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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一口二言: 하나의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한다.

김성근과 연관된 각종 구설과 논란을 정리한 문서. 한국 프로야구에 몸담은 기간이 길었던 감독이기에 그만큼 논란도 많다. 좋게는 자기 소신이 강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는 성격 탓에, 나쁘게는 신중하지 못한 언행과 일구이언,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내로남불)식 언행, 아전인수적인 태도로 구설에 자주 오르곤 한다.

특히 김성근 개인팬들이 점령하고 있는 몇몇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지지와 사실 왜곡을 통한 김성근 개인숭배 분위기가 퍼져 있는 터라 김성근 감독에 대한 건전한 비판까지 용납하지 않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의 지적들 중에서는 다른 상황, 다른 맥락으로 사용한 표현들을 무리하게 엮어 비난하는 것들도 있다. 또 그와 반대로 무분별한 심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밖엔 볼 수없는 사실"을 객관적 근거 없이 왜곡과 추측으로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글도 해당 문서에 존재한다.
읽는 사람들의 객관적이고 비판적 시각이 요구되는 문서다.

2 20세기

2.1 고교야구 시절(~1981)

2.1.1 충암고 감독에서 신일고 감독으로

충암고 감독을 맡고 있던 김성근은 야구명문인 신일고의 한동화 감독이 경질되자, 아직 충암고와 계약기간이 2년 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인인 김동엽, 한을룡 등에게 신일고 감독 자리에 관심있음을 내비쳤다.[1] 이에 절친 김동엽이 신일고 교장과 직접 접촉하여 김성근 영입을 성사시켰다.

그러자 충암고는 발칵 뒤집혔다. 당장 급하게 감독을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 충암고는 신일고에서 경질된 한동화를 급하게 감독으로 영입했다. 김성근은 마산상고 감독 시절에도 기업은행에서 코치로 부르자 갑자기 감독을 그만두고 상경해 버리는 바람에 마산상고측을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충암고는 가만히 당하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충암고측은 김성근에게 계약을 파기했으니 계약금 600만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김성근은 "안정적인 기업은행 직장을 그만두고 충암고 감독을 맡았던 것은 600만원의 거액계약 때문이었는데…"라고 하면서 몹시 아까워 했지만, 스스로 계약을 파기한 이상 계약금을 다 토해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 이후 김성근은 결코 스스로 먼저 감독직을 중도 사퇴한 적이 없다.

한편 스승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충암고 선수들은 신일고 상대로 독하게 붙었다고 한다.

2.1.2 이재홍 건국대 진학 강요 사건과 경질

2.1.2.1 사건의 전말

김성근 감독은 1981년 당시 신일고 에이스 이재홍한테 건국대 진학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재홍이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 진학을 고집하자, 김성근 감독은 이재홍의 유니폼을 벗기고 황금사자기 대회에 출장시키지 않으면서까지 건국대 진학을 강요했다.

또 김 감독은 그해 5월 대통령배 대회에서 주전으로 기용되지 않은데 불만을 품고 팀을 떠난 김모 선수를 야구팀에서 제외시켰는데, 후에 학부모가 “야구를 다시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하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파문이 커지자 결국 학교 측은 김성근 감독을 해임했다. <경향신문 1981년 10월 28일자 기사 원문> 당시에는 선수끼워팔기 등 체육계 입시비리가 암암리에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나, 이재홍 사건은 에이스에게 대놓고 명문대를 포기하고 중위권학교로 진학을 하도록 희생을 강요한 사건이라서 당시에도 크게 문제화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일고가 김성근을 해임한 것은 이재홍 사건 등을 제외하더라도, 잘나가던 신일고가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심각한 부진에 빠진 것도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신일고 야구부는 75년에 창단된 직후 76년과 78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단번에 야구 명문고로 떠올랐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79~81년 동안 신일고는 4대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에서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한번도 진출하지 못했다.

2.1.2.2 김성근의 해명 및 거짓 미화

하지만 김성근은 경질된 후 언론에 “선수들에게 올바른 정신을 심어주려는 지도방법을 학교 측이 막는 현실이 아쉽다”고 하면서 마치 자신이 부당하고 억울하게 해고된 것처럼 말하며 신일고 측을 비판했다.

실상은 성적 부진에다가 학생의 진로에 부당하게 간섭하다가 경질된 것이지만, 나중에 김성근은 신일고측이 학교측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자신을 못마땅해 하다가 부당하게 경질한 것으로 왜곡, 미화했다. 이재홍에게 연세대 진학을 포기하고 건국대 진학을 종용했던 행위는 음해성 소문이었다면서 거짓으로 미화했다.

“김성근 감독은 신일고를 우승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에 고분고분하지 않자 학교 측이 그를 두고 갖가지 음해성 소문을 만들어 해고했다.”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14>신일서도 우승하고 잘리다

신일고는 창단 3년만에 황금사자기에 두차례 우승하며 단번에 야구 명문고로 떠올랐는데,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후 3년 동안 4대 고교야구 대회 결승에 한번도 진출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훗날 역시 신일고 시절도 미화되고 포장되었다. 김성근 임기 마지막해인 1981년 신일고가 메이저대회는 아니지만 화랑대기에서 우승했는데, 이것을 부풀려서 윤색하는 식이었다.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14>신일서도 우승하고 잘리다
자신을 공격할 줄 알아야 이긴다

2.1.2.3 선수끼워팔기 입학관행

기량이 뛰어난 유망주를 입학시키면 대학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 동기선수도 끼워 입학시켜주는 선수끼워팔기 관행은 대표적인 입시비리의 한 형태로 오랫동안 사회문제가 되어온 관행이다. 유망주 끼워팔기 입학관행은 부유층 자제의 편법적인 대학입학 방법의 하나로 악용되어 왔다.

공부로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운 부유층 자제가 운동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내고 운동부에 이름만 걸어놓고 있다가 나중에 해당 운동부의 유망주가 대학에 입학할 때 끼워팔기 조건을 제시한 대학에 함께 입학하는 편법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체육특기자로 입학하더라도 보통 경영학과, 정외과와 같은 일반적인 학과에 소속되기 때문에 이렇게 편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운동부 활동을 하지 않고 일반학과 학생으로 재학하다가 졸업장을 받게 된다. 때문에 부유층 자제들이 편법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는 경로로 자주 악용되었다.

김성근은 동기선수도 입학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재홍 본인의 미래를 희생해서 건국대에 갈 것을 강요한 것이라고 하지만, 당시 선수끼워팔기 입학관행의 실상을 들여다볼 때 진의는 알 수 없다. 선수끼워팔기 입시관행은 오랫동안 크게 사회문제가 되어온 대표적인 입시비리이며, 학부모들로부터 아무런 댓가가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실력없는 동기들의 미래를 위해 이재홍 본인의 미래를 희생하라는 김성근 감독의 처사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2.2 OB 베어스 코치(1982~1983)

2.2.1 박철순 혹사

프로야구 원년 박철순의 혹사에 대해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이 비판을 받고 있다. 김영덕 감독이 최종 의사 결정권자였으므로 그가 최종적인 비판을 감수했어야 하는 점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당시 OB에서 투수기용에 대해 큰 권한을 가지고 있던 김성근 투수 코치 또한 박철순 혹사에 대한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다. 당시 김영덕 감독은 투수 기용에 관해서는 김성근 코치에게 거의 맡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성근 코치가 올린 투수를 김영덕 감독이 교체하자 김성근 코치가 경기도중 가방을 싸 나가버린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2.2.2 사인훔치기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의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은 삼성 라이온즈의 주전 포수 이만수의 사인을 훔쳐 OB 타자들에게 알려줬다. 이것은 김성근 감독이 직접 인터뷰와 자서전 등에서 밝힌 내용이다. 김성근 코치는 이만수의 팔뚝 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엄지를 폈는지 검지를 폈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사인은 지금보다 단순했다고 한다. 삼성도 김성근 코치가 사인을 훔치는 것을 알아챘고 이 때문에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성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성근 코치의 사인 훔치기는 한국시리즈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이만수는 다 포기하고 아예 김성근 코치 쪽으로 돌아앉아 싸인을 내면서 무언의 항의를 하기도 했다고. 김성근 감독은 본인이 삼성의 사인을 죄다 훔친 덕분에 OB가 삼성을 이기고 원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포수 이만수 덕에 원년 우승', 'tv 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참조. 기사 중 동영상 46분 28초부터 김성근 감독이 직접 이만수 사인 훔치기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김성근 감독의 자서전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53페이지에도 실려 있다.[2][3]

또 이후 OB 베어스 감독 시절에도,

책에 소개된 경기의 뒷얘기들이 흥미진진하다. 그가 OB베어스 감독으로 있을 때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성적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포수의 팔근육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포수의 사인은 주먹에서 시작되는데 손가락을 펴는 숫자에 따라 팔뚝의 근육이 달라진단다. 근육의 모양을 보고 그걸 읽어내니까 경기의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라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성적이 좋았던 까닭이 포수의 사인을 훔쳤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여러번 말한 적 있다.[4]


김성근 감독은 이러한 싸인 훔치기에 대해, 이전의 인터뷰에서부터 최근에 논란이 된 한화 이글스 인터뷰에서까지, 동일한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인터뷰를 보자.

김감독은 "올시즌은 4경기 모두 중계를 해주다보니 미리 상대팀 사인 분석이 용이해졌다. 알고 치면 아무래도 안타가 많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분석. 이어 "사인 훔치기를 탓하기에 앞서 노출을 막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 - 2008년 6월 17일자 기사
그러나 사인 훔치기 의혹에 대해선 "원래 사인은 철저한 보안을 위해 자주 바꾸는 것이다. 사인을 분석하는 건 8개 구단 모두 하는 당연한 일"이라면서 "프로로서 그걸 뺏기는 게 잘못"이라고 발끈하며 정당성을 역설했다. - 2009년 기아와의 한국시리즈 중 사인을 훔쳤다는 의혹을 받은 후
"사인을 보는 것은 프로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테크닉"이라고 주장한 그는 "상대방에게 걸리지 않고 해야한다. 그게 바로 기술"이라며 자신이 항의한 부분이 '사인 훔치기'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 2010년 9월 롯데전에서 사인훔치기 의혹을 제기한 후의 인터뷰
"'사인 훔치기'는 원칙적으로 금지돼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고, 상대가 어필하면 그만 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동 인터뷰
“사인 훔치기? 웃으면서 말하겠다. 우리 팀은 하지 않지만 다른 팀은 다 한다. 우리 팀? 제발 했으면 좋겠다. (중략) 우리 세계에서는 (사인을) 빼앗기는 것이 병신이다. 프로는 빼앗겼다고 떠드는 것은 수모다. 어디서 빼앗겼는지 알아내 역이용해야 한다. 그래야 야구 수가 는다.” - 2015년 '한화가 사인 훔치기를 잘 한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며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성근 감독은 싸인 훔치기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고, 줄곧 인터뷰에서 그것을 밝혀온 바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사인 훔기기는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종의 테크닉이며, 2. 사인훔치기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모든 팀이 보편적으로 하고 있기에 오히려 빼앗기는 쪽에 잘못이 있다. 3. 그러나 만약 사인을 훔치다 걸렸다면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더 이상은 사인 훔치는 행동을 중지해야 한다

문제는 김성근 감독 스스로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자기팀의 유불리에 따라 그때그때 사인 훔치기에 대해 여러 차례 말을 바꾸며, 본인이 일관적으로 고수한 입장과 대치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에 있다.

사인훔치기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규정상 금지된 행동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야구 규칙은 아니지만 대회 요강 26조(불공정 행위의 입수 및 관련 행위 금지)에 사인 훔치기를 금지하고, 어기면 퇴장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KBO에서 사인훔치기를 명문화하여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김성근 감독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이전의 반론에서는

요강에서 지적한 사인훔치기는 규칙이 아니다. 본디 규칙이라 함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 또는 제정된 질서"이다. 하지만 KBO 대회 요강은 법칙과 같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이 아닌 지침에 불과하다. 보편타당하다고 전제하는 야구 규칙과 같이 명확한 기준을 바탕으로 강제성을 띄는 것이 아니라, 요강은 KBO가 툭하면 바꾸는 유동적인 방침으로서 "권장,참고"의 개념이 강하다. KBO 대회 요강과는 별도로 기록되고 취급되는 KBO 야구 규칙에서 사인 훔치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 역시 이에 대한 방증이다.

