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지도자 경력

1 K리그 울산 현대

1989년 레버쿠젠에서 은퇴하고 영구 귀국하여[1] 차범근 축구교실을 여는 한편, 1991년 현대 호랑이 축구단(現 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흥미로운 것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마찬가지로 차범근 감독의 전임 감독이 김호였다는 것. 감독 부임 첫 해인 1991년에는 현대의 K리그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가 감독으로 있던 중 그의 지도 방식과 크게 마찰을 일으킨 최강희가 결국 1993 시즌을 앞두고 갑자기 은퇴하였다. 사실 이 부분은 여러 모로 논란거리가 많은데, 자세한 것은 최강희 항목 참조.

1994년까지 울산의 감독을 맡으면서 통산 55승 50무 46패를 기록했으나, 1994년 시즌 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고재욱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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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박종환호
(1996~1997)
차범근호
(1997 ~ 1998)
허정무호 (1기)
(1998 ~ 2000)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종환
(1996~1997)
차범근
(1997 ~ 1998)
김평석
(1998 / 감독대행)
허정무
(1998~2000)
박항서
(2000 / 감독대행)

당시 국가대표팀은 빠따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1996년 아시안컵에서 대실패[2]한 뒤 '누구를 감독으로 선임해야 할 것인지'로 여러 말들이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 야인으로 있었던 차범근이 감독으로 취임했다.

대표팀 시절 차범근이 강조했던 것은 '템포 축구'였다. 선수 개개인이 공을 가진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의 빈틈을 공략, 발 빠른 윙어-서정원, 고정운, 이상윤 등-를 활용하여 측면을 무너뜨리고 결정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최용수-가 골 망을 흔든다. 당시 차범근이 사용한 3-5-2 전술은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상 5-3-2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4 윙어 전술'로 미드의 3 중 2가 윙어(...). 즉 중앙은 유상철 혼자 버티는 전술[3] 전적으로 측면 돌파를 중시하는 그의 전술-타겟 놓고 양사이드 윙어 무한 크로스-은 아시아권에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그 때는 왼편의 하석주와 오른쪽의 최성용이 최전성기이기도 하여 이들의 활동량으로 중앙에서의 빈 공간을 커버하였다. [4]

이러한 전술을 바탕으로 선수들 개개인의 정보를 컴퓨터 분석을 통한 데이터 축구를 앞세워 주목받았다. 1997년 월드컵 최종예선에 일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와 한 조에 속해 6승 1무 1패. 특히 1997년 9월 27일의 도쿄 대첩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축구 한일전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악몽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월드컵 본선에서의 허황된 기대치는 바로 이 도쿄 대첩에서 시작됐으니...

최종예선에서의 호성적에 따라 대한민국 팬들은 '이번 월드컵은 되겠다.'는 긍정적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예상과 달리 참패가 거듭되며 예선 도중 경질되고 말았다. 멕시코에게 1:0으로 앞서고 있다가 내리 3골을 내주며 1:3으로 역전패했고, 결정적으로 네덜란드에게 0:5라는 굴욕적인 스코어로 패배한 게 컸다. 그로인해 한국 축구 역사상 초유의 월드컵 기간 도중 감독 경질을 당하면서 쓸쓸히 혼자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참고로 당시 대한민국을 굴욕적인 스코어로 무너뜨렸던 네덜란드의 감독은 4년 후 대한민국을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였다.

상당히 운이 없었던 월드컵이기도 했다. 주전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괜히 중국하고 평가전했다가 부상당해 못 뛰었지[5], 에이스인 최용수와 서정원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본선 첫 경기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사상 처음으로 선취골을 넣었던 하석주가 바로 가린샤 클럽에 가입해버렸지…서정원은 아이가 수두를 걸렸는데 가여워서 안아주었다가 수두가 옮았다

