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 황후

(신공황후에서 넘어옴)
일본의 역대 덴노
14대섭정15대
주아이 덴노진구 황후오진 덴노

파일:Attachment/진구 황후/일본진구황후.jpg

진구 황후를 그린 일본 그림. 옆의 노인은 책사라고 전해지는 타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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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 황후의 한반도 침공을 묘사한 오스프리의 그림. 일본서기 내용을 거의 복붙하고 있다.

한자로는 신공황후(神功皇后). 본명은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氣長足姬尊, 息長足姬尊), 오오시타라노미코토(大帶比賣命), 오키나가노타라시히메노스메라미코토[1](大足姬命皇后)며, 실존인물로 인정받지 않은 일본 지배자 중 하나다.

1 진구 황후는 누구인가?

일본서기, 고사기, 신황정통기에 등장하는 일본가상의 통치자로, 덴노면서 섭정이라는 다소 해괴한 직위로 나온다. 이런 직위는 일본 역사에서는 전무후무하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진구황후에 대해 신라를 정벌하라는 의 계시를 받았으나, 당시 덴노이던 주아이 덴노가 이를 의심하고 따르지 않다 죽자 임신한 상태로 배를 타고 신라로 건너가자 바다가 신라를 삼키고 이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이 데꿀멍하여 항복했다는 둥, 신라 궁전 앞에 창을 꽂아놓았다거나 한반도의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돌아왔다느니 하는 삼한정벌의 기록이 나온다.

나중에 일본인들의 임진왜란 기록에서는 진구황후가 한반도의 어느 바위에다가 '삼한의 왕은 일본의 개다' 라는 문구관련 자료를 새겨놓은 것을 직접 확인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유명한 이야기는 진구황후가 (나중에 오진천황이 되는) 아들을 임신한 상태로 신라를 정벌하였는데, 정벌이 끝나기도 전에 아기가 태어날 조짐이 나타나 돌로 출산을 늦추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인터넷상에서는 돌을 산도에 꽂았다느니, 돌로 산도 입구를 막고 천으로 감았다느니 하는데 일본의 고서에서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고사기에서는 이 돌을 허리춤에 차고 출산을 늦추었다고 하며, 일본서기에서도 똑같이 돌을 허리에 차고 신에게 기원하여 출산을 늦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돌을 허리춤이나 소매에 넣고 주문을 외워 출산을 늦추려 함은 당시 일본에서 쓰였던 주술이었다. 나라시대의 기록에는 이때 진구황후가 썼다는 돌이 남아 사람들에게 경배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 돌이 허리춤이나 소매에 넣기에는 너무 컸는데, 여기에 대해선 '돌이 나중에 커졌다' 고 한다.

이 책들보다 후대에 나온 신황정통기에서는 자기들이 보기에도 어이가 없었는지 삼한정벌은 사료 오독이니 신라 정벌이 맞다고 적었고,[2] 위지 동이전에 신라는 변한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옛 조선의 유민들이 그 기원이라 적고 있다.돌로 출산 늦추기는 우연히 여의주를 얻어 그 힘으로 출산을 늦추었다 라고 수정하였으며, 일본 에도 막부시대 미토 토쿠가와 가문의 당주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에 의패 편찬된 사서 대일본사(大日本史, だいにほんし)에서는 재위에서 삭제되었다. 이들의 주장이 일본 사학파 중 가장 우익 성향이 강한 미토 학파의 전신이고, 실제로 후대의 미토 학파는 진구 황후의 실존을 적극적으로 밝혔다는 점을 생가하면 아이러니한 일.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이 합리적 수준에서 사실이라고 가정(어디까지나 가정)한다면, 돌로 주술을 행한다고 출산을 늦출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진구황후는 배 타고 한반도로 건너가던 중에 오진 덴노를 잉태한 것이다. 그러니 오진 덴노의 친아버지는 주아이 덴노가 될 수가 없다.[3] 즉, 덴노 가문의 만세일계가 부정된다![4]

2 고사기의 계보도

 아메노히보코
9대 카이카 덴노타지마-모로스쿠
(多遲摩母呂須玖)
10대 스진 덴노히코-이마스-노-미코
(日子坐王)
 타지마-히네
(多遲摩斐泥)
11대 스이닌 덴노야마시로-노-오호쯔쯔키-노-마와카-노-미코
(山代之大箇木眞若王)
이리네-노-미코
(伊理泥王)
 타지마-히나라키
(多遲摩比那良岐)
12대 케이코 덴노
이니시키-노-이리-히코-노-미코토
(印色之入日子命)
타니하-노-아지사하-히메
(丹波能阿治佐波毘賣)
타니하-노-토호쯔-오미
(丹波之遠津臣)
타지마-히다카
(多遲摩比多訶)
키요-히코
(淸日子)
야마토 타케루카니메-이카즈찌-노-미코
(迦邇米雷王)
타카키-히메
(高材比賣)
스가카마-유라도미
(菅竈由良度美)
오키나가-스쿠네-노-미코
(息長宿禰王)
카즈라키-노-타카메가-히메
(葛城之高額比賣)
14대 주아이 덴노진구 황후
15대 오진 덴노
호무다-와케-노-미코토
(品陀和氣命)

위의 관계도를 정리해보자면 그녀는 카이카 덴노아메노히보코의 후손이다. 또한 14대 주아이 덴노의 아내이며, 15대 덴노인 오진 덴노의 어머니라고 한다. 주아이 덴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로, 있어도 대체로 아내인 진구 황후의 조언을 듣지 않았자는 내용만 있다.