대회 요강은 야구 규칙으로서 규제하기 애매한, 선수와 감독에게 있어 강제성이 있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며,

2010년 이전까지는 KBO 대회 요강이건 KBO 야구 규칙이건 그 어디에도 사인훔치기에 대한 규정을 찾아볼 수 없다. KBO가 대회 요강에서 사인훔치기를 처음 언급한건 2009년이며, 2010년에야 이를 적용하기로 했다. 그 이전까지는 사인훔치기에 대해 명문화된 지침이나 규칙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2009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사인훔치기가 언급된 KBO 요강을 근거로 1982년의 사인훔치기 행태를 지적하는건 엄연히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사인 훔치기에 대한 요강이 적용된 것이 2010년 이후부터이므로, 김성근의 내로남불스러운 발언(본인이 사인을 훔쳤을 때는 규칙으로 정해져 있는 사항이 아니다라고 말하다가, 다른 팀이 사인을 훔쳤다고 의혹을 제기할 때는 대회 요강에 금지된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이중잣대)은 결코 모순되거나 이중잣대를 보이는게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의 요강이 단순히 권장, 참고의 개념에 불과하다면, 그 요강을 근거로 하여 로이스터 감독을 비판했던 김성근 감독도 강제성이 없는 방침에 불과한 요강을 가지고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한 셈이니, 이는 오히려 김성근 감독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2009년 KIA, SK 사인 훔치기 논란 당시 기사를 보면, '사인 훔치기?' 김성근 "프로로서 그걸 뺏기는 게 잘못"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대회요강 제26조 '불공정 정보의 입수 및 관련 행위 금지'에 따라 부적절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조종규 심판위원장은 "공수 교대라면 모를까 경기 중이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적발될 시 전력분석원의 퇴장 및 남은 경기 출입금지까지 내리겠다는 게 KBO의 입장이다.
KIA의 항의와 KBO의 방침을 들은 SK 측은 "선수에게 직접 한 게 아니라 수비코치를 통해서 전달됐다. 시즌 중 다른 팀도 하는 일이다. 금지한다면 하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선 입장을 보였다.

보다시피 KBO가 사인 훔치기에 대해 전력분석원 퇴장 및 남은 경기 출입금지 등으로 제재하겠다고 분명한 입장을 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회요강이 규칙이 아닌 하나의 지침이라는 사실은 사인 훔치기의 정당성에 대한 옹호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을 어길시에 구체적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강제성이 없는 지침에 불과하다는 것은 분명히 거짓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김성근 감독은 애초부터 "이전에는 사인 훔치기를 규칙으로 제재하지 않았고 2010년 이후부터 규칙이 적용되었기에, 그 이후로는 사인 훔치기를 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위의 인터뷰를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김성근 감독은 요강이 나온 시점과 상관없이, 사인 훔치기는 몰래 이루어질 경우에만 정당하며, 상대방이 항의할 시에는 금지된 행동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2010년 9월 김성근 감독이 "롯데 3루 주루코치가 SK포수 사인을 훔쳐서 1루 주루코치에게 전달하고 이 사인을 다시 타자에게 전달했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해서 논란을 야기했을 때, 롯데 로이스터 감독이 코치 2명을 거쳐 타자에게 사인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뿐만아니라 "사인 훔치기를 했던 안했던 문제되지 않는다"며, '"사인 훔치기가 야구 규칙에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자, 한국에서는 "사인훔치기가 원칙적으로 들켜서는 안되는 행동"임을 주지시키며, "로이스터가 아는 (메이저리그) 야구가 전부는 아니다. 여기는 한국"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니까 김성근 감독은 원래부터 "사인 훔치기는 상대방 몰래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해온 것이지, 로이스터 감독에게 "한국에서는 (예전에는 규칙에 없었으나) 지금은 규칙으로 사인훔치기가 금지되어 있으니,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게, "상대방에게 걸리지 않고 해야한다. 그게 바로 기술"이라며 자신이 항의한 부분이 '사인 훔치기'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는 인터뷰 기사이다. "사인 훔치기는 몰래 이루어져야 하며, 상대방이 항의할 시 사과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걸리지 않고 사인을 훔쳐냈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의 잘못"이라는게 김성근 감독의 주장인 것이다. 따라서, "규칙이 제정된 시점 이전에 일어난 일이니 소급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두 번째 반론은 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반론이다.

차라리 김성근이 싸인은 빼앗기는 쪽이 잘못이다. 싸인훔치기가 뭐가 나쁘냐고 주장해왔다면 싸인 훔치기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되었을지언정,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가 "싸인을 훔치다 걸리면 사과하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상황에 따라 타인에게는 이 원칙을 지킬 것을 강요하면서 싸인을 훔쳤을 것이다라는 심증만으로도 사과를 요구하는 반면에, 본인이 이 원칙을 지켜야할 시점에서는 입 싹닫고 모른 척한 것에 있다. 즉, 싸인을 훔치다 걸리면 싸인을 훔치는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걸리지 않으면 싸인을 빼앗기는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해놓고도, 이 기준을 본인의 유불리에 따라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내로남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상대팀이 사인 훔치기를 했다고 판단할때마다) 사과를 요구하며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킨 것이 무색하게도, 정작 본인이 이만수의 사인을 훔친 행위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항의가 들어왔음에도 사과는 커녕 보란듯이 사인 훔치기를 계속했던 바가 있다. 당시 사인 훔치기로 인해 벤치클리어링까지 일어났고, 이만수 본인도 김성근의 사인 훔치기에 대해 항의하며 아예 김성근 쪽으로 돌아앉아 싸인을 내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은 사인 훔치기를 끝까지 지속했으며, 이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서전에 "싸인을 훔쳐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써놓으며, 본인이 싸인을 훔치다가 걸린 행위에 대해서는 사과를 해야된다는 자각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째서 "싸인을 훔치다 걸리면 사과하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원칙이 본인에게만 적용되지 않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한 2009년 포스트시즌에서 SK의 장외 사인(관중석 수신호) 및 사인 훔치기 논란이 나올 당시에 했던 발언들도 평소에 본인이 고수한다던 원칙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SK 주자가 두산 사인을 훔쳐 타자에게 신호를 보내고, 이를 관중석에 앉은 SK의 김정준 전력분석원 등이 수신호로 선수들에게 시프트 등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나왔고, 두산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KIA가 한국시리즈 1차전 때 항의함에 따라 논란이 일었다. KBO는 대회요강 26조 불공정 정보의 입수 및 관련 행위 금지에 따라 부적절하다는 해석을 내리고 향후 적발될 시 전력분석원의 퇴장 및 남은 경기 출입금지 조치를 내리겠다고 밝히며 사인훔치기로 해석했고, SK도 "선수에게 직접 한 게 아니라 수비코치를 통해서 전달됐다. 시즌 중 다른 팀도 하는 일이다. 금지한다면 앞으로 하지 않겠다."라고 해명하며 사실상 관중석 사인 훔치기를 시인했다.

이렇게 사인훔치기를 하다 다른팀에게 항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은 사과는 커녕 적반하장적 태도로 일관했다. "시즌 중 타팀이 사인훔치기를 했다."면서 엉뚱한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중요한 것은 사인을 훔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이라면서 "8개 구단 모두 상대를 분석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며 사과 없이 논점회피적 태도만 보였을 뿐이다.

나중에는 한술 더 떠

김 감독은 18일 문학구장에서 취재진과 만나 "필요하면 따질 수 있다. 야구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가 한 일을 뒤돌아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 시기에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의심스럽다. 나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1차전부터 'SK 2루 주자가 상대 배터리 사인을 타자에게 알려준다'는 의혹이 불거진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이날 김 감독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어두웠다.
김 감독은 프로 정신이 부족해 나온 말이라고 강변했다. 상대의 빈틈을 찾되 자신의 빈틈은 내주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김 감독은 "프로는 당하지 말아야 한다. 당한 뒤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프로답지 못한 자세다"라고 말했다.

언제는 "싸인을 훔치다 걸리면 사과하고 그만두어야 한다"더니, 본인이 사인 훔치기 의혹을 받자, "당한뒤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프로답지 못한 자세다"기존의 입장하고 백만광년정도 떨어진 소리를 하고 있다. 위의 로이스터 감독에게 항의할때도 알 수 있듯이, 상대방 팀에 항의할 때는 근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사인을 훔쳤으니 사과하라며 수없이 항의를 해오던 김성근 감독이, 본인팀이 상대방 사인을 훔쳤다는 의혹을 받을 때는 "프로는 당하지 말아야하는 것이라며" 변명질을 하고 있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김성근 감독의 항의는 "당하지 않으려는 프로의 노력"이고, 상대방 팀의 항의는 "의도가 의심스러운, 프로답지 못한 구시렁"일 뿐인가? 결국 "대회 요강에 나온 금지사항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KIA측의 항의에 대해서 김성근 감독은 마지막까지 사과안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한 후 "KIA가 한국시리즈 내내 사인을 훔쳤다"라며, 사인 훔치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게 프로답지 못하다는 누구 말마따나 본인이 프로가 아니라는 것을 열심히 어필하며 자아비판을 시도했다. 이정도면 자아비판이 아니라 자아분열 수준이다.

김성근 감독은 이처럼 본인 스스로가 스스럼없이 거의 공개적인 수준으로 사인훔치기를 자행했고, 이후에도 이른바 관중석 사인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등 여러차례 사인을 훔쳤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상대팀에 대해서는 딱히 물증도 없으면서 수차례 사인훔치기 의혹을 제기하여 곤경에 빠트려 구설수에 올랐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2.3 OB 베어스 감독(1984~1988)

2.3.1 "김영덕이 삼성 감독 자리를 가로챘다"

83년 10월 14일 김영덕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퇴임하고 김성근이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덕 감독과 함께 크게 구설에 올랐다.

우선 김성근 감독이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83년 시즌 중 삼성으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고, 김영덕 감독에게 가서 내년에 삼성 감독으로 가게 됐으니 후임 투수코치로 유백만을 쓰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영덕 감독이 삼성구단에 접촉했고 결국 김영덕이 삼성 감독으로 갔다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수십년이 지난 후 발간된 자서전 "꼴찌에서 일등으로" 등에서도 삼성이 자신에게 먼저 감독 제의를 했는데 김영덕이 삼성 감독 자리를 가로채갔다면서 분노하고 있다.

한편 김영덕 감독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원년인 82년에 팀을 우승시켰지만, 이듬해인 83시즌에 선수들이 줄부상으로 인해 전기 6위(최하위), 후기 5위, 종합 5위로 마감하자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혔는데, 그것은 선수단을 다잡기 위한 성격이었고 설마 정말로 그만두게까지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구단 측에서 그를 해임하자 새로 감독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삼성 측에 전화를 걸어 감독직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삼성구단측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83년에 김성근에게 감독 의향을 물어 본 것 자체는 맞지만, 삼성은 당시 김영덕 감독, 김진영 삼미 감독, 배성서 동국대 감독 등에게 감독 의향을 물어보는 등 광범위하게 감독 후보를 타진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김성근에게 감독 의사를 물어본 것이지 감독직을 제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감독이 되었으니 서로에게 윈윈인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김성근은 "삼성이 나에게 먼저 감독 제의를 했는데 김영덕이 가로챘다"며 분노했고, 선수들에게 김영덕을 팀의 배신자로 규정하여 삼성전에서 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격렬한 집단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 1984년 시즌 중에 OB-삼성 간에 네 차례나 격렬한 난투극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시즌 말미에 김영덕 감독이 한국시리즈에서 OB를 피하기 위해서 롯데에게 져주기 게임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사건의 진실은 본인들만이 아는 것이지만, 세월이 흐를 수록 김영덕 감독이나 삼성구단 측의 입장은 잊혀지고 김성근 감독 측의 주장만이 확인된 사실인 것처럼 떠돌고 있는 형편이다.

