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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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도가 예술

광주일고 1학년 시절에는 약간 뛰어난 선수 수준이었으나, 2학년때부터 각성하여 3학년때는 이미 전국무대를 초토화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선동열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0년에는 프로야구 출범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었고, 연세대한양대가 선동열을 입학시키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지만, 고려대는 초고교급 선수인 선동열의 스카우트비용이 없어서 오퍼를 넣지 못했던 상태였다.[1] 그러나 선동열의 아버지 선판규씨가 직접 고려대 야구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려대에 진학시킬 의사를 내비쳤고, 당연스럽게 진학이 결정되며 1981년 선동열은 고려대학교에 입학한다.[2]

고려대학교 입학 이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참여, 김건우, 조계현 등과 함께 초대 우승을 일궈냈다. 1년후인 1982년에는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당시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전에서의 거듭된 호투로 대한민국 우승의 주역이 된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찍은 평균 자책점은 0.31. 다만 이 대회 방어율 1위는 0을 찍은 임호균이었다. 이 시기부터 최동원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자리를 물려 받는다.

1984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LA 다저스에서 오퍼를 받았다는 발언을 하였고, 본인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 1982년에 다저스에서 영입을 제안받았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3] 1984년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4차전과 6차전는 부진했지만, 1984년도에 LA 올림픽에서는 꽤 호투했다. (16이닝 자책점 1점, 1승1패 방어율 0.56) 다만 토너먼트제에서 선동열이 1패를 한 것은 문제(자책점은 1점)였고, 쿠바가 빠졌는데도 한국팀이 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초특급인 투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해태는 구단의 사정이 좋지 않아 최대한 계약금을 깎아보려고 이런저런 수를 썼다. 하지만 선동열 측은 최소 3억을 요구했고, 해태는 난색을 표했다. 이 과정에서 군면제에도 실패하고[4], 안 되면 대학원이나 가버리겠다고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이것마저 떨어져 버린다. 해태는 이제 고개 숙이고 오겠구나했는데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야구단과 계약해버린다.(...) 당연히 해태 팬들은 난리가 났고 해태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깨질만한 물건들은 죄다 박살이 나는(...) 분위기 속에서 1985년 새해로 넘어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태와의 협상은 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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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선다. 해태 팬들은 이제 해태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깰 수 없는 물건들까지 죄다 박살을 내기에 이르렀고(...) 결국 선동열의 어머니가 간곡히 설득한 끝에 1억 5천에 해태 유니폼을 입는다.

그러자 이번엔 한국화장품 측에서 반발. 그도 그럴것이 엄연히 입단한 자기 선수가 계약 해지도 안했는데 이중계약을 맺은 꼴이니...당시엔 아마야구 선수는 최소 2년을 플레이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아마야구연맹은 이 규정을 들이댔고, 프로입단계약 무효 가처분소송까지 제기했지만 어찌해서 해결되고 1985 시즌 후반기부터 등판하게 된다.[5]

이렇게 복잡하게 프로에 입성한 후 그의 전설은 시작된다.

2 프로 선수 시절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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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각도가 예술 야 각도드립좀 치지마 웃겨서 못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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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투수라 불렸던 사나이.[6]

무등산 폭격기 무등산 각도기

데뷔 첫 해(1985년)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이중 계약 파문으로 후반기부터 출전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첫 프로 경기에서는 7.2이닝 동안 무려!! 5실점이나 하는 등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줬으나 평균자책점 1위(1.70)를 기록하며 7승 4패 8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했다.[7] 그 해 신인왕은 놓쳤다. 신인왕은 프로 입단 동기생인 같은 팀의 이순철.

