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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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씨의 등나무 문장.[1]

1 개관

藤原,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와 함께 일본 4대 본성 중 하나. 헤이안 시대 때 섭정으로 전성기를 누린 가문이었다.

미나모토와 타이라는 황가에서 사성받은 분가들로 여러 분가들이 있으며, 타치바나 가문은 후지와라의 대두 이후 몰락하였다.

2 기원

선조는 현재의 교토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가였으며 이 가문의 일원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덴지 덴노(天智 天皇)에게서 668년에 후지와라 성을 받은게 시작이지만 그 자신은 후지와라 성을 받은 다음해(669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시초이자 번성하기 시작한건 둘째아들 이었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때부터이다.[2]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3]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몬무 덴노(文武天皇)가 되는 오비토(首皇子)에게 미인으로 유명하던 딸 쿄묘시(光明子)를 들여보내고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그녀를 황후로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이후 지속적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3 후지와라 4가의 성립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南),북(北),식(式),경(京)의 4대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이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이던 나가야 왕(長屋王)을 모함해 자결시키고 권력을 쥐었다. 그리고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 쿄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하였다. 황족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밀어붙여 결국 쿄묘 황후로 책봉되어 황족의 황후 독점이 깨졌다. 이것이 외척 후지와라 가문 위세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735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왕의 아우 스즈카 왕(鈴鹿王)와 강력한 귀족이던 타치바나(橘) 가문으로 넘어갔다. 후지와라의 4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다시 가문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의 아들로서 시키케(式家)의 일원이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는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부임하게 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하였고, 그로 인해 시키케는 몰락하게 된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난케(南家)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결국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된다. 나카마로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이던 고묘 황태후(光明皇太后) 의 후원을 받아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를 제치고 승승장구하였다. 755년 강력한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실각시켰고, 757년 제위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을 진압하며 모로에의 아들이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비롯해 타치바나 가문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에미노 오시카츠(惠美押勝)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760년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추진하면서 상당한 군사권도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모이자 후원자이던 쿄묘 황태후(光明皇太后) 사후 상황으로 있던 고켄 덴노(孝謙天皇) 및 그 측근인 승려 도쿄(道鏡)와 사이가 멀어지던 그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일족이 몰락하였다.

770년 여성으로서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내었던 쇼토쿠 덴노(称徳天皇)[4]가 승하하였는데, 덴무 덴노(天武天皇) 계열이던 천황은 자식이 없어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텐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황의 제부이던 덴지 덴노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천하여 결국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고닌 덴노(光仁天皇)로서 즉위했다. 고닌 덴노는 텐치계인 쇼무 덴노(聖武天皇 의 딸이자 고켄 덴노의 이복동생이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후 소생의 태자를 폐립하고,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을 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간무 덴노(桓武天皇)로 781년 즉위해, 784년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하였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헤이안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텐무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에서도 후히토의 아들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자손들인 홋케(北家)가 대두하였다.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까지 승진하는 등 조정의 중신으로서 율령제 정비와 토지의 사유 억제에 힘썼다. 소노히토 사후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가문의 지위를 다졌다. 후유츠구는 사가 덴노(嵯峨天皇)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사다이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며 코닌격식(弘仁格式)편찬을 주도하는 등 율령 정비에도 공헌했다. 또한 후유츠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그 권세를 강화했다.

