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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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어: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ուն (Hayoc’ c’eġaspanut’yun, 하요츠 체가스파누티운), Մեծ Եղեռն (Mec Eġeṙn, 메츠 예게른)[1]
터키어: Ermeni Meselesi [2]
영어: Armenian Geno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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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터키난징 대학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 근현대 최초의 학살사건[3] 이란 주장도 나오며 나치 독일홀로코스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연구된 학살[4]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이유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건이기도 하다. 희생자수는 주장하는 측마다 다르긴 한데 100만에서 150만명으로 추산된다.

다만 보통 알려진 거와 달리 아르메니아인만 골라 죽인 게 아니다. 후술하면 알겠지만 민족주의적으로 종교를 떠나 오스만 제국에 대들 민족은 싸그리 제거한다는 것이라 아시리아인 및 무슬림이라고 해도 아랍인도 아르메니아인보다 수가 적을지언정 수십여만 정도 엄청나게 학살되었다. 이 학살 이후 그리스인들도 수십여만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학살로만 알려졌고 이들은 아르메니아 측도 이 학살을 비난하는 측에서도 묻혀져버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아랍권 당시 피해를 입은 나라는 아르메니아 학살이니 대학살이란 이름에 대해 걔들만 학살당했냐며 언짢게 여긴다. 영어 위키피디어만 해도 이때 벌어진 무슬람 학살(아시리아인이나 그리스인 학살이라 별도로 상세히 분석하는 거랑 대조적이다.)에 대해서 고작 Massacres in the Çoruh River valley(코루흐 강 계곡 학살)이라고 두루뭉실하게 대충 언급되는 수준이다. 이 명칭에 대해서 아랍 측에서 무척 안좋게 여기는데 일개 한 지역 학살사건만 다루고 있다는 것. 강제로 이동하던 아랍 무슬림들을 코루흐강 계곡에서 쏴죽이거나 밀어 강물에 떨어뜨려 죽인 학살 사건 하나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문제의 원인

아르메니아 학살을 다루기 전에, 우선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통치시스템에 대해 언급을 해야 한다.

오스만 제국시기 통치체계는 기본적으로 자치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구의 통제가 용이한 도시는 오스만 제국이 직접 파견하는 태수와 지사들이 통치하고, 향촌은 현지의 유력 인사들이나 군벌, 부족들이 자치하고, 속주 지역 또한 현지의 왕이나 총독이 자치하고 단지 세금을 제때 제때 이스탄불에 보내고 술탄에 기어오르지만 않는다면 오스만 제국에서는 현지 군벌, 자치세력이 무엇을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기도 하거니와, 제국 내에 통용되는 언어의 종류도 워낙 많기 때문에, 그리고 민족간의 문화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심지어 밀레트 제도 하에서는 세금제도까지도 각 밀레트마다 달라서 기독교인들은 중앙에서 어느정도의 세금을 거두라고 할당량이 떨어지면 신자들의 명부를 관리하는 교구가 세금을 할당량보다 많은 세금을 거둔 다음 남는 액수를 교회가 운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파나리오테스의 시기에 이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는 그야말로 돈이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온갖 대가문들이 돈을 대고 줄을 서는 등 도때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다만 이런 자치시스템은 중앙정부가 지방에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적어지므로 광할한 지방을 통치하기에는 편리했으나 일단 반란이 한번 터지면 삽시간에 가뜩이나 약한 지방통제력을 삽시간에 잃어버리는 효과를 낳게 된다. 때문에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오스만 제국은 상당히 가혹하게 진압을 했는데, 거의 재정복에 준할 수준으로 반란지역의 주민들을 통제하고, 심지어 반란의 중심지는 학살과 파괴, 강제 이주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학살의 근본 원인도 따지고보면 중앙정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못 갖고있던 상황과 중앙정부가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러시아의 반란선동, 청년튀르크당과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운동의 충돌,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서 영토를 상실하여 대규모 오스만계 난민들로 인해 기독교 이웃들에 대하여 악화 일변도를 겪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여론이 짬뽕이 되어 벌어진 복잡한 원인을 갖고 있다. [5]

오스만 제국은 신민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각각의 밀레트(Millet)를 조직시켜 각자의 종교법과 관습법대로 사법을 시행했다. 이를테면 발칸지역의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등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 밀레트'로 묶어 정교회 교구제에 따라 판관을 배정하고 이들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내정했으며, 터키인,아랍인,쿠르드족 가운데 수니파를 믿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이슬람 판관(Kadi)와 대율법학자(Ulama)들이 이들을 책임졌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들 또한 자체의 밀레트를 갖고 있었는데, 이 제도가 도입될 초기에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무슬림이냐, 그리스도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했지 그가 사용하는 언어나 민족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6] 19세기 이전까지 밀레트 제도는 무슬림에게나 기독교인에게나 각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잘 돌아갔으나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오스만 제국내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18세기 파나리오테스들이 해외무역과 권력층에 대한 줄대기로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19세기에 이르면 프랑스, 러시아등 유럽 열강들이 오스만 제국내 기독교인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뒤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탄지마트 이전 법으로는 무슬림은 인두세를 면하는대신에 군대를 가고, 기독교인은 징집을 면하는 대신 인두세를 내는식으로 나름대로 공평한(?) 협의점이 있었지만 탄지마트 법 이후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차이를 없앰에 따라 무슬림들은 "우리도 군대 안가겠다!"고 반발하고, 기독교인들은 "군대를 가느니 차라리 내던 세금 계속 내겠다!" 면서 반발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파들이 득세하면서 탄지마트 개혁도 물거품으로 되어버리고, 민족주의운동이 더 넓게 퍼지는 와중에 보수파들이 강화한 것이 오스만 제국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차이를 규정한 옛 법률의 강화였다.

쉴레이만 1세의 법에 의하면,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거주지가 구분되며, 복장이 구분된다. 이를테면 예루살렘 구시가지 처럼 무슬림 거주지와 기독교인 거주지, 유대인 거주지가 전부 구분되어 있다. 대체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발칸반도 지역의 경우, 기독교인들은 농촌에 거주했으며, 무슬림들은 도시에 거주했으며 각자 자신의 구역에서 교회 종을 울리거나 아잔을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이스탄불같이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함께 섞여사는 지역의 경우 무슬림지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교회들은 종을 울릴 수가 없었다.[7] 하지만 이러한 법도 별로 의미가 없었던게, 오스만 제국 초창기에는 새로운 성당, 시나고그의 건립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나, 17세기 정도만 되어도 도시내 기독교인 유력자들이 도시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여 이런 규제를 묵인해준 상태로 새로운 성당이나 시나고그를 건설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이런 뇌물을 먹이거나, 어느정도 권력을 가진 기독교인 귀족, 상인집단, 영주가 없는 지역들인데, 이스탄불을 비롯한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들보다도 더 강력한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번성하고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동부 시골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런 특혜도 없이 척박한 땅이나 파먹으면서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부패한 법체계와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에서 반 기독교적인 관리나 현지 부족장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혀도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훗날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러시아가 이 지역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을때 현지 아르메니아인들중 상당수가 러시아에 호응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불안불안한 체제 하에서나마 제국 내 소수파들은 조용히 참고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에 확산된 민족주의가 드디어 오스만 제국에도 들이닥치며 이들 차별받는 소수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한다.

