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의 주인공. 배역은 최수종이 맡았다. 태조 왕건 후속작 제국의 아침에서 이문수가 맡았다.
목차
1 행적
1.1 출생과 성장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려진 왕건의 출생과 성장은 앞으로 후삼국 시대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또한 대립하게 되는 인물인 궁예는 물론 견훤과도 기이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궁예와의 인연은 기이할 정도로 각별하게 묘사된다. 신라군에게 쫓기며 송악 인근 세달사의 범교 스님에게로 가고 있던 궁예와 그의 유모가 왕륭의 도움을 받았을 때, 장기간의 추격으로 몸이 상한 궁예의 유모가 숨을 거두는 날 왕건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륭은 동생 왕평달을 시켜 왕건의 출생을 알리며 세달사에 제를 올리라고 하였고, 범교 스님에게 궁예를 인도해 준 것도 왕륭이었다.
도선대사의 예언을 믿은 왕륭은 왕건에게 엘리트 교육을 시키는데, 어린 왕건의 언급으로 보아 중국, 일본에도 가 보았고, 이동하다가 해적과 마주치기도 하는 등 온갖 경험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륭은 인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자주 언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소년으로 성장하여 왕륭을 따라 서라벌로 가게 되는데, 서라벌로 가던 도중 대규모의 산적 떼거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일행 중 한 스님의 활약과, 각간 위홍의 신라군이 도착해 왕건 일행을 구해 주게 된다. 당연히 이 때에 왕건 일행을 지킨 스님은 다름아닌 젊은 궁예이고, 당시 각간 위홍의 신라군을 지휘하던 것은 당시 위홍의 부장으로 설정된 견훤과 추허조 등이었다. 작중의 창작이 가미되어 있지만 꽤 의미심장한 만남인 셈이다. 이후 왕건은 서라벌에 온 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위홍에게 확인하러 왔던 궁예와 이를 막아서는 견훤이 서로 대등하게 겨루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청년으로 장성한 뒤, 도선대사의 부탁에 따라 젊은 경보대사를 당나라에 보내 주고, 그 이후 도선비기를 걸어다니는 스포일러 도선대사에게 받게 되면서 왕건은 명실공히 도선대사가 말한 예언의 주인공이 된다. 도선비기를 읽으며 도선대사의 뜻을 깨닫고 난 뒤 아버지 왕륭이 송악을 궁예에게 넘겨주려는 의도를 정확히 알아맞췄고,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가주가 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가 궁예를 알현하였을 때, 옛 일을 기억하고 있던 궁예의 환대를 받는다. 왕건은 궁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산을 거의 탕진해 가며 송악궁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고, 이 과정에서 유금필, 능산, 박술희와 결의형제[1]를 맺은 뒤 주군으로 삼는 일과 궁예의 명령에 따라 금성 태수로 가 있던 아버지 왕륭의 죽음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겪는다.
성장하는 중 강장자의 딸인 연화(강비)를 사랑하게 되고 정혼 이야기까지 오가게 되었으나. 아버지에 의해 정혼은 유야무야되고 종간과 강장자 사이의 이해관계[2]가 맞아떨어지며 연화가 궁예의 비가 되었고, 첫사랑에도 실패하게 된다.
훗날 강장자가 권력욕에 취해 나대가다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걸 보자면 결과적으로 왕륭이 연화와의 정혼을 막은건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왕건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이십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왕건은 업무에만 집중할 뿐 장가는 커녕 여인에게 관심하나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사에 손꼽히는 하렘마스터가 된다 이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왕건의 미래가 창창하다는걸 알아본 정주의 호족 유장자는, 왕건이 주도하는 금성 공략에 온갖 지원[3] 등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외동딸로 하여금 왕건의 하녀 역할을 하게 한다. 그러나 유장자의 집(정주에서 함선제작이 이루어지므로)에서 반년이 넘게 머물면서 왕건은 업무에 신경쓸 뿐 유장자의 부탁도 다 물리고, 유장자의 딸에겐 관심하나 주지 않았고, 결국 나주 공략이 실현되기 직전인 상황에서, 유장자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왕건에게 독주를 먹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음 딸에게 시침을 들게 만들어 결국 왕건이 자신의 딸을 받아들이게 만든다(55화 후반부 내용). 이때 정신이 혼미한 왕건의 눈에 유장자의 딸이 연화로 보이는데, 그만큼 연화와의 정혼이 깨지게된 사건은 왕건에게 엄청난 트라우마였다는걸 보여준다.