프랑스 월드컵은 백 태클에 대한 규정이 상당히 강화된 첫 대회였는데, 실제로 보면 태클이 들어갈 때 멕시코의 당시 미드필더였던 라몬 라미네스 선수가 뒤로 돌았기 때문에 고의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태클 자체는 거칠었기 때문에 충분히 카드는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차범근은 이를 두고 "옐로카드로 끝날 정도라 생각했는데 퇴장을 당해서 당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애초에 조 편성부터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당장 팀 각각의 면모만 보아도, 먼저 네덜란드는 이전부터 월드컵 준우승만 2회에 일단 월드컵에 나오면 조별리그 통과를 밥 먹듯이 이뤄내는 나라였다. 1994 월드컵까지는 16, 24개 팀으로 진행되다 보니 월드컵에 개근한 브라질이나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우승 후보 급이라도 꾸준히 월드컵에 출전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당시 스쿼드 조차 과거, 미래를 통틀어도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역대 최고 수준의 레전드급 선수들이 즐비한 최강팀 중 하나였다. 보통 유로 88 우승을 이루어낸 오렌지 삼총사 시절 다음가는 최고 수준의 멤버 구성으로 꼽힌다. 실제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4강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사임할 수밖에 없던 것이 '이런 스쿼드로 4강은 기대 이하 수준의 성적이다'라는 여론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벨기에 역시 피파 랭킹 20위권을 넘나들고 오랜 월드컵 참여경력과 더불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4강에 진출한 것을 비롯하여 16강 진출도 여러 번 이뤄낸 무시 못할 다크호스였으며, 이 두 팀에게 프랑스는 홈 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실제 당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네덜란드전 때 관중석이 오렌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작하기도 전에 완벽히 기가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멕시코는 당시 피파 랭킹 10위권을 다투는 북중미의 강호로 월드컵만 나오면 일단 16강은 가는 국가였다. 당시 북중미 축구에서는 멕시코가 최강이고, 미국이 멕시코를 추격하는 추세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멕시코가 유독 저평가되어서 1승의 제물이라고 보도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이 당시 멕시코 선수들이 해외진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비유럽 리그에 관한 정보도 부족하니 멕시코 리그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이렇게 유독 멕시코 국대가 우리나라에서 저평가당하는 현상은 멕시코 선수들의 해외진출 증가와 인터넷의 발달로 멕시코 리그를 포함, 멕시코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그동안의 월드컵에서 상대했던 팀들이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우루과이, 스페인, 독일 등 멕시코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절대 떨어지지 않는 강팀들이라는 점도 멕시코를 깔보는 원인의 한 축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 멕시코 국대는 캄포스, 블랑코, 에르난데스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쿼드였다. 이런 살인적인 수준의 강호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그저 아시아에서 월드컵 흥행에 구색이나 맞추러 나오는 최약체 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외신들 평에서 한국은 16강 진출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조추첨 당시 국내 언론들은 "멕시코는 우리와 대등하게 경기해 본 경험이 있었고, 네덜란드는 다인종 팀 구성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약하다"는 평을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 팀에 인종갈등이 있기는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팀 내부 문제가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네덜란드가 브라질, 프랑스 등과 경기를 할 때이지 당시 몇 수 아래인 대한민국과 경기를 할 때는 아니었다. 더불어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스타플레이어들의 기강을 잡는데 능숙한 거스 히딩크였다.

"벨기에는 1980년대의 강팀일 뿐 지금은 약세라는 평을 내리며 셋 중에 한 경기 이기고 두 경기 정도 비기면 괜찮겠다"는 실로 무식한 수준의 평을 쏟아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사실 외국 언론과 항시 접하는 한국 언론들이 정말로 경쟁국들을 저렇게 판단하고 그런 평가를 했을리는 없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해외 축구에 무지했던 당시 대중을 기만해댔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기자들과 전문가들이 직접 여러 경기를 보고 평하는 것보다는 외국 언론의 평을 보고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출처가 되는 언론이 속한 국가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축구 강국이니 이들 언론의 분석만 보고 분석을 한다면 해볼 만 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도 했다.

언론이 무턱대고 악의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하는 기사를 쏟아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 월드컵 직전 최종 평가전을 어느 나라와 했는지 생각해보자. 이때만 해도 '자꾸 이겨서 자신감을 갖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약팀과 평가전을 많이 했고, 설령 강팀과 평가전을 한다 해도 제대로 1군과 하는 게 아니라 1.5~2.5군과 경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짜 제대로 된 세계급 강팀과 제대로 붙어보는 경우는 월드컵 정도가 전부였다. 히딩크 감독의 부임 후 2001년에 체코와 프랑스에게 5:0으로 크게 털리기 전까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수준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이런 식의 설레발은 그 이후에도 한참이나 근절되지 않아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세계 축구의 사천왕 중 하나라 불릴 정도의 초강호 아르헨티나 조차 지역 예선에서 삽질했으니까 한국이 이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설레발을 쳤다. 결과는 1-4로 한국은 곤살로 이과인 단 한 사람에게 유린당했다.