3 아르메니아 수난의 시작

1894년 오스만 제국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서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그리스를 마지못해 독립시키고 유럽 열강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기 때문. 그래도 오스만 제국에선 그리스 독립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더이상 그리스인을 요직에 기용하지 않으면서부터 드라고만(Dragoman - 서구와의 교섭을 위해 설치한 외교부)이라든가 관료직에 아르메니아인을 대거 기용했다.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고 자치 혹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수동적인 모습을 지켰다. 애초에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정부 덕분에 자신들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라고 언제까지 2등 신민의 처지를 받아들일 것은 아니었고,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 교육 받은 지식인층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들도 자신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875년 경에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까지 나서서 토지 몰수, 무슬림들에 의한 약탈과 강제 개종, 강간과 살인을 막아달라고 청원했지만 오스만이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한 경우는 전무했다.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열강들과 열강의 지원을 받는 자국내 민족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반기독교 감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으며, 또한 수 차례에 걸쳐 유럽쪽의 영토와 종주권을 상실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 또한 좀 더 관용적이었고, 다양성을 인정하던 동로마의 계승자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본격적인 이슬람 제국이자 수니파의 종주국이란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제국이 1877~1878년에 벌어진 튀르크-러시아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패해 불가리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등 지배하던 동유럽 속령들을 독립시키고 허구헌 날 털리기 시작했다. 낡고 비효율적인 내부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골골거리며 유럽의 환자 소리 듣던 것이 이 시대 제국이지만[8] 패전국이 겪는 전형적인 인지부조화 속에 이 모든 것을 동부지역 기독교인들이 러시아와 짜고 벌인 짓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이 밀려난 지역에서는 서구의 묵인하에 이슬람교도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만행이 저질러졌는데, 이때 고생꽤나 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 처지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하여튼 전반적으로 이 시기 오스만은 1차 대전 직후 독일이 '내부에서 찌르는 바람에 진 거다' 운운하는 것과 소름돋을 정도로 비슷한 양상이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카프카스 일대를 상실했던 시점에서 부터 발칸 전쟁에서 패하고 1차대전이 터지는 시기 까지 1~2백만 사이의 발칸반도, 카프카스에서 쫒겨난 무슬림 난민들이 콘스탄티니예, 트라브존, 이즈미르 같은 도시들의 거리를 꽉 매웠고, 이들리 러시아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게 당한 수모와 핍박을 아나톨리아인들에게 전하면서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믿지 못할 내부의 적이라는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다.

한편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하던 러시아는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 디야르바크르, 시바스같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강제했다. 이 결과로 여태껏 제국에 눌려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을거라 믿게 되었고, 본격적인 아르메니아 독립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훈차크, 다슈나크 등 아르메니아인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정당이 결성됐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제국에서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의 여파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곳곳에서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사회의 유지를 위해 오스만 당국이 선택한 방법은 인명 살상을 동반한 대대적이고 가혹한 탄압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 오스트리아가 제국 내 최대 소수민족인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이뤄 오스트리아-헝가리 체제를 성립시켰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두 나라는 조건도 달랐고, 잠시나마 안정을 이뤘던 오스트리아도 결국에는 소수 민족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며 붕괴했긴 하지만. 기독교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쳐발리기 시작하며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기독교에 맞선 범이슬람주의가 유행한 것도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악재였다. 현대 중동에서도 흔히 보이듯, 기독교 외세에 맞서자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주 먹잇감은 막강한 외세보다는 옆 동네에 사는 힘 없는 현지 기독교인들인 경우가 잦기 때문.

긴장감이 높아만가던 가운데, 1894년 압둘 하미드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 '하미디예'라고 이름 붙인 친위부대를 동부 국경에 투입했는데, 이들은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이 창설 목적이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배치된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동원됐다. 한때는 하미디예가 모든 학살의 행동 대장이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들의 역할을 낮춰 잡는 시각도 등장하고는 있다. 물론 이들이 주범이 아니란 뜻은 아니고 기여율을 이전에는 90~100%로 봤는데 요즘은 7~80% 정도로 낮춰 본다는 이야기. 이 시기 동부에서 제국은 가뜩이나 반란 분위기가 무르익은 지역에서 징세율을 두배로 올리는 등 일부러 반란을 유도한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하다시피 반란은 일어났고 곧 무자비한 학살이 뒤따랐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하미디예의 잔혹 행위를 막아달라고 술탄에게 청원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오스만은 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자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고, 이는 곧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 10만에서 30만에 가까운 인원이 학살 당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학살에 참여했고, 살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당시 유럽 외교관들이 목격한 것들 중에는 총상은 양반이고 가죽을 벗겨 놓은 시신들도 흔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와줄 것처럼 해놓고는 막상 학살 당할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서구 국가들에 항의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운영하던 오스만 은행을 점거하는 무력 시위까지 했지만, 결국 서방의 도움은 오지 않았다.[9]

한때는 이것을 '1차 학살'로 분류했으나, 제국 통치에 반발하는 집단을 찍어누른 전근대적 진압에 가깝고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학살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터키와 몇몇 어용 국가들이 외롭게 2만명 피해 설을 주장하고 학계에서는 10만-30만을 정설로 친다. 여하튼 이래서 근현대 최초 학살이라는 정의가 탄자니아 및 나미비아 학살이 먼저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아다나 학살

Adana massacre
1909년 4월 오스만 제국 아다나 주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다. 오스만 측 주장으론 독립을 요구하며 아르메니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 오스만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무력 충돌로 782명 무슬림이 죽자 이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는 거였다. 오스만 측 발표로는 5천여명 아르메니아인이 죽었다고 발표하는데 아르메니아 주장으론 2만에서 3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아시리아인들까지 이 와중에 3~5천여명이 덩달아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학살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 언론 일부가 비난한 정도외에는 국제적으로 묻혀지고 말았다.