2.3.2 윤석환 혹사 논란

두산 베어스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는 윤석환은 김성근 감독의 혹사 첫 작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살려조의 조상 되시겠다. 혹사가 난무했다는 80년대 프로야구에서도 윤석환은 장명부, 최동원 다음가는 혹사 케이스로 꼽힌다. 성균관대 졸업 후 1984년 1차 지명으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윤석환은 1년차 신인인 1984시즌 12승 8패 25세이브(1위)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하며 구원왕과 신인왕에 올랐다. 윤석환은 명목상 국내최초의 마무리투수로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중무리 역할을 하면서 등판할 때 마다 2~3이닝 이상씩 던지는 혹사를 당했다. 그는 1984년 전체 경기수의 절반이 넘는 57경기에 출장하여 그해 투수 최다출장 부문 1위에 올랐고 불펜 투수로는 역대급인 146이닝을 던졌다. 아울러 선발로도 2경기에 등판하여 2승을 거두기도 했다. 등판시 평균 소화이닝은 2 2/3에 달해 엄청난 혹사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시즌 경기수가 100개였던 시절인게 다행이었다.

윤석환은 1년차인 1984년에 맹활약했지만 그해의 혹사의 여파로 어깨 부상을 겪으며 이듬해인 1985년부터 급격하게 구위가 하락하여 평범한 투수로 전락했다. 1985~1987년 세 시즌 동안 기복있는 모습을 보이며 부진을 겪었다. 특히 반복된 부상으로 소화이닝이 현저히 줄었다. 그가 부진하자 김성근 감독은 그를 선발로 돌렸다가 안되니까 다시 불펜으로 돌리는 등 보직변경을 계속했는데 그것이 윤석환에게는 더욱 무리를 주었다는 평이다.

세 시즌을 부진 속에 보낸 그는 김성근 체제 OB의 마지막 해인 1988년 불펜투수로 돌아와 기적같이 다시 부활하여 40경기(1위) 13승(5위) 3패 14세이브(2위) 평균자책점 2.08(2위)로 커리어 하이 성적을 기록했다. 슬라이더를 새로 배운 것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해에 108이닝을 던진 혹사로 인해 이듬해부터는 완전히 몰락한 모습을 보이며 이후 2년간 단 3승만을 거두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1990시즌 후 조범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당하며 김성근 감독과의 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삼성 이적 후 단 1승만을 추가한 채 이적 1시즌만에 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

2.3.3 몰수게임 파동

1985년 7월 16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MBC-OB전에서 OB 김성근 감독이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수단을 철수시켰고 이에 몰수게임이 선언되었다.

이날 저녁 9시 10분 OB 김성근 감독이 MBC 1루 주자 박흥식이 2루에서 태그를 피해 2루로 귀루하는 과정에서 김양경 2루심을 피해 3피트 라인을 벗어났다고 주장했지만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6분 뒤 그라운드에 있던 선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철수시켰다. 이근우 주심은 5분 안에 경기에 임하지 않으면 김성근 감독을 퇴장시키겠다고 박기철 기록원을 통해 장내방송으로 알렸다. 기다리던 이근우 주심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9시 23분에 감독 퇴장을 선언했고, 장내방송으로 다시 5분 안에 감독대행을 내세워 경기에 임하지 않으면 몰수게임을 선언하겠다고 발표했다. OB 선수단이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9시 28분에 몰수게임을 선언했다.

야구규칙 4.15에는 ‘주심이 일시 정지 후에 플레이를 선고하고부터 1분 안에 재개치 않을 경우’ 몰수게임을 선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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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수게임이 선언되자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빨리 몰수게임을 선언할 줄 몰랐다”면서 당황스러워 했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잠실구장을 찾은 관중들은 5회 이후에 몰수게임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환불을 받을 수 없었고 이에 일부 관중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OB 구단은 “심판이 감독에게 직접 퇴장이나 몰수게임을 선언하겠다는 통보를 하지 않고 장내 안내방송을 한 것은 잘못된 절차이며 주심이 구간 측에 통보도 없이 장내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몰수게임을 선언한 것은 경기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한 처사”라고 항의했다. 이어 OB 구단 대표이사 겸 단장 박용민 씨가 "KBO의 제재조치는 부당하며, OB측의 제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7월 20일부터 경기에 불참하는 것은 물론 팀 해체까지도 불사하겠다."는 폭탄발언을 한 내용이 <스포츠 서울>에 보도되어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상벌위원회를 열고 몰수게임 사태를 빚은 김성근 감독에게 출장정지 4게임과 제재금 50만원을 부과했을 뿐만 아니라, 이근우 주심에게 출장정지 5게임과 제재금 20만원을 부과했다. 이근우 주심의 몰수패 선언은 규정에 따른 것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OB 구단 측이 팀 해체까지 불사하며 강경하게 나오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KBO는 "이근우 심판은 규칙에만 너무 집착, 성급한 몰수게임을 선언해 경기를 원활하고 신속히 진행해 팬을 즐겁게 해야 하는 프로야구 목적을 배신한 최악의 사태를 초래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박용민 단장도 한발 물러나 “사석에서 심판 장난이 심해 차라리 팀을 해체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견이었고, 일부 보도에서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 단장은 “그때 흥분한 상태에서 얘기한 것이 확대됐다. 아직 KBO의 제재 결과에 대한 공식 공문을 접수하지도 않았고 구단에서도 공식적으로 그런 논의조차 없었다.”고 발을 빼 결국 OB의 팀 해체 파동은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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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윤석환 승률왕 만들어주기 논란

1984년 혜성처럼 등장해 신인왕 및 구원왕을 휩쓸었던 OB 투수 윤석환은 혹사의 여파로 이듬해인 1985년 4승 1패의 부진한 성적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시즌 막판에 김성근 감독은 윤석환을 승률왕으로 밀어주기 위해 해태전에서 4-0으로 앞서고 있던 3회에 잘 던지던 선발투수 황태환을 내리고 윤석환을 투입했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승률 1위 시상대상은 기준승수 없이 규정투구이닝을 채운 투수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 규정이닝만 채우면 1승무패인 투수도 승률 1위 수상자가 될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이날 윤석환을 6 2/3이닝을 던지게 해서 5승 1패를 만들며 규정투구횟수를 3분의 1이닝 넘게해서(110.1이닝) 가까스로 시상기준에 맞추었다. 시즌이 끝나고 윤석환은 삼성 김시진(25승 5패)과 공동 승률왕에 올랐다. 그해 승률왕 공동수상 시상식에서 김시진에게는 박수갈채가, 윤석환 호명 때는 야유가 쏟아졌다.

김성근 감독의 윤석환 승률왕 밀어주기 논란으로 인해 KBO는 이듬해인 1986년부터는 승률 순위는 10승 이상을 거둔 투수 가운데 뽑기로 규정을 바꾸었다. #

윤석환은 또 한차례의 승률 1위 타이틀을 따기 위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85년 혹사의 여파로 부상을 겪으며 부진한 3년을 보낸 윤석환은 1988년 부활에 성공하여 8월 31일 현재 13승 3패, 승률 .813으로 당당한 수상대상이 됐다. 김성근 감독은 윤석환이 개인타이틀을 따도록 더 이상 승부와 관련된 게임에 내보내지 않고 타이틀 굳히기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김감독이 어느날 게임을 마친 후 기자들과 식사를 하다가 시상기준을 가만히 들어보니 승률 1위가 되려면 '10승 이상 거두어야 할' 뿐 아니라 '규정투구이닝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윤석환은 당시 규정투구횟수 108이닝에서 3.2이닝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9월 4일 이미 4-1로 뒤져 패배의 부담이 없는 롯데전에 3회말부터 장호연에 이어 계투시켜 정구선에게 만루홈런을 내주는 곤욕까지 치르면서 3.2이닝을 던져(6실점 5자책점) 규정투구이닝을 간신히 채우도록 해서 시상기준을 맞추었다.[5]

출처 = 이종남 저, "사람 좋으면 꼴찌(한국프로야구10년비화)" (스포츠서울,1992)

2.3.5 부정위타자 사건

2.3.5.1 개 요

1986년 7월 4일 잠실 MBC-OB전에서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부정위타자 사건이 발생했다. 부정위타자 해프닝은 전광판 시설이 있고 장내방송이 나오는 현대 야구에서는 나오기 힘든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시범경기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KBO에서 발생한 유일한 부정위타자 사건이다.

OB의 박노준과 이승희가 9회말 부정위타자로 출전했고 MBC 김동엽 감독이 10회에 뒤늦게 부정선수라며 몰수게임 처리해줄 것을 주장하며 28분간 항의했다. 하지만 즉시 항의하지 않으면 부정위타자는 정위타자로 인정받는다는 야구 규칙에 따라 김동엽 감독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프로야구 감독들이 야구 룰도 제대로 모른다며 OB 김성근 감독과 MBC 김동엽 감독이 모두 비판받았다. 특히 당시 언론은 야구룰에 누구보다도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김성근 감독이 이런 실수를 한 것에 대해 의아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일각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룰을 알고 있으면서도 규정의 맹점을 이용하여 고의로 부정위 타자를 타석에 세운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3.5.2 부정위타자 관련 규칙

부정위타자 관련 기본규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심판은 부정위타자가 타석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주의를 환기시켜서는 안 된다.

(2) 만약 부정위타자가 타격을 완료하기 전이면 상대방의 어필시 정위타자가 볼카운트를 이어받아 타석에 서면 된다.
(3) 만약 부정위타자가 타격을 끝냈을 때 다음 타자에게 투구하거나 다른 플레이를 하기 전 주심에게 어필하면 정위타자는 아웃된다. 부정위타자의 타격에 의한 진루나 득점은 모두 무효.
(4) 어필이 없으면 부정위타자는 정위타자로 인정받고, 그 다음 타순으로 이어진다.

부정위타자 관련 규칙에 대한 자세한 설명 1
부정위타자 관련 규칙에 대한 자세한 설명 2

2.3.5.3 사건의 전말

1-1 동점이던 9회말 OB의 1사 1·2루 찬스에서 8번 김경문 타석이 돌아오자 OB 김성근 감독은 이규석 주심에게 다가가 “박노준이 대타를 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주심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어찌된 영문인지 심판의 대답을 무시하고 박노준을 대타로 타석에 내보냈다. 박노준은 아마추어 시절 투타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인바 있어 김성근 감독은 박노준을 대타작전에 자주 기용했었다.

이날 박노준은 이미 9회초부터 김진욱에 이어 구원투수로 등판한 상태였는데, 야구규칙상 등판 중인 투수는 지명타자 외에 다른 선수의 대타자 또는 대주자가 될 수 없다. 때문에 그 시점에서 박노준은 지명타자인 윤동균 자리(4번) 외에는 대타로 나올 수 없었다.

박노준을 대타로 쓴 데에 이어 김성근 감독은 또 이승희를 대타로 썼다. 사건 다음날인 7월 5일 KBO는 박노준이 8∼3번을 뛰어넘어 4번으로 나섰고, 이승희는 또 5∼8번이 아닌 9번으로 나섰기 때문에 OB가 2차례 부정위타자를 쓴 것으로 유권해석을 내렸다.

박노준 타석 당시 이규석 주심은 김성근 감독이 부정위타자를 내보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심판이 부정위타자가 타석에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면 안된다는 규칙에 따라 아무 말 없이 계속 경기를 진행했다.

한편 MBC 김동엽 감독은 9회말 박노준과 이승희가 부정위타석에 있을 때 가만히 있다가 규약집을 한참 뒤적거린 후 10회말에야 뒤늦게 항의했다. 하지만 부정위타자 다음 타자의 초구 이전까지 항의가 없으면 부정위타자가 정위타자로 인정된다는 야구룰에 따라 김동엽 감독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3.5.4 언론 보도 및 비판

사건 이후 언론들은 프로야구 감독들이 야구 룰도 제대로 모른다며 OB 김성근 감독과 MBC 김동엽 감독을 모두 비판했다. 특히 김동엽 감독이 제 때 항의만 했어도 부정위타자를 무효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동엽 감독은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한편 김성근 감독이 박노준을 부정위타자를 세우기 직전에 주심에게 “박노준이 대타를 칠 수 있느냐” 물어봤고 이규석 주심이 "안 된다"고 대답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졌다. 심판이 안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박노준을 타석에 세운 이유에 대해서 의혹이 증폭되었다. 일각에서는 부정위타자를 쓰더라도 심판이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고 상대편이 즉시 항의하지 않으면 정위타자로 인정된다야구규정의 헛점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논란이 커지자, 김성근 감독은 사건이 발생한지 한참이 지난 후에 이 주심이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을 "된다"로 잘못 알아들었다고 말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2014년 3월 10일 전광판이 없는 상동야구장에서 열린 롯데-두산 시범경기에서 두산 송일수 감독이 두 차례 부정위타자를 출전시켜 논란이 되면서 1986년의 이 사건이 재조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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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시도 때도 없는 히트앤드런

경기 초반부터 히트앤드런 작전을 구사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사실 작전 상으로는 문제가 안 되는데, 중요한 점은 주자가 득점한 상황이면, 계속해서 번트를 대라고 하면서, 타자들이 자기 스윙을 하지 못 하고, 오로지 번트를 대서 진루타만 만드는 루즈한 경기를 만드는 상황이 반복이 된 것. 이렇다 보니, 성적이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로 괜찮다 한들, 관중들의 야유는 매번 거셌을 정도. 어느 정도였냐면, 그 당시 거포타자로 주목받았던 김우열이나 윤동균이 번트를 대었을 정도. 결국 타격감이 개판이였던 셈. 결국 1985년, 1987년에는 10홈런을 넘긴 타자도 배출 못 했다. 팀 타율은 말할 것도 없었고...

