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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코비[1] : Challenger, go at throttle up
딕 스코비 : Roger, go at throttle up[2][3]
미션 패치[4]. 우주에서 관측하기로 했던 핼리 혜성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1 개요
1983년 4월 4일 STS-6 미션으로 데뷔하며 운용되었던 4년 동안 어떤 궤도선보다 자주 우주로 나갔고 많은 시간을 우주에서 머무른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가 우주왕복선의 개발 이래 25번째인 STS-51-L에서 발사 도중 폭발한, NASA 창설 이래 전대미문의 쇼크, 대참사. 그리고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과 우주 정거장 개발 계획, 그리고 미군의 SDI를 뒤흔든 사건.
챌린저는 원래 활공시험기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지상 진동 시험기로 만들어졌지만 우주비행이 가능하게 개조되어 컬럼비아호에 이은 미국의 두번째 우주왕복선이 되었다.
'챌린저'의 이름은 우주왕복선이 만들어지기 이전, 최후의 달 유인 탐사 미션이었던 아폴로 17호의 달 착륙선에서도 쓰였다.
1.1 명칭
우주왕복선을 활용한 일련의 우주 미션은 정식 프로젝트명이 STS-X[5]였다. 하지만 1983년 하반기, 1984 회계년도부터 NASA는 미합중국 공군의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도 우주왕복선을 발사할 계획을 잡고[6]이 때부터의 미션 명칭을 STS-4[7]1[8]-B,C,...[9] 같은 식으로 지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런 거 없고 당시 NASA 국장 제임스 벡스가 아폴로 13호의 사례를 보고 13이란 숫자를 너무 무서워해서 결국 STS-13을 피하기 위해 벌인 삽질이라 카더라.[10][11] 어쨌든 이런 괴이한 명명법도 1986년 1월 28일의 이 미션과 함께 흑역사화했다.
2 챌린저의 통산 기록
총 69일을 우주에서 보냈고, 지구를 987바퀴 선회했으며 총 60명의 남녀가 챌린저에 탑승했다.
챌린저는 야간 발사를 실시한 사상 최초의 우주왕복선[12]이었고, 고장난 인공위성을 우주에서 잡아 보수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첫 왕복선[13]이다.
우주로 올라간 첫 미국인 여성, 우주로 올라간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14], 미국인 여성이 하는 우주유영[15], 우주왕복선 계획의 첫 우주유영[16], 사상 최초의 무선 EVA[17], 최초의 궤도 진입 중단[18], 최대 인원 수송[19] 등의 기록들을 세웠다.
3 탑승자
위에서 왼쪽부터
엘리슨 쇼우지 오니즈카 - 미션 스페셜리스트. 미합중국 공군 중령.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우주비행사. 첫 미션은 국방부 기밀 미션 STS-51-C.
샤론 크리스타 코리건 맥콜리프 - 1948년 9월 2일생. 우주에서 원격수업을 실시할 예정이었던 교사.
그레고리 브루스 자비스 - 1944년 8월 24일생.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하워드 휴즈가 설립한 휴즈 항공(Hughes Aircraft Company)의 우주개발부문(Hughes Space and Communications Group) 직원으로, 이번 미션에서 TDRS-2 통신위성[20]의 궤도 전개를 위해 투입되었다.
주디스 애를린 레스닉 - 1949년 4월 5일생. 미션 스페셜리스트, 우크라이나 이민 2세 유대인으로, STS-41-D에서 첫 우주비행을 수행하며 사상 2번째 미국인 여성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마이클 존 스미스 - 1945년 4월 30일생. 우주왕복선 조종사. 미합중국 해군 중령. STS-61-I 미션 파일럿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프랜시스 리차드 "딕" 스코비 - 1939년 5월 19일생. 미션 지휘관. 미합중국 공군 중령. X-24 리프팅 바디 테스트 파일럿 출신. 아들 리처드 스코비 주니어가 미국공군사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21]
로날드 어윈 맥네어 - 1950년 10월 21일생. 미션 스페셜리스트. 레이저물리학을 전공한 물리학자로, STS-41-B에서 첫 미션을 수행했다. 색소폰을 불 예정이었던 사상 2번째 미국 흑인 우주비행사.