상대팀이 이기고 있어도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상대 타자들이 기가 죽었을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김응룡 감독은 선동열이 컨디션 난조로 나오지 못할 때도 불펜에서 몸을 풀게해서 일부러 타자들 기를 죽이곤 했다고...[8]

박찬호 이전에 미국 MLB에서 관심을 가졌던 한국 야구선수가 딱 2명이었는데 바로 최동원과 선동열이라고 한다. 물론 전자는 토론토 현지 언론에서 거론이 됐다는 건 알 수 있는데, 후자는 선동열의 주장과 선동열이 이야기를 들은 언론 및 주변 몇 몇 야구관계자의 발언 이외에는 구체적인 증거없는 썰일 뿐...

통산 평균자책점이 1.20이고 이걸 능가하는 기록은 더 이상 나오기 힘들 전망이며, 역대 평균자책점 2위인 최동원이 2.46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애초에 KBO 역사상 선동열의 통산 방어율보다 낮은 방어율을 1시즌이라도 기록해 본 선수는 1993년에 1.13의 방어율을 기록한 OB의 김경원밖에 없다. 통산 WHIP도 0.80 인데, 2위인 이상훈 선수의 1.05와는 제법 차이가 많이 난다. 1993년 시즌에는 10승 3패 3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0.78", WHIP는 0.54로 역대 시즌 최고의 평균자책점WHIP을 기록했다. 게다가 0점대 평균자책점을 3시즌 이나 기록했다. 최전성기로 꼽히던 1986년에는 262이닝 동안 24승 6패 6세이브를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0.99",[9] 1987년에는 162이닝을 던져 14승 2패 6세이브에 평균자책점 "0.89".[10] 86년도 당시 108경기를 치르던 당시 KBO 리그에서 혼자서 무려 262이닝을 던졌다(...) 다만 1993년과 1986년이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KBO 전체 방어율이 3점대 초반 정도였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물론 1987년은 KBO 전체 방어율이 3점대 중반으로 93, 86시즌보다는 다소 높은 편이었다. 3점대 중반도 물론 KBO 전체 방어율이 5점대 초반에 이르는 2016년 현재보다는 많이 낮은 수준이지만.

그의 선수경력 기간 동안 선수생활 초반의 나이 차가 좀 있던 최동원을 제외하면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최동원과의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로 호각. 이 경기들에 대해서는 선동열 VS 최동원 문서 참조.

평균자책점 외에도 인간 같지 않은 기록이 많다. 90년대 초 KBS 이병훈 해설이 선수시절 선동열의 공을 쳐서 홈런을 때린 뒤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에 자기 사진이 나올까 설레었으나 정작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의 기사는 선동열 홈런 맞다.(…) [11]

88년도에는 16승 5패 10세이브 방어율 "1.21"로, 에이스로서 전후기 통합리그로 치뤄진 단일 시즌 첫 해 우승을 견인했다. 198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7.1이닝 동안 탈삼진 14개에 무실점으로 빙그레 타선을 압도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 [12] 89년과 90년에는 각각 21승 3패 8세이브 방어율 1.17, 22승 6패 4세이브 방어율 1.13으로 리그 MVP와 투수 3관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13] 89년에도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리그 4연패에 기여했으나, 90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잡고 우승.[14]

1991년에는 선수생활 7년만에 연봉 1억원 계약을 맺었다. 입단 계약금으로 억단위를 받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순전히 연봉만으로 1억을 받은 것은 선동열이 처음. 요컨대 선동열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억대 연봉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이 해에도 19승 4패 6세이브에 방어율 1.55를 기록하며 투수 3관왕을 차지. 그러나 리그 MVP는 35홈런을 때리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빙그레 이글스장종훈이 차지했다. 이 해 역시 해태가 6번째 우승을 달성.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9회에 선동열은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장식하며 1989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이어 포수 장채근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그러나 1992 시즌 이후 선동열은 선수생활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1992년 4월 11일 잠실 OB전에 그가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날 일기예보에 다음날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서 경기 취소를 확신하고 마음놓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비가 잦아들어서 경기가 강행되었고, 선발로 등판해서 경기를 치르던 도중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가운데 식어가는 어깨로 무리하게 투구를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냈지만 그 결과 어깨에 건초염이 생기면서 부상으로 거의 시즌을 접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예상도 못했지만 이 경기가 결국 선동열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 완봉승이 되었고, 결국 그의 야구 인생과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다 줬다. 선동열의 92년도 기록은 2승 8세이브 0.28(...)[15] 선동열을 제외하고도 10승 투수가 5명 나왔던 92년의 해태 타이거즈 전력을 고려하면 해태로서는 매우 아쉬웠던 시즌. 물론 시즌 1위였던 빙그레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롯데의 전력이 매우 강력하기는 했다.

