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국장. 방패 가운데 아라라트산이 그려져 있고, 사방의 그림은 각각 바그라투니 왕조(좌상), 아르타셰스 왕조(좌하), 아르샤쿠니 왕조(우상), 루벤 왕조(우하)의 문장이다.
유라시아의 역사가 깊은 디아스포라 민족 치고 눈물 쏟아지는 과거사 없는 민족이 어딨겠냐만, 카프카스 산맥이라는 오지면서도 또 동서 문명 교류의 중심지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 시켰던 아르메니아는 유독 그 설움과 한이 깊다. 게다가 너무 유서 깊고 독창적인 문명이다 보니(...) 외부인들은 아르메니아어를 배우고 그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아 대학살 같은 침울한 주제 빼고는 외부에 알려진게 거의 없는게 더욱 아쉽다.
1 고대
캅카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득한 옛날부터 여러 민족의 주요한 이동통로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박터지는 현장에 놓여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 시절인 기원전 1270년 경, 아르메니아 고지에 있는 반 호수의 주위에 중심에 있던 철기 시대 왕국인 우라르투(Urartu)가 시초였으며 이후 하이크라는 이름 아래 아르메니아 문화를 키워나갔다.
아르메니아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인데, 예르반드 왕조[1]라는 독자 왕조가 있었으나 당대 동방의 강자였던 메디아 왕국의 속국이었다. 이후 메디아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될 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결국 사트라피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페르시아가 망한 후에야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 BC 20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격으로 예르반드 왕조는 패망했다.
아르타셰스 왕조의 깃발.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아르메니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던 아르타셰스(Արտաշես)가 곧 반란을 일으켜 아르메니아를 장악하고 아르타셰스 왕조(Artaxiad Dynasty)를 세웠다. 캅카스 일대에서 차근차근 세력을 키운 아르타셰스 왕조는 기원전 1세기 티그라네스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집어먹고 동방의 최강자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공격에 발리고 망했어요. 이후 서방의 강대국 로마와 동방의 강대국 파르티아(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사이에 끼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안습의 길을 걸었다. 아예 지배 왕조가 파르티아계인 아르사케스 왕조로 교체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어로는 아르샤쿠니 왕조라고 하며, 이란 본국의 아르사케스 왕조가 페르시아계인 사산 왕조에게 멸망당한 뒤에도 아르메니아에서 토착화하여 백여 년 간 더 존속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를 신봉하는 등 이란과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웠으나, 이란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4세기 초,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도 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392년이니 무려 8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자국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교회는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이후 이 나라 옆에 위치한 아라라트산(구약성경의 노아의 방주가 표착한 산)이 위치했다는 점을 생각했는지 자신들을 노아의 직계 후손이라고 자칭하였다.아니 그럼 유대인은? 이 점 때문에 이스라엘과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지금도 남자 이름으로 아라라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안습한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3세기 이후 로마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 나라에서도 전란이 끝이지 않았다. 결국 페르시아와 로마에 의해 국토가 반동강 나면서 멸망했고, 이후 몇차례 아르메니아 본토나 소아시아 남부 지역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모두 단명했다.
현대 아르메니아는 동유럽에 가까운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공인 이전 아르메니아는 종교(조로아스터교)와 문화, 습속, 인종 등 등 여러 면해서 이란과 유사했기 때문에,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지대라는 정치적 문제와는 별개로 이란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이란의 지배세력이 파르티아계 아르사케스 왕조에서 페르시아계 사산 왕조로 교체되자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던 아르메니아 왕가는 사산 왕조와 적대하게 되었고, 기독교 국교화까지 시행됨으로써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이 때문에 사산 왕조는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중부/동부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와 친로마파 귀족들을 억압하고 아르메니아를 이란의 일부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대규모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봉기/아바라이르 전투) 전쟁 자체는 이란이 이겼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이 워낙 거셌으므로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권과 기독교 신앙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2 중세
7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급속도로 파급되었지만[2]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앙인 기독교를 지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와 갈등을 빚으면서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결국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정교로 발전하였다. 아르메니아는 지리적으로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오리엔트 정교회 교회,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더 가까웠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키릴로스주의(합성론)을 믿었으나, 십자군 전쟁기에 서방교회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잠시간 가톨릭으로 귀일한 적도 있었다. 이런 복잡한 교회사 때문에 아르메니아 정교의 변천과 역사는 중요한 연구거리가 되었다.
