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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elts
라틴: Celtus
아일랜드 소녀
켈트는 프랑스, 영국 등지에 살던 민족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어로는 Keltoi, 라틴어로는 Gallus 혹은 그리스어 형태를 받아들여 Celtae라고 불렀다. 라틴어 이름 Gallus에서 유래하여, 이들이 살던 땅, 즉 현재의 프랑스 지역을 갈리아라고 불렀다. (비슷한 것으로 게르만-게르마니아).
흔히들 말하는 켈트족이란 정확히 말하면 '후대의 언어학자들이 켈트어라고 명명한 언어군을 사용한 집단을 싸그리 일컫는 말'이랑 구분이 필요하다. 즉, 고대의 켈트인들은 저희들끼리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 땅에 살던 켈트인이 프랑스 땅에 살던 켈트인을 만나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하면 GR하네..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1][2] 그리고 현대 켈트인들도 사는 지역이나 나라마다 언어가 조금씩 다른 편이며 종교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아일랜드, 브르타뉴는 가톨릭이지만 스코틀랜드[3]와 웨일스[4]는 개신교가 주류이다. 특이하게도 개신교쪽으로 건너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는 16~17세기 정치세력화된 개신교 주요 종파들 중에서 가장 가톨릭과 비타협적이고, 교리나 전례적으로도 가장 극단적이었던 반면, 역으로 가톨릭권에 남았던 아일랜드와 브르타뉴의 가톨릭 문화 또한 가장 전투적이고, 보수적이며, 강경하게 개신교와 타협을 거부한 가톨릭 내부에서도 매파였다. 그 사이에 낀 잉글랜드만[5] "우리 켈트족 이웃들은 뭐든지 하면 좀 끝장보지 않고 적당히 하는 법을 몰라"라고 하며 골치아파하는 형국이다.
게르만족은 물론 로마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럽 전역에 분포해 살며 유럽의 주인노릇을 했다. 전성기에는 흔히 켈트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지역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나 동유럽, 이집트(!)[6]까지 진출하여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를 자주 약탈했다.
이 시절 켈트의 원정은 스키타이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키타이가 폴란드와 보헤미아에 영향을 끼치며 그 지방 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
BC 4세기(기원전 390년) 에트루리아가 켈트에 털리면서 두 개의 도시를 빼앗겼는데, 이때 빼앗긴 도시들은 메디올라눔, 보노니아로 개명된다. 이 도시들은 현재 밀리노, 볼로냐라고 한다.
이때 에트루리아는 다급한 나머지 한때 따가리(...) 취급했던 로마 공화국에 SOS를 때렸고, 로마에서 온 지원군 덕에 수도 클루시움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열받은 켈트가 남하하여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였고,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던 로마 공화국은 7개월 동안 처절하게 발리며 끝내 본진인 로마마저 약탈당한다. 하지만 켈트족은 로마에 들어와서 약탈만하고 건물이나 시설은 거의 박살내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없이 다음에 로마가 적당하게 무르익으면 다시 털어먹으려 했기 때문이다.[7]. 이 당시 로마의 각종 기록들이 대규모로 유실되어서 B.C 390년 이전 로마사는 신화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켈트 남부 부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휘젓고 있을 때, 동방 부족들은 흑해연안까지 진출, 이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그리스를 침공한다. 이때 그리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코린토스 전쟁의 여파로 정상이 아니었고, 켈트 부족들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결국 델포이 신전까지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2 몰락
2.1 북이탈리아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은 이탈리아인들의 위협으로 계속 남았으며 자신들과 다른 야만족이 바로 위에 거주한다는 것은 로마 중심의 이탈리아 지배가 고착화되는데 기여를 했다. 즉 로마가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인간 같지도 않은[8] 야만족속들을 막기 위해서 로마를 중심으로 단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북이탈리아를 수시로 공격한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북이탈리아 공격은 한니발 전쟁기를 제외하면 상시적으로 일어나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물량빨로 인해 패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은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도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법무관 군을 격퇴시켰으나 그래봤자 그 다음해에 똑같은 규모로 다시 쳐들어오니 GG(...) 기원전 2세기 중반이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거의 복속된다.