이후로, 선동열이 거의 시즌을 거의 공치다시피 한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의 기적의 행진의 제물이 되는 이변의 희생자가 되었으며,[16] 선동열은 이 경기 이후로 어깨의 근지구력 약화로 1993년에는 전업 마무리로 뛰었다.[17]흔히 이 부상 이후 선동열이 완전히 마무리로 전업했다고들 하나 실제로 선동열은 1994년에 선발 재전환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 커리어 로우 평균자책점을 찍고근데 그게 6승 4패 12세이브 2.73(...), 그 다음해이자 한국 프로야구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5년까지는 전업 마무리로 뛰게 된다. 이 해 5승 3패 33세이브 방어율 0.49(!)[18]를 기록. 그리고 해태 선발진의 축은 선동열에서 조계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에서의 김응룡의 기용법 덕분에 한국에서의 통산 146승 중 딱 절반인 73승이 구원승이다. 그래서 통산 최다 완투 및 완투승 타이틀은 롯데의 윤학길이 가지고 있다. 단, 통산·시즌 완봉승 기록은 선동열이 가지고 있는 게 맞다. 1986 시즌의 8완봉과 통산 29완봉승. 참고로 최동원 역시 개인 최고 성적을 올린 1984 시즌 후반기에 구원으로 더 많이 등판했다. 김응용 강병철 두 감독 모두 '저렇게 잘던지는 놈을 선발내서 4, 5일에 한번씩 써먹으니 그냥 불펜대기 시키다가 위급하면 막 써먹는게 더 좋겠네' 싶어서 불펜으로 돌렸고 실제로 대충 몇점차 안났는데 선발이 좀 휘청댄다 싶으면 몇 이닝이 남았든 그냥 올라가서 던지고 다음날도 그렇게 던지고 뭐 그런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는 강병철 감독의 경우엔 본인이 직접 인정했을 정도.

이렇듯 한국에서 선수 시절 선동열은 완벽에 가까운 투수였으나, 포스트시즌에서만큼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다. 풀타임 선발로 뛰었던 86년~91년을 기준으로 할 때 5번의 한국시리즈와 3번의 플레이오프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72이닝, 방어율 2.50, 피홈런 6개.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나, 그의 프로통산 방어율과 통산 피홈런을 생각하면, 매우 나쁜 기록이다. 또한 풀타임 선발로 뛴 이 기간 동안의 8번의 포스트시즌에서 겨우 2차례의 선발승을 기록하였다는 것도 선동열로서는 의외인 점. 그래서 혹자는 선동열은 정규시즌용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동열의 압도적인 페넌트레이스 성적에 비한 성적일 뿐 저 기록 또한 당연히 충분히 훌륭한 기록이다. 그만큼 해태는 선동열을 페넌트레이스 내내 잘 써먹었고, 선동열도 시즌 내내 활약으로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게다가 해태는 한국시리즈만 가면 선동열 외 다른 선수들이 제대로 각성하는 묘한 징크스(?)가 있었기에 선동열의 상대적으로 빈약한 포스트시즌 성적은 종종 묻히곤 한다.