7~13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諸國)의 통치를 번갈아 받았다. 이 동안 아르메니아 본토를 떠난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 나갔고, 주류층에 편입된다. 심지어 두 황제 가문을 배출하기까지 했다. 7세기 동로마의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헤라클리우스와 그가 일궈낸 왕조가 아르메니아 출신. 이 왕조가 단절된 후인 9세기에 한번 더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 1세가 등극하면서 아르메니아계 마케도니아 왕조가 들어선다. 이 왕조의 통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아르메니아 본토에서도 바그라투니 왕조(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라고 부르기도 하며 수도는 현재 터키에 있는 아니(4번 항목)였다.)가 등장하여 확고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인 아르메니아에 갖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는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바그라투니 왕조(또는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조)는 이웃 조지아의 왕실인 바그라티온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이 가문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을 거쳐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국 수도인 아니는 지진 및 여러 전쟁으로 버려져서 지금은 쓸쓸한 폐허로 남아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아르메니아 왕국이 내분으로 휘청거리자, 동로마 제국이 일부 영토를 합병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의 침공으로 소아시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연히 동로마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결국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남은 영토 역시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 때 일부 피난민들이 킬리키아 지역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를 소(小)아르메니아 왕국 혹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라고 한다. 이 왕국은 마침 레반트 지역으로 들이닥쳤던 십자군과 동맹하기도 하고 몽골과도 동맹을 하며 그럭저럭 버티다가 1375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파란색)
아르메니아 본토는 13세기 몽골의 대공세 이후 몽골 제국인 일 칸국의 통치 아래 들어왔다. 몽골인들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종교에 관대하여 아르메니아 정교도도 간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 이 시기 동서 문화 교류와 경제 교역이 번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시리아-캅카스-이라크-이란을 잇는 무역로를 활용해 많은 활약을 했다.
이 지역의 몽골 국가가 몰락한 뒤 혼란이 이어지면서 무역이 쇠퇴하여 몰락했으나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패권 하에 통합되면서 타 종교에 관대한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서 상업 민족으로 널리 알려지며 번성했다. 오스만 통치 아래 아시아 지역의 상업은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총괄하여 경쟁했다고 했을 정도로 번창했다고 한다. 프랑스에 커피를 유행시키고 최초의 카페를 개점한 것도 아르메니아인으로 전해진다. 당시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비유적으로 헝가리에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령 현대 파키스탄 까지, 남북으로는 러시아에서 예멘 까지 중세~근세의 이슬람 제국이 있는 곳에는 아르메니아 상업 커뮤니티까지 따라왔다고 봐도 될 만큼 유대인보다도 더 넒은 커넥션과 입지를 자랑했고, 이들 상인들이 쌓은 재력을 고향인 서부 아르메니아 지방의 수 많은 유서 깊은 수도원, 교회들에 투자하여 20세기에 아주 피비린내나는 한 사건 이전만 하더라도 현대 터키의 동부 지방에는 수백개의 연필 같이 뾰족한 첨탑이 상징적인 근엄하고 오래 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수도원, 교회들이 있었다.
3 근대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이후 급속히 몰락하면서 그에 기댄 아르메니아도 몰락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이 북방에서 남하해 오면서 강력한 압박을 받은 오스만 제국은 1774년 현대 아르메니아 지역을 러시아에 넘겼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지나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르메니아인들도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각성했다. 그러나 민족이 러시아 치하와 오스만 치하로 분리되어 있었고 경제적 여건과 교육 상태가 열악하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와 오스만 정부의 분리주의 운동 탄압도 작용했다.
19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오스만은 내부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전근대적 체제를 뒤엎고 집권한 터키 군부도 이 부분에선 술탄 시대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오히려 근대적 사상으로 무장한 터키 군부가 1차 대전 중에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이전까지 이뤄지던 전근대적 '진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적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대략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오스만 내 아르메니아인 중에 추정치에 따라서는 100만에서 150만에 가까운 숫자가 학살됐다. 이 중 상당수는 대책없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다 병사하거나 아사했다. 또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내부에서 노선 갈등으로 분쟁이 빚어지기도 하고, 다른 소수민족들이 무력한 아르메니아인들을 습격하여 도륙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또 아르메니아인들이 저항 과정에서 터키나 쿠르드 민간인들을 살해한 적도 많다. 이 점을 들어 현대까지도 터키와 뇌가 빈 터키빠들(한국에도 있다. 뭔 소린가 싶으면 이 문서 과거를 보자)이 '죽인게 아니라 죽은거다' '참 복잡하고 얽히고 설킨 부분이 많다' '둘 다 가해자다'라면서 신나게 물타기를 시도하는데, 명심하자. 강제 이주를 단행한 오스만 당국은 막대한 숫자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급을 할 대책이 없었고, 딱히 대책을 세울 생각도 없었다. 이들은 명백히 살해의 의도를 갖고, '저기로 보내면 죽겠지?'라는 생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으로 끌고 간 것이다. [3] 직접 총으로 쏴죽여야만 학살이라는 식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터키측에서 하면 양심없는 가해자 소리 듣기 좋지만 터키랑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한국인들 중에서 이런 개 짖는 소리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바탄 반도에서 미군들이 병과 기아로 죽은게 대다수니 일본이 학살한게 아니라 정글과 태양이 나쁜 놈이라고 주장할 작자들이다. 아르메니아인끼리도 죽였다고? 한국도 독립 운동 하면서도 좌우간에 무섭게 싸웠지만 그게 갑자기 일본의 조선인 탄압과 학대를 '복잡한 사정'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터키측에서 소수민족들을 선동하거나(주로 쿠르드족이 많이 나섰다) 본인들이 직접 나서서 살해한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음이 확인되고 있다.
