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세족

(부원배에서 넘어옴)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연합문벌귀족무신정권권문세족신진사대부


權門勢族(한자)

1 개요

고려시대의 문벌 귀족 가문으로, 간섭기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계를 장악한 족벌 세력. 권문세가(權門勢家)라고 부르기도 하며, 다른말로 부원배(附元輩)라고도 한다.

2 일반적으로 알려진 특징

무신정권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충렬왕대에 이르러 완전히 지배세력화 했다.
크게 나누면 ①구 문벌귀족 가문 ②무신정권 세력들 ③무신정권 이후 새로이 출세한 관료층 ④원과의 특수관계를 이용해서 출세한 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친원 세력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무신정권기 최우에 의해 설치된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잡고,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확대되자 이를 장악하여 국정 전반을 주도하였다.

고려 초의 문벌귀족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문벌귀족이 중첩된 혼인을 통해 귀족으로서 가문 자체의 권리를 누렸다면 권문세족은 관직 그 자체를 중시했다. 다만 '재상지종'이라고 하여,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가문을 규정할 정도로 혼인 관계를 여전히 중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권문세족의 토지 경영은 전형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부재지주, 즉 중앙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지방 토지를 관리하는 지주의 형태를 보여준다.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경영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어 농장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러하여 양민의 수가 적어들고 조세를 내야할 백성이 줄어 국가의 조세 수입이 감소, 나라의 재정이 궁핍해져 고려의 멸망에 일조했다.

3 반론

13 ~ 14세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권문세족이라는 세력 및 이들과 신진 사대부의 대립 구도에 대한 회의를 표하는 의견도 많아졌다. 굳이 그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문세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의견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일단 '권문세족'이라는 호칭에 대해서, 세족은 맞지만 권문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몇 대에 걸쳐서 관직을 장악한 주요한 집안은 있었지만, 이들이 원과 연계해서 중앙 권력을 독점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가 일고 있는 상태. '재상지종'이라는 것도 그냥 유력 가문에 가깝고, 파평 윤씨나 해주 최씨 같은 가문은 문벌귀족 시절부터 원래 잘 나가던 가문이었다. 권문세족을 규정하는 집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

오히려 이러한 논의 속에서는 고려의 국왕이 친원적이었다는 이야기까지도 나오고 있다. 주로 원에서부터 자신 혹은 왕비와 함께 한 환관과 시종 세력을 동원하여 국정에 투입했고, 필자적(비칙지) 등의 비정규 관료가 운용되었다. 정동행성과 만호부 등은 분명히 원의 간섭 기구였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어찌되었건 고려의 국왕이었고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오히려 세족 층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즉 '자주적 국왕이 원과 비자주적 친원 세력에게 죽어지내던 시대'라는 기존의 평가에 회의가 일고 있다는 얘기다.

직접 토지를 경작하지 않으면서 양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결국 그것이 중앙 재정의 궁핍으로 이어졌다는 서술은, 권문세족에게 보다 공격적으로 서술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이르는 양반의 생활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다만 양반은 직접 경작을 관리 감독하는 등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는 했다).

물론 양반과 뚜렷이 구분되는 권문세족의 문제점도 있다. 수조권이 몇 번씩이나 중첩되었으며(그것도 경기도만 수조지가 아닌, 전국이 수조지였던 고려시대의 일이다!) 유력 세도가들은 강과 산을 경계로 땅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인데, 따라서 토지 소유의 규모는 권문세족 쪽이 훨씬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이르는 토지 개혁론에 불을 지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애초에 무신정권기, 더 길게는 문벌 귀족의 집권기까지 올라가는 이야기이고, 소위 '신진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3세기부터 토지 소유 구조에 대한 개혁론은 활발해지고 있었다. 흔히 신돈의 개혁 기구로 알려진 전민변정도감은 이미 고려 원종 때부터 설치되어 7번에 걸쳐 존폐를 거듭했고, 녹과전을 지급하면서 수조권을 건드려 보려고 했던 것도 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조권 문제의 기본은 실질적으로 땅을 지급받을 수 있는 관료의 수보다 실제 관료의 수가 지나치게 팽창했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었다. 문신이란 문신은 죄다 썰어버린 무신정권 초기 이후 중앙 행정이 크게 위축되면서, 무신정권 후기부터는 문신을 다시 등용하는 한편 지방 세력을 위무하여 행정에 이용하거나 중앙에 끌어들이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13세기에 이르게 되면 다양한 지방 세력의 활발한 중앙 진출로 나타나며, 이것의 부작용으로 관료층이 오히려 비대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연히 '세족'들도 늘어나면서, 수조권 중첩이 더욱 폭증했다는 것이다.