4 셋칸정치의 시작

후유츠구의 차남이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는 조와의 변 진압 후 권력을 장악, 857년 조카인 몬토쿠 덴노(文徳天皇) 치세 하에서 조정 최고위 관직이던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858년 요시후사와 대립하던 몬토쿠 덴노가 의문스럽게 급사하자 자신의 외손인 9세의 세이와 덴노(清和天皇)를 세웠다. 어린 외손자를 덴노로 옹립한 그는 셋쇼(摂政)에 임명되어 전권을 장악, 명실공히 외척 권세가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866년에는 오우텐몬의 변(応天門の変)으로 다이나곤(大納言) 토모노 요시오(伴善男) 등의 정적들이 숙청되어 그 권세는 더욱 강회되었다. 884년 요시후사 사후 권력을 쥔 요시후사의 조카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経)는 외조카 요제이 덴노(陽成天皇)를 폭군으로 몰아 퇴위시킨 후 고코 덴노(光孝天皇)를 옹립하여 권력을 굳혔다. 그는 55세인 성인 천황 치세에서도 섭정의 권력을 갖는 칸파쿠(關白)에 임명되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로서 후지와라 가문은 셋켄케(摂関家)로서 두 지위를 독점하게 된다.[5]이후 9세기에서 12세기에 걸친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지배가 행해지게 된다. 이 시기는 휴우츠구 이래 개간이 장려되어 생산물이 늘어나고 조간격식(貞観格式)의 편찬과 같이 문물이 정비되던, 비교적 평온한 시기로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수도에서는 후지와라 가문이 권력을 강화하며 그 세력을 키웠고, 반대파 귀족과 북가가 아닌 후지와라 일문들은 고위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9세기 말 후지와라의 외손이 아니었던 우다 덴노(宇多天皇)가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셋칸케의 권세에 견제가 가해졌으나 젊은 신임 당주였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가 후지와라 가문을 따르는 조정 내 세력을 이용해 저항함으로서 그 권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이고 덴노(醍醐天皇)에게 정적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참소하여 실각시켰으며(昌泰の変), 천황도 신하들을 좌지우지하던 외척 후지와라 가문과 협력해야 국정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토키히라는 통치 면에서는 황가와 협조하여 엔기격식(延喜格式)의 편찬 및 반전여행령(班田励行令) 반포를 통해 율령 정비와 농민 보호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후지와라 가문은 지속적으로 황후를 배출하고 어린 외손을 저택에서 키우면서 친밀감을 쌓아 율령제의 틀 안에서 천황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토키히라의 아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藤原忠平)는 부호층을 용인하고 토지세를 수취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 기존의 율령제 체계의 와해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 타다히라의 자손들이 셋칸직을 이으며 권세를 누렸다.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키고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등에 의해 토벌된 시기가 이 때이다.

5 세도의 절정

この世をば わが世とぞ思ふ 望月の 欠けたることもなしと思へば

(이 세상은 모두 나의 것. 저 보름달처럼 부족함이 없노라)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6]

달이 차고 나면 기울게 마련인 것을

969년에는 칸파쿠 겸 다이조다이진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実頼)와 우다이진(右大臣) 후지와라노 모로타다(藤原師尹)를 비롯한 후지와라 세력은 정적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를 실각시키고 엔유 덴노(円融天皇)를 옹립해 셋칸케의 권세를 강화했으니 이것이 안나의 변(安和の変)이다. 이것은 후지와라 가문이 지방의 여러 세력들까지 포섭하고, 중앙의 대귀족들의 지위와 천황좌의 향방도 좌우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네요리 사후 벌어진 형제간 다툼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권력을 쥔 후지와라노 가네이에(藤原兼家)는 982년 자신과 충돌하던 가잔 덴노(花山天皇)를 퇴위시키고 손자 이치조 덴노(一条天皇)를 옹립해 권세를 굳혔다.

가잔 덴노는 남설되어 국고를 위협하고 농민층을 내몰던 장원을 억제하려 하는 등 후지와라 가문과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정책을 폈던 것에 가네이에가 후지와라 가문 내의 권력투쟁에서 우위를 점한 후 자신의 외손을 옹립해 권세를 굳히고자 했던 것이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덴노위를 좌우할 정도의 권세가 지속되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셋칸직과 그 권세는 관례화되기에 이르렀으며 최고의 귀족이자 전통적 외척 가문으로서 남게 된다. 미나모토(村上源氏)를 비롯한 고위 귀족과 방계 황족들은 이들의 견제를 받았고, 후지와라 방계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 역시 이들의 위세에 눌린 채 가문에 따른 품계의 제한이 확고해졌다. 이후의 권력 향배는 후지와라 씨장자 가문의 자손들 간 씨장자와 외척 자리를 놓고 벌이는 다툼에서 결정되었다. 일본 자민당?

이들은 조정을 장악하여 자신들이 양육하여 친밀감을 쌓은 미성년의 외손 덴노를 옹립하고 폐위하기까지 하엿으며, 덴노를 정무에서 밀어내고 율령제의 틀 안에서 덴노의 후견인이자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둘렀으며 막대한 장원을 기진받아 강력한 경제력과 사병 동원력을 갖게 되었다. 후지와라 출신의 황후나 중궁들은 이런 권세를 뒷받참하였으며, 지속적으로 후지와라 출신의 여인들이 궁중에 들어와 황자를 낳게끔 조력하였다. 후지와라 가문이 후원한 씨사들 역시 막대한 장원과 승병을 거느리고 친 후지와라 세력으로서 위세를 부렸는데, 특히 나라 지방 인근 야마토 지방이 극심하였다.