뭐 이런 사정도 있지만 당시 쿠르드인들과 갈등으로 서로 싸우던 일도 있어서인지 디야르비크르에 있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당인 수르프 기라고스도 당시 쿠르드인들에게 부숴졌다. 그리고 1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2013년 디야르비크르 시에서 복원해줬다.
4 현대
이후 아르메니아는 소련으로 편입되었다.
소련 치하에서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서방세계로부터 무시되었다. 때문에 NATO 가맹국인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도 흑역사 취급을 받으며 다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스탈린은 아르메니아 독립 및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대거 학살해버리면서 계속된 어두운 역사를 가져야 했다.그런 가운데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야 아르메니아는 간신히 민족국가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경제적 여건이 워낙 열악한데다 독립하기 직전에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나라가 작살나버려 그나마 있는거 조차 무너져 처음부터 다시시작해야 했고, 지진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독립해버려 뭐하나 성한게 없었다. 게다가 독립하자마자 민족분규가 터져 옆나라인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 국내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집단 거주하는 수많은 아르메니아인 문제 때문이었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분리독립 및 아르메니아로의 통합을 주장하자 이를 거부한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을 무력 진압하려면서 아르메니아 정부가 강력히 반발해 결국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아르메니아쪽에 조금 유리하게 돌아가던 중에 러시아의 개입으로 곧 휴전되었지만 덕분에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난 수준이 되었다.
이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이 호잘르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했기에 아르메니아도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학살은 아제르바이잔이 먼저 벌였고 피해자 수로는 더 많긴 하지만 분풀이성으로 학살도 벌인 건 맞는 사실. 아제르바이잔과 전쟁 당시 학살 여부에 대해서는 미국도 유럽도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지 않고 둘 다 학살자이자 가해자로서 중립을 지킨다.
터키의 EU가입을 지지한 영국에선 아제르바이잔 학살도 검토해야한다고 아르메니아와 아르메니아를 지지한 프랑스와 그리스를 윽박지르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바쿠를 가보면 당시 죽은 아제르바이잔인 사진과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은 가스불을 켜놓은 거대 추모비가 있다. 아르메니아가 예레반에 설치한 추모비처럼.) 하지만 영국이 아제르바이잔을 편들어주는 건 아닌데 아르메니아 학살 이후 벌어진 쿠르드인 독가스 학살 주범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이 저지른 학살에 얽매이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이야기하는 것도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곡창지대와 여러 지역에서 나오는 농작물로 굶주리진 않지만,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자본 투자가 완전히 막혀있기에 아르메니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 앞서 언급했듯 아르메니아 본국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한 나라가 아니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가려면 육상으로만 가야하기에(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여길 인정하지 않기에 비행기로 절대로 못 간다.아제르바이잔은 비행기로 간다면 격추시킨다고 이를 갈고 있다.)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결국 해외 아르메니아인들이 대주는 투자금으로 겨우 버티는 실정이다. 오히려 아르메니아 문제 덕분에 이웃한 조지아가 유라시아 철도 및 운송과 자원 파이프 라인을 주워 먹어 덕을 봤다. 나아가 아르메니아로선 경제적으로 국제 투자가 부진한데 터키와 유라시아 튀르크권 나라들이란 막대한 시장을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이 아르메니아에 투자하지 않고 있다.[4]
게다가 독립국이 되자 아르메니아는 옆나라인 터키에게 1차 대전 중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했고 터키가 일부를 시인하긴 했으나 위에서도 언급한 논리들로 물타기하며 사실상 책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런 민족감정이 대번에 양국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NATO 가맹국인 터키를 윽박지를 수도 없고 러시아 남쪽 요충에 자리잡은 아르메니아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러시아는 침묵하거나 그냥 아르메니아 편을 들었다. 현재 터키 측에서도 사과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소련 붕괴 이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및 나히체반 자치공화국 문제로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단지 소련 정부가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탈퇴를 선언하면서 소련-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적극 지원해 아제르바이잔을 탈탈 털어버렸다. 그나마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의 경우, 전쟁을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으로 확대될 경우 터키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군사개입해 아르메니아를 박살낼 것이라고 협박 (실제 군대를 터키-아제르바이잔, 터키-아르메니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해서 큰 문제 없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아르메니아가 점령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에 친러시아 성향의 헤이대르 앨리예프(Heydər Əliyev)가 집권하자 러시아의 중재로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아르메니아만 편들 수가 없었는데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의 뿌리를 아예 뽑아버리려고 아라라트산을 터키에 줘버렸기 때문이다. (수도 예레반에서 아라라트산이 매우 잘 보인다. 즉 터키가 이 곳에 군대를 대거 주둔시키고 미사일을 펑펑 쏴대면 예레반은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터키는 유라시아권에서도 막대한 군사강국이라 그럴만한 장비나 무기와 군사력과 여력이 충분하다) 아르메니아의 행동을 보았을 때 러시아에게 아라라트산 문제 해결해 내라고 징징댈 일은 불 보듯 뻔한 일.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터키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터키는 친미 나라로 아랍과 유라시아를 둔 중요한 요충지로서 미국이 그동안 터키에서 벌어진 온갖 인권탄압과 쿠데타를 일절 외면했던 것도 친미정책 및 이스라엘 및 아랍과 유라시아 감시 및 세력권 유지라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가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과 이스라엘이 터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점[5],게다가 아제르바이잔과 혈맹 관계이자 나아가 유라시아 앞마당에 온갖 자원이 가득하고 튀르크계 나라들에게 큰 형님, 형제 소리를 듣는 터키를 러시아가 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오세티아 전쟁때 조지아로 쳐들어간 러시아가 조지아 내에 있던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잇는 철도 및 도로 및 송유관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던 것도 두 나라를 염두한 일이다. 또한 러시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을 일절 인정하지 않으며 필요이상의 군장비 지원은 자제하고 조지아가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통하여 얻는 이득에 대하여 말을 아끼고 있다.
