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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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명훈
출생1953. 1. 22, 서울특별시
학력뉴욕 매네스 음대, 줄리어드 음악원
가족모친 이원숙 여사, 부인 구순열, 누나 정명화, 정경화, 형 정명근, 슬하에 3남[1]

1 개요

Myung-whun Chung, 鄭明勳

서울 덕수국민학교 재학 중 피아노 공부를 위하여 누나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이후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입상하며, 피아니스트로서 대한민국에서 화려하게 주목을 받았고 세계적인 음악인으로 명성을 얻었기 시작하였다.
정명훈은 동양인으로서 36세의 나이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현 파리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에 취임할 정도로 일찍이 음악적 역량을 인정받은 지휘자이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첼리스트 정명화의 남동생이기도 하며, 셋이서 피아노 3중주단인 '정 트리오' 를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친형 정명근은 음악매니지먼트 CMI 사장을 역임하는 등 예술계에서 활동하였는데, 2015년 10월에는 수십억원의 국가보조금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39억 배상판결을 받은 바 있다관련 기사

2 약력

한국전쟁 후반기에 서울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에 서울시립교향악단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제11번을 협연하면서 신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한인 식당을 개업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한 어머니를 따라 건너가 계속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고, 1967년에는 시애틀에서 독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71년 뉴욕의 매네스 음악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에게 피아노를, 칼 밤베르거에게 지휘를 배웠고, 누나 정명화가 스위스의 주네브 음악 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참가했을 때 피아노 반주자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73년에는 서독 뮌헨ARD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로 입상했다. 1974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용해(74년 이후 미국 시민권을 쭉 보유하고 있다가 90년대 중반에 한국 국적을 회복. 관련 기사)당시 한국인들은 적성국가 소련의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스타니슬라프 이고린스키와 공동 2위로 입상했다. 이 소식은 한국에서도 경사로 여겨졌고, 콩쿠르 직후 바로 귀국해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후 본격적인 피아니스트 연주 활동을 벌이면서 같은 해 10월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지기도 했고, 1975년에는 영국의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도 참가했지만 마이클 휴스턴과 공동 5위를 하는 데 그쳤다. 이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교향악단일본 순회 공연에 협연자로 동행했고, 장 마르티농[2]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 등의 지휘자들과도 미국과 일본에서 협연했다.

1975년에 매네스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지휘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음악원 관현악단과 뉴욕 청소년 관현악단 등을 지휘해 무대 경험도 쌓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이끌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979년에는 샤를 뒤투아가 지휘한 같은 악단과 함께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연주했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영국 음반사 데카에 취입했다.

1980년대 초반 부터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교향악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 지휘하며 점차 지휘자로서의 활약을 넓혀나갔다. 1984년에는 서독으로 거점을 옮겨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스웨덴의 비스(BIS)와 영국의 ASV, 서독의 코흐(Koch) 등에서 예테보리 교향악단과 잉글랜드 노던 신포니아, 자르브뤼켄 방송향 등을 지휘해 닐센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교향곡, 드보르자크의 현악/관악 세레나데 등의 녹음을 취입하면서 지휘자로서 음반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자르브뤼켄 재임기에는 전임자 한스 첸더의 노선을 따라 기존 레퍼토리 외에 현대음악 작품의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 헬무트 라헨만의 '먼지(Staub)', 윤이상의 교향곡 3번의 세계 초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오페라 지휘도 이 시기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86년에 파리에서 프로코피예프의 불의 천사로 메이저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고 같은 해에 베르디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뷰했다. 첫 오페라 지휘는 줄리어드 음악원 재학 시절에 공연한 푸치니나비부인이었고,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재단의 도움을 받아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을 지휘하기도 했다.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피렌체 시립 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오페라를 자주 공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터에 새로 지어지고 있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 파리 국립오페라)의 음악 감독에 공식 취임하기도 전에 해고되자 초대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90년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후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 지휘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로린 마젤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출되자 빡쳐서 예정된 스케줄을 취소하면서 대역으로 베를린 필 데뷰 공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같은 해 도이체 그라모폰(이하 DG)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데뷰 앨범으로 전년도에 바스티유 오페라 관현악단과 녹음한 비제의 관현악 모음곡이 출반되었다.

바스티유 오페라 재임기에는 오페라 공연을 위주로 하면서도 프랑스 현대음악계의 거장 작곡가였던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 연주에 중점을 두었고, 이 시기 DG에서 출반된 앨범도 대다수가 메시앙의 관현악 작품을 담고 있다. 메시앙은 생전에 정명훈의 지휘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며, 투랑갈릴라 교향곡 같은 경우에는 직접 음반 해설을 집필하기도 했고 말년에 작곡한 '4인을 위한 협주곡' 을 정명훈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에 프랑스 음악계에서 벌어진 정치권 싸움에 휘말려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 자리를 임기 종료 전에 사임해야 했는데, 이게 빌미가 되어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가 잠시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객원 지휘자로만 활동하다가 1997년에 이탈리아 로마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고, 아시아 지역 악단 단원들을 비시즌기에 모아 조직하는 페스티벌 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산타체칠리아 외에도 빈 필하모닉, 시카고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의 공연에도 객원 지휘자로 무대에 올랐고, DG와 EMI 등에서 이들 악단과 음반 취입도 병행해 진행했다.

