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먀스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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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먀스콥스키(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ясковский, Nikolai Yakovlevich Myaskovsky). 러시아(소련)의 작곡가.

1881.4.20(율리우스력으로는 4월 8일)~1950.8.8

1 생애

당시 러시아령이었고, 지금은 폴란드 땅인 노보게오르기옙스크에서 러시아군 공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뜬 뒤에는 주로 고모인 옐리콘다의 집에서 자랐고, 옐리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오페라단의 전속 가수가 되자 같이 따라갔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바이올린 교습을 받으면서 일찍부터 음악에 입문했지만, 음악가가 되는 것에 자신이 없었는지 아버지처럼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병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재학 중이던 189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온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한 차이콥스키교향곡 6번을 듣고 작곡가가 되겠다고 뜻을 굳혔다.

다만 이미 등록한 사관학교 교육도 포기하기 아까웠는지, 일단 1902년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모스크바 근교의 부대에서 복무하면서 틈틈이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다. 글리에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소개서를 써주었고, 1906년에 입학해 아나톨리 랴도프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다.

음악원 재학 중에는 자신보다 10년 가까이 어렸고 마찬가지로 글리에르에게 배웠던 프로코피에프와 친교를 쌓으면서 곡도 같이 쓰고 랴도프에 대한 뒷담화도 같이 까는 등(...) 잘 어울렸고,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이 수업 시대에는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나 차이콥스키 같은 선배들 외에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전위적인 음악을 써냈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강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11년에 음악원을 졸업한 뒤 모교의 강사와 음악비평가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에프의 신작을 옹호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공병 장교로 다시 징집되었고, 오스트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전투신경증으로 인해 후방인 탈린으로 옮겨 해군 요새의 축성에 참가했다.

이 기간 동안 다른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와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시기의 혼란을 겪었는데, 아버지가 황제군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붉은 군대에게 끔살당하고 고모의 죽음과 고모부의 자살을 접하는 등 정신적으로 수많은 시련을 당했다. 이후 소련이 성립되면서 소련군으로 개편된 붉은 군대로 옮겨가 1921년에 전역했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어 모스크바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교적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축에 속하는 소련 작곡가들 중에서는 특히 교향곡 등 기악 음악의 작곡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생애 마지막까지 27곡을 남겨 소련-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교향곡을 작곡한 인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1930년대 중반 쇠돌이 아저씨에 의해 시작된 대숙청 속에서도 보수적인 음악 성향 때문인지 별 화를 입지 않고 넘어갔지만,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 계획을 찬양하는 시를 소재로 하거나 최고 권력자에 대한 찬양을 담은 관현악곡과 노래를 작곡하며 소련 정권이 내세운 사회주의 사실주의 사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시베리아로 피난해 그 지방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작곡했고, 1차대전 시기 때처럼 전쟁의 참화를 표현한 곡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7년에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소련 음악계의 숙청에 휘말렸고,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같은 여타 작곡가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다굴을 당했다.

이러한 공적인 공격 외에도 암으로 인해 건강도 쇠약 일로를 걷고 있었고, 1950년에 마지막 현악 4중주를 작곡한 뒤 투병하다가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주요 작품들

2.1 교향곡

  • 교향곡 제1번 C단조 (1908, 1921 개정)
  • 교향곡 제2번 C샤프단조 (1911)
  • 교향곡 제3번 A단조 (1914)
  • 교향곡 제4번 E단조(1918)
  • 교향곡 제5번 D장조 (1919)
  • 교향곡 제6번 E플랫단조(1923)
  • 교향곡 제7번 B단조 (1922)
  • 교향곡 제8번 A장조 (1925)
  • 교향곡 제9번 E단조 (1927)
  • 교향곡 제10번 F단조 (1927)
  • 교향곡 제11번 B플랫단조(1932)
  • 교향곡 제12번 G단조 '10월 교향곡' (1932)
  • 교향곡 제13번 B플랫단조 (1933)
  • 교향곡 제14번 C장조 (1933)
  • 교향곡 제15번 D단조 (1934)
  • 교향곡 제16번 F장조(1934)
  • 교향곡 제17번 G샤프단조 (1937)
  • 교향곡 제18번 C장조 (1937)
  • 교향곡 제19번 E플랫장조 (1939. 취주악단용 작품)
  • 교향곡 제20번 E장조 (1940)
  • 교향곡 제21번 F샤프단조 (1940)
  • 교향곡 제22번 B단조 '교향 담시' (1941)
  • 교향곡 제23번 A단조 (또는 카바르다니아 주제에 의한 교향 모음곡. 1941)
  • 교향곡 제24번 F단조 (1943)
  • 교향곡 제25번 D플랫장조 (1946, 1949 개정)
  • 교향곡 제26번 C장조 '러시아 주제들에 의한 교향곡' (1948)
  • 교향곡 제27번 C단조 (1949)
  • (소관현악을 위한) 소교향곡 제1번 A장조 (1911)
  • (현악 합주를 위한) 소교향곡 제2번 B단조 (1929)
  • (현악 합주를 위한) 소교향곡 제3번 A단조 (1946)