3 왜 실존 인물이 아닌가?

일단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보기에는 기록의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먼저, 그녀가 신라로 쳐들어오자 이에 인질을 보내 항복한 신라의 왕의 이름은 파사매금(波沙寐錦)[5][6]이고, 보낸 인질의 이름은 미질기지(微叱己知, 혹은 미질허지(微叱許智))로 기록되어 있다. 파사 이사금미사흔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파사 이사금은 재위기간이 기원후 1세기경인 80년~112년이라 기원후 2세기경인 170년 ~ 269년에 활약한 신공황후랑 전혀 맞지 않는다. 무려 1세기나 차이가 난다. 다만 파사 이사금 시대의 기록은 고고학적으로는 증명이 안 되고, 신공황후 파트는 이주갑인상으로 보정을 하면 4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 파사 이사금 때 벌어진 신라의 경상도 지역 초기 영토 확장 기록이 실제 신라계 유물의 출토로 고고학적으로 제대로 합치되는 시기도 마침 4세기쯤이므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연대가 둘 다 어느정도 어긋났다고 보면 터무니없는 세세한 정벌 내용을 제외하고 파사와 신공황후가 동시대 인물이라는 점 자체는 맞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신라 정벌 기록의 근거를 따져보면 삼국사기파사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는 백제가야의 침략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있지만 일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미사흔은 눌지 마립간의 동생으로, 후대의 인물이다. 파사 다음 신라왕인 지마 이사금가야에 패하고 왜의 침입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럼 이번에는 일본서기랑 안 맞게 된다. 또한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 보면 포로로 잡은 신라왕의 무릎 힘줄을 뽑아버리고 돌 위를 기어다니게 했다느니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249년/253년(249년은 삼국사기, 253년은 삼국유사 기록. 그나마 이건 거의 차이가 없다) 왜군에게 죽었다는 석우로에 대한 기록을 거의 그대로 베껴쓰고 있다. 즉, 하나도 맞는 게 없다.

더 웃긴 건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신라구의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고 있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일본인들이 공격하는 일도 기록되어 있으면서 진구황후는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중국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일단 중국의 기록 중에 종종 신라의 경우 일본보다 아래라고 적는 기록은 있지만 애매모호하며(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임나일본부설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무엇보다 위지 동이전 왜인전 기록을 비롯한 일본 고대사 관련 중국기록에 히미코는 나올망정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은 안 나온다. 더욱이 당시 히미코의 지배지 외에 다른 곳에 있는 나라에 대한 기록도 나오고 해당 소국들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단순 지방호족/반란세력 정도로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더군다나 진구황후 본인의 가족관계도 문제가 된다. 진구황후의 아버지는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息長宿禰王)인데, 이 사람의 생몰연대는 기원후 321~384년으로, 진구황후보다 나중 사람이다. 거기다 어머니 카츠라기노타카와카히메(葛城高顙媛)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아메노히보코의 손녀(6대손이라는 기록도 있는 듯)인데, 정작 진구 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에는 신라의 존재를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천일창(아메노히보코) 설화는 한국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구조가 거의 같아 출연 인물들을 동일시하거나 같은 계통 설화로 보는 학설도 있는데, 이 경우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기원후 2세기경의 이사금인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기가 되어 진구황후 집권기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거기다 이 때는 진구황후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는 히미코(비미호)가 사신을 보낸 시기. 더 꼬인다.

추가로 그녀는 타라시(足 혹은 帶) 계통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 계통 이름은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신화나 다름없는 고대 부분이 아닌 제대로 된 역사시대 기준으로 7~8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난다.

한때 큐슈 지역에서 발굴된 요시노가리 유적이 이와 관련되어 일본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받았으나, 정작 출토되는 유물 상당수는 한국계 유물들이 주루룩 발굴되었고, 결국 한반도계 도래인들이 중심이 되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는 기존의 일본의 연구결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7] 몇몇 일본 학자들은 야요이 시대보다 먼저 존재한 죠몬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연관성에 대해 단절성보다는 연관성에 집중하여 어떻게든 일본의 고대사의 상한선을 올려보려고 했지만, 두 문화는 주류 인종부터가 다른데다 대륙(특히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야요이 문화가 현대 일본인의 직계라는 건 연구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지므로 이 설은 용도폐기된 상태다.[8]

4 누구냐, 너?

