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로버트 오펜하이머에서 넘어옴)

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년 4월 22일 ~ 1967년 2월 18일
320px-Robert_Oppenheimer_1946.jpg

1 개요

미국의 핵물리학자.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였다.[1]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으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하게 되고 이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는 미국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몇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요구를 거부해 결국 핵무기가 실전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었기에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전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다.

2 인생

2.1 어린시절

뉴욕에서 부유한 독일계 유대인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양복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 시기는 기성복이 태동하는 시기로 사업이 승승장구해 오펜하이머 가족은 상당한 갑부였다.

부모의 엄청난 교육 열정 아래서 자라났는데,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뉴욕 에티컬 컬쳐 스쿨의 자유롭고 탐구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 오펜하이머의 취미는 광물들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머리도 좋고(iq160) 교육환경도 최상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무리없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들어갔다. 대학교 시절 매년 남들보다 1.5배 더 많은 학점을 땄는데, 이렇게 해서 4년제 학사과정을 3년만에 졸업하게 된다. 성적도 나쁘지 않아 입학때부터 졸업때까지 최우수성적을 받는다.

학과공부뿐만 아니라 언어공부도 열심이어서 독일어프랑스어에 매우 유창하게 되었고 유창한 독일어능력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어의 경우엔 1주일 만에 공부해서 강의할 정도였다. [2] 또한 산스크리트어도 취미로 공부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힌두원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2.2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이후의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그다지 과학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였으며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에 비해 한수 아래로 평가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하버드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간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러더퍼드보어로 대표되는 영국의 실험물리학 전통은 그와 잘 안맞았고, 그는 신경쇠약 및 우울증에 걸렸으며 지도교수를 독살하려 하는 등[3]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2.3 괴팅겐 대학교 시절

그는 영국을 떠나 독일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겼고, 이곳은 당시 이론적인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의 유창한 독일어가 크게 도움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우울한 영국에서는 적응이 불가능했지만, 이론적인 면만을 다루는 괴팅겐에서는 물만난 물고기처럼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괴팅겐 대학교 시절의 오펜하이머는 굉장히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는데, 강의가 마음에 안들면 교수를 끌어내리고 자기가 교단에 서서 수업하곤 했다. 그래서 괴팅겐 대학의 대다수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오펜하이머의 초기생애라 볼 수 있는 케임브리지 시절과 괴팅겐 시절은 그의 정신이 상당히 불안정했던 시기라 볼 수 있는데 미국에서의 교수직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끝내면서 그의 성격은 과거에 비해 대단히 냉철하고 차분해지며 수많은 인원을 이끄는 리더쉽과 통솔력,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2.4 미국에서의 교수직과 좌파적 성향

그는 귀국하여 미국에 양자역학을 도입했다. 이어서 칼텍과 UC버클리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물리학의 대가가 된다. 이렇게 20대에 명교수가 되었고, 30대에는 세계적인 양자역학 및 소립자물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공황 시절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카시즘 시절 그가 크게 곤욕을 치르는 원인이 된다.

2.5 맨해튼 프로젝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자 이 거대한 군사작전에서는 군인들을 다루는 장군이 아닌 과학자들을 총괄할 수 있는 뛰어난 학자를 필요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이 작전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일 것이라 생각해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던 장군인 레슬리 그로브스에게 자신이 벅찰정도로 원자폭탄 일을 맡고 싶다는 것을 어필한다.

그의 진실한 심경에 넘어간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를 과학부문 총책임자로 임명하는데, 과거 오펜하이머가 좌익정치인들에게 거액의 기금을 기부한 바 있고 비록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원인 물리학자 친구들을 여럿 두었기에 미군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사권은 그로브스 담당이라서 이는 수월히 처리된다.

맨해튼 계획이 군계획이었기 때문에 당시 형식적으로 중령 계급을 받았다. 그는 한번도 관리업무를 맡은 바가 없었으나 이를 훌륭히 완성하고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며 수천 명의 과학자가 동원된 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결국 미국은 이들이 개발한 원폭으로 일본 제국을 항복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끝낸다.