4 대폭발
7명의 소중한 생명을 가져간, 운명의 폭발
1986년 1월 28일[22] 셔틀 프로그램의 통산 25번째 미션인 STS-51-L에서 챌린저 오비터가 이륙한 지 73초 후에 폭발하여 탑승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모습은 CNN의 실시간 TV중계[23]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 더욱 큰 충격으로 인식되었다. 역대 TV 생방송에서 나온 최악의 사고를 꼽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건.
이 흑역사로 기록될 사건으로 대폭 위축된 미국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은 싸그리 캔슬, 그로부터 2년 뒤에야 왕복선의 발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폭발은 영상 2분 참조. |
이후 발사체의 잔해들은 1987년 1월에 폐기한 두개의 미니트맨 미사일 사일로에 넣어져 장기보관 되었다.
이후 이 사고는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도 소개되었다.
5 사고의 재구성
영상판독에 의하면, 승무원들은 우주선 폭발 후에도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고고도에서 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15km 높이에서 시속 320km의 속도로 추락했다고 한다. 실제로, 우주선 내에 장착되어 있는 비상용 호흡장치 7개 중 3개[24]가 활성화되어 있는 채 잔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살아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후일 영상 판독에서 폭발 시 까만 점같은 추락하는 것이 연기와 함께 터져나오는 것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승무원 모듈이었다고...원래 이런 사태에 대비해 머큐리 계획 때부터 유인우주선에는 비상탈출용 로켓[25]이 있었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로켓이 달린 건 1회용 우주발사체들이고, 우주왕복선에는 그 특이한 구조 때문에 이런 장비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설계상 예산 문제로 처음부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여서 끼워넣기가 바로 안 된다는 점이다. 대신, 우주왕복선의 문에서 튀어나오는 기다란 장대로 사고가 터지면 우주비행사들은 낙하산을 멘 채 그 장대에 몸을 의지하여 왕복선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추가되었다.[26]
사고의 원인은 로켓 부스터의 이음매를 메꾸는 역할을 하는 고무재질의 O-Ring에서 차폐유지가 되지 않은 것. 우측의 고체로켓부스터로부터 나온 고온의 연소가스에 노출되어 타거나 부식되어 실링효과가 떨어진 상태에서 강한 공기저항에 의하여 큰 힘을 받게 되자, 외부탱크에서 산소가 누출되어 사고가 났다고 하고 있다. O-Ring은 고무재질이 반드시 들어가며, 발사중 빈틈이 발생하면 그쪽을 막으면서 적당하게 변형되어야 했다. 고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체가 화씨 65도 이하(섭씨 18.5도 이하)의 온도에서는 급격히 탄성력을 잃어버려, 본래의 형태로 돌아올만큼의 충분한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발사 시의 기온은 영하권이었으며, 이로 인해 탄성을 잃어버려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O-Ring은 뜨거운 부스터 내의 가스로부터 생기는 압력을 계속 받았다. 이것은 O-Ring의 파손, 결과적으로는 계속된 이음새 틈으로의 가스 분출로 우주선의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것은 자명했다. 한마디로 추워서 딱딱한 고무에 금이 갔다. 후대의 추가적인 판독에 의하면(위의 영상 참고) 발사대에서 점화를 시작하자마자 터질 수도 있는 원인인데 바로 터지지 않은 이유는 연료찌꺼기가 구멍을 막아서 O-Ring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7]
이 찌꺼기들이 62초만 더 버텼다면 부스터가 떨어져나가며 챌린저는 무사했겠지만... 허리케인급의 제트기류에 흔들려[28] 이 찌꺼기들이 빠져버리고 연료는 누출, 외부탱크의 산소와 만나고 추진기 상단이 윗쪽 연료탱크와 충돌, 대량의 연료가 한 순간에 연소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것이 단지 O-Ring과 날씨 탓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뜯어보면 이것도 NASA의 다른 실패작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인재에 속한다.[29]
부스터 제작사 타이오콜[30]의 기술자들과 심지어 O-Ring의 설계를 직접 담당했던 로저 보졸리(Roger Boisjoly)는 O-Ring의 개수형이 나오기 전까지 미션 발사를 미룰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보졸리는 정확히 1년 하고도 4일 전 발사되었던 STS-51-C 미션[31]을 통해 추운 날씨의 발사가 위험함을 깨달았다. 수거된 고체 로켓 부스터에서 탄 자국이 발견되었고, 조사 결과, O-Ring이 다 타들어가 1mm도 남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었던 것이다. 보졸리는 이를 근거로 제시하며 '영상 11도 이하에서는 절대 발사해서는 안 된다'며, 발사 전날은 물론이고 발사 당일 12분 전까지도 발사 연기를 요청했다. 관련 인터뷰도 존재한다. #
그러나 NASA와 2차 계약을 맺기 직전이었던 타이오콜 사와 챌린저 호의 발사기념 연설을 하기로 되어있던 레이건 대통령을 의식했던 NASA도 이들의 요청을 모두 묵살하고 말았다. 이는 NASA와 타이오콜 사가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승리하여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 그러나 이런 대형사고 후에도 타이오콜 사는 2차 계약을 성사시켰으며, NASA측 책임자이자 '그럼 뭐 4월까지 기다리란 말이냐'며 틱틱거린 래리 멀로이는 승진했다. 이뭐병...