아르메니아 극우들에겐 터키 상당수 영토가 옛 아르메니아 땅이기에 되찾을 땅으로 여긴다. 우리네 환빠처럼. 옛 아르메니아 왕국 수도인 아니를 비롯하여 성지인 아라랏 산과 많은 땅을 터키 안에 가지고 있기에 영토를 찾지 못하면 그 안에 남은 조상들의 문화재나 유물들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아르메니아로선 무리인 상황. 사실 현실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점에서야 마찬가지지만 진짜 요동 지방에서 영향력을 상실한지 1,000년이 넘은 한반도와 달리 당장 터키는 아나톨리아 내륙과 동부 조금으로만 들어가도 당장 백년 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다가 대학살 이후 텅텅 비어 방치와 훼손, 풍화 속에 썩어 무너져 가는 옛 아르메니아 교회, 수도원, 주택 같은 유물들이 카이세리 부터 카르스, 디야바키르, 반 지방 까지 쫙 널려 있기 때문에 감정적, 역사적 거리라는 측면에서 환빠 따위 망상병 환자들과 비교할게 아니다. 사실 문화, 사회사적 측면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문화 공동체의 역사의 중심지는 아니가 위치한 옛 바스부라간[6] 일대, 즉 현대 터키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일대였으며, 관련 역사적 유물과 문화적 활동의 중심지도 대학살로 쓸려나간 아나톨리아 동부와 내륙지방이었다. 그 동네의 정치적 지배 세력은 고대/중세 로마와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몽골,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러시아 사이에 왔다갔다 했다 한들 해당 지방에서 아르메니아인이 계속 살아 왔으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 왔던 지역들이 100년 만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존재 자체가 멸균실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청소당해 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문화예술사적 관점에서 연구 보존되어야 할 유물들은 죄다 터키군 사격 연습 타겟으로 쓰인다던지, 인근 농부들의 헛간 재료로 무너지고 있다던지 하는 꼴을 수 십년간 눈 뜨고 지켜봐야 했으니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서 복창이 뒤집히는 건 당연지사.
2007년에는 터키가 화해의 제스쳐로 악다마르 섬 아르메니아 교회를 일부 고쳐준 일이 있는데, 이게 되려 아르메니아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악다마르가 아닌 악타마르 섬이라는 아르메니아어로 섬 이름을 바꾸고 이 섬 교회나 터키 전역에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 유적지들 소유관리권을 양도하라는 요구를 더하게 된다. 그러자 터키 극우들도 울컥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작살나버렸다고 한다. 이 때, 터키 카르스시에선 거대한 손조각을 조각하면서 평화의 손이란 이름으로 아르메니아와 평화를 기념하는 걸 만들었더니만 극우들이 와서 반발하는 통(카르스 학살 당시 피해자 유족 후손들까지 와서 이 조각가를 죽인다고 분노했다)에 미처 완성을 못하고 조각가가 한동안 피해있어서 몇 달이나 방치되기도 했었다. 나중에 완성은 했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쓸쓸히 방치되어 있다.
