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atus Populusque Romanus(로마의 원로원과 인민들)
si fueris Romae, Romano vivito more.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로마에 가면, 로마 법에 따르라. [1]
로마를 수도로 하여 성립한 국가. 위의 표현은 로마의 모토인데[2] SPQR이라는 약칭으로도 사용된다. 보통 로마 제국(IMPERIVM ROMANVM)이라고 하지만 한때 공화정 체제인 적도 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건국부터 멸망까지 존속한 국가의 정식 명칭은 아니다. 그냥 '로마'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와 구분하기 위해 이 항목의 이름은 '고대 로마'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멸망을 5세기로 보는것은 15세기까지 존속한 비잔티움 제국을 무시한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이며, 따라서 '고대 로마'라는 명칭도 엄밀히 따지면 잘못되었다.[3] [4] |
BCE 753~CE 476(서로마 제국), CE 1453(동로마 제국)
목차
면적: 6,500,000㎢[5] [6]
인구: 56,800,000명 (AD 117)[7]
1 개요
서구 문명을 실질적으로 정의(定義)한 역사적 국가[8], 인류역사에 있어 큰 영향력을 남긴 국가.
유럽의 고대부터 중세까지 존재했던 제국. 처음에는 도시국가로 출발하더니 결국 세계 제국으로 발전한 덕분에 수도 이름 로마가 그대로 나라 이름이 되었다. 라틴족(로망)에 의해 건국된 도시지만, 건국과 동시에 타 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다민족 국가를 큰 규모의 제국으로 성립하는데 성공한 국가다. 다문화의 폐혜란 이상한 이론이 있으나, 로마 제국은 '민족'이란 이상한 개념에 국초부터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으며, 제정 이후의 로마는 더이상 '로마시에서 살고 유피테르를 숭배하며 라틴어를 쓰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가 아니었다. 국경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사방으로 뻗쳐져 있었고, 그에 따라 제국의 구성 민족도 라틴, 헬라스, 셈, 켈트, 게르만계 등등 어마어마하게 다양해졌다. 시대가 흐를수록 로마 제국의 정체성은 더이상 로마 시와 라틴 민족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디오클티아누스 대 이후로 행정 조직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로마시는 수도의 기능을 모두 상실했으며, 헤라클리우스 대 이후로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채택되면서 라틴 문화 역시 완전히 희석되어갔다. 엄연히 도시 로마에 사는 시민과 이탈리아인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이런 사고방식은 막센티우스의 실패로 인해 제국 전체에서 부정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이탈리아의 로마시와 라틴어가 로마 제국의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시각은, 민족주의적인 편향적 해석에 경도된 한국 대중의 편견에 불과. 일단,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의 역사까지 합치면 약 2000년간 유지된 초장수 국가다. 초기 왕정시대와 4차 십자군 이후를 제외해도 천년 제국이란 점에서 흠좀무. 1000년을 버틴 나라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황제의 계보와 라틴어, 판테온으로 대표되는 건축물, 법, 종교 등 수없이 많은 면에서 이후의 유럽 국가들에 대해 큰 영향을 주었고, 유럽의 당대 제국들의 이상향은 항상 로마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 당장 황제를 뜻하는 유럽 각국의 언어는 거의 대부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2 통치체계
처음에는 왕정으로 시작하였으나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이 되어 성장기를 맞았으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등장 이후 사실상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 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황제의 후계자가 실제 피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지만, 대개는 황제가 후계자를 양자로 삼고 계승하는 형식을 많이 취했다. 기본적으로 로마의 황제권은 '가문'에 귀속되는 '자산'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또한 양자도 가문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일부일처제에서 친자로만 부자 상속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확률적으로 보아 상당히 어렵다.
단, 동양에서 장자 상속 등으로 원칙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던 것과 달리 로마에서는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분명한 원칙을 세우지 않았다. 대체로 황제가 다음 황제를 지명하는 식.[9] 이러한 방식은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함으로써[10] 오현제 시대의 번영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현명한 사람'이 아닌 '힘이 있는 사람'이 제위를 계승하는 폐단을 낳았다. 또한 이로인해 황제의 '정통성'을 뒷받침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므로 제위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거나 계승한 황제가 함량미달인 경우 군 지휘관들이 제각기 황제를 자칭하는 혼란과 내전도 가져올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혼란의 시대가 훨씬 길었다(...). 이러한 제도상의 허점과 그에따른 혼란을 생각하면 로마 제국이 오랫동안 건실하게 유지된 것이 놀라울 정도.
아마도 그걸 보완할 정도의 법 제도나 시스템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의미도 될 듯하다. 실제로 로마가 완전 막장이 되기 전에는 함량 미달의 황제가 제위에 올라도 제국의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국의 제정에 비해 의외로 적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생에 직접 관계가 있는 조세 제도도, 로마는 지방 조세 행정에 국가가 거의 개입하지 못해서 황제의 역량에 따라 민생의 변화가 뚜렷하게 작용하지 못한 점도 있다.[11]
4황제 시대가 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이후 황제를 뜻하는 서양 각국의 단어가 로마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말의 변형인데 '엠퍼러(emperor)', '카이저(Kaiser)', '차르(Царь)' 등. 엠퍼러는 개선 장군의 의미를 가진 임페라토르(IMPERATOR에서 유래하였으며, 카이저나 차르는 관직명이 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어차피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꼭 집어넣었다. 원래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정당성 부여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나중에는 거의 황제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황제를 '카이사르(Caesar, 시저)'라고 부른다.
이러한 황제를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로마의 후계를 자처한 나라들이니 만큼 로마가 제국인 건 사실이다. 유럽에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기주체적으로 관습을 탈피하고 칭제하기 전까지 로마와 관계없는 그 누구도 황제를 내세우지 못했으며, 그 대영제국의 왕도 유럽 바깥에서 '인도의 황제' 자리를 얻어오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황제로 칭하지 못했다. 황제를 넷씩이나 둔 시대도 있었다고 하지만, '선임 황제'는 결국 어쨌든 어느 시기에서도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었다. 4황제 시대가 오히려 황제의 전제 권력이 강화되어 가던 시기였던 건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서구에서 제국의 개념은 로마에서 따온 것인데 로마가 제국이 아니라는 소리는 자기 모순일 뿐이다.
3 역사
이탈리아 반도의 듣보잡 소수 이주 왕국으로 시작하여 에트루리아인의 졸개 비스무리하게 지내다가, 힘을 길러 상전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켈트 등을 정복하며 결국 거의 전 유럽을 손에 넣었다.
체계화 되고 조직화된 전술과 무기 연구, 개발, 군복무를 시민의 명예로운 의무로 삼아 군 조직을 강화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막강했다.[12] 로마군 항목을 참조. 공학에서도 로마는 세계 최강이었다. 허나, 로마의 진정한 힘은 현재의 유럽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인 역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현재의 서양 법률은 그 기본은 로마의 법에 두고 있으며, 라틴어는 비록 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이들이 없지만, 여전히 각종 학술 용어로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13] 심지어 판타지 작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라틴어 마법의 주문은 서브컬처계에까지 미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대표하는 예라 하겠다.
3.1 왕정 시대
유럽의 역사 | |||||||
알바 롱가 왕국 | → | 로마 왕국 | → | 로마 공화국 |
로마 7왕 참조.
로마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라고 한다. 형제의 외가는 알바롱가의 왕가이며 아버지는 군신 마르스(또는 아레스)였고, 알바롱가의 왕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트로이 측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트로이가 망한 뒤 살아남은 두 트로이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 두 왕자가 그리스에 우호적이었던 것을 기억했던 그리스인들은 이 두 왕자를 이탈리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두 왕자 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였는데 그는 중부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이때 알바롱가라는 도시의 왕이었던 라티누스가 아이네이아스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은 뒤, 자신이 죽게 되자 왕좌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 왕위에 앉았다. 이후 프로카라는 왕이 사망했을때, 그의 아들들인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가 내분을 일으켰는데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내쫓은 뒤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를 결혼을 못하는 여사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레아 실비아의 미모에 반한 마르스(또는 아레스)가 그녀를 취해 레아 실비아는 두 쌍둥이를 낳게 되었고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분노한 알바롱가의 왕 아물리우스는 그 두 형제를 강가에 '노출'을 시켰다.[14] 그러던중, 그곳을 지나가던 어미 늑대가 형제를 발견하고 젖을 물림으로써 그들은 목숨을 구한다. 이윽고 두 형제를 양치기가 발견하여 두 형제를 자식으로 삼아 키웠는데 그 둘을 각각 로물루스, 레무스라고 이름 짓는다.
쌍둥이 형제는 장성하여 양치기 집단의 두목이 된다. 어느 날 왕위에서 쫒겨난 누미토르가 정착한 땅을 약탈하러 온 레무스를 생포하게 되는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누미토르는 이들이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게 되었고[15] 누미토르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의 원수 아물리우스를 죽이기로 하고,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궁전에 침입하여 아물리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누미토르는 아물리우스의 뒤를 이어 알바롱가의 왕이 되었으며,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이 정착할 도시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로마 시를 건설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753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와는 달리 고고학적으로는 난민들이 모여 살다가 점점 유입되어 도시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땅을 파 보자 로마에는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기원전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것이 로마인들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은 초가집과 같이 흙과 밀집을 엮은 텐트 같은 집에서 살았고 당시 이미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고 살고 있었던 동방의 도시들에 비하면 한줌밖에 안 되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거창한 신화와는 달리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가 보여준다.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마땅한 배필이 없자 로물루스가 꾀를 내어 사비니족의 가족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벌인 틈을 타 무방비가 된 사비니족 여자들을 보쌈해 배필로 삼아 버렸다는 신화다. 이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은 각 도시에서 흘러나온 부랑아, 난민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로마 시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건국 시점이 늦은 점, 또한 시의 발전이 강력한 집단의 조직적인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유입된 인구 증가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마는 7개 언덕이 있었는데 로마로 이주한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에서 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방어적인 측면에서 언덕 꼭대기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였고 로마인들도 그리한 것이었다.[16] 처음부터 7개 언덕에 이주한 것은 아니고 다른 부족을 통합하면서 그 부족에게 언덕을 하나씩 내 주게 된다.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 레무스 두 형제는 이후 로물루스가 경계를 침범한 레무스를 죽이고 나라를 통합하였다.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 야산 로마인으로 불리던 퀴리날레 로마인을 통합하였다. 이후 사비니족 등을 통합하였고 카피톨리노 언덕과 밸리안 언덕의 사이에 있던 늪지대의 물을 뺀 다음 땅을 다지고 그곳에 포룸 로마눔을 건설한다. 이 두 언덕은 로물루스, 레무스가 이주했다는 곳으로 이 두 언덕 사이에 있던 부족들이 가장 최고참이었으므로 이 두 언덕 사이의 땅에 이 포룸을 건설한 것이었다. 이 포룸 로마눔에선 모든 종류의 공직 할동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정착 생활을 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단이 그 시작이었기에 외부의 인재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고 그 때문에 그리스, 에트루리아인들의 많은 건축술과 정치 체계를 본뜬베낀다. 특히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로마인들은 이름 - 씨족 - 가문 이름으로 나뉜 작명 방식도 카피하게 되고 또한 건축술, 종교, 정치제도의 모든 면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을 따라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건국 이후 전투종족이라 싸움에는 강했던지 조금씩 주변 작은 마을들을 점령한 뒤 이들을 로마에 강제 이주 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를 불리게 된다. 그 결과 기원전 600년 즈음엔 인구가 3만명 정도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에 맞춰 로마는 세르비우스 성벽이라는 7개 언덕 전체를 두르는 커다란 성벽을 축성한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철거할 때까지 로마의 성벽이 된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부터 500년의 250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하였다고 보는데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당시 왕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7명의 왕 중 첫 번째는 로물루스였다.