정부의 사고진상조사단엔 말년에 암투병중이던 물리학자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 있었고, 그의 전기에 따르자면 다른 조사단이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을 하는 사이 관련 기술자를 제외하곤 처음으로 진상을 알아냈고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보신주의 문화와 관료체계에 쩔어있는 NASA의 문화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했다.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중에 얼음물에 O링 샘플을 담그는 것을 통해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알리려고 했다고. 최종보고서에서 마저도 이를 덮으려는 분위기 속에서 계속 우긴 끝에야 O링과 나사의 뻘짓에 의한 인재를 다룬 그의 보고서를 부록으로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이야 뭐라 하건!'의 뒤쪽에 파인만이 진상조사단에 제출한 보고서의 일부가 부록으로 실려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읽어보면 좋다. 이 사고조사는 매우 철저하고 포괄적인 조사과정과 모든 가능성을 포함해 한점의 의혹도 남지않게 철저하게 분석한 뛰어난 조사보고서로 유명해서 사고조사보고서의 모범사례로 널리 일컬어지고 있다.
리처드 파인만의 저 유명한 TV 실험 중계 영상. |
이후, 파인만의 제자이자 199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오셔로프는 STS-107 참사의 진상조사에 참여했다. 샐리 라이드는 챌린저에 이어 나이 먹은 뒤 컬럼비아 사고가 났을 때도 패널로 불려나왔다.
6 그 외의 이야기
사실 이 미션에서는 위성의 궤도 전개 어쩌고 시시콜콜한 얘기 외에도 중요한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사상 최초의 우주 원격 수업! 1985년 NASA는 '우주 교사 프로그램(Teacher in Space Program)'를 기획했다. 실제 교사가 우주왕복선에서 직접 과학 실험을 하면서, 미국 전역의 학교에 원격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무려 12,000명의 교사가 지원했고 치열한 경쟁 끝에 '크리스타 매콜리프'라는 여교사가 선발돼서 강훈련끝에 1986년 챌린저호에 탑승했다.
보밋 코밋에서의 훈련 장면. 오른쪽이 백업 교사인 바버라 모건이다. |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를 지켜보던 바버라 모건의 영상. |
이후 우주 원격 수업은 프로젝트가 완전히 엎어졌다. 사실 이 프로젝트도 취지는 좋아보이지만 냉정히 보자면 언플일 뿐이었으니... 챌린저 사고 이후 지적된 NASA의 실속 없이 과도한 언론플레이를 타파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고 결국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사고로부터 12년이 지난 1998년, 47세의 아줌마가 된 바버라 모건은 다시 NASA를 찾아갔고, 정식 우주인 선발에 지원하여 신체검사와 심리검사를 모두 통과한 끝에 십 수 년은 젊은 파일럿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07년 8월, STS-118 ISS 도킹 미션에서 모건은 환갑을 앞두고서야 매콜리프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1985년 자원했던 교사 수 천 명이 모여서 엔데버[32]의 발사를 지켜봤다. 이 미션에서 함께 ISS에 간 동료들 중 최연소이자 모건의 1998년 기수 동기인 트레이시 콜드웰(Tracy Caldwell)은 1986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한편으로, 1986년 초는 핼리 혜성이 지구 근처에 오는 기간이라 우주에서 핼리 혜성을 관측한다는 사상 초유의 기회이기도 했다. NASA가 이 시기에 무리해서 발사(직전 미션도 천문학 관련 미션이었다)를 강행한 것도 핼리 혜성이라는 유명한 떡밥을 놓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고, 우주 원격 수업에서도 핼리 혜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다룰 예정이었으나... 2061년 여름을 기대하자. 이 때가 되면 달에서도 관측할 수 있겠지?