5 1915년 학살

망해가는 오스만은 이후로도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1차 대전을 겪으며 나라가 기울어간다. 오스만 제국은 결국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제국의 '성전'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울 것을 요구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해서 러시아를 공격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뭐 잘해준게 있다고 저런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대응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에르주룸 회담이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 사이에 열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 위협으로 판단한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캅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약 3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당연히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차 아르메니아 학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연맹과 진보를 위한 회의(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빼놓을 수가 없다. 복잡한 풀네임보다 당시 서구 언론의 애칭이었던 청년 투르크당으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CUP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옅어서 초기까지만 해도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가 수도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던 아다나에서 이 기회를 틈타 현지의 반동주의적 무슬림들이 쿠데타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둘 하미드의 반동 쿠데타 자체는 고작 11일만에 제압되고 헌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만 5천에서 3만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된 이후였다. 현대까지도 터키에서는 이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이었다던가 단순히 정치적 보복에 불과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며 이 사건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한편 아르메니아 학살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고 터키와 터키빠들만 주장하고 사실은 이전부터 계속 이어져오던 일련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의 일환인 (Van) 사건이 뒤이어 터졌다. 1915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어 오스만은 CUP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딱히 그렇다고 피지배민족의 권리나 인도주의 같은 것을 함양한 세력은 아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구 열강의 오스만 침탈을 겪으며 이런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건 그리고 이 전이나 현대에 들어와서 보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반인륜적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장 학살을 주도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이었던 탈라트 파샤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 박사 같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무늬만 무슬림'이지,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도덕적으로 냉소적인 인간들이었고, 이는 이들이 외국의 저널리스트나 평소의 발언과 행동, 훗날 회고록 등에서도 잘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무슬림적 관점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열등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호해 주어야 하고, 이슬람 국가 내에서 살 자리가 있는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탈라트 파샤를 비롯한 CUP 지도부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로 민족적인 문제로 보았고, 튀르크인들이 지배하고 영유해야 할 땅인 아나톨리아를 두고 경쟁해야하는 박멸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단순한 징벌, 차별의 대상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적 의미에서 절멸해야 할 열등 인종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전과 달리 1915년에 벌어진 대학살에서는 추방과 학살을 피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여도 박해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추방, 학살하였다. '흔히 터키측 어용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지정학적 갈등에 의해 터진게 아니라 조직적이고, 인종적 논리에 따라 자행된 근대적 제노사이드라는 걸 입장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선 전근대적인 술탄 정부보다 더한, 근대적 민족주의로 무장했으며 이 시기 막장화된, 혹은 막장화되던 독일, 일본 등과 크게 다를게 없는 적을 만나게 된 것. 오스만 정부는 현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협조하려 들 것이라 의심했는데, 누가 그런 상황을 자초했는지만 차치하면 판단 자체는 상식적이었다. 반 일대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제브뎃 베이(Cevdet bey)는 매우 강경한 반아르메니아주의자였는데, 그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잔뜩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의 20년째 겪고 있던 학살과 약탈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어느 정도 무장을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또 반대로 오스만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어 구체적인 사실은 미궁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으며, 제브뎃 베이 본인도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러던 와중에, 반 시에 도착한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에게 젊은이 4천명을 징집하겠다고 통보한다. 하지만 제브뎃 베이는 이미 반 일대에서 숱하게 학살을 벌인 전과가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제브뎃 베이가 먼저 도시의 가용 병력을 제거한 뒤 쳐들어오려는 심산이라고 판단하고 징집령을 거부했다. 반 공방전의 시작으로 알려진 1915년 4월 20일 직전인 4월 19일 하루에만도 2500여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된 상황이었으니 아르메니아인들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4월 20일, 명령에 저항하는 도시를 봉쇄하고 있던 투르크군이 도시에 들어가려던 아르메니아 여성을 붙잡아 희롱하자 이를 막기 위해 도시에서 아르메니아 남성 둘이 뛰쳐 나왔고, 투르크 군인들이 이들을 사살하자 분노한 아르메니아인들이 투르크 순찰대를 공격했다. 이에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구역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며 반 공방전이 시작됐다. 도시 내부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들의 전투가 벌어졌고, 도시 외곽에서는 진입하려는 오스만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교전을 벌였다. 한때 러시아군이 동부 아나톨리아로 깊숙히 진격해오고 투르크군이 후퇴하며 포위가 풀린 적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패배하고 밀려나기 시작하자 반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도 대부분 피난을 갔다. 이 피난 과정에서 쿠르드인들의 공격으로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다. 반 시에 거주했거나 반으로 피난했던 인원 중에서만 보통 5만에서 6만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오스만 제국은 곧이어 벌어진 비틀리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물리치고 시간을 벌자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모두 살던 곳을 떠나 시리아 사막 등으로 강제 이주 당했는데, 오스만은 이주 중에도, 이주 후에도 제대로 된 생필품을 제공한 적이 없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을 의도적으로 아사시켰다. 오스만군은 이주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고, 야외에 노출된 아르메니아인들이 쿠르드족을 비롯한 적대 세력들에게 공격 받는 것도 사실상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이를 조장했다. 터키는 지금까지도 이 학살을 은폐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터키의 입장을 무분별하게 대변하는 자들은 저 학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노선 갈등으로 자기들끼리도 죽이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싫어한 쿠르드족들도 학살에 나섰고, 많은 수가 직접적으로 살해되지는 않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서 참 복잡한 사건이라고 애써 오스만의 책임을 희석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누구도 바탄 반도에서 죽은 미군이 대부분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으니 정글과 태양을 탓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지원도 보호도 하지 않으면서 가혹한 환경으로 내몬 것은 직접 죽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학살의 의도를 갖고 자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저런 오지로 보낸 당사자들은 명백한 살해의 의도를 갖고 있었고, 단지 그들이 선택한 수단이 자연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학살한 숫자도 매우 많다. 이 당시 오스만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집단으로 불태워 죽이거나,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나가 물에 던져 죽이는 등 참으로 창의적인 방법들까지 동원해가며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피해자 수는 100만이 넘어갔다.

그리고...아르메니아 인 학살은 이렇게라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만 덩달아 학살당한 쿠르드인들이나 시리아 정교회인들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쿠르드인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살았기에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 않아 서로가 죽이고 학살하면서 가해자이자 학살자가 되었던 씁쓸한 결과가 되었다.

더불어 당연하지만 오스만 인들이라고 닥치고 아르메니아인 죽이삼~~이런 것도 아니긴 하다. 오스만 인들도 목숨걸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켜주기도 했다. 2001년 당시 98살이던 바살프 아티람치안이라는 아르메니아인은 어릴적 자신이나 가족들과 이웃, 수백여명 아르메니아인들을 오스만군이 죽이려 추격할 당시, 이제 우린 죽었구나 다 포기했는데 지나가던 오스만인 양치기가 대충 보더니 나를 따라오면 목숨이라도 일단 구할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일단 따라가니 작은 변두리 마을로 간 양치기가 대충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지하라든지 헛간에 아르메니아인들을 숨겨주고 물건은 대충 창고에 넣고 일상처럼 지냈다고.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추격하던 오스만 군인들이 와서 아르메니아인들 행방을 묻자 누군지 모를 이들이 무더기로 저 쪽으로 가는 걸 잠깐 보았을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며칠이나 숨겨줬다고 한다. 이 마을로 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중에 병으로 죽은 한두명 빼고 모두 아르메니아로 무사히 달아났다고 한다. 90년대 들어서야 이 증언을 토대로 아르메니아 측에서 이 마을로 와 보았지만 마을은 흔적도 없어진 다음이었다고....

일부라고 해도 오스만 정계나 언론도 이건 학살이다! 범죄를 왜 저지르는가? 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를 보인 이들은 매국노같이 매장되어 같이 학살되거나 암살,테러에 시달려 해외로 달아나야 했다. 터키계인 영국 정치인 보리스 존슨도 바로 이 학살을 반대하던 정치인, 언론인 알리 케말 베이(1867~1922)의 증손자이다. 케말 베이는 정계, 언론으로 이 학살을 반발하며 비난하다가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2016년 4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도 이걸 다루고 있는데 이 당시 오스만인 농부가 도와줘 목숨을 구해 무사히 아르메니아로 간 아르메니아인 증손자들이 목숨을 구해준 오스만인 무슬림 증손자랑 지금도 종종 만나며 친하게 지내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스만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반감도 컸지만 아르메니아인을 도우면 매국노로 몰려 같이 처형당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학살을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갈 수 없지만.

5.1 그 뒤에

그런 와중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마침내 1918년 5월 28일, 독립국가인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나라를 가진 기쁨도 오래가질 못했다. 아직도 터키의 지배를 받는 아르메니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터키를 침공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아르메니아는 전체 사상자가 2만 정도로 다른 나라에서 보면 적은 편이었지만 이 당시 아르메니아 공화국 인구가 200만도 안되었던걸 생각하면 엄청난 피해였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건국 이후로 분열된 문제(위에 열거한 살아남고자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역자 여부와 이들을 같은 아르메니아인으로 받아줘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살고자 무슬림으로 개종한 이들도 있었다.당연하지만 현재 아르메니아에선 이들을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종하고 학살을 도운 것뿐.이들도 피해자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배신자라느니 매국노라느니 비난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이들도 억울한게 살고자 그랬고 무슬림으로 개종해도 학살당한 피해자도 있기 때문.)로 논란과 갈등도 빚어지던 와중에 결국 소비에트 연방에게 흡수당하고 만다.

그래도 아르메니아로서는 학살에 기여한 오스만 장군 및 일부 책임자들이 1920년 초반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암살당하며 조금이라도 원한을 풀긴 했다. 1921년 아르메니아인 소그호몬 테흘리안(1896~1960)이 학살에 참여한 내무장관 마흐메드 탈라트(1874~1921)를 암살하던 게 유명한 사례다. 다만 이 인물들은 아타튀르크에 반발하여 축출되어 권력을 잃었기에 죽이기 쉬웠던 점이 있었고 아타튀르크를 따르던 학살 관련 장군들은 암살이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써 암살한다고 쳐도 아직도 오스만령에 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복살해할 가능성을 걱정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위에 열거한 반 학살을 비롯한 학살을 저지른 제브뎃 베이는 이후 은퇴하여 천수를 누렸듯이 학살자 상당수는 천수를 누렸다.

