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Long Playing Record
파일:Na1466481882529.jpg
컬러 LP도 있다.[2]
컬러도 모자라 반투명 LP까지 있다.[3]
접촉식 턴테이블
바늘 대신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재생하는 턴테이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생산한다.
음반 포맷으로 당시의 널리 쓰이던 SP(Standard Playing Record)나 EP(Extended Playing Record)등에 비해 훨씬 긴 재생시간을 가지고 있어서 LP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발표 당시의 센세이션은 DVD가 블루레이로 업그레이드된 것에 비할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크기는 지름 12인치(30cm) 내지는 매우 드물게 10인치고, 무게는 약 200g이다. 재질 때문에 바이닐 레코드(Vinyl Record)라고도 불린다. LP가 진화한 것이 레이저디스크[4], 거기서 다시 한번 디지털로 진화한 것이 CD이다.
1.1 역사
1.1.1 연구와 개발
직경 25cm SP가 한 면 당 3분, 30cm SP도 4분 30초를 넘기기 힘들던 수록 시간에 대한 불만은 이미 SP가 한창 장사가 될 무렵부터 있어왔다. 이 때문에 수록 시간을 늘이기 위해 온갖 개량과 실험이 행해졌는데, 이들 중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1931년에 미국의 RCA 빅터에서 음반 회전수를 종래의 78rpm에서 33rpm으로 떨어뜨려 한 면당 15분 정도 녹음이 가능한 디스크를 내놓아 화제가 되었는데, 이것도 재질의 한계와 재생 시간 연장으로 오히려 축소된 녹음/재생 가능 주파수 대역, 음질 불량 등의 이유로 채 1년을 못넘기고 버로우했다.
이 실패를 직접 겪은 당시 RCA 빅터 사장 에드워드 월러스타인은 결국 회사를 퇴사해 콜럼비아 레코드로 이직했는데, 그러면서도 장시간 재생이 가능한 레코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당시 콜럼비아의 모회사였던 CBS의 기술연구소에도 월러스타인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전자공학자 피터 골드마크가 있었는데, 골드마크는 월러스타인에게 연구와 개발을 승인해 달라고 했고 월러스타인도 바로 결재해 1941년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시작될 무렵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미국이 2차대전 참전국이 되면서 갑자기 연구가 답보 상태가 되었다. 그나마 전세가 호전되고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하게 된 1945년부터 다시 제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군수 산업과 연계된 중화학공업의 엄청난 발전으로 오히려 성공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다만 이 시기에 입안자인 골드마크는 컬러 텔레비전 개발 부서로 옮겨갔기 때문에, 월러스타인은 그 때 막 제너럴 일렉트릭을 퇴사한 기술자 빌 바흐만을 스카웃해와 연구와 개발을 재개했다.
바흐만은 전쟁 중 생산과 이용이 활성화된 새로운 고분자 물질인 플라스틱에 주목했는데, 플라스틱은 기존에 레코드의 제조에 많이 쓰인 일종의 염료 물질인 셸락보다 더 유연하고 가벼웠다. 그리고 고분자 물질인 만큼 좀 더 세밀하고 좁은 소릿결을 새겨넣어도 될 만큼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계속 실험을 진행했다. 특히 염화비닐수지(PVC)가 적합하다고 여겨졌고, 이와 병행해 정밀하게 소릿결을 새겨넣을 수 있는 프레스 기기와 좀 더 가벼운 픽업의 개발도 병행되었다.
1.1.2 발표
이렇게 해서 약 3년 뒤인 1948년 봄에 새로운 음반의 양산이 실용화 단계까지 올라갔고, 콜럼비아는 1948년 6월 21일에 뉴욕의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에서 Long-Playing Record, 약칭 LP의 발표와 시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시연회에서 기술 설명과 시연을 담당한 이는 실질적으로 LP 연구와 개발을 주도한 바흐만이 아니라 골드마크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골드마크가 LP를 개발했다고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훗날 월러스타인은 '골드마크가 아이디어를 냈고 연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LP 개발을 한 사람은 바흐만이다'라고 밝혔다.
어쨌든 골드마크는 발표회장에서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수북한 SP 더미들과 자신이 품에 안은 LP 레코드들을 비교해 보여주고는 '이 SP들은 제가 안고 있는 새 음반들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라면서 LP의 우월한 재생 시간을 선전했고, 또 시연회에서는 SP보다 월등히 향상된 음질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기존의 SP가 최종 개량 때까지 30~12000Hz까지만 녹음/재생이 가능했던데 비해, 이 LP는 15000Hz까지 고음역대를 넓혀 소리의 명료도를 한층 향상시켰다. 게다가 뒤틀림이나 갈라짐이 적은 신소재 덕에 표면 잡음도 엄청나게 감소해 듣기에도 훨씬 편했다.