그래서 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1950년부터 '셰이크 다운' 또는 '오프 태클'이라는 소련 공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진한 미국의 핵폭격기들이 소련의 곳곳에 400에서 600개의 핵폭탄을 투여하는 제3차 대전 시나리오이다. 결국 이 계획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 번 미국의 핵 정책에 경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이 개발되기에 이른다.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제조에 반대하였다가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다. 미국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므로, 미국 정부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킬 목적으로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건'[4]을 때마침 일어난 광신적인 매카시즘 속에서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빨갱이몰리고 쫓겨나게 된다.

후로는 정보접근 권한을 잃어버려서, 미국이 실시한 최대의 원폭 시험인 1954년 비키니 환초 핵실험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 친구 핵물리학자에게 '그냥 숫자 하나만'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15'라고 대답해줬다고... 하지만 그로써는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5]

그가 남긴 말 중 의미심장한 게 있다.

"If the radiance of a thousand suns were to burst at once into the sky, that would be like the splendor of the mighty one...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수천 개의 태양의 휘황찬란함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이는 전능한 자의 광채와도 같으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The Bhagavad Gita(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 11장 12절과 32절(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부분)의 변형
당시 발언을 녹화한 기록

그가 이 말을 인용해서 읊은 직후, 그의 동료 케네스 베인브리지(Kenneth Bainbridge)는 더욱 직설적으로 자신의 후회감을 표현했다. 그가 말하길,

"From 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
(이제 우린 다 개새끼가 됐어.) 희대의 패드립퍼 강아지는 천재과학자를 낳는다고 한다
-이 말은 게임 Braid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그가 생각했던대로, 그의 첫 핵폭탄 트리니티(Trinity, 삼위일체)가 터진 이후, 인간은 자신을 멸망시킬 수 있는 위대한 생물이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까딱 잘못하면 핵전쟁으로 한순간에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비록 심각한 부작용의 우려 때문에 달갑지는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강대국간의 전면전쟁을 수십년간 대단히 성공적으로 억제해왔다. 어쩌면 개틀링 박사의 이상이었던 "인간들이 무시무시한 병기를 손에 쥐면 무서워서 안 싸우겠지!"를 이룬 건 오펜하이머일지도 모르겠다.

물리학 이외에도 예술이나 문학 쪽에도 조예를 가졌는데, 어릴 적에 출판사에 보낸 편지를 너무 잘 써서 어른으로 착각당했던 일화가 있다. 일생동안 시를 쓰는걸 좋아했으며 미술품들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 "나의 탁월함이 두렵다네."라고 한 걸 보면 자뻑도 상당했던 걸로 보인다. 사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는 '야 나 멋지지 않냐' 수준의 농담이다. 물리학자 폴 디랙[6]은 오펜하이머가 시를 쓴다는 소리를 듣더니 "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물리학은 그 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둘은 병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반면 굉장히 부드럽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심하다 못해 오히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고 (본인이 매우 뛰어남에도) 친구들의 성취를 보며 초조해하고 심지어 열등감에 다른 친구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맨해튼 계획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본인의 물리학적 능력 역시 상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저런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열등감은 나중에 극복했고, 세심한 배려를 가진 성격이었다. 매우 반항적인 젊은 천재 리처드 파인만은 원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와 아내의 관계를 읽은 오펜하이머가 친절하게 매주 휴가를 주고, 병원 치료까지 제시해 줘서 그에 감동한 파인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오펜하이머를 위해 맨해튼 계획 참가를 결정했다. 괜히 미국 정부에서 그에게 계획의 책임자 자리를 맡긴 게 아니다.

엄청난 애연가인 덕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담배핵무기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냥 애연가 수준이 아니라 보기 드문 헤비스모커였다고 한다. 담배 파이프나 꽁초가 입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워낙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아서 이미 30대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는데,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충고를 씹고 그냥 계속 담배를 물고 살았다. 젊은 시절에 뉴멕시코로 놀러 갔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허기가 져서 몹시 지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파이프를 권했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고는 그때부터 헤비스모커가 되었다고.