2.2 이베리아
이베리아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동남부 해안가는 비-인도유럽어족의 이베리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 중부와 북부는 켈트족 혹은 켈트-이베리아 혼혈족, 남부는 카르타고인과 투르데타니아인, 서부는 인도유럽어족계통의 루시타니아인, 북동부 구성탱이에는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한 종족이 켈트계 제민족이었고, 2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의 영향력이 이베리아에 미치게 되자 이들은 로마에 맞서 100여년간 투쟁을 한다.
전쟁의 양상은 북이탈리아처럼 로마의 물량빨로(...) 로마는 지든 이기든 꾸준히 군대를 보냈고, 처음에는 이베리아인들, 이후에는 켈트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이 와중에 누만티아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이어졌고, 켈트족을 포함한 이베리아의 종족들은 세르토리우스 반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북부 바스크계 제민족들을 제외하고 모두 복속된다.
2.3 일리리아와 발칸
과정은 동일하나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다. 그리스의 로마군과 카르파티아의 다키아인들에게 밀려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키아인들중 상당수가 켈트족 혈통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문화적으로 다키아인들과 켈트족의 관계는 깊다.
일리리아의 켈트족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그들은 현재 보헤미아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보이족을 중심으로 통합을 하였지만 다키아인과 게르만족, 로마인의 진출로 1세기경 복속된다.
2.4 갈라티아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를 공격한 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이주한 켈트족들은 소아시아 서부 내륙지역인 갈라티아에 정착하여 그들의 왕국을 세운다. 갈라티아의 켈트족은 프톨레마이오스조와 셀레우코스조의 전쟁에 용병을 파견하면서 디아도코이 왕조간의 전쟁의 큰 변수가 된다.
하지만 기원전 189년 로마에 복속된다. 이후 미트라다테스 전쟁 등등의 전화에 휩싸이고 최종적으로 속주가 된 것은 기원전 25년.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기원후 4세기에도 켈트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2.5 프랑스
기원전 7세기경까지는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 정착했다. 켈트족은 이동 정주를 반복하며 켈트족의 "위대한 팽창"이 시작됐는데 소아시아까지 이동을 하였다. 오랜 시간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하고 그곳에 영구 거주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로마제국 또한 카이사르처럼 대적하면서 확장하여 켈트족은 로마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갈리아에 부임한 카이사르는 점점 갈리아를 평정해 나가고 켈트의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는 켈트족을 통합하여 로마제국과 동맹부족이였던 하이두이족까지 로마에 등을 돌려 반기를 일으키어 로마제국과 전쟁을 하였다.
하지만 모든 켈트족이 로마제국에 패배하고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는 처형당한후 켈트족은 약체화되었고 독일 북부 서부쪽에선 게르만족의 공격에 의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의해 사라졌다.
알프스 이남의 켈트 세력은 로마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소모전으로 나온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실제 기록상으로, 오랜 전란으로 약화된 켈트인은 포에니 전쟁 이후 새롭게 업그레이드 된 동수의 로마군을 수차례 격파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러 단편적인 기록을 검토해봤을 때, 리비우스가 켈트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겪은 패전을 다수 생략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로마는 이런 패배를 메꿀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지만 이미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인수브레-보이족 켈트 세력은 이를 메꿀 역량이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군사적 역량이 성공의 핵심이었지만, 그 전에 켈트인들은 크게 소모되어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깊은 골이 패인 켈트 부족 세력들간의 반목을 적절히 이용해가며 갈리아를 평정했다. 그 후 아르베르니족이 켈트족을 통합 로마제국에 동맹부족으로 있던 하이두이족까지 반기를 일으키게 했지만 패했다.