1.2 본격적인 출사
왕건은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뒤 궁예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궁예의 제의로 결의형제를 맺게 된다. 궁예의 영토 확장 과정에 있어 왕건은 다른 장군과는 달리 특유의 인화력으로 호족들을 잘 다루며 충주의 유긍달[4]이나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 같은 호족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후 궁예의 순행에 따라나서며 궁예가 가진 제국의 꿈을 같이 이루기로 하고, 제국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획기적인 계책이 필요하다는 궁예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주(당시 금성)를 침공하기로 한다.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않던 왕건은 나주 침공을 계획하고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부인 둘을[5] 얻게 되는데, 오래 전부터 유장자가 자신의 딸과 장가를 들라는 요구를 받아 왔지만 이를 한동안 거절했다가. 술에 만취시켜 놓고 딸이 밤시중을 들도록 만든 유장자의 행동으로 결국 장래를 약속하게 되어 첫째 부인으로 삼고, 나주 침공 시 결탁하기 위해 만났던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과도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충주 전선에서 후백제와 대치했을 때 죽령, 조령 전투에서 큰 도움을 얻은 유긍달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삼는다.[6] 오랜 동안 거절해 오다 첫 번째 부인과의 정혼을 약속한 뒤, 궁예의 명령을 받아 세 번째 부인을 얻게 되기까지의 모습은 왕건이 여난때문에 쩔쩔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대목 중 하나.
이후로도 궁예의 명에 의해 북벌 총사령관을 맡았다가 다시 위기에 처한 나주를 구하러 떠나는 등 여러 곳의 전장을 오가게 되면서 작게는 공산 전투부터 훗날 후삼국의 통일까지 함께 하는 장군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다. 특히 두 번째로 묘사된 나주 공방전에서는 군사 태평의 계절 변화를 읽은 계책으로 거의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적장 수달까지 잡는 등 엄청난 전과를 이루었다. 마진-태봉의 이름을 내건 여러 전장에서 사실상 궁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한 것. 당연히 왕건의 직책 역시 대장군, 도독 등으로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최고 벼슬인 시중까지 올라가게 된다. 한편으로 충주에 있을 때 진표 율사의 제자인 석총 대사에게 간자를 받으면서 왕건은 다시금 예언의 인물임을 인증받게 된다.
이처럼 왕건은 송악의 군주였을 때 뿐만 아니라 궁예의 조정에서도 타고난 인덕으로 젊은 장수들부터 원로들까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충성심도 남달라서 자신의 의형이자 주군인 궁예가 피습을 받은 뒤 미륵관심법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와중에도 변함 없는 충성심을 유지하던 몇 안 되는 궁예의 측근들 중 한 명이었다. 작중에서 궁예의 측근에 있으며 이 정도의 절대적 충성심과 뛰어난 능력을 항상 유지하던 것은 왕건을 제외하면 종간과 은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종간과 은부는 왕건을 처음 볼 때부터 제거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게 함정...
(정무보고를 하기 위해 왕건과 종간이 함께 대전에 든다. 궁예는 이미 환각으로 인사불성 상태.)종간: 폐하, 신 종간이옵니다. 어이 된 일이시옵니까?
궁예: (뒤돌아 본다. 비틀대며)너희들은... 너희들은 누구인가? 석총이가 아닌가? 아니... 아지태인가?
종간: 폐하, 신 종간이옵니다. 고정하시오소서, 폐하.
궁예: 석총이가 아니라...? 아지태도 아니고?
(바라보다가 비로소 정신이 든다)
궁예: 오호... 그렇구만. 아우가 아닌가? ...사형도 오셨구려.[7]
부당한 궁예의 명령이나 철원의 참상을 보고 예하 장수들이 반발하고 궁예를 나쁘게 말하거나, 잊을 만 하면 송악 또는 도선대사의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왕건 자신은 그 불만이나 예언에 대한 대한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억눌러 왔으며, 주변 거의 모든 사람의 반발을 일축해 가면서까지 고집스럽게 충성을 논하고 황명을 받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작은아버지 왕평달이나 자신을 길러 준 사부들이 주위의 참소를 받아 유배를 가는 일도 있었지만[8], 왕건의 충성심은 변화가 없었다. 석총 대사에게 받은 간자에 대해서조차 폐하에게 보고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 정도였으니[9]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 심지어 강비와 두 태자를 죽이고 난 뒤 궁예가 쓴 관심법 앞에서도 끝까지 인정하고 충성하는 모습[10]을 보여 줄 정도로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였으나 아지태의 만행. 임춘길의 거듭된 참소, 종간과 은부 등의 모함, 형미 대사의 죽음 등으로 왕건은 점점 흔들리게 된다.
