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미스 활동시절
2015년경 모습
1 개요
영국 인디 음악의 영원한 아이콘
영국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모 아니면 도다. 나를 사랑하거나, 버스 밑에 깔리길 바라거나. 중간은 없다.
Morrissey. 영어권의 발음과 국내 외국어 표기법 모두 모리세이가 아닌 '모리시'이다. 핫뮤직과 같은 잡지를 통해 퍼진 잘못된 표기법으로 이후 본국의 발음이 확인된 이후 정정되었지만 아직도 이 표기법이 많이 퍼져있어 내한공연에까지 쓰였으나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이다. 본명은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Steven Patrick Morrissey)이다.[1]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이다. 소년같은 외모와 사춘기적 감성을 한 몸에 걸친 특유의 가사와 감수성으로 더 스미스 시절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았다.
2 더 스미스 이전
1959년 5월 22일에 영국 맨체스터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비원이였고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다. 당시 영국에서 발생한 청소년 연쇄살인사건인 무어스 사건[2]의 발생 장소가 모리시의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나이가 비슷했던 모리시는 유년 시절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보내야 했다.[3] 그래서 근시가 생겨 안경을 종종 썼는데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조니 마가 처음 그의 방에 갔을 때 한 방에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 8살때는 처녀시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 후 스미스의 데뷔 앨범 The Smiths에서 무어스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곡인 Suffer Little Children을 수록하였는데, 가사에 당시 희생당했던 아이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기재했다는 이유로 언론과 유가족들의 비난을 받았고 유가족들이 소송까지 걸게 된다. 하지만 모리시의 성장 배경과 곡을 들어본 유가족들이 추모의 의미를 담은 가사라는걸 깨닫고 소송을 취하했으며 오히려 언론에서 비난받는 모리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원래 맨체스터는 다소 거친 노동자 계급 문화를 가졌던 곳으로 유명한데, 모리시는 유년 시절 집에만 틀여박혀 있었던터라 거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엄격했던 모리시의 집안 또한 그에게 조그마한 일탈도 허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모리시는 현재까지도 극단적인 채식주의[4]로 대표되는 절제된 생활[5] 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때문인지 그는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고있다고 한다.[6]청소년기에 느낀 이러한 비참함은 그의 음악적 원천이 되었으며 모리시의 생명 존중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때 주로 듣던 음악은 샹그리라같은 60년대 걸그룹의 음악들과 뉴욕 돌스[7], 데이빗 보위등이 었다고 한다.
이 당시 친하게 지냈던 소수의 친구들 중 하나가 펑크 록커이자 유명 비주얼 아티스트 린더 스털링이다. 데뷔전이었지만 매드체스터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팩토리 레코드와 하시엔다 클럽의 사장인 토니 윌슨과도 가까웠다. 하지만 팩토리 레코드는 스미스와 계약하진 않았다.[8] 윌슨이 죽기전까지는 서로 신경을 긁어대는 이상한 우정(?)을 유지했는데, 윌슨은 생전에 그를 부를 때 일부러 모리시가 싫어하는 본명인 '스티븐'이라고 불렀다. 그외에 제임스의 팀 부스, 더 컬트의 빌리 더피[9] 등과 친했으나 린더를 제외하곤 누구와의 우정도 오래가진 못했다. 여담으로 이렇게 맨체스터 토박임에도 맨체스터 특유의 악센트를 안쓰고 포쉬한 악센트를 쓴다. 아무도 이유를 몰라서 그의 미스테리 중 하나이지만 모리시가 맨체스터 악센트를 쓰는건 그거대로 안 어울리지 않겠냐는 게 중론(...)
모리시가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음악 잡지에 각종 글을 기고하며 방구석폐인의 나날을 보내던 1982년 어느날 조니 마가 기타를 들고 모리시의 집 현관에 서있었다. 그는 모리시에게 밴드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 밴드가 더 스미스다.