SP 시절에는 수시로 갈아줘야 했던 바늘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는데, 새로 선보인 LP 턴테이블의 바늘은 부식의 위험도 있고 내마모성도 떨어지던 종래의 철 같은 금속 대신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를 가공한 것이라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오디오 시스템의 발달로 사운드박스가 필요없게 되자, 손잡이와 지지대만 간단하게 달린 훨씬 가벼운 픽업으로 대체되면서 음반을 눌러대던 압력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콜럼비아는 발표회 후인 8월에 바로 시장에 LP를 내보냈고, 동시에 새로운 레코드 재생기(턴테이블)도 필코 사에 위탁해 발매했다. 다만 기존의 SP도 재생이 가능하도록 턴테이블에는 LP의 재생 속도인 33과 1/3rpm 외에 78rpm 기능도 그대로 들어갔다. 이 새로운 음반과 턴테이블은 엄청난 속도로 보급되었고, 1년 뒤에는 미국의 거의 모든 음반사가 LP로 음반을 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콜럼비아와 달리 라이벌이었던 RCA 빅터는 1949년 2월에 45rpm 음반을 내놓아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했는데, 이 음반은 재질이나 재생 기술은 LP와 거의 동일했지만 레코드를 꽂는 구멍이 도넛처럼 상당히 커서 '도넛 판'이라고도 불렸다. 한 면 당 재생 시간은 5분 가량이었는데, 음질은 확실히 SP보다 향상되었지만 한 장에 불과 10분 정도밖에 담지 못하는 수록 시간 때문에 결국 1950년 초에 LP를 주력 음반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45rpm 음반도 대중음악의 싱글 발매에 계속 쓰였고, 이후 EP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1.1.3 보급과 리즈시절
LP는 발매 후에도 꾸준히 개량되었는데, 초기 LP는 한 면 당 수록 시간이 22분 30초 정도였지만 이후 버라이어블 피치 커팅이라는 신기술이 개발되어 30분 이상까지 수록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 LP 발매 2년 전인 1946년에는 독일에서 압류해온 초기형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인 마그네토폰의 개량형이 미국에서 실용화되었고, 예전처럼 원판에 직접 녹음하느라 삑사리 등의 실수를 수정하려면 판을 새로 갈아서 녹음해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는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LP와 SP의 위치는 넘사벽으로 벌어졌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음반임에도 제작 단가나 과정은 오히려 SP보다 저렴하고 간소화되었고, 이 때문에 종전에 음반 제작과 판매를 주저하던 군소 음반사나 뉴비 음반사들도 쉽게 레코드를 제작해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흥한 회사로 필립스가 있었고, 이외에도 웨스트민스터나 콘서트 홀, 레밍턴, 복스 등 수많은 음반사들이 난입해 엄청난 양의 음반들을 쏟아냈다.
또 재생 시간의 연장 덕에, 그 동안 음반화가 매우 더뎠던 오페라의 전곡 음반도 LP가 발명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발매되기 시작했다. 특히 연주 시간이 평균 3~5시간에 이르러 SP로는 수십 장이나 필요한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들이 큰 혜택을 입었고, 그 동안 채산성과 음반 숫자 문제로 녹음되지 못한 여타 대규모 작품들이 계속해서 음반으로 나왔다. 연주 시간이 10~30분 혹은 그 이상에 이르는 대규모 모음곡들을 발표하던 재즈 빅 밴드의 본좌 듀크 엘링턴도 LP의 발매 후 해당 작품들을 재녹음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독일과 일본에서도 LP의 제작과 유통이 시작되었고, 이후 SP는 끝없이 매출과 생산이 줄어들면서 1963년 경 전세계적으로 생산이 중단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LP는 그 이후에 도입된 카세트 테이프와 함께 음반 포맷의 대표 격으로 거의 40여 년을 군림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초중반에 최초로 국내 생산을 시작했고, 몇곡 안 들어가는 SP나 EP보다 더 곡이 많이 들어가는 LP가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SP와 EP생산은 찬밥신세가 되고 LP생산이 국가 주도하에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비록 EP가 수록 시간 때문에 맥을 못췄다고 해도 싱글용 음반으로 계속 살아남은 것에 반해, 이러한 편견은 결국 한국의 EP 시장을 고사시킴과 동시에 싱글 음반이라는 존재 자체를 희귀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대중음악 음반을 주로 발매하는 음반사들에서는 오직 타이틀 곡 뽑는 데 혈안이 되어 다른 앨범 수록곡들을 듣보잡화하는 괴상한 관행이 퍼져나갔고, 이 여파는 전체적으로 대중음악 시장의 기형적인 성장이라는 악영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세기가 바뀐 뒤에는 모바일 싱글 시장의 성장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태이다.