결국 궁예의 관심법과 그 뒤에 이어진 일들로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던 왕건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이른바 4기장이라 불리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주도한 혁명 모의에 대해서도 수없이 거절했지만 부인 유씨가 내 온 갑옷을 입음으로써 수락하여 혁명 세력의 우두머리로 추대되고, 훈련을 빙자해 도성 가까이까지 주둔했던 혁명군의 움직임과 내군부장 장일 및 원봉성령 최응까지 따르게 된 혁명은 수월하게 성공하여 왕건이 황제의 위에 오른다. 이 와중에도 왕건은 혁명을 수락하는 대신 궁예를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았고 실제로도 궁예를 발견한 뒤 직접 가서 궁예를 편한 곳에 모시려고 했지만, 궁예는 이미 왕건과의 마지막 만남 이전에 죽음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왕건과 마지막 만남을 가지기 전에 이미 어검으로 은부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왕건의 오열 속에서 궁예는 죽게 된다.
1.3 황제 즉위
역성혁명을 통해 황제가 되었지만 재위 초반에는 남아 있는 친 궁예 세력으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된다. 환선길의 반란 시도는 장수들과 왕건 본인의 기지로 넘겼고 가장 큰 위험 세력이었던 명주의 김순식은 부친이 되는 허월 대사가 설득해 반란을 막았으며 선장 및 임춘길의 반역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흔암의 암살 시도 시에는 독화살에 내군의 장일 부장을 잃기도 하는 등, 즉위 초반 궁예를 추종하는 잔존 세력들의 문제로 크고 작은 곤란은 계속되었다. 이런 내부 사정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 팔관회를 열어 철원의 원혼들과 백성들을 위로한 뒤, 고향인 송악으로 도읍을 다시 옮긴다.
한편으로는 집안 문제도 부각되었는데[11] 적장자 문제로 인해 부인들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고 조정도 분열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빠르게 이 문제를 봉합해야만 한다는 최응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인 오다련과 유긍달 등의 벼슬을 빼앗고 고향의 향리로 보내버려 신하들과 왕실 내부에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충주부인 유씨 소생의 아들을 병으로 잃기도 했다. 그리고 아자개에게 산삼을 보내 상주를 차지하게 되나 그로 인해 병환 중이었던 신혜왕후가 피접을 선택하며 이별을 하게 된다. 어느 정도 국내 문제들을 정리하고 난 뒤 태자 무(훗날의 고려 혜종)를 정윤으로 세우고, 나주부인 오씨를 황후로 책봉하는 등 후계를 안정시킨 다음 비로소 본격적으로 후백제와의 싸움을 벌이지만 조물성 전투와 실제 역사상 왕건의 최대 패배로 일컬어지는 공산 전투, 그리고 삼년산성 전투까지는 연이어 불리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은 돌림병으로 그간 의지했던 군사 태평을 잃었고 죽어가는 장졸들을 살리기 위해 견훤과 화의를 맺기로 한다. 왕건은 견훤에게 군례를 올려 형제 관계를 감수하고, 일시적으로 신라와의 국교를 끊어야 했으며 사촌동생 왕신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볼모로 주고받은 진호의 죽음[12] 과 이를 들은 왕신의 자결로 인해 후백제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졌고, 그 이후 서라벌을 침공한 후백제군을 상대하려다가 공산 주변의 지리에 어두운 상태에서 전투를 무리하게 강행한 탓에 만 명 이상의 군사와 신숭겸, 김락을 비롯한 여덟 명의 공신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된다. 이 공산 전투는 고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며 왕건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굴욕을[13] 주었다.
공산 전투 이후 벌어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왕건과 그의 군대는 호족과 변방 장수들의 배신으로 위기를 맞아 유금필이 없었다면 죽었을 정도로 큰 위기에 빠졌다. 이런 연이은 패배와 배신에 대해 굉장히 날카로워진 것 때문인지 삼년산성 전투에서 돌아온 뒤 왕건은 사서의 기록대로, 삼년산성 전투에서 고려를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의 가족을 철퇴로 죽이라고[14][15][16] 명령하고 이들을 까마귀 밥이 되도록 하여 배신에 대해 철저하게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절치부심 끝에 준비한, 지게 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고창 전투에서, 병력 규모는 적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적절한 전략 성공과 유금필, 삼태사들의 도움 및 활약으로 적병을 8천 명 이상 죽이는 큰 성과를 일궈냈다. 견훤: 그 중에서도 전사자만 8천이야, 8천! 8천! 이런...