2.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커리어 처음으로 굴욕을 겪은 시절. 그리고 그 굴욕을 이겨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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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렬이 상대타자를 경계한다는건 KBO 리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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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km 찍고 신문일면에 실리던 내가 아니야![19]

첫 해에는 국내 프로야구와는 다른 스트라이크존 적응 문제와 더 높은 레벨의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타자들이 헛스윙하기 급급하던 공을 일본타자들은 가볍게 안타를 만들어내니 속수무책일 수 밖에. 특히 붉은 악마 군단, 빅 레드 머신 등으로 불리는 히로시마 핵타선에 유난히 약해서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는 0.1이닝 7실점이라는 대기록까지 세웠다(...). 그 후 2군을 전전하며 패전처리로 주로 활약했다. 당시 요미우리의 용병타자였던 셰인 맥이 선동렬의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홈런을 친적이 있는데 경기 후 슬라이더밖에 없네. 슬라이더만 쳐라는 멘트를 날린 적도 있었다(...). 사실 일본 진출 첫해에도 FIP는 2점대였으니 세이버매트릭스의 관점으로 평가하면 운도 따라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진출한 첫해인 1996년가 주니치 커리어 중에서 K/9이 가장 좋았던 시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20] 빠른 공의 구위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다. 즉 해태시절보다 구위가 떨어져서 털렸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얘기. 정작 문제는 국내에서는 그렇게 빨아주던 주자견제능력과 제구가 일본에서는 기초도 안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1996년도 BB/9은 주니치 시절 중 가장 좋지 않은데 3.6을 조금 넘어간다. 국내 마지막 커리어인 1995년도 BB/9이 1.15였으니 1년만에 BB/9이 3배나 폭등했다. 거기다 타자가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린 라이트였다. 구위는 좋아서 삼진은 잘 잡는데 좋지 않은 제구에 볼넷으로 주자가 출루하면 도루하고 불안한 경기운영으로 장작이 쌓이며 큰거 하나 맞고 대량실점 패턴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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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공의 구위가 아닌 다른 원인을 지적하시는 위원님 결론은 선동렬을 제대로 상대하지 않은 국내타자들 탓!