2.2 관현악곡

  • 교향시 '침묵' (1910)
  • 교향시 '알라스토르' (1913)
  • 소관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E플랫장조 (1929)
  • 경례 서곡 (1939) 흑역사
  • 슬라브 광시곡 (1946)
  • 감상적 서곡 (1947)
  • 소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스망 (1948)

2.3 협주곡

  •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바순,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서정 소협주곡 G장조 (1929)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1938)
  • 첼로 협주곡 C단조 (1944)

2.4 취주악

  • 두 개의 행진곡 (1941)
  • 극적 서곡 (1942)

2.5 실내악

  • 현악 4중주 제1번 A단조 (1929~30)
  • 현악 4중주 제2번 C단조 (1930)
  • 현악 4중주 제3번 D단조 (1930. 1910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현악 4중주 제4번 F단조 (1930. 1911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현악 4중주 제5번 E단조 (1938~39)
  • 현악 4중주 제6번 G단조 (1939~40)
  • 현악 4중주 제7번 F장조 (1941)
  • 현악 4중주 제8번 F샤프단조 (1942)
  • 현악 4중주 제9번 D단조 (1943)
  • 현악 4중주 제10번 F장조 (1945. 1907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현악 4중주 제11번 E플랫장조 (1945)
  • 현악 4중주 제12번 G장조 (1947)
  • 현악 4중주 제13번 A단조 (1950)

2.6 독주곡

  • 첼로 소나타 제1번 D장조 (1911, 1935 개정)
  • 바이올린 소나타 F장조 (1946~47)
  • 첼로 소나타 제2번 A단조 (1948)

2.7 피아노곡

  • 피아노 소나타 제1번 D단조 (1907)
  • 모음곡 '추억' (1907~08, 1927 개정)
  • 피아노 소나타 제2번 F샤프단조 (1912)
  • 피아노 소나타 제3번 C단조 (1920, 1939 개정)
  • 피아노 소나타 제4번 C단조 (1924, 1945 개정)
  • 피아노 소나티나 E단조 (1941)
  • 피아노 소나타 제5번 B장조 (1944. 1907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피아노 소나타 제6번 A플랫장조 (1944, 초기 습작을 개정한 작품)
  • 모음곡 '폴리포니 스케치' (1947)
  • 피아노 소나타 제7번 C장조 (1948)
  • 피아노 소나타 제8번 D단조 (1949)
  • 피아노 소나타 제9번 F장조 (1949)

3 수상 경력

  • 레닌훈장 (수훈 연도 불명)
  • 소련 인민예술가 (1946)
  • 국가 스탈린상 예술 부문 5회 (1941 1급, 1946 1급 2회, 1950 2급, 1951 1급)

4 창작 성향

젊었을 적에는 나름대로 당대 음악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현대적인 음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점차 보수화되어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 같은 정통 기악곡을 위주로 다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페라발레도 안쓰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도만 하고 제대로 완성하지 않은 채 스케치나 단편만 남겼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작곡가가 된 것은 당시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소련 사회가 보수적/억압적인 분위기로 돌아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교직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학생들에게 고전적인 이론 교육을 오랜 시간 했기 때문에 교육자로서의 성향이 작곡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창작 성향이야 어쨌건 소련 시기 가장 부지런했던 작곡가라는 평에는 변함이 없고, 특히 27곡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교향곡 같은 경우에는 웬만한 용자 지휘자나 관현악단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전곡 연주한다는 소리를 못할 정도다.[1] 하지만 되려 이러한 양적인 면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보수적인 다작가라는 멍에를 아직도 짊어지고 있기도 하다.

5 사생활

젊었을 적부터 전쟁과 혁명, 친족들의 잇따른 죽음 같은 수많은 우환을 당했기 때문인지,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을 많이 탔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도 평생 하지 않은 마법사독신남이었고, 말년에 가서도 평범한 노인의 모습 속에 자연스레 권위를 갖춘 인물로 비춰졌다.

하지만 스탈린 집권 후 전위적인 음악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많은 되도 않는 전문 용어를 남발하는 정치꾼들에게는 확실히 혐오감을 느꼈는지, 지인들에게 편지 등을 통해 돌려까기도 했고 자신이 말년에 병든 몸으로 즈다노프 등에게 직접 먹잇감이 되었을 때도 은근히 그들의 관료주의적인 비판 행태를 비꼬기도 했다.

교육가로서 남긴 업적도 작곡가 못잖게 중요한데, 하차투리안과 드미트리 카발렙스키, 로디온 쉐드린, 비사리온 셰발린, 보리스 차이콥스키, 안드레이 에슈파이 등 1930년대 이후 소련 음악계에서 이름난 많은 작곡가들이 먀스콥스키의 문하를 거쳐갔다.
  1. 이미 세기를 넘긴 2013년 현재까지도 먀스콥스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유일한 지휘자는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