1.4 시련을 이겨내고 대업을 이루다
거듭된 패전에도 인내를 통해 힘을 기르고 최응 등의 의견을 통해 주위의 형세를 파악했던 왕건은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로 드디어 삼한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만든다. 고창 전투의 승리로 후백제와의 힘의 균형도 다시 고려 쪽이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여러 지역이 고려로 귀순했을 뿐만 아니라 경순왕의 초청을 받아 신라에 가서 신라의 병권을 이양받아 사실상 신라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 사이의 과정도 아주 순탄치는 않았는데 신료들의 참소로 유금필을 유배 보내거나 최승우의 계책으로 인해 송악이 유린당하고 해군이 상당 기간 전투불능 상태가 되기도 했고. 태평이 죽은 뒤 그 동안 왕건의 곁에서 책사 역할을 했던 최응마저 젊은 나이에 손쓸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여러 가지 환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후백제가 무리하게 벌인 운주 전투에서 후백제는 견훤의 등창과 지리멸렬한 병력 운용으로 운주가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제대로 싸울 만한 대비를 갖추지 못했던 반면 왕건은 남천의 호족 서목과 나주 탈환 때 활약했던 전위성주 이치의 협조로 인해 상대적으로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대승을 거두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확실한 우위에 선다.
이처럼 후백제와는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강경 일변도의 전략을 쓴 반면 신라에게는 답답할 정도로 유화정책을 벌인다. 나라를 들어 바치겠다면서 경순왕이 사신을 보내도 이를 들어주지 않고 열심히 나라를 살려 보라는 식으로 돌려보낸 것. 물론 천년의 사직을 가진 신라에 대한 백성들의 희망과 바람. 그리고 이미 이름뿐인 나라를 받아 봤자 실익이 없다는 정치적 판단 등에서 나온 용인술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들어바치겠다고 사신을 보내고 신하들이 모두 윤허하라는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웃임을 강조하며 인덕을 내세운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후백제에 대해서도 최응이 죽으면서 남긴 상소문에 따라 옥룡사의 경보대사에게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후 신검이 견훤을 폐위시키자 그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냈던 옥룡사의 경보대사를 움직이고 아자개의 서찰을 전하도록 하는 등의 술책으로 견훤을 고려에 망명하도록 했고, 오랜 동안 사양했던 경순왕의 귀부도 받아들여 신라를 병합한다. 그리고 일리천 전투에서 패륜을 저지른 아들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운 견훤을 내세워 후백제의 병력들을 완전히 붕괴시킨 뒤 후백제의 병력들을 한 발 앞질러 포위해 항복하도록 하여 승리를 거두고, 후백제의 황권을 찬탈했던 역신들과 견훤의 아들들을 모두 제거하며 도선대사의 예언이었던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된다.
2 평가
2.1 캐스팅 평가
당시 태조 왕건의 방송 전에 최수종의 캐스팅을 두고 사극의 주인공으로는 맞지 않을 거라는 평이 많았다. 물론 최수종은 신체적 능력이 매우 좋은 연기자 중 한 명이지만 그 동안의 연기 경력에서 최수종의 이미지는 눈 크고 겁 많은 부잣집 도련님 수준이었으니, 사극에서 전란의 시기를 그리는, 그것도 장군부터 시작해 황제가 되는 왕건 같은 인물을 맡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는 말도 많았다. 물론 실제 역사상 왕건도 실전으로 잔뼈가 굵은 장군보다는 온화한 이미지의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웠으니 오히려 이쪽이 고증에 맞다는 주장도 방영 당시에 있었지만, 당시 최수종 외에 물망에 오른 배우 가운데 한 명이 그 유명한 용의 눈물의 주인공 유동근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당시 유동근은 용의 눈물에서 맡은 이방원의 이미지가 아직 너무 깊게 남기도 해서 최종적으로는 최수종이 캐스팅되었고, 우려와는 달리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부터 통일을 이루는 60세 정도까지의 왕건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해 내며 주인공이자 황제로서의 포스를 유감 없이 드러낸 최수종은 이 후에도 해신, 대조영 등을 비롯한 각종 사극물에서 주인공이나 군주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
다만 최수종은 원래 태조 왕건 후속으로 방영되었던 제국의 아침(태조왕건 처럼 이환경 작가가 맡았다.)에서도 왕건의 최후를 연기할 예정였지만당시 기사 내용 어떻게 된 일인지 출연하지 않고 배우 이민수가 대신 맡았다. 대신 죽기 직전의 회상에서 잠깐 출연하였다.