1998년에는 KBS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고국에서 첫 중책을 맡아 화제가 되었는데, 취임 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악단 경영진과의 심한 불화로 인해 사임한 흑역사도 있었다. 악단의 기량과 오디션 문제가 주 이유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부지휘자 선임 건이 주요한 이유라고 한다. 정명훈의 한국 체류기간 이외에는 악단을 트레이닝할 인물이 없다보니 그 대안으로 정명훈은 한 외국인 지휘자를 부지휘자로 추천했지만, 당시 IMF의 여파가 컸던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으로서는 외국인 부지휘자 선임은 비용면에서 큰 무리가 따랐다. 거기에 서로간의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까지 겹쳐 양측의 감정의 골이 심하게 깊어졌다.

2000년에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바스티유 시절 그랬던 것처럼 메시앙의 관현악 작품 음반화에 주력하면서 스트라빈스키라벨, 베토벤, 드보르자크, 무소륵스키 등의 작품도 음반으로 취입했다. 2001년에는 소니CEO이자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대규모 악단이 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단 이사장이었던 오가 노리오의 부탁을 받고 특별 예술 고문에 부임했다.

2006년에는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의 요청으로 서울시향의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에 부임했고, 부임 직후 대대적인 오디션을 진행해 전체 단원의 1/3 가량을 교체하면서 타성에 젖어 있었다고 비판받고 있었던 악단의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단원들과의 갈등도 심했지만, 오디션 후 젊고 역량있는 신진 연주자들과 관악 파트의 적극적인 외국인 단원 영입으로 확연히 향상된 연주력을 보여주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2009년에는 DG와 5년 계약으로 매년 두 장씩의 앨범을 발매하는 계약을 맺으면서, 한국 뿐 아니라 NHK 교향악단 같은 아시아 톱클래스 악단도 못해본 메이저 레이블과의 장기 계약을 성사시킨 기록을 남겼다.

서울시향 부임 이후 활동 중심을 해외에서 한국으로 점차 옮겨가고 있다. 2015년 6월에 라디오 프랑스 필과의 고별공연을 했다. 연주 이후 정명훈은 악단 역사상 최초의 명예 음악감독(Directeur Musical Honore)으로 추대됐다. 이 공연을 끝으로 현재는 서울시향만 음악감독 직책으로서만 머물러 있다. 정명훈 이후 라디오 프랑스 필은 핀란드 출신의 미코 프랑크가 예술감독직을 맡는다.

하지만 다른 해외 악단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것은 아니다. 2010년에 도쿄 필에서 퇴임한 뒤 계관 명예 지휘자로 계속 악단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사상 첫 수석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향에서 했던 것처럼 해당 악단과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진행 중이다. 또한 2015년 6월부터는 예술감독직을 맡았던 라디오 프랑스 필의 사상 최초의 명예 음악감독으로 추대되었으며 이후로도 그 인연을 계속 이어나갈 예정이다. 여러 악단과 객원 출연하는 대신 소수의 악단과 오랜 기간에 걸쳐 밀접한 관계를 맺는 편이며, 미국 관현악단과는 인연이 없는 편이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관현악단인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는 특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해당 오페라극장 음악 감독이었던 리카르도 무티, 스승이기도 했던 줄리니에 이어 이 악단과 세 번째로 자주 공연한 기록을 갖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북한과 음악 교류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추석 연휴 중이던 2011년 9월 12일에 서울시향 행정 직원 두 사람을 대동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서울신문 기사 사실 방북 계획은 이전에도 있었는데, 1990년 여름에 공연 제의를 받았지만 한국 정부의 방북 허가가 나지 않아 무산되었다. 2006년 10월에도 윤이상관현악단을 지휘하러 갈 예정이었지만, 때마침 북한에서 지하 핵실험을 강행하는 바람에 역시 취소되었다. 주로 어린이 음악 교육과 남북 관현악단 교환 공연 등 행정 사안을 논의하기 위한 방문이었고, 일정 중 조선국립교향악단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허설 참관 중에 잠깐 지휘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북 성과는 이듬해인 2012년에 은하수관현악단의 창단 이래 첫 해외 공연으로 나타났다. 3월 14일에 파리의 살르 플레옐에서 진행된 공연의 2부 순서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과 합동으로 연주한 브람스교향곡 1번과 앙코르 두 곡을 지휘했다. 2015년 11월에도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 함께 방북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아직 확정되진 않았다. 정확한 소식이 나오면 추가바람.

2013년 10월 18~20일에는 2001년 12월의 공연 뒤 소원한 관계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메시앙의 네 개의 교향 명상 '승천' 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을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무산되었다. 정확히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중에 기사를 통해서 제대로 알려졌다. 하와이의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바닷물 속에 있던 바위를 보지 못하고 다이빙을 했다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정명훈 자신이 피아니스트로서 베를린필 악장 다이신 카시모토와 함께 연주할 계획이었던 듀오 연주까지도 동시에 취소되었다. 이 연주는 크리스티안 예르비가 대신 지휘했다.

취소 소식 이후 베를린필은 정명훈을 이듬해에 다시 초청할 뜻을 내비쳤고, 결국 2014년 5월 8~10일 베를린 필 무대에 약 12년 만에 다시 출연해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과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

2013년 1월 25일 서울시향과 바그너 음악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공연을 약 세 시간 앞두고 급성 요통이 발병해 급작스럽게 취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회복한 뒤로는 예정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7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에서 자식들과 손녀를 위해 직접 선곡한 첫 피아노 독주곡집 녹음을 ECM 스탭들과 제작했고, 해당 녹음은 12월 말에 출반되었다.

2014년 12월 빈 슈타츠 오퍼(Wiener Staatsoper)음악 감독직에서 중도 사임한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öst)를 대신해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리골레토(뉴 프로덕션)를 지휘했고 동 극장 데뷔 공연이었던 시몬 보카네그라 공연(2011년)에서 빈 슈타츠 오퍼 단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2016년 가을 빈필의 아시아 투어를 이끌게 되었다.