굴욕을 맞본 1996년 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되자 마음을 다잡고 투수코치에게 직접 개인훈련을 부탁해서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간다. 이때 어찌나 독하게 훈련했던지 김응용 감독이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거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루 3000개 투구와 하체단련으로 제구력을 다잡고 투구폼을 수정하여 주자견제능력을 보완하는 등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때마침 개장한 홈구장이 투수들의 천국 나고야돔이라는 이점 덕분에 1999년 시즌까지 좋은 활약을 보였다. 1999년 시즌은 논란이 조금 많은 편이지만, 주니치 시절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던지 훗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만큼 훈련해보자.'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으며 '자신의 전성기는 한국 시절이 아닌 일본에서 뛴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선동열이 정말 대단한 점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렇게 자존심을 내려놓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한 점과 변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제 감독으로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국내에서 선동렬은 상대팀 타선을 초토화시키며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일본에서는 구위는 괜찮지만 제구도 경기운영도 부족한 2군을 들락거리는 패전처리조일 뿐이었다. 이러한 성적에 뒤따르는 냉정한 시선이나 대우를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것이다.[21]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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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그 각동님이 아닌데? 누가 이런 위대한 선수를 각동님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후 97년에는 1승 1패 38세이브 방어율 1.28, 98년에는 3승 무패 29세이브 방어율 1.48로 일본 리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등극했다. 투구 스타일은 KBO시절 오승환과 비슷하게 주무기는 70% 이상 던지는 직구였고 여기에 슬라이더를 가미했다. 국내에서도 커리어 하이 수준이었지만 일본에서도 이 두 시즌 동안 최고 수준 마무리의 성적을 기록했다. 사실상 KBO가 탑클래스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한 시발점이 선동열의 이적이었다. 그 후 이종범(해태->주니치->KIA), 이상훈(LG->주니치->보스턴->LG), 구대성(한화->오릭스->뉴욕 메츠->한화->시드니 블루삭스), 정민철(한화->요미우리->한화), 타이론 우즈(두산->요코하마->주니치), 세스 그레이싱어(KIA->야쿠르트->요미우리->지바롯데), 호세 페르난데스(SK->세이부->라쿠텐), 이승엽(삼성->치바 롯데->요미우리->오릭스->삼성), 이병규(LG->주니치->LG), 다니엘 리오스(두산->야쿠르트), 이혜천(두산->야쿠르트->두산), 임창용(삼성->야쿠르트->시카고 컵스->삼성), 김태균(한화->치바 롯데->한화), 켈빈 히메네스(두산->라쿠텐), 이대호(롯데->오릭스->소프트뱅크), 오승환(삼성->한신), 릭 밴덴헐크(삼성->소프트뱅크), 앤디 밴 헤켄(넥센->세이부->넥센) 등의 사례가 이어지면서 KBO 탑클래스 선수의 일본 유출 사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KBO에서 활동하다 일본에 건너가서 다시즌 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는 선동열, 타이론 우즈, 이승엽, 임창용, 이대호, 오승환 정도로 압축된다. 특히 90년대~2000년대 초반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 중 유일하게 선동열의 경우가 2시즌으로, 구대성의 경우는 한시즌 동안 선발로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오릭스가 막장을 달리던 시절인데다 불펜으로 나왔을땐 기복이 있고 분식회계도 자주 한 터라[22] 성공이나 실패라고 딱히 단정짓기 어려운 성적이다. 이상훈 역시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선동열과 활약하긴 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였던 시즌은 1999년 시즌밖에 없다. 언급한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정민태, 정민철, 다니엘 리오스, 이혜천, 이범호, 이종범, 이병규 등은 확실히 일본 프로야구에서 망했고, 조성민은 첫해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은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이야 명예로운 은퇴였다고 하지만 시즌 막판부터 주니치와의 협상과정에서 잡음이 많아 매끄럽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선동열이 99시즌 중반에는 3경기 연속경기를 블론하며 2군에 다녀오며 구위가 점점 떨어지며 이닝 소화율도 낮아지게 되었다. 1999년의 성적은 1승 2패 28세이브 2.61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여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97, 98년의 성적과 비교하면 확연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39경기라는 적지않은 경기에 등판하였음에도 이닝이 31이닝으로 평균 1이닝도 안된다. 한마디로 마무리가 불안해서 9회시작하자마자 출격시키지를 못하고 아웃카운트 1,2개 남겨놓고 투입하는 일이 꽤 있었다는소리. WHIP으로 봐도 1997, 1998년에 0.76, 0.86을 기록한 반면 1999년은 1.32로 확연히 불안해졌다는걸 스탯으로도 확인할수 있다.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역시 전년에 비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선동열과 사사키 모두 올해는 구위가 아닌 얼굴로 마무리를 하고있다고 발언을 했을 정도. 전성기를 지난 피칭을 하지만 그 투수의 이름값으로 타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피칭을 한다는것을 은유적으로 언급한 것. 하지만 사사키는 미국에 진출해서 포크볼 낚시질을 계속했다.

그 후 주니치에서는 새로운 마무리 투수 에디 게일러드를 영입했고, 선동열의 다음 시즌 계약 때는 야마다 수석 투수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내년 시즌에는 마무리로 기용할 수 없다. 미들맨으로의 보직 변경은 물론 때론 2군행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이 시절 주니치의 불펜 투수진은 선동열을 굳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좋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를 맡는 오치아이 에이지, 이후 부동의 릴리프투수로 떠오른 이와세 히토키 등 일본인 불펜 투수진이 매우 충실했다.

그 후 보스턴 레드삭스로의 진출을 꾀했지만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가족들의 집을 포함한 주거비를 자비로 부담해야 된다는 다소 굴욕적인 이야기를 듣고 부친의 종용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사실 명예로운 은퇴라고 보기에는 다소 잡음이 끼인건 사실. 하지만 그는 나쁘게 상황이 돌아가자 깔끔하게 은퇴를 결심하고 추해지기 전에 KBO의 레전드로 남았다.