두산 베어스 원년 팬들이 김성근 감독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도 여전히 그러니까 문제다

2.4 태평양 돌핀스 감독(1989~1990)

2.4.1 고의경기지연 논란

1989년 7월 8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태평양의 경기에서 김성근 태평양 감독이 고의로 경기지연시켜 관중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날 경기에서 4회까지 3-2로 삼성이 리드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김성근 태평양 감독이 강우로 경기진행이 어렵다고 주심에게 경기중단을 요구하며 항의하여 10여분간 경기가 중단됐다. 경기중단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성근 감독은 투수와 외야수를 잇따라 교체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김성근 감독의 이같은 경기 지연 행위는 노게임 선언을 위한 고의적 책략이 아니었느냐하는 「혐의」를 받았다. 김성근 감독의 이러한 비매너 행위에 대해 야구팬들의 거센 비난과 항의가 이어지자 KBO가 뒤늦게 김성근 감독이 고의로 경기를 지연했는지 여부를 놓고 진상을 조사에 착수했다.

2.4.2 박정현 다승왕 및 신인왕 만들어주기 논란

1989년 9월 30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태평양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태평양 김성근 감독은 9-1로 크게 앞서고 있던 5회 2사 후 선발 최창호를 내리고 박정현(야구선수)#s-1을 마운드에 올렸다. 이날의 투수교체는 신인왕과 다승왕을 동시에 노리는 박정현을 밀어주기 위한 것. 유력한 신인왕 후보이자 다승왕 2위였던 박정현은 최창호의 뒤를 이어 등판한 후 7안타 4실점으로 난타 당했지만, 결국 최창호의 1승을 자신의 1승으로 만들고 19승째를 올려 20승을 거둔 해태 선동열을 바짝 추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광주 관중들이 덕아웃 위에서 태평양 김성근 감독에게 크게 야유하기도 했다. #

김성근 감독의 밀어주기 지원을 받은 박정현은 비록 다승왕을 차지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역대 신인 최다승 투수(19승)라는 타이틀 달성에 성공했고 신인왕에도 올랐다. 그러나 박정현의 역대 신인 최다승 기록은 84년의 홍문종, 이만수 타격왕 사례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타이틀 조작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되면서 지금까지도 비난받고 있다. #

당시 언론은 한동안 잠잠했던 인위적 기록 만들기 논란이 다시 발생했다면서, 가치있는 개인기록은 정당한 승부의 결과에 따른 것이며 야구경기 룰의 헛점을 악용하는 인위적 기록관리는 시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4.3 박정현 혹사 논란

2년차 중고신인 투수였던 박정현(야구선수)은 1989년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9승 10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15의 성적을 거두어 신인왕에 올랐다. 또 박정현은 다승과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했다. 그가 정규시즌 동안 선발과 불펜에서 던진 이닝은무려 242 2/3이닝이었고 17완투를 했다(...)

그해 박정현은 준플레이오프에도 19 2/3이닝을 던져 혹사 맹활약하게 된다. 이는 현재까지 단일 시즌 준플레이오프 최다 이닝 기록이다. 박정현은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10월8일)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14회까지 던져 완투승을 거두었다. 박정현이 1차전에서 던진 투구수는 173개였다. 1차전의 감격적인 승리 후 팀과 인천 관중들이 모두 승리에 들떠있는 사이 박정현은 허리를 두 손을로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현은 단 이틀의 휴식을 후에 3차전 5회에 다시 등판했다. 구단 측에 따르면 박정현이 자청해서(?) 구원등판한 것이라 한다. 박정현은 9회 2사까지 역투(투구수 75)했으나 마지막 한 타자를 남겨둔 상황에서 허리를 부여잡으며 마운드에 주저앉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에도 언론에서 박정현의 무리한 등판을 보고 “원년(1982년) 박철순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

박정현은 김성근 감독 체제 2년차인 1990년에도 좋지 않은 허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투구수인 191 2/3이닝을 던지며 13승 7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63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에서 경질된 이후인 1991년과 1992년에도 여전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허리 통증이 점차 악화되며 조금씩 하락세를 보이다가 결국 1993년 시즌을 앞두고 허리와 팔꿈치 부상의 악화로 쓰러져 재활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94년 복귀했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고통받으며 몰락한 모습을 보여 패전처리 투수로 기용되었다. 1998년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어 김성근 감독과 다시 만난 박정현은 잠시 부활한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2000년 시즌 후 SK에서 방출되면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김성근 감독은 박정현 혹사 논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1989년 신인왕으로 태평양 돌핀스에서 맹활약했다가 사라진 언더핸드 투수 박정현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김 감독은 “원래 언더핸드 투수들은 투구 폼 때문에 허리가 무리가 가게 돼 있다. 특히 박정현은 다리까지 크로스로 나오는 폼이어서 무리가 더 갔다”면서 박정현이 선수시절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풀이했습니다. - 2010년 8월 3일 박선양 기자 네이트 칼럼

2.4.4 정명원, 최창호 혹사 논란

박정현(야구선수)#s-1, 정명원, 최창호는 김성근 감독의 태평양 시절 트로이카로 불리며 맹활약(이라 쓰고 혹사라 읽는다)했다. 이 셋은 1989년 태평양이 거둔 65승 중 45승을 거두었고 선발, 불펜으로 전천후 활약했다. 이해 박정현은 38경기에 등판에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242 2/3이닝을 던졌고, 3년차 최창호도 28경기에 등판해 223 1/3이닝을 투구했다. 1년차 정명원은 38경기에 등판에 139 1/3이닝을 던져 구원투수로는 매우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앞서 언급된 박정현 뿐만 아니라 최창호와 정명원 역시 나중에 부상으로 평탄치 못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이들은 모두 신인이었기 때문에 혹사의 여파가 비교적 천천히 나타난 편이었다.

1989년 1년차 신인으로 38경기 11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5의 화려한 성적을 거두었던 정명원은 이듬해인 1990년부터 부상으로 후유증을 겪기 시작했다. 1990시즌 정명원은 부상으로 불과 15경기에 출장하여 2승 4패 2세이브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평균자책점은 무려 7.57로 치솟았다. 1989년 2.95로 수준급이었던 FIP는 다음 해 4.73으로 치솟았고, 타석당 11.91%였던 삼진율도 8.03%로 내려앉았다. 데뷔 시즌 2.8이던 WAR은 -0.2로 폭락했다. #

김성근 감독은 정명원 부상의 원인을 코치들의 잘못, 훈련 부족, 방탕한 사생활 탓으로 돌렸다. 김성근 본인이 태평양에 있는 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혹사와는 무관한 부상이라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팬들도 정명원의 추락을 연봉 협상으로 시간을 끄느라 비시즌 기간에 훈련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감독 그만두고 다친 선수들 보면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됐어요. 하나는 가을, 겨울 동안 충분히 어깨를 보호했어야 해요. 바뀐 코칭스태프가 그런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태평양 때 박정현이. 동계 연습 때 볼 30, 40개 던지다가 삼성과 연습게임에서 추운데도 7회까지 던지게 했어요. 당연히 다칠 수밖에. 최창호, 정명원이도 마찬가지예요. - 2002년 오마이뉴스 인터뷰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폼과 밸런스를 코칭스태프에서 잡아준다. 나도 늘 그 점에 유의했다. LG에 있을 때 이동현 같은 경우는 포크볼을 반듯한 폼으로 잘 던졌다. LG에서 물러난 뒤 보니까 투구폼이 변해 있었다. 정명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서 나온 뒤 보니까 2월 그 추운 날에 대구 경산구장에서 정규시즌도 아닌데 7회까지 던지고 있었다. 기술적인 면 외에 술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사생활이 나빠도 혹사와는 관계없이 부상이 찾아올 수 있다. - 2007년 3월 12일 SPORTS2.0 제42호
(혹사논란에 대하여) 먼저 김 감독은 정명원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김 감독은 “입단할 때 정명원은 볼은 빨랐지만 제구가 안됐다. 그래서 전지훈련 때 하루에 500개를 던지며 컨트롤 안정에 힘쓰기도 했다. 그렇게 던졌어도 내가 있는 동안에는 부상이 없었다” 면서 “내가 삼성 감독으로 옮긴 후 태평양과 2월달에 경산구장에서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추운 날씨에 정명원이 6이닝 이상을 던지더라. 그래서 전지훈련때 볼을 많이 던졌냐고 물었더니 ‘50개 정도밖에 안던졌다’고 했다. 그 후에 팔꿈치에 문제가 생겼는데 태평양에서는 내가 재임시절 많이 써먹어서 다쳤다고 하더라“고 해명했습니다. 김 감독은 훈련이 덜된 상태에다가 추운 날씨 속에 많은 이닝을 던진 것이 문제였다는 분석이었습니다. - 2010년 8월 3일 박선양 기자 네이트 칼럼

김성근 감독은 2014년 정명원과 최창호가 거의 잊혀질 때까 되자 부상 이야기는 쏙 빼놓은 채 정명원과 최창호가 자신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훌륭한 투수로 거듭났다면서 자찬의 예로 들었다.

우리 애들(고양 원더스 선수들)은 아침 7시에 나온다. 심하면 밤 11시, 12시에 들어간다. 누가 봐도 혹사다. 그런데 이걸 혹사라고 하면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전에 정명원최창호도 500개씩 던졌다. 그걸 안 던졌으면 걔들은 선수가 안 됐을 거다. 회사도 아침 7시에 와서 12시에 퇴근하는 곳도 있다. 그건 무리다. 하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그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회사와 조직원 모두 발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도 무리라고 하면 그 회사를 그만 두면 된다. 폼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혹사라고만 하면 점점 약해진다. - 2014년 4월 10일 아이즈 인터뷰

김성근 감독이 매일 500개, 1000개씩 던지도록 했던 수많은 투수들 중에 성공했던 이는 정명원과 최창호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리고 이 둘은 나중에 부상으로 고전했다.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태평양 감독에 있는 동안은 아무 문제 없었다면서 자신과는 무관한 부상임을 강조해 왔다.

2.4.5 임호균 각서 파동

임호균 각서 파동은 당시에도 파장이 컸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90년시즌 내내 야구계 뿐만 아니라 야구팬들 사이에서 소문이 무성하던 사건이었고, 시즌이 끝나고 결국 김성근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스포츠신문들이 앞다투어 의혹을 보도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 중 신동관 사장은 태평양그룹 부회장으로 영전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고[6] 임호균 역시 2012년 인터뷰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각색하여 계속 언급해 왔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건은 김성근 감독을 미화하는 미담으로 윤색되어 왔다.

