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 왕국의 영토 | 하노버 왕국의 국기 |
Königreich Hannover, Kingdom of Hanover.
1 개요
독일 북부 니더작센 주에 존재했던 영방국가다. 역사적으로 하노버 공국, 하노버 선제후국 등으로도 불린다.
하노버의 위치는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주(덴마크와 독일의 접경지)이며, 구 하노버 영토의 85%가 니더작센주를 이루고 있다.
전성기 하노버의 영토는 면적이 40,000제곱 킬로미터 정도로 벨기에보다 크고 현재의 네덜란드, 덴마크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다.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 내의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절반 수준으로 웨일스보다 좀 컸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사에서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영방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은근슬쩍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나가던 시절 하노버왕국은 독일 전체에서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에 이은 네 번째 규모의 대국이었으며, 근대 여러 영방국가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독일사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만 프로이센 등 대국이 주도하고 하노버는 이러한 연합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역사 서술 관점에서 주목을 못받는 편이다. 또한 당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에서 하노버의 무게는 작지 않았다.
2 역사
1636년, 수도를 하노버로 옮겨 하노버 공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1692년,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가 선제후가 되어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불리게 된다.
2.1 영국과 동군연합
1714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가 조지 1세로서 영국의 왕이 되어 영국과 동군연합이 되었다. 영국은 조지 1세부터 하노버 왕조라고 한다. 영국은 영국대로 백년전쟁에서 상실했던 유럽 대륙의 거점을 오랜만에 얻게 되었다.
조지 1세는 영국 왕이 되었지만 대륙에 더 관심이 많아서 독일 내에서 하노버 공국의 세력을 확대하는데 신경을 썼다. 뤼넨부르크 후국을 상속받았으며, 조지 1세는 내륙에 머물고 있던 하노버를 북해로 진출시키려는 목적에서 대북방전쟁에 참가하고 승리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과 바덴을 할양받아 하노버 영토는 북해와 접하게 된다.
조지 2세 역시 독일 출생이었으며, 하노버 왕조의 왕은 조지 3세에 이르러서야 영국 출생이 된다.
2.2 나폴레옹 전쟁 시대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는 유럽 대륙을 나폴레옹이 다 먹었는데 독일 한 가운데 '적국' 영국의 동군연합이 있는걸 두고 볼리가 없다. 1807년, 하노버 공국은 베스트팔렌 왕국과 강제 합병되면서 멸망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하노버의 장교와 군인들은 임금님이 계시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14,000명의 하노버 군인이 "왕의 독일인 군단(King's German Legion)"이라는 부대로 재편되어 영국군의 지휘 아래 싸웠다. 매우 열심히 싸웠는지 영국군에서 이들은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1813년,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영국의 조지 3세가 하노버 공국을 재탈환했다. 1815년의 빈 회의에서 하노버 공국은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해서 공국 체계를 유지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약했던 왕의 독일인 군단(King's German Legion)은 재건된 고향 하노버로 귀환했으며 새로 건설된 하노버 왕국의 군대로 복귀했다.
2.3 동군연합 해소
하노버 왕조의 왕들는 초기에는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를 더 중시하였으나, 영국 태생의 왕들이 즉위하고 영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점차 하노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
조지 4세는 하노버에서 하노버 왕으로서 즉위식을 따로 가졌지만, 동생 윌리엄 4세(독일어로는 빌헬름 4세)는 하노버를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815년부터 1837년까지 조지 3세의 아들이자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케임브리지 공작 어돌퍼스 왕자가 하노버 부왕(副王·viceroy, 총독)으로 부임해서 대리 통치했었다.
1833년, 하노버 왕국에서는 영국법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어 자유주의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1837년, 윌리엄 4세가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4세보다 먼저 사망한 남동생 켄트·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1767~1820)의 외동딸 빅토리아가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하노버에서는 살리카법에 따라서 살아 있는 남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Ernst August I)[1]가 왕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하노버 사이의 동군연합이 해체되었다.