권문세족에 대한 회의는 신진 사대부와 이들을 대비시켰을 때 더욱 뚜렷해진다. 우선 신진 사대부의 출신 계층은 대체로 ①무신정권 이후로 최우에 의해 등용된 신관료층('능문능리' 계층) ②지방 중소 지주, 향리 세력 등이 진출한 세력 ③기존 권문세족이 전환한 세력 등으로 설명되는데, 문제는 ①의 경우 권문세족과 출신 상 다를 바가 없고, ②의 경우 신진 사대부의 기반이 중소 지주층임을 확인할 길이 거의 없는 데다가 향리 세력의 경우 과거급제를 통해 권문세족으로도 활발히 진출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13세기까지, 권문세족과 사대부 세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논의가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게다가 13 ~ 14세기 초반까지 '신진 사대부의 효시'로 평가되었던 인물들도 상당수가 세족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박전지, 홍언박 등 이미 권문세족에서 갈라져 나온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들은 물론이요, 이제현, 안향, 백이정 등의 인물은 아예 원에서 수학하고 온 인물들이다. 대체 어느 중소 지주가 그나마 권문세족에게 침탈받는 재산을 기반으로 원나라에서 유학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러한 이들 중에는 원나라에서 관직에까지 오른 인물들이 있다. '친원 세력'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권문세족보다 오히려 나을 것이 없다는 얘기다.

흔히 신진 사대부는 과거를 중시했고, 권문세족은 음서를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권문세족 측에서도 오히려 과거에 많이 응시했다. [1]음서로 관직에 진출하고 과거에 합격해 관직 생활에서 입지를 펴 나가는 것이 대표적인 경로였다.
게다가 음서를 통하지 않고 처음부터 과거로 관직에 진출한 자들의 상당수 또한 권문세족이었다. 세족 집안의 출신 지역도 전기에는 개경 중심의 집안들이 많았던 반면, 후기에는 삼남 지방이 중심이 된다.

또 한가지 권문세족에 대한 편견 중의 하나가 권문세족은 유교적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과거시험 문과 합격자의 많은 수가 권문세족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연구 결과 정도전, 조준 등 조선 건국의 주요 인물들까지도 가문을 따지고 들어가니 '최소한 예전에는 한 가닥 했던 집안들'이 많았고, 존 던컨의 연구 결과 아예 조선 초기 관료들도 권문세족 집안 출신이 많았다. 14세기부터 이미 신진 사대부 집안과 권문세족이 활발하게 통혼하기도 했다. 즉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구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4 ~ 15세기 고려와 조선 사이의 격변을 폄훼할 이유는 없으며, 유학적 사고관에 따른 개혁론이 한반도에 큰 격변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일단 14세기부터 남부 지방에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여 과거 응시자의 하한선이 내려갔고, 13세기까지 혜심 등에 의해 주도되던 유교와 불교 사이의 타협론이 침몰하기 시작했으며, 과거에 대한 중시는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여기에 공민왕 대가 되면 성균관의 개혁이 마무리되어 이색, 정몽주 등의 인사가 과거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시대를 상징하는 좌주 - 문생 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까지는 권력을 지탱하던 요소들과 새로운 요소들이 어느 정도 융화되어 기존 세력과의 타협으로 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압력 정도만이 주어졌다면, 14세기 중엽부터는 그 압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중앙도 스스로 비대해지면서 그 중앙에서 얼마만큼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원명 교체와 홍건적, 왜구 등으로 인해 한반도가 받던 압력이 촉진제가 되었고, 마침내 요, 금, 원의 압력과 무신정권의 세파까지도 모두 이겨냈던 고려 왕조가 새로운 왕조로 재탄생하는 격변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포인트는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 친원과 반원의 이중 대립 구도를 지양하자는 것에 있다. 애초에 출신 성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고려-조선 교체기에 토지 문서를 싸그리 불태워 버리고 정도전은 국가의 평균적인 토지 분급을 주장할 정도로 사회상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며, 굳이 권문세족이 쓸려 나가야 신진 사대부가 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론들은 존 던컨 등이 주장하는 비교적 신흥 학설이며 아직 주류 학설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권문세족신진사대부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이 식민사관이 강조해온 정체성론으로 회귀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목적을 위해 역사적 관점을 끼워 맞출 수는 없지 않냐는 시각도 있다. 다만 존 던컨 교수는 정체성론은 부인한다고 밝히고 있다.