1.1.4 CD의 등장과 쇠퇴
아무리 LP가 SP보다 우월했다고 해도, 이 새로운 음반에 대한 청자나 평론가들의 불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SP의 셸락보다 훨씬 가볍고 유연하며 충격에 강한 염화비닐 수지를 소재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유연성이 오히려 단점이 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질이 나쁜 바늘로 재생하거나 실수로 픽업 바를 레코드 표면에 긁었을 때 흠집도 잘 나고, 열에도 약해 난로 옆에 실수로 뒀다가 시망해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합성수지의 원죄라고 할 수 있는 정전기 때문에 음반 표면에 먼지가 너무 쉽게 달라붙고, 심지어 소릿결에 박히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아무리 공들여 닦고 틀어도 가끔씩 튀는 잡음이나 바늘과 음반의 마찰로 생기는 필연적인 서피스 노이즈(표면 잡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녹음과 재생 기술의 발달은 LP의 이러한 단점을 오히려 강조하는 모양새를 낳았고, 결국 기술자들은 LP의 바늘이나 카세트 테이프/비디오 테이프의 헤드 같이 음반이나 영상물 표면에 특정 물체가 직접 접촉해 마찰하는 식으로 소리를 읽는 기존 방식 대신 간접적인 재생 방식을 계속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 초반에 CD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LP와 EP는 꾸준히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아무리 초기 CD와 그 플레이어의 값이 비쌌다고 해도, 음반의 크기와 음질, 잡음의 현저한 감소와 재생 가능 음역의 확대라는 이점은 LP 등 기존의 음반 포맷을 버로우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디지털 녹음의 보급과 함께 LP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최신 녹음들이 CD로만 나오는 등, LP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다.
결국 LP의 생산량은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가파른 내리막을 걷게 되었고, 세기가 바뀐 뒤에는 그냥 한정판 음반의 제작 정도에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2004년에 마지막 LP 공장을 운영하던 서라벌레코드가 사업을 접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공식적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2012년 한국에서 LP팩토리라는 기업이 출범해 LP 생산을 재개하고 있다. 관련기사
1.2 현재의 취급
그럼에도 아직까지 LP 수집가들의 수는 무시못할 정도로 많고, 중고음반 시장에 유통되는 LP의 양과 가짓수도 상당히 많다. 복고 열풍으로 2013년 국내 유일의 LP 생산 기업인 LP팩토리는 연간 3만장을 생산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연간 460만장의 LP음반이 팔리고 있을 정도다.[5]
이들 애호가들 중에는 CD가 너무 날카롭고 딱딱한 음질인데 반해 LP는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며 LP를 고집하는 이들도 많다. 유명인 중에선 만화가 허영만이 있다.[6] 하지만 이에 대해 전체적인 재생 대역폭은 CD가 LP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고, 마찰에 의한 마모로 소리의 열화가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LP에 비해 레이저로 표면을 읽어서 소리를 뽑아내는 CD가 보존과 재생 기간이 더 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며 비과학적인 주장이나 지나친 추억팔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실상 필름 대 디지털의 논쟁과 비슷한 경우.
LP 좋아하는 사람들은 CD는 디지털이라서 차갑게 들린다거나 원음을 왜곡한다고 까는데 실제로는 LP가 특성상 원음 왜곡이 많이 된다. 이게 사람에 따라서 CD의 원음에 가까운 깨끗한 소리보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들리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오히려 CD가 중간에 장난질 치지 않는 한 원음 왜곡이 적다. 즉 LP가 따뜻하게 들리는 것은 아날로그라서 그런게 아니라 LP라서 그런거다. 매체의 특성 차이를 디지털/아날로그의 차이로 착각하지 말자. 또 오랫동안 LP로 들어온 유명한 음악들은 CD로 다시 듣게 되면 생소하게 들려서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SP와 마찬가지로 생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몇몇 음반들의 경우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는 경우도 많은데, 이 때문에 몇몇 LP 수집가들은 적게는 몇십 만원, 많게는 천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음반 한 장의 구입에 쓰기도 한다. 특히 LP 초기에 난립한 군소 음반사들 중에는 회사의 파산 등으로 원본 녹음 테이프의 소재가 불명확하거나 심지어 파기된 경우까지 있어서, 이들 녹음을 들으려면 LP 외의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까지도 있다(...).