2015년 5월 서울시향과 바그너의 '발퀴레'를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공연 한 주 전에 정명훈이 목 디스크 통증을 이유로 연주를 고사하고 대신 지휘자 콘스탄틴 트링크스가 투입되어 연주를 마쳤다. 다행하게도 이 날 연주는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호평이 지배적이었다. 더불어 무대에 긴 시간동안 있어야 하는 오페라 지휘는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서울시향뿐만 아니라 라 스칼라 극장 등에서의 오페라 연주 일정도 취소하였다.

2015년 8월 서울시향 예술감독직을 사임하고, 남은 계약기간 동안은 무보수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2015년 12월 29일, 서울시향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2016년 이후 스케쥴을 모두 취소하였다.

3 수상 경력

  •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 (1974)
  • 이탈리아 음악비평가협회 프랑코 아비아티상 (1988)
  • 이탈리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상 (1989)
  • 프랑스 올해의 음악상, 프랑스 음악비평가협회 선정 올해의 아티스트 (1991)
  • 프랑스 디스크 그랑프리, 미국 엑설런스 2000상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음반. 1992)
  • 프랑스 레지옹도뇌르훈장 슈발리에(3급) (1992)
  • 프랑스 클래식 음악의 승리상 중 최고의 지휘자상과 최고의 음반상, 프랑스 최고 오페라 연출상 (1995)
  • 일본 레코드 대상 (베를리오즈환상교향곡 음반. 1995)
  • 한국 금관문화훈장 (1996)
  • 일본 아사히 방송 ABC음악재단의 96 ABC 인터내셔널 음악상 (1996)
  • 한국 호암상 (1997)
  • 프랑스 클래식 음악의 승리상 두 번째 수상 (2003)
  •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코망되르(1급) (2011)
  • 이탈리아 베네치아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 평생음악상 (2013)
  • 이탈리아 음악비평가협회 프랑코 아비아티상 두번째 수상 (2015)

4 이모저모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비관적이고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물론 차이콥스키 콩쿠르 같은 경우 자신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지만, 5위 입상에 그친 리즈 콩쿠르 같은 경우에는 '연습이 부족했다' 면서 자신의 경력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논조의 인터뷰도 한 바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또 결혼한 뒤로 인자하고 여유로운 성품으로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환골탈태한 성품 덕분인지 자선음악회를 자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유니세프의 국제 대사로 마약퇴치와 청소년 구호 및 교육활동에도 앞장 서고 있다. 2008년에는 태안 반도 기름유출사고의 구호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관련기사 서울시향의 희망드림 콘서트

지휘 활동에 매진하게 된 이후로는 피아니스트 활동이 매우 뜸해졌다. 그나마도 1979년에 녹음한 데카 음반차이코프스키 피협 1번과 1990년대 중반에 정트리오 멤버로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겸해 DG에 녹음한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 같은 협주곡들, 정트리오 멤버로 데카와 EMI에 취입한 베토벤과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3중주곡들 같은 실내악들, 누나 정명화와 녹음한 첼로 소품집, 이탈리아의 메조 소프라노 가수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독창곡집인 '사랑의 노래' (데카)나 한국 베이스 가수 연광철슈베르트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공연 실황 앨범(소니 뮤직 코리아) 같은 가곡 반주 음반들 정도가 정명훈이 피아니스트로 남긴 몇 안되는 기록물이었다.

하지만 2013년에 상술한 대로 ECM에 첫 독주곡집을 취입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첫 앨범을 내놓게 되었다. 2014년 6월 일본에서 첫 독주곡집 쇼케이스를 가졌고, 대전, 대구,창원,고양,서울 에서는 30여 년 만의 단독 리사이틀 일정이 잡혀 있기도 하다. 일본 쇼케이스에서의 인터뷰에 따르면 ECM에서 두 번째 독주곡집 녹음을 제의받은 상태라고 한다. 결국 2014년 11월 첫 독주곡집 녹음을 했던 이탈리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두번째 독주곡집 녹음을 하기로 확정 되었다. 레이블은 역시 ECM..였으나 목 디스크 악화로 무기한 연기 되었다. 추후 추가바람. 물론 수준급 피아니스트로 여전히 그의 연주력이 상당히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독주자로서의 활동기간이 매우 짧았고 거의 오랜동안 지휘에 전념하였던 터라 연주의 완성도에 회의를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ECM 레이블과의 솔로 녹음은 중단 되었지만 최근 고양 아람누리에서 서울시향과 브람스 교향곡 4번, 브람스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소품을 녹음 하였다.

이미 한국인 지휘자중 에서는 제일 저명한 지휘자이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에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유독 고국인 한국에서만 까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외국 지휘자를 까는 경우는 없었다). 목수정 사건(아래 참조)때문에 까이는 경우도 있다. 아래를 참조...

정작 자신은 세간의 비평에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자신의 연주에 대한 평론 기사조차도 잘 읽어보지 않는다고한다. 심지어 자기가 지휘한 음반도 잘 안 듣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연주한 실황 음원이나 음반을 들으면 몸이 아플 정도라고.

음악적으로는 악보에 충실하며 열정적인 박력과 섬세한 서정미를 잘 살린다는 평이다. 지긋한 연배와 경력에도 불구하고 10~20대의 젊은 연주자들과 협연하기를 즐기며 악단 단원 선발 오디션에서도 젊은 연주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리허설은 기대 수준도 높고 연습 강도도 몹시 강해서 단원들이 인간적으로는 존경하지만 리허설 때는 매우 힘들어한다는 말도 있다. 일본의 음악 잡지 '음악의 벗' 에서는 사이먼 래틀, 발레리 게르기에프와 함께 앞으로를 이끌어나갈 3대 지휘자로 뽑히기도 하였다.