그 결과, 정보랄 것이 부족한 당시 대중들은 저런 희망에 가득한 거짓 부렁들에 어울려 춤추며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대를 대표 팀에 거는 촌극이 벌어졌다.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중 대다수가 네덜란드의 전력이 우승후보감이라는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각종 언론 설레발에 속아 투혼만 발휘하면 이길 수 있는 '우리나라보다 조금 강한 상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로 해외축구에 대한 무지의 극치로, 네덜란드 전 대패 이후 국민들 인터뷰를 지금 다시 돌려보면 눈도 못 뜨게 창피한 수준. 물론 이 부분은 언론에서 해외축구에 대한 정보 자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것이나 축구협회에서 제대로 된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압도적인 예선 성적을 자축하기만 했던 탓이 크다. 근데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장 2006년 스위스전이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8강 드립(...)만 봐도. 또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 가자 그게 진짜 실력인 줄 알고 뻐기는 훌리건들이 많았지만 실상 경기를 직접 뛴 선수들은 되려 아르헨티나를 고마워했을 정도였다.

뭐 사실 월드컵 조 편성이야 어떻게 되든 어렵지만…당시 차범근 감독은 이런 조 편성을 두고 언론들이 "16강 할 수 있다!"고 다들 설레발치는 것에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다수 언론이 이랬다. 그나마 딱 하나 시사저널만이 놀랍게도 웃기지 말라며 죽어라 해봐야 1무 2패가 한국 축구 현실이라는 경악스런 예상 결과를 내놓았다. 그것도 네덜란드에겐 한 4점차 정도 대패를 당하고 벨기에에겐 1~2점차 패배, 멕시코와 죽어라 해야지 비긴다는 예상을 내놓았는데, 결국 벨기에와 멕시코가 바뀐 거 빼고 대부분을 맞췄다. 만약 하석주가 퇴장당하지 않았다면 이 예상이 맞았을 확률이 높다. 참고로 이렇게 보도한 시사저널은 당시 온갖 비난과 항의전화를 받았으나 이후 많은 독자들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예측했다고 놀라움에 빠진 반응을 보였다. 사실 시사저널을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알면서도 개소리한 거지... 한국이 아닌 다른 팀으로 현재 국대전력을 기준으로 본 상태에서 조편성을 하면 마치 독일(당시의 네덜란드)-스페인(당시의 벨기에)-콜롬비아(당시의 멕시코)-온두라스(당시의 한국)같은 조편성에서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은 온두라스의 포지션이다. 이런 조 편성에서 온두라스가 16강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

당시가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였다면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이 개소리라며 일축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이 때는 인터넷은 커녕 1가구 1컴퓨터가 정착된 시절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렇게 경질되었다. 경질원인은 대한축구협회와의 불협화음과 감독으로서의 역량 부족 등이 거론되었는데, 이런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축구협회와의 불협화음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경질된 후 김평석 대행으로 바뀌고 나서 뛴 벨기에전은 유상철이 동점 골을 넣으며 무승부로 끝났다. 그리고 차범근은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대회 도중 경질된 유일한 감독으로 흑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아무리 졸전을 해도 월드컵이 다 끝난 이후 감독을 경질하기 때문이다. 대회 도중 경질한다고 얻을것도 없고, 애초에 한국은 월드컵 1승도 못해본 나라인데 축구강국과 정서가 다른데 마치 16강에 당연히 가는 나라가 탈락한것처럼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편. 차범근 이외의 경우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감독이었던 카를로스 파헤이라, 2010년 월드컵 당시의 프랑스 감독인 레몽 도메네크 정도 밖에 없다.