은퇴식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표타자였던 AV 매니아마쓰이 히데키와 상대하게 되는데, 야동보고 휴지소비하는게 인생의 낙인 고질라가눈치없는(?) 마쓰이가 안타를 때리게 된다. 하지만 웃으면서 포옹. 참고로 마쓰이는 선동열의 공을 가장 잘 공략했던 타자중 한 명.[23] 여담이지만 마쓰이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후에 천적으로 군림했던 선수가 바로 박찬호다. 마쓰이가 스스로 박찬호의 공은 칠 수 없다고 말할 정도.

경기가 끝난후 마쓰이에게 선동열의 은퇴경기에서 어째서 안타를 쳤는가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현역을 은퇴하는 선수에 대한 내가 보일수 있는 최대의 예의이다. 오히려 일부러 치지 않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누군가의 은퇴식에서 3삼진을 잡은 누군가가 생각난다

국내 여러 스포츠 찌라시에선 '나고야의 태양'이라고 지칭했다. 주니치 유니폼 마킹이 'SUN'이었기 때문. 나고야의 태양 같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정작 일본내에서의 별명은 앙팡맨(호빵맨)이었다. 당시 감독 호시노 센이치가 나고야의 태양을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본 적도 있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주로 호흡을 맞추던 배터리 콤비 중 한 명이 한국이름 강무지로 알려진 나카무라 타케시이다.

임창용의 일본 성적을 비교하면서 논쟁이 자주 일어난다. 확실히 고전 스탯으로 볼때는 임창용의 우위가 보이지만 세이버 스탯으로 보면 오히려 선동열이 한참 앞선다. 파크팩터의 경우 피홈런의 경우 임창용이 불리하고 BABIP의 경우 선동열이 불리하고 나고야돔 외에도 주니치 스타즈 아무 구장 사용등으로 차이가 적고 시대를 감안한다면 극악한 투고타저의 시대의 임창용의 스탯보다는 선동열 세부 스탯이 좀 더 좋은 편이고 특히나 1997년도 WAR은 탑에 속한다. FIP의 경우 임창용의 커리어 하이가 선동열 통산에도 못 미치고 FIP+의 경우 195와 150으로 차이가 심하다.[24] 여기에 대해서 "10년도 더 전의 투수라서 비율스탯이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과 "그러면 페드로 전성기 비율스탯은 10년전 성적이니까 의미없냐?"는 의견이 대립중이다.[25]