일본 비평계에서도 호의적인 평을 많이 받는 보기 드문 한국 음악인이다. 활동 초기에는 아무래도 한국인들의 인식에 널리 깔린 반일 감정 때문에 다소 거리를 두는 경향이 많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지휘자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런던 교향악단, 라 스칼라 필하모닉,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같은 세계 각지의 관현악단들과 일본 순회 공연을 자주 개최하면서 앙금이 많이 사라진 모습이다. 일종의 명예직이기는 했지만 타 악단을 통합한 후의 도쿄 필을 별 탈 없이 이끌면서 보여준 모습도 긍정적으로 비춰지고 있고, 베를린 필 악장인 카시모토 다이신과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최연소 1위 입상자로 유명한 쇼지 사야카 등의 일본 연주자들과도 자주 협연하거나 녹음을 하는 등의 협업이 많은 점도 이러한 평가에 일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일본 황실의 황태자인 나루히토와도 기회가 되면 실내악 협연을 하는 등의 이벤트 공연도 일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DG와는 서울시향의 음반을 계속 출반하고 있고 일본 음반사들과도 음반 제작을 하고 있다. 킹레코드에서는 NHK 교향악단 실황 시리즈 중 베르디의 레퀴엠이 포함되었고 엑스톤에서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취입한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발매했다. 도쿄 필 특별 예술 고문 취임 후 2002~2004년 동안 진행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실황도 녹음되어 IMX 클래식스라는 음반사에서 여섯 장의 CD 세트로 발매되었는데, 이게 현재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명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기도 하다.

2015년 10월 도쿄 산토리홀이 주최하는 "스페셜 스테이지 2015"의 아티스트로 선정 되어 서울시향과 도쿄 필하모닉을 번갈아 지휘했고 피아노 솔로,실내악,지휘 마스터클래스를 완수 하였다.

4.1 오페라 레퍼토리

  • 모차르트-돈 조반니,마술피리,후궁탈출,이도메네오
  • 브리튼-피터 그라임즈
  • 베토벤-피델리오
  • 베버-마탄의 사수
  • 로시니-세빌리아의 이발사,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윌리엄 텔
  • 베를리오즈-트로이 사람들
  • 바그너-방황하는 네덜란드인,탄호이저,트리스탄과 이졸데,라인의 황금
  • 베르디-가면 무도회,운명의 힘,리골레토,오텔로,돈 카를로,팔스타프,시몬 보카네그라,운명의 힘,라 트라비아타
  • 비제-카르멘
  • 무소르크스키-보리스 고두노프
  • 차이코프스키-에프게니 오네긴
  • 푸치니-나비부인,라 보엠,토스카
  • 드뷔시-펠레아스와 멜리장드
  • R.스트라우스-살로메
  • 메시앙-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 쇼스타코비치-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 생상스-삼손과 데릴라
  • 프로코피예프-불의 천사

이후 추가 바람.

4.2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기록

  •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82)
  • 바스티유 오페라 (1990,1994)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95)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96,2006)
  •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1997,2000)
  •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2002,2007,2013)
  •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03,2005,2015)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2006,2015)
  • 라 스칼라 필하모닉 (2008)
  •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2012)
  •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6)