4 유명 권문세족 가문

4.1 재상지종 15개 가문

  • 경주 김씨 : 충렬왕의 외가. 김봉모-김태서-김약선, 김기손, 김경손-김혼 계열 / 김기손의 후손들은 전주 김씨로 분적하며 바로 이 전주 김씨 후손 중에 우리들이 매우 잘 아는 북쪽의 인물이 있다.
  • 안산 김씨 : 고려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의 가문. 그런데 그 위상이 김은부의 처가인 경원 이씨 가문으로 바톤 터치 되면서.. 다소 사그라든 위세--- 충렬왕-충숙왕 대에 활동한 김원상이 안산 김씨 가문이다.
  • 언양 김씨 : 아름답고 긴 수염으로 유명한 고려판 관운장 위열공 김취려의 후손들. 13세기 초 김취려 장군의 무공에 기반하여 대출세한 가문. 도은 이숭인의 외가가 언양 김문이기도 하다.
  • 여흥(황려) 민씨 : 무신정권기에 출세한 민영모의 가문이다. 과거 급제자가 엄청나게 많이 배출되었다. 이방원의 처가 가문이기도 하다. 고려 말기 듣보잡 수준 이하인 전주 이씨[2] 가문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안 되는 전통적인 고려의 대명문 가문이다.
  • 파평 윤씨 :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개국공신 윤신달의 가문. 고려 전기 문숙공 윤관 장군 이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명문 가문이다. 충렬왕 재상지종 발표 여러 해 후... 충혜왕의 부인 가운데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 있다. 즉 충정왕의 생모가 파평 윤씨이다.
  • 경원(인천, 인주) 이씨 : 매우 유명한 가문. 왜냐하면 역사 교과서에 절대로 안 빠지는 인물의 가문이다. 바로 이자겸... 고려 문종 이래 10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세 가문.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심도있게 연구한 가문이기도 하다. 세조의 장인 파평 윤문 윤번의 장인인 공도공 이문화가 경원 이씨 가문이다. 조선 왕실에도 세조의 아들 이후로 경원 이씨 가문의 피가 흐른다. 그 위력 포스가 정말 후덜덜하다.
  • 청주 이씨 : 현종 대 왕가도-이자림의 가문이다. 이자림은 황실의 성씨를 하사받은 인물로, 현종 묘정 배향공신이다. 덕종(현종의 아들)의 왕비가 배출된 가문이다.
  • 정안(장흥) 임씨 : 조선 연산군 대 임사홍의 풍천 임씨 가문과 한자 는 같지만 본관이 다르다. 무인시대 드라마에도 나온 공예태후 임씨의 가문이다. 고려 명종, 신종의 외가 이다.
  • 평양 조씨 : 몽골어에 능숙하여 출세한 조인규의 가문이다. 충선왕의 비가 배출되었다. 유명한 조준이 조인규의 증손자이다.
  • 횡천 조씨 : 무신정권 기에 출세한 조영인-조충 가문이다. 조충은 김취려 장군과 함께 거란 유종을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장군이다.
  • 평강 채씨 : 무신정권기 군인 채송년의 가문이다. 채홍철, 채하중 등이 배출된다. 정조 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이 가문 출신이다.
  • 철원(동주) 최씨 : 고려 전기 이미 문벌 귀족 가문으로 최유청의 출세로 급부상한 가문이다. 무신 정권기에도 번성했으며, 고려 말 무민공 최영 장군이 배출된 가문이다. 유명한 문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최남선이 철원 최씨 가문이다.
  • 해주 최씨 : 역사 교과서에 꼭 나오는 문헌공 최충-교육 관련해서 꼭 등장하는 가문이다. 이자겸의 처가가 해주 최씨 가문이다. 조선 시대 세종 대의 최만리, 왜란 시기 의병장 최경회 등이 해주 최씨 문중이다.
  • 공암(양천) 허씨 : 충렬왕 묘정 배향 공신 첨의중찬(오늘날 국무총리) 허공의 가문이다. 허공의 딸 순비 허씨(노책의 장모)는 충선왕과 재혼했다. 충선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 남양 홍씨 : 딱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홍규(홍문계)의 가문이다. 홍규는 원래 임연의 사위였다가, 1270년 거사 이후 재혼한 듯 하다. 홍규와 부인 광산 김씨 사이에서 명덕태후(공민왕의 생모)가 태어난다.