터키는 냉전기에는 소련을 상대하는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서방 국가들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논평을 내기를 꺼려 왔었다. 참고로 터키 내에서는 50년대에 작가인 아샤르 케말이 쿠르드인 및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과거를 거론했다가 무지 고생해야 했었다. 이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학살로 인정한 것은 65년 우루과이가 최초이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터키의 가치가 하락하자 이제 더 이상 터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 서방 국가들 대부분이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과 이에 대한 부정을 규탄하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의 경우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법안까지 제정하기도 했었다.그래놓고 알제리 학살에 대한 건 프랑스는 터키가 하는 짓을 따라한다[10]

2015년 3월 기준으로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할 것인가에 대해 심리하고 있는데, 만약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부정이 금지될 경우 유럽 연합 소속 전 국가가 아르메니아 학살이 사실이라는 증언을 채택하게 되는 것이라 귀추가 주목된다. 하지만 1년 넘도록 이에 대하여 그러니까 기독교인에 한해서만 학살이라는 걸 부정하는 걸 금지하고 기독교 열강이 비기독교권에 저지른 학살에 대한 부정은 넘어갈것이냐? 라는 비아냥도 당연히 나오고 있다. 이는 터키의 물귀신 작전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렇게 치자면 그 시대, 유럽 열강이 여러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 해당 피해국가들의 반발을 염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터키 독립전쟁이후 체결된 로잔 조약으로 터키 공화국 영토에서 거의 추방조치된 그리스인과 달리,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터키에 남아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20-5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스탄불에서는 아르메니아어 신문도 발행될 정도로 꽤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학살당시 강제이주지로 설정된 터키 남동부지방과 시리아에도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아르메니아계이면서도 스스로 밝히지 않아서 간혹가다 시골에서 누군가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무슬림이거니 하고 이슬람식 장례식을 준비하다가 알고보니 아르메니아 정교인이라는걸 알고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곤 한다.

6 논란

이 사건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터키측의 집계에 따르면 피해자는 20만 명.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추정치는 150만 선이다. 현대에도 터키와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세력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최대한 부정하거나 어떻게든 물타기해보려는 악질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난징 대학살 부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다. EU에서 터키의 가입을 반대하는 주요 명분 중 하나가 지금까지도 터키가 이 범죄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터키가 이거 인정하고 배상하고 그런다고 당장 EU가입이 되는 것도 아니다. 터키에서 이러면 당장 가입할 수 있느냐? 이러자 이 명분으로 반대하던 그리스나 프랑스가 긍정적인 답변도 못하고 머뭇거렸기 때문. 터키에서는 그저 우리가 싫다고 명분을 들이댄 것 뿐이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이 항목에 여럿 나온 사항이지만 터키를 비난하면서도 그 시대, 식민지에서 유럽,미국,일본 등등 강대국들이 벌여놓은 학살도 넘치는 상황이고 현대에도 각국 이득과 여러 문제로 논란이 크다.

6.1 다른 나라들의 태도

아르메니아 학살을 깊이 공감하며 터키를 비난하는 나라인 그리스는 영토문제나 다른 문제로도 터키랑 으르렁거리는 점도 있지만 그리스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서 이해한다고 이를 가는데 비슷한 시기인 1913~1922년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주장으로는 아르메니아 학살 못지않게 사망자가 25만(터키 주장)에서 90만명(그리스 주장)에 이른다! 이 학살에 큰 기여를 한 누레딘 이브라힘(1873~1932)는 이즈미르 화재 당시 그리스인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던 인물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한 알리 케말 베이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인물(다만 아르메니아 학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이다.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그를 우대했고 그가 병으로 죽자 국장으로 장례를 베풀었다. 다만 이 당시 그리스 내에서도 이에 대한 분풀이로 터키인도 학살당한 게 있어 터키도 같은 학살자라고 비난하며 맞서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 학살보단 묻혀졌고 이 항목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터키와 사이가 나쁜 불가리아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와 관련해 아르메니아를 편 들고 터키를 비난하는데 불가리아도 발칸전쟁 당시 에디르네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 곳곳에서 남아있던 5만에서 8만 정도 불가리아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이제이가 된 문제로 불가리아는 터키랑 그리스를 같이 욕하기도 한다. 일부 오스만 제국 지배에 협조하던 그리스인 민병대에 불가리아인 학살을 맡겼기 때문. 그리스야 살고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불가리아는 "너희들이 안 그래도 같잖은 불가리아놈 이 기회에 죽여보자고 나선 거 알거든?"이라며 그리스도 학살자로서 같이 욕먹을 문제가 있다고 맞선다. 하긴 오스만 제국 지배 이전부터 둘이 으르렁 싸워오고 서로 마구 죽이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도 비슷한 시기 쿠르드인에 대하여 학살을 벌이던 일(윈스턴 처칠 항목에서도 나올 만큼 처칠이 그 학살자가 되었다...)이라든지 터키에서는 너희들부터 어디 보상하시지? 라고 맞서거나 그 피해 국가들에게 아르메니아처럼 따지라고 권유하고 있다...그리고 위에서도 서술한 대로 오스만 제국을 학살자라고 비난하던 레오폴드 2세라는 벨기에 또라이콩고에서 벌이던 학살은 더 엄청났으니.......게다가 웃기는 건 벨기에는 이 학살을 나몰랑하고 그 레오폴드 2세를 찬양하는데 급급하기에 터키에게 지금까지도 욕먹고 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데 터키는 콩고에게 쟤들 좀 봐라, 지들 학살을 아예 감추는 주제에 누굴 탓하는 걸까? 콩고 늬들은 보고 화 안나니라고 약올리고 콩고는 누가 할소리냐며 벨기에에게 욕하고 있다....

다만 터키는 덴마크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는데 1783년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하면서 가축의 80%가 죽고 이 여파로 기근이 오면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던 일을 가지고 당시 아이슬란드를 지배하던 덴마크를 비난하다가 오히려 역관광(사실 덴마크도 이 기근으로 약 8만에서 20만명이 사망했다.)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 터키가 이걸 거론한 게 영국이 터키를 비난하다가 터키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들먹여 영국에게 엿먹인 적이 있었기에 비슷하게 들먹인 거였다. 확실히 아일랜드 대기근은 항목을 봐도 확실히 영국이 벌여놓은 짓이었고 그 대기근 와중에 굶어죽어가던 아일랜드를 영국이 지원도 외면해 그야말로 아르메니아 학살이랑 비슷하거나 이상일수도 있는 200만 이상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떠나게 만들어 850만 인구가 400만 이하로 줄어들게 한 인재(200년 가까이 지난 2010년대 지금까지도 아일랜드 인구는 이 기근 전 인구 수를 회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이다. 그러니 지금도 아일랜드가 이를 갈며 학살이라고 영국을 비난하고 있으며 터키의 이런 지적에 동감하며 영국에게 맞섰다. 그러다보니 덴마크에게도 비슷한 걸로 꺼내들던 게 이 기근이었지만 아일랜드와 달리 덴마크 본토까지 피해를 입었기에 이건 자폭이었다. 사실 덴마크는 17세기까지 3백여년 정도는 아이슬란드나 페로 제도에 대하여 차별없이 잘 지내왔으나 점차 선민적으로 변해 아이슬란드와 갈등을 빚었고 18세기 아이슬랜드 의회를 강압적으로 덴마크가 없앤다든지 갈등이 벌어져서 결국 독립 요구와 일부 무력이 벌어지게 되어 결국 아이슬란드는 독립한다. 그런데, 터키는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 자국도 어려운 판국에 술탄 압뒬 메지드 1세가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대영 제국 위신이 떨어지니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다. 술탄은 이 요구에 응했지만 그 대신 식료품을 가득 채운 배 3척을 몰래 보냈고, 터키 선원들은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이를 전달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무척 고마워했고 감사장도 보내주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스만 제국 상징이던 초승달을 지역 문장에 넣어가며 고마움을 표하던 일이 있던만큼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해서 영국과 반대로 터키가 은혜를 베풀었다. 터키에선 이걸로 큰소리치고 영국에게 뭐라고 하는데...사실 지원받은 아일랜드에서야 무척 은혜를 입은 셈이긴 하다.