진구황후가 이렇게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뒤죽박죽이다 보니, 이미 에도시대 때부터 일본 내에서도 여러가지 설이 혼재되어 서로 갑론을박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일본 사학계는 제국주의 시절 이 반론들을 다 씹고 밀어붙였다가 결국 게임 오버.

  • 실존인물설
그냥 실존인물이라는 설. 당연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1945년 고대 일본사서 비판이 해금된 이후로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현재는 진구황후 전설이 내려오는 일부 신사나 이들 신사의 마쓰리에서나 볼 수 있다. 즉 역사가 아닌 설화로 취급받고 있다.
히미코(비미호)가 모델이라는 설. 에도시대부터 등장한 설이다. 히미코가 진구황후와 마찬가지로 신술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무녀 여왕이었다는 점 등 그나마 가장 타국 역사서의 기록과 근접하기에 나온 설. 그러나 재위기간에 약간 차이가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딸인 토요(혹은 미요)도 진구황후의 모델로 본다. 임용한의 '한국고대전쟁사' 1권에서는 히미코 설을 채택하면서도 진구황후의 신라 침공은 백제에 고용된 용병으로써의 공격이고, 신라왕을 죽였다는 것은 위에 나온 신라 장군 석우로를 죽인 것을 과장한 것이라는 절충설을 택했다.
과거 백제 멸망시 백제 부흥군을 파병한 사이메이 덴노가 모델이라는 설, 일단 둘 다 여왕이고, 타라시 계통의 이름을 갖고 있는 거에 대해서도 증명이 가능해지며, 과거 야마토의 위치가 아직 논란에 빠져 있는데 반해 진구황후 전설과 관련있는 신사들이 많은 큐슈에 실제로 부흥군 출병과 관련해 그녀가 머문 적이 있어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설이다. 현재 정설이다.
근초고왕 제위 시절 업적들의 주체가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의 업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진구 황후가 근초고왕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라는 설.
  • 신라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신화?
일부 학자들은 진구황후가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추정을 한다. 백촌강 전투의 패배 이후 일본은 쓰시마와 큐슈에 신라와 당의 침공에 대비해 다수의 성을 축조했는데 이후로 신라를 가상 적국으로 규정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라는 양가 감정이 생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나타난게 바로 진구황후라는 것. 진구황후가 삼한정벌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적은 신라라는 점, 파사 이사금의 항복을 받은 점, 진구황후 전설에 기반한 신사들이 큐슈에 다수 존재한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즉, 내부적으로 우리는 신라를 정복했었고 신라는 우리의 속국이니 두려울 것 없다는 차원에서 만들어낸 신화가 관찬 사서인 일본서기에 기록되면서 실제 역사로 둔갑했다는 것.

5 그 외

복거일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일제가 1940년대 말까지 강력하게 실시한 내지화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 고유의 역사는 완벽히 말살되었다. 이후 일제가 왜곡한 조선의 역사교육 시간에는 조선이 5세기 무렵에 일어난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 이래로 일본의 영토였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 이후의 조선 역사에 관해서는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일본 만화 하늘의 혈맥에서 우치다 료헤이가 이것을 땜빵하기 위해 광개토왕릉비 비문을 조작하며 무시무시한 소설을 쓰는데.....[9]

방영 종료된 사극 드라마인 근초고왕에서는 막판에 조금 등장.
  1. 황후라는데 막상 여기를 보면 気長足姫皇尊이라 쓰고 천황을 뜻하는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로 읽는다.
  2. 웃기는 게 저자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본인도 이 부분에서 '진한, 마한, 변한을 합하여 신라라고 한다' 라고 사료 오독을 저질렀다.
  3. 진구황후와 동행한 권신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오진의 친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4. 다만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친아버지로 가정하면 쿄겐 덴노의 남계 후손이 되어서 만세일계가 딱히 부정되지는...
  5.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나 일본이나 고대 인명/지명들은 대부분 고유어 음차라서 그건 별로 상관이 없다.
  6. 매금은 광개토왕릉비통일신라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며, 마립간과 같은 말로 추정된다.
  7.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요시노가리 특별전을 열 때, 한국 학자들이 특별전의 부제로 일본 속의 고대 한국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요구하자 일본 학자들은 아무 군말없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 부제로 통과되어 버렸다. 안습.
  8. 같은 이유로 기자동래설이 부정된다. 기자가 동래했다는 걸 증명할 만한 수준의 중국계 청동기 유물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중국계 청동기 유물이라 해 봐야 기껏해야 청동 꺾창이나 중국식 청동거울, 중국식 거울을 모방한 본뜬거울이 전부. 그리고 이런 추세의 청동기 흐름은 일본 청동기 유적에서 복붙한 듯 그대로 따르고 있다. 더 안습.
  9. 오진 덴노의 아버지가 광개토대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