이 사람과 대비되는 소련측 인물이 이고르 쿠르차토프이다. 마치 세르게이 코롤료프베르너 폰 브라운의 라이벌 구도처럼 쿠르차토프와 오펜하이머도 비슷한 라이벌이었으며, 후에 반핵운동에 동참한것도 똑같다.

이 인물에 대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7]가 있는데 무려 1,000페이지가 넘으며 실제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최형섭 교수(번역 당시에는 교수가 아니었다)가 한글로 번역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여 번역에만 수년 걸렸다고.

무한도전 정 총무가 쏜다 특집에서 하하가 이 책을 고르며 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하는 단순히 두껍고 비싸보여서 정준하의 계산을 헷갈리게 할 목적으로 고른건데, 내용도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고른 직후에 멘붕(...) 후에 2011년 3월 13일 무한도전 "정총무의 책책책 책을 좀 읽읍시다" 편에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름만으로 원고지 3장(600자) 중 4~5줄(80자~100자)을 채우고, 오펜하이머의 아버지가 부자여서 많이 사줬을 것 같아 좋겠다거나 명문 대학을 간 게 부럽다고 하는 등 [8] 엉망인 독후감을 써서 큰웃음 빅재미를 준다. 하하가 독후감을 쓰던 중에 한 말인 "등장인물이 1000명정도 되나 봐..."도 명언이다. 당연하지만 한 인물의 평전이라 그의 주위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이 언급되다보니 생기는 일.

그가 남긴 말들은 다음과 같다.(출처: 위키쿼트)

I can't think that it would be terrible of me to say — and it is occasionally true — that I need physics more than friends.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내가 끔찍한 사람이 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가끔은 사실이더라고.) 나에겐 친구보다 물리학이 더 필요해.)
-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1912년 8월 14일 ~ 1985년 2월 3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If atomic bombs are to be added as new weapons to the arsenals of a warring world, or to the arsenals of the nations preparing for war, then the time will come when mankind will curse the names of Los Alamos and Hiroshima. The people of this world must unite or they will perish.
((전략)전쟁을 준비하는 국가, 혹은 전쟁"중"인 세계의 무기고에 원자폭탄이 신무기로써 추가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하는 날이 올 겁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반드시 결합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죽을 테니까요.(후략))
- 1945년 11월 16일, 육군과 해군이 (2차대전에서의) "우수함"을 시상하는 자리에서 상을 받을 때 연설하며.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우리는 과거의 세계로 돌이킬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일부는 웃고, 일부는 울었으며,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 트리니티 핵무기 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이 유명한 문구는 린킨 파크의 네 번째 앨범 A Thousand Suns의 수록곡 The Radiance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질라(2014)코믹콘 티저 예고편(소음주의)에서는 일부 구절이 인용되어 나왔다. 원작의 고지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적절한 원작반영의 일환인 듯.

3 여담

그가 일본에의 핵무기 투하 후 죄책감을 가지고 핵무기에 반대했다는 것 때문에 와패니즈혐한일빠로 오해를 받기도 했고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이런 잘못된 지식이 실린 책도 몇몇 있었다는데 일례로 오펜하이머가 "한국은 죄없는 일본 시민들이 죽어나간 덕에 이익을 챙길 수 있었는데 고마운줄도 미안한 줄도 몰라요" 라는 등의 일본을 감싸주고 한국을 경시하는 말을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카더라도 있다.[9] 하지만 정작 오펜하이머 박사는 그런 의향이 전혀 없었으며 이건 오펜하이머에 대한 고인드립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그에게 일본 옹호 성향이나 혐한감정은 존재치도 않았다. 정확히는 승리할 때 잔인한 방법을 써서 전승했다는 점과, 진짜 나쁜 놈들인 일본 지도층은 안 죽고 무고한 시민들만 죽은 것[10] 때문에 핵개발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이지 일본을 옹호하기 때문에 핵을 반대한 게 아니다. 오히려 핵개발 시 일본의 횡포를 막고 전쟁과 학살을 막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으로 핵개발에 동참했으며, 개발과정에서 핵실험 이후 대형 핵무기로 대량살상하기보다 전술적 소형 핵무기로 일본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자는 의견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또한 전후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물러난 이후 핵 반대 운동을 펼칠 때도, 대형 핵무기를 써서 이기는 게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기는 것을 원한 것이지 일본한테 핵맞았다고 위로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본에도 얼마 정도의 죄책감은 느꼈겠지만 일본의 악행까지 부정하진 않았다. 다시 말하겠지만 오펜하이머 박사는 더럼 스티븐스 같은 혐한 서양인이 아니다.