일단 현대에 와서 세계적으로 대학살이라고 인정하지만 터키의 끈질긴 물귀신 작전과 같이 아르메니아가 소련 강제 합병이후 70년이 넘게 소리를 내지못했고 냉전시대 터키를 더 중요하게 본 미국이 이를 덮어버렸던 역사가 있다. 사실 냉전 시대에는 듣보잡으로 파묻혀졌던 역사를 가진 바 있다. 오죽하면 냉전 시대 전에도 소련에게 강제로 통합되면서 잊혀졌기에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로 바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지금 거론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느냐며 유태인 및 비게르만, 자신의 사상을 따르지 않은 게르만인까지 학살하는 것을 얼마든지 문제없이 덮는다고 큰 소리쳤을 정도로 당시에는 묻혀졌음을 알 수 있다.

미국으로서도 아르메니아가 독립하고 나서 지리적으로 러시아 입김에서 나오지 못한 상황이라 강력한 친러국가가 되었으니 아르메니아 편들어주기가 껄끄럽다. 90년대 초반에 아르메니아계 정계 미국인 의원들 주도로 미국은 아르메니아를 지지했다가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치룬 아제르바이잔이 반미가 강해져 2대 대통령이자 친미 및 서구정책을 취하던 애뷜패즈 엘치배이 정권이 여론 비난 속에 쿠데타까지 당해 붕괴되었다. 정권을 차지한 헤이대르 앨리예프는 강력한 반미 정책을 취하고 친러 정책을 굳혀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 중이다. 다만 아제르바이잔은 당시 러시아도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준 것 때문에 친러정책은 이후 수그러들면서 미국이나 서구에 중립적으로 대하고 있다. 덤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오랫동안 쓰던 러시아어를 배제하고 아제르바이잔어나 터키어를 더 집중으로 가르치며 영어도 비중을 높히며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러니 미국으로서도 알아서 러시아를 배제하고 조금씩 미국에게 우호를 보이려는 아제르바이잔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지아남오세티아 전쟁을 당할 당시, 아르메니아 정계는 입다물고 외면했지만(다만 여론에선 러시아를 욕하고 비난했으며 일부 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도 러시아를 비난했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비난하던 걸 봐도 아제르바이잔도 이젠 친러 정책만 취하지 않는다.

하여튼 아르메니아에게 1992년 102억 달러나 되는 돈을 지원한 미국은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을 한동안 반미 친러국가로 만들었고 돈을 들인 그 아르메니아는 정작 친러국가[11]이기에 미국으로서는 난감한 결과를 만들었다. 이렇게 여러 외교 이득적으로 따져야 하는 점도 있기에 미국도 결의안을 지지하면서도 터키가 주장하는 동시대 기독교 열강이 벌인 학살에 대한 결의안도 같이 나서봐라는 비난에 막히고 있다.

일단 미국은 상원 결의안까지 나섰지만 그렇다고 위에 서술한 유럽인권재판소처럼 논란을 빚으며 국가적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물론 학살은 맞지만 왜 아르메니아 대학살만 그렇게 상원결의안으로 나서고 있느냐?는 반론도 많다. 터키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 미국도, 다른 유럽 열강도, 일본도 식민지에서 저지른 무수한 학살이 많음에도 오로지 아르메니아 학살만 결의안으로 나선다면야 다른 학살사건은? 결국 기독교인 학살만 서구권이 나서서 옹호하고 결의안을 나선다고 반발만 거세지지 않느냐? 제노사이드라 그렇다? 위에 서술한 탄자니아 및 나미니아 학살도 해당 부족 70~80%가 학살당하여 여기야말로 제노사이드에 들어간다는 의견 및 해당 국가들의 주장이 있는데도? 이런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해당 피해 국가들도 "맞아, 터키가 학살을 저지르긴 했다!"라고 비난하면서도 "그런데, 왜 터키 욕하는 늬들 미국이니 프랑스이니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뭐했어? 그런 학살에 대해 어디 미국 상원 결의안 통과해봐라!" 라고 터키랑 같이 이를 갈며 분노하고 이런 비난에 해당 가해국가들은 터키랑 축소하거나 부정하기 일쑤다. 이러니 미국도 안하무인으로 결의안 통과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들에게 어느 나라 학살만 봐주고 결의안 통과하고 늬들이나 다른 나라가 저지른 건 넘어가고 모른척하냐! 비난에 시달리고 외교나 여러 모로 골치아퍼질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다. 당장 중국 네티즌만 해도 미국의 이 결의안을 두고 미국놈들이 아르메니아만 오냐오냐하곤 어디 난징 대학살에 대하여 결의안을 두는지 봐라!....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거기에 씁쓸하게도 종교적 논쟁으로 이어져가고 있다는 점도 있는데 터키랑 역사적으로 앙금이 있는 아랍권 이슬람 나라도 이 학살도 인정하고 터키를 비난한다. 같은 무슬림이라고 터키를 봐주는 건 없다. 오히려 이들은 터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전혀 좋게 안 여긴다. 굴욕으로 여기고 심지어 기독교놈들이 오스만 놈들보다야 쬐금은 낫다라고 이를 벅벅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 아랍인들은 그리스 및 기독교계보다는 더 밑바닥인 3류 백성으로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아랍인을 더 밑으로 보고 정계 요직이나 멀리 지배지 총독을 오스만 인 아니면 충성을 인정받은 그리스인이라든지 기독교인 위주로 임명해 다스렸고 아랍인은 등용한 게 훨씬 적었다. 심지어 일부 지역이나 요직에서는 유태인보다도 밑으로 대우받거나 등용될 지경. 그래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기독교 열강들이 1차 대전 당시 우리 도우면 오스만 놈들에게 독립시켜줄께~라고 사기를 치려 하자 군말없이 오스만에 대들어 저항했다. 지금까지도 이 앙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수 있는게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터키군 참전을 요청하자 친미 정부 수반들도 결사반대했다. 만약에 터키놈들이 또 이라크 땅으로 들어온다면 오스만 놈들에게 또 당할 거 같냐? 라며 반미 저항중인 세력과 손잡아서라도 터키놈들부터 요절내겠다! 라고 으르렁거려 미국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물러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위에 먼저 서술되었듯이 아르메니아인들이 집중 학살 당하던 같은 시절 아르메니아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 된 현대 이라크-터키-시리아 일대의 아랍 부족들도 집중 학살, 혹은 강제 이주 당한 전적이 있다. 상술되어 있지만 당시 오스만 정국을 주도하던 군부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과 전혀 거리가 먼 뒤틀린 의미에서 근대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집중 타겟이긴 했지만 종교와 상관 없이 정치적으로 불안하다고 판단 된 집단이면 쿠르드족, 아랍인, 튀르크멘 가리지 않고 다 조져버렸기 때문이다. 25만~75만 정도 학살되었다는 아시리아인, 4만(터키 주장)~최대 50만 정도 학살되었다는 무슬림 아랍인, 5만~20만 정도로 추정되는 다른 무슬림(알레비) 및 쿠르드인들도 이 당시 같이 학살당했다. 그럼에도 위에 서술한 대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엄청 길게, 상세하게 사진 자료랑 같이 기재하고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도 크게 다루는 거랑 달리 오스만 제국이 당시 저지른 코뤼 강 계곡 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아랍인 무슬림들도 분명히 학살당했거늘, 영어 위키피디어에서는 짧게 다루는(글로만 2줄 정도) 수준이다.