한편 모리시의 이러한 스미스 이전 삶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제목은 모리시의 퍼스트 네임인 <Steven>.
3 더 스미스
해당 항목 참조.
4 솔로 활동
스미스의 갑작스런 해체 이후, 모리시는 1년 가까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운둔하였다.[10] 이런 그를 본 스미스의 프로듀서였던 스티븐 스트릿이 모리시의 집으로 곡을 들고 찾아와 격려하였고 모리시는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허나 조니 마라는 든든한 조력자 없는 그의 솔로 활동은 꽤 불안정했다. 프로듀서가 자주 바뀐 데다가 음악적 성향도 들쭉날쭉거렸다. 1988년에 내놓은 첫 솔로 음반 Viva Hate는 스미스 후광[11]에 괜찮은 퀄리티로 호평을 받았다. 매니저에게서 첫 솔로 앨범이 차트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리시는 또 잠적해버렸다. 그 다음 작품 Kill Uncle은 흑역사급의 굴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다행히 데이빗 보위[12]의 지기 스타더스트 시절에 같이 작업했던 기타리스트인 믹 론슨으로 프로듀서를 교체하고 발표한 1992년 작 《Your Arsenal》, 1994년 작 《Vauxhall and I》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허나 1995년부터 불거진 스미스 멤버들과의 소송의 트라우마 때문에 또 나락에 떨어져 결국 소송이 끝난 1997년 이후 7년동안 음악 활동을 완전히 중지했다.
헐리우드로 이주 후 발표한 2004년 작 《You Are the Quarry》[13]가 대박을 치면서 '역시 모리시'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에 탄력을 받은건지 2006년과 2009년에도 앨범을 냈다. 미국의 촉망받는 사진작가 라이언 맥긴리가 이 때 2년간 투어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2007년에 모리시를 주제로 한 <Irregular Regulars>라는 전시회를 열었다.[14] 모리시는 2009년 이후에는 공연만 다니고 활동이 뜸하다가 2013년 11월에 라이브 앨범 & DVD/BD인《Morrissey 25 Live》를 발표했고, 무려 펭귄클래식을 통해 자서전을 발표했다. 클래식이 아닌 원고를 클래식 라인으로 출간한다는 것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펭귄클래식의 명성을 흐리게하는 눈먼 결정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펭귄 편집장이 스미스 팬일줄이야 근데 현 영국 총리도 스미스 팬이다[15] 이 일에 대해 펭귄북스 측은 "모리시가 자서전을 쓴 과정(인생) 자체가 클래식입니다 (중략) 대부분의 전설들은 죽어야 그 자리에 오르는데 모리시는 살아 있는 동안 그 자리에 올랐으니까"라고 밝혔다. 2014년 7월 앨범《World Peace Is None Of Your Business》[16]를 발매했다.
그런데, 2014년 중순 갑자기 미국 투어를 취소하고 10월에는 스페인 언론 엘 문도(El Mundo)를 통해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If i die, i die"라고 발언했다. 또, 2014년 초에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2012년에는 55살이 되는 2년 뒤에 은퇴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7] 현재 은퇴 발언은 번복한 상태이다.
2015년 9월에 소설 "List of the Lost"를 출간했다. 평은 영 좋지 않은 편. 가디언지의 Michael Hann은 아예 대놓고 읽지 밀라고하기도 했으며 The Daily Beast의 Nico Hines는 책 내 여성에 대한 묘사를 두고 "괴상한 여성혐오 산책'이라고 깠다. 이 비판에는 동반자NME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소설을 두고 "혼란스럽고 종종 민망한 섹스의 조금 당황스러운 슬랩과 클리셰, 괴상하고 과장된 대화"라고 칭하기도 했다..