사실 영국이 하노버 왕국을 영향권으로 계속 두기를 원했다면 뭔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 동군연합 해소 전에 하노버의 내정에 개입해 살리카법을 폐지하거나(물론 이 경우 하노버가 구성원으로 들어가 있던 독일 연방에서 문제를 삼았을지도 모른다), 동군연합이 해소를 막진 않더라도 정부수반을 영국 정부가 지명해 그가 실권을 휘두르게끔 하는 제도를 마련해 둔다든지 등등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하노버를 유럽 본토의 귀찮은 땅으로 여겼고 유럽 밖 식민지 확장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하노버 왕국이 영국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치했다. 조지 3세 시절 윌리엄 피트(大피트) 총리가 대놓고 하노버는 국왕의 이해관계에 드는 땅일 뿐 영국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며 거의 버리다시피 했을 정도. 당시 빡친 조지 3세가 그를 해임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영국 정계의 지도층은 하노버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었으니 하노버를 영향권에 남겨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당시 영국 정계의 지도층이 하노버 왕국을 자국 영향권 내에 남겨 두려 했다면 세계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영국과 동군연합이 해소된 후 첫 국왕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자유주의 헌법을 폐기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괴팅겐 대학의 교수 7명이 항의서를 냈지만 추방, 면직 등의 처분을 받았다. 여담으로 이 7명 가운데 유명한 그림 형제가 있다.
3 멸망
하노버 왕 게오르크 5세(Georg Friedrich Alexander Karl Ernst August)는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다가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프로이센에 왕국이 합병당했다. 게오르크 5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고, 하노버 왕국의 복구를 여러 열강국에 요구했지만 실패했다.
독일에서는 하노버 왕국의 복원을 요구하는 보수주의 정치 결사 단체 독일 하노버 당(Deutsch-Hannoversche Partei)이 생겨났다.[2] 게오르크 5세는 프랑스에서 사비를 들여서 하노버 탈환을 노리고 Welfenlegion라는 군사조직을 만드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마저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게오르크 5세는 파리에서 사망했고 윈저 성의 채플에 묻혔다.
여담으로 이 때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탈취한 하노버 왕국의 국고를 바이에른 왕국에 뇌물로 퍼다주면서 구워삶았다고. 그리고 루트비히 3세는 그 돈으로 건축 덕질을 했다!!!
하노버 왕국의 영역는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주가 대부분 계승하고 있다.
4 왕가의 그 후
게오르크 5세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Ernst August Wilhelm Adolf Georg Friedrich)는 친척들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하노버의 왕세자이자 영국의 컴벌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3]로 활동했다. 그의 사촌인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Wilhelm, Herzog von Braunschweig)은 자신이 사망하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에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를 상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정부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이는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와 하노버 왕가가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노버 왕가와 호엔촐레른 왕가의 이 대립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2세의 장남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위로 서한을 보내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2세는 마지막 남은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Ernst August Christian Georg)를 독일로 보냈는데, 3세는 이 때 빌헬름 2세의 외동딸 빅토리아 루이제(Viktoria Luise)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이로써 문제가 없다고 여긴 독일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으로 즉위하는 것을 허가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영국 컴벌랜드 공작으로서의 상속권을 포기했다. 빌헬름 2세 쪽에서는 영국에서 컴벌랜드 공작으로 유지하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되면서 그런데로 왕가의 체면은 차리는가 했는데…….
그런데 이 때문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일군으로서 복무해야 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영국에서 독일과 결탁한 하노버 왕가에 대한 이미지는 진짜 최악이 돼버렸다.(…) 결국 1917년 작위박탈법이 제정되어 컴벌랜드 공작의 작위도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은 통째로 공화국이 돼서 하노버 왕국의 부활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
하노버 왕가는 보오전쟁 때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서 망하더니 1차대전 때 독일 편을 들어서 망한 셈. 줄을 계속 잘못 서는 것도 능력이다 차라리 끝까지 영국 편을 들었더라면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망조 드는 과정에서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틀러한테 또 털렸겠지
보오전쟁 이후 하노버 왕국은 완전히 사라졌지만,[4] 하노버 왕가 때 형성된 인맥 관계가 좀 남아 있었다고. 그 이 인맥 라인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현 니더작센 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