4.3 디스코그래피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28번, 29번/ 노던 신포니아 오프 잉글랜드 (SKC, 1983년)
모차르트 교향곡 28번/ 남서 독일 방송 교햐악단 (ALLEGRIA)
드보르작 현악 & 관악을 위한 세레나데/ 노던 신포니아 오프 잉글랜드 (ASV 1983년)
림스키-코르사코프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시의 전설 모음곡.쇼스타코비치 교향곡 6번/ 자르브뤼켄 방숑 교향악단 (KOCH 1985년)
윤이상 교향곡 3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피아노 지휘 겸함)/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 (1985년)
드보르작 트리오 1 & 3번/ 정 트리오 (DECCA 1986년)
멘델스존,브람스 트리오 1번/ 정 트리오 (DECCA 1987년)
라헨만 관현악을 위한 먼지/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 (BMG/RCA 1987년)
드보르작 교향곡 7번,8번/ 괴텐부르크 심포니 (BIS 1987년)
닐센 교향곡 5번,바이올린 협주곡/ 괴텐부르크 심포니/ 강동석 (BIS 1987년)
차이콥스키 트리오,쇼스타코비치 트리오 1번/ 정 트리오 (EMI 1988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 (KOCH 1988년)
닐센 교향곡 1번,플루트 협주곡/ 괴텐부르크 심포니 (BIS 1989년)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0년) -Grand Prix du Disque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메시앙 그리스도의 승천/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1년)
생상스 삼손과 데릴라/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1년)
비제 카르멘 모음곡,아를르의 여인 모음곡 1&2번, 아이들의 놀이/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1년)
베토벤 트리오 1, 4, 5, 7번/ 정 트리오 (EMI 1991/92년)
림스키-코르샤코프 세헤라자데,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2년)
쇼스타코비치 므첸스크의 멕베스부인/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2년)
베르디 오텔로/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3년) - Diapason d’or
베를리오즈 이탈리아의 해롤드,로마의 사육제 서곡/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3년)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뒤티외 메타볼/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3년)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DG 1993년)
메시앙 미소,빛나는 무덤,잊혀진 제물,4인을 위한 협주곡/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4년)
메시앙 피안의 빛/ 바스티유 오페라 (DG 1994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4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DG 1994년)
로시니 슬픔의 성모/ 빈 필하모닉 (DG 1995년) - Orphée d'or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DG 1995년)
드보르작 교향곡 3번, 7번/ 빈 필하모닉 (DG 1995년)
사랑의 노래/ 바르톨리 (DECCA 1996년)
베토벤 3중 협주곡,베토벤 로망스 1 & 2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정트리오 (DG 1996년)
A Hymn for the World/ 로마 산타 체칠리아/보첼리,바르톨리 (DG 1997년)
A Hymn for the World/ 로마 산타 체칠리아/터벨,보첼리,바르톨리 (DG 1998년)
포레 레퀴엠,뒤리플레 레퀴엠/ 로마 산타 체칠리아/ 터펠,보첼리 (DG 1998년) - Classical Brit Award
체칠리아 & 브린/ 로마 산타 체칠리아 (DG 1998년)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 교향곡 1번/ 아시아 필하모닉 (DG 1998년)
Sacred Arias / 안드레아 보첼리 (필립스 1999년)
루이스 바칼로프 미사 탱고 & 탱고세인,피아졸라 리베르 탱고/ 로마 산타 체칠리아 (DG 1999년)
베르디 4편의 성가,아베 마리아 etc/ 로마 산타 체칠리아 (DG 2000년)
메시앙 협곡에서 별들에게/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G 2001년)
드보르작 현악 & 관악을 위한 세레나데/ 빈 필하모닉 (DG 2001년)
뒤티외 바이올린,첼로 협주곡/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르노 카퓌숑, 트룰스 뫼르크 (Virgin 2001년)
이탈리아 서곡집/ 로마 산타 체칠리아 (DG 2001년)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 슈만 피아노 협주곡/ 마르타 아르헤리치 (France DG 2001년)
말러 교향곡 1번/ 로마 산타체칠리아 (MUSICOM 2001년)
프랑스 아리아/ 런던 심포니/ 벤 헤프너 (DG 2001년)
메시앙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G 2001년) - German Record Critics Prize
브람스 교향곡 2번,라벨 피아노 협주곡/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세드릭 티베르기엥 (EXTON 2002년)
베토벤 교향곡 전곡/ 도쿄 필하모닉 (IMX 2002~2003년)
베토벤 교향곡 5번/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France DG 2002년)
말러 교향곡 4번/ 로마 산타체칠리아/ 조수미 (MUSICOM 2002년)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G 2004년)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사야카 쇼지 (Japan DG 2005년)
드뷔시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ECCA 2005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시카고 심포니 (CSO Resound 2006년)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다이신 카시모토 (SONY 2006년)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IDIER JEUNESSE 2006년)
베를리오즈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ECCA 2007년)
라벨 어미거위,볼레로,쿠프랭의 무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France DG 2007년)
브람스 2중 협주곡/ 구스타프 말러 유스/ 르노 카퓌숑,고티에 카퓌숑 (Virgin 2007년)
루토스와프스키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ECCA 2007년)
메시앙 그리하여 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소망한다,성찬식을 위한 찬송가 etc/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ECCA 2008년)
메시앙 천국의 색채,신의 현존에 대한 3개의 작은 기도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DG 2008년)
바르톡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NAIVE 2008년)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연광철 (SONY 2009년)
드뷔시 바다,라벨 라발스,라벨 어미거위/ 서울시향 (DG 2010년)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서울시향 (DG 2010년)
말러 교향곡 1번/ 서울시향 (DG 2010년)
브람스 교향곡 4번/ 체코 필하모닉 (EXTON 2011년)
차이코프스키 보칼리제, 교향곡 6번 비창/ 서울시향 (DG 2011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서울시향 (DG 2012년)
베토벤 교향곡 5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서울시향/ 김선욱 (DG 2013년)
피아노 소품집 (ECM 2013년)
베르디 오텔로/ 라 페니체 (C Major 2013년)
진은숙 생황,첼로,피아노 협주곡/ 서울시향 (DG 2014년)
말러 교향곡 9번/ 서울시향 (DG 2014년)
말러 교향곡 5번/ 서울시향 (DG 2015년)

4.4 스케줄

2013년 스케줄 [1]
2014년 스케줄 [2]
2015년 스케줄 [3]
2016~2017년 스케줄 [4]

5 그 외

  • 2000년에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National de France) 음악 감독에 내정되어 일본 투어까지 다녀온 상태였으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단원들의 요청으로 후자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차기 음악감독 선출 과정에서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만장일치 투표 소식이 정명훈의 마음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취임 당시 몇몇 단원들이 감사의 뜻으로 애국가를 연주하는 모습이 프랑스 텔레비젼을 통해 방영되기도 하였다.
  •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에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향 예술 감독직을 제의받은 인연으로 고려대학교의 음악대학 설립 계획에 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다른 음대/음악원의 견제와 정치적 문제, 재정난 등으로 인해 사실상 무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정명훈의 정치적 행보를 의심하는 이들이 종종 떡밥으로 들고 나와 까기도 한다.
  •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그를 모델로 한 "정명환"이라는 지휘자도 있었다. 극 중 강마에의 라이벌 캐릭. 재미있는 점은 실제 정명훈은 강마에와 더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오래 거주한 탓에 해당 국가의 요리들을 좋아한다고 하며, 특히 피렌체 시절부터 맛들인 이탈리아 요리의 열광적인 팬이라고 한다. 단순히 음식을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텃밭을 가꾸고 요리까지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동아일보 출판부에서 직접 이탈리아 요리 레시피가 중심이 된 요리책 '정명훈의 Dinner for 8'을 내기도 했다.
  •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엘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에 따르면 리카르도 샤이,리카르도 무티,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법정 최고액 개런티(30,000유로)를 받는다고 한다. 이탈리아 국내에서만 이 정도고 해외에서는 더 많은 개런티를 받는다고 후술 되었다.
  • 16세때 구입 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여태까지 써오다가, 최근에서야 오스트리아의 명기 뵈젠도르퍼(Bösendorfer, MODEL 290 Imperial)피아노를 구입했다고 한다.
  • 오래 전부터 60대 이후에는 책임지는 직책을 맡지 않고 교육 활동에 매진할 것이며 마음 맞는 오케스트라와 객원만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쳐 왔다.