왕은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해 일을 처리하였는데 원로원은 100개의 로마의 유력 부족의 수장들이 한데 모인 강력한 집단이었다. 이 원로원은 훗날 300명으로 구성된 로마 원로원의 모태가 된다.
5대 왕으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로마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혼혈인 에트루리아의 유력자였다.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본국의 지위 획득은 힘들다고 평가한 그는 로마로 건너와서 세계 최초로 선거 운동을 벌여서 왕에 이른다. 그런데 이후 7대까지의 왕이 모조리 에트루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지배한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로마가 특정 부족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의 화합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견해도 있다.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매우 유능한 왕으로 로마의 정치제도를 확립시키고 앞서 언급한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성한다.
7대 왕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라고 하는데 왕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인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으로, 원로원을 무시하고 자신 멋대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가 군사 원정을 하는 동안 그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가 이름답게 루크레치아라는 명문가 귀족의 안주인을 강간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의 발단은 루크레치아의 남편과 섹스투스가 누구의 부인이 더 예쁜가 내기를 하였고 따라서 두 젊은이가 자신의 부인을 서로에게 보였는데, 이때 루크레치아의 모습을 본 섹스투스는 흑심을 품고 며칠 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집을 방문, 잘 대접받은 뒤 그날 밤 침실로 침입해 단도를 가지고 협박하여 강간한 것이었다. 섹스투스가 떠난 뒤 루크레치아는 하인을 시켜 전장에 나가있던 남편과 시아버지, 그녀 집안의 친척이자 왕의 사위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부른 뒤 복수를 맹세시키고 자결을 하였고 이에 분노에 끓은 브루투스가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250년에 걸친 왕가가 이 한번의 사건으로 뒤엎어지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그리스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왕정 붕괴 - 귀족에 의한 공동 통치 -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 수립의 수순으로 점차 민주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민주화되는 것은 도시국가들의 특징으로 이는 도시국가의 사활이 달린 전쟁을 시민군이 수행하였고 때문에 시민들의 발언권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중동은 엄청나게 넓게 퍼진 평야 지대를 기반으로 잡아 도시국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국가를 형성하여 이 넓은 일대를 통채로 관리하였고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 명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세습 왕조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이탈리아와 같은 지역은 대규모 평야 지대보다는 하나의 도시가 그들만의 정부가 있는 도시국가들이었는데 이는 넓은 평야가 펼쳐진 중동과 달리 산과 분지들로 이루어진 데다 수많은 인종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국가에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도시의 농민들을 소집하여 시민군을 구성한 뒤 나가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 병사들은 농민으로 탈바꿈하여 농사를 지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로 농민들이 곧 군인인 세계였고 이들은 무장을 자체 조달하였다.
이렇게 되자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나라의 흥망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파악하였고 때문에 정부에 전리품의 분배와 같은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때문에 하나의 왕조가 농민들의 위에 군림하는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많은 귀족들은 이러한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 들었고 이것을 잘하는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을 능가하였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가 이러한 대표적이 예이고 아테네에선 솔론과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이러면서 점점 왕의 존재감은 희미공기화해지게 된다. 그 결과 왕의 필요성은 조금씩 사라지고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정, 그리고 최후엔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정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었다. 로마도 똑같은 수순을 밟아 결국 기원전 500년쯤엔 왕정이 붕괴되고 만다.
그리스에선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으로 구성하다 귀족들도 왕족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권력을 잃게 되고(...) 시민들이 주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로마 특유의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17]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네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른다. 이 파트로네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네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떤 파트로네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네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네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던 그리스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 때문에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한 반목 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고이자로 돈을 꿔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게 하고 돈을 못 갚으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뒤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써서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끝까지 로마의 문제가 되어 로마멸망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평민이 빠진 로마군대는 켈트족에게 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겼으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18].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으므로 평등 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세 유럽처럼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는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19] 해방 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일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서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 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이 호민관 - 원로원 - 집정관 - 군단 사령관 테크를 타서 유력 가문이 돼버리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신참자라는 의미의 노블레스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의 어원이 되었다.
건국 직후인 왕정 시대 때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이는 로마의 지리적 특징상 피할 수 없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그 위치가 하필이면 이탈리아에서 제일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테베레 강(라틴어 : 티베레/Tiberis)까지 끼고 있다. 그래서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를 근처를 거쳐야 했는데, 왜냐하면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 했고 이는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로마로 하여금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노출시켰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왕정 시대의 로마는 건국 시기가 수백 년 앞선 에트루리아 따까리 비슷한 위치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7명의 역대 왕 중 마지막 세명이 에트루리아계인 것을 보아 추측할 수 있고, 에트루리아계 왕이 더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건축 양식, 도시 건설, 작명, 점술관을 겸직하는 행정관 등등 모든 문화 곳곳에서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를 군사적으로 직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북쪽에 위치하여 끊임없는 갈리아족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군사적 욕심을 부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왕정 시대에 등장하는 왕들은 한결같이 군사적으론 유능하였으며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서술이 나오지 않는다. 폭정을 해서 왕위에 쫓겨났다는 타르퀴니우스조차 주변의 수많은 도시들을 정복했다고 리비가 서술한다. 로마인들이 그들이 받은 패배를 고의로 누락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실제로 로마인들의 군사적인 능력이 주변국들을 압도한 것은 사실로 보이며 왕정이 무너진 해인 기원전 500년 쯤엔 이미 라티움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이렇듯 로마의 급성장에는, 로마가 테베레 강을 낀 비옥한 라티움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농사가 모든 것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비옥한 토지의 유리함을 갖추고 있었던 점, 그리고 외항 오스티아를 쉽게 확보하여 바다를 통한 무역이 용이했다는 점이 주요했다. 또한 로마인들이 외국인들 혹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성장에 한몫을 하였다. 로마에 인구가 적었던 초기엔 타 도시 죄수들의 피난처를 자처하기까지 한다(고대 사회에선 범죄자가 피난처로 지정된 도시로 가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또한 로마인들은 왕정 시대의 7왕 중 세 명이 라틴족이 아닌 에트루리아인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로마인들은 그들의 왕, 또는 지도층이 그들의 일족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개방적인 모습은 로마가 그들이 점령한 도시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거나 완전 라틴 시민권을[20] 수여하여 그들과 동화시키는, 그 당시로선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로써 로마는 꽤 충성도가 높은 우방국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3.2 공화정 시대
유럽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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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 | → | ||||||
카르타고 | → |
로마인들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그 밖의 나라와 섬들도 모두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벗들이나 자기들에게 의지하는 이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멀고 가까운 곳의 임금들을 정복하니, 그들의 이름을 듣는 이는 누구나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도와서 임금으로 만들려고 작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임금이 되었고, 그들이 작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들의 위세가 드높았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아무도 왕관을 쓰지 않고, 위엄 있게 보이려고 자주색 천을 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원로원을 세워, 삼백이십 명의 의원들이 날마다 백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논의하여 잘 다스리게 하였다. 또 해마다 한 사람을 뽑아[21] 백성을 다스리고 온 나라를 통치하게 하였다. 백성은 모두 그 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들 가운데에는 시기나 질투가 없었다.[22]성경 마카베오기 상권 8장 11~16절
공화정 시대의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를 참조.
공화정 이후에도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은 주변 국가들을 압도하였다. 이 때문에 라티움[23]에 있는 도시들은 라틴 연합을 맺은 채 대항한다. 로마는 홀로 연합군을 상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압도하였고[24] 결국 카시아눔 조약(Foedus Cassianum)을 맺게 된다. 이는 조약에 쓰여 있는 내용은 로마가 힘들면 라틴 연합이 도와주고 라틴 연합이 힘들면 로마가 도와준다는 것인데, 따라서 로마는 이들 라틴 연합 전체와 동등한 입지에 서게 된다.
이렇게 힘이 커지자 옛날 로마를 따까리 취급하던 에트루리아 지역까지 공격하게 되고 결국은 유능한 장군인 카밀루스의 지휘아래 기원전 396년 에트루리아의 이름난 도시인 베이를 점령하게 된다.
이때 베이의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텅 빈 베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평민과 귀족들의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어난다. 평민들은 로마 시민의 절반을 베이로 이주한 다음 살게 하여 또다른 로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의견에 귀족들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였고 특히 베이를 지휘한 카밀루스가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다.
그러자 평민들은 분개하였고 카밀루스를 횡령 혐의로 고발한다.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민들은 카밀루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기로 작정했으므로(…) 카밀루스가 무죄 판결받는 것은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로마를 떠난다. 그래도 재판을 열려서 카밀루스는 벌금형에 처해진다.
이런 내분을 벌이는 동안 켈트족이 남하하게 된다. 켈트족은 베이 점령의 9년 뒤인 기원전 387년에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우선 에트루리아 지역의 클루시움이라는 도시를 포위한다. 이때 클루시움은 베이 점령 이후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세력을 뻗기 시작한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로마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바빴고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켈트족에게서 방파제가 될 수 있었던 베이를 없앤것은 로마 자신이었다. 켈트족은 로마로 쳐들어왔는데 당시 로마는 이미 라티움의 패권자였으나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베이에 제2의 수도를 건설하자는의견대립-으로 군사력은 약해져 있었다. 급조된 로마군은 패배하였으며 로마의 성문도 열려 있었다고 한다. 켈트족은 성 안으로 진입하였고 로마 시민은 싸울 수 있는 자들만 뽑아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노 언덕 위로 올라가 농성하였다. 원로원 의원이더라도 싸울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가지 못했다. 카피톨리노 언덕은 방어에 유리했으나 비좁았기 때문이다. 켈트족은 원로원 의원, 어린아이, 여자 할 것 없이 죽이고 로마 시내의 건물들과 문서들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불살랐다. 그 결과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 문서들은 모두 소실된다.
켈트족은 로마 시내를 점거하긴 하였으나 카피톨리노 언덕의 로마인들이 계속 저항하였고 켈트족은 떠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어 도시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몰랐다. 시체를 수로에 그냥 버려 수돗물을 먹고 전염병까지 생길 정도였다. 로마인들은 도저히 방법이 없자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했고 켈트족은 300kg 황금을 받고 로마를 떠났다. 로마는 다시 카밀루스를 불러들여 독재관으로 삼고 떠나는 켈트족을 습격하여 분풀이를 하였다. 하지만 주변의 라틴 부족들은 로마를 깔보기 시작하였고 이후 주변 정세를 안정시키는데 20년이나 소비하게 된다.