영광도 좌절도 뒤로 한 채, 그렇게 한 시대를 지배했던 선수가 떠났다. 그리고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2.3 프로 선수 시절 연도별 주요 사기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죄다 빨간색이네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5해태
타이거즈
25111748
(3위)
-0.6361.70
(1위)
74223103
(5위)
30210.847
198639
(6위)
262⅔
(2위)
24
(1위)
66
(4위)
-0.800
(2위)
0.99
(1위)
153259214
(1위)
38290.780
19873116214
(2위)
26
(3위)
-0.875
(1위)
0.89
(1위)
89250144
(2위)
21160.840
198831178⅓
(3위)
16
(2위)
510
(4위)
-0.762
(3위)
1.21
(1위)
116342200
(1위)
29240.847
198936
(10위)
16921
(1위)
38
(4위)
-0.875
(1위)
1.17
(1위)
82255198
(1위)
27220.769
199035190⅓
(5위)
22
(1위)
64-0.786
(1위)
1.13
(1위)
121158189
(1위)
35240.898
199135203
(4위)
19
(1위)
46
(8위)
-0.826
(1위)
1.55
(1위)
135833210
(1위)
42350.788
19921132⅔208
(6위)
-1.0000.282001242110.918
199349
(2위)
126⅓10331
(1위)
-0.769
(2위)
0.78
(1위)
48226164
(2위)
11110.538
199427102⅓6412
(5위)
-0.6002.73815299431310.997
199548
(2위)
109⅓5333
(1위)
-0.6250.4949117140
(6위)
960.576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96주니치
드래곤즈
3854513-0.8335.50624286735331.611
19974363⅓1138
(1위)
-0.5001.283601369990.758
19984248⅔3029-1.0001.483141158880.863
199939311228-0.3332.613111134991.355
KBO 통산
(11시즌)
3671647146
(4위)
40132-0.785
(1위)[26]
1.20
(1위)
968284041698
(3위)
2742200.795
NPB 통산
(4시즌)
16219710498-0.7142.7016096322861591.112
개인 통산
(15시즌)
529184415644230-0.7801.3611283746719263352790.930
  •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면, 15년 동안 매년 123이닝에 10승 15세이브를 기록하며, 매 이닝마다 1명 미만으로 내보내며 1년 평균으로 128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는 뜻이다. 선수로는 까면 안됩니다
완투, 완봉기록
연도완투완봉
198510
198619
(1위)
8
(1위)
198774
(1위)
19889
(3위)
1
198986
(1위)
19908
(4위)
6
(1위)
199112
(2위)
3
(2위)
199211
199300
199430
199500
KBO 통산(11시즌)68완투
(4위)
29완봉
(1위)
  1. 당시 초고교급 야구선수들의 대학 진학을 할 때는, 대학 측에서 계약금 지급은 물론이고,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다른 선수들도 같이 입학시켜주면서까지 모셔오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대였다.
  2. 출처 - 고려대학교 스포츠매거진 SPORTS KU 2010년 3월호
  3. 정작 메이저리그에서 그에게 오퍼를 했었다는 자료가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메이저 오퍼 발언도 선동열 자신의 주장과 그 이야기를 들은 국내 스포츠 언론들만 언급하는 정도일 뿐이다. 증거가 비교적 확실히 남아있는 최동원과는 다소 다른 경우. 하지만 구두 수준에서 오퍼가 오고갔을 가능성은 있다.
  4. 징병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경력으로 오늘날의 예술체육요원 격인 병역특례를 받았는데, 당시의 병역특례는 국내에서 5년간 활동해야 해외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해태에서 이 기간을 채우고 현역으로 가진 않았다. 당시 치질이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 안 받고 술을 마셔가며 악화를 시켜서 내심 면제 판정도 기대했다고 한다. 선동열 본인은 해태 구단 관계자와 병무청이 짰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현역은 안 갈 것이지만 현역 판정을 내려야 현역 안 가기 위해서 해태에 갈 것이라는 판단으로. 보통 검사 즉시 판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신검을 받을 때는 즉시 판정 결과를 통보하지 않고 기다리라 하고는 귀가 후에 현역 판정으로 연락을 받았다고. 농구의 이충희가 그것 때문에 스페인 진출에 실패하고, 축구의 김주성은 서른이 넘어서야 독일에 진출할 수 있었다.
  5. 그러나 사실은 전기로 배정된 경기를 하나 뛰었다. 1985년 9월 22일 MBC전으로 원래는 전기에 치러져야 했을 경기인데 우천 등의 이유로 후기에 치러졌으나 분류상으로는 '전기' 경기가 되었다.