6 도덕성 논란

6.1 국립 오페라합창단 사건

국립 오페라 합창단 집단 해고와 관련해 해고 철회 운동에 지지를 호소하러 온 사람들의 청을 거절한데다가 직접 관련도 없는 최근 촛불시위 관련 발언으로,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 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서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 (이하 생략) 까지 해버렸다는 내용을 진보계 인사 목수정이 자신의 블로그에 까발리면서 여론의 질타를 당했다.

당시 국립 오페라 합창단은 신임 유인촌 문화부 장관 취임 이후 예산 절감을 이유로 해체가 결정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산 절감을 이유로 국립 오페라 합창단을 해체했지만 정작 오페라단 전체 예산은 더 늘었다. 물론 오페라단 예산이 늘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합창단 운영을 유지해야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합창단 운영에 우선하는 분야가 있을 수도 있다.

해체로 인해 졸지에 실업자가 된 오페라 합창단 단원들은 각계에 해체 반대 지지서명을 받는 중이었다. 이들은 정명훈이 2003년 자신들과 함께 까르멘 공연을 하고나서 프랑스에도 없는 최고의 합창단이라며 극찬으로 립서비스를 했었다는 이유로 명망있던 정명훈에게 꼭 지지서명을 받길 원했고 정명훈의 형을 통해 지지서명을 요청했다. 당시 이들을 돕던 진보신당에선 파리지부 당원인 목수정 등을 보내 정명훈에게 서명을 직접 요청한 것이다.

과거 정명훈은 사회당 정권이던 미테랑 대통령 시절,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 임명되어 좌파로 분류되기도 했었고 1994년 보수당이 집권하며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자 소송을 걸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해고 취소 판결을 받아냈었다. 이 때,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노조는 정명훈을 위해 부당해고 반대서명을 해준 적도 있었고 이는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때문에 목수정 일행은 정명훈이 지지서명 정도는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참고로, 정명훈이 처음 노조에게 요청한 건 파업이었는데 노조는 평상시 그와 사이가 나빴던 탓에 큰 표차로 파업을 부결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지휘자의 활동은 대체로 연주자의 노조 활동과 부딪히기 마련이고 특히 노조의 활동이 가장 잘 보장된 프랑스에서 숱한 파업을 겪은 정명훈은 노조에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단원들에게는 "당신들 지금처럼 파업하면 한국에선 감옥에 간다."라고 했다. 이 때도 서울시향 개편 문제로 노조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서울시향에 그를 임명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등 대체로 친정부적인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지지서명을 거부하고 서명을 요청하던 목수정 일행과 언쟁을 벌였다.

이에 대해, 여론은 목수정이 새벽 1시에 일면식도 없던 정명훈을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가서는 경호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말싸움까지 벌이고는 오히려 정명훈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한다는 식으로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많았다. 같은 진보계로 분류되던 진중권까지 목수정을 비판을 강하게 하면서 목수정에게도 많은 비난이 가해졌으며, 심지어 진보계의 전여옥으로 불리기도 했다. 기사를 내보낸 신문사인 레디앙 측은 목수정이 상처를 입었다며 덧글란을 폐쇄하는 이후 조금 다른 형태로 재현되는 졸렬함을 보여줬다.

참세상에 올라온 목수정의 반론에 의하면 그들은 정명훈의 비서와 사전약속을 해서 낮에 찾아갔고 비서를 통해 불어로 된 서명운동 용지를 전해주고 아침에 받아가기로 한 뒤, 한글로 된 문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다시 인쇄한 용지를 들고 호텔로 찾아갔는데 마침 호텔로비에 손님과 함께 있던 정명훈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정명훈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것이고 한참동안 언성을 높인 것은 정명훈 혼자였고 자신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대꾸한 것 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정명훈 측의 해명이 없기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써는 이는 목수정의 주장일 뿐이다. 목수정의 그간 행동에 비추어 볼 때 신뢰도는 떨어진다.

실제로, 정명훈과 목수정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은 쇠고기 문제나 아프리카 사람을 돕느니 하는 것이 아니다.

정명훈은 서명 거부 때, "그 사람들이 서명을 해서 구제해줘야 할만큼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이냐?"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클래식 음악하면 막연하게 대우받고 귀족적일거라 생각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생계를 이어가야만 하는 음악인들도 매우 많다. 2001년 기준으로 국내 최고대우를 받고 있던 KBS 교향악단 단원 평균 연봉이 2500만원 선이었고 2005년 서울시향 수석연주자 연봉이 3500만원 선이었다. 이 단원들은 명문음대 출신에다 유학까지 갔다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한국정서 상 유달리 문화예술계에서 노조를 세운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어서 호응도 많이 받지 못하는 편이다. 유럽은 말할것도 없고, 미국조차도 악단이나 오페라 단원들이 고용조건 등으로 인해 파업을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드라마 작가들도 노조를 구성하고 있어 이들이 파업할 경우는 아예 드라마 자체가 못 나오는 경우도 많다.