CD의 보급 이후에도 턴테이블과 함께 디제잉의 필수요소이기도 해서 DJ들이 LP를 구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쓰기도 했는데, 이것도 컴퓨터 음악과 편집의 발달로 인해 입지가 굉장히 좁아졌다. 2011년 3월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 시내에 소재한 클럽 중 DJ 박스에 턴테이블이 설치되어 있고 최소한의 방진 대책까지 마련해둔 클럽은 다섯 곳을 넘지 못한다고 기록되었다. 서울이 이 정도면 다른 지역의 클럽과 나이트에서 LP 디제잉은 전멸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며, 심지어 소규모의 저예산 클럽들을 위주로 보급된 CDJ(DJ를 위한 CD플레이어)마저 퇴출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애플의 맥북과 에이블튼 라이브로 대변되는 랩탑 디제잉의 영향으로 보인다. 물론 힙합쪽의 턴테이블리스트 들은 아직도 LP와 턴테이블을 쓰긴 한다. CDJ로도 스크래치를 할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다른게 많아서...
라디오 방송에서 가끔 LP를 틀어주는 경우가 있는데, LP를 턴테이블에 얹어 그대로 재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방송사고의 위험 때문에 LP의 소리를 다른 매체에 옮겨담은 것을 사용한다. 특히 KBS처럼 방송국에서 자체적으로 LP를 재생해 잡음을 최대한 제거한 뒤 wav 파일로 변환시켜 하드디스크나 CD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재생하는 경우도 있다.
2013년 2월 현재 방영 중인 KBS 2FM 나얼의 음악세계(매일 새벽 2~3시)는 LP 음반을 방송국에 있는 턴테이블로 직접 틀어주지만 문제는 녹음방송이라는 것(...).[7]
2013년 11월 현재 방영중인 SBS 파워FM의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매일 오후 10~12시)에서는 매주 수요일, 양평 LP바라는 코너를 운영중인데 장기하와 얼굴들의 객원 멤버인 하세가와 요헤이 본인이 수집한 LP를 직접 틀어주는 코너를 마련하고 있다. 이 코너를 위해 SBS에서도 턴테이블을 구입했고 현재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실시간 LP를 들을 수 있는 코너로서 본 방송의 간판 코너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5년 10월 현재 KBS 1FM에서 오후 2시부터 방송되는 명연주 명음반이 주말 특집으로 LP 음반 수록곡을 송출하고 있다.
사실 아무리 생방송에서 방송국 턴테이블로 직접 LP 음반을 재생한다고 해도 청취자가 최종적으로 듣게 되는 것은 방송국-송신소 간 전용회선망을 통해 256kbps급[8]으로 손실압축된 디지털 오디오를 거친, '형식'만 아날로그인 FM음. 결코 순수 아날로그음이 아니라는 것. 쉽게 말하자면 턴테이블을 컴퓨터 사운드카드에 직접 연결하여 곧바로 MP3 256~320kbps 파일로 녹음한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LP 음반 중 대부분은 순수 아날로그 제작이지만, 2010년대 들어서 복각되고 있는 LP 음반의 상당수는 순수 아날로그이기 보다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샘플링 수준은 CD급인 44.1kHz 16비트급이 아닌 192kHz/96kHz 24비트급이긴 하겠지만. 2000년 이전에 발매된 오리지널 LP 음반 중에 간혹 디지털(PCM) 방식의 릴 테이프가 마스터 테이프인 경우가 있다. 이건 한국에서 발매된 음반 사이에서는 없다고 보면 되고[9], 선진국에서 발매된 일부 음반에서나 그런 경우가 있다.
아예 못 쓰는 레코드판은 오븐용 그릇에다 넣고 잘 만들어주면 그릇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단, 뜨거운 것은 넣으면 그릇이 녹아 버리기 때문에 주의할 것. 이는 KBS 스펀지 298회에 소개되었다.