로마는 켈트족에게 당한 패배를 계기로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그리스식의 팔랑크스 스타일을 버리고 레기온 스타일로 진화한다. 팔랑크스는 모든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각형을 이뤄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레기온 스타일은 작은 네모들로 큰 네모를 형성해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레기온 스타일은 훗날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발전한 뒤 칸나이 전투 직후 대대(Cohort)를 편성함으로써 완성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켈트 족과 상대하였을 때, 우수한 무장을 갖춘 신분 높은 계급이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양익이 달아나면서 중앙이 포위, 그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후로 높은 계급의 생존률을 높히기 위해 계급 순으로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 이것은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아로 나뉘는 매니풀라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즉 켈트에게 당한 패배는 로마가 레기온 스타일의 전투 방식을 창시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50년후 라틴 연맹은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데 그 이유는 라틴 연맹에서 로마와 함께 공화국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로마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는 라틴 연맹보다 세력이 컸으므로, 굳이 권력을 나눠먹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 싸움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 로마는 라틴 연맹을 해체하고 속국 동맹국으로 삼고 새 라틴 동맹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때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국가들을 대한 것은 고대 사회에선 매우 드물게 온건한 것이였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부여해주었고 이들에게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인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연공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로마가 라티움 지역에서 가장 센 도시가 된 뒤 부하까지 거느리는 동안 아펜니노 산맥에 살고 있는 삼니움족 중 일부가 서쪽 평야 지대에 남하하여 비옥한 땅에서 살려고 마음먹는다. 이들은 로마가 버티고 있는 라티움 지역을 피해 라티움 지역의 바로 아래쪽의 평야 지대인 캄파니아 지역에 "민족 이동"을 시작한다.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들은 라티움 지역의 보스인 로마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부하들과 함께 삼니움족을 두들겨 내쫓고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도 속국 동맹국으로 삼는다.
그러나 인구가 포화될 대로 포화되었고, 잠시나마 맛본 평화로운 평야 지대의 삶을 잊지 못한 삼니움족은 15년 뒤 대대적으로 캄파니아 지역을 공격한다(2차 삼니움 전쟁). 이미 이 지역의 보스가 된 로마는 바로 이들을 요격하였는데 이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아 이 삼니움족과 로마인의 전쟁은 무려 22년을 끌게 된다.
로마인들은 2차 삼니움 전쟁 초기엔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에 로마인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기 때문이다. 거듭된 연승에 고무된 로마인들은 삼니움족의 본거지인 아펜니노 산맥으로 직접 들어가 이들을 궤멸시키기로 결심했으나, 두 집정관이 네 개 군단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카우디눔 협곡에서 매복 부대를 만나 모두 생포되는 치욕을 당한다. 이 두 집정관과 그들의 군단을 모두 생포한 삼니움 족장은 이들의 처우에 대해 고심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들 군단을 모두 처형하던지 아니면 모두 조건없이 풀어주라고 조언한다. 그 이유인즉 이들 모두를 처형하면 로마는 쇠약해질 것이고, 조건 없이 풀어주면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족장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인들을 무장을 해제한 채 속옷 차림으로 멍에 밑을 기어가도록 한 뒤 로마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로마는 병력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도 삼니움족에 대한 적개심을 맹렬히 키우게 된다.
로마인들은 산으로 올라가 삼니움족과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전략을 바꾸어 이들을 산 위에서 고립시키는 전략을 폈다. 즉 삼니움족의 도시들 중 산 밑이나 중턱에 있는 도시를 공략하고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평야 지대의 도시들을 공격해 로마의 동맹국으로 바꾸는 방법이였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삼니움족은 계속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심지어 켈트족까지 끌어들여 로마와 결전을 벌였는데 로마는 센티눔이라는 도시에서 이들 연합군을 쳐부수고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다.
삼니움족과의 싸움 후 로마는 삼니움족의 전투 방식에서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 유명한 투창(필룸, 복수형 필라과 사각 방패(스쿠툼)도 삼니움족의 무기를 도입한 것이며,[25] 전투 방식도 크게 바뀌어 기존의 뻣뻣한 팔랑크스 편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유연하고 전략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마니플-코호트 단위로 군대를 조직하는 법을 베끼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로마의 레기온은 나중에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개박살내면서 그 우월성을 지중해 세계 만방에 알리게 된다.
삼니움 전쟁이 끝나자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곧바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의 분쟁에 개입하여 이들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로마는 투리라는 소도시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하는데, 이때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의 영해를 지나게 된다. 타렌툼과의 조약에는 이들의 영해를 로마 선단이 지나면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타렌툼은 이 로마 선단을 공격하였고, 이것에 분노한 로마는 타렌툼에 선전 포고를 한다. 타렌툼은 그리스 서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에피로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에피로스 왕국의 왕은 피로스로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을 자신의 세력 하에 넣으려는 욕심으로 이것을 허락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로 이탈리아로 들어온다. 이렇게 벌어진 피로스 전쟁에서 피로스와 로마는 두차례에 걸쳐 대규모 회전을 벌였고, 피로스는 명성에 걸맞게 연이어 승리를 거두나 전사자가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이르렀으므로 원정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로마는 피로스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도시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 동맹 관계였다. 로마와의 전쟁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 피로스는 이를 핑계삼아 이탈리아를 떠나 시칠리아로 무대를 옮긴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여 연이은 승리를 하나, 훗날 포에니 전쟁 때 증명되듯 해군 없이는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하였다. 카르타고 도시들을 공략할 때 카르타고 해군의 꾸준한 보급은 피로스가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피로스는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했고 그리스계 도시들은 이것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된다. 그리스계 도시들이 피로스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카르타고의 해군력을 제압할 방법이 없게 되자 피로스는 시칠리아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 온다.
피로스가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로마군은 전쟁에 대한 대비를 꾸준히 하여 피로스의 병력을 훨씬 웃도는 군단을 편성하고 있었다. 피로스는 이에 대해 로마군이 한데 모이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하고 베네벤툼에 머물던 로마 군단을 야습하기로 하나, 이 야습을 로마군이 알아챘으므로 실패하고 피로스군은 패배하고 만다. 이에 피로스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결국 로마에게 항복하고 만다.
피로스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마저 먹게 된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를 통째로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 그렇게 되자 이젠 시칠리아 섬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된다. 카르타고는 당시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그리고 에트루리아계 도시들과의 내분에 개입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시나와 시라쿠사와의 내분에 로마가 개입하자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연합하여 로마군을 상대키로 하였으나 시라쿠사는 격파당해 로마에게 복속되고 카르타고는 로마에 전쟁을 선포, 시칠리아 섬을 놓고 두 나라는 23년에 걸친 전쟁(제 1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나 로마는 우수한 병사의 질, 풍부한 전쟁 경험, 지휘관의 자질 등에서 카르타고에 우위를 점했으므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둔다. 20여 년 뒤에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함으로써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서 로마인들은 전쟁 초기의 연패와 칸나이 전투 대패 끝에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배반하는 등의 위기를 맞이하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카르타고 정부의 무능력과 라틴 동맹이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예상한 한니발의 전략적 판단 착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과 한니발 사이의 사절을 우연히 생포하는 행운 등이 겹쳐 전세를 역전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여 자마에서 한니발을 패배시킴으로써 2차 포에니 전쟁 역시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꺾게 되자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와의 싸움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된다. 로마인들은 이 싸움에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의 세력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 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요청으로 셀레우코스 왕조군을 그리스에서 격퇴하고 시리아 까지 건너가 셀레우코스군을 격파함으로써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확립한다. 그 뒤 필리포스 5세의 뒤를 이은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가 로마에게 다시 반기를 드나 로마는 이것을 진압하고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키고 만다.
그 뒤 로마는 정복된 국가들이 로마의 패권에 반발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던 코린토스와 포에니 전쟁의 맞수였던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주민들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림으로써 주변국에 본보기를 보인다. 그 이후로는 로마의 패권이 공고해져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의 전체를 소유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급속도로 이루어진 성장은 로마 내부에 많은 모순을 낳았다.
가령 기존의 파트라이 클레엔테스의 관계로 돌아가던 사회 구조가 완전히 개발살났다. 지중해를 제패하면서 로마는 당시 서양과 중동을 아우르는 수도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 세계 전체의 지식인, 부유층, 출세한 해방 노예, 새로 해방되는 무수한 노예들이 로마로 상경하였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얻은 로마 정부는 도시를 세계 수도에 걸맞는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벌였고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노동자들도 상당하였다. 이로써 로마 시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였고 때문에 로마는 백만의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가 된다. 이는 19세기 초 런던이 인구 백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수용했던 것과 맞먹는 인구 규모다. 이러한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기존의 파트리아, 클레엔테스의 폐쇄적인 구조가 파괴되었고 그로써 전통적인 공화정의 탈을 쓴 귀족 정치의 기능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부의 유입은 로마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은 철저히 원로원 계급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늘어난 로마의 부를 원로원이 독점하였다. 반면 병사로 징병되어 싸워 이김으로써 부를 얻는 데 큰 공헌을 한 로마 시민들은 이 혜택을 누릴 수 없었고, 오히려 로마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장거리 원정을 수행하느라 농장을 경영할 수 없어서 파산하는 이들이 많았다. 원로원은 이들에게서 농장을 헐값에 사들인 뒤 노예를 대규모로 고용하여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한다. 이러한 불평등으로 인해 로마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불만은 점점 고조된다.
이렇듯 귀족 정치를 지탱한 로마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의 파괴, 늘어난 부를 독점하는 원로원 계급, 그리고 늘어난 전쟁거리와 그에 따른 복무 기간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평민 계급과 귀족 계급의 대립은 심화되고 몇몇 정치인들에 의해 이 문제를 로마 공화정의 체제 내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면서 그동안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로마 공화정의 모순점이 노출된다.
3.3 공화정의 붕괴와 제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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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비잔티움) 제국 |
부를 독점한 원로원은 이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농장을 늘려나갔다. 이에 자영농들이 농장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헐값에 팔고 그 돈을 탕진하는 이들이 많게 되어 자영농민들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들 자영농들은 로마 군단의 중추를 이루는 중보병들의 구성원이였으므로 이들의 몰락은 로마 군단의 질적 하락을 초래했으므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국유지를 파산한 무산자 계급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농지법을 발의한다. 그런데 이것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 국유지는 이미 임대를 받은 이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바로 법률에 밝은 원로원 계급으로 새로 로마의 소유가 된 국유지에 대한 정보와 가격, 그리고 이를 임대받기 위한 복잡한 절차를 훤히 꿰고 있었으므로 국유지가 생기면 곧바로 원로원 계급의 누군가가 임대를 금방 받아버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나누어줄 국유지는 바로 이러한 땅들로 무산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원로원 계급이 가진 땅의 임대권을 돌려받아야했다. 원로원 계급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순순히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는 이 반발을 무릅쓰고 농지법의 시행을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호민관 권리를 사용해 민회에 회부하여 적법한 절차를 통해 가결시킨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그동안 로마 공화정이 규정한 헌법을 초월하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이 두 형제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농지법을 무산시킨다.