어쨌든 드루이디즘을 비롯한 전통 문화를 잃어버렸지만 대신에 로마식 문명을 기초로 하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골어는 거의 소멸하고, 로마의 라틴어가 바로 이를 대체하였다. 이는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지속되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로마제국에 들어온 프랑크족과 같은 게르만족에 융합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6 영국
영국에 사는 민족들은 이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퍼지지만, 역시나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네덜란드를 거쳐 바다를 건너와 침략해왔고,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역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만족이 침략해서 켈트족은 대부분 웨일즈나 스코틀랜드의 산악지역으로 쫓겨났다.[9] 이때 켈트족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인물을 신화화 한 것이 아서 왕이다. 아마도 잠시나마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던 어떤 켈트족 지도자가 미화되어 전설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현재 남은 켈트족의 국가는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아일랜드어(겔러, 혹은 게일어 Gaeilge)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켈트어군의 상용 언어지만, 아일랜드를 400년간 지배한 영국에 의해 영어가 깊숙히 퍼진데다가 영어의 힘에 압도되어 현재 아일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영어를 상용어로 쓰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가 겔러를 퍼트리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상용자는 줄고 있으며, 모어로 쓰는 사람은 7만명 정도이고, 이것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모어로 쓰는 사람이 소멸되면 사실상 사어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완전하게 동화된 것은 아니어서 켈트족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북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 등등이 영국과 프랑스에 편입된 것은 겨우 근대 이후의 일이며, 지금도 그들의 민족적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하다(같은 영국 국가안에 있지만, 잉글랜드가 프랑스하고 축구시합을 하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 끼리도 우리야말로 진짜 켈트 문화, 민족의 종주국이다, 니들은 찌질하게 잉글랜드에게 식민지나 됐다, 아니다 니가 잉글랜드 식민지로 보냈던 시절이 더 찌질했다(...) 라는 식으로 서로 놀리며 상호 디스하는 풍경을 에딘버러, 글래스고, 더블린의 술집에서 종종 볼 수 있다[10]. 이 두 나라는 물리적인 거리나 문화적인 거리도 상당히 가깝고, 예나 지금이나 얼스터 지방과 하이랜드는 인구,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한 나라라고 볼 만큼 같이 해 온 역사와 상호 소통, 교류가 깊어 스코틀랜드에도 아이리시들이 굉장히 많고, 아일랜드에서도 스코트인들이 많이 산다.
참고로 영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선사시대의 건축물 스톤헨지는 켈트족과 관련이 없다. 스톤헨지는 켈트족의 도래 이전에 살던 선주민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로 켈트족이 당도할 기원전 10세기 경이면 이미 1천년도 넘은 고대 유적이었다(...).
영화 '폼페이'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마일로'는 이 영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이다.
3 기타
켈트인들의 최대 판도는 매우 넓어서 에스파냐 전역과 북아프리카 일부,[11] 흑해 부근에도 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흑해 연안은 갈리아인들의 본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는지, 빛의 신 루의 창 브류나크를 살로니카에서 발견한다.[12]
영어로 발음하면 셀틱으로도, 켈틱으로도 모두 발음하며, NBA 농구팀 보스톤턴 셀틱스도 여기서 딴 이름이다.
현 프랑스 일대의 켈트족은 골족이라고도 불리고, 유명한 프랑스의 만화 아스테릭스도 켈트족의 영웅 아스테릭스가 로마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내용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선조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만화라고 하며 매우 좋아한다.근데 프랑스는 프랑크 계통 아니었나?[13]
어떤 반역 애니 시리즈의 어떤 비범하게 맛간 제국 황가의 시조(라고 그들이 주장하는) '알윈 1세'도 따져보면 켈트족이다.[14]
4 켈트어
켈트어는 라틴어 등과 다르게 단수, 복수 체제가 아니라 단수, 양수, 복수 체계이다. 양수란 '두 개인 것'을 가리키는 말. 즉 켈트어에서는 하나짜리인 것과 두 개짜리인 것, 세 개 이상인 것을 구분한다는 소리로, 이와 같은 특징은 산스크리트어에서도 동일하다. 어순도 VSO형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영어나 프랑스어 등 익숙한 유럽어들과 차이가 있다.
오늘날 살아남은 켈트어 가운데는 웨일스어가 수적으로 가장 많다. 아일랜드에서는 게일어를 국가에서 보호지정하여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철자개혁을 하지 않아 옛 정서법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영어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괴악하다. 쓰기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 쓰고 읽기를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라고 읽는다고 보면 된다.
