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공화국 Repubblica Fiorentina | ||
국기 | 국장 | |
1115년 ~ 1532년 | ||
위치 |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 |
수도 | 피렌체 | |
정치체제 | 과두 공화정 | |
국가원수 | 곤팔로니에레 | |
언어 | 이탈리아어,라틴어 | |
민족 | 토스카나인,라틴인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1115년 건국 1494년 메디치가 축출 1512년 메디치가 복귀 1532년 공국으로 전환 | |
통화 | 피오리노 | |
성립 이전 | 토스카나 후작령 | |
멸망 이후 | 피렌체 공국 |
1 개요
이탈리아 중부 내륙에 존재했었던 공화국
2 역사
피렌체 공화국의 설립은 카노사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피렌체는 토스카나 후작령을 관할하던 마틸데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을 지지하고 있었다. 1081년 롬바르디아에 당도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에게 자유를 줄 것을 약속했고, 이에 피렌체를 뺀 토스카나의 모든 도시들이 황제파로 돌아섰다. 피렌체의 귀족들은 마틸데 후작과 함께 하인리히 4세와 싸워 피렌체를 지키는 데 성공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은 상인귀족들이 대거 성장하였다.
1115년 마틸데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피렌체는 자연스럽게 공화국이 되었다. 마틸데의 유일한 영지였던 피렌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건지배에서 벗어나 코뮌 체제를 설립했고, 독립국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하였다. 독립한 피렌체는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양모무역, 제강, 무기생산 등 상업에 두각을 드러냈고, 이탈리아 각지에서 상인들과 노동자들의 이주를 받아 급속히 팽창했다. 1050년경 1만 5천명이었던 도시의 인구는 1200년경 3만명까지 늘어났고, 1172년 성벽을 중축해서 도심지의 면적을 확대시켰다.
피렌체의 최초 권력자들은 기사 작위를 보유하고 있었던 토착귀족이었고,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100년간 피렌체의 정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인구증가와 함께 성장하는 중산층 세력이 커져갔고, 토착귀족 세력과 중산층 세력의 대결은 13세기 구엘프와 기벨린의 대립으로 번졌다. 여기서 토착귀족층은 기벨리니파(황제파)가 되었고, 도시 중산층과 노동자, 농민들은 구엘프(교황파)에 가담했다.
1244년 토착귀족들의 권력독점이 완화되어 구엘프파가 세력을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1250년 중산층과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켜 기벨리니 세력을 축출하였고, 공직을 장악한다. 구엘프의 집권은 주변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불러왔는데 기벨리니파가 집권하고 있었던 시에나 공화국[1]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2] 피렌체는 다른 구엘프 도시[3]들을 소집하여 1260년 시에나로 진격했고, 시에나는 신성 로마 제국과 다른 기벨리니 도시들을 끌어들여 맞섰다. 결국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와 기벨리니 군대가 승리하였고, 피렌체에서 쫒겨난 토착귀족들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중산 계급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1282년 교황의 지지를 받은 구엘프파는 '정의의 법률'을 제정하여 토착귀족 가문들을 몰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토착귀족 가문 72개 중 55개의 가문이 시민권을 빼앗기고 축출당했고, 이들은 피렌체에서 영구몰락하고 말았다. 기벨리니를 몰아낸 구엘프는 흑당과 백당[4]으로 또다시 분열했고, 흑당은 1031년 교황 보나파시오 8세의 야심을 빌여 백당을 몰아냈다. [5] 흑당은 131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무너진다.
