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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 中苏边界冲突(간체자) 中蘇邊界衝突(정체자)
러시아어 :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на острове Даманский,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на острове Даманский
1 개요
1950년대 말 중국과 소련이 완전히 우방관계를 청산한 이후 긴장상태가 높아지다가 결국 터진 국경분쟁.
말이 좋아서 국경분쟁이지 하마터면 중국과 소련의 전면 핵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었던 공산권의 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중국-베트남 전쟁과 달리 이 사건은 공산권에서도 특히 강대국에 속하는 중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또한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2 배경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자 베리야, 몰로토프, 말렌코프, 불가닌 그리고 니키타 흐루쇼프 사이에서 처절한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최종 승자는 흐루쇼프였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전세계의 공산당 대표단이 참관하고 있는 가운데 무려 5시간에 걸쳐서 "스탈린은 독재자이자 악당이다. 우리는 스탈린 때문에 2차대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승리한 것이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이념을 배신했다"라는 내용의 충격적인 비공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내외적으로 대대적인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과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고통받던 이들의 민심을 일거에 획득하고 자신의 권력을 다져나갔다. 이 때문에 창당 때부터 스탈린을 맹주로 추종하던 중국 공산당은 이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이전까지 중소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라기보다는 거의 동맹에 가까운 관계였다. 양쯔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난징 대교는 1956년 소련 기술진의 전폭적 지원 하에 건설되었고, 모스크바에는 수많은 중공 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 헝가리에서 반소봉기가 일어나면서 공산권에서 소련의 종주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소간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1]
흐루쇼프는 서방세계와의 대립이 극에 달했던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평화공존을 외치며 안정을 원했는데, 마오쩌둥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마오쩌둥 자신이 스탈린을 국민당을 지지했던 것 때문에 싫어했음에도 스탈린의 은혜로 큰 사람이 스탈린을 배신하다고 안 좋게 보았으며 마오쩌둥은 이전의 반서방 대결주의 노선을 고수하면서 소련을 변절자'수정주의자'[2][3]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 이상으로 개인숭배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었으므로 많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게다가 공산권에서 소련에 뒤이은 국력과 역량을 지닌 중공은 동유럽이랑은 달리 순순히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을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은 소련을 제치고 스스로를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게 되지만, 당시 동유럽 위성국들은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과 북베트남 동남아 정도의 지지국 정도만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소련이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중국 혼자서 서방세계와 직접적으로 군사대결을 하기가 어려웠고 군사적으로도 애를 먹었다. 특히 1958년의 진먼 포격전과 같은 국지전에서 타이완에 미국이 지원을 해주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반면, 소련 입장에서도 중국은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는데, 노동자 세력이 주도한 혁명으로 이룩된 소련과 달리 중국의 혁명은 농민 기반의 혁명이라서 공산주의 논리에 안 맞아 보였을 뿐 아니라, 중국의 공산주의 대외정책은 지나치게 확장 일변도였기 때문에 힘을 아끼고 안정적으로 나가려던 소련 입장에서는 중국은 큰 골칫거리였다. 특히 흐루쇼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장기간의 평화적 공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은 가급적 회피하면서 우주개발 경쟁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등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에 산재한 반미 세력에 대한 지원은 충실히 하였다. 흐루쇼프 축출 이후 등장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지도부도 미국과 부분적 핵군축협상에 나서는 등 직접적 대결은 회피하는 자세는 여전했다. 자국을 수정주의자라고 까던 중국에 대해 소련은 중국을 수구꼴통'교조주의자'[4]라고 깠다.