차범근이 감독으로 있었던 당시 선수들은 차범근은 터무니없는 작전을 짜서 강요한다고 그의 지휘를 평가절하였는데, 간간히 연습시합에 참여하여 선수들이 이야기한 '터무니없는 작전'을 자기가 직접 제대로 성공시킨 것과 아들인 차두리가 방송에서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도 아버지(차범근)랑 신체능력 경쟁을 벌여 이긴 일이 없다."란 말로 미루어 볼 때[6] 당시 차범근의 구상과는 달리 선수들의 기술과 신체능력, 전술 이해도 등이 차범근 감독이 원했던 수준에 미달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선수들이 이행할 수 없는 지시는 그게 성공했을 때 얼마나 효과적이건 간에 옳은 지시라고 할 수 없다. 자기가 지도하는 선수들의 기량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지시를 내리는 것 역시 감독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엽기적인 것은 모 선수에게 작전 지시를 하는데, 그 선수가 그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자 왜 이걸 못 하냐면서이걸 왜 못해~ 왜 시범을 보였는데 그 기술이 크루이프 턴에 논스톱 크로스. 심지어 당시 차범근은 오후에 청소년 축구대회에 시상자로 참여하느라 양복에 구두였다 카더라. 이건 해내는 게 천재지, 아무나 시도할 평범한 작전이 아니다. 소위 천재선수가 지도자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근데 이건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말이다. 원래 성공한 선수든 지도자든 상대성적 안에서 말하는것이므로 소수만 성공했다고 평가 받는다. 비스타급 감독 10명이 리그에 들어와서 1~2명만 성공하면 비스타들은 성공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게 맞을까? 스타출신이든 아니든 그냥 어느 분야나 성공을 수식어를 받을 수 있는건 소수인원이다. 저 말이 나오는것은 스타급 아니면 감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도자 인재풀과 선별, 양성 시스템이 취약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감독들이 스타출신이라서 망해도 스타출신 흥행도 스타출신인데 망한 사람이 당연히 더 많으니 기억에 강하게 남아서이다. 다만 한국 스포츠 팀 특유의 상명하복 구조와 슈퍼스타 의존성으로 인해 선수들 개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훼손되기 쉽다는 단점이 스타출신 감독으로 부터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선수와 감독의 주요 갈등 요인 중의 하나이다. 차범근의 울산 현대 감독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차범근이 K리그 감독으로서 국내 원탑을 찍고 국대 감독이 된 게 아니다.

오죽하면 이 일화를 반영한 듯 KDB 대우증권 CF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플립플랩과 마르세유 턴, 제치고 라보나 킥으로 마무리하며 참 쉽죠라며 웃는 연출을 보여줬다. 물론 이 광고는 합성이었지만.#

차범근 본인에게도 이 당시 월드컵은 가장 뼈아프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제 그렇게 아플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최근 거스 히딩크를 만나 "너님 때문임" 하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세월이 지나 좀 상처는 아문 모양. 그러자 히딩크는 웃으면서 미안하다라고 말했고, 이를 찍고 있는 카메라 기사에게 이 부분은 편집해 주세요라면서 농담까지 했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 원한으로 맞붙은 것도 아니고 히딩크 역시 자신의 조국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기에 누굴 만나든 이겨야 할 의무가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일부러 져줄 경우 내부적으로는 자국 국민들에게 역적으로 취급당하고 외부적으로는 승부조작 의혹을 당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가 대한민국을 5-0으로 격파한 것은 그냥 히딩크가 그렇게 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지 한국에 대한 악감정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16년이 지나 1998년 조 편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꿀 조에서비슷한 성적을 거두고도 도중 경질은커녕 유임되는 어떤 분의 처사를 보고 차두리가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의 악화로 홍명보는 끝내 사퇴했다.

3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

3.1 2010년 이전

국가대표감독 중도 사임이라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남긴 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로축구 경기에서 선수들이 승부 조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대한축구협회의 분노를 사 '한국 축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5년간의 자격 정지 중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7][8] 하지만 AFC에서 아시아 축구영웅을 너무 막 대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자격정지를 3년으로 낮춘다.

이후 중국 슈퍼 리그 등을 전전하다가 수원 블루윙즈의 감독으로 K리그로 복귀하면서 다시 감독으로 활약하였다. 다만, 이후 행보를 보면...

2004 시즌 우승
2005 시즌 10위
2006 시즌 준우승
2007 시즌 3위
2008 시즌 우승
2009 시즌 10위

2004년 첫 부임한 그는 그 동안 김호 감독 때 구축하던 스타일을 뒤엎고 피지컬을 활용한 축구로 수원을 개조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물론 선수층에 큰 변화를 주기 보다는 기존의 선수+애제자 김대의와 공격수 마르셀을 추가하였는데 시즌 초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후반기 수비적인 부분을 보강해내면서 후기리그 우승, 수원의 3번째 트로피를 안기게 되었다.

