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제13대 총선에서 넘어옴)
대한민국의 주요선거
종류대통령 선거
(대선)
국회의원 선거
(총선)
지방선거
(지선)
재ㆍ보궐 선거
(재보선)
국민투표
최근 선거18대
2012년 12월 19일
20대
2016년 4월 13일
6회
2014년 6월 4일
2016년
2016년 4월 13일
1987년
1987년 10월 27일
차기 선거19대
2017년 5월 9일
21대
2020년 4월 15일
7회
2018년 6월 13일
2017년 4월
2017년 4월 12일
(예정없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1985년 2월 12일1988년 4월 26일1992년 3월 24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무소속, 기타
125석70석59석35석1석9석
제13대 국회의원 목록

1 개요

1988년 4월 26일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이다.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치른 최초의 선거이며 개정된 헌법에 따라 조기에 실시하였다. 투표율은 75.8%를 기록했다.

2 배경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2대 총선때보다 23명이 늘어났다. 지역구 의원수는 40명이 늘어났고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7명이 줄어들었다.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 민중의 당, 제3세대당 등이 참여하였다.

3 과정

민주정의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의 분열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득표율은 36.6%에 그쳤다. 게다가 대선을 통해 선호하는 당에 대한 지지가 뚜렷한 지역구도가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조금만 뒤틀리면 다시 독재정치를 펼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노태우 정권은 지지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하지만 야권이 대선에 이어 총선 단일화에도 실패하며[1] 또 분열하자 이에 대한 실망감이 더더욱 커지고 노태우 대통령도 5.18 민주화운동 강제진압 사과 등 상당히 유화적인 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공천에서 제5공화국 인사 상당수를 배제하면서[2] 일부 민주세력의 호감을 받아 이를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총선 선거운동 기간 도중 예전과 같은 관권, 혼탁 선거가[3] 펼쳐지면서 "이번에 민정당에게 몰아주면 다시 의원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지게 되었고, 설상가상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총재로 재직하면서 저지른 비리가 잇달아 드러나면서 민정당에게 악재로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민정당은 지역구 87석(득표 34.0%)을 확보하는데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군인표 빼면 어찌될지 선전할 것이라 여겨졌던 수도권에서도 총 77석 가운데 32석에 그쳤는데, 여당 지지세가 높은 인천 석권 등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10석으로 공동 2당의 참패를 보였다. 그럼에도 TK의 절대지지와 호남을 제외한 각지에서의 고른 의석 획득으로 지역구 1당을 차지했고, 득표율 비례가 아닌 지역구 1당이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절반을 배정받는다는 희한한 당시 선거규정으로 전국구 75석 중 38석을 챙기면서 총 125석을 획득한다.

한편 통일민주당은 부산지역을 석권하고,[4] 그 외 전국에서 고른 득표를 얻어 득표율에서 2위(23.8%)를 기록했지만 소선거구제도로 인해 후보도 2위로 아쉽게 낙선되는 지역구가 많아서 원내 3당에 그쳤다. 특히 경남에서 일부 서부농촌지역과 당시 경남소속이던 울산시를 민정당에 내준게 뼈아팠다. 다만 서울 강남지역에서의 선전은 눈에 띄였는데, 총 의석 8석 중 무려 4석을 차지했다. 특히 서초구의 경우 야권 성향 무소속 박찬종 의원과 함께 여당 후보를 모두 몰아냈다.

반대로 평화민주당은 득표율 3위(19.3%)에 동부지역에서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권 석권과[5] 호남권 원적 유권자가 많은 서울에서의 선전(1당, 17석)만으로 원내 2당을 차지했다. 서울, 호남을 제외하고는 경기 성남시 을에서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원내2당이 된거니 어찌보면 흠좀무하면서도 당시 견고한 지역주의의 씁쓸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충남 13석, 충북 2석)과 경기도 지역(2당, 6석)[6]에서 선전해 총 35석을 확보했지만, 충북 의석을 민정당에게 대거 내주며 충남맹주로만 자리잡게 된다. 사실 충남맹주라기도 머한게 총 18석(대전 포함) 중 5석을 자당이 아닌 후보에게 뺏기며 확실히 다른 지역주의 정당에 비해선 비교적 충성도가 낮다는걸 보여줬다. 물론 이게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제3야당을 표방한 한겨레민주당은 군소정당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1석 확보에 그쳤다. 그나마 당선된 한 명은 전남 신안 지역구의 박형오 후보인데, 같은 지역구에 후보등록한 평화민주당 한화갑의 후보등록이 무효 처리되면서 후보가 민주정의당 김복수 후보와 박형오 둘만 남게 되자 평화민주당이 박형오를 전면적으로 밀어준 탓이라 자력당선이라 하기 힘들다. 그렇게 당선된 박형오마저 선거 직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한겨레민주당은 망했어요.(...)