1.3 보관과 관리 시 주의사항
LP의 표면 잡음은 재생하기 직전에 초극세사 천에 전용 세정액을 살짝 적셔서 닦아주면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하다. 전용 세정액이 없을 경우, 새로 붙는 먼지를 방지하는 기능은 없지만 그냥 깨끗한 물로 닦아도 된다. 간혹 목공풀을 이용해서 먼지를 없애기도 하며 효과는 좋지만 실패시 음반하나를 날려 먹기 때문에 큰 주의가 필요하다. 먼지가 많은 LP를 그대로 재생시킬 경우, 소리만 지직거리고 끝나는게 아니라 바늘이 소릿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까지 방해해서 음반과 바늘 사이의 마찰을 심하게 일으키거나, 심할 경우 퍽 튀며 소리를 씹게 만들기도 하므로 원칙적으로 피하는게 좋다.
실제로 턴테이블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바늘끝과 판이 맞닿은 부분의 온도는 섭씨 400도까지 올라간다. 당연히 먼지 등의 이물질이 걸리적거리면 발열은 더 심해지고, LP의 기록면은 달궈진 바늘에 미세하게 녹으면서 주변의 먼지들을 끌어당긴 후 그대로 굳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바늘이 튄다는 건 말 그대로 벌겋게 익은 바늘로 비닐판을 찍어누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된다.
물론 턴테이블 바늘이 송곳이나 바느질에 쓰는 바늘 같은 물건에 비해 크기로나 열용량으로나 비교가 안될만큼 작고, 만들 때도 마찰과 그로 인한 열을 가능한 줄이기 위해 촉 끝을 금속이 아닌 다이아몬드로 만든다거나 표면을 부드럽게 연마하는 식으로 가공하기 때문에, 눈에 보일 정도로 판을 녹이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바늘과 음반이 직접 닿아 재생이 된다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바늘은 멀쩡할 지언정, 음반은 만신창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또 CD보다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잘 휘어지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똑바로 세워두지 않고 벽이나 책장에 기대어 둘 경우 장기적으로는 판이 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커버가 종이이므로 습기와 곰팡이에 취약하지만 그것은 CD와 마찬가지. LP매니아들을 경악시킨 손상으로는 투명한 PVC 재질의 LP 보호 커버와 LP음반의 접촉으로 인한 화학반응이 있었다. 이것은 표면의 화학반응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잡음을 낳게 된다. 매니아들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음반에 커버를 씌웠기 때문에 더욱 피해가 컸다.
반면 LP 자체는 웬만해서는 소리가 난다. LP가 아무리 더럽고 기스가 많아도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소리가 잘 나는 경우가 많으며 튀는 음반도 적당히 닦아주거나 하면 넘어갈 수 있다. 특정 부위가 손상되면 음반 전체를 못듣게 되는 CD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면도 있다. 단 표면이 더러운 경우 매니아들 사이에서 가치가 하락하므로 잘 관리하는 것이 당연히 좋다. 또 CD는 부식되는 경우도 있어 장기 보관이 어렵지만 LP는 2차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을 지금 재생해도 소리가 잘 나기 때문에 의외로 내구성이 강하다. 60년대 중반 LP의 양산 이후 만들어진 LP들은 지금도 일상적인 청취에 아무 문제가 없다.
LP는 CD에 비해 확실히 뭐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들다. 종이 케이스 귀퉁이도 CD보다 훨씬 얇아서, 여러 장을 두껍고 튼튼한 케이스에 담은 오페라 전곡반이나 여타 전집류가 아닌 낱장의 경우 수록곡이나 연주자도 작은 글자로 인쇄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도 주의해야 한다. 이걸 대단찮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쑤셔박다가 좀 규모가 큰 LP 가게나 집의 LP 보관용 장에서 자기가 듣거나 구입하고 싶은 음반을 쉽게 못찾아 한참을 꺼내고 집어넣고 하는 생고생을 하기 십상이다. 소장자 나름의 분류방법을 잘 고민해서 관리해야 한다. 예전에 방송국 등에서는 작곡가별이나 장르별, 연주자별 등으로 분류한 견출지를 살짝 튀어나오게 붙여서 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2 Low Profile
LP. 슬림 케이스에 맞춘 데스크탑 PC의 부품 규격. 주로 VGA카드나 확장 슬롯에서 많이 사용된다.