더불어 몇몇 터키 극우들이나 쿠르드족이나 극단적인 이슬람인들이 보란듯이 아르메니아 교회(터키 전역에 이런 버려진 채 관리되지 않는 교회들이 꽤 많다)에 총질을 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고 쿠르드인 저항세력이 이런 곳에 숨어드는 통에 터키군 전차가 아예 교회를 포격하던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동부 지방에 가득남은 기독교 유적 훼손을 터키 정부가 막은 게 90년대부터였다. 교회 유적이 쏠쏠한 관광자원이라 그런 면도 있지만...터키 전역에 워낙에 많은 기독교 유적 덕에 알려지지 않은 시골 교회 유적들은 이슬람 차미(Çami, 모스크 또는 마스지드라고 불리우는 이슬람 성원)가 된 곳이 많다.(예수나 인물 그림만 지우고 십자가가 새겨진 벽을 놔두고 그 모습 그대로 이슬람 성원으로 쓴다.) 덕분에 이런 곳 관리양도 요구에 터키 극우들이 화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나라가 없는 쿠르드인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오스만 제국 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치적으로 준동할 무렵 오스만 제국 정부는 인근 쿠르드 부족들을 준동 시켜 아르메니아계 마을들을 학살, 약탈하여 겁 주는 일이 많았고, 역으로 쿠르드 부족들이 정부 말 안 듣고 러시아 측과 내통하던가 할 경우 인근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내 찍어 누르는 일도 많았다. 이러다가 결국 1915년 봉기와 대학살 당시 주된 현지 진압/테러 겸 시리아 사막행 죽음의 행진 도중 간수로 쿠르드 부족들이 집중 참가한 것으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쿠르드 측도 당장 본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사막에서 죽으로 내모는 도중 영 미심쩍다고 분류 된 다른 부족들도 같이 강제 이주 당했고,[7]무엇보다 그 이후 터키 공화국이 수립 된 후 데르심 학살을 대표적으로 본격적으로 터키 측에게 탄압 당하기 시작했다.
이런 막장 사이클을 돌고 돌며 결국 20세기 중후반 쯤 되면 남부 카프카스/동부 아나톨리아의 터줏대감 격 양대 민족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인들은 전자는 아예 그 존재가 사라져버렸고, 후자는 고향 땅에서 2등 시민 취급 받으며 살아야 하는 형편이 되버렸다. 이러다 보니 현대 들어와 이라크, 시리아, 터키 현지의 쿠르드계 정치 단체들은 게릴라 반군인 PKK던, 기존 의회 정치 내에서 쿠르드인들의 권리와 터키 전반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하는 인민민주당 측이든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실체와 그 과정에 있었던 쿠르드인들의 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이다. 아르메니아 측에서도 아르메니아 공화국 당국이든, 아르메니아 혁명동맹을 비롯한 해외에 거점을 둔 디아스포라계 정치 집단이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터키 당국을 공적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나마 이슬람 나라이면서 이란과는 터키를 두고 사이가 안 좋은 점은 비슷해서 협력하는 게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매우 싫어하는데 터키가 그 이스라엘에 많은 도움을 주기에 당연히 터키도 매우 질색한다.게다가 터키와도 국경 분쟁 문제와 같이 과거부터 역사적으로 앙금이 컸기 때문에 이를 갈아왔다. (하지만 웃기게도 터키 맥주가 이란에 많이 수출된다(...)
하지만 이란과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둘이 원수질 일이 없고(물론 전쟁이나 갈등이야 있었지만 이웃나라끼리 흔하디 흔한 일이었고 되려 아르메니아에선 이란에 대해 역사적으로 매우 좋게 봐줄 일이 꽤 있었다.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인 아바스 1세(1571~1629)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우대하여 수도인 이스파한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허락했다. 그것도 종전에 이슬람 성원을 특별히 사도 교회로 만들게 해줘서 지금도 이스파한에 가면 거대한 이슬람형 돔 위에 십자가가 걸려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반크 교회도 이때 내 준 것이다. 특히 사파비 왕조 시절 왕조 설립의 주축인 튀르크계 시아파 전사 집단인 키질바시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을 영향력을 축소 시키고자 사파비 왕조의 샤들은 이웃 오스만 제국의 데브셰르메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전통적인 속주였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카프카스 기독교인 출신 개종자들을 집중적으로 천거하는 정책을 폈고, 이 덕분에 페르시아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반크 교회(1603년부터 2년동안 지어진 교회이다) 참고로 이 교회 안에는 1915년 아르메니아 학살을 추모하는 추모비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권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서로가 전쟁을 이겨 차지한 땅에 있던 교회나 성원을 자기들 종교 건물로 만드는 경우는 수두룩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이스탄불을 차지한 메흐메트 2세도 정교회 건물을 허락했지만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거대한 정교회 성당을 죄다 이슬람 성원으로 바꾸고 허락받은 정교회 성당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덕분에 지금도 이스탄불에 남은 이스탄불 정교회 성당을 보면 그리스나 다른 정교회 나라의 성당과 차원이 다르게 초라하다. 더불어 그리스 본토에 많은 섬에 남은 그리스 정교회도 엄청 작은데 크게 짓지못하게 해서 궁여지책으로 일반 가정집 수준 교회를 많이 만들었다.) 즉, 큼직한 이슬람 성원을 줘서 마음껏 너희들 종교 건물로 고치게 만들어 내준 게 대단한 셈이다.뭐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진 경제적 수완이 줄 이득을 위한 점이 컸겠지만.