목수정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 역시 생계를 가진 생활인이고,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연대를 해야하고, 사회적 약자인 개개인들은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이들을 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한국의 공립 관현악단들에 입단하는 것은 고시 소리를 들을 만큼 어렵지만 그 뒤에는 철밥통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발전을 게을리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명훈이 KBS 교향악단을 4달만에 사퇴의 형식으로 해임된 것은 오디션을 둘러싼 악단원과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KBS 교향악단은 드미트리 키타옌코 퇴임 이후 끊임없이 악단 운영과 관련된 잡음이 터져나왔고, 키타옌코의 후임으로 부임한 함신익도 창단 이래 최악의 내분 상황에서 불명예 퇴진하고 악단도 KBS와 계속된 불화 끝에 재단법인체로 독립해 재출발할 때까지 수많은 공연 취소와 그로 인한 비판 여론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결과, 한 때는 독보적인 국내 원톱이던 위상은 크게 떨어져서 서울시향에 완전히 역전당한 상태다.

서울시향의 경우에도 취임 후에 철저한 경쟁체제로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정명훈이 경쟁과 실력을 강조하는 것은 상임지휘자로서 당연한 업무집행인 것이다. 그러나, 고시 소리 들을 정도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온 인재들이 자기 개발을 소홀히 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적절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사용자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다.

위에서 문제가 된 사안은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평가 제도 등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도 아니고, 그야말로 합창단을 해체하여 근로자 전원을 해고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갈등 상황이다. 이를 그저 "실력이 부족하면 해고에 대한 반론권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회사 실적이 안나온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리해고가 가능하다고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명훈이 책임자도 아니고 실력이 있음에도 해고된 거냐는 뉘앙스로 되물은 정명훈이 정리해고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실, 이 문제에서 정명훈은 개입할 근거가 없는 외부자인 상황이다.

6.2 고액연봉과 항공권 등 논란

많은 언론에서 고액연봉(10년동안 14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과 이런저런 가쉽거리기사들이 많이 나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를 찬양하는 이들은 정명훈급정도의 커리어와 실력을 가진 지휘자는 세계에 20명도 채 되지 않을것이며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이 아닌 변방 중의 변방인 아시아권에서 활동하려면 그정도 금액으로는 택도 없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그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통역이라든지, 사소한 협조인원들까지 필요하긴 하다. 금액으로 표현하면 최소 2배이상의 금액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다. 그들은 연주자들과의 연봉차이 역시 연주자들의 연봉이 적은것이 문제이지, 정명훈의 연봉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연봉을 적게 받는다고 주장한다. 실력있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베를린필 등등)의 단원들의 경우 보통 연봉이 1억정도 된다고 하니.

#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 코너에서 정명훈의 고액 연봉 논란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그를 찬양하는 이들은 조수미와 차범근과 같이 실력으로서 외국에서 인정받지만 국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서울시향이 정명훈이 지휘를 한 후로 실력이 향상되었으며, 아직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되기에는 먼길인데 이제 와서 정명훈을 해고한다면 이제까지의 투자를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라 주장한다.

정명훈만한 커리어를 가진 지휘자를 여럿 골라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맞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일단 정명훈을 포기한다면 동급 지휘자라 해도 실질적으로 비용을 더 많이 들여야 데려올 수 있다고도 말한다. 물론 특정 지휘자(비록 음악감독(또는 예술감독)일지라도)에게만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오케스트라의 음악성이나 다양성면에서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전세계 어느 악단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하는 예는 없고, 오히려 실력있는 지휘자의 부임과 그의 주도적인 역할이 악단을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 더구나 오케스트라 연주에 필요한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뛰어난 연주 실력이며, 오히려 세계적인 수준의 여러 악단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소리와 특성을 높게 평가받는다.

또한, 정명훈 관련해서는 서울시향에 관련한 문제 즉 서울시향의 실력문제가 아닌 정명훈의 행동에 대한 서울시향 내의 각종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서울시 감사결과 정명훈에게 제기 되었던 각종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한다.기사 PD수첩 2015년 2월 10일 방송분 하지만 그 '의혹 사실'건에 대해서는 무리한 의혹 제기라는 반론이 있었고, 해외에도 이 사실이 소개되었다. 반론글 해외에 소개된 글의 번역본 게다가 정명훈이 사용한 항공권을 모두 감사한 결과, 지휘자가 정확한 행정절차를 잘 모른 탓에, 거꾸로 그에게 미지급된 항공권 금액이 엄청났다고 한다(...) #

그러나, 그것은 매니저에게 지급될 항공권이어서 그랬던 것인데, 가족을 매니저로 하는 꼼수를 썼으니, 가족이 그 고액 항공권의 혜택을 받을 수 밖에. 과연 그의 가족이 고액 항공권을 지급 받을 정도의 전문 매니저 였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해 봐야한다. 다시말해,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양심에 관한 주제이다.

게다가 2014년 사건의 경우, 그 발단은 어디까지나 단장의 인격모독적 행위였는데, 정작 정명훈 논란으로 또다시 비화되면서 단장의 문제는 슬쩍 묻혀버린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는 2014년 당시 정명훈 사태를 분석하면서 박현정 단장과 정명훈의 문제는 서울시향의 시스템에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시향의 권한과 책임이 일치가 되지 않은 문제가 박현정과 정명훈의 갈등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명훈과의 재계약 문제는 그의 '인간성' '정치성향' 보다 음악가로서의 성과로 평가해야함을 주장한다. 정명훈 취임 후 유료티켓이 38.9%에서 92.8%로 증가한 것, BBC Proms에 서울시향이 진출한 것,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플래티넘 2장과 골드 1장의 음반을 출시한 것[3] 또한 그가 부지휘자로 발탁한 성시연이 경기필하모닉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발탁된 것등을 들었다.