이런 노선 논쟁으로 인해서 1960년대에 접어들면 양국간의 군사/과학기술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고 소련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유학생은 전원 귀국하고[5] 중국과 소련 사이의 국경지대에는 대규모 병력이 배치된다. 중국과 소련은 서로를 적국으로 간주하면서 군사전략을 짜게 된다. 소련은 유사시에 만주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혹은 산동반도 지역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까지 검토했고, 중국은 소련의 공격에 대비해서 내륙지방에 군수공업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공산권은 소련과 중국으로 완전히 양분된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끌던 유고슬라비아는 원래부터 독자노선을 선언한 상황에서 중국과 소련 양쪽 모두와 거리를 두었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 둘 사이에서 교묘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뜯어낼 건 최대한 뜯어내고 내정은 간섭받지 않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6]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중국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영토 10배나 되는 엄청난 땅을 빼앗아갔다. 청나라 말의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서방과 중국을 중재해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숙원이던 연해주 / 부동항을 손에 넣었고, 만주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소련 성립 당시 잠시 영토팽창에서 손을 떼고 있었으며, 양국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중국 측은 이를 일단 인정하고 넘어갔으나, 러시아가 연해주를 강탈해갔다는 악감정은 계속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념 관계로 양국의 사이가 악화되자 잠재되어 있던 역사적 악감정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는데, 당시 린뱌오 국방부장이 군권을 장악한 자신에게 마오쩌둥의 후계자 자리가 자연스레 돌아오도록 일부러 중소간의 긴장상태를 조장했다는 설이 있다. 처음에는 그저 국경수비대 간의 패싸움이었던 것이 갑자기 중국군의 무장기습으로 말미암아 전시사태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 설도 신빙성이 있다.
3 전개과정
처음에는 저렇게 손까지 흔들고 화기애애하게 시작했는데..
국경을 둘러싼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왼쪽이 소련군, 오른쪽이 중국군
흰 위장복이 소련군, 짙은색 군복이 중국군. 얼어붙은 강에서 벌이는 패싸움. 병림픽
결국 이런 패싸움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분쟁지에 소련군 장갑차와 무장헬기가 출동했다. 이뭐병
1969년 우수리 강에 홍수가 나 전바오 섬(珍寶島, 珍宝岛, 다만스키 섬)의 소유권이 불명확해지면서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쪽 병사들끼리 서로 악수하고 담배도 교환할 정도로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이내 전바오/다만스키 섬이 누구 땅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현재는 중국으로 귀속됨) 이에 양국 지도부는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지지않으려고 국경검문소에 특수부대를 배치하고 병림픽 패싸움을 벌였다. 무기를 사용하면 군사도발로 간주되므로 맨손으로 주먹다짐을 벌이게 한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못해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이 과정이 좀 어이없는데, 특수부대의 주먹다짐에서 밀린 중국 측이 무술 단련된 특수부대를 데리고 와서"나무 몽둥이는 무기로 치지 않는다."[7]며 몽둥이로 소련군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당연히 몽둥이를 무기로 간주하고 권총으로 대응했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뭐병(...)[8]
3월 12일, 중국군은 소련군을 기습했으나 기계화부대와 보병부대의 격돌인지라 오히려 중국군의 피해가 훨씬 컸으며 15일 차량화소총병 부대와 전차부대로 이뤄진 제병협동군이 주력인 소련군의 반격에 의해 전통적인 보병부대가 주력인 중국군의 인명피해가 더욱 일방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이때 중국은 전선에서 부대가 대규모로 전진하는 구시대적인 전술을 구사했고, 이에 대응하는 소련군의 전술은 바로 저런 전술을 격파하기 위해 만든 종심 전투 교리였다. 소련군은 병력은 적었으나 강력한 화력으로 계속 중국군을 포격했고,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한 전사자는 중국군 100명, 소련군 50여 명이었지만, 다른 설에 의하면 소련군 사상자는 소대급이지만 중국군 사상자는 연대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전장이 한반도처럼 산악지대 위주도 아니고 평야지대였으니 중국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이때 모스크바에서는 큰 피해를 입은 중국군에 대해 "모택동주의 모험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덤이 된 할힌골 전투의 교훈을 잊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조롱을 했다.
한편 양국의 국경에는 소련군 60만, 중국군 80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병력이 배치되었고, 양 군 모두 명령만 떨어지면 전면전에 들어갈 기세였다.
8월에는 이전부터 역시 국경 분쟁의 대상이던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지역에서도 충돌이 일어났으며, 소련군 지도부는 아예 중국을 제압하여 골치아픈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전쟁까지 감행하는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계획하였다.