2016년에 슈프림과 콜라보레이션 티셔츠를 냈다. 이 일과 관련해서도 잡음이 많았다. 슈프림이 티셔츠에 넣기 위해 찍은 모리시의 사진은 출시전까지 극비로 부치기로 합의가 되었는데, 모리시의 조카[18]가 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바람에 슈프림은 모리시에게 사진을 다시 찍자고 제의를 했다. 그런데 모리시는 슈프림이 패스트푸드전문점을 스폰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고 전에 작업한것도 출시하지 말라고 했다. 양측간에 공방이 오갔으나 슈프림은 그냥 배째라는 식으로 처음 작업한 사진을 가지고 티셔츠를 발매했다. 불티나게 팔리는중.
그의 경력에 보다 상세한 설명은 You Are the Quarry 앨범 라이센스 버전에 수록된 성문영의 애정을 담은 상세한 해설도 참조바란다.
4.1 2012년 내한공연
2012년 5월 6일 멜론AX홀에서 내한 공연이 열렸다. 한국내 인지도 때문에 비슷한 시기 노엘 갤러거의 내한공연이 티켓 판매 오픈 2분만에 매진된 반면 암표 가격도 정가 절반 시세에 형성되었다. 아 잠시 눈물좀 닦고공연장에도 영국인 등 유럽인과 북미인들이 절반이었다. 공연에서 다른 멤버들은 영국 왕실을 까는 티셔츠를 입었고[19] 스미스 시절 곡인 Meat is Murder에서는 각종 가축의 짝짓기 영상을 보여주는 등[20] 섬나라의 기상을 은근히 잘 보여주었다. [21]
간간히 앞줄 관객들과 손을 잡아주면서 중간에는 셔츠를 벗어서 관객에게 던져주고 마지막에는 한 팬의 현수막을 허리에 껴입는 팬서비스까지 보여주었다. 링크 반면 1시간 15분에 그친 공연 시간이나 멘트 부족은 아쉬움을 남겼다. 의사소통이 안될 것이라고 속단한 것일까? 그가 원래 적극적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무대매너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건 이제까지의 공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22] 팬들의 갈증을 풀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모리시는 당시의 도도한 태도와는 다르게 그 해 돌았던 투어의 베스트5에 서울 공연을 넣었다(!)그는 자기가 다니는 공연의 점수를 매긴다(...)
5 논란
5.1 인종주의?
음악 경력 전반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인종주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언론들은 더 스미스 시절의 곡 Panic 가사와 흑인음악 혐오 성향과 결부시켜 모리시를 인종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심지어는 기자가 대놓고 '당신은 인종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을 한 일도 있었다.[23] 2010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내 동물 학대 실상을 비난하며 중국인을 아종(subspecies)[24]으로 지칭했다. 2011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 공연에서 Meat is Murder를 부르기 전에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학살은 맥도날드와 KFC가 자행하는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발언을 했다. 또 2012년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바베큐 굽는 냄새가 나자 공연중이던 모리시는 "바베큐 냄새가 나는데...그게 사람고기였으면 좋겠군."이라고 발언해 큰 물의를 빚었다.인종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채식 탈레반 같다
5.2 영부심
더 스미스 시절부터 모리시는 '영국성'이라는 요소를 무척 강조했다[25]. 그는 팝 음악의 근원인 흑인 음악의 요소를 배제하고 백인/영국적인 요소를 도입하려고 했으며[26], 음악 외적인 행동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 예로 잡지 인터뷰에서 펑크 록을 '세계가 영국을 따르려고 했던 사건'이라고 설명했으며 그것을 보고 '안도했다'라 말했다. 게다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 미국 투어 역시 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미스는 활동 당시 영국 내에서만 인기를 얻었고 미국에선 '뭐임 이 듣보잡들?'정도의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 지금이야 모리시 한정으로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지만.[27]