2.4.5.1 김성근측의 주장

우선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김성근 前 LG트윈스 감독」 <上> <中> 「기사: 김성근,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난다」
1990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태평양 프런트는 노장 투수 임호균을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를 보고만 있는 것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선수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신동관 사장실로 쳐들어가 '임호균이 90년 시즌에 5승을 하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쓰고 사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시즌이 시작된 후 '김성근이 감독직을 유지하려고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에 임호균을 투입하여 승을 챙겨주려고 한다'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고 이에 구단은 5승에서 선발 5승으로 각서내용를 수정했다. 김성근 감독은 이에 반발하여 아예 임호균을 쓰지 않고 감독직에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예 임호균을 쓰지 않았지. 당연히 5승은 안 됐고." 시즌이 끝난 후인 10월19일 김성근 감독은 김포공항에서 ‘태평양 김성근 감독 경질’이 적힌 신문을 보게 된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어. 구단에선 나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빛이 변한 걸 알았거든."이라는 말을 남긴 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0년 시즌 임호균은 구원으로만 7경기에 출전하여 승패없이 방어율 4.60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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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2 사건 당시의 언론 보도 및 소문

허나 이는 김성근 감독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다른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미 프런트와 갈등을 빚고 있던 김성근 감독이 자청해서 '임호균이 90년에 5승을 하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쓴 것은 경질된 후 더 좋은 팀(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꼼수로 임호균을 이용했다는 것. 김성근 감독이 1989년 태평양 감독에 취임 직후 오대산 극기훈련을 실시한 후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김성근 감독의 주가가 갑자기 치솟았다. 스포츠에서 정신력이 크게 부각되던 당시 풍토에서 삼성을 비롯한 몇몇 구단 수뇌부가 김성근 감독의 오대산 극기훈련을 통한 정신력 강화 훈련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원했다는 것. 특히 두터운 전력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삼성 구단 수뇌부는 이것을 결국 정신력의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할 적임자로 김성근 감독을 원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김성근도 인터뷰에서 대놓고 "삼성 같은 강팀 감독으로 가서 우승 한번 해보고 싶다"면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아직 태평양과의 계약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당시 임호균은 기량이 현격히 쇠퇴하여 1989시즌 동안 승리 없이 단 1세이브(1패)만을 기록했다. 헌데 이러한 임호균이 1990년 갑자기 5승을 거둘리가 만무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이 각서내용에도 불구하고 1990년 시즌 중에 임호균은 한번도 선발로 등판시키지 않자 이러한 소문은 더욱 파다해졌다. 그리고 시즌종료 후 사람들의 예상대로 김성근 감독은 태평양에서 경질되었고 며칠 후에 삼성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주간야구나 스포츠서울 등에서는 삼성과 김성근 사이의 배후 밀약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김성근이 삼성으로 가기 위해서 태평양에서 일부러 짤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 임호균을 이용했다는 것. 당시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한때 김성근에 열광했던 도원아재들은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김성근을 맹비난했다.

2.4.5.3 2012년 임호균의 인터뷰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 당시의 무성했던 의혹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와 강연 등에서 임호균 각서 사건은 제자를 위해 김 감독 스스로 옷을 벗으며 희생한 사건이라는 주장을 반복해서 설파해 나가면서 아름다운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지 20여년이 지난 2012년 사건당사자인 임호균이 MK스포츠와의 가진 인터뷰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반전이 일어났다. 「[전설을 찾아 임호균, “김성근 감독 5승 각서 원하지 않았다” 下」] 사실 이 인터뷰는 임호균의 야구인생 전반에 관한 인터뷰였기 때문에 각서 관련 내용은 짧게 다루어졌는데, 임호균은 인터뷰 중에 각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숨을 고른 이후 무거운 표정으로 현재 김성근 감독이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라고 말하면서 간단히 언급했다. 임호균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은퇴를 결심했고 구단에도 의사를 밝혔다는 것. 그리고 이미 유학을 결심했는데 김 감독이 붙잡아 한시즌 더 뛰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호균 본인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태평양 프런트가 임호균을 방출하려 했고 김성근 감독이 이를 반대한 끝에 각서까지 썼다는 김성근 감독의 이야기와는 상반된 내용이다. 이 인터뷰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김성근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임호균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재조명되었다.

2.4.6 위장오더 (위장타순)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던 시절에 태평양 돌핀스의 김성근 감독은 위장오더로 유명했다. 일례로 1990년 6월 14일 태평양-LG전에서 경기전 전광판에는 태평양의 1번타자 중견수에 투수 박정현이, 3번타자 3루수에 투수 최창호가 떠있었다. 물론 이것은 상대 선발투수가 좌완인지 우완인지를 확인한 후 거기에 맞는 적합한 타자로 교체하기 위한 위장오더였다. 당시 다른 팀들도 위장오더를 사용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태평양을 제외한다면 포스트시즌이 아닌 정규시즌에는 구경하기 힘든 일이었다.

1990년 8월 5일 대전에서 열린 빙그레-태평양전에서는 1회초 대타홈런이라는 진귀한 기록이 탄생했다. 이는 태평양 김성근 감독의 위장오더 때문에 탄생한 기록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선발 라인업에 1번타자는 2년생 투수 허정욱, 2번타자는 그해 MBC에서 태평양으로 이적한 투수 오영일을 써넣었다. 그리고는 1회초 시작하자마자 대타 작전으로 나갔다. 1번 대타 김윤환은 아웃됐지만 2번 대타 김진규가 솔로홈런을 날린 것. # #

김성근 감독의 과도한 위장오더 및 위장선발은 야구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부 젊은 감독들[7]은 이러한 구태야구를 지양하고 메이저식 선진야구를 추구하자는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선발투수예고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2.5 삼성 라이온즈 감독(1991~1992)

2.5.1 위장오더(위장타순) 추문

OB 감독 시절부터 위장오더와 위장선발로 비난받았던 김성근 감독은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위장오더를 과도하게 남발하여 야구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91년 시즌 개막부터 위장오더를 남발하기 시작한 김성근 감독은 7월 15일까지 시즌 전반기에만 무려 10차례 안팎이나 위장오더를 작성해 추문이 일었다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비신사적인 승부욕 때문에 빙그레 김영덕 감독과 LG 백인천 감독 등 다른 일본야구 출신의 애꿎은 야구지도자들에게까지 비난의 불똥이 튀고 있다고 기사는 지적하고 있다. #

2.5.2 이중오더 사건

1991년 7월 14일의 사건인데, 당시에는 선발예고제가 없었다. 해태와의 대구 홈경기를 앞두고 우완 선동열과 좌완 김정수 둘 중 한 명이 등판할 것으로 추측한 삼성 김성근 감독은 일단 좌타자 일색인 오더와 우타자 일색인 오더 두 장을 작성해 놓았다. 게임 1시간 전 출전선수 명단을 교환할 시각에 삼성 배대웅 수석코치가 조금 늦게 도착하여 해태 김봉연 코치가 박찬황 심판에게 먼저 오더를 건넨 것을 확인한 후 박찬황 심판에게 슬쩍 "동열이죠?"라고 물었다. 그 의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박 심판은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8] 이에 배 코치는 서류철에 준비해 온 두 오더 중에서 선동열용 오더를 꺼내 제출하였는데, 낌새를 챈 해태 김봉연 수석코치에게 동작그만 이중오더냐 서류철을 털렸고, 결국 두 장의 오더를 모두 빼앗겨 망신을 당했다. 이것이 KBO 사상 유일무이한 이중오더 사건이다.[9] 사실 이날의 사건 이전에도 김성근 감독은 위장오더나 위장선발 등으로 여러차례 구설에 오른 바가 있었고 이중오더도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은 없던 차였다. #

김응용 감독은 대노해서 경기를 못 하겠다고 버텼고, 김성근 감독이 결국 김정수용으로 작성했던 오더로 해당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일단 긴급상황은 봉합이 되었다. 상황상 선동열이 그냥 늘 그렇듯이 호투하고 경기가 끝났으면 무난했을 텐데, 하필이면 그날 선동열이 난타당해 5.1이닝 7실점으로 강판당했다. 7회말 김응용 감독은 김정수를 마운드에 올렸고, 사건의 관계자(?)로 분노게이지가 가득 찬 김정수가 류중일이만수에게 이중오더에 대한 보복으로 등 뒤로 가는 공을 던지고 퇴장당했다. 그 다음 등판한 강태원마저 빈볼을 던져 기어이 벤치 클리어링까지 이어졌다. #

당시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김응용 감독은 매스컴을 향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 이건 사기극"이라면서 김성근 감독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또한 야구팬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김성근 감독은 언론을 향해 '오해'라고 항변 비겁한 변명 했지만 결국 KBO의 징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으로 김성근 감독이 KBO로부터 징계를 받자 대부분의 야구관계자들은 '약삭빠른 잔꾀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삼성 배태웅 코치에게 무심코 해태의 오더를 알려줬던 박찬황 구심에게도 KBO 상벌위원회로부터 제재금 20만원이 벌과되었다.[10]

참고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김성근이 김응용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성준이 선발이라는 걸 알려준 후에 1회에 교체했다라는 괴담이 돌곤 하는데, 1991년 7월 14일은 일요일이다. 애초에 다음날 경기가 없으니 말이 안되는 뜬소문. 그나마도 이 경기 다음에 삼성은 롯데와, 해태는 빙그레와 3연전을 가졌다.

2.5.3 코치진 및 선수단과의 갈등

김성근 감독의 삼성에서의 두 시즌(1991년~1992년)은 코치, 선수단 및 팬들과 갈등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년이었다.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이 삼성의 팀색깔을 완전히 부정하고 철저히 자신의 색깔로 바꾸려고 한 것이 팀내외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 이는 이미 김성근 감독이 선임되던 시점부터 예견되어왔던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삼성 감독에 취임한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삼성이 감독 교체에 따른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는 김성근 감독과 이미 미국식 야구를 섭력해온 삼성의 코치들과의 의견차가 발생한 것. 삼성은 그동안 미국식 야구를 지향했다. 프로구단 최초로 미국전지훈련을 떠났고, 미국인 코치를 영입했다. 국내 코치진의 미국연수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취임하자 곧바로 일본 지도자들을 인스트럭터 형식으로 초청, 색깔 바꾸기에 나섰다. 4월 초부터 타격 인스트럭터로 데라오카, 투수 인스트럭터로 오가와를 초청, 3개월씩 선수들을 지도하게 했다. 트레이너에는 이케다가 3개월간 초청됐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함학수, 손상대, 천보성, 박상열 코치 등이 팀을 떠날 것이라고 보도가 나왔다.

김 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선수들을 철저히 관리하겠다. 지금까지의 개인기를 지양하고 팀플레이에 주력하겠다”면서 자칭 관리야구를 천명하였고, 혹독한 훈련에 들어갔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라.’라는 지론으로 김성근 감독은 오전 4시에 김상엽을 불러내 투구연습을 시켰고, 태평양에서 최창호, 정명원에게 했던 것처럼 박용준에게도 매일 500개의 공을 던지게 했다. 또 김성근 감독은 포지션별 경쟁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김성근 감독은 삼성 감독 취임 인터뷰에서 '"포수 포지션이 삼성의 최대의 약점"이라고 지적하며 팀의 주포 이만수 포수에게 고난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렸다. 김성근 감독은 이만수가 자만해 있다면서 주전 포수를 박정환(1957)으로 교체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취임한지 며칠 후 OB 포수 조범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이만수의 공격력으로 그나마 팀성적이 유지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이만수를 교체하기는 커녕, 오히려 휴식도 없이 혹사에 가깝게 출장시켰다. 이해(1991년) 이만수는 118경기에 출장했는데 이는 이만수 본인의 16시즌 커리어 통산 최다출장 기록이다.[11] 하지만 이 와중에도 김성근 감독은 이만수 등 삼성 타자들이 원년부터 해오던 세레머니를 질책하고 금지시키는 등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세레머니를 금지시킨 후 타율이 떨어지자 나중에 김성근 감독은 다시 세레머니를 허용했다. 또 김성근 감독이 더블포지션제를 실시하는 등 삼성의 전통적인 수비시스템을 완전히 갈아엎으려 하자 결국 선수단의 집단반발이 일어났다.