2005년엔 조병국, 권집, 이종민, 조성환, 고창현 등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던 어린 선수를 대신해 김남일, 전재운, 송종국, 마토 등을 영입하면서 경험 있고 즉시 성적을 뽑아낼 수 있고 자신의 축구 색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선수들로 꾸며내면서 컵 대회 우승을 얻어내지만 이후 첼시와의 경기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속출하였고 특히나 선전원정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내리막 길을 걸으며 2000년 5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전재운과 손정탁의 트레이드 건은 지금에서도 논란거리.

2006년 전반기 역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퇴진 압박을 받게 되었고 특히 송종국의 무리한 투입과 더불어 연이어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독일 월드컵 해설까지 가버리겠다고 해 팬들의 강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기회를 잡지 못하던 선수들을 중심으로 컵 대회에 내보내면서 성적은 더 바닥을 기었고 초유의 서포터 보이콧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서는 이관우와 백지훈의 영입을 통해 반전을 보여줬고 FA컵과 리그 준우승을 이끌어 냈다. 물론 당시 우승을 못하면서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없던 팬들은 퇴진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2007년은 에두와 안정환의 영입과 나드손의 리턴으로 시즌 중반으로 향할수록 강한 수원을 만들어냈다. 했다하면 3대0, 4대0이 나와 팬들 사이에서는 수원 사점 블루윙즈라 불릴 정도였는데 당시 사용하던 전술이 워낙 볼위닝에 집착하는 전술이다 보니 체력의 손실이 강했고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에게 패퇴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이로서 2년 연속 무관에 이르며 팬들은 다음 시즌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남일과 안정환 등이 팀을 떠나며 다음 시즌을 불안케 했다.

아마 차범근 그에게 최고의 한해라면 역시 2008년 시즌을 꼽을 것이다. 당시 수원은 김호 감독 시절 가지고 있던 8연승 기록을 갈아치웠고 99년과 2006년에 경신한 13경기 팀 무패최다기록을 18경기로 갈아버렸을 정도로 승승장구 하였다. 물론 시즌 중반 힘이 꺾이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가 했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은 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하던 선수들의 근성을 일으키며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티켓과 리그 1위를 쟁취,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리그 컵까지 해서 두개의 트로피를 얻어내는 성과를 보여준다.

아마 그의 감독 커리어에 있어서 이때가 가장 최고조의 순간이 아닌가 싶은데 그 이후 그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2009년 가시마 앤틀러스를 상대로 특유의 선 굵은 축구로 4-1로 발라 버리자 까방권을 획득하나 싶었으나 얼마안가 원정에서 3-0으로 캐박살났고 K리그 올스타와 J리그 올스타 팀이 맞붙은 조모 컵에서 세 번째로 만난 가시마 감독에게 그야말로 볼 점유율, 패스웍, 전술 등 모든 부분에서 완패하며 4-1로 깨지자 K리그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었다.

2007년 K리그 신인왕에 오른 하태균은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활약이 없다. 그토록 공을 들였던 서동현은 2008년 대활약을 펼치며 각성 하는 듯 했으나 2009년 완전히 버로우해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울산에서 데려온 이상호는 2009 시즌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감이 있었으며, 그나마 2008년 시즌이 끝나고 신영록은 해외로 떠났다. 그런데 매년 드래프트 때면 선수는 참 괜찮게 잘 뽑으니 실로 미스테리.

혹자는 감독 하지 말고 유소년 축구단 단장을 하면 훨씬 많은 업적을 남길 거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주최하는 차범근 축구 상에 선정된 유망주들의 면면을 보자면 박지성, 이동국, 기성용, 김두현 등.