9세기 말엽부터 심각해지는 국가 수취체계의 문란과 장원의 확대는 농민의 곤궁을 초래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율령제의 징병체제가 와해되었기에 조정은 부농 무장층을 무사 계층으로 삼아 군사력으로 동원하였다. 여기서 무가가 싹트게 된다.(한편 내몰린 농민들이 장원을 보유한 거대 사원에 들어가 승병으로 동원되어 국가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혼란속에 지방관인 고쿠시((国司)들은 많은 권한을 위임받아 상당히 자율적인 지방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조정은 조세 징수에 중점을 두었다. 반란이 일어난 경우 무사 씨족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 장군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토지 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관으로 지방 권력을 쥐었던 유력 무사 씨족의 수장이 유착하여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후지와라 셋칸케의 정치는 이런 변천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11세기 고정된 세율의 조세 부과 및 각 쿠니(国)별 수취와 같은 세제 개편을 통해 봉건화를 촉진시켜 버렸다.

10세기 말 일가 내 다툼에서 우위를 점한 후지와라노 모로스케(藤原師輔)의 손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때는 셋칸케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데, 미치나가가 겐지모노가타리의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칸파쿠가 되지는 않았다고 하나 나이란(內覽)으로서 왕실 기밀문서를 관장하고, 조정 정사를 장악하여 자신의 저택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에서 실권자로서 군림하였으며 형과 조카들을 밀어내고 네 딸을 덴노의 비로 들여보내어 외손들을 덴노로 세웠다.

그러나 미치나가가 추진했던 조세제도 개편이나 약소한 장원 억제책은 큰 소용이 없어[7] 지방에서는 토지를 둘러싼 호족 간의 다툼이 지속되었고, 동북 일대를 중심으로 중앙의 통제력 역시 약화되고 있었으며[8], 겐지(原氏)와 헤이시(平氏)라는 강력한 무사 일족이 대두하고 있었다. [9] 미치나가의 권력은 형의 일족과 외손을 밀어내고 외척이자 후지와라 가문 당주로서의 지위를 굳히면서 절정에 달했다. 천황을 능가하여 천황을 압박해 퇴위시키거나, 동궁을 마음대로 바꾸는 지경이었고, 헤이안에 화재가 일어나 황궁인 다이리(内裏)와 미치나가의 저택이 불탄 상황에서 수령들이 미치나가의 저택 재건에만 성의를 보이고, 미치나가에게 물품들을 바치는 등 그 위세가 천황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아들 요리미치(藤原賴通) 역시 50여년간 셋칸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이후 미치나가의 자손들인 미도류(御堂流)가 후지와라 가문의 씨장자의 자리를 잇는 셋칸케(摂関家)로서 훗날 고셋케(五摂家)를 이루게 되며 이후로는 이들 가문에서 셋칸이 임명되는 것이 완전히 관례화되어 버린다.

6 권세의 쇠퇴

이렇게 절정에 이르렀던 권력은 11세기 초 황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던 고산조 덴노(後三條天皇)가 즉위하면서 도전받게 된다. 천황은 방계로서 비 셋켄 가문으로 권력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후지와라 출신 귀족들과 무라카미 겐지 같은 황족 출신 귀족, 그밖의 하급 귀족들과 지방 세력들을 기용하여 외척의 자리에서 밀려난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칸파쿠 요리미치는 은거하였고, 후지와라 가문은 씨장자 자리를 놓고 분란이 일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고산조 덴노는 이들을 수족으로 하여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으로 칭송받는 개혁정치를 시행해 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했다. 이로서 장원제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졌으며 셋켄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그러나 그럼에도 셋켄케의 장원은 막대했으며, 이후로도 천황들이 계속 후지와라 가문을 경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타이라(平) 일족은 이런 황가의 경계심 덕에 황가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고산조 덴노의 아들 시라카와 덴노(白河天皇)는 후지와라 가문 비 섭관가 계열의 외손으로 반 후지와라 정책을 지속했다. 그는 아들에게 양위 후 인세이를 실시해 중하류 귀족과 무사 가문 타이라씨를 중용하면서 후지와라 가문을 견제했다. 자세한 내용은 인세이 참조. 다만 이 시기에도 황후나 중궁은 황족이 아닌 이상 대개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들이 들어왔으며 비섭관가 여인들의 경우에도 섭관가의 양녀가 되기도 했다. 한편 미치나가가 황태후의 승인을 얻어 셋칸에 취임했던 선례가 이 시기에는 조우고의 승인에 따른 셋칸 취임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조우고의 권위가 보다 더 높아지게 되기도 했다.