두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이 최초로 발의한 Senatus Consultum Ultimum, 즉 원로원 최종 권고의 희생자가 되는데 이 원로원 최종 권고는 일종의 긴급조치와 같은 것으로 원로원이 원하면 모든 헌법, 절차를 무시하고 어떤 처형을 내릴 수도 있다는 무법적인 조항이었다. 이는 원로원이 사실상 공화정의 탈을 벗어던지고[26] 사상 최초로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때 원로원 최종 권고에 대해 좀 더 다루자면, 원로원은 본래 헌법상 조언만 내릴 수 있는 기구였으며 입법권,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원로원의 칙령(decree of senate)이라는 것이 존재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집정관에게 권고하는 형태를 띄고 집정관이 이를 받아들여 행사하는 것으로써 그 효력을 가질 뿐이었다. 원로원이 지금의 의회처럼 예산에 대한 결정도 내렸으나, 이것 역시 재무관들이 담당할 이들에게 고참으로서 방침을 내려 주는 형태로 효력을 갖고 있었다. 비록 원로원의 방침이라는 것이 막강한 권한을 가져 집정관과 재무관들이 따를 수밖에 없긴 하였지만 적어도 자발적인 집행이라는 시늉을 함으로써 권위는 있으나 권한이 없는 원로원의 모습을 띄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원로원 최종 권고는 이런 원로원의 칙령과 전혀 다른 것으로 이것을 집정관이나 다른 이들이 따르지 않으면 반역이 돼버린 것이었다. 이는 권고가 아닌 명령이었다. 즉, 원로원이 권한이 없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권한이 있을 수도 있게 돼버린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이 명령은 로마 시민들이 가진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호민관에 대한 신변 불가침권, 그리고 민회에서 가결되어 효력을 갖게 된 법안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공화국 로마의 정치 체계의 근본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원로원이 이러한 초법적인 행위로 그라쿠스 형제를 죽게 하여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27] 모순이 그대로 남아 그 이후로도 몇 명의 호민관들이 원로원에 도전하다가 죽는 일들이 생겼다. 그럼에도 구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와중에 누미디아 왕국의 왕이였던 유구르타가 로마에 반기를 들어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을 진압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낸 로마의 장군 마리우스는 군제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개혁함으로써 무산자 계급을 로마 군단으로 흡수한다.[28] 그 이후 이 새로운 형태의 군단병으로 30여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남하를 격파함으로써 이러한 제도를 로마에 확립시킨다. 그러나 이들에게 퇴직금으로 지급해야 하는 농토 배분 문제로 다시금 원로원과 마찰을 겪게 되고 마리우스 파였던 호민관이 그라쿠스 형제가 발의한 것과 똑같은 형태의 농지법, 즉 국유지를 마리우스 군단병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다 다시 원로원의 반발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된다. 마리우스는 현직 집정관으로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신뢰를 잃게 되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만다.
그 뒤 현재 터키 지역에 있는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라다테스가 로마의 패권에 반기를 드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현직 집정관이였던 술라가 군단을 편성하나 마리우스는 자신의 옛 마리우스 파를 움직여 군단 지휘권을 현직 집정관이 아닌 마리우스가 갖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킨다. 이에 술라는 편성한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를 점령하고 마리우스 파를 제거한 뒤 미트라다테스와의 싸우러 떠났고 술라가 떠나자 군사력이 없던 로마를 마리우스가 점령하여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지지자를 모두 살해한다.
그 뒤 로마는 술라와 마리우스 파의 내전에 휩싸인다. 미트라다테스와 강화를 맺고 돌아온 술라는 마리우스 파의 저항을 진압하고 로마를 점령한 뒤 이들을 대거 숙청한다. 그 뒤 로마 원로원 귀족들의 독재는 계속되었으나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술라의 개혁[29] 을 무효화하고[30] 호민관과 연합해서[31]원로원과 대놓고 대립하는 등[32] 이무렵에 이르면 원로원 귀족들의 정당성은 상당 부분 없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민중파(구 마리우스 파)의 일부 역시 로마에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또한 딱히 원로원에 반대하는 정책을 입안한 적도 없었으므로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경계는 했지만 딱히 적대하지는 않았다.
카이사르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부임한 스페인 서부 지역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당시 동방 원정을 끝내고 마리우스 때와 마찬가지로 퇴직금으로 농지를 배분해줘야 하는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몰래 동맹을 맺는다. 여기에 크라수스까지 끌어들여 삼두 결속을 맺은 뒤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어 농지법을 통과시킨다.
그 뒤 카이사르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8년 간의 기간 동안 갈리아 전역을 로마 패권 하에 제패하는 업적을 쌓는다. 카이사르의 뛰어난 정치적인 수완과 군사적 업적으로 인한 높은 명성을 극도로 경계한 원로원 귀족들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임기 종료 뒤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고 민간인 출신으로 집정관 선거에 나서라는 요구를 한다. 카이사르는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정적들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33] 원로원에 군사 지휘권을 유지한 상태로 출마하였고 여러가지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원로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잡혀 죽은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원정군을 소집하여 이탈리아 본국으로 쳐들어오니(...), 이리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생한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에서 원로원 세력의 군대를 연파하고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면서 이 때 부터 사실상 로마 제국은 제정이 시작되었다. 당사자인 카이사르는 그가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에게 암살당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원로원은 물론 공화국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싸인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정리하고 최초의 황제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의 치세는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의 사후 칼리굴라, 네로 같은 폭군이 등장하여 로마 제국은 잠시 내전에 휩싸이긴 하지만 이후 5현제 시대에 돌입해서는 황금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시기를 맞게 된다.
3.4 제국의 위기
그러나 5현제 시대는 단순한 번영기나 황금 시대는 아니었으며, 로마의 번영만큼이나 내부적 모순이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외부 침입에 의한 약탈과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로마는 적들이 갈수록 강해지다 보니 더 이상의 확장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서 이민족을 공격하여 노예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길어진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군단은 계속 증설되었다. 게다가 각 군단이 한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병사들이 비밀리에 현지 여성과 결혼하게 되면서[34] 군기가 해이해지기 시작했고,[35] 이민족에 대한 약탈이 사라지면서 귀금속의 유입이 감소하자 3세기에 들어서면서 금화와 은화의 질이 하락했다.[36]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폭동을 두려워한 황제들은 서커스와 같은 대량의 자금이 투입되는 공공 행사를 축소하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기간 산업인 농업 생산성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로마의 팽창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노예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BC 1세기에 비해 AD 1~2세기의 노예 가격은 8~10배 가까이 상승했다.[37] 노예의 절대적인 수량도 문제였지만 노예 사망으로 인한 손실과 위험성이 증가했다. 노예의 출산율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농촌 노예의 성비는 남초 현상이 심각했으며, 노예의 자식을 부양하는 일을 기대하기도 힘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실제로 AD 1세기 무렵에는 노예 출산에 장려금을 주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고된 노동으로 인한 농촌 노예의 사망률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농촌 자유민 인구 증가율이 높았냐면 그것도 아니었으며 물레방아, 말이 끄는 수확기를 비롯한 몇 가지 기술 혁신도 있었지만 본질적인 농업 생산력 증가와 연결되지 못했다. 특히 후자는 로마가 새로이 정복한 북부 유럽에 적합한 농법이었지만 그 농법들은 매우 한정적인 지방에서만 적용되었으며 대부분은 지중해식 농법에 의존했다.[38] 즉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로마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지속성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팽창이 끝나고 노예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잃어갔다. 그리고 위의 요건들이 겹쳐지면서 로마는 한계수익률에 도달하게 되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따라서 5현제 시대 이후, 군단에 대한 봉급 지급이 지연되는 등 각 지역 주둔군의 불만이 커져 갔고, 지방에 대한 제국 수도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으며, 여러 지방 군단을 통솔하는 상급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는 등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다가 결국 내전을 반복하면서 로마 제국은 점점 동방식 전제군주화되어 갔다. 이런 식으로 점점 제대로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39]
이런 국가 막장 테크는 3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세수가 부족할 때 마다 찍어내는 화폐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경제는 막장이 되고[40][41] 게르만인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으로 변해 국경 경비를 뜷고 약탈을 일삼았으며,[42] 동방에서는 로마에 대해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았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정반대 성향의 강적이 일어났는데, 사산조 페르시아는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기동 방어 체계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에게 부담이었다.[43] 로마 제국의 기동 방어는 게르만족과의 다뉴브 강 전선에 병력을 보충해야 할 경우 일시적으로 파르티아의 국경에 주둔한 군대를 다뉴브 강으로 이동해서 메우고, 그 반대로 동방 전선에서 일시적인 긴장이 흐를 경우엔 파르티아를 압박하기 위해 다뉴브 강의 군대를 잠시 동방 전선으로 차출시키는 시스템이다. 군단을 융통성 있게 운영하는 기동 방어 체계는 리메스로 알려진 방어선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로마에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다뉴브 강에서 게르만족과 싸워야 할 때에도 동방 전선의 군대를 차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동 방어가 불가능해지면서 다뉴브 강 전선과 동방 전선을 모두 방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대를 보충해야 되고, 군대를 보충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기 때문에 예산 또한 늘려야 하는데 로마 제국의 수입원을 제공하던 노예는 줄어들어[44] 제국의 경제력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라 돈을 찍어내게 되고, 은화 함량이 감소해서 결국 인플레이션이 시작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루프물
게다가, 게르만족들이 그 이전보다 차원이 다르게 강성해지기 시작한 시기도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두한 시기와 일치한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군사력 보충과 방어선 유지에 신경써야 했기에 시기적으로 정말 운이 없었던 셈. 이렇게 로마 제국 후기에 큰 짐이 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이 분단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싸웠다. 동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그로 인한 국력의 소모는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허무하게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 의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영구적으로 상실하게 된 것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지친 탓이다. 결국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패배하여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는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의 치세 대부분을 반란 진압과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족들과의 싸움에 소진했으나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고 야만족들의 침입은 거세어져만 갔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치하땐 갈리아 지역(지금의 프랑스)과 시리아 지역(지금의 중동)이 로마에서 독립하여 그들의 왕을 옹립하였다.삼국지
로마 제국은 이때 거의 망했어요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갈리에누스가 암살된 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가 고트족의 대규모 남하를 일망타진함으로써 극적으로 로마를 구한다. 그는 고티쿠스라는 존칭을 얻으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우렐리아누스는 매우 유능한 황제로, 도나우 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도나우 라인을 재정비한다. 그 뒤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로마에서 떨어져 나간 두 세력)을 연이여 격파하여 이 두 지역을 다시 로마와 합병시킨다. 그는 화폐 개혁을 시도하고 로마 시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 로마의 정국과 경제 안정을 꾀한다. 이때 그가 시도한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하려는 시도는 훗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킨 것과 유사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런 개혁을 진행하며 동시에 사산조 페르시아를 꺾어 로마 제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행군 도중 전쟁에 지친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로마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그들의 고유 권한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제 계승을 원로원에 요청하게 된다. 로마 원로원은 신임 황제를 뽑는 데 상당한 혼란을 겪으며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간신히 타키투스 황제를 선출하나 70세의 고령이였던 그는 재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원로원이 정국을 주도하는 일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타키투스 황제 이후 프로부스 황제가 뒤를 잇는데 그 역시 대단히 유능한 장군이였다. 그는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전역에 걸쳐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우-라인 국경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나 군단 시찰 도중 프로부스 황제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 의해 그 또한 암살당한다.고만해, 미친놈들아!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와 같이 유능한 황제들의 연이은 암살은 당시 로마의 혼란 상황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카루스 황제가 뒤를 이으나 이 황제는 불우하게도 군용 캠프에서 벼락 맞아 죽고(...) 내분 끝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3.5 4세기, 제국의 변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게르만족의 침입과 사산조 페르시아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사두 정치를 편다. 사두 정치는 네 명의 황제를 뽑아 각 황제가 그들의 영역에서 조세권,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방식이였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로마 상황에서 매우 적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 명의 황제가 광활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두가지 중대한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는 로마의 조세 방식을 자치에 맡기지 않고 황제가 파견한 세무원들이 직접 징수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동안 로마 제국의 징수법은 각 도시에 있던 원로원에게 조세량을 의뢰하면 이들이 알아서 징수하여 정부에 보내는 방법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것을 중단하고 로마 정부에서 예산을 짜면 그만큼의 세금을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세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행정 구역을 세분화한다.
