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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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김준근, <기산풍속화도>,석전하는 모양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소장. 이 양반의 작품은 의외로 국내보다 외국에 많다.

과거 한국에서 유행했던 놀이. 조선시대에는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의 강화살인버전이다...

양반,평민,군인 안가리고 잘싸운다(...)왠지 귀여운 그림체이지만 실제라고 상상해 보면 흠좀무.[1]

이름 그대로 싸움이다. 머리에 짚으로 짠 모자를 쓰고 몽둥이를 들고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싸우는 놀이…인데 하다가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당연한 거 같은데?. 크게 서로 돌을 던지고 피하는 투석전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육박전으로 나누어 있으며 전쟁 마냥 진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한다.이쯤 되면 사실상 전쟁 맞는 듯 승부는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심지어는 상대편의 마을까지 쳐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하고 며칠씩이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전쟁 맞네

<수서>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석전(石戰)의 풍습은 삼국시대(고구려) 때부터 전해진다.[2]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조한 북한에서 초기에 고구려의 풍습 중 하나였던 이 석전놀이를 재현하였다가 딱 한 번 시행해보고 그만 뒀다고 한다. 이유는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 등이 기록한 조선의 석전 풍습을 보면 거의 조폭들의 집단항쟁 수준이었다. 수십, 수백의 장정들이 서로 짱돌을 던져대고 곳곳에서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진 부상자가 속출하며 심지어는 승세를 탄 쪽이 상대방 마을로 쳐들어가서 집까지 부술 정도였으니(...) 엄마 뭐야 이거 무서워! 더 나아가 석전은 때로는 권력자, 예를 들어 평소에 횡포를 부리던 지주라거나 수탈에 앞잡이 역할을 하던 아전 등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 돌을 던지는 식으로 항의하는 '민심' 의 표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과연 일제가 두려워하여 금지할 만하다. 누가 한국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 라고 했나?

조선시대에는 왕가의 사랑을 받아 태종 이방원은 에 걸린 와중에도 석전 구경하겠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기도 했으며 태조 또한 석전을 좋아했다 한다. 세종의 경우는 처음에는 지원하다가 나중에는 금지했는데 이런 와중에 양녕대군의 아들들이 석전에서 놀다가 사람을 죽여서(…) 그들을 귀양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신 접대용으로 석전을 행하기도 했고 평민들은 다 모여서 석전을 하기도 했다.현재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하는 운동회의 콩주머니 던지기가 어쩌면 이 놀이를 계승한 것일지도?[3]

이러한 석전을 즐기는 미풍양속(?)은 중종 조에 최임이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쓰이는데, 바로 제포에 웅거한 왜구가 차일과 방패를 설치하고, 버티자 안동지방민으로 구성된 투석 부대를 투입해 모조리 짱돌로 개박살내버린다.[4]뭐지? 성난 군중인가?! 그리고 사관은 여기에 예로부터 안동지방 사람들이 석전을 즐겼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후에도 왕왕 기록에서 석전 부대가 나타나지만 조총 등 개인화기가 발달하면서 유희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영조 때에도 기록이 보이는 등 꾸준히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일제에 의해 근절되기 전까지 석전은 계속되었으며[5] 솔까말 금지시킬만하다 부상자는 기본이고 가끔 사망자까지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니 조선시대에도 이미 여러 번 금지됐으니 꼭 일제가 아니더라도 정부에서 금지시킬 것이다. 선교사 등도 이 놀이에 깊은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등에서도 이런 돌팔매질의 전통(?)은 존재했으며 스페인에선 이게 발렌시아주 부뇰 토마토 던지기로 변화했다.[6] 단 토마토를 으깨서 던지는게 룰이다. 또한 럭비도 원래는 공 하나를 두고 마을 두 쪽이 싸워가면서 상대편 마을까지 을 갖다 놓는 놀이였다.

오늘날에 이러면 주변 기물 파손은 물론 다친 상대방이 어쩌다 합의해주지 않으면 범죄다.

다큐멘터리 '깡패건달로 보는 100년'에 따르면 석전꾼들은 정월 대보름에 강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으로 한 해의 농사를 여는 악습풍습인 석전에 전문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석전꾼은 범죄자나 거지 등 불량배들이 많았고, 관의 감시를 받았던 이들은 관리들의 동원에 쉽게 응할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반체제적인 독립협회가 집회를 할 때 공권력으로는 해산시킬 수 없었기에 사적인 경로를 통해[7] 동원하여 해산시켰는데, 이 중에 오강의 석전꾼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즉, 석전은 일반적으로 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한강 정모와는 상관 없다.

드라마 별순검 시즌 1에서도 석전과 관련된 사건이 등장한 적 있다. 남촌과 북촌에서 연례 석전을 벌이던 중 북촌 최고의 석전꾼이 죽게 되는데, 이것이 사실 우연히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석전 시합전에 마시는 국에 비상을 타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

다음 링크는 석전의 역사에 관한 만화이다.

1부
2부
3부
개그 번외

바리에이션이자 후속 버전으로 눈싸움이 있다. 물론 과거 조선,고려시대에도 눈싸움은 즐겼을 것이지만 가끔 위험한 버전으로 돌에 눈을 뭉쳐 돌눈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절대 해선 안된다.
  1. 생각해 봐라. 저 점들이 다 짱돌들인데 저게 몸의 어딘가에 맞는다고 상상하면...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2. 고구려는 매년 정초에 패수(浿水:지금의 대동강) 위에 모여 좌우 두 편으로 나누고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운다. 이 때 국왕은 요여(腰轝)를 타고 와서 구경한다.
  3. 애니메이션인 장금이의 꿈 2기에서는 국왕이 참관하는 가운데 투석전이 열리는데 부상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실제로 콩주머니를 던진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거 없이 하드코어하게(....)
  4. 이때 왜구의 돌격을 막기 위해 녹각목을 들고 전진.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40에서 50미터가량의 거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또 왜구가 차일과 방패를 설치했다는 것에서 어설프게 만든 차일과 왜구가 가져온 제대로 된 방패의 구분도 가능하다. 때문에 등장한 것이 일본방패호구설.
  5. 금지한 이유는 치안 안정. 실제로 일제 이전 조선시대에도 석전을 구실로 지주 집이나 관공서에 돌을 던지는 행동이 많았다.
  6. 주 원인은 발렌시아 지방의 토마토 가격의 폭락과 프랑코 정부의 병크
  7. 풍운한말비사 기록에는 팔도의 역사, 보부상과 함께 오강의 석전꾼이라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