5 켈트 신화
켈트족과 관련된 신화로 켈트 신화가 있다. 아서 왕 전설 신화도 켈트 전설이다.- ↑ 사실 90년대 중반, 냉전이 종식되어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유럽 국가 내에서 각 지역단위의 독립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에 켈트 연방 공화국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기는 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가 연합하여 연방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 이었는데, 당시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스코틀랜드의 독립주의자들이 보여줬던 반응이 딱 저거였다. GR하네... 애초에 켈트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민족 집단으로 동질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큰 단위였던 것. 그리고 동서고금 어디든지나 유효한 인류 역사의 법칙이지만, 비슷한 이웃들일 수록 관계는 더욱 험악한다는 원칙은 여기도 마찬가지인지라 북아일랜드에 가보면 비교적 최근까지 서유럽 복판에서 서로 총질하고 폭탄 설치하며 싸우던 장로교 믿는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켈트족과 가톨릭 믿는 아일랜드 켈트인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도 일찍부터 영어를 받아 들이고 정치적 중심지였던 로우랜드의 스코트인들과 끝까지 게일어와 유목, 수렵 중심 씨족 사회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했던 하이랜더들과의 싸움이 그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 ↑ 또 하나 참고할 점은, 켈트족과 같은 개념을 근대 이후의 민족 개념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켈트족이란 개념 자체가 고대에 켈트어를 쓰던 집단에서 파생된 개념이라, 현대의 민족개념보다는 '튀르크 어족'이라거나, 남아프리카를 석권한 '반투(어)족'같은 광범위한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
- ↑ 대한민국 개신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로회의 원산지이다.
- ↑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근본주의 신학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이곳 출신이다.
- ↑ 영국 국교회는 항목에도 잘 서술되어 있지만 개신교 종파 중에서 가장 가톨릭의 전례와 교회 구조를 많이 유지, 계승한 편이며, 잉글랜드란 사회 자체도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시절이 예외적으로 종교성이 후끈하게 달아 올랐었지, 전반적으로 종교적 극단주의와 교조성을 배격하고, 평신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 ↑ 하지만 이건 단순히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요청으로 켈트족 용병대의 평화로운 이집트 정착이다. 이런식으로 정복이나 군사적 원정이 아닌 단순 이주까지 따지면 전 세계에 진출하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 ↑ 이때 로마를 털어먹은 켈트의 족장 브렌누스는 로마쪽에서 화평의 대가로 내놓은 재물에 검을 얹으며 "패자에겐 재앙이 있으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켈트에게 털린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침공당한 날에 개를 패고 거위는 방석에 모시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왜냐하면 켈트군이 쳐들어왔을 때 개들은 조용하고 거위들이 꽥꽥 설쳤기 때문.
- ↑ 물론 비-켈트족 이탈리아인의 눈으로
- ↑ 하지만 정복자들에 비해 피정복민인 켈트인들이 훨씬 많아서였는지, 현대 영국인과 독일인은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의 외모에 미묘한 차이가 있듯이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독일인은 각지고 다부진 얼굴을 가진 사람이 많고, 영국인은 비교적 둥글길쭉한 얼굴형이 많은데, 이는 아일랜드인과도 비슷하다.
- ↑ 벨파스트나 런던데리 같은 북아일랜드에서는 저 떡밥이 터지면 최근까지는 진짜 총폭탄이 날아다니는 험악한 동네였으니 예외로 두자...
- ↑ 용병으로 내려가 헬레니즘 제국에서 복무하다 그 대가로 파윰분지를 받아 아직도 파윰분지엔 켈트족에 후예가 있다고 한다.
- ↑ 당시 흑해연안에 켈트족이 조상이 살았겠지만 그때 켈트족 이라는게 존재했을지는 의문이다. 흑해연안은 인도유럽어족의 발원지와 그 인근지역이니까. 인도유럽어족에서 켈트족으로 분화한 기원지는 북부 알프스 기슭 할슈타드 -라 텐느 문명이다.
- ↑ 프랑크족은 일단 게르만의 분파였으므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선조라고 받아들이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었으리라. 더군다나 프랑크 왕국은 독일과 이탈리아 지방도 지배했고 그 중심의 중앙 프랑크 왕국은 독일과 프랑스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해 있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신이 되며 쪼그라든 신성로마제국은 어쨌든 독일지역에서 명맥이 끊긴다. 하지만 갈리아의 골족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만의 선조였고 영국와 한창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 공조해서 영국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런 프랑스인들의 내심과는 달리 어쨌든 그들의 선조가 프랑크족과 골족의 혼혈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민족 혈통 대비로 따지면 프랑스인들은 켈트계 피를 주로 이어받았다.
- ↑ 주인공을 필두로 이 집안 사람들 상당수의 눈동자가 보라색계열인데, 이 눈색은 켈트족에서 드물게 나오는 색이다.
제작진이 인종설정을 제대로 해놓은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