두번째 중대한 개혁은 군제 개혁이였다. 로마군의 인력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두배로 늘어났고, 이를 위해 공화정 시대 때 없어졌던 징병제를 부활시켜 각 도시들에 일정량의 신병을 징병케 하고 또한 군인의 아들은 반드시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 이러한 개혁은 비록 조세 관리들의 부패과 관료제의 비대함 등의 부작용을 낳았으나 거의 망해가던 로마의 정황을 크게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군사력을 두 배로 늘리는 정책과 네 명의 황제의 통치는 크게 성공하여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에 패배하여 자기영토로 완전히 후퇴하였고 게르만족은 라인-도나우 강의 국경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다.[45]
그러나 로마 제국의 약점이었던 제위 계승의 불확실함은 여전히 영향을 미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서 물러나자 그 네 명의 황제가 즉시 내전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은 다시 1인 황제 체제로 바뀌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비록 본인의 야심 때문에 다른 황제들을 모두 없앴으나 그 역시 로마 제국이 황제 단 한 명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죽기 전 로마 제국을 이리저리 쪼개 자신의 자식들과 친척들에게 각각 맡기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례식 때 이들 친척은 모두 숙청되고 그의 세 명의 자식들이 각각 로마 제국을 분할해 통치하게 되지만, 살아남은 삼형제 중 서방을 맡은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만용을 부리다 죽어 중간을 다스리던 막내 콘스탄스가 서방 영토를 죄다 흡수하여, 중간의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를 제치고 사실상의 선임 황제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상당히 쾌락을 즐기는 황제였는데, 많이 알려진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후기 로마 제국은 사치와 나태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고 군국주의적인 면도 심화되어 있어 이전이라면 용납될 수 있었던 행태도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콘스탄스는 휘하 게르만족 장군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찬탈당했고,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방은 일단 갈루스에게 맡겼다가, 감시하려고 맡긴 고문관들을 죽인 갈루스를 처단하고 자신은 다시 동방으로 돌아가는 한편 서방을 맡을 부제(副帝)는 부친 쪽으론 사촌동생이요 모친쪽으로는 오촌 조카인 율리아누스를 임명한다.
율리아누스는 서쪽에서 갈리아에 칩입해 오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선전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 또한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였다. 로마는 모처럼 평화를 맞이하는 듯하였으나 다시 고질적인 로마의 문제, 즉 군단이 제멋대로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발생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병 중 일부를 동부에 보내라고 명령하였고 이것을 거부한 군단병들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그 명령에 반항한 것이였다.
율리아누스는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를 선포하게 되자 로마 제국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나 내전이 일어나기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병사하여 율리아누스가 단독 황제로 등극한다. 율리아누스는 이미 국교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로마 고유의 다신교로 바꿀 것을 꾀하나 격렬한 반발을 겪게 된다. 그는 이것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나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자식이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후계자는 군단이 선출하였다. 요비아누스가 선출되나 불과 일 년 만에 의문사하고 뒤를 이어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상당히 유능하여 게르만족을 잘 막아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발렌스를 동제로 삼고 그는 서제가 되었는데 그가 죽자 서제의 자리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인 그라티아누스가 오른다. 동제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삽질 끝에 고트족에게 로마 군단이 전멸하게 만들고 본인도 전사하여 로마 제국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발렌스의 뒤를 이으라고 서제 그리타아누스에 의해 동제로 파견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들 고트족과 강화를 맺고 이런 타격을 잘 수습한다. 서제 그라티아누스가 죽자 서제 자리는 발렌티아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발렌티아누스 2세는 재위한 지 9년 뒤 죽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홀로 2년 정도 다스리다 병사하자 그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들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각각 물려준다.
3.6 제국의 분열
유럽의 역사 | |||||||
로마 제국 | → | 서로마 제국 | → | 동고트 왕국 | |||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 → | 오스만 제국 |
Fall of The Roman Empire...in the 15th Century: Crash Course World History #12 |
이 동영상에서 몇가지 틀린 부분도 있는데, 정교회를 동방 혹은 그리스 정교회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세계 총대주교가 황제에 의해서 선출되었다고 말한 부분이다. 세계 총대주교 선출에 황제가 간섭할 순 있었지만 다른 왕국의 교회의 총대주교 선출과 달리[46] 세계 총대주교 선출은 직접적으로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황제는 평신도인 반면, 세계 총대주교도 어디까지나 황제의 신하라는 묘한 관계였고, 그러다보니 황제와 교회 사이의 충돌도 상당히 잦았다.[47]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후대에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제국 서부와 제국 동부가 서로를 각기 하나의 국가로 인식했다는 얘기는 틀린 말이고 공식적으로는 갈라진 바 없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죽음 이후 이러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자리잡힌 바 없으며, 모든 포고령은 항시 동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또 동서 로마 양대 궁정은 선임 황제인 쪽이 반대편에게 강력한 내정 간섭을 할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사실 테오도시우스 이전에는 오히려 선임 황제를 배출하는 쪽이 주로 서로마 쪽이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사후의 두 황제가 주체적인 의사로 정책을 결정하는 제대로 된 황제가 아니어서 국정을 나몰라라 했던 데다, 동서 양쪽의 실력자들이 스틸리코 외에는 모두 제국에 대한 주인 의식과 책임 의식 없이 자기 세력과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지라 동서 로마 양쪽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초유의 이런 악조건에서도 서로마 제국은 유능한 군사령관이였던 스틸리코, 그리고 아이티우스의 활약으로 간신히 명맥은 유지한다. 테오도시아누스 황제가 죽기전 두 황제의 후견인으로 삼은 스틸리코는 초기엔 군사를 이끌고 서로마와 동로마를 오가며 게르만족을 열심히 격퇴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점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누더기가 된 서로마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급기야 스틸리코가 임명한 동로마 책임자를 죽이고 자신들만의 정부를 세운다. 결국 절망적인 재정 상태의 서로마 제국만으로 게르만족을 상대해야 했던 스틸리코는 노예와 검투사들까지 끌어모아 3만여 명의 병력으로 맞선다. 이 병력으로 연이은 승리를 하긴 하나 드넓은 국경을 수비할 수 없었던 스틸리코는 갈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고트족의 족장인 알라리크를 고용하여 북이탈리아만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하였으나 이런 정책은 황제와 원로원의 불만을 샀고 결국 그는 암살되고 만다.
그 뒤 스틸리코의 죽음을 안 알라리크는 고트족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따라서 로마는 건국 초기 갈리아족의 침입 이후 처음으로 이민족에게 함락되고 만다.[48] 사실상 서로마 제국은 이때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서로마는 이미 방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갈리아에서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를 반달족에게 털리면서 경제도 망가지기 시작했고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에게도 털리면서[49]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런 소동 와중에 서로마의 장군이였던 아이티우스가 간신히 활약하여 갈리아의 남부와 이탈리아만은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다. 아이티우스는 갈리아를 침공해온 아틸라를 저지함으로써 훈족의 침략을 막아내었으나 다음 해에 북이탈리아에 쳐들어온 훈족을 막아내지는 못하였고 아틸라는 마음껏 약탈한다.
아이티우스는 다음 해에 북이탈리아의 침략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은 황제의 음모에 의해 목숨을 잃으며, 그 뒤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은 로마를 두 번째로 약탈한다. 이제 서로마 황제들은 동로마에서 임명되어 부임하거나 원로원에서 선출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중반까지 서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만은 손에 위태위태하게 쥐고 있었고 재기를 하기 위해 2차례의 반달 원정을 시도한다. 1차인 461년에는 서로마가 300척의 배를 준비해 무리해서 반달을 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의 화공 작전에 함선이 싹 다 불타버린다. 낙담한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돌아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궁정 관료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나, 4년 후 다시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한다. 그러자 동로마는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준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동, 서로마는 반달족을 치려 한다.
동로마의 주도 아래 10만이나 되는 군대가 편성되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가는데, 잘못된 인사 책정이 일을 그르친다. 동로마 황제의 처남이었던 바실리스쿠스가 총사령관이었는데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근데 상대가 심히 언밸런스. 상대인 반달왕 겐세리크가 평화 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함대를 주둔할 걸 권했고, 그거에 낚여서 바실리쿠스는 또 그대로 한다. 그러자 겐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하고, 함대는 활활 잘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서로마 재생 작전은 망해버렸고 이때부터 동로마가 버린 서로마는 그냥 빈껍데기였다. 그러다 결국엔 봉급을 받지 못한 게르만 군대가 서로마 실권자인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대장 오도아케르가 황제를[50] 폐위시키면서 476년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본토를 상실했으며[51] 달마티아(구 유고슬라비아)에서 기반을 닦아온 전 황제 네포스가 동로마의 임명을 얻어 복귀하게 된다.
그는 무능과 부패로 정적이 많았으며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와중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암살되어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사후 오비다가 그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계승자로 오도아케르의 침공에 480년 항복하며 서로마는 끝이 났다. 서로마의 희망이였던 선군 마요리아누스의 사후를 배경으로 세워진 서로마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는 총독 아에기디우스가 초대로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계승했으나 486년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지고 멸망함에 따라 포로로 붙잡혀 다음 해에 처형당한다. 다른 로마계들도 있었는데 북아프리카 서쪽에 살아남은 로마 전초들이 여럿 되었으며(로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되었지만), 반달족 주변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 나가면서 로마-무어 왕국 등 국가도 세우고 영향력을 끼치던 중, 구 로마를 수복 중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 다시 합치기도 한다.
이후 로마의 역사는 시즌 2 비잔티움 제국 문서 참조.
4 로마의 이것저것
비잔티움 제국과 프랑크 왕국을 합치면 고대 로마의 면적이 나온다.
로마 시절에 너무 잘 나갔는지, 후손인 이탈리아인들은 세기말 막장 군대로서 새로운 전설(…)들을 쌓고 있다. 오죽하면 로마인들 중 반은 나라 세우러 가다 죽고, 반은 나라 지키다 죽어서 이탈리아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 물론 로마를 이탈리아인만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대한 오류이긴 하다. 또한 로마의 전 신민이 라틴어로 대화하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개의 지역은 토착어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특히 그리스 지역은 라틴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또한 로마인들이 공부한 문학의 대부분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어서,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당장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 하더라도, <명상록>을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썼을 정도로 학술 언어에서 라틴어는 찬밥이었다. 라틴어로 무조건 말하라니 한심하군 모든 국민들이 라틴어로 의사소통 했다는 것은 결국 근거가 없는 틀린 얘기다. 또한 예수만 하더라도 모어는 그지역 토착언어인 아람어였으며, <신약성경>은 학술언어인 그리스어로 서술되었다.
대대로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한 국가는, 자신이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과거 로마의 영역이었던 땅을 정복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 왔다.