2.5.4 김성근 경질 시위

시즌 개막부터 김성근 감독이 번트를 남발하며 호쾌한 타격의 팀이라는 삼성의 이미지를 지워나가자 삼성팬들도 반발했다. 뿐만아니라 빈번한 투수교체에 위장선발과 위장오더의 남발, 해태전 이중오더 파문, 투수 혹사 논란 등이 이어지며 타팀 타팀 야구팬들들로 부터 심한 비난과 질책을 받으며 공공의 적이 되자, 삼성팬들은 김성근 감독이 삼성의 팀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면서 불만을 표했다. 게다가 성적마저 하락하자 팬심이 급격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대구의 한 원로 야구인은 “우승 청부사로 영입했던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호쾌한 공격야구를 바라는 대구 팬들과는 맞지 않았다. 팬들은 김 감독의 잦은 투수교체를 비난했고, 홈런보다 번트에 치중한 야구 스타일에 실망했다. 그럼에도 우승을 하지 못했으니, 팬들의 원성은 높았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팬들의 누적된 불만은 김성근 경질 시위와 관중수의 급격한 감소 등으로 표출되었다. 1992년 봄부터 시작된 삼성팬들의 김성근 경질 시위는 선수단 항명에 큰 힘이 되었고, 시즌 종료 후 김성근 감독의 경질을 이끌어 냈다.

1990년대 초 한국프로야구는 연간 관중수가 300만, 400만, 500만을 연달아 돌파하는 르네상스기였지만, 삼성 라이온즈의 관객수만 급감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1990년 43만 명이던 대구 홈 관중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91년 35만 명으로 줄었고 1992년에는 31만 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삼성의 호쾌하고 화끈한 공격야구가 부활하자 1993년 50만 명을 돌파했다.

2.5.5 김성길 혹사

김성근 감독의 벌떼 마운드와 이로 인한 투수 혹사도 팀안팎의 비판을 받았다. 김성근감독이 부임하기 직전 삼성은 강력한 타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수력이 약점으로 꼽혔는데, 삼성이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 배경은 투수코치 출신인 김성근 감독이 투수력을 끌어올려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삼성 투수진에 대한 처방으로 벌때 마운드와 혹사 운용을 도입했다.

이에 몇몇 투수들이 혹사당했는데, 특히 만35세의 노장 투수 김성길을 마구잡이로 혹사시킨 것은 당시에도 큰 비난을 받았다. 김성길은 주보직이 마무리투수였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를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용했다. 혹사 때문에 김성길은 그해 엽기적인 기록들을 다수 남겼는데, 정규시즌에만 무려 189이닝을 던져 16승 12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30을 기록하며 최다출장 1위에 올랐는데 이는 마무리투수로는 기록적인 수치다. 이 기록에는 선발 3경기 완투를 포함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김성길은 전구단 상대 승리를 거두는 등 강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와중에 5경기 연속 세이브를 쌓아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9월 7일 롯데와의 더블헤더에서 연속 승리투수가 되어 같은 날 2승을 거두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김성길의 가혹한 혹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데,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구원등판해 80구를 던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고, 불과 이틀만인 3차전에는 1회에 선발투수 좌완 성준을 이어 구원등판하여 위장선발? 198구를 던지며 13회까지 완투했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10회말 구원으로 투입되었고, 3차전에서는 다시 선발등판하여 1실점 완투승을 거두어 팀의 유일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의 혹사로 김성길은 밥숟가락을 들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포스트시즌 당시 김성길의 가혹한 혹사로 김성근 감독은 큰 비난을 받았다. 삼성팬들도 사람 죽인다고 김성길 그만 올리라고 아우성을 쳤을 정도.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조기탈락한 것이 김성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991년 엄청난 혹사를 겪은 김성길은 몸이 완전히 망가지고 부상을 얻었다. 이듬해인 1992년 부상으로 고전하면서 방어율 5.14, 1승7패1세이브의 추락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 종류 후 쌍방울로 트레이드됐다. 1993년 쌍방울에서 단 2승(5패)을 거둔 후 은퇴했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성길은 선수생활을 은퇴 후 한국에서 자리잡는데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일본에서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택시기사, 주유소 직원 등을 전전하다가 2001년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2.5.6 삼성 시절 미화, 왜곡 논란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흑역사인 삼성 시절의 실패를 자서전 등에서 미화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1년 12월 23일에 출간된 자서전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42페이지에서는 "지금까지 나는 거의 성적이 최하위인 팀의 감독으로 들어갔다. 태평양이 그랬고 쌍방울이 그랬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부임할 당시의 삼성이나 LG도 마찬가지였다."라고 말하며 당시 삼성이 거의 최하위팀이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직전인 1990년 삼성은 준우승팀이었으며,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이듬해인 1993년에도 역시 준우승을 거두었던 팀으로 결코 최하위권팀이 아니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본인 스스로 삼성이 우승할 전력의 팀이라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은 1990년 11월 2일 삼성 감독 취임 기자회견에서 "취약한 포수진을 보강하고 투수진의 스피드를 강화하면 우승은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정상의 수준에 있는 팀에 왔으니 정상에 오르고 말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11월 9일자 신문에서도 “우승할 전력의 감독을 맡았으니 우승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삼성 구단은 1991 시즌에 기필고 우승을 이루기 위해 작심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각 팀의 선수들을 쓸어모아 언론으로부터 삼성 역대 최고의 전력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았다. 삼성 프런트는 김성근 감독이 원한 '김성근 사단' 코치들을 모두 영입했을 뿐만아니라 김성근 감독이 요청한 선수를 모두 싹쓸이로 영입해서 선수단 규모가 60명에서 75명으로 15명이나 증가했고 팀의 연봉 부담액도 2억7천만원이나 늘었다. 삼성은 현금 트레이드 등을 통해 굵직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특히 OB의 윤석환, 조범현, 신경식, 태평양의 이광길, LG의 최일언, 최홍석, 롯데의 허규옥 등 각팀의 간판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팀 창단이래 가장 완벽한 전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삼성의 싹쓸이 선수 영입 때문에 1991년 2월 4일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자제하자는 KBO 사장단 회의가 열리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시즌에 돌입하자 김성근 감독의 삼성은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고, 이에 따른 팬들의 비난과 언론의 비판 기사 「김성근 감독 흔들리고 있다-"거품 야구" 자초」 「삼성감독 김성근 강팀에 안맞는 조련사」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삼성의 투수력이 약하고 전력이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그리 강하지 않다", "성준·유명선 등 주전급 투수들의 부상으로 가뜩이나 약한 마운드를 운영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삼성의 전력, 특히 투수력이 형편없었다는 김성근 감독의 변명과는 달리 1991시즌 당시 언론은 삼성 라이온즈가 타선 뿐만아니라 투수력에서도 리그에서 강팀이라고 평가했다. 김성근 감독 본인도 1991시즌 개막을 앞둔 출사표에서 삼성의 마운드가 (김성근 본인의 조련으로)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2009년 7월 15일에 출간한 자서전 「꼴지를 일등으로」에서 자신이 맡았던 시절의 삼성 선수단을 '엘리트 의식에 젖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다'며 본인의 흑역사였던 삼성 감독 시절의 저조한 성적을 선수 탓으로 돌려 삼성팬들로부터 비겁한 변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는 리더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조직에 대한 통제력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해온 김성근 감독 본인의 발언을 무색케 하는 궁색한 변명이었다. 「꼴지를 일등으로」라는 책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스스로 변명 하려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된 것.

김성근 감독이 자신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자신 맡았던 팀들을 약한 팀으로 왜곡하는 것은 다른 팀에도 해당된다. 김 감독은 쌍방울이 실제로는 연봉총액 1위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쌍방울이 가난한 팀이라고 말하고 다녔으며, LG 역시 돈 없고 힘 없는 팀이라고 말했다.

2.6 해태 타이거즈 인스트럭터-2군 감독(1994~1995)[12]

2.7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1996~1999)

2.7.1 위장선발, 위장오더 논란 및 선발투수 예고제 실시

과거에도 위장선발, 위장오더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던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 감독에 취임하고 나서는 이러한 편법을 사용하는 빈도가 더 늘어났다. 때문에 쌍방울 경기에서는 한타자용 선발투수 투입 혹은 타석에 서지 않는 타자가 양산되었다. 이에 야구계와 언론이 위장오더는 김성근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꼬집으며 김성근 감독을 비판했지만 그때마다 김성근 감독은 팀 사정상 불가피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다른 감독들도 점점 이를 따라하기 시작하자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결국 1998년부터 KBO는 선발투수 예고제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2.7.2 박재홍 부정타격 논란

1996년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신생팀 현대 주포인 신인 박재홍의 타격이 부정타격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김성근 감독은 박재홍이 타격 후 왼발이 배터박스를 벗어난다며 '부정타격'이라고 주장했다. 배터박스 앞부분을 활용하는 박재홍은 타격 후 왼발이 배터박스를 걸치거나 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문제삼은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박재홍의 타격에 대해 경기가 한동안 중단될 정도로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아예 선수단을 철수시키기까지 했다. 김성근 감독이 이듬해까지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논란은 꽤 오랜기간 프로야구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김성근 감독의 항의가 계속되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6월 26일 규칙위원회를 개최해 야구 규정 6조3항[13] 등에 의거해 박재홍의 타격에 대해 적법판정을 내렸다. 야구인들 사이에서도 박재홍의 타격 자세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당시 심판위원장으로 곤욕을 치렀던 김광철씨는 지금도 “박재홍의 타격 자세는 문제가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왼발이 배터박스를 벗어나 있었다면 문제이지만 타격 후 자연스런 동작으로 연결된 점은 문제가 없다. 규정에도 자연스런 동작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KBO의 적법판정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의 이의가 제기되자 KBO는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사무국과 일본야구기구(JBO)에까지 자문을 구하기도 했는데 역시 적법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김성근 감독이 박재홍의 타격 자세를 문제삼은 것은 잘나가던 현대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당시 야구계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심판진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의 이의제기가 계속되자 결국 박재홍은 타격 자세를 오픈 스탠스로 바꿔야 했다. 하지만 박재홍이 타격자세를 수정한 이후에도 김성근 감독은 한동안 박재홍의 타격자세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였다.

2.7.3 쌍방울은 가난한 구단? - 실은 연봉총액 1위 구단

김성근 감독은 훗날 쌍방울 시절 가난한 여건을 극복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특히 박재홍 부정타격 시비나 마운드 높이 논란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쌍방울의 어려운 여건 때문에 현대에 오기가 생겨서 그랬다고 항변했다.

김성근 감독은 "1996년 당시 쌍방울이 모기업의 재정악화로 어려움을 겪은 반면 현대는 자금력이 풍부해서 현대에 대한 오기가 발동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현대에 대해 박재홍 부정타격, 마운드의 높이 등을 이유로 싸움을 붙였다고 술회했다. 김성근 감독은 "그때 내가 그 얘기를 꺼내서 (박재홍이 폼을) 고치느라 힘들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 [런다운 예전 쌍방울-현대시절 생각나?]

다른 인터뷰에서도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의 가난함을 강조했다.

"쌍방울 시절 가난한 우리 선수들은 현대만 만나면 으리으리한 분위기에 기가 먼저 죽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다. 현대전서는 더 집요하게 야구했다. 그릇된 부분이 있으면 더 강하게 어필했다. 세상은 내게 손가락질 했지만 그 과정에서 쌍방울 선수들은 투혼과 자신감을 얻었다." - <SK 불패의 병법>(8)마음은 얻고 엄격함은 유지하라

김성근 본인의 발언이 아니더라도 쌍방울 레이더스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김성근 감독의 지도력으로 성공을 일궈낸 투혼의 팀으로 널리 언급되고 있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김성근 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96, 97시즌. 두 시즌 동안 보여준 '공포의 외인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혼은 영원히 야구팬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공포의 외인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하지만 박동희 칼럼에 의하면 쌍방울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12월부터이며, 96, 97 두 시즌 동안은 쌍방울이 그렇게 어려운 팀은 아니었다고 한다.