정확히는 미국 자체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중반에 있었던 디스코 열풍으로 대표되는 상업적인 흑인 문화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곡이 더 스미스 시절의 곡인 'Panic'.'[28] 가사 후렴구에 디스코는 불태워버려! 그걸 튼 DJ는 교수형에 처하자.(Burn down the Disco, Hang the blessed DJ.)란 내용이 나온다. 모리시에게 인종주의자란 낙인이 찍힌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곡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사의 내용은 디스코 폭파의 밤을 인종차별적 사건이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기존 디스코 그룹의 상업적인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모리시와 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도하던 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비극적인 내용의 보도가 끝나자마자 DJ가 왬의 신나는 'I'm Your Man'을 틀자 느낀 기분을 가사로 옮긴 것 뿐이라고. 실제로 가사가 논란이 되자 조니 마는 "그럼 뉴 오더에는 흑인이 있냐?"라 따지기도 했다. 당시 뉴 오더와 스미스는 경쟁 상태였고 모리시는 조이 디비전은 이안 커티스가 죽은 후광으로 뜬 밴드라고까지 했다.[29]모리시 인성수준 물론 지금은 모리시도 뉴 오더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많이 하고 있고 조니 마는 아예 90년대 후반, 버나드 섬너와 같이 일렉트로닉이라는 듀오를 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밴드 매드니스의 재결합 공연에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들고 나타나 비난을 받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매드니스는 유독 스킨헤드팬이 많은 밴드였다. 따라서 그 날 공연에도 앞자리에 스킨헤드족들이 열광하고 있었는데 게스트로 나온 모리시가 유니온 잭을 몸에 걸치고 나왔으니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쓴 격으로 필요이상의 오해와 비난을 사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매드니스 재결합은 그냥 묻혀버렸다(...) 스미스 시절부터 의도했든 아니든 영국 언론과 대중들의 사랑과 비난을 한몸에 받아왔던 그이기에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헐리우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30]
그러나 상술한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지성과 감성, 카리스마로 논란을 상쇄하는 인기 또한 늘 그를 따라다닌 것이 사실이다. 여러모로 문제적 인물이자 희대의 아이콘. 어그로끄는 스킬이 남다르다.
5.3 사생활
더 스미스 시절부터 모리시의 사생활은 큰 논란이 되어왔다. 더 스미스와 솔로앨범의 가사와 앨범커버등 컨셉들은 노골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었다. 80년대 당시에는 모리시는 자신은 섹스를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정의했다.[31] 무성애자란 말을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
그러나 모리시는 무성애자이며 동정이라는 주장은 철회[32]하고 2013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남자와 여자 몇 몇과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고백했다. 팝 역사상 오래된 떡밥이 해결된셈. 언론이 이 일을 가지고 모리시의 전 남자친구[33]를 괴롭혔기 때문에, 모리시는 미국판 자서전에서는 이 내용을 삭제했다.
여전히 독신이긴하다. 이란계 여자친구를 만날 때 아이를 가질 것을 상의했지만 실현되진 않았다.[34]앞으로도 그럴듯.- ↑ 보면 알겠지만, 뮤지션이 자신의 성(姓)을 예명으로 쓰는 흔치 않은 케이스이다. 이와 비슷한 이름을 지닌 뮤지션은 리쌍의 길이 있다. 82년 스미스를 결성하자마자 모리시는 본래 이름인 '스티븐'을 버리고 모리시로 살기로 결심한다. '스티븐'이란 이름이 너무 지루해서 그랬다는 설이 있고, 누구에게도 친근하게 불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다. 조니 마가 이때부터는 그를 '모즈'(Moz), '모저'(Mozzer)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게 그의 지금까지의 애칭이 되었다.
- ↑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안 브래디와 마이라 힌들리가 맨체스터에 살던 청소년 5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사건. 일부 희생자들의 시신이 남부 잉글랜드의 새들워스 무어에서 발견되어 무어스 사건이라고 이름붙여졌다.