7 호겐의 난과 막부 성립 이후

1156년의 호겐의 난(保元の乱)은 황가와 후지와라 셋칸케의 내부 분열과 권력투쟁이 뒤얽혀 폭발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셋쇼(摂政)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는 당주인 부친 타다자네(藤原忠實) 및 부친이 차기 당주로 내세우던 동생 나이다이진(內大臣) 요리나가(藤原頼長)와 대립하였다. 타다자네는 셋쇼인 장자 대신 총애하던 요리나가를 후계로 세우고자 하여 씨장자의 인장, 씨장자의 상징 주기대반(朱器臺盤)을 장남에게서 빼앗아 요리나가에게 주어 타다미치의 반발을 샀다. 후지와라 가문의 씨장자(우지노초자)는 후지와라 셋칸케에 속한 막대한 장원과 씨사 등을 관할했으며, 후지와라 일족을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원래 셋칸이 이를 겸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가문의 최고 어른이던 타다자네가 이를 뒤집은 것이었다. 이는 천황가의 내분과 연계되어 호겐의 난으로 이어졌는데 타다미치는 우세를 점하던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 편에 섰고, 형과 고시라카와 세력에 의해 조정에서 고립되어가던 요리나가는 스토쿠인(崇德院)과 손을 잡았다. 전란의 풍문이 떠돌고 고시라카와 덴노 측이 압박을 강화하면서 무력 충돌이 예견되었고, 요리나가가 후지와라 가문의 장원에서 차출된 사병들과 무사 씨족의 병사들이 소집되어[10] 전투가 벌어졌다. 한밤의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이끌던 고시라카와 덴노의 군대가 승리하였으며 요리나가는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결과로 셋쇼 타다미치는 경쟁자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굴복시켰으나, 스토쿠 덴노를 지지했던 아버지와 동생을 대역죄인으로 몰게 되어 아버지를 대역죄인으로 모는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한 당주 문제에 있어서도 최초로 천황에 의해 당주임을 인정받게 되어 후지와라 씨장자의 평판과 위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여기에다 무력 기반이었던 카와치 겐지 일족도 여럿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어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헤이지의 난에서 몰락하여 황가와 이세 헤이시의 위세 앞에 눌리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부친과 동생의 영지도 상당수 몰수되어 경제적으로도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타다미치가 고시라카와 덴노의 후지와라가 당주 결정을 받아들인 후 셋칸케 씨장자에 귀속된 영지 다수는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 타다미치의 장자 모토자네가 고노에(近御) 가문, 당시 반 헤이시(平氏)의 선봉이었고 한때 후지와라 셋칸케의 씨장자 자리에 오르기도 했던 차남 모토후사가 마츠도노(松殿) 가문,[11] 모토후사 사후 정권을 잡았던 그 동생 가네자네가 구조(九条) 가문을 개창했다.

이후 타이라노 키요모리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같은 무사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조정이 실권을 잃고, 그에 따라 셋칸케의 힘도 약화되었으며 장원도 많이 상실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후지와라 셋칸케의 자손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관례적으로 외척의 신분과 고위직을 독점·세습하였다. 그러나 센코쿠 시대에 들어서 교토가 잿더미가 되고 덴노가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에 이르면서 이들의 처지도 악화되었고, 히데요시나 에도 바쿠후의 지원으로 가문을 꾸리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5개(고노에(近衛),[12] 구조(九条), 이치조(一条), 니조(二条), 다카츠카사(鷹司))로 분할된 것이 고셋케(五摂家)이며, 이 다섯 가문만이 칸파쿠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13] 고노에 가의 분가가 다카츠카사 가문이고, 구조 가문의 분가가 이치조, 니조 가문이다. 적장자의 후손인 고노에 가는 고셋케의 수장격의 지위를 가졌으나, 각 가문들이 배출한 인물들의 능력이나 관위에 따라 가세가 달라졌다. 이들을 싯페이케(執柄家)라고도 한다.

고셋케로 나뉠 때부터 후지와라 성은 공식문서에서만 쓰고 일반적으로는 각 가문명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세이가케(清華家)에도 후지와라의 자손들이 대다수라 9개의 가문 중 7개가 후지와라의 자손(이중 2개는 고셋케의 미도류 자손), 2개가 무라카미 겐지, 오기미치 겐지의 자손이었다. 그외 다이신게(大臣家)를 비롯한 구게(公家)중 다수가 후지와라 가문의 자손이었다. 다 해먹네
메이지 유신 이후 이들 가문은 각 가격에 따라 화족으로서 작위를 받게 되는데, 고셋케는 공작, 세이가케는 후작[14]에 서작되었다.

그밖에 헤이안 말기 세력을 떨쳤던 오슈(奥州) 후지와라씨도 후지와라 가문의 방계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밖에 지방으로 내려가 무가를 이룬 후지와라의 자손들도 있다.