아바스 1세는 시아파 골수 신도로서 순니파를 비롯한 다른 이슬람 종파나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반면, 딱 하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게만은 매우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종전 오스만 제국이나 다른 이슬람 나라들에서 자주 벌이던 기독교 및 비이슬람교 신도들에게 세금을 더 받던 것도 없애고 당당한 페르시아인으로 인정하며 세금도 더 받지않았고 이들을 경제직이긴 해도 주요 무역 담당같은 일을 맡기며 등용했다. 그래서인지 이주해온 아르메니아인들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의 생일에는 금을 가득 선물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성을 높이 사서 그들을 페르시아의 이득에 써먹으려 하고자 받아준 점이 있었지만.그 덕에 아르메니아인들은 꽤 관대하게 살아갔으며 아예 수도인 이스파한에 떡하니 졸파라는 아르메니아인 특별 자치 거주지역까지 하사받아 여기서 모여 살아갔었고 지금도 아르메니아인 10만 이상이 여기서 살고 있다.여담인데 크리스티아노포비아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란이 성지 이스파한에 이렇게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자치구역이나 교회를 인정하는 것도 엄청 관대한 거다. 다른 종파는 예외없이 박살내버렸다...
이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보면 당연히 터키와 차원이 다른 긍정적인 역사적 친밀감까지 있고 조지아보다 훨씬 경제적 규모도 더 크고 자원으로 도움이 되며(러시아도 막대한 자원이 있지만 여긴 애증의 관계이며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에게 하도 이래라 저래라 하기에 반발도 있다) 최근 현대사에서도 이란에 사는 아르메니아계들이 본국과 이란의 관계 우호에 기여하고자 사회 기부 및이란 정계에 로비도 하기 때문이다.덕분에 호메이니 시절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이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 이란 곳곳에서 천주교나 여러 기독교 성직자들이 살해[8]당하고 집단 폭행에 교회들이 불태워진 반면, 아르메니아 교회들에 대한 약탈이나 테러는 호메이니 정부가 강력하게 금지했는데 되려 팔라비 왕조 시절에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상업적 견제(팔레비 왕조는 유대인들을 우대했다)가 워낙 심했기에 이들이 호메이니를 은근히 지지해 비밀리에 상당한 돈을 지원했던 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에 군비도 제공하면서 아르메니아계의 입지는 제법 크게 인정받게 된다.
그야말로 수백여년 세월에 걸쳐 압바스 1세와 호메이니라는 골수 신앙인들이 지도자로서 자국에서 시아파만 고집했던 반면, 딱 하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공통점을 봐도 아르메니아에선 그나마 이웃나라에선 이란이 좋게 남을 수 있었던 것(물론 서로가 이득 때문에 그런 게 있었지만 그야말로 상부상조했다).
2009년 터키에서 다시 화해를 시도하고 2010 월드컵 예선전에서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맞붙게 되자 터키 총리가 아르메니아를 방문하기도 하며 학살도 일부 인정했다. 하지만 터키에서도 학살을 조금 인정해왔던 것도 있기에(앞서 언급하듯이 학살이 아예 없었다라고 하진 않는다. 그 수가 부풀려졌다는 것과 아르메니아도 학살했다고 따지는 게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반응은 그리 환영하는게 아니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 원정 예선경기에서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터키를 비난하는 시위도 벌인 바 있는데 경기는 터키의 2:0 승리라서 아르메니아의 기분은(...) 그래도 터키랑 이렇게 공식적인 축구경기를 가지는 거랑 달리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아예 경기를 치루지 않을 정도로 더 사이가 나쁘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이 1915년 발생한 터키인 학살사건(반 사건,사실 터키인보다 쿠르드인들이 더 많이 죽은 사건이라 이들이 격분하여 아르메니아 학살에 뛰어든 원인 중 하나)을 인정 및 사죄하는 등 일부 양보하면서 약간 분위기가 좋아질 듯했고 2010년 9월 19일 터키 악다마르 섬에선 95년만에 추방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입국을 허락하며 악마다르 섬 대성당에서 예배를 보게 허용했다. 이 자리에는 5천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참석했으며 200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했다.
아르메니아 악다마르 대성당
사실 이 예배는 2010년 4월 24일에 가질 예정이었으나 아르메니아에서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일로 기리는 날짜라서 터키 극우들이 반발하여 무기한 연장된 끝에 9월에서야 이뤄진 거였다.
921년 경 아르메니아 왕 기가크 1세가 세우게 했다는 이 대성당은 아르메니아에서 손꼽는 성당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1915년 이후로 아르메니아인 추방으로 오랫동안 버려져왔다. 이후로 이곳에서 쿠르드인들과 독립 문제로 벌어진 총격전으로 성당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가득했으며 문이 없고 벽 한 곳이 큰 구멍이 뚫려있었으며 아예 천장 한 쪽은 폭발하여 뻥 뚫린 상태로 훼손이 심했었다. 게다가 1951년에는 터키 측이 아예 박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걸 결사반대하며 막은 인물들이 아르메니아인이 아닌 동부에 거주하던 쿠르드인 지식인이라는 사실. 그 중 하나인 쿠르드계 터키 소설가인 야샤르 케말(Yaşar Kemal, 1923~2015)은 [9]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는 건 인류 역사에 둘도 없는 죄악이라며 이 성당의 파괴를 반대했다.