(쌍방울의 선수단 지원은) 1997시즌까지 메리트[14] 시스템도 있었고, 연봉도 박한 편이 아니었다. - 박동희 칼럼

사실 현대 유니콘즈 역시 넉넉한 지원을 받은 것은 초기에 잠깐이다. IMF를 전후로 현대그룹이 어려워지면서 야구단에 대한 지원이 크게 줄었고, 2000년대에 들어 계속 재정난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허덕이다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2016년 2월 KBO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7년 연봉총액 1위 구단은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김성근 감독이 부자 구단이라 칭했던 현대 유니콘즈의 연봉총액은 쌍방울에 이은 2위였다.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맡았던 삼성, LG도 거의 최하위권팀, 돈 없고 힘 없는 팀이라고 비하, 왜곡하기도 했다. (해당 항목 참조)

2.7.4 부정방망이 논란

1997년 5월 5일 삼성-LG 3연전에서 LG 천보성 감독이 삼성이 부정배트를 사용한다고 항의한 부정방망이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KBO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한 이는 정작 천보성 감독이 아닌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었다. 5월 29일 김성근 감독은 KBO에 공문을 보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KBO 관계자들이 미국, 일본에 출장을 가며 고생을 한 끝에 미국 조사기관에서 배트는 정상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 와중에 연타석 만루홈런 친 방망이 톱질당한 정경배 지못미

또 김성근 감독은 5월 28일 현대 선수들이 야구규칙에 명시되지 않은 검정색 방망이를 사용한다고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제소했다. KBO는 출범 당시 유색 방망이의 사용을 전면 금지했으나 지난 88년 다갈색 방망이에 한해 허용한 이후 이 규정은 사문화되어 1997년 당시 검정색, 담황색, 암갈색 등 대부분의 선수들이 유색방망이를 써왔다. 김성근 감독의 방망이 색깔 파동은 당시 쌍방울이 1승6패의 부진에 빠지자 분위기 전환용으로 라이벌 팀의 트집을 잡은 것으로 풀이되었다. 김성의 감독의 이러한 행태는 누워서 침뱉기, 프로야구 죽이기라는 비난을 받았다.

더군다나 쌍방울 선수들도 제소하기 전날까지도 검정색 방망이를 거리낌없이 휘둘러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김성근 감독은 큰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2.7.5 투수 혹사 논란

김성근 감독의 인해전술식, 벌떼작전씩 투수운용을 놓고 혹사 논란이 일었다.

상대팀들은 위기때면 한 이닝에만 두세 명의 투수를 동원하는 쌍방울의 「벌떼작전」에 말려 아예 제풀에 꺾이고 만다. 쌍방울이 팀방어율은 최하위권에 머물면서도 지난해에 이어 2년연속 상위권에 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김성근감독은 페넌트레이스 운영의 귀재라는 찬사를 받는 한편 선수들에게는 부상의 악령을 안겨다주는 「지옥의 사자」라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 「투수조련사」라는 별명처럼 그는 OB시절 박철순을 최고투수로 키웠고 태평양 시절에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의 「삼두마차 시대」를 열었지만 그가 떠난 뒤 남은 투수들은 어김없이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올해도 김성근감독은 시즌초부터 투수들을 너무 혹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듣고 있다. 쌍방울이 올해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할지는 피로에 지친 쌍방울 투수들이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97년 5월 15일 동아일보 장환수 기자

김성근 감독을 적당히 치켜세우면서도 실상은 그의 지나친 투수혹사를 비판했다. 투수 혹사 비판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의 허약한 투수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했다.

2.7.6 김현욱 다승왕 만들어주기 논란

1997년 김현욱이 20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의 김현욱 다승왕 만들어주기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중간계투요원인 김현욱을 다승왕으로 만들기 위해 잘 던지고있는 선발투수를 일부러 끌어내리고 김현욱을 등판시켜 야구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97년 8월 29일 LG전에서 5-0으로 앞선 상황에서 잘 던지던 선발 오상민을 5회 강판시키고 김현욱을 등판시켜 승리를 챙겨준 것이 그 예. 오상민은 1이닝만 더 소화하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지만 김성근감독의 횡포(?)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김성근 감독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다승과 방어율,승률 타이틀은 결국 김현욱의 몫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며 '타이틀 만들어 주기'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김성근 감독은 시즌 막판인 9월에만 김현욱을 17번이나 등판시켜 6승을 챙겨주면서 기록 만들어주기 논란을 가열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현욱은 9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 연속 승리, 9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 동안에 4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시즌 마지막 한달 동안 김성근 감독의 밀어주기로 7승을 추가한 김현욱은 시즌내내 단한번도 선발등판하지 않고 오로지 구원승만으로 20승을 거둬 다승왕에 올랐다. 구원승만으로 다승왕에 오른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현욱은 승리를 거둔 20경기에서 총 67 2/3 이닝을 소화하여 경기당 평균 3 1/3 이닝을 던지고 승리를 챙겼는데, 이는 최소 5이닝을 완투한 후에야 승리 요건을 갖출 수 있는 선발투수들과 형평성 논란을 낳았다. 김성근 감독의 기록 만들어주기에 대해 기자들이 투표 거부로 응대하여 결국 김현욱이승엽에게 시즌 MVP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투수 골든글러브도 이대진에게 내 주었다.

2.7.7 김현욱 혹사 논란

다승왕 만들어주기와는 별도로 김현욱 혹사 논란이 있었다. 1997년 김현욱은 70경기에 구원등판하여 무려 157 2/3 이닝을 던졌다. 임창용을 혹사시켜 인간백정, 서백정으로 불린 서정환 감독 시절에 임창용이 던진 이닝수가 138 2/3 이닝(1999년)이었다는 점을 보면 김현욱의 혹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임창용이 1998년말 해태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되면서 해태와 삼성 두 구단에서 스타였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은 반면, 김현욱은 비인기팀 선수인데다가 1993년 데뷔 후 1996년까지 총 승수가 고작 4승에 불과한 듣보잡 투수였기 때문에 그의 혹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감이 있다. 김현욱은 무릎의 회전을 많이 이용하는 사이드암 투수였는데, 1997년 혹사를 겪은 후 그해 말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복귀해서 1998년 시즌에도 68경기에서 129 1/3 이닝을 던졌다(...) 그러나 이때 무릎수술이 완쾌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기복귀한 것이 김현욱의 남은 선수생활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1999년에 친정인 삼성으로 복귀한 김현욱은 한동안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은 선수생활 내내 고질적인 무릎과 오른팔꿈치 부상이 그를 괴롭혔는데 매번 등판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가며 던졌다고 한다. 특히 왼쪽 무릎은 1997년 수술 후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출전하여 혹사당하면서 더욱 악화되어 여러차례 재수술을 고려했지만 수술 후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담당의사의 소견 때문에 결국 계속 수술을 미뤄가며 김현욱 본인 스스로가 재활에 상당한 지식을 쌓아 스스로 몸관리를 하면서 버텼다. 2004년 시즌을 앞둔 기사에 따르면 김현욱의 왼쪽 무릎은 야구 선수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손상돼 있어 연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과장을 좀 보태면 공을 던질 때마다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뻑뻑할 정도였다고 한다.

2004년 김현욱은 무릎부상과 오른팔꿈치 인대 부상이 악화되어 공을 던지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 FA자격 취득 요건을 3개월 앞두고 시즌아웃되었다. 김현욱은 7월 26일 “사실 FA가 되는 올시즌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몸을 다쳐 계획이 다 어긋났다”며 “이게 내 복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야구선수가 몸관리 잘못해서 다쳤으니 다 내 책임이다”고 말했다. 결국 김현욱은 팔꿈치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에 실패하여 2005년 5월 20일 은퇴선언을 하고 6월 2일 은퇴식을 가졌다. 김현욱은 혹사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관리 및 재활에 큰 관심을 가져 은퇴 후 코치가 되고 난 후에 트레이닝에 큰 관심을 가졌고 2010년에는 요미우리에서 트레이닝 연수를 받고 아예 트레이너로 전향했다. (김현욱 관련 기사) : # # # #

2.7.8 마운드높이 논란 및 왜곡 미화

1998년 후반기 개막일인 7월 11일 수원야구장에서 열린 현대-쌍방울 전에서 김성근 감독이 "마운드가 규정보다 아주 높아 보인다."며 김병주 주심에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첫타자 조원우를 타석에 보내지 않아 경기 시작이 39분이나 지연된 끝에 퇴장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성근 감독이 퇴장당하자 쌍방울 프런트가 선수들을 경기에 투입하도록 지시하여 경기가 시작되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쌍방울의 정식이의제기를 접수한 KBO는 이날밤 10시 40분께 이상일 운영부장이 토목기사 한 명을 대동, 수원구장으로 급히 가서 구장 시설계장과 양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운드 높이를 실측했다. 그 결과 마운드의 높이는 41cm(16.27인치)로 규정(10인치)보다 높게 나와 KBO는 수원구장 측에 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김성근 감독이 마운드 높이에 대해 이의 제기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메이저리그도 투고타저, 타고투저가 있을 때 마다 마운드높이 규정을 수시로 바꾸는 등 국제적인 기준이 일관되지 않았기에 KBO도 마운드높이에 대해 크게 제재하지는 않았고 각 구장이 마운드높이를 조절하는 것은 홈팀 어드밴티지로 여겨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날 김성근 감독이 마운드높이를 항의하다 퇴장당하자 당시 언론들은 마운드가 높을 경우 현대 선발 정민태처럼 오버핸드 투수에게는 유리하지만 쌍방울 김기덕같이 언더핸드 투수에게는 불리하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이 마운드 높이로 시비를 걸고 있다고 김 감독을 비판했다. 또 부정 방망이 사건 때도 김 감독이 본인의 팀은 방망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팀이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항의했던 누워서 침뱉기,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행태를 다시한번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성근 감독 자신은 언더핸드가 많은 쌍방울을 특성을 활용하기 위해 전주구장도 마운드높이를 규정보다 훨씬 낮게 유지할 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구장의 마운드 높이를 문제삼는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 방망이 색깔이나 마운드 높이처럼 당시 사문화되어 KBO가 실제로 규제하지 않던 부분에 대해서 트집잡기식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 팀이 연패로 상황이 좋지 않을 때마다 상대팀의 트집을 잡아 자신의 팀의 분위기를 전환하는데 이용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앙금이 결국 빈볼 사건 등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는 점 등도 거론되면서 김 감독에 대한 비판은 거세졌다.

이 사건은 해묵은 쌍방울-현대 간의 마운드 높이 시비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그 시작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성근 감독은 팀이 재정이 풍부했던 현대에 대해 오기가 발동해서 마운드 높이, 박재홍 타격자세 등으로 현대 측에 계속 시비를 걸었다.

▲ 1996년 플레이오프 당시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 평지처럼 평평하게 깎은 전주구장 마운드[15] (동영상이 보이지 않으면 YouTube에서 보기를 눌러주세요)

하지만 위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성근 감독은 정작 쌍방울의 전주구장의 마운드는 규정보다 훨씬 낮게 평지수준으로 깎았다.[16] 현대는 주로 정통파 스타일 투수들로 낮은 마운드에 적응하기가 힘든 반면 쌍방울은 성영재, 김기덕, 김현욱 등 언더핸드 투수들이 주류를 이뤄 낮은 마운드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마운드를 깎은 덕분인지 쌍방울 레이더스는 전주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 연승했지만 전주구장을 떠나 인천과 잠실에서 열린 3, 4, 5차전에서 내리 패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마운드 깎는 노인 김성근 감독은 플레이오프에서 2연승한 뒤 3연패로 탈락하자 "3차전부터 갑자기 판정에 문제가 많았다."면서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1, 2차전 마운드는 문제가 없으시구요?

훗날에도 김성근 감독은 박동희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현대는 리그 최고의 부자구단이었다. 그래서인가. 이상하게 3차전부터 심판 판정이 석연치 않았다. 선수들 사이에서 ‘저래도 되는 거냐’고 발끈할 만큼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이 이어졌다. 그러다 조금씩 경기가 말리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꼬이고 말았다.”

1998년 7월 11일에 벌어진 사건은 관행이라는 이유로 KBO가 마운드높이를 대충 넘겨왔다는 잘잘못을 떠나, 김성근 감독이 자신은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서 타 구단이 마운드 높이가 규정에 맞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한 점, 그리고 연패를 당하던 쌍방울의 팀 분위기 전환용으로 물고 늘어진 점 등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이 사건 이후 KBO는 전구장의 마운드 높이를 규정에 맞추도록 지시했다.

이를 가지고 훗날 김성근 감독은 인터뷰와 강연 등에서, 당시에 자신이 내로남불 행태로 크게 비난받았던 사실은 감추고, 본인이 퇴장도 불사하고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전구장의 마운드높이가 통일되어 한국야구 선진화를 앞당겼다면서 자신의 업적으로 사실을 왜곡, 미화했다. 김성근 감독의 미화, 왜곡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고 김성근 감독이 야구장 마운드높이 통일의 주역임을 찬양하는 글들이 구글을 검색하면 수도 없이 나왔었다.