당시 중국은 핵무기와 미사일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없고, 사정거리 2,000km 정도의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모스크바를 타격하기에는 무리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군의 기계화 빈도는 매우 낮아서 공군이나 기갑부대는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며, 더욱이 중소 국경지대는 산악지대도 별로 없어서 소련과의 전쟁은 백전백패를 의미했다. 이는 20여 년 뒤 이라크가 몸으로 입증했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해 확전을 막았다.입장이 바뀐듯한 느낌 정확히는 소련이 중국을 치기에 앞서 미국이 과연 베트남에 묶여 있음에도 참전을 강행할 가능성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입장을 물어봤는데, 미국 정부는 예상과 달리 중국을 침공할 경우 중국 편에 서서 참전하겠다거나,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이쪽에서 전면 핵전쟁 시작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등의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9] 결국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할 수 없었던 소련이 확전을 포기하고 물러서면서 중국은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된다. 물론 미국 덕택에 살아났다는 걸 알았기에 중국이 다시 소련을 자극하는 일은 없었다.
이후 1969년 9월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호치민 북베트남 국가주석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총리는 장례식 참석 후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나 평화적 합의를 도출하기로 하면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전바오/다만스키 섬은 소련 붕괴후 1991년에 국경협정이 체결되어 중국에 귀속된다.
4 결과
중국은 이 분쟁에서 상당히 자존심을 구겼다. 핵 전력과 재래식 전력 모두 소련은 중국보다 훨씬 우월했으며, 전쟁이 벌어질 경우 소련군은 중공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갈아바렸을 것이며, 중국은 최악의 경우 불리한 조건으로 강화하는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육군이 2류로 평가받았던 과거의 러시아군과 달리 소련군은 바로 옆동네하고 격하게 전투를 벌이는 동안 엄연한 초강대국의 군대로 성장한 상태였으며, 충분한 군사력과 더불어 기계화한 장비와 물자도 있어서 중국이 중일전쟁 때처럼 장기적인 항전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았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만주, 북중국을 초토화시키는 등 견디지 못하고 사실상 북만주나 내몽골, 위구르 등까지 영토를 빼앗길 가능성도 있었다. 극단의 상황이지만, 어쩌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북경이 점령당하고 중국과 소련과의 우발적 핵전쟁으로 세계멸망이 이뤄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 측에 "그쯤에서 끝내라. 나 실력행사 들어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이라는 투의 경고와 군부의 중국 전면침공 계획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태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 진압으로 관심을 돌린 소련정부와 군부가 중소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덕에 이 분쟁은 끝내 전면전까지는 가지 않고 마무리된다.
이 분쟁은 양국의 갈등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고, 소련을 견제하려던 미국은 중국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1972년에 반공 우익의 대명사였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이 이를 상징한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한다.[10][11]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12]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인도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13] 한편 몇몇 다른 공산국가들도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에 접근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선은 평화가 온 뒤에도 불확실하다가 결국 소련이 해체된 뒤에야 국경 분쟁을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다만스키 섬(珍宝岛)은 1991년에 중국으로 공식 반환되었다. 또한 드넓고 사람이 안 살던 만주와 시베리아 간의 미확정 국경선은 2004년에 들어와서야 확정한다.[14]
5 그 외
미국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SF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두 번째 영화화 버전인 <오메가 맨>은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결국에는 핵전쟁과 세균전을 포함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어 세계가 멸망한다는 내용에서부터 시작된다.
소련군이 이 분쟁에 투입했을 당시, 소련의 최신형 전차 T-62 한 대가 전투 중에 파손되어 전장에 유기된 것을 중국군이 노획했는데, 당시 활강포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중국군은 T-62의 활강포를 보고 "이거 불량품 아냐? 포에 강선도 제대로 못 파네요, 소련 놈들."이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 ↑ 사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문제로 양측 사이엔 여러모로 악감정이 있었다. 영미조차 난징 함락 시점에서 중공과 협상하려 한 반면 소련은 가차없이 소련 대사관을 광저우로 옮겨 국민당 지지를 끝까지 표명하다가 국부천대 이후에야 중공을 인정했다.