1348년 흑사병이 창궐하여 도시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다. 여기에 잉글랜드 왕실에 200만 플로린을 대출한 것이 디폴트로 이어져 바르디[6], 페루치, 브란카치 등 많은 상인가문들이 몰락하였다. 바르디 가문은 손해를 만회하려고 쿠테타를 획책하다가 추방되었으며 피렌체에는 큰 정치공백마저 발생하였다. 여기에 교황의 세력이 발전해서 피렌체를 위협할 정도가 되자 피렌체 시민들에 반교회적 감정이 커져 갔고, 특히 신흥 상인층은 전통적으로 교회와 결속되어 있는 구지배층을 공격하고자 고의적으로 반교회 선전을 전개했다. 이에 137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냐에서부터 피렌체를 침공했다. 피렌체군이 이를 격파했고, 교황은 교회군을 상대로 반격을 했다는 이유로 피렌체 시 전부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대교황청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피렌체가 그레고리우스 11세의 사망을 기해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파문에서 풀림으로써 끝났다.
1378년 7월. 14세기 후반의 불황 속에서 모직물 공업 종사자들인 소모공(치옴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미켈레 디 란도를 지도자로 세우고, 베키오 궁전을 점거하여 체제를 전복시켰다. 미켈레 디 란도는 수공업자들과 치옴피를 포함한 정부를 만들어 내각을 꾸리려고 하였으나, 1382년 상층 시민측의 반격을 받아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알비치, 스트로치, 토르나부오니, 알베르티 등 상인 귀족 가문들이 정계를 장악했다.
14세기 말 흑사병의 공포가 가시면서 피렌체는 다시 호황을 맞았다. 피렌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흑사병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였고, 유럽의 상업 중심지마다 진출하여 세를 넓혔다. 이 때 피렌체의 금융업은 경쟁 상대가 없었으며[7], 직물 산업은 2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이러한 발전은 곧 도전을 받게 되었다.
비스콘티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던 밀라노 공국은 15세기 경 포 강 일대의 비옥한 평야를 장악하고 북이탈리아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8] 롬바르디아를 얻은 갈레아초 비스콘티 공작은 1397년 피렌체를 공격했다. 밀라노는 피사와 루카, 볼로냐, 시에나 등의 이탈리아 중부 도시들을 점령하고, 피렌체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나 1402년 사망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은 피렌체는 콘도티에리를 활용해 피사와 리보르노를 탈환해서 토스카나의 패권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아레초에서 리보르노까지 세력을 넓힌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토스카나 지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자유를 상징하는 자치도시들의 상징이 되었다.
이 무렵 무젤로에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이주했다. 이들의 가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부동산과 금융업 등의 상업활동으로 부를 늘렸고, 1410년 피렌체에서 3번째 부자가문으로까지 성장하였다. 바르디 가문이나 알베르티, 루첼라이, 포르티나리 등 유력가와의 관계까지 구축한 메디치 가문은 여러가지 기회를 틈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가문이 되었고,[9] 그 아들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 교황 간의 정상회담을 중재하는 등의 치적을 쌓고 권력투쟁 끝에 알비치, 스트로치 등의 유력가문까지 몰락시키고 '국가의 아버지' 칭호를 받아 사실상의 통치자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1478년 4월 26일 파치 가문의 음모를 기회로 잡은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파치 가문을 몰락시키고 절대권력을 잡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과의 외교를 이용해 이탈리아를 평화 상태로 만들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예술가, 문학인들을 지원,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과 함께 메디치가의 몰락도 시작되었다. 로렌초의 아들인 피에로 메디치는 형편없는 정치를 폈고, 1494년 샤를 8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렌체에 쳐들어오자 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메디치가의 무능에 실망한 피렌체 시민들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내세워 메디치가를 축출했다. 사보나롤라는 엄격한 신정 정치를 폈고, 허영의 불꽃이라는 의식을 거행, 많은 예술품들을 파괴하였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그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대립하자 사보나롤라를 체포,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했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이후 피에로 소데리니가 이끄는 공화정 정권이 출범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정권에 참여한 것도 이 때이다. 소데리니 정권은 베네치아의 안정된 정치체제를 모방, 정치개혁을 시도해 이상적인 공화주의를 실현하려고 애썼지만 너무 유유부단한 그의 성격 때문에 고배를 맛보아야 했다. 피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출병시켜 진압하려고 했지만 용병제의 모순 등의 이유로 실패했고, 메디치가 숙청에 너무 소극적이었던 나머지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자 소데리니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복귀한 메디치 가문은 실정을 거듭했다. 카를 5세의 세력에 당황한 메디치 가문은 카를 5세를 견제하고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에 증원해준 군대가 카를 5세에게 전멸당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사코 디 로마로 로마가 불타자 자유를 갈망하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한 번 더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공화국 정부를 재건을 시도했다. 마침내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피렌체를 포위했을 때 피렌체는 영웅적으로 적의 포위 공격을 저지하려고 준비를 갖추었고, 도시는 황제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성문을 폐쇄하면서 요새 구축의 지휘관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고용했다. 하지만 전투 끝에 피렌체는 항복을 했고,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인 알렉산드로 메디치가 카를 5세에 의해 피렌체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피렌체의 공화정은 종말을 맞았고, 알레산드로 메디치 공작은 시에나를 정복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운다.