NASA가 천문학사에서 잃은 것은 핼리 혜성 관측의 기회 뿐만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2월 초신성 SN 1987A의 발견으로 지구상 천문학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건만, NASA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은 이 연구에서 아무 기여도 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NASA의 야심작 허블 우주 망원경이 지구 상에서 빌빌대는 사이[33] 소련 우주인들은 막 가동되기 시작한 미르에서 초신성을 관측하였다. 애도 분위기와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사이 이런 빅 이벤트들이 터지자 당연히 전미가 열폭했다. 지못미.
세계구급 찌라시로 유명한 위클리 월드 뉴스는 이 미션 당시의 대화록을 입수했다는 소설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대화록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주선 발사 초기의 압력은 3G~5G, 크면 8G를 넘보는 엄청난 수준의 압력이라[34]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상황 같은 건 애당초 불가능에 가깝다. 초인이라면 모를까. 즉, 우주선 내부의 화재로 타죽더라도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죽는다는 소리다. 솔직히, 사망 시 대화 내용 녹음테이프보다 이 쪽이 훨씬 끔찍하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The Final Countdown이 챌린저호 추모곡이라는 도시전설이 퍼져있는데, 전혀 사실 무근의 거짓말이다. 항목 참조. 진짜 챌린저 참사와 관련된 곡은 Owl City의 'Galaxies'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건 아니지만, 앞의 인터루드 제목이 'January 28, 1986'인 걸 감안했을 때 추모곡이 맞는 걸로 팬들은 추정하고 있다.
승무원인 로널드 멕네어(Ronald Ervin McNair)는 우주로 색소폰을 가져가 장 미셸 자르가 작곡한 <Rendez-vous Ⅵ>라는 곡을 협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고로 인해 무산되었고, 장 미셸 자르는 맥네어를 기려 <Last Rendez-Vous(Ron's Piece)>라는 곡을 만들고 추모공연으로 휴스턴에서 <Rendez-Vous Houston>콘서트를 연다.
BBC에서 만든 2013년작 TV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가 이 때 터진 사고를 수사하는 위원회(라 쓰고 리처드 파인만이라고 읽는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윌리엄 허트가 파인만을 연기했는데, NASA라던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관료들이라던지 군이라던지 하는 여러 기관을 대표하는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얼굴마담 노릇[35]을 시키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수많은 강연을 째고 끌려왔다가 제일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협조적인 공군소장 도널드 쿠티나 장군은 계급이 낮아서 나라에서 리무진을 안 준다고 툴툴대며 파인만을 정부 소유 자가용 제트기에 태워서 직접 몰고 다니기도 한다(...) TV 영화라는 점, 우주덕들이나 파인만 빠돌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영화라는 핸디캡이 제기되면서도 IMDB 7점 대의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내용을 첨부하자면
이미 조사위원회 내부의 상당수와 NASA의 현장실무자들은 O-Ring의 문제라는 심증을 갖고 있었으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데, 이 중에 몇 명이 이런 저런 경로로 파인만에게 힌트와 미묘한 암시아이보리 비누를 주면서(직접 폭로하면 자기나 동료가 다치니까...) 파인만이 진실에 이르도록 유도한다.[36] 최초의 미국 여성 우주인으로 조사위원회 내에선 NASA의 입장을 대변하는 높으신 분 역할을 하고 있던 샐리 라이드가 실제론 최초의 제보자였으며, 라이드로부터 진실을 전해들은 공군 소장 쿠티나 장군이 겉으로는 공군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높으신 분의 면모를 보이면서 뒤에선 파인만이 진실에 이르도록 은근한 힌트를 계속 던지고, 이 와중에 NASA의 현장 실무자들로 추정되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온다. 그리고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언급되듯이, 이 사건 이후로 미 공군은 군사적 목적의 우주 개발을 NASA에 맡기는 것을 더욱 꺼리게 되었고 결국 쿠티나의 주도 하에 델타 Ⅱ 로켓으로 위성을 쏘아올리며 우주 개발 부문에서 NASA와 일정 부분 거리를 두게 된다.
