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의 대(大)문장[1] | |
위치 | 사보이 지역 |
모토 | FERT[2] |
이후 | 사르데냐 왕국 |
1 개요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의 지방 이름 사보이.
현 사보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사보이 왕조는 11세기인 1032년 사보이 백작으로 서임된 움베르토 1세에 의해 창건되었다. 옆나라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혈통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행운이 있었으며, 그 덕에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조가 되었다. 창건 이후 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 걸친 독립 군주국으로 번영했으며, 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여러 세력들을 중재하며 실리를 추구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시칠리아 섬을 양도받는다. 그런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면서 사르데냐의 왕이었던 카를 6세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바꾸자고 제안하였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사르데냐 섬을 얻어 1720년 국호를 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사보이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명목상의 부르고뉴 왕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센을 획득해 프로이센 왕국으로 개칭한 브란덴부르크와도 비슷하게 사르데냐 왕국을 칭하게 된 것이다.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 제1제정의 나폴레옹에 의해 피에몬테를 잃었으나, 빈 회의에서 프랑스로부터 피에몬테를 되찾아 1814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Regno di Sardegna-Piemonte)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1831년에 사보이 본가의 대가 끊기고, 사보이-카리냐뇨 가문 출신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새 국왕이 되었다. 사보이 왕가는 이후 리소르지멘토의 중심이 되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을 받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세습한 2의 지역은 프랑스에게 넘겨준다.
사보이 왕조는 4대, 이탈리아를 통일한 지 85년 만인 1946년에 왕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46:54로 패하여 폐위되었다. 아울러 국왕 움베르토 2세와 그의 남자 직계후손들은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사실 높으신 분들에게는 아무래도 좋던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종가인 사보이까지 프랑스에 헌납해가며[3] 이탈리아를 위해 헌신했지만 무솔리니 한 번 잘못 찍어서 쫓겨난 비운의 왕가.
공화국 수립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한동안 인식이 좋지 못했다가 최근에 와서야 재평가되는 분위기이다. 1960년대 북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조반니노 구아레스키(1908~1968)의 유명한 연작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에도 이러한 세태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마을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는 할머니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메가톤 급 떡밥을 투척 "왕정 시절 국기를 자기 장례식에 써줄 것"을 자기 제자인 공산당 소속 읍장에게 당부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다.
2 역대 국왕 및 가문 수장
(이탈리아 통일 이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861-1878)
- 움베르토 1세 (1878-1900)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00-1946)
- 움베르토 2세 (1946)
(가문 수장)
- 움베르토 2세 (1946-1983)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세자 (1983-)
- 이 사람의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딸 둘만 두고 있어서, 남계가 절손될 가능성이 높다. 움베르토 1세 이후 계속 외아들로만 대가 이어진지라, 그 이후의 사보이 왕가 당주는 사보이-아오스타 가문에게로 가게 된다.
3 분가
- 사보이-제노바 공작가 - 카를로 알베르토의 차남 페르디난도 왕자를 시조로 하여 5대 165년(1831~1996) 동안 지속됨.
- 사보이-아오스타 공작가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 왕자[4]를 시조로 하여 1845년 창설. 5대째 지속되고 있다.
분가 사람들은 1946년 이후에도 국외추방을 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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