  6. 이승엽을 국민타자, 서장훈을 국보급 센터라 칭하는 것과 동일하다.하지만 선동열 자신이 자신의 감독 커리어로 이미지를 아주 크게 깎아먹었다. 물론 기아 타이거즈를 제외한 타 팀 팬들에게는 국보급 감독이다(...)
  7. 후반기만 뛰고 규정이닝인 110이닝을 넘겼다(.....)
  8. 실제로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면 타자들이 스윙을 서둘렀다는 증언이 있다.
  9. 이 해에 다승,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2관왕을 기록했다. 탈삼진도 1위였으나 이 당시 탈삼진 부분은 따로 시상을 하지 않았다. 승률 부문은 19승 4패의 최일언이 차지했다.
  10. 87년에는 부상 때문에 전년도만큼 많은 등판을 하지 못했다.
  11. 나중에 해설자가 된 이병훈은 모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선동열한테 홈런 치고 너무 놀라서 스스로 도핑테스트를 받으러 갔다는 드립을 쳤으나 아마도 농담일 것이다. KBO에서 도핑테스트가 도입된 게 2000년대이다.
  12. 그러나 그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시리즈에서 더 이상 등판하지 못했다. 이 때 투수진에서 선동열 대신 활약한 선수가 시리즈 MVP 문희수.
  13. 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부문. 당시 탈삼진 부문은 상이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4관왕.
  14. 이 때 LG가 무려 4승 무패로 우승한다(!)
  15. 물론 부상으로 32이닝에 그쳤기 때문에 당시 규정이닝인 126이닝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다.
  16. 선동열처럼 압도적 수준의 마무리가 부재하면서, 특히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였던 5차전에서 롯데에게는 9회 집중타를 맞았다.
  17. 그러나 '마무리'라기에는 3~4이닝 마무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18. 규정이닝인 126이닝에 17이닝 미치지 못하는 109이닝을 던졌다. 전업 마무리 투수의 기록이다(...)
  19. 흑역사인 1996년 시즌 중간계투로 나와 던진 모습. 결국 점수는 내줬다. 보다시피 구위는 문제가 없던 시절. 오히려 해태시절보다 구속은 더 빨라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20. 1996년도 K/9는 11을 조금 넘는다. 또한 주니치 시절 탈삼진을 두번째로 많이 잡은 시즌도 1996년도다. 주니치 시절 기록 참고바람
  21. 2군에 내려가서 자기 빨래도 직접해야하고 적응이 어려웠던지 1996년 시즌이 끝나자 짐싸서 바로 귀국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과 적응의 어려움은 지바 롯데로 이적했던 이승엽도 겪었다.
  22. 애초에 2002년 선발로 간 것도 처음엔 마무리로 영입했지만 실패했기 때문. 더블 스토퍼 체제로 굴려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선발로 전환한게 대성공했다. 단 당시 오릭스가 막장을 달린건 빠따가 답이 없었기 때문이라 구대성 이야기를 할때는 오히려 고평가를 받을 요인이 된다. 2002년 오릭스는 파리그 전체 방어율 1,2위팀을 두고도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는데 당시 팀 평균 득점이 3.1점.참고로 류현진이 류크라이 소리 들었을때 타선지원이 뒤에서 3위였는데 그때 한화 타자들 평균 지원점수도 3.5점은 넘었었다. 물론 당시 파리그가 투고타저이긴 했지만 오릭스 바로 위에 있던 지바 롯데는 무려(?) 3.57점이었고, 1위인 세이부의 경우 평균 득점이 4.8점. 팀타율이 0.235인것도 노답인데 3할타자는 1명에 장타력, 출루능력까지 전무한 그야말로 물빠따였다.또한 투수력도 선발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똥망이라 평균방어율도 전체 1,2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3.93으로 전체 최하위. 일본에서 역대 최고용병 설문조사를 하면 top5수준에서 거론되었던 선동렬만큼은 못미쳐도 10위안엔 드는 수준이었다.
  23. 통산 15타수 5안타(모두 단타) 무볼넷이기 때문에 타율은 .333이지만 가장 잘 공략했다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수도.
  24. 여담으로 의외로 임창용은 일본시절 세이버스탯이 클래식보다 많이 떨어진다. 노블론을 찍은 시절도 FIP로 따지면 동시즌의 마무리중 탑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의외로 아이큐피쳐이신듯
  25. 페드로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지금의 타자들은 차원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안다. 90년대 후반 NPB 타자들과 2000년대 후반 NPB 타자들이 다르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안다....
  26. 100승 이상 기록 투수 중 압도적 1위다. 2위가 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