4.1.1 기존의 문벌 귀족 가문

  • 경원 이씨[3] : 이자연, 이자겸
  • 경주 김씨 : 김혼
  • 공암 허씨[4] : 허공
  • 안산 김씨 : 김원상
  • 정안 임씨[5] : 임의, 임원애, 공예태후
  • 철원 최씨[6] : 최영[7]
  • 청주 이씨 : 이자림-왕가도
  • 파평 윤씨 : 윤관, 윤언이, 윤인첨, 윤보, 윤선좌
  • 해주 최씨 : 최자, 최유엄

4.1.2 무신으로 인정받으면서 성장한 가문

  • 언양 김씨 : 김취려, 김희조
  • 평강 채씨 : 채송년, 채홍철

4.1.3 관인가문

  • 당성 홍씨[8] : 홍대순, 홍복원, 홍다구
  • 황려 민씨[9] : 민지
  • 횡천 조씨[10] : 조문간

4.1.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 평양 조씨 : 조인규, 조준

4.1.5 기타

  • 행주 기씨 : 원나라 황후가된 기황후, 그외 오빠 권문세족 수장 기철이다.

4.2 재상지종은 아니지만 유력한 가문

독립운동가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 서두에, 자신이 충렬공(김방경)의 직계 후손임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김사형, 김질, 김시민, 김응하, 김자점[12](...) 등이 바로 이 가문 출신이다.
  • 전의 이씨 : 이언충, 이혼
  • 칠원 윤씨 : 윤수, 윤환(여러 번 수상을 역임하심. 시호가 자그마치 충효 임. 충성과 효도를 겸비....)
  • 행주 기씨 : 기철
  • 해평 윤씨 : 윤석, 윤지표
  • 경주 이씨
  1. 음서의 경우 인원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 부모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모두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혜택을 못받은 나머지 자식들은 과거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2. 훗날 조선(대한제국)의 왕가/황가가 된다.
  3. 현재의 인천 이씨. 고려 시대 때 경원이 인주로 지명이 바뀌어서 인주 이씨로도 불렀다.
  4. 현재의 양천 허씨.
  5. 현재의 장흥 임씨.
  6. 현재의 동주 최씨.
  7.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그 최영 맞다.
  8. 현재의 남양 홍씨 당홍계(唐洪系). 사실 이쪽은 대원관계라고 봐야 된다.
  9. 현재의 여흥 민씨.
  10. 현재의 횡성 조씨.
  11. 현재의 구(舊) 안동 김씨.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를 한 신(新) 안동 김씨와는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가문이며 구 안동김씨는 김부의 아들 대에서 갈라져 나왔고 신 안동김씨는 고려 태조를 도운 안동의 호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12. 김자점이 조선 효종때 역모를 꾸미다 처형된 탓에 김자점 친척의 후손인 김구가 어릴 때 고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