰게 되었다.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했다.

2.8 2000년

2년 연속 다승왕
2000년에는 김수경, 임선동과 함께 18승을 올리며 리그 최초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15]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을 올렸다. 그 해 스포츠 신문사에서 플레이오프 MVP와 정규리그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2.9 일본 진출 2001년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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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일본진출을 하였지만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고 돔구장이라는 곳에 적응도 못한 채로 시즌을 시작하니 막상 2승을 거뒀는데 후에 탈탈 털렸다 이듬해도 작년과 별반없이 개털렸고 그대로 2군에 머물렀다. 2001년에 같이 있던 정민철은 감독의 삽질때문에 일본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먼저 KBO로 전격복귀한다. 정민태 역시 마찬가지로 2003년에 현대 유니콘스로 돌아온다.[16] 불펜에서 공을 받아 봤던 요미우리의 불펜 포수인 유환진은 정민태에게 구종이 단조롭다는 평가를 내렸었다. 팀내에서도 팀케미가 떨어진게 어찌보면 김별명의 원조 버젼 투수판 정도망

2.10 2003년

그의 마지막 리즈시절

2003년에 정민태는 세계 기록인 선발 21연승[17]을 기록하며 종전의 기록인 약켓맨 로저 클레멘스의 20연승을 갈아치웠으며 177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3.31, 17승 2패를 기록하며 세번째로 다승왕 타이틀+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승률부문 타이틀도 차지한다. 그리고 SK 와이번스벌어졌던 한국시리즈에서는 1, 4, 7차전에서 선발로 나서며 모두 승리를 따내 1998년에 이어 2번째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당시 현대 응원하다가 SK로 바꾼 인천의 야구팬들은 정민태를 보면 욕밖에 안나왔다(...)

2.11 2004년

정민태의 마지막 시리즈

하지만 그 후 부상[18]과 노쇠화가 겹치며 2004년에 7승[19], 이후로는 무승 10패를 기록한다.

2.12 2005년 ~ 2007년

에이스의 몰락과 팀의 해체
'현대가 없어진 날 끝났다

2005년에는 시즌 초반에 부상으로 재활하다가 5월 초순에 복귀하다가 6월즈음 부상으로 그대로 시즌 아웃,
2006년은 역시 부상의 연속과 재활, 2군에서 맨날 탈탈 털렸던 시기였다. 이 시기 팀에 한참 후배인 조용준은 재활훈련은 그냥 대충대충 하고 너무 놀다가 재활에 몰두 안했다고 은퇴에 원인이 이것 일까? 이 인간 때문에 손승락이 2007년에 똑같은 짓을 ㅁㅅㅁ
시즌말에 1군으로 복귀했으나.. 2007년에는 등판할때마다 먼지나도록 제대로 털리고[20]..(...) 이 때부터 연봉 감소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존심이 상한 정민태는 그럴 수 없다고 징징 거리면서 넷상에서는

정찌질,정먹태,정울보,정먹튀,돈민태 등등 별명이 생겨났다.

2.13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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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되어버린 KIA 타이거즈 시절.

1경기 만에 은퇴

선수 말년에는 무리한 연봉으로 인해 '돈민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2004년 4월말 이후로 급격한 노쇠화와 부상등으로 인하여 전혀 팀에 도움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연봉협상에서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현대 유니콘스히어로즈로 재창단될 때, 이장석 사장과 박노준 단장은 '연봉 거품을 빼는 MLB식 운영'이란 명목으로 김동수,전준호,이숭용,송지만,조용준 등의 고액연봉자는 물론 모든 선수의 연봉을 후려치려 했다. 고참 선수들은 집단으로 반발하였고 박노준과 계속 트러블이 나다 박노준은 선수들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목적으로 3월 4일 정민태를 자유계약선수로 방출시켰다.[21] 그 후 선수들은 결국 3월 말에야 깎인 연봉안을 받아들였다.

어쨌건 평소 고향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밝혔고 SK도 '인천 SK'를 표방하기에 SK는 정민태의 영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선발 자리를 보장한단 조건을 내걸었고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사장이 현대자동차그룹에게 정민태를 영입해 달라고 요청한 결과,[22] 정민태는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다. 그러나 2008년 4월 18일 무등 한화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김태완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하여 패전 투수가 된 뒤 2군으로 내려갔고, 그게 마지막 경기가 됐다. 2군으로 내려갔지만, 재기에 실패하며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23] 은퇴할 때도 고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는 원래 그를 옹호해줘야 할 현대 팬 자체가 적을 뿐더러, 히어로즈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적던 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더욱 심화된 것이기도 하다.