민주한국당(평택시, 송탄시),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은 아예 당선자조차 내지 못하고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이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이런 여소야대 정국은 민주화 열풍과 맞물려 광주특위 구성 등으로 5공 비리가 대대적으로 까발려지고 사회각지에서의 각종 부조리한 문제점 제기가 활발히 이루워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여소야대 정국은 1989년 공안정국과 제2당인 평화민주당의 여당 협조모드로 상당히 기세가 수그러들게 되었고, 특히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여대야소로 아예 판세부터 대대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지역주의 정서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특히 충청권 원적 유권자들의 신민주공화당 지지(15.8% 득표)가 대선에 비해 두드러진 반면, 민주화의 열망으로 양김에게 갔던 표는 많이 떨어졌다.

이 선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나와 부산직할시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청문회 스타가 되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또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한 이후 정치인생에서 상기한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하려 부단히 노력하였고, 지역분권 및 지방정부 자립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4 결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민주정의당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한겨레민주당무소속, 기타합계
서울10171030242
인천6010007
경기161460228
강원80310214
충남202130118
충북7002009
광주0500005
전남017001018
전북014000014
부산101400015
경남120900122
대구8000008
경북170220021
제주0010023
지역구8754462719224
전국구38(34.0%)16(19.3%)13(23.8%)8(15.8%)0(1.3%)0(5.4%)75
합계12570593519299

5 선거를 뒤엎은 리허설 해프닝

"먼저 제주시 지역에서는 이 시간 현재 개표가 완료돼 민정당의 현경대 후보가 3만 8천 245표를 얻어 득표율 39.9%로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무소속의 고세진 후보는 2만 8천 739표로 30%, 민주당의 김성범 후보 1만 4천 367표로 15%, 평민당의 강종호 후보 9천 573표로 10%, 공화당의 신두완 후보 4천 764표로 5%의 득표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정교하게 리허설을 하냐

선거를 하루 앞두고 제주MBC에서 리허설했는데 그 장면이 송출되는 방송사고가 나서 제주도 일대가 완전 난리가 난 적이 있다.(...) 그나마 새벽정파 시간이라면 여파가 덜 했겠지만 오후 방송 시작 직전에 일어난 사고라 후폭풍이 더 거셌다. 이에 MBC에서 사과방송을 하고 문책조치를 내렸고, 수사결과도 단순실수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방송사고로 인해 제13대 대통령 선거부터 이어진 컴퓨터 여론조작 설이 설득력을 얻어 민주정의당은 제주도에서 전멸한 건 물론이고 수도권 의석도 상당히 깎아먹었다는 후문이 있다.(...) 결국 MBC 본사에서는 당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사과했고 전국 50분 + 지역 10분 단위체계로 진행할 예정이었던 개표방송을 제주 지역에서만은 본사 개표방송을 그대로 방송했다.

실제 제주시 결과는 현경대 31,720표(33.5%), 고세진 후보 39,329표(41.45%)로 현경대 의원의 3선이 좌절되었다.[7][8] 제주도 전체 결과는 통일민주당 1석, 무소속 2석. 물론 그 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고세진, 이기빈 의원은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1. 다만 단일화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 1번지"로 상징적 선거구인 종로구에선 평화민주당의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이 사퇴하면서(불출마 후 전국구 당선) 통일민주당 김명윤 총재권한대행으로 사실상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으나 김명윤 후보가 패배했다. 단, 종로의 패배는 3김에 반대하는 제3야당을 제창한 한겨레민주당이 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렸던 제정구 후보를 공천한 탓도 컸다. 제정구 후보는 12%의 득표를 했는데, 민주정의당 이종찬과 통일민주당 김명윤의 격차는 채 2%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결론은 올 야권단일화가 안되어서 졌다.
  2. 물론 민주정의당 내 신주류들의 5공 세력 견제 또는 노태우 대통령의 박철언 정책보좌관 등 자기 사람 심기 의도도 있었다.
  3. 대놓고 민정당 후보 선거유세장에 가면 국밥 같은 식사와 몇만원씩 든 돈봉투를 나눠줬고, 현역군인들의 부재자투표는 선거공보물만 받은 채 정작 표는 간부들이 모두 민정당 후보를 찍어서 보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4. 다만, 금정구 1석을 민정당 후보에게 1% 차이로 아깝게 내줬다. 다시 생각나는 군인표
  5. 총 37석 가운데 36석을 차지. 신안군에서 한겨레민주당이 의석을 얻었으나 이는 한화갑이 출마하지 못한 결과였다.
  6. 수원시 을, 성남시 갑, 의정부시, 광명시, 파주군, 고양군 등 경기 대도시와 북서부에서 승리를 거뒀다.
  7. 현경대 후보는 이후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모두 당선 되어 5선 고지에 오르니 리허설 승리 오보로 되려 물을 먹은 뼈아픈 패배라고 할 만하다. 여담으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대까지는 줄곳 3연 낙선 중. 이후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8. 여담으로 통일민주당의 김성범 후보는 13,621표로 14.38%, 평화민주당의 강종호 후보는 7,913표로 8.35%, 신민주공화당의 신두완 후보는 2,172표 (2.29%)를 얻는 등 실제 선거 결과에서는 리허설보다 적은 득표를 얻었다. 애초에 40:30:15:10:5로 5단위로 떨어지게 리허설을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