참고로 이 케말은 군부를 비난하고 쿠르드인 차별과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으며 온갖 풍자소설을 쓰다가 오랫동안 투옥당하고 무척 시달림을 받았지만 양심있는 작가로 터키 진보층의 격찬을 받았다.
어쨌든 겨우 파괴는 막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가 지난 2007년에서야 터키 측이 수리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갈등으로 다시 교회 예배는 불허되었다가 3년만에 예배문제를 허용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악다마르 섬(Akdamar Island-터키어는 Akdamar Adası)이 터키 이름이니 아르메니아 이름인 악타마르 섬 (Aghtamar,Akhtamar 아르메니아어는 Աղթամար [ɑʁtʰɑˈmɑɾ])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가 터키 측에게 그런 헛소리라면 앞으로 아르메니아인 출입금지하겠다는 엄포에 굴복해야 했다.
아르메니아에선 서로들 오려고 난리가 나면서 3만여명이 신청했으나 터키 측은 수를 줄여서 예배를 보게했다. 그리고 교회에 십자가를 일절 세우지 않게 했는데 이에 실망하는 아르메니아에게 터키는 예배를 망치고 싶냐고 못박았는데, 이 섬 주변은 쿠르드인들이 가득하며 터키인들도 보수적인 이슬람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에 3백명이 넘는 터키군경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터키 극우들과 쿠르드인들의 분노어린 반발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아제르바이잔도 그런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남겨진 이슬람 성원을 멋대로 교회로 개조한 주제에 터키에게 무슨 염치로 요구하냐면서 분노했다. 아예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당시 터키 대사를 소환하여 실망이라는 뜻을 보여서 터키 안에서도 아제르바이잔 기분을 생각하자는 의견도 엄청났다. 이런 가운데,아르메니아 정교회 주교는 이 예배를 매해 볼 수 없냐고 간청했으나 터키 측은 장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결국 화해 제스쳐라고 하기에는 여러 말이 많은 예배였다. 그렇긴 해도 2011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측 요구대로 이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워주었다. 물론 자국 극우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러다가 2013년부터 터키가 매해 예배를 허용하도록 하면서 거의 100년만에 아르메니아 소년들이 와서 세례식을 이 성당에서 한 바 있다. 2014년도 예배가 허용됐다.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극우파 반발이 여전히 거셌지만.
그리고 위에 서술한 대로 디야르비크르에 있는 수르프 기라고스 아르메니아 성당도 2013년에 복원됐다.
이렇듯 아르메니아는 주변 국가들과 계속 분쟁거리를 만들거나 떠안고 있는데, 실제로 터키와 분쟁이 터지거나 아제르바이잔과 또 전쟁을 할 것을 고려했는지 러시아 군대가 자국에 주둔했는데도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러시아에 많은 걸 의존하면서 또한 친러시아 극우들도 생기는 과정에 과거에 소련이 벌인 민족주의 및 반소 지도자들을 학살하고 역시 소련 시절에 벌인 학살 및 탄압을 침묵하는 러시아에게 반감도 크기에 애증이 교차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현대와서도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2008년 2월 19일 실시한 대통령선거에서 세르브 사르키샨 총리가 당선되자 현재 가택연금 상태인 테르 페트로시안 초대 대통령을 지지하는 야당 세력이 이를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여왔다.
게다가 러시아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얽매이는 상황에서 2013년 12월,러시아와의 천연가스 협정에 비준했다. 야당의 거센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놓여 있던 협정이 23일 의회에서 승인을 받았지만 당시 예레반에서 시위대가 반대시위를 벌였다. 갈수록 러시아 입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그 반대 이유인데 그만큼 러시아 눈치를 많이 봐야하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여론적으로는 러시아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이 많아서 2015년 초중반에도 예레반에서 연이어 반러시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주둔 러시아군들이 민간인 아르메니아 여성을 성폭행하고 이를 막으려던 남성을 쏴죽인 사건이 터졌음에도 러시아 측이 대충 해당 군인 일부만 몇년 징역형을 살게하고 부대에 관련한 처벌은 없고 대충 감추는 사건도 터졌음에도 아르메니아 정계는 러시아 눈치를 보며 덮어야 했다.