6.3 MOM을 통한 갑질

정명훈은 2009년 MOM(미라클오브뮤직)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한다. 무료 공연 등을 통해 기금을 마련해 청소년 음악 교육 및 환경 보존 활동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MOM 재능 기부자 가운데는 서울시향 단원이 상당수 포함돼 있고, 수익금이 전해진 알로이시아 오케스트라는 정 감독의 아들이 지휘자로 있는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서울시 감사관은 ‘미러클 오브 뮤직’에서 주최하는 ‘아시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APO) 공연에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시향단원들이 3년간 총 66명이 출연했다고 밝혔다. 당시 출연료를 기부하는 ‘재능기부’ 참여는 강제성은 없었지만, 정 감독이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갖는 절대적인 인사 권한을 고려할 때 진정한 자발적 참여였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게다가 출연료를 MOM에 기부해 "사업자경비"로 공제받는 수법으로 4년간 5억원을 절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법적으로 위법한 탈세는 아니지만, 사회공헌을 표방한 MOM을 이런 식으로 활용한 점이 음악인으로서, 내지는 세금을 받는 서울시향 지휘자로서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6.4 서울시향 단장 성추행 조작 사건과 부인의 연루

2016년 3월 2일, 성추행 파문의 경찰 수사결과가 발표되어, 박현정 단장이 직원들을 성추행했다는 직원들의 주장은 허위로 밝혀졌다. 이러한 허위 사실 유포에 가담한 직원 10명은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사건의 핵심은 구순열(정명훈 부인)의 지시로 이 조작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인데, 해외로 도망쳤기 때문에 기소중지로 경찰수사는 마무리 되었다.

정명훈은 2015년 12월 재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전격으로 사임한다. 사임까지 가게 된 발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2014년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의 성추행 파문을 직원들이 고발
2.2015년 박현정 대표의 성추행 조사가 무혐의로 판결됨
3.박현정 대표는 무혐의 판결 이후 성추행 고발 배후에는 정명훈과 정명훈의 아내가 있었다고 주장
4.2015년 12월 재계약을 앞뒀기에 다시 정명훈의 특혜관련 이슈들이 불거지며 진흙탕 싸움이 됨
5.실제로 정명훈의 아내가 서울시향 직원들에게 위증교사 및 증거인멸을 지시한 증거가 발각되며 입건됨#
6.위증교사에 대한 법적 책임이 불거지자 정명훈이 사퇴
7. 박현정, 정명훈 부부 명예훼손으로 고소. 정명훈도 명예훼손으로 맞고소

정명훈에 대해 계속 우호적인 평론을 써왔던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2015년 12월 정명훈이 사임과 관련하여서도 계속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레브레히트는 정명훈의 사임이 정명훈과 박현정 서울시향 단장간의 파워게임에서 빚어진 정치적 문제라고 분석하였다. 기사 그리고 Death of Seoul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기사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계약을 상실할 것이고[4], 정명훈의 사임이 특별히 정치적 싸움으로 이뤄진 사임이기에 앞으로 저명한 지휘자와 계약하기 힘들 것이며, 외국인 단원의 탈퇴와 더불어 전체적인 오케스트라의 퀄리티가 하락할 것을 우려하였다. 레브레히트는 음악 평론가로서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이룬 성과가 순식간에 잊혀지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명하기도 했다.

월간 객석의 류태형 전 편집장은 해외에서는 정명훈의 사임이 정치적 파워 게임이라고 보고 있다는 인터뷰를 했는데 이는 레브레히트의 기사를 레퍼런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정명훈의 사임이 음악적 성과와 이슈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시향 행정직원들의 인권문제로 시작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결국 사퇴로 이어지게 된 결과에 관해서는 정명훈측에서도 논란들이 불거질때마다 보다 대중들과 소통을 하고 해명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지적하며 정명훈측의 미흡한 대응에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은 특혜나 음악성이나 정치적 분란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위증교사 때문이다. 미국 국적의 정명훈의 아내 구순열 씨는 현재 위증교사 혐의로 입건된 상태이며, 1년간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보도가 처음 나왔을 2015년만 해도 서울시향은 정명훈과 재계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조사 결과가 모두 나오기 전에 서둘러 사퇴하고 출국하는 모습은 정명훈의 꼬리자르기 혹은 법적 책임 회피로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박현정(54)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와 서울시향 단원들 간 폭언ㆍ성추행 공방에서 경찰이 박 전 대표 손을 들어줬다. 경찰은 특히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 부인 구모씨가 직원들과 박 전 대표 퇴진 문제를 논의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안전과는 박 전 대표와 관련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로 서울시향 직원 곽모(40)씨 등 10명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3일 밝혔다. 또 정 전 감독 부인 구씨가 직원들에게 허위사실을 유포하라고 지시한 정황을 포착, 해외에 체류 중인 구씨를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2016년 3월 29일, PD수첩이 이와 관련한 보도를 했다.
  1. 둘째아들이 가수 신예원과 결혼하였다.
  2. 1975년 10월 23일 카네기 홀에서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이 해적반으로 나왔다.#Myung-When
  3. 물론 서울시 자체에서 구입한 것이 많기에 세계적인 레이블에서 내놓은 자체를 업적으로 평가하자고 말한다.
  4. 2016년 예정된 말러 교향곡 6번 연주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앨범으로 출시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