동아시아인 남성도 노예 생활을 했다. 그의 유골은 기원 1세기나 2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기사. 일부 번역.[52]
일부에선 기독교가 커져서 나라가 망했다고 보지만, 이는 초기에는 잘 나갔으나 이후 나라가 망해가니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면서 기독교가 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부흥기에 미트라 교, 오시리스 교 등의 신흥 외래 종교 역시 유행했고, 기독교와 이런 신흥 종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을 보면 이런 경향은 분명해진다.[53]
게다가 시대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게, 당시 로마 황제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이 줄어든 상태라 로마 대주교(교황)가 이민족들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침략자인 게르만족도 종파는 달랐지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54] 일례로 알라리크는 로마를 함락할 당시에는 교회 안에 피신한 로마 시민들에게는 약탈이나 목숨을 뺏는 행위 등을 금하였다.[55] 이후 교회로 피한 이들이 안전을 보장받는 선례가 되어 기사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56]
오히려 초기 로마 식으로 하려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후기 로마 식으로 변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정복 사업의 정체, 노예 감소로 인한 노동력 감소, 경작지 황폐화, 은광 생산 감소가 겹쳐서 기존 경제가 피폐해진 상태였는데, 3세기에 들어서 북방 게르만족의 남하가 거세졌고 국경선에 가해지는 압력이 기존 1, 2세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져서, 기존의 군단병을 이용한 선 방어(Limes)로 막아 보려다가 물량으로 한 군데 집중해서 우르르 밀고 들어오는 게르만족에게 털리고 말았던 것이다(3세기의 위기).
선 방어가 왜 잘 안 통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우선 로마가 관리해야 하는 국경은 엄청나게 길었고 따라서 한 군단이 커버하는 길이는 어마어마했다. 군단 하나가 6천 명 정도였는데 이것으로 지금의 휴전선 정도의 국경을 관리해야 하는 셈. 따라서 아무리 무적의 로마 군단이라도 한 군단으로 최소한 10만에서 20만 단위로 남하하는 게르만족에 맞설 수 없었고, 따라서 황제가 직접 국경으로 와서 군단을 한데 모아 이들을 쳐부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는 전략 예비대를[57]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을 소집하려면 각 군단 기지에서 빼내야 했다. 그 얘기는 그쪽 국경을 텅텅 비워 놓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렇게 빈 곳으로 빈집털이를 할 경우 로마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병 전력을 늘려 기동력을 향상시켜서 게르만족이 중심부로 들어오기 전에 요격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기존의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 체계가 뒤바뀌었다. 잘 나갈 때는 기존 설렁설렁한 로마 식 체제로도 충분했지만, 사방에 적이 늘어나고 업무가 가중화되다 보니까 동방식 관료 체제와 4황제 체제로 바꿔서 정부 통제와 업무 능력을 향상시켰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된다.
문제는 이렇게 내세운 4황제들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황제가 넷이라는 건 동일한 계급에 군사 지휘권까지 가진 최고 권력자가 넷이라는 것이고[58] 역으로 생각하면, 다른 3명을 제거하면 자기 혼자 권력을 독차지할 수도 있다는 얘기. 이런 생각을 한 건 다른 황제들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박 터지게 싸운 것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느 정도 진정시키지만, 공동 황제끼리의 대립은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59]
로마의 동서 분열 시기쯤 되면, 서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가 아닌 라벤나에서 거주했으며 통치도 라벤나에서 했다. 이후 라벤나는 사실상 행정적으로는 서로마의 중심이 되었으며 서로마 멸망 이후 고트족도 라벤나를 수도로 썼다. 물론 원로원은 아직 로마에 있었지만.
라벤나가 로마를 대신한 이유는 순전히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라벤나는 라인, 도나우 국경에 훨씬 가까운 데다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어 지중해 동쪽으로 가기도 수월하다.
제국이 된 이후에는 로마의 인구 수가 엄청나게 늘었으면서 농지는 전쟁 등으로 버려지거나 했기 때문에, 곡물을 지중해의 뱃길을 통해 수입해야 했다. 이때 식량의 주요 생산지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였다.[60] 그렇다고 이탈리아의 농사가 완전히 폐농한 건 아니고, 밀 농사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식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 대신 포도나 올리브 등의 재배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밀 농사를 짓는 농장도 없지 않았다.
다만 유럽 문화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로마지만, 실제 독서 문화 자체는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만한게 로마 시대에는 당연히 프린터나 복사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인쇄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히 필사해야 하였으며 당시에 책이라는 물건 자체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61] 로마 시대에 책은 어디까지나 감상용, 선교용, 소장용 장식품으로 여겨졌으며, 독서보다는 연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었고, 철학자들의 능력도 독서와 강연을 통해서가 아닌 연설과 대화를 통해 길러졌다. 심지어 일자 무식인 장군들이 외부로 원정을 나가서 전리품으로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장식품으로 집안에 진열해 놓으면, 종이가 부족한 로마 본토에서는 이 위에 덧칠해서 새로운 책을 만들었을 정도(…). 그래서 로마 시대에 기록된 걸로 추측되는 책들 다수에는 뒷면에 고대 그리스, 중동권의 글이 쓰여져 있다. 현대에는 기술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쿠르츠게작트의 동영상에 의하면, 우리가 고대 로마시대를 볼때의 오래 전이다라고 보는것과 고대 로마인들이 고대 이집트를 오래 전이다라고 보는것이라고 같다고 말하였다.[62]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에서는 가부장권이 막강하였는데, 가부장의 권한은 세습되기도 하였다. 가족 내의 가부장권은 사회로 확장되어 파트로네스(보호자)-클리엔테스(피호민) 관계로 확장되었다. 다만 파트로네스는 가부장권에서 확장된 피호민에 대한 권리보다 피호민에 대한 의무가 훨씬 더 무거웠고, 이는 로마 사회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4.1 로마는 누구의 역사인가?
중고나라의 역사
로마 제국의 역사가 누구의 역사인지에 대한 떡밥이 각 국가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일단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가 이탈리아에 위치하고 있고 로마 민족들의 혈통이 어디로 가지않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라는 정설과 원래 영국은 소수의 원주민들이 살았는데 로마인들이 영국을 개척하고 많이 이주(?)를 하였으므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영국의 것이라는 설도 있으며, 또한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는 독일의 것, 서고트 왕국이라는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는 스페인의 것, 프랑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내세우며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하고 있으며,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운운하며 그리스 또한 로마 제국을 자기 역사로 보고 있다. 확실한 건 서유럽에서부터 북아프리카와 아랍권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의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로마사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큰 의미없는 논쟁이므로 현대 유럽 주류 학계에서는 이러한 일을 가지고 싸우진 않는다. 유럽의 각 국가(혹은 지방)마다 로마 제국과 연관이 있던 국가들은 역사에 포함시키되, 누가 정통인지는 따지지 않고 그냥 역사의 한 과정으로 보는 편. 물론 서로마가 붕괴하고, 유럽판 춘추전국시대였던 중세 시대부터는 국가가 아닌 지역마다[63] 역사가 크게 차이나기 시작한다. 유럽 역사에서 키배는 로마 제국 시절이 아닌 중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실 로마 제국에서 크게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유럽의 중세 이후 역사가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4.2 납 중독
로마제국은 연간 80,000톤의 납을 생산하였으며, 이는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과 거의 맞먹는 규모였고, 이로인하여 서반구의 제일 오래된 대기오염을 초래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늘날 그린란드의 빙하코어 샘플에는 2000년전 로마에서 생산되었던 납물질이 검출되엇다고 한다.
송수관 등에 납을 사용하는 등, 납을 일상 생활에서 널리 썼기 때문에 납 중독으로 멸망했다는 설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들도 납의 독성을 알고 있었으며, 납 송수관에 석회질이 끼어서 코팅이 되어 납 중독을 막아주었다고 반박했고, 사실이다. 그런데도 납에 심하게 중독된 유골들이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납을 식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납 용기에 포도주를 담아 가열하면 둘 사이에 반응이 일어나 용기 아래쪽에 연당, 또는 아세트산납(II)(Pb(CH3COO)2)이 생성되는데 단 맛이 나서 로마인들은 그걸 조미료로 사용했고, 여러 로마 시대 요리책에도 연당이 요리 재료로 자주 언급된다(네로 황제가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납 중독으로 멸망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많겠지만, 유골에 나타나는 납 중독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로마인들의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먹은 납으로 인해 건강 피해를 입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납은 갖은 신경계 질병을 일으키고 판단력, 기억력, 지능 등 지적 능력을 방해하는 주요한 물질이다. 거기에 높으신 분들일수록 납 노출량이 높아지니 나라를 제대로 굴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5 로마의 기술력
비록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와 동방 국가들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건축과 정치 시스템, 법학 등의 분야에서 대단한 영향을 후대에 주었다.
5.1 놀라운 건축기술
참고로 유럽의 유명한 도시들 역시 대부분 로마에 의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대개 군사 기지나 로마 이주민들이 세운 마을이었는데 군단병이 곧 시민이었던 로마 군제의 특성상, 식민지에 정착하는 로마인들은 현지인과 결혼한 로마 군인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영국과 프랑스의 수도가 된 런던(최초에는 론디니움이라는 이름이었다)과 파리(최초에는 루테티움이라는 이름이었다)도 로마가 건설하거나 도시화한 곳이다.
유럽 각지에다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규모의 건물들을 막 짓고 다녔기 때문에,[64] 당시 북방 민족들이 로마의 건축물을 보고 거인과 난쟁이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스파냐에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다리가 아직도 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자치지역 남서부 살라망카 주의 주도 살라망카에 있다. 좀 풍화되긴 했어도 멀쩡하게 생겼다. 심지어 지금까지 고쳐서 쓴다.
참고로 로마제국에는 400,000 km의 도로가 있엇으며, 그중 80,500 km가 포장 도로였다. 반면에 비교하면 비슷한 시대의 중국 한나라에는 비포장도로가 고작 35,000 km밖에 없엇다.
로마의 콘크리트는 "포졸리나"라고 해서, 금이 가거나 훼손되면 그 부분에 규산칼슘이 생성되서 틈이 매워지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천연시멘트의 특성으로 기술개발이라고 하기는 조금 뭐하지만.) 그 기술은 비잔틴 문명까지는 유지되었으나 비잔틴 멸망 이후로 실전되었다가[65] 1800년대에 인공 포촐란 시멘트로 복원되었다. [1] 콘크리트의 원형은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하여 사용했으나, 콘크리트 건축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문명은 역시 로마였다.
또한 기술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발상의 문제인데, 수도(水道, 물길) 개념 역시 로마 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사라졌다가 근대에 이르러 복원된 케이스. 프랑스 남부 아비뇽 지방에는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된 높은 수도교가 있는데, 19세기까지도 이 수도교의 용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너무나 폭이 좁은 이 다리는 인간이 아닌 악마가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악마의 다리"라고 불렸다. 비록 기술적으로 건축자체는 가능했지만, 중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는 물을 끌어와서 도시에 공급하는 개념 자체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 수로 기술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로마의 관개수로들 때문에 지연되었을 정도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사하라를 틀어막는 클라스란 것이다![66]
로마의 가도들은 진짜로 틈 따윈 존재하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했으며, 중세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돌을 빼갔음에도 아직도 상당히 그럴싸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기나긴 세월을 거처 남은 돌덩이도 마구 풍화되었을 터임에도 비교적 돌 도둑(...)이 적었던 가도들은 지금 모습이 옛날 모습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꽤 멀쩡하게 생겼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예 틈 조차 발견하기 힘들 정도였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저 멀쩡해보이는 가도가 엄청난 풍화로 다 닳아 떨어진 가도라곤 현대인도 중세인처럼 상상도 못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탈리아의 간선 국도 역시 로마의 가도에 아스팔트만 깔고 쓸 정도이다.