아르메니아 정계가 러시아에게 대들지 못하고 굽신거릴 수 밖에 없는 건 러시아가 떠나면 아르메니아로선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되기 때문이다. 터키는 상당한 군사강국이며 주변 유라시아 튀르크계 나라들이 지지하고 있고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크계 나라로서 이들과 우호국이다. 조지아는 위에 나오듯이 경제적으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에게 의존도가 높으니 아르메니아를 지지하지 못하며 그나마 이란이 있지만 악의 축으로 미국에게 허구헌날 까이는 이란을 의존하기에도 그런 상황. 그나마 2015년에 미국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면서 이란에 의존도가 차츰 높아지긴 했다. 아무튼 지리적 위치라든지 러시아 입김으로 미국이나 서구권 나라들은 도와줄 수도 없다. 터키 아니면 러시아를 통해 와야 하고 조지아는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러시아에게 경제,정치적으로 많이 얽혀있으니 행여나 아르메니아가 터키랑 전쟁이라도 붙어서 신나게 두들겨맞아도 물질적으로 도와준다고 해도 도와줄 길이 아예 없다. 터키는 당연하고 러시아가 만일 나몰랑하고 바라보는데 조지아도 길을 열어주긴 불가능이고 이란은 어찌 편들어준다고 해도 무력적으로는 돕기 어려우니 말할 것도 없다. 이러니 아르메니아로서는 열터져도 러시아에게 꼭 붙을 수 밖에 없으니 결국 이런 현실 속에서 아르메니아에선 유로마이단과 같은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 ↑ Yervanduni(Երվանդունի). 고대 페르시아어로 용맹하다는 뜻의 "에루안드(Eruand, Երուանդ)"의 변형이며, 그리스인들은 오론테스 왕조(Orontid)라고 썼다.
- ↑ 특히 동로마가 소아시아를 빼앗긴 이후
- ↑ 씁쓸하게도 터키를 아르메니아 학살로 비난하던 독일도 똑같은 욕을 먹고 있다. 바로 1900년대 초반에 식민지이던 나미비아에서 저항하던 헤레로족을 사막에 내다버려 학살해버린 것. 그래놓고 독일은 터키처럼 우리가 안 죽였으니 사막에서 지들끼리 싸우다 죽던지 자연사했으니 우린 모른다라고 하다가 나미비아에게 그럼, 독일 본토에서 안 죽이고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인 수백여만 유태인이나 반나치 인사들이나 집시들,..무수한 사망자들도 똑같이 책임없다고 해야지?라고 신나게 까였고 터키에게도 사돈남말하네라고 역시 신나게 까였다...
- ↑ 미국에서 꽤 큰 기업이 아르메니아에 공장을 짓고 투자하려고 했는데 오너가 아르메니아계였다. 하지만 회사 간부들은 그러다간 유라시아권 투자와 이전에 유라시아 나라들에 세운 공장까지 보복당한다고 결사반대했고 상업성이란 명목에서 결국 없던 일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 ↑ 그나마 이스라엘은 터키와 2011년 무기판매를 취소하며 사이가 나뻐졌으나 그럼에도 이스라엘로선 터키를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다. 온갖 자원 및 여러가지로 보복당하면 엄청난 국가손해이기에
- ↑ Vaspurakan, 서부 아르메니아어 발음으로는 바스푸라칸
- ↑ 사실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가 워낙 스케일이 커서 그렇지, 1차대전기 오스만 정부는 뿐만 아니라 동부 아나톨리아 일대 아시리아인들도 제노사이드라 할만한 강제 이주/인종 청소를 했으며, 폰투스 일대 현대 트라브존 중심의 그리스인들도 대량학살/강제추방, 게다가 종교도 가리지 않고 참 평등하게도(...) 인근 아랍 부족들과 쿠르드인들도 대량으로 학살과 집단 아사를 동반한 강제 추방을 자행했다. 지속적인 반란과 진압성 학살은 있을지언정 전성기 시절 부터 비교적 안정적으로 민족, 종교 공동체 사이 공존 체제를 보장해 온 전 시대 오스만 정치 시스템의 역사와 비교하여 생각하면 1차대전을 통한 해체시기 오스만 제국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의 피바람과 인종 청소를 자행했고, 현대 중동의 정치적 불안과도 연결점이 있는 역사적 유산이다. 문제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서구권은 아르메니아나 그리스 학살에 대해선 위키피디어 영어판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자료도 올리는 반면, 이 당시 학살당한 아랍 무슬림 학살은 대충 한 두줄 글로 언급하는 수준. 이러니 아랍권에서도 오스만 제국도 증오하지만 서구 기독교 색히들도 기독교 쪽 피해만 자세히 캐고 터키를 뭐라고 한다며 무척 기분나뻐하며 대든다. 덕분에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언급되면 아니? 그 시절에 아르메니아놈들만 학살당했냐! 기독교만 피해자만 보이는 거냐며 반론하기에 이른다...
- ↑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사가 이란에 대하여 쓴 책을 보면 1979년 당시 이란에 거주하던 이란인 개신교 선교사는 갑자기 들이닥친 폭도들에게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두려워하는 신도들 앞에서 잘린 목사의 목을 보이며 죽기 싫으면 개종하던지 아니면 이란에서 나가라는 경고를 남기고 사라졌다고...이 선교사가 이란에서 만난 개신교 현지인 목사에게 직접 들은 일이라고 한다.
- ↑ 바람부족의 연대기같은 작품이 한국에서도 정식번역되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