성실하게 자기일 열심히 하는 선수들과는 궁합이 잘 맞았지만 에고(EGO)가 강하거나 (누가 좋아하겠느냐 만은)불성실한 선수들과는 마찰을 빚는 일이 자주 있었다. 최강희, 서정원, 홍명보, 최영일, 나드손 등이 그 예. 다만 단순히 수원과 안 좋게 헤어졌다고 끼워 넣는 경우가 있는데 조재진조성환은 두터운 스쿼드에 밀려 기회를 많이 부여받지 못한 상황 속에 팬들의 노골적인 야유까지 곁들여져 수원 구단 자체를 싫어하게 된 케이스[9]고 리그에선 한골도 못 넣으며 부진했던 안정환이나 항명파동 일으켰던 이천수는 순전히 본인 탓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매년 1개 이상의 우승컵은 가져오고 있어서 마냥 비난할 수는 없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던 2009년에도 FA컵의 우승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3.2 그리고 2010 시즌

2009 시즌의 불명예를 만회하겠다며 야심차게 선수 영입을 했지만 결과는 그야말로...야심차게 뽑은 브라질 용병은 3명 다 시망급이고, 이분 말고 제주 유나이티드에다가 배기종과 박현범을 조공하고 강민수와 이동식을 받아왔다. 국가대표 팀에서는 유독 부진해서 욕을 엄청 쳐 먹지만 강민수는 리그에서는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주전을 먹는 선수이고, 그럭저럭 활약을 하였지만 이동식은 아름다운 2군행. 문제는 박현범으로 제주에서 포텐셜이 터졌다. 그나마 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염기훈유리몸.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운재의 부진까지 겹치면서 결국 10라운드에 리그 15위, 즉 꼴찌를 기록한다.

혹자는 차범근이 잘못한 게 아니라 허정무 아들 강민수 탓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0]

또, 2010년 5월엔 차범근 감독의 경기 후 기자회견의 발언도 곧잘 까임 대상에 오르고 있다. 관련 내용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항목을 참조.
사람이 낙천적인건지 어떤 건지, 졸전을 펼치고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언을 하거나 선수들의 플레이가 좋지 못했다는 등의 발언도 자주해서 '자신의 전술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항상 선수 탓만 한다.'고 까이기도 한다.
물론 감독의 특이한 언행이나 언플이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성적이 나쁘고 경기내용마저 신통치 않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2010년의 차범근의 상황은 선수 시절 명성을 감독하면서 다 깎아먹을 기세. 차범근이 감독을 못하는 이유는 자기 스펙에 맞춰 작전을 짜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3.3 사임

2010년 5월 20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후임 감독 선정을 위해 6월 6일 전북 전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한 후 사임할 예정이라고 한다. 결국 6월 6일에 수원의 패배를 지켜보며 쓸쓸히 사임하고 윤성효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차범근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여담으로, 차범근과 그의 가족이 귀국한 날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1989년 10월 3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날에 독일은 완전히 통일된다.
  2. 지금도 회자되는 이란 쇼크. 전반에 2:1로 앞서다가 후반에 다섯 골 먹고 참패했다.
  3. 당시 유행에 가까웠던 사령탑 축구 덕에 대한민국 언론은 계속 '플레이메이커'를 찾았고 그냥 중앙에 선다는 이유로 유상철을 '플레이메이커'나 '게임메이커'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게임이 안 풀리면 유상철에게 욕 몰빵
  4. 보면 알겠지만 유상철김남일이나 박지성이 아니다. 결국 차범근 감독의 실전 경험 부족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보여주었다.
  5. 이 부분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2006 독일 월드컵 직전 전성기를 달리던 이동국이 부상당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 2010년으로 미뤄진 것과 같은 맥락.
  6. 차두리는 저 말을 할 당시에 현역 선수들 중에선 한국 최강의 피지컬을 갖고 있었다.
  7. 하지만 당시 차범근의 발언과 2011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문제의 일이다. 차범근 감독이 발언한 내용은 어뷰징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K리그 승부조작 사건#s-2 참조.
  8. 승부조작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얘기가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차범근의 발언으로 수위에 오른 것뿐이다. 목적은 판이하지만 이 승부조작의 경우 유소년 수준부터 프로까지 이어지고 있기에 더더욱 위험한 부분.
  9. 사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이 선수들이 수원을 나간 뒤 포텐이 터져서 수원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언급되는 것이다. 반면 수원은 하단에도 언급하다시피 세대교체에 큰 문제를 드러냈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차범근이 이들을 안고 갈 수 있었다면...
  10. 이는 편견에 가까운 농담으로 하는 소리고, 현재 수원 수비진에 강민수 마저 없었다면 더 대책이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 곽희주와 리웨이펑을 위시한 기존 수원 수비진들의 기량 하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