또한, 고대에도 그렇고 중세에서도 숲만 가득했던 옛 갈리아, 게르마니아 지역에 저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시를 때려박는 짓[67]은 로마만이 보여줄 수 있었다.누가봐도 나무만 잔뜩있는 그린벨트스러운 곳들을 지금의 도시로 바꿔놓는 기반을 다 로마가 만든 것이다. 로마가 저 땅들에 도시를 마구잡이로 때려박아준(...) 덕분에 저곳에 문명에 자리잡았으며, 서로마란 슈퍼파워가 붕괴했음에도 암흑시대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중세가 열렸다. 또한 중세를 지나 식민지 개척시대가 설립되는 것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도시화 및 개간지로 만든 것은 중세인들의 힘이다. 지중해권과는 달리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방의 도시의 역할은 지역 거점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이 때려박은 도시의 영향력도 한정적이었다. 결국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로마의 유산인 대농장들은 로마가 쇠락하면서 이에 따라 쇠퇴하고, 그에 의존하던 로마의 도시도 쇠퇴를 면치 못했다. 중세 농업 경제의 발전은 북부 유럽에 걸맞는 농경 방식 도입과 발전, 지속적인 기술 개량,[68] 소규모 촌락 공동체에 의한 적극적인 숲 개간이 본질적인 이유였다.
5.2 시대를 앞서간 식민 정책
공화정 시대의 로마의 식민 정책은 고대 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상대국을 노예화하거나 착취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이들이 점령한 도시에는 동맹국의 지위와 라틴 시민권을 부여하고, 점령지의 귀족 가문의 통치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 이후 그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단 하나, 동맹국으로서 로마의 전쟁에 같이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식민 정책은 고대는 물론 근대에서조차 보기 드물 정도로 온건한 것이었다. 기존 피점령 집단의 존재와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서 그들의 반발은 최소화 되었으며, 이후로도 로마는 스스로 그들의 자치 문제에 간섭을 자제함으로서 피정복민들의 지배층이 그들이 누리던 특권이 침해받는 일이 그다지 없게 하였다. 또한 로마와 동맹하여 같이 싸움이 그들의 안보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이로움을 깨닫게 되자, 피정복민들은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안주하였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제국화되어 갔다.
이러한 관계는 로마에게도 이로움이 있었는데, 각지의 다양한 특색을 가진 보조병은 주로 중보병을 편성하는 로마군에게 다채로운 병과를 제공하여 군사력이 강화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에게 일괄적으로 제공받는 보조병은 독자적으로 최대 8만 남짓한 20개 군단의 동원력을 가진 로마가 이의 1.5배에 달하는 병력을 추가로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로마는 자비로 용병을 고용하는 카르타고나, 자비로 왕국의 시민병을 징집해야하는 동방국가를 능가하는 물량 동원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군사적 이점 뿐만 아니라 정책상의 편리함 또한 제공해 주었는데 점령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한 관료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를 갖추기 위한 비용을 크게 절감시켜 주었으며 각 도시의 지배집단이 스스로 하는 통치는 지배의 효율을 극대화해주었다.
이러한 식민정책의 효과로 점령지를 로마는 피정복민들을 그들의 패권하에 편입하는데 오는 반발을 최소화하여, 점령을 굳히는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게 하였으며 지배영역을 장기간 반발없이 보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로마는 그들의 영역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보존한 지중해의 문명권 모두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넣는데 성공하게 되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라고 부르게 된다.[69]
그리고 해당 정책의 우수함을 카아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 단기간에 넓은 갈리아 지역을 제패함으로서 다시한번 증명해주었다.
이러한 공화정 로마의 정책은 당시에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로마 주도의 평화'라 칭송받았으며, 현대의 미국이 그들의 외교 정책에 참고한, 시대를 앞서가는 대외정책이었다.
단 이러한 정책은 로마가 지중해 문명권을 통합한 뒤 천천히 도시국가에서 영토 전체에 크게 기반을 두는 단일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버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제정 말기에는 여타 제국과 다를바 없는 모습을 보였으나, 공화정 당시 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하는데 있어 선택할 수 있는 대외 정책으로서는 매우 우수하였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이러한 로마의 식민정책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신약의 4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는 제정 초기의 로마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는데, 식민지인 이스라엘에서 피식민지 혈통인 헤로데가 왕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심지어 꽤 권한도 큰 편이다. 헤로데와는 별도로 로마에서 파견된 행정관인 본시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도 있지만, 예수를 풀어주려고 할 때 유대인들이 "빨리 사형하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라고 깽판을 치자 마지못해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70] 당장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조선인들이 "A를 빨리 사형하십시오"라고 총독부에게 깽판을 쳤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로마가 마냥 식민지에게 오냐오냐 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유대 지방에서 반란 일어나자 강경하게 진압하기는 했다. 하지만 반란이 일어났는데 강경하지 않은 나라가 더 이상한 것.
5.3 로마의 정치제도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 참조.
6 로마의 역대 황제들
- 로마 역대 황제 참조.
7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 작품들
- ROME
- 스파르타쿠스 : 피와 모래, 스파르타쿠스 : 투기장의 신들, 스파르타쿠스 : 복수, 스파르타쿠스 :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
- 눈 속의 독수리
- 벤허
- 글래디에이터
- 클레오파트라
- 줄리어스 시저
PC용 게임
시저 3, 시저 4가 실제 도시 운용을 담았다면, 로마 토탈 워와 토탈 워: 로마 2는 전투와 정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왠지 모르게 영미권 창작물에서 표현될 때는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7.1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한 세력들
사실 판타지 장르에 나오는 거의 모든 '고대의 제국'은 로마를 모티브로 했다고 보면 된다.
- 닐프가드 제국(더 위쳐 시리즈)
- 누메노르(가운데땅 세계관)[71]
- 발리리아(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 인류제국(Warhammer 40,000)
- 시저의 군단(폴아웃: 뉴 베가스)
지구(레이스톰)[72]- 제국(엘더스크롤 시리즈)
- 티빈터 제국[73]
- 아마르 제국(EVE 온라인)
- 은하제국(파운데이션 시리즈)
- 프로토스(스타크래프트)
- 화성제국(덕 다저스)
8 관련 문서
- ↑ 성 암브로시우스(340~397)가, 지방마다 단식일이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밀라노에선 밀라노의 단식일을, 로마에선 로마의 단식일을 따른다는 의미. 원래는 이 구절 뒤에 '다른 데에 가면 다른 곳의 법을 따르라(si fueris alibī, vīvitō sicut ibi)'라는 구절이 따라온다.
- ↑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는 공식 국호라고 오랫동안 잘못 쓰여 있었는데, 국호가 아니라 로마의 주권자를 강조한 표어(모토)다. 뜻으로 보아 로마 왕국 시절에는 쓰이지 않았고 로마 공화국 시절에 확립된 표현으로 짐작되고 있다. 고대 로마는 멸망했지만 오늘날도 로마 시의 모토로 사용되고 있다.
- ↑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후세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알려진 당시의 동로마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국가의 공식 명칭도 'Imperium Romanum' 즉, 로마 제국. 또한, 동로마 제국 멸망 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차지한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들조차 스스로를 '룸 카이세리'(로마의 황제) 라고 지칭하여 로마의 후계자임을 자부하였다.
- ↑ 뒤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로마는 원래 태생이 도시국가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이 똑같다.
- ↑ 만약 지중해 면적을 포함하면 10,000,000㎢을 넘는다!
- ↑ 이 고대 로마 최대 판도를 현대의 국가별 국토 면적 순위에 대입해보면 6위 오스트레일리아와 7위 인도 공화국의 중간 정도 된다.
- ↑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2세기 초반에 무려 1억 2천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과장이 섞여 정확하다곤 할 순 없어서 5600만을 전성기 인구로 본다. 2세기 중순 황건의 난 이전 한나라와 비슷한 수준. 비율로만 따지면 당시의 세계인구 약 2억 5천만의 5분의 1이다. 저 비율을 현재 인구에 대입하면 무려 15억이 넘는다. 현재의 유럽 대륙 인구의 약 2배. 그래서 당시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이 로마 또는 한나라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 북유럽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서양 연안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와 북아프리카 상당 지역이 직·간접적으로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였었다. 동유럽의 경우 고대시기 로마보다는 중세시기 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이 컸지만. 까놓고 말해 서구 사회 전체가 직계든 방계든 결국 고대 로마의 후손인 셈이다.
- ↑ 보통 어떤 식으로든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을 고르기는 했다. 아들이 아니면 조카라거나 사위라거나 등등.
- ↑ 그러나 사실상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은 아들이 없는 경우였다.
- ↑ 덤으로 세금 걷는 걸 직업으로 하던 세리들이 알아서 세금을 걷던 막장 로마식 세금제도를 개혁해 보려던 도미티아누스는 막장 황제로 낙인찍히고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 이 문제는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가서야 개선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적어도 3세기 초까진 로마의 유지 지속에 도움이 되었다.
- ↑ 공화정 말기까지 로마는 가히 최강의 병력 보충 능력을 갖춰 물량에서도 막강했는데, 그 와중에 여러 전술을 잘 받아들인 덕분에 병력의 품질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공화정 말기부터 쌓인 모순 때문에 결국 무너지긴 하지만.
- ↑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사용하는 나라나 민족이 없는 것을 고려해볼 때 사실상 사어에 가깝다. 하지만 영국의 사립 학교에서는 아직도 버젓이 주요 과목으로 남아 있는데다 13+ 시험 과목이기도 하다. 또한 가톨릭의 트리엔트 미사 때 사용되는 언어고 서양 각국의 언어에 그대로 쓰이는 표현도 많으며 멋부릴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속라틴어에서 파생된 각각의 로망스 어군의 언어들 모두 라틴어 자체가 변형되어 형성된 언어들이라 볼 수도 있으니 가히 흠좀무.
- ↑ 이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영아를 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지금의 낙태와 비슷한 개념으로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이를 햇볕에 죽을때까지 노출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에서 묵인하였고 따라서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 인구를 늘리고자 한 아우구스투스가 법으로 금지하였고 훗날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되면서 살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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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인 '출생의 비밀'과 흡사한데 때문에 학계에서 실제 역사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 게다가 로마 옆을 흐르는 테베레 강은 로마를 빙 둘러 지나가면서 물난리를 자주 일으켰기에 배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는 이상 저지대에 거주하기란 어려웠다.
- ↑ 영어의 patron(후원자), client(고객)의 어원이다.
- ↑ 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평민중에는 인재가 없었다.
- ↑ 가내 여노예의 자식이 대부분이다.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등은 전혀 해당 없다.
- ↑ 완전 라틴 시민권은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시민권을 말한다.
- ↑ 집정관을 가리키는데, 실제로는 두명의 집행관이 있었고 이 부분은 저자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 성경에 로마가 우호적으로 쓰여있어서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저자가 마카베오 시기의 이상에 더 가까운 로마 공화정의 진취적 사고방식을, 근동-그리스 지방의 전제주의에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마카베오기의 주된 내용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이스라엘의 독립투쟁임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 라티움은 로마 부근의 지역을 뜻한다. 로마를 끼고 흐르는 강인 테베레 강의 북쪽을 에트루리아 지역이라고 부르고 그 남쪽이 라티움 지역이었다. 라티움 지역 밑에는 릴리스 강이 흐르는데 그 남쪽을 캄파니야 지방이라고 부른다.