그러니 이런 동병상련을 겪은 아랍국가들도 당연히 터키를 욕하고 학살이라며 아르메니아에 사죄나 배상을 해야한다고 공감을 하면서도 이 학살을 두고 밑에 서술한 추모비라든지 미국이나 유럽이 나서는 걸 두고 아르메니아가 기독교 다수 나라라 더더욱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터키가 기독교 나라이고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나라였다면 미국도 유럽도 지금처럼 끈질기게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터키 편을 들어주고 묻어버렸을 것이다.'"라며 비난하고 있다 . 하긴 아르메니아 학살만 이야기하는 서구 열강이 이 시절 같이 학살당한 비기독교 아랍인은 아몰랑 관심도 없고 제대로 파악도 하지 않으려 하니 이라크나 시리아같은 나라에서도 우리도 숫자가 적다고 해도 아르메니아나 시리아 기독교인들이랑 같이 학살당한 피해자들인데? 우리 무슬림은 몰라라하면서 뭐가 어째? 라고 미국 상원결의안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어쨋든 나머지 이슬람권에서는 차라리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으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많이 설치면 설쳤지, 종교적으로 터키 쉴드 쳐주고 그딴거 없다. 오히려 이란 측에서는 자국 내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역사도 터키 못지 않게 깊고, 터키와는 반대로 딱히 아르메니아와 원수 질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살 당시 난민들을 받아주고, 관련 아르메니아 역사학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등 지역 열강 중에 그나마 아르메니아인들을 잘 돌보아준 편에 속한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권 나라들이 부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 이 논리나 비난에 대해서 유럽인권재판소나 미국 상원결의안도 같이 해당되기 때문이다.오죽하면 미국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도 아르메니아는 이스라엘,아제르바이잔이나 터키는 아랍 이슬람권을 두는 반응이랑 똑같다고 했는데[12] 그만큼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보고 옹호한다는 주장도 미국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해관계가 엃혀서 복잡해지는가 보여주는 단면이지, 학자적 관점에서는 헛소리에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다. 제노사이드는 어디 누가 더 심하게 당했나 경쟁하는 훈장이나 올림픽이 아니고, 절대적인 숫자만으로 따지면 나치 독일이 말기 오스만 제국보다 훨씬 더 역량이 강했고, 깽판 친 범위도 넒어서 희생자 수가 더 많은 게 당연하지만, 인구 대비 비율로 보면 당장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가 아예 소멸해 버린 메츠 예게른도 홀로코스트 못지 않다. 그리고 상술된 토머스 프리드먼의 발언도 나무위키로 옮기면서 뭔가 와전 된 것 같은데,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동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이라 하면 놨두긴 개뿔 학살이 집중 된 지역이고, 역사적 동-서 아르메니아 입장에서 동부 지방, 즉 예레반과 에치미아진 일대 현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강역인 지방이라 하면 애초에 1차대전 시점에서 오스만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영유하고 있었던 땅이니 학살 자체가 불가능했다. 프리드먼의 발언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서부 지방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한데, 이 또한 현대 와서 논파 된 낭설이다. 당장 총력전을 치루는 나라의 수도 민심을 뒤흔들지 않기 위해 콘스탄티니예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놨두었을 뿐이지, 이즈미르, 마니사, 아다나 같은 전선과 멀리 떨어진 서부, 남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들도 모두 끌려갔다. 심지어 수도에서도 민족주의를 더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된 사도교회 사제, 아르메니아계 지식인, 학자, 언론인들은 모두 골라서 죽였다. 결론은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그 시절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를 자처하고 그 연속성이 대내외적으로 인정 받는 터키는 뒤늦게라도 이 사건을 인정하며, 급진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옛 영토 반납은 헛소리[13], 지금도 제대로 관리를 못 받고 있는 현지의 수백개는 족히 넘는 아르메니아 관련 사적들을 돌보며 과거사 정리를 하고, 다른 제국주의 시절 열강들도 저런 자기 나라의 어두운 과거사를 자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직면하는게 바람직하겠지만, 언제 국제 정치와 특히 과거사 둘러 싼 역학 관계가 그리 도덕적으로 돌아 갔는가.... 게다가 이 점에서 터키의 이중성이 더더욱 기가 막히는게, 다른 면에서는 틈만나면 오오 영광스러운 오스만 제국의 후손 오오 거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며 자뻑하기 바쁜 터키가[14] 이 피비린내나는 현대 중동사의 심연에서 스타트를 끊은 이 사건만 두고는 우린 오스만 제국이 아니다. 책임 따지고 싶으면 타임슬립이라도 해서 그 시대 술탄에게 책임 물어라 따위 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아제르바이잔같은 경우에는 아르메니아랑 사이가 나뻐서 이 학살이 조작이라며 터키를 편든다. 뭐 덕분에 파키스탄과 원수지간인 인도 공화국은 아르메니아를 편들며 밑에 서술한 대로 1960년대에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비를 세우며 터키를 비난하고 있는데 이처럼 국제적 이득이나 여러 종교적 갈등까지 얽혀 있기에 아르메니아로서도 섣불리 뭐라고 할 수 없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콜롬비아같은 경우 아르메니아라는 도시 이름을 붙여주고 학살을 비난하며 기리고 있으나 미국이나 캐나다를 제외한 중남미 나라들은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6.2 터키의 부정적인 태도

이에 터키는 이 책임에 대하여 그럼 오스만 제국에게 따져라, 현 터키 공화국은 그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느냐? 라고 대하고 있다. 그리고 저런 유럽 연합측에게 코웃음으로 대하며 프랑스에게는 알제리인 학살을 이야기하며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식민지에서 벌어진 학살을 이야기하며 그러는 네놈들은 사과 및 보상을 제대로 했냐? 라고 맞서고 있다. 독일같은 경우도 20세기 초반, 나미비아에서 헤레로 족 학살에 대하여 도이칠란트 제국 책임이니 우리 탓 아니다, 우리가 직접 안 죽이고 칼라하리 사막에서 굶어 죽었다~ 라고 한 일로 터키에게 우리가 하던 소리 똑같이 하네? 라고 비웃었다. 당연하지만 피지배국이었던 나미비아에서 분노했다..유대인도 독일군이 직접 안 죽이고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냐며 나미비아에서도 독일 정치인들의 헤레로족 학살에 대한 망언을 비난했을 정도였으니....

뭐 터키야 물귀신 작전으로 그러는 미국에게 영국 식민지배에서 독립 이후 엄청나게 자행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라든지 근현대에서 필리핀에서 벌인 학살이나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 같은 일로 따져들고 프랑스는 알제리,베트남,마다가스카르 학살, 독일은 나미비아,탄자니아 학살, 영국은 인도,아일랜드,케냐 학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학살, 벨기에는 콩고민주공화국 학살, 스페인은 페루,아르헨티나,쿠바,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학살, 포르투갈은 모잠비크,브라질등등에서 학살 자행한것부터 먼저 사과하고 보상하고 똑같이 해봐라라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해당 나라들도 .....터키랑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터키는 비웃듯이 저런 학살을 당하고 사죄? 보상? 도 없는 나라들과 같이 저 가해국가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누군 상원결의안에 나서고 그러고 누군 잊어버리고 아몰랑 이러냐? 대든다. 이러니 터키 극우들은 늬들이 똑같이 보상하고 사죄하고 인정하면야 우리도 그래야지~하지만 안 그러잖아? 라고 비웃는다...그리고 이 논리는 일본 극우들도 거론하긴 하지만 난징 대학살 말고도 여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나라들에게 수두룩하게 저지른 게 많아서리 터키랑 다르게 국제적으로 더 까인다.....일본 극우들이 백인들에게 지배받던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나라들을 우리군이 해방했다 이러지만 정작 그 나라들이 꼴랑 몇년 일본 지배받고 이건 뭐 이전에 지배하던 양놈들이 더 낫네라며 이전에 지배하던 미국이나 영국같은 나라와 손잡고 일본에 맞서 싸웠으니 일본의 이런 물귀신 작전은 그리 효과가 없다

참고로 터키 안에서도 분명히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 탓이라고 해도 과거에 학살이 벌어진 건 사실이다라고 인정하는 진보파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엄청난 비난을 감안하거나 심지어 살인협박도 각오해야하는 판국이기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르한 파묵100만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나 10만이 넘는 쿠르드인들을 학살한 게 맞다라고 외신 인터뷰하다가 엄청난 비난과 살인협박에 시달렸다. 또한 터키역사상 첫 노벨문학상 수상조차도 저렇게 기독교 놈들에게 아첨하듯이 학살이라고 인정받아 보상으로 받았다는 비난까지 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2007년 아르메니아계 터키 국적 언론인인 흐란트 딩크(1954~2007)도 이 학살을 여럿 보도하다가 극우파인 사마스트 오군이 쏜 총에 살해당했다. 경악스럽게도 사마스트 오군은 1990년생으로 당시 나이가 17세였다! 그리고, 범인인 오군은 잡힌 다음 인터뷰하는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라고 말했던 바 있다. 이러니 오르한 파묵이 과연 마음 편하게 터키에서 살 수나 있을까? 결국 그는 해외(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과 글쓰기 교수가 되었다.