3 정치
도시의 유력 길드가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정경일체 국가였다. 상공업 길드를 아르테라고 불렀는데 금융업, 직물업, 상업, 의약업, 법률업자들로 구성된 대 아르테와 정육, 주점, 목공, 석공 등 나머지 14개 길드로 구성된 소 아르테로 나뉘었다. 토착귀족 대다수는 이 아르테의 가입이 불가능했고, 시 정부가 토스카나 각지의 지방호족 명단을 발표해 정치참여를 금지했다. 고대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30세 이상의 남성에게만 정치 참여를 허락했다. 결과적으로 50만에 달하는 영토에서 정치 참여가 가능한 사람은 3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의회였던 인민 평의회와 행정 기관이었던 총무회는 대 아르테 조합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국가원수인 곤팔로니에레는 항상 대 아르테 조합원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과두공화정 체제는 자유를 표방하는 피렌체인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고,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가문들끼리도 엄청난 견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 사회는 이런 갈등을 조정할만한 정치적 역량이 부재한 상태였다. 피렌체는 군사력를 전적으로 용병에 의존했는데 용병(콘도티에리)의 고용은 전시에만 이뤄졌고, 경찰력은 무존재하다시피 했다. 여기에 국가원수 임기는 2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길드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서 피렌체 정치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제와 비교해볼 때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4 기타
귀족가문들이 엄청난 수익금을 예술과 문학 등 문화산업에 쏟아부은 나머지 르네상스의 총본산이 되었다. 당장 피렌체 출신 네임드들만 해도 단테 알리기에리, 브루니, 페트라르카, 지오토 디 본도네, 보카치오,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도나텔로, 기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 셀 수 없이 많다.
어쌔신 크리드 2의 시작 배경이다.
5 관련 문서
- ↑ 시에나 공화국은 1125년 황제와 동맹을 맺고, 마틸데 후작과의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건국된 공화국이다.
- ↑ 애초에 해상무역과 모직산업, 금융업 등 분야에서 피렌체와 경쟁하고 있었던 시에나가 언젠가 피렌체와 전쟁을 할 것이라는 사실은 뻔했다.
- ↑ 볼로냐, 만토바, 페루자 등
- ↑ 흑당은 교황과의 결속 강화를 주장하며 뭉친 친교황파였고, 백당은 자주적 지위 쟁취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 ↑ 이 때 백당에 속해있던 단테 알리기에리 역시 추방당했다.
- ↑ 이 가문의 주력 사업은 은행업이었으나, 1346년 파산해서 망했다. 여담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듣보잡에 가까운 이 가문이 서브컬쳐에 등장한 예가 있다. 바로 대항해시대 온라인. 문제는 피렌체가 아니라 뜬금없이 리스본에 '발디'라고 오역되서 등장한다는 것..
- ↑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피터지게 전쟁을 하고 있었고, 시에나는 흑사병의 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
- ↑ 밀라노는 14세기경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바람을 운좋게 피했다.
- ↑ 대표적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삽질인 루카 공방전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