- ↑ 이는 도시들이 라틴 연합을 맺을 때쯤 이미 로마는 라티움의 절반 정도를 지배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연합군이 수는 많으나 물량에서 로마에게 앞서지 못했다.
- ↑ 참고로 나머지 삼신기 중 하나인 글라디우스는 훨씬 나중에 이베리아 반도의 켈트족으로부터 도입한 것이다.
- ↑ 로마 공화정이라 부르나 사실 로마는 철저한 귀족정이었다.
- ↑ 로마인 이야기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3권에서 그라쿠스 형제 살해가 100년간 내전이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당시 로마 공화국의 모순은 초법적인 행위로 눈앞의 유력 민중파 정치인을 죽인다고 넘어갈 일이 전혀 아니었다.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이유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 그라쿠스 형제다.
- ↑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당시에는 매우 적절한 개혁으로 평가받았지만 이후 군벌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공화정을 무너뜨린 주범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근본적인 토지 개혁이나 자본 구조의 개편 없이(이 문제를 해결하려던 평민 귀족인 그라쿠스 형제는 둘다 끔살되었다) 단순히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꾼 관계로 재원 마련은 물론 지휘관의 사병화가 촉진되었다. 상승 장군으로 유명했던 마리우스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병에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 결국 이런 지지가 사병화를 촉진해 국내 쿠데타도 성공시켰다. 이를 본받은 후계자인 술라와 폼페이우스 등이 쿠데타와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공화정의 근간이 무너져 결국 제정으로 가는 결과를 낳았다.
- ↑ 자세한 내용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항목 참고, 간략히 말하면 본인은 공화정을 지키려고 생각했으나 그 수단으로 공화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요소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모순의 극치였다.
- ↑ 더불어 평민회에서 제정된 법이 원로원의 동의 없이 효력을 가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 ↑ 호민관은 둘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대신 막강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았다.
- ↑ 실제 이유는 원로원이 자신들의 권력 행사에 제약을 거는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 ↑ 지휘권을 반납하고 로마 땅을 밟는 그 즉시 카이사르가 선택할 길은 사실상 암살을 당하든가 원로원 최종권고에 의해 맞아죽든가 둘 중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원로원 최종권고 자체가 원로원에 의한 공개 암살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 ↑ 로마 군인은 원칙적으로 복무 기간 동안 결혼할 수 없었다.
전격 마법사 퀘스트 - ↑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원정시 일부 군단을 주둔지에서 빼내어 다키아로 이동시키자 집단 항명, 집단 탈영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좀 더 이후의 일이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갈리아의 로마군 중 일부를 동방 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도 했다.
- ↑ 은화의 경우, 카이사르 시대에 90% 이상의 수치를 보였던 은 함량이 3세기 초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3세기 중반에는 30%, 말기에는 5%까지 감소했다. 크기가 함께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 기존 화폐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 Jones, "Slavery in the Ancient World" 191~194p.
- ↑ 오히려 위의 기술들은 중세 농업생산력 증가를 뒷받침하는 기술이 되었다.
- ↑ 예를 들자면 콤모두스나 헬리오가발루스 등.
- ↑ 경제학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고대와 중세에는 화폐생성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 결과 국가가 오래 유지될 수록 재정이 막장상태로 흘러 쇠퇴한 뒤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나 국가가 들어서는 패턴을 계속 반복하였고, 이는 로마 또한 피할 수 없었다.
- ↑ 또한 로마는 면세의 혜택을 받는 지배계급과 세금을 낼 수 없는 계층으로 양극화가 진행되었는데 이 또한 근대 이후에나 출현한 체계적인 조세제도를 고대에 시행하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 그 결과 세수입또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 한 곳을 우르르 밀고 들어가 뜷어 버린 뒤, 약탈하고 다시 국경 너머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 ↑ 파르티아는 중앙집권제가 아닌 봉건제라서 로마랑 전쟁을 하려해도 영주들이 말 안듣으면 전쟁 못한다. 이러다 보니 내부적으로 단합 안되어 로마보다 유리한 조건에서인데도 로마한테 많이 털리고 살았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는 중앙집권제를 이루면서 로마를 위협하는 강력한 적이 되었던 셈.
- ↑ 수치적으로 감소하기도 했고, 있는 노예들조차 틈만나면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켜 더이상 노예제 경제가 어려워 졌다. 노예의 가격도 엄청나게 올라 부유층이랑 귀족들도 노예 산다면 고민을 해야할 정도였다. 그래서 자유민의 수를 늘려 세수를 확보하려는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제도적으로 모든 노예가 사라진다.
- ↑ 단 디오클레티아누스식 세제 개혁과 군사력의 증강은 학자들이 당시로서는 적절한 방식이라 지적하나 예산만큼 거두는 세금과 관료체제와 군비의 확장으로 증가한 비경제적 비용은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점에서 이미 쇠퇴 중인지 오래인 로마의 경제력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이러한 조치 이후 로마는 해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계속 줄어들게 된다. 동서 분열된 이후의 서로마가 스페인, 이탈리아, 갈리아,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는 상황속에서도 이탈리아만 가지고 있었던 포에니 전쟁때의 로마보다 훨씬 적은 병력의 동원력을 가졌던 원인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다.
- ↑ 러시아의 총대주교는 차르가 임명했다.
- ↑ 이건 결국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던 동서 교회가 완벽히 분리되는 참사를 유발한다.
- ↑ 고트족은 스틸리코의 로마군에게 깨진 이후 로마의 동맹이 되었으나 스틸리코가 숙청되면서 고트족과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포위만 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르는 정도로 끝내려 했으나 라벤나에 있던 황제 호노리우스의 정치력 부족으로 인해 협상은 실패했고 결국 알라리크는 로마를 함락시켜 버렸다.
- ↑ 1차 원정에서 아틸라는 오를레앙까지 진격했고 2차 원정에서는 북이탈리아까지 진군했다.
- ↑ 당시 황제는 오레스테스의 아들로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작은 아우구스투스)였다. 로물루스는 신화의 로마 건국자이며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초대 황제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처럼 살해당하지는 않았고, 오도아케르가 어린 황제가 편안히 여생을 보내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 ↑ 현재 세계사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멸망 연도이기도 하다.
- ↑ 이 기사가 실린 <파수대>는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하는 잡지다.
- ↑ 이 학설을 "기독교 계통"의 학자들이 주장한다는 이상한 주장이 있는데, 기독교는 당대 로마 제국에 있던 수많은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고,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은 정치ㆍ경제적인 변화가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리스도교의 융성은 백 번 양보해도 원인이 아닌 결과고, 기독교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는 건 20세기 초반에 극복된 옛날 사관이며, 현재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식의 시각도 서로마 멸망=로마 멸망으로 바라봤을때 성립된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중심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1000년을 골수 기독교 제국으로서 버텼다. 천도 이후의 로마, 이른바 비잔티움 제국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아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같은 기초 기독교 지식을 강제 학습(...)하게 될 정도로 뼛속까지 기독교 제국이었다.
- ↑ 로마인들은 정통 교리인 아타나시오 파(오늘날의 가톨릭)를, 게르만족들은 대부분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 ↑ 단, 훈족은 그런 거 없다. 훈족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로 피하든 말든 모조리 죽여버리고 약탈했다. 이 때문에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 ↑ 4차 십자군이 까인 이유 중 하나로, 교회를 약탈했다는 게 들어간다.
- ↑ 특정 지역의 방어선이 뚫리거나 한 곳에 적이 집중해올 경우 추가적으로 증원하는 부대. 현대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로 예비군과는 다름.
- ↑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처음 제도를 만들었을 때는 동일한 지위의 황제인 정제(正帝)는 2명뿐이고, 나머지 2명은 부제(副帝)로서 정제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이 시스템이 무너진다.
- ↑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란 직책을 공화국 시기의 집정관처럼 만들려고 했을지도 모르나, 애초에 임페라토르가 공화정 시절에는 병사들에게서 인정받은 개선 장군을 뜻하는 말이었고, 그게 제정 시절 들어가서 군사적인 색채를 짙게 가진 '황제'를 가리키는 명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키케로 시대를 기준으로 가르치는 고전 라틴어에서는, Imperator가 '황제'라는 뜻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 ↑ 흔히 북아프리카 하면 사막을 떠올리지만, 당시에도 오늘날도 북아프리카 해안가는 올리브와 밀 생산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대 카르타고의 영역이었던 튀니스, 알제리 지역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도 풍부한 밀 생산량을 자랑했다. 고대부터 '제국의 빵 바구니' 소리를 들었던 이집트는 뭐…
- ↑ 다만 제본 방식이 두루마리 형태에서 현재의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한것은 로마 시대 맞다.
- ↑ 현대를 기준으로 고대 로마는 2000~2400여년 전인데 고대 로마를 기준으로 고대 이집트도 2000~2400여년 전이다.
- ↑ 봉건제에서 왕이란 그냥 다른 영주들과 계약 관계로 엮인 관계이다. 사실상 그냥 나보다 큰 영지를 가진 또다른 영주. 때문에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했고, 각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 단위의 소속감이 더 강했다.
- ↑ 아니, 짓는 정도가 아니라 때려박고 다녔다.
- ↑ 시멘트 자체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 ↑ 물론 로마 이전에도 아직 북아프리카에는 숲이 남아 있었고, 로마도 그걸 물려받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수로 건설로 사하라의 북아프리카 침공을 엄청나게 늦추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밀어냈다. 흠좀무. 참고로, 아랍 제국이 동로마를 개발살 내면서 아프리카를 동로마가 상실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지금 북아프리카는 죄다 사막이다.
- ↑ 로마에서 시민들에게 인정 받는 제일 쉬운 방법은 정복 성과를 내고 개선식의 영광을 받는 것인데, 이걸 위해 정복한 땅들은 죄다 숲만 가득한 미개척지였다. 하지만 로마는 거기다가 그냥 도시를 건설해 해결한다.
- ↑ 전술했듯 로마 멸망 전에는 이런 농경 방식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 ↑ 정복하는 일보다 점령해 굳히는 게 더 어렵고 많은 물량이 소모되는 일임을 감안, 로마가 다양한 문화를 가진 피정복민들을 그들의 세력하에 그토록 빠르게 편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해당 사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라크 전쟁 참고.
- ↑ 물론 이 사건의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빌라도는 별 고민 없이 예수를 처형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복음서들이 AD 1세기경의 문서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당시의 생활상 정도는 제대로 반영이 되어 있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즉 식민지 주민들이 행정관에게 징징거려서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는 정도는 가능하였다. 물론 행정관이 각 잡고 밀어붙이면 불가능하지만.
- ↑ 후계 국가라 할 수 있는 곤도르는 비잔티움 제국을 모티브로 했다.
- ↑ 상대하는 적들이나 그 적들이 위치한 지명의 면면을 보면 고대 로마 제국이 싸워왔던 적들과 나라들로부터 이름을 딴 게 상당수다.
- ↑ 이쪽은 제정 시대 로마가 아닌 공화정 시대 로마를 모티브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