이에 터키 문학의 양심이라고 불리우던 야샤르 케말(Yaşar Kemal, 1923~2015)도 오르한 파묵을 옹호하며 틀림없는 학살이라고 맞서고 있다. 다만 케말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틀림없는 학살이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터키를 욕하는 강대국들이 같은 시대 벌인 학살은 대체 왜 은폐하고 터키랑 똑같이 굴면서 터키만 욕하느냐 양비론적으로 비난하고 맞서고 있다. 하지만 케말을 두고 단순히 물귀신 언동을 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우선 케말은 틀림없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고 있다! 위에 서술한 대로 터키 극우들은 학살이라는 걸 되도록이며 피한다든지 수를 줄이지만 케말은 100만 이상 학살이라고 인정한다. 게다가 그는 쿠르드인이기에 인종적으로도 차별받아왔고 이미 1950년대!부터 아르메니아 유적 파괴 및 학살 은폐에 대한 걸 비난하고 터키 군부를 비난하며 오랜 세월을 옥에서 고생한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악다마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대성당 철거를 사생결단으로 반대하며 국제적으로 알리다가 군부에 끌려가 엄청 고생했던 터라 이 대성당을 역사적인 보물로 중요하게 여기는 아르메니아에서도 케말에 대한 평가는 무척 좋기에 그의 양비론적인 비난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오르한 파묵도 케말과 같은 우리도 학살자가 맞지만 왜 우릴 욕하는 강대국들 너희들은? 너희들도 사죄하고 보상해야지라고 비슷한 의견을 말했고 터키 진보파들도 거의 이런 의견과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우리도 분명히 잘못이고 학살이라고 인정하기에 뭐라고 비난할 수 없다. 이들이 말한 양비론 비난에서 터키를 그리도 비난하는 강대국들은 위에 길게 서술하듯이 다를게 없으니까.

7 여담

이 일로 터키와 아르메니아 갈등은 아주 거세지고 있지만 터키가 어느 정도는 학살을 인정하긴 하고 우호적인 행동을 하면서 조금씩은 반터키 감정이 줄어들긴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성지와 같은 터키 악다마르 성당을 2010년 터키가 95년만에 재건하여 십자가도 세워주고 예배를 허용했을 당시 아르메니아에서는 수만여명이 서로 오고자 할 정도로 난리였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매해 아르메니아 대주교의 방문 및 예배와 같이 청소년 세례식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엄청 기뻐하고 환영했지만 그 대신에 터키는 아르메니아와 이를 가는 우방 아제르바이잔의 반발과 자국 극우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때문에 이들 예배에 중무장한 터키군들이 배치되어 경호를 서줘야 했다.

여담인데 터키 드라마아르헨티나나 남미 각지에서 인기를 끌자 아르메니아계들이 조상 모독이라고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극소수 아르메니아계 모독이랑 왜 우리랑 얽히는데? 라는 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세계 각지에 이 학살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미국,캐나다,우루과이,남키프로스, 프랑스, 본국인 아르메니아같은 나라같이 기독교 다수인 나라에 주로 있다.

하지만 그밖에도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1/Armenian_Genocide_memorial_in_Aleppo_Syria_at_the_Armenian_church_40_martyrs.jpg/150px-Armenian_Genocide_memorial_in_Aleppo_Syria_at_the_Armenian_church_40_martyrs.jpg 시리아[15], 레바논, 인도, 이란 등에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들 이슬람 다수 및 비기독교권 나라들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이전부터 성토해오고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왔기에 저런 게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1919년 터키에서도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3년만에 파괴되어 이젠 사진으로만 남은 바 있다. 일부 터키인 & 아르메니아인들이 만들었지만...당시 그리스와 전쟁 중이라 이걸 누가 부쉈는지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2015년 5월, 이 사건에 대해 새삼 한국인들의 주목을 이끈 사건이 발생했다. 2015년 5월 14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에서, 협연자로 출연한 아르메니아 출신 첼리스트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이 본 공연을 마친 후, 앙코르 곡을 준비하던 중 작은 소동이 있었던 것. 하크나자리안은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올해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아르메니아인으로서 오늘 앙코르 곡은 이 사건에 바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객석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발언은 삼가라'며 야유했으나 하크나자리안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어떤 사건인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16] 그가 앙코르로 선보인 곡은 조반니 솔리마의 '라멘타치오(애통)'. 2013년 6월에 있었던 서울시향과의 첫 협연 때에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바 있는 곡이다. 하크나자리안을 비난했던 관객은 터키 인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씁쓸한 사실이지만 1990년대 이후 친터키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도 '형제국' 터키를 위해 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2015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을 추모하는 의식이 터키에서도 아흐메트 다우트오울루 총리가 이스탄불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대주교좌 성당에 방문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다우트오울루 총리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지만, 이 당시에 전쟁과 학살로 희생된 아나톨리아의 모든 민족들,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시리아인[17], 터키인을 추모하고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연설했다. 하지만 다른 자리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1915년의 비극은 인류적인 비극이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되며 특히 아르메니아가 제시하는 학살자 수, 근거자료들은 사실과 달리 매우 부풀려져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그리고 2015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학살을 20세기 최초의 학살이라고 발언하여 터키에서는 분노하고 있다. 우습게도 콩고에서는 벨기에가 저지른 (레오폴드 2세 참고) 학살은 거들떠도 안본다고 분노하고 있다... 터키도 이걸 들먹이며 가톨릭이 대다수인 벨기에콩고에서 저지른 20세기초 학살을 외면하는 교황이라고 분노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모스크로 되돌리자는 움직임까지 부채질하고 있다. 아니 왜 로마 교황이 아니라 엉뚱한 데다 대고

하지만 서구권이나 교황이 말한 학살은 영어로 genocide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genocide라는 단어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단어는 경제적 착취, 강압적 통치를 유지할 목적으로 수단으로서 혹은, 부수적 피해로서 대량살상이 이루어져도 이를 그냥 무시하고 목적을 관철시키는 경우를 묘사하려고 만든 단어가 아니다. 접두사 geno-가 의미하듯 그저 피해자가 특정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량 살해를 자행하는 것을 말한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난하는 측의 주장과 교황의 발언에서 "학살"을 "인종청소"로 바꾸어 읽어보자.

하지만 그에 앞선 20세기 초에 독일이 나미비아에서 행한 헤레로 족 학살이 있기 때문에 최초의 학살은 아닌데 터키 측에서 분노할 만하다. 게다가 헤레로 족을 학살하며 벌인 짓이나 변명도 독일은 터키랑 차이가 전혀 없다. 헤레로 족을 잡아다가 사막에 놔두었는데 지들끼리 싸우다 죽었으니 우린 모르삼~~이러다가 나미비아에서 유태인도 독일이 아닌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였으니 우린 모른다고 하는 거랑 차이가 있냐? 까이고 위에 서술하듯이 터키가 나몰랑하며 말하는 근거도 우리가 직접 안 죽였다...그냥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하니까 지들끼리 싸우다 죽었지....이런 거랑 차이가 없다. 나미비아에서도 교황에게 우리(당시 헤레로 족은 나미비아에서 상당한 인구를 차지)가 당한 학살은 외면하냐며 무척 안좋게 대하는 반응이다.