2.7.9 김원형 빈볼 사건

1998년 7월 26일 당시 신문에 추악한 드라마로 대서특필된 빈볼 사건이 터졌다. 이는 96년부터 이어진 쌍방울 김성근 감독의 마운드 높이 시비 및 박재홍 부정타격 논란 등으로 앙금이 누적된 결과였다. 8회말 현대 이숭용김원형의 공에 왼쪽 다리 오금부위에 맞고 그라운드 밖으로 업혀나갔다. 그러자 현대 안병원이 9회초 쌍방울 조원우의 옆구리에 공을 맞혔다. 김원형과 박경완의 유명한 빈볼사건도 이 경기에서 발생한 사건 중 하나였다. 9회말 쌍방울 투수 김원형이 현대 타자 박경완을 맞추라는 벤치의 사인을 받았지만 절친이었던 박경완을 차마 맞추지 못하고 위협구만 계속 던지다가 결국 심판에게 퇴장당한 것. 김원형은 경기 직후 "벤치에서 빈볼에 대한 사인은 없었다. 심판의 퇴장명령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며 말을 아꼈지만, 훗날 인터뷰에서 벤치의 지시로 절친 박경완에게 빈볼을 던진 것을 사실상 시인했다. "결국 김원형은 김성근 감독의 하늘 같은 엄명을 따르면서도 친구의 몸을 다치게 하지도 않은 채 자기를 희생하는 우정의 본보기를 보여 준 셈이다." 새콤달콤 스포츠 뒷 이야기 역시 김원형

다음날인 7월 27일 경기에서도 쌍방울 성영재가 현대 박경완의 왼쪽 무릎을 맞추면서 전날 벌어진 추악한 빈볼 시비를 다음날까지 이어갔으나 현대 측에서 더이상 보복에 응하지 않으면서 일단락되었다. 한편 이날 빈볼을 던진 성영재는 경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2015년 이동걸 빈볼 사건 때 김성근 감독이 "46년 감독으로 살면서 빈볼 지시하지 않았다고 발언하자 반박 사례 중 하나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2.7.10 심판 폭행 사건

1999년 6월 18일 당시 쌍방울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두산과의 전주 홈 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허운 1루심을 폭행해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혔다. 6월 21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상벌위는 심판을 폭행한 혐의로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금지 및 벌금 200만원을 부과했다. 김성근 감독은 폭행사실을 부인했다. 이에 KBO 사상 최초로 상벌위원회의재심이 열렸다. 6월 23일 상벌위가 재소집됐지만, 전주의 효자정형외과의원에서 발부한 의사의 소견서와 경기운영위원의보고서 등을 종합한 결과 폭행 사실이 확실하다고 판단되어 12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징계를 재확인했다.

2.8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2000)

3 21세기

3.1 LG 트윈스 2군 감독-1군 수석코치-감독대행-감독(2001)

3.1.1 해태 선수 비하 발언

5월 20일 광주 해태-LG전에 앞서 해태 왼손 투수 최영완이 엔트리에서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김성근 LG 감독대행이 언론에 "그 선수가 빠지면 우리는 어떡하라고."라고 발언한 것에 해태 팬들이 분개했다. 최영완은 5월 18, 19일 LG전에서 6타자 3피안타 2볼넷으로 크게 부진했다. 김성근 감독대행의 발언은 상대 팀과 선수를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

3.1.2 신윤호 혹사

2001시즌 내내 신윤호마구잡이로 등판시키며 혹사시키는 것에 대해 논란과 비판이 많았다. # # # LG팬들 뿐만아니라 타팀팬들도 신윤호를 혹사를 크게 걱정했을 정도. 한 언론 기사는 "김성근 감독이 눈앞의 1승에 너무 목말라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마무리 투수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소중한 관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일침하기도 했다. 물론 신윤호 선수의 혹사를 강한 정신력 등으로 미화하는 언론도 있었다. 혹사논란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적어도 하루 이상의 휴식이 있기 때문에 결코 많이 던지는 게 아니다. 세이브 투수는 이런 식의 운용이 불가피하다"라고 변론했다. 2001시즌 신윤호는 선발로 첫 등판하여 승리를 따낸 후 바로 불펜으로 전환하여 시즌 동안 144 ⅓ 이닝을 던졌는데 이런 혹사의 결과로 신윤호는 32SP로 세이브 1위[17]와 15승(14구원승) 6패로 손민한과 함께 공동 다승 1위, 승률 1위(0.714)를 기록하며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통했다. 신윤호의 통산커리어인 28승, 28세이브 중 절반 이상이 2001년 단일시즌 동안에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신윤호는 혹사의 여파로 다음 해인 2002년부터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2년 스프링 캠프 때부터 부상으로 조짐이 안좋더니 시즌 초부터 투구밸런스가 망가진 모습을 보여 2군으로 쫒겨가는 수모를 겪은 후 선발 전환을 시도했지만 결국 4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6.45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 2003년 이후 신윤호는 2008년에 은퇴할 때까지 6시즌 동안 단 7승만을 기록한채 결국 팔꿈치 부상으로 소리소문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신윤호 혹사와 이어진 부진으로 말이 많자 김성근 전 감독은 2002년 LG 감독에서 경질된 직후 신윤호가 망가진 것은 야구 월드컵에 나간 탓이라고 변명했다.

3.2 LG 트윈스 감독(2002)

김성근/구설/2002년 문서로.

3.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관련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무엇이든 한국 대표팀을 돕고 싶다고 발언했지만, 아무런 직책에도 선임되지 못했다. 2009년 2회 WBC 당시에는 리그 연속 우승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지도력을 인정받고 2008년 금메달을 획득한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경문 감독의 대표팀 용퇴로 감독 제의가 있었음에도 건강 문제와정작 건강 운운하시면서 펑고친건 함정 비겁한 변명입니다 자존심을 이유로 거절하고[18] 건강상태나 팀 성적이 더 좋지 않은 1회 WBC 감독이었던 김인식이 선임되어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다음은 김 전감독 측의 해명성 기사 (박동희의 오프시즌 MailBag) 김성근이 WBC 감독 거절한 이유, (박동희 in 캠프) 김성근 감독과의 대화

그리고 김병현이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대표팀에 불참하자 김병현을 인격적인 기본이 안 된 사람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였다. (기사) 이 정도 수위면 얄짤 없는 명예훼손, 참고로 당사자인 김인식은 "주변 사람이 나에게 전화해서 '김병현이 잘못했다'고 하더라. 해외로 가면서 여권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병현의 성격상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김병현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할까봐 걱정된다. 대표팀이나 김병현을 위해서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다." 라고 인터뷰를 하여 김병현을 보호하였다.

3.4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2006)

3.4.1 내야수 니시오카 츠요시 구타 사건

사건 자체는 2006년에 발생했지만, 정작 사건이 보도된 것은 2009년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에서 언급하면서 나왔고, 2016년 4월 한화 이글스가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지면서 기사가 재발굴되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김성근은 내야수 니시오카 츠요시가 맹타를 휘두른 날 타격감이 어땠냐고 니시오카에게 묻자 니시오카는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답변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김성근은 니시오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이후로도 두번 더 맞았다고 한다.

김성근은 이 사건에 대해 "그래도 선수들이 많이 고마워하더라"라고 스스로 미화해서 인터뷰했지만, 군기 잡는 것의 옳고 그름, 그리고 선수 성적의 좋고 나쁨을 떠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든 나쁜 짓이다. 애초에 물어본 말에 대답 한마디 했다고 바로 죽빵을 맞았는데 고마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사건에 대해 "그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폭력을 휘두른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어도 부족할 망정 선수들이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맞은 니시오카 츠요시도 진심으로 김성근이 자신의 얼굴을 때려준 걸 고맙게 느끼고 있을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또한 이 사건도 니시오카에게 직접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일본리그보다 아래인 KBO리그에서도 우승을 해보지 못 한 감독으로서 일본에서의 코치 경력은 일천했다. 순회코치란 명칭도 인스트럭터에 가까운 직함으로 이런 경우는 선수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먼저 나서기 힘들다. 자세한 내막은 알기 힘들지만 니시오카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김성근 감독의 구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3.5 SK 와이번스 감독(2007~2011 중도퇴임)

3.5.1 2007년

김성근/구설/2007년 문서로.

3.5.2 2008년

김성근/구설/2008년 문서로.

3.5.3 2009년

김성근/구설/2009년 문서로.

3.5.4 2010년

김성근/구설/2010년 문서로.

3.5.5 2011년

김성근/구설/2011년 문서로.

3.6 고양 원더스 감독(2012~2014)

3.6.1 2012년

김성근/구설/2012년 문서로.

3.6.2 2013년

김성근/구설/2013년 문서로.

3.6.3 2014년

김성근/구설/2014년 문서로.

3.7 한화 이글스 감독 재임중(2014.10~)

3.7.1 2015년

김성근/구설/2015년 문서 참조

3.7.2 2016년

김성근/구설/2016년 참조
  1. 이 부분에 대해 김성근은 김동엽이 먼저 제의하자 농담인 줄 알고 가볍게 응했는데, 나중에 김동엽이 신일고 관계자들과 함께 막무가내로 찾아오고나서 해명하려 했지만, 마지 못해 계약했다고 주장한다. 출처는 (1991년 중으로 추정) <주간야구>의 김성근 관련 연재기사.
  2. 그러나 한국 시리즈 당시 이만수 포수는 긴팔이었다(...) 이 때문에 사륜안이라도 가지고 있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3. OB 베어스 우승에 기여한 것을 자랑하려다보니 사인 훔치기를 말할 때 어느정도 과장이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전에도 삼성에서 쫓겨난 후에도 삼성은 원래 약팀이었다라는 식으로 언플을 한 적이 있어서...
  4. 그러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으니, 김성근 OB 감독 재임기간 對 삼성전 승률은 0.411에 불과하다 (...) 이것도 어느정도 허풍으로 봐야할듯
  5.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1997년김현욱이 있다. 김현욱은 승률왕은 아니지만 다승왕으로 만들기 위해 5이닝 이전에 선발을 강판시키고 그를 등판시켰다.
  6. 일부 김성근 감독팬들은 태평양 구단 측이 임호균 각서 파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성근 감독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신동관 태평양그룹 부회장이 일종의 좌천이라 여겨지는 야구단 사장 시절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을 꺼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단입장에서도 이 사건의 해명에 나설 경우 비공식적인 각서를 썼다는 비난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구단에서 짤리고 싶어했던 김성근 감독의 장단에 놀아난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구단 측이 억울하지만서도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당연하다.
  7. 이광환, 김용희 감독 등
  8.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오더를 받기 전에 상대팀의 오더를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되는데, 작성된 오더를 이제 받는다는 생각에 순간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9. 김성근 감독팬들은 당시에 이런 이중오더 사건이 많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 사건이 실제로 발각된 유일한 사례다.
  10. 위장오더 사건 자체와는 무관하지만 빈볼을 던진 김정수도 50만원의 벌금과 1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11. 그러나 이 영향으로 이만수는 개인통산 199홈런을 기록한 후 한 달 가까이 아홉 수에 걸려 헤메다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가서야 간신히 200홈런을 달성하게 된다.
  12. 해태 이상국 단장이 야인으로 있던 김성근을 직접 인스트럭트로 영입했다. 이중오더 사건 등으로 김응용 감독과 관계가 껄끄러웠지만 김응용 감독이 이상국 단장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아 김성근의 영입이 이루어졌다.
  13. 타자석의 선도 타선의 일부라고 명시되어 있음
  14. 승리수당. 경기를 이길때마다 1군 선수단 전체 혹은 수훈선수한테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제도. 공식적으론 금지였지만, 뒤에선 모든 팀들이 메리트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팀의 주전 선수들은 시즌을 결산해보면 공식 연봉보다 메리트를 더맏이 받았을 정도로 기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수차례 금지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15. 20초에 김기태 타자가, 2분 20초에 염경엽 2루수가 등장한다.
  16. 현대구단과 김재박 감독은 김성근 감독과 달리 전주구장의 마운드높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7. 구원승을 제외하면 18세이브(4위)
  18. 후배이자 리그에서 더 낮은 성적을 거둔 김경문이 자신보다 먼저 대표팀 감독에 거론된 것을 문제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