- ↑ 바로 다음 번인 STS-26 Return to Flight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
- ↑ 메인엔진 추력이 최고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메인 엔진 추력이 최고라 함은 즉 SSME가 정상이라는 것이고, SSME가 정상이라 말하자마자 뜬금없이 부스터가 터져버린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우주왕복선 발사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유명한 순간은 이 챌린저 폭발 사고였다. 최후의 셔틀 발사였던 STS-135 미션 당시 Atlantis, go at throttle up이라는 말이 들려올 때 어릴 적, 젊을 적 이 사고를 봤던 올드비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 ↑ 이게 왜 발사 순간이 아니라 수십초 지난 시점이냐면, 무지막지하게 가속하면서 기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발사한 뒤 72% 가량까지 SSME 추력을 조절해놨다가 음속을 돌파한 뒤 회복하는게 FM이기 때문이다.
- ↑ 패치에 있는 영어 글자들은 당시 챌린저에 탑승했던 승무원들의 이름들이다.
- ↑ 공식 명칭인 Space Transportation System의 약자였지만 아무도 트랜스포테이션 어쩌고라 안하고(...) '스페이스 셔틀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단지 미션 명칭만 STS-X.
- ↑ 정확히 말하자면, SDI 때문에 군사위성 마구마구 쏴제끼려던 공군과 예산다툼이 생기자 NASA에서는 "까짓거 우리가 셔틀 자주 쏴서 올려줄게!" 하며 높으신 분들을 감동케 했다.
- ↑ 미션이 확정된 연도 기준. 84년에 확정되었으면 4로 시작하는 식.
- ↑ 평소대로 케이프 커내버럴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하면 1,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하면 2. 정작 미 공군 주도의 미션을 고려하여 이렇게 미션 명명법까지 뜯어고쳤건만 미 공군의 위성 발사는 NASA가 국회의원을 우주에 보낸다거나 하는 기이한 이유를 들어가며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결국 서부에서 발사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 ↑ 순서
- ↑ 참고로 STS-13...이 아니라 STS-41-G가 된 이 미션은 최초로 2인의 여성 우주 비행사가 탑승(샐리 라이드, 캐스린 설리번)하고 그 중 설리번이 미국 여성 최초의 우주 유영을 수행했던, 꽤 성공적이었던 미션이다. 참고로 이 미션 역시 챌린저 미션이었다.
국장님의 혜안 덕인지 아니면 어차피 성공했을 미션에 괜한 삽질을 벌였던 건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 ↑ 다만 이상한 명명법 도입 이전에 STS-13으로 코드명이 정해져 있던 미션은 11번째의 STS-41-C였다. 이 미션 역시 챌린저 미션으로, 이는 솔라맥스 위성 수리를 수행했고 후일 케슬러 신드롬 연구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STS-51-L의 희생자인 딕 스코비가 처음 수행한 미션이기도 했다.
- ↑ STS-8
- ↑ STS-7. 이 위성의 캡처 훈련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 사람이 샐리 라이드였다.
- ↑ 가이 블루퍼드(Guion Bluford), STS-8.
- ↑ STS-41-G
- ↑ STS-6
- ↑ STS-41-B
- ↑ STS-51-F. 다만 이 미션 자체가 위성 쏘는 미션이 아닌 우주에서 실험하는 미션이어서 예정보다 저궤도라고 미션 자체에 별 지장은 없었기에 조금 수정한 일정을 전부 수행하고 돌아왔다.
- ↑ STS-61-A 역대 유일무이한 8인 발사/8인 귀환 미션으로, 스페이스랩 미션이어서 스페이스랩의 관제 또한 휴스턴이 아닌 서독에서 맡았다.
- ↑ Tracking and Data Relay Satellites. NASA가 교신을 위해 발주한 통신 위성 시리즈로, 초기 버전은 퇴역했지만 후기 버전들은 지금도 활동하며 우주 통신에 써먹고 있다. 다만 모기업 휴즈 항공 우주개발부문은 보잉에게 인수되었다.