'후지와라노'라고 된 것도 '후지와라' 씨이다. 노(の)는 '~의'라는 뜻으로 '후지와라 가문의'라는 뜻이 된다. 일본 고대 귀족의 이름을 쓸때 이렇게 쓰는데 서양식으로 따지면 독일의 VON과 같은식으로 쓰던것이다. 관련된 번역서에 따라 혼동을 막기 위해 '노' 부분을 띄어쓰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

8 현대의 후지와라 씨

현대 일본에도 후지와라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앞에서 설명한 후지와라 가문의 후손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자칭한 후지와라씨도 많고 고셋케 분할 이후 후지와라 성을 쓰지 않고 각 분가의 성을 썼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평민에게 성을 주면서 후지와라가문을 위해 일했거나 그 근방에 살았던 사람도 후지와라의 성씨를 주었기 때문. 우리나라의 김씨 다수가 신라나 가야 왕실의 후손이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본성으로 쓰인 경우만 위에서 설명한 후지와라 가문 출신이고, 그냥 성으로 쓰인 경우는 평범한 성이라고 보면 된다.

9 백제 성왕의 후손설

15세기 후반에 적힌 『오우치다타라씨악보첩』(大内多々良氏譜牒)에 의하면, 후지와라씨의 오래된 선조의 임성태자(琳聖太子)는 오우치씨(大内氏)의 시조이며,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19년(611년)에 백제에서 스오국(周防国) 다타라 하마(야마구치 현 호후 시)에 상륙했다. 쇼토쿠 태자(聖徳太子)가 새로운 성씨와 함께 영지(領地)로 오오우치현(大内県)을 하사했다.

오우치씨(大内氏)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99년에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왜구 퇴치의 은상으로 조선 반도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땅을 요구하였다. 영지(領地)의 요구는 기각되고, 무역은 인정되며 그 무역의 이익이 오우치씨(大内氏) 세력 성장의 큰 요인이 됐다.

고후쿠지(興福寺) 다이조오인(大乗院) 몬제키진손(門跡尋尊)에 있는 『다이조오인지샤조오지키』(大乗院寺社雑事記)의 1472년의 항에서는 "오오우치(大内氏)는 원래 일본인이 아니다...혹은 또 고려인 등등"이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후지와라씨는 한국의 부여씨 즉 부여서씨와 연관된다.

10 본성으로 쓰인 경우

11 성으로 쓰인 경우

12 제 3의 용례

  1.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문장은 용각산에 그려진 그 문양이다. 이는 용각산을 처음 만든 후지이(藤井)씨 가문에서도 등나무 문장을 사용하기 때문인데, 등나무 문장을 쓰는 가문은 후지와라씨, 후지이씨 가문 말고도 사이토(斎藤), 이토(伊藤) 가문이 있다.
  2. 가마타리는 덴지 덴노에게서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후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비슷한 케이스. 물론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3. 몬무 덴노(文武天皇)의 아버지로 원래 황위 계승자였던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에게 딸을 후궁으로 보냈었다.
  4. 고켄 덴노(孝謙天皇)가 나카마로의 난 이후 준닌 덴노(淳仁天皇)를 폐위하면서 보위한 후의 이름
  5. 이후 셋쇼와 칸파쿠는 메이지 유신 때 완전히 폐지되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고다이고 덴노겐무 신정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만이 예외로 남았다.
  6. 후지와라씨 셋칸정치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미치나가가 연회 중에 달을 보고 읊었다는 유명한 와카. '망월의 노래(望月の歌)'라고 불린다. 셋칸정치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그야말로 권력자의 노래라고 할 만한 작품.
  7. 일단 후지와라 가문부터가 막대한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도 사정이 비슷해 귀족들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8. 이미 이런 문제로 인해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때도 무사세력을 동원해 진압하였으며 그 와중에 진압군의 수장이던 미나모토 일족이 동국에 세력을 쌓고, 타이라 일족이 서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9. 이에 후지와라 가문은 주로 미나모토 일족(河内源氏)을 통해 반란이나 사원의 승병들의 강소 등을 막아내는 등 무력을 행사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다.
  10. 당시 가장 유력했던 무사 씨족인 카와치 겐지와 이세 헤이시 모두 가문이 양분되어 싸웠다.
  11. 이후 단절됨.
  12. 이 가문의 당주 중에서 고노에 후미마로라는 희대의 막장 정치인이 있다. 해당 항목 참조.
  1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태로 이 제한을 벗어나서 칸파쿠에 오를 수 있었다.
  14. 산조 가문은 유신 과정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공작으로 서작되었고, 사이온지가와 도쿠다이지가도 후에 공작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