아르메니아-이집트계 캐나다 감독인 아톰 에고이안은 이 사건을 소재로 아라라트라는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1.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탈리아인 만화가 파올로 코시가 그린 '메즈 예게른'이란 작품 역시 아르메니아 학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2. 영어의 Armenian Genocide의 표현을 직역해 Ermeni Soykırımı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터키어로 soykırım은 하나의 일족이나 가문(soy)을 전부 씨(kırım)를 말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때문에 학살보다는 '멸문'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터키에서 공식적인 아르메니아 학살 관련 문건 표기는 '아르메니아 문제'라는 뜻의 Ermeni Meselesi 이며, 이를 완곡, 소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1915년 사건 '1915 olayı' 같은 말을 쓴다.
  3. 다만 후술하듯이 1차 학살은 학살로 보기 어렵고 진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터키에서 학살을 덮고자 그런 게 아니라 서구권에서도 분석한 것..때문에 역시 후술한 나미비아탄자니아같은 곳에서 독일이 저지른 학살이 근현대 최초 학살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이 나라들이 주장하고 있다.
  4. 하지만 홀로코스트와 달리 1980년대만 해도 묻혀지던 감이 있었다. 후술하듯이 여러 문제로.
  5. 여담이지만, 공화국 시기 초기에 이러한 약한 지방 장악력때문에 피봤다는 것을 깨달은 터키 공화국 정부는 국토를 67의 도(현재는 81개)로 세분화하고 도지사부터 말단 군수, 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방관을 중앙에서 통제하려 시도했다. 다만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적어도 자기 땅, 부족에선 왕이나 다름 없었던 쿠르드, 아랍 부족들이 중앙정부가 자꾸만 자신들의 이권(오스만 제국 시기에 쿠르드 부족, 향촌 구성원들에 대한 조세, 군사, 사법권은 모두 부족장의 손에 달려있었다.)을 침해하려하니 반발을 일으키게 된 것. 2016년 현재도 진행중인 PKK의 반란과 쿠르드족문제도 이와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6.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개혁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교가 정해져 있지 않았었다. 첨언으로 이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메니아 측은 정치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게 종속되어 있을지언정 동부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자리 잡은 그 오랜 역사와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 받아 정교회권과 다른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밀레트로 자치권을 인정 받았다. 19세기 들어서도 적어도 초중반에는 발칸 반도의 정교회권 민족주의 열풍이 불 때 아직 아르메니아쪽은 조용히 당국에 적극 협조했던 편이라 충성스러운 밀레트 (millet-i sadıka)라는 별명까지 있었을 만큼 돈독했는데...
  7. 현재 이스탄불에서도 대부분의 교회건물들이 '탁심', '갈라타', '페네르', '베이오울루'쪽에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흔적이다. 이 지역은 유럽대사관이 밀집해있던 지역이고 기독교인들이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했었다.
  8. 최근 EU 경제 위기 등에서도 사용되며 약간 보통 명사 느낌이 드는 단어지만, 이 단어의 기원은 이 시대 오스만을 칭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러시아 황제가 최초로 사용했다.
  9. 이 때문에 지금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놈들도 나뻤지만 결국 아르메니아를 돕는 척하곤 나몰라라하던 서구권도 나쁜 색히라는 비난이 많다. 사실 아르메니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강대국들은 어디까지나 아르메니아를 이득에 따라 이용했을 뿐이니...
  10. 프랑스 극우들은 알제리인들도 일부 프랑스인 학살을 저질렀으니 같다라고 주장하다가 더더욱 욕처먹었다.그렇게 치자면 유태인들도 폭탄 테러라든지 일부 저항으로 나치에 저항하다가 일부 독일 민간인 죽였다면서 유태인도 학살을 조금이라도 한 셈이라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랑 차이가 뭐냐? 더불어 그리 치자면 아르메니아도 일부 저항하여 오스만 민간인을 조금이라도 죽였으니 같이 오스만 측이 학살을 벌인게 정당보복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 뭐라고 할텐데? 라는 비웃음과 비난에 대하여 입다물 수 밖에....
  11. 사실 아르메니아도 러시아가 좋은게 아니다. 아르메니아 항목이나 아르메니아/역사 항목을 봐라. 현재 러시아도 아르메니아에게 행패를 온갖 부린다.2015년만 해도 러시아인이 꽉 잡은 아르메니아 전기요금도 펑펑 올리고 온갖 에너지 관련으로 돈을 올리며 주둔중인 러시아군이 탈영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을 마구 죽이고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몇년 징역형으로 대충 끝낸다든지. 아르메니아에서도 반러시아 시위가 벌어지지면 정부 차원에서 막는다. 러시아가 떠나면 아르메니아는 군사력으로 넘사벽인 터키나 그 터키의 후원을 받으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되찾을 명분으로 전쟁준비하는 아제르바이잔과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도 유럽도 도와주고 싶어도 터키나 러시아,아니면 터키와 아제르바이잔,러시아에게 경제적 눈치(이 3나라가 수출입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를 보는 조지아도 길을 내줄리가 없기에 꽉 막힌 상황에서 아르메니아는 정말 생지옥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란도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내키지 않을게 뻔하니. 이러니 아르메니아도 울며 겨자먹기로 친러시아 정책을 취하는거다. 소련 시절 온갖 학살 및 약탈까지 생각하면 숫자가 적다 뿐, 러시아도 아르메니아에게는 증오어린 역사가 깊다.
  12. 하지만 유태인인 프리드먼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보단 낫다고 하여 아르메니아계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나치처럼 개종하던 말던 유태인을 마구잡이로 죽이던 거랑 달리 적어도 오스만 제국은 동부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은 놔뒀다고 다르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스라엘은 학살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터키를 좀 생각하여 홀로코스트보단 낫다고 하는 시각을 보인다. 모세의 후손이라고 자부하기도 하는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무척 언짢아하는 점도 있긴 하지만.
  13.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를 구성하는 지방이자 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오스만 제국 당시 아르메니아 6개주 (vilayet)은 현대 터키 영토의 1/3쯤 되는 거대한 땅이다. 아무리 아르메니아 측이 과거사에 피가 맺혀도 사실 학살 시점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다스린지 족히 500년이 넘었던 이 지방을 근대적, 정치적 의미에서 아르메니아 땅이라 주장하며 양도 받는 건 현실성이 없는 소리다. 게다가 그 일부는 시리아에도 있기에 시리아도 엉? 그말인즉 우리보고도 땅내놓으라? 당연히 화낸다.
  14. 오스만 제국 항목에 나와 있지만 사실 엄밀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따지면 적어도 19세기 이전 오스만 제국은 터키인의 제국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배 계급은 근본적으로 구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짙게 받으며 정교회권 유럽 출신의 개종자들이 주도했었고, 그 이하로는 그냥 다 신민이었으며,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도 차라리 수니 이슬람의 종주국이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했지, 딱히 튀르크인이라고 우대하며 중심 민족으로 삼은 건 유럽쪽 속주를 전부 다 빼았겨버리고, 아랍인들의 충성도 또한 심각하게 뒤흔들린 19세기 후반 제국 역사의 끝자락에 되어서야 튀르크인의 제국이란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대 터키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아닌건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 무슬림만의 제국으로 인식하는 건 명백한 역사학적 오류다
  15. 사실 시리아는 강력하게 이 학살을 비난하며 아르메니아를 편드는데 이 학살 와중에 현대 터키~시리아~이라크 국경 지대에 살던 아랍인들도 대거 학살당하고, 현대 시리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한 비극이 있기 때문이다. 추모비도 여럿 되고 아예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 교회까지 따로 세웠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에는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 추모비도 세워져있다.
  16. 위에 링크된 기사에는 이때 또다시 'You shut up'이라고 야유가 나왔다고 씌어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던 관객들 중에는, 두 번째 야유가 하크나자리안에 대한 아유가 아니라 정치적 발언을 삼가라고 했던 관객을 향한 것이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꽤 있다. 1, 2
  17. 터키어로 Süryani, 쉬리야니라고 부르며 주로 마르딘 일대에 거주하고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시리아 정교를 믿는 소수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