- ↑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운동 내부에서 부르주아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에 적대하는 기회주의적 조류. 현실 변화에 눈이 팔려 기본적 원칙을 제멋대로 수정하여 왜곡하는 태도를 말한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 중국의 비난은 심지어 어떤 거리의 이름을 '수정주의로'라고 바꿔서 소련을 비웃을 정도. 이원복 <현대문명진단> 출전.
- ↑ 과학적인 해명 없이 신앙 또는 신조(信條)에 입각하여 도그마(命題)를 고집하는 입장. 마르크스주의에서 많이 쓰이는데, 사물의 변화나 사물 그 자체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나 레닌, 마오쩌둥 등의 말을 기계적으로 현실에 적용하여 공식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 서방세계와 대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과도 단절하면서 중국은 최신 과학기술을 도입할 통로를 잃고 만다. 거기에 문화대혁명으로 전문인력과 연구시설이 완전 개박살나면서 중국의 학문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 ↑ 북의 김일성은 이런 중소대립을 이용해서 8월 종파사건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주체사상이 최초로 등장한다.
- ↑ 봉술 무술을 연마한 중국 특수부대였으니 몽둥이를 썼다
- ↑ 이렇게 된 데에는 중국과 소련의 봉에 대한 인식 차이에 있었다. 당시 소련군의 격투술은 복싱이었고, 중국군의 격투술은 봉술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몽둥이를 무기로 생각하지 않았고 소련군은 무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보기에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수련자의 손에 들린 봉은 갑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능히 죽일 수 있는 무기다.
근데 어차피 복싱 수련한 특수부대가 때리는 주먹도 사람 잡기에는 큰 부족함이 없다.일반적으로 봐도 몽둥이는 충분히 무기다. 우리나라 형법에서도 사람을 몽둥이로 팼느냐 주먹으로 팼느냐에 따라 형량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경찰에게 몽둥이를 들고 접근할 경우 경고 후 발포 대상이다. - ↑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냉전 상황에서 동아시아를 유지하고 유럽까지 방어한 것은 중소간 대치로 인해 소련군이 유럽에 전념할 수 없는데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과의 대치로 세력 확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이 중국까지 장악하면 이 모든 것이 말끔히 해결된다.
- ↑ 실제로 미국이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건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이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은 뒤 미국을 국빈방문한 직후이다.
- ↑ 물론 대한민국은 중국과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제3공화국은 반공을 국시로 삼았고, 그에 따라 공산국가인 중국은 이미 서로 전쟁을 치른 바도 있는 적대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서로 접근하는 모습, 즉 이념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형태를 띄어가자 당시 박정희 정권이 위협을 느꼈고, 이로 인해 10월 유신을 단행해서 종신독재 체제를 도입했다는 분석도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과 중국이 최초로 외교적 접촉을 한 것은 1983년의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었다.
- ↑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 ↑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중국과 파키스탄은 소련 엿 먹이는 일이라서 신나게 도와줬다.
- ↑ 다만스키도는 넘겨받았지만, 중국측이 다른곳에서 크게 양보해서 경상북도만한 영토가 러시아측으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두 국가의 국경선이 워낙 넓어서 눈에 띠지도 않는다. 이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다. 그런데도 여전히 중국-러시아 국경은 워낙 길고 땅이 얼었다 풀리는 환절기에 국경이 불명확해지는 일이 계속 발생해서 양국 간에는 매년 국경재획정을 위한 협의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러시아 지도를 매년 구입해서 보면 매년 어딘가 미세하게 조금씩 바뀌는 국경선을 볼 수 있다.
- ↑ 2015년 12월 5일자 무한도전에서 이 대사가 배우의 애드리브였음이 밝혀졌다.
- ↑ 본래 정형돈이 할 역할이었다. 각본은 이미 써져 있었다. 무한도전에선 중국인 역할이라고만 했는데 그 중국인이 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