- ↑ 2015년 기준으로 소장이다.
- ↑ STS-61-C가 이런저런 이유로 발사 카운트다운만 쳐도 4전 5기의 도전을 했던 기괴한 미션이었던지라 일정이 너무 늦어져서 발사일이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어졌다. 당장 STS-61-C의 착륙으로부터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우주왕복선 발사를 또 강행한 것. 또한 이로부터 19년 하고도 하루 전인 1967년 1월 27일은 아폴로 1호의 테스트 중 화재로 세 우주인이 숨진 날이었기에 NASA는 이후로 1월 말을 공식 추도 기간으로 정했는데, 2003년 2월 1일에 STS-107 컬럼비아가 재돌입 중 폭발하여 다시 7인의 승무원을 모두 잃었다. 아무래도 NASA는 이 기간에 웬만하면 우주 미션 자제해야 할 것 같다(...)
- ↑ 우주왕복선 발사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타 방송사는 녹화보도만 했는데, CNN은 지속적으로 생중계를 했고, 이 사고를 생생하게 보도한 까닭에 CNN은 전문 뉴스 채널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 ↑ 마이클 스미스, 주디스 레스닉, 엘리슨 오니즈카.
- ↑ 엔진이 위치한 우주선 하단이 폭발시, (주로)상단에 있는 유인부분이 분리된 후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비상탈출용으로 만들어진 추진장치.
- ↑ 영화 스페이스 카우보이 마지막 부분에 잘 나온다. 물론, 이런 장비로 챌린저호 폭발사고와 같은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지만.
- ↑ 연료에 효율성 등을 위해 알루미늄이 추가되었는데, 이런 연료가 연소되면 찌꺼기가 발생한다고 한다.
- ↑ 폭발 직후 연기가 직각으로 꺾였던 것도 이 제트기류 탓이라 한다. 발사 30분 전, 발사지점 상공을 지나가던 항공기가 시속 300여km급의 제트기류를 만나 고도를 낮춘 것이 확인되며 원인이 규명되었다.
- ↑ NASA의 그 시절 안전불감증이 어느 정도냐면 우주왕복선은 안전하니까 선내에서 여압복도 필요없다고 간편한 비행복에 완전 밀폐가 안되는 비행헬멧만 주고 우주비행을 시켰다! 이 사고 이후에야 여압복과 여압헬멧이 재도입되었다.
- ↑ 현재는 M&A를 여러번 거치며 오비털의 일부가 되었다.
- ↑ 디스커버리 미션으로, 켄 매팅리가 사령관을 맡았던 국방부 기밀 미션이었다. STS-51-L의 희생자인 엘리슨 오니즈카가 처음 탑승했던 미션이기도 했다.
- ↑ 참고로 STS-118 미션은 원래 컬럼비아의 STS-107 다음이자 첫 ISS 방문이 될 예정이었다.
- ↑ 원래, 1986년 전개되어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비록 훗날 STS-31 미션에서 전개되고 우주공간에서 빌빌(...)대던 것을 생각하면 큰 일은 못했을 거라 볼 수도 있으나, 이 역사적인 우주 망원경의 첫번째 퀘스트가 우리은하 근방의 초신성 관측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너무도 크다.
- ↑ 3G가 어느 정도의 압력이냐 함은, 고압에 약한 사람이면 질식할 정도의 수준인 롤러코스터도 기껏해봐야 2G정도밖에 안 된다. 훈련을 거친 우주 비행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5G 이상으로 넘어가면 호흡 곤란이나 블랙 아웃, 화이트 아웃 등이 오게 되는데, 퍽이나 낮은 수준인 3G 정도의 압력이라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다.
- ↑ 샐리 라이드나 닐 암스트롱 같은 NASA의 레전드 우주 비행사들도 NASA에서 시켜서 들어온 거고, 위원회의 여러 관료들도 행정부의 연줄로 들어온 조사관들이라 상호지간 높으신 분들 놀이나 한다.
- ↑ 실제 많은 대형참사, 사건사고의 진실이 이런 식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현장 실무자들은 대부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등. 황우석 사건에서 보듯이 내부고발이란게 정말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