- ↑ 그러나 의외로 모리시는 육상에 재능이 있어서 많은 수상을 했는데 뛰는 것을 싫어해서 그만두었다. 맨체스터의 기타리스트 비니 라일리에 의하면 레슬링도 잘하고 힘도 세다고. 사람들이 모리시에게 갖는 편견들이 재밌다고 덧붙였다.
- ↑ 비건계 채식주의자로 육식을 혐오한다. 스미스의 두번째 정규앨범 Meat Is Murder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참고로 콤비였던 조니 마도 비건계 채식주의자.
- ↑ "I don't eat anything that has burped or ran or swam so it has to be something really quite dry and lifeless and exotic. Rather like me." (난 뛰어다녔거나 헤엄쳐다녔던 것은 먹지 않는다. 내가 먹는 건 완전히 무감하고 생명이 없는 것이라야 한다. 마치 나처럼.)
- ↑ 소수의 친구들에게 유머감각과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대부분의 맨체스터 사람들에게는 '그 모퉁이에 사는 정신이 좀 이상한 스티븐(Steven the Nutter)'이라고 불렸다고(...)
- ↑ 그는 뉴욕돌스의 엄청난 팬으로 뉴욕돌스 영국 팬클럽 회장이었다(...) 본인이 만들었다. 여기서 뉴욕돌스 팬진도 썼는데 조니 마가 이것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2006년에 뉴욕돌스 재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도 모리시
- ↑ 언젠가 윌슨은 모리시가 쓴 희곡 습작을 읽고 이상한 집착이 생겼고 그를 'Our Dostoevsky'라고 불렀다. 모리시는 19살 때 그에게 '전 팝스타가 될거에요'라고 선언했는데 윌슨은 그가 작가가 될 줄 알았기 때문에 황당했다고. 몇 해 뒤 스미스가 데모테잎을 가지고 그를 찾아갔을 땐 비웃으면서 깠다(...)
- ↑ 그가 1978년에 조니 마를 모리시에게 처음 소개시켜주었다.
- ↑ 모리시는 스미스가 그에겐 엄청난 정서적 투자였고 서약이었는데 조니 마가 갑자기 '모든게 끝났다'라고 선언했다고
- ↑ 사실 이 앨범 자체가 조니 마의 작곡스타일을 영리하게 카피한 것이다(!)
- ↑ 데이빗 보위는 모리시의 한 때 우상이었고 보위도 모리시의 노래인 'I know it's gonna happen someday'를 커버하는 등 90년대 초반에 얼마간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그런데 보위가 90년대에 유럽투어를 할 때, 모리시가 오프닝가수로 투어 중 전 공연에 같이 참여하기로 약속했는데 모리시가 두세번의 공연 뒤 그만두어 사이가 멀어졌다. 모리시는 그 뒤에 보위를 'David Showie'라고 조롱하며 언론에 뒷담을 깠다.
모리시 인성수준 - ↑ 수록곡 자체는 02년도부터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린데이, SUM41, 블링크 182 앨범을 만든 프로듀서 제리 핀과 작업하면서 중후하면서도 탄력이 살아있는 앨범으로 환골탈태하였다. 이전까지는 자기복제라는 굴욕적인 평가가지 받았지만 탄력있는 사운드와 그 자신의 원숙미가 더해져서 잊혀지던 커리어가 반전한 셈.
- ↑ 여기서 모리시의 모습은 실루엣으로만 찍혀있는데 이것에 대해 맥긴리는 "모리시는 그의 노래처럼 무척 신비로운 사람이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온지라 아무도 그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느낌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모리시 이전에 그와 같이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사, 음악, 심지어는 무대 위에서의 몸짓까지도 온전하게 소유하고 있는 아티스트다."라고 작업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다.
- ↑ 데이비드 캐머런은 모리시를 'My Favorite Man'이라고 지칭하기도
- ↑ 아이러니한것은 모리시는 노벨 평화상 축하공연을 한 바 있다.