또한 국내의 몇몇 책에서는 오펜하이머가 핵폭탄 투하에 죄책감을 가진 것 때문에 사형을 당했다는 근거없는 헛소문을 그대로 실어놓은 경우도 있는데, 저긴 소련이나 일본제국이 아닌 미국이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의 메인화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통해 그의 계정에 접근할 수 있다. 단 CIA 서버가 아닌 Dreamland라는 서버에 계정이 있으므로 rlogin dreamland 명령어를 통해 로그인해야 한다. ID는 roppen. 패스워드는 trinity 나치 좀비 모드의 배경 스토리에 관련된 파일들을 열람할 수 있다.

폴아웃 4에선 DLC 파 하버를 진행할 때 동료 중 한 명인 닉 발렌타인과 가게 되는데 동행 중 원자교단의 본거지인 중핵(The Nucleus)에 있는 핵잠수함의 미사일을 터뜨릴 때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을 읊는다.

  1. 맨해튼 계획에는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의 거의 외계인급 두뇌들이 총집결해 있었다. 당시 영/미/캐나다/(옛)독일계 S급 과학기술자들을 모두 긁어모은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2. 물론 네덜란드어는 영어, 독일어와 매우 가까운 편이다.
  3. 교수의 책상에 독이 든 독사과를 올려놓았다.
  4. 소련이 원폭개발에 성공한 후 미국은 수소폭탄 개발계획을 서두르는데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다수의 물리학자들은 대량학살무기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한다. 그로인해 오펜하이머는 미국정부의 눈밖에 났고 비밀청문회의 서류가 분실된 것을 빌미로 노골적인 공격을 받게된다.
  5. 3월 1일 폭발의 규모가 15메가톤이었다.
  6. 정말 거의 물리, 수학밖에 모르고 그 부작용으로 사회성이 거의 바닥을 달리는 수준의 사람이다.... 그래도 강의는 잘했다고
  7. 신개념의 에너지인 핵을 완성한 오펜하이머를,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한 제목.
  8.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하하의 독후감 중간에 나온다. 그냥 졸업한 정도가 아니라 하버드 화학과를 3년 만에 summa cum laude(최고 성적)를 받으며 졸업. 게다가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나와서는 최정상급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점이 더 무섭다.
  9. 물론 한국의 경우 일본이 핵을 맞은 덕에 광복을 맞을 수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핵무기 투하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일본옹호나 반민족적인 태도로 오해받을 수 있으며 다른 핵전쟁에 대해선 반대하더라도 일본이 핵을 맞은 거에 대해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현재는 북쪽 반국가단체뚱뚱이 독재자가 핵을 계속 만지작 거리기 때문에 오펜하이머 박사의 반핵의견에 대해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앞서 말한 카더라같이 오펜하이머박사가 일본을 옹호하고 한국을 경시한다는 잘못된 내용의 문헌이나 책이 있다면 유저들의 추가바람.
  10. 일본 제국을 이끌고 한국 등을 식민지로 만든 건 일본 지도층들이었다. 물론 일반 일본 시민들이 한국인들을 차별하고 함부로 대했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일반 일본인들까지 죽어도 싸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건 일본 정부에서 국가 차원으로 한국인들을 2등 국민이나 노예 등으로 일본 시민들에게 각인 시킨 원인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