3 히어로즈로의 귀환, 은퇴식

사실 KIA에서 은퇴한 뒤에 KIA에서 투수코치로 일하면서 영건들을 키우고 싶다는 의견을 표력했지만, 선수들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바람에 실망한 나머지 2008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넥센 히어로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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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시즌 중에 은퇴식을 치렀다.[24] 코치를 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사진에도 나오듯이 평소때의 인상은 둥글둥글하고 인자해 보이지만, 투수가 어이없이 털릴 때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땐 굉장히 무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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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야구 최초의 7억 투수라고 불리었다. 현재 2016년 김광현이 8억으로 깡충 뛰어올렸다.
  2. 일명 아리랑볼이라고도 한다. 100km 전후로 던져서 타자도 주심도 얼탱이 없는 벙찌게 웃고말게 하는 정민태의 특기중 하나.
  3. 1996~2000년
  4.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던진 선수로는 정민태 외에 최동원이 있지만, 최동원은 1983년에 9승에 그치며 4년간 200이닝 투구와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
  5. 정민태가 포스트시즌에서 당한 패배는 199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조계현에게 당한 패배뿐이다. 당시 힘이 장사이신 성님에게 홈런을 맞아서 패배 기록상 한국시리즈 통산 다승 2위이며 포스트시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투수이다.
  6. 얼마안가 방위복무 후 2군으로 추락
  7. 이분은 작년도 방위 복무
  8. 당시 리그 세이브 수치는 1위
  9. 알다시피 현대는 창단 96년도 부터 97년도는 물방망이 타선이였다 제대로 발휘한게 이듬해 98년
  10. 이 기준으로 13년 뒤에 1점대 방어율이 나왔다. 류현진이 기록
  11. 조금 논란이 있는데 LG 노장 김용수가 당시 최고령 다승왕에 올랐는데(18승) 한국시리즈에서 2패를 기록하다보니 기자단들도 정민태에게 돌아서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허나, 명심할 것은 세부내용으로 봐서 정민태의 War가 선발 중에서 1위를 기록했는데 김용수는 한참 뒤진 10권에 머물렀다. 이유는 방어율과 FIP에서 운이 조금 따를분이라고 2위는 선발 보직이 아닌 마무리 투수 임창용이 있었다. 얘는 대체 뭐냐 ??
  12. 선발투수의 평균 자책점과 구원투수의 평균 자책점의 가치를 맞추기위해 등장한 런 세이브라는 지표를 이용하면 1999년의 정민태는 1986년의 선동열보다도 높은 런 세이브를 기록한다. 1999년의 정민태의 런 세이브는 약 62.5, 1986년의 선동열은 약 61.
  13. 얼마나 심했냐면 1999년 한 해에 30-30 달성자가 3명이나 나왔다;;;
  14. 이명수 400타석, 김경기 308타석.
  15. 이건 김재박 감독과 김시진 투수코치의 생각으로 로테이션을 각각 나눠줬다.
  16. 2006년 스포츠2.0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코칭스탭 間의 불화가 컸다고 한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 감독과는 괜찮았지만, 투수코치였던 가토리 코치와 관계가 매우 안좋았다고...
  17. 박철순이 1982년에 22연승을 기록한 적은 있지만 이것은 구원승을 포함하여 세운 연승기록이다. 이후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선발 22연승을 넘어서면서 기록을 갱신했다.
  18. 2003년 한국시리즈 당시, 허리부상이 있었음에도 테이핑 감으면서까지 던졌다고 한다.
  19. 4월 중순까지는 그래도 나름 잘던졌는데, 4월 25일. 일요일이었고, 두산과의 잠실구장 경기에서 제대로 탈털 털린(무려 8실점이나 했다.) 시점부로 등판할때마다 자주 난조를 보였다.
  20. 사직구장 최초 장외홈런을 이대호에게 허용한 것도 이 시기였다.
  21. 정민태가 연봉에 불만을 가져 자의로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기아에서 받았던 연봉은 히어로즈가 제시했던 8천만원보다 천만원 적은 7천만원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인터뷰에서 박노준 단장이 먼저 본인을 방출시켰다고 밝혔다.
  22. 정민태를 SK로 보내기 싫었고 범현대가에 남기려 했단 추측도 있다.
  23. 2008년 7월에 김조호 단장에게 본인 방출 요청을 하자, 임의탈퇴 공시되었다.
  24. 여담이지만 영구결번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단내에서는 영구결번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롯데로 가고선 아...야 다시 결번하자.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