- ↑ 조니 마는 이 발언에 대해 "걔 절대 은퇴안할걸"이라고 예언했다
- ↑ 사진작가이자 모델로, 모리시의 'Suedehead'뮤직비디오 초반에 등장하는 꼬마가 이사람이다.
- ↑ 'We hate william and kate'란 문구가 적혀있었다.
- ↑ 수위가 높아 어떤 여성 관객들은 곡 연주 내내 고개를 돌렸다.
- ↑ 모리시는 Vegan계 채식주의자이다.
- ↑ 나이로 보나 음악으로 보나 어떤 때는 디너쇼 같기까지 하다. 물론 영어권 국가에선 멘트가 많다.
- ↑ 모리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 ↑ 즉 생물 분류학적으로 사람과 같은 종이지만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족속들이란 의미. 어떤 언론에서는 '하위인종'이라고 번역했는 데, 엄연한 오역이다. 인종을 뜻하는 영단어엔 종을 뜻하는 'species'가 전혀 없기 때문. 달리 말하자면 모리시는 중국인을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은 셈이다.
- ↑ 참고로 모리시는 아일랜드계이다. Irish Blood, English Heart라는 노래도 있다.
- ↑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인 조니 마는 모리시와는 반대로 흑인음악의 열렬한 팬이다. 이런 음악적 견해 차도 더 스미스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
- ↑ LA를 중심으로 모리시가 큰 인기를 얻고 난 뒤에는 그는 헐리우드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 ↑ 이 곡은 티렉스의 'Metal Guru'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당시 모리시는 그 곡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조니 마에게 이런 곡을 만들고 싶다고 했고 기타 브레이크도 'Metal Guru'에 쓰인것과 똑같은 걸 쓰기를 적극 바랐다. 마에 의하면 그래서 이 곡은 'Metal Guru'와 한 곡이나 다름 없다고.
- ↑ 사실 스미스는 조이디비전등이 속해있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이 성사될 뻔했는데 레코드 매니저인 롭 그레튼과 모리시가 큰 말다툼을 하게되어 무산되었다. 그때 그레튼은 "이안은 스스로 목이라도 맸어.(네 놈은 그런 깡이라도 있음?)"라는 식으로 얘기했고 또 사장인 토니 윌슨은 데모 테잎을 듣고 "이 버즈의 곡들은 이미 연주 되고 있는데?(=니네 음악 버즈랑 똑같음)"이라고 말했다. 그게 모리시의 신경을 건드렸다. 모리시는 그레튼을 한참 째려보다가 나가버렸다고 한다. 토니 윌슨의 생애를 다룬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이 윌슨에게 '네가 스미스와 계약안한건 잘못한일이다'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적 연출과는 다르게 토니 윌슨은 스미스와 계약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전에 밝혔다. 한편 최근 모리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조니 마가 도망가서 스미스가 해체되었을 때 윌슨은 모리시에게 "조니는 할 만큼 했어!"라고 했다고(...)
- ↑ 그런데 모리시가 10대시절 쓴 일기를 보면 '오늘 하루종일 눈만 치우고 있다. 눈이 정말 싫다. 그리고 눈도 나를 싫어한다. 따뜻한 LA같은데서 살고싶다'라는 내용도 있다(!)
- ↑ 조니 마의 증언에 따르면 '모리시는 섹스는 하지 않았어. 그런데 여자친구가 굉장히 많았고 남자친구도 몇 있었지(...)'라고
- ↑ 자신은 'Humansexual'이라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그게 몇 명 안돼서 그렇지' 라고 했다.
- ↑ 제이크 월터스라는 사진작가로 모리시와 오래 작업했다. 원래는 복스홀(Vauxhall)출신의 복서였다. 모리시의 앨범 <Vauxhall & I>나 노래 'Boxers'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은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산다(...)
- ↑ 스미스 시절에 폴란드인 여자친구를 사귄적도 있고, 중년이 되어서 불가리아인 여자친구를 사귄적도 있는걸로 보아 외국인 여자가 취향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