데스크탑의 본체 형태 중 공간 활용성이나 미관 등의 이유로 가로폭을 좁게 만든 슬림 케이스가 있다. 좁은 슬림 케이스에는 일반적인 크기의 그래픽 카드 등 PC 부속품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보다 작거나 길고 얇은 형태의 부품이 필요하다. LP는 그 크기를 정한 규격. 좌우 폭이 좁은 방식인데도 Narrow Profile이 아니라 Low Profile인 이유는 이 규격이 생겼을 당시의 PC들이 본체를 눕히고[10] 그 위에 모니터를 얹어서 쓰던 형태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타워형 PC 케이스들이 주류가 되며 LP 규격의 케이스들도 세워서 쓸 수 있도록 받침대를 제공하기 경우가 생겨났다.
LP규격의 부품은 케이스와 부품을 연결하고, 각종 외부연결 단자가 달리는 브라켓이라는 금속판만 교체하면 일반적인 규격의 케이스에도 연결이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품을 사면 안에 일반적인 규격의 브라켓을 함께 넣어주기도 한다.
폭이 좁은 규격의 특성상 단자를 많이 달기 힘든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자를 옆 슬롯등에 달고, 이걸 부품과 케이블로 연결해 놓는 경우도 있다. 서버용 랙마운트의 2U(Unit)과 높이가 거의 비슷하다. 그러한 이유로 2U 타입의 랙마운트용 케이스들은 LP 규격의 확장 슬롯을 가진 경우가 많다.
3 Liquidity Provider
유동성 공급자. 금융시장에서 거래량을 증가시켜 가격을 균형가격에 접근하게 만드는 자. 추상적인 개념으로, 거래를 활발히 하지만 이익을 내지 못하는 개인 투자자들도 일종의 유동성 공급자로 취급받는다. 미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장내시장에 마켓 메이커라는 이름의 유동성 공급자들이 존재한다. 뉴욕증권거래소의 경우 종목별로 1명의 마켓메이커가 지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주식시장이나 코스피200 지수선물 시장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2005년에 ELW 시장이 개설된 이후로 주목받는 개념이 되었다.- ↑ 세르비아의 여자가수 드라간 미르코비치의 노래 앨범. 나이가 나이다 보니(1968년생) 현재는 퇴물 취급을 받고 있지만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세르비아를 위시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국가에서 대한민국의 아이유, 원더걸스, 소녀시대만큼이나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였다.
- ↑ 2016년 발매된 원더걸스 LP 한정판.
- ↑ 지금은 해체한 일본의 테크노 팝 밴드 P-MODEL의 1집 앨범인 'IN A MODEL ROOM' (1979) 앨범이다.
- ↑ 메카니즘은 다르지만 판의 크기는 동일하다.
- ↑ 이는 힙스터 문화와 관련이 높은데, 10년 넘게 백만장 근처를 왔다갔다 하던 연간 LP 총 판매량이 2007년 이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13년에는 무려 6백만장을 찍었다. 참고. # 전체 음반판매량의 2퍼센트 정도만을 차지하는 수치이지만 눈여겨볼 만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유럽도 비슷해서, LP판만을 취급하는 음반가게가 힙스터, 인디 문화 성지와도 같은 런던, 베를린 등에 존재하거나 2010년대 들어 인디 레이블에서는 LP버전의 앨범만을 내는 경우가 잦아지기도 하는 등, 인디판에서 상당한 떡밥(?)인 것은 사실. 이젠 듣지도 않을거면서 사모으기만 한다고 비난하는 의견마저 나올 지경이다. 실제로 제조 중지되는 턴테이블이 있는 등 아주 근거없는 소리도 아니라는 게...
- ↑ 식객을 통해 시디는 차갑고 레코드는 따뜻하다란 말을 많이 했다. 인터뷰한 사람의 의견을 그냥 옮긴 걸 수도 있지만...
- ↑ KBS의 경우 녹음방송은 48kHz 16비트의 비압축 웨이블 파일이다. 그리고 방송국-송신소 간 회선망은 APT-X 코덱...(256kbps급)
- ↑ 보통 APT-X 코덱이 많이 쓰인다.
- ↑ 1990년대까지는 한국에서는 CD로 발매되는 일반 대중가요 음반의 마스터 테이프가 아날로그 방식의 오픈릴 테이프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94년에 발표된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의 마스터 테이프는 아날로그 릴 테이프이다.
- ↑ 이런 형태의 PC 본체 혹은 케이스를 '데스크탑' 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대략 펜티엄 클래식에서 펜티엄 MMX의 보급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타워형 PC들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나 그 명칭은 남아있다. 2016년 현재 데스크탑이란 단어는 책상에 두고 고정형으로 쓰는 PC를 뜻하는 단어로 그 의미가 확장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