2.2 작중 인물들의 평가
왕건에 대한 작중 인물들의 평가는 아래의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인품과 능력을 공히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
또한 왕건은 작중에서 다른 인물들과 형제관계로 꽤 많이 엮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촌동생 왕식렴과 왕신 같은 직계 형제는 물론이고, 작중의 창작으로 의형제 관계가 된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는 물론 궁예와 견훤과도 형제의 의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중의 전반부 및 후반부를 관통하는 인물들인 궁예와 견훤과의 관계에서도 왕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극한의 인정과 신뢰를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궁예는 먼저 형제의 의를 맺자고 했을 뿐만 아니라 병과 의심으로 정신이 망가지며 강비와 두 태자까지 죽이는 중에도 왕건만은 죽이지 않았고, 관심법조차 왕건을 구해 주기 위한 것이라 실토했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왕건을 언제든 죽일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던 것은 왕건이 자신보다 나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견훤과는 조물성 전투에서 맺은 형제의 의를 기점으로 개인적인 교분이 생기며 견훤은 왕건을 '왕건 아우'라고 지칭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더니 금산사로 유폐된 뒤에는 왕건 아우가 아니면 삼한 통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대놓고 말하고, 나중에는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자신이 이룬 제국을 사실상 통째로 들어 바치게 된다.
물론 왕건 역시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할 때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궁예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것도 숱하게 거절했었고,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궁예를 끝까지 죽이지 않으려 했다. 또한 견훤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우 대접을 받는 것을 감수하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그를 대장부이자 영웅으로 높게 평가한 것은 물론, 정변이 발생해 그가 쫓겨나자 인간적인 측은함을 드러내며 상황이 이런 것이고 입지가 다른 것 뿐이지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적인 면모와 충성심은 적과 아군 모두에게 인정받았는데, 견훤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끝까지 왕건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결국 궁예의 명령에 따라 화형을 선택해 죽은 수달조차도 왕건을 참다운 영웅이라고 인정했을 정도.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견훤을 귀부시키는 원인이 된다.
후고구려-마진-태봉으로 계속 이름이 바뀌고, 군주가 타락하며 점점 위기로 치닫는 궁예의 조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어딜 가든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왕건이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사실 2차 나주 전투 이전부터 수하들은 물론 친척들이나 심지어 아지태까지 왕건에게 반역을 제의했으나, 왕건을 그걸 다 물리치고 오직 묵묵히 제 할일을 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환선길이 삽질을 하던 충주 지역의 군대가 왕건으로 총사령관이 바뀌니 사기가 올랐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말단의 군대나 일반 백성들조차도 왕건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왕건을 소환하라는 명을 받고 수 차례 왕건의 집을 들락거렸던 내군부장 장일이 나중엔 알아서 정보를 술술 불어주고 혁명 시 자발적으로 궁 내에서 내응하고 자기를 희생해 이흔암의 암살 시도로부터 지켜준 것이나, 지속적으로 명주를 차지했던 김순식이 왕건을 자발적으로 알현하며[17] 결국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나, 죽도록 싸웠던 최대의 적인 견훤조차 나중에는 왕건의 아래에 들어올 것을 자청하는 것을 보면 왕건은 가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뢰와 호평을 받고 있다.
물론 황위에 오르기 전의 왕건에게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위험인물로 보고 제거하려 했던 종간과 은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북벌의 망상을 이루고자 회유하였다가 회유에 실패하자 정적이 되며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 왕건을 걸고 넘어진 아지태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왕건을 시기했던 강장자 같은 소인배들은 왕건을 싫어했으며, 임춘길은 백제의 첩자 도우의 꾀임과 자신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궁예 재위 때부터 왕건을 죽이려 했고 나중엔 그 스스로 일으킨 반란으로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중에 왕건의 인품과 능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왕건의 인품과 능력을 경계했기 때문에 적이 된 것이다. 작중 최응과 종간의 대화[18] 에서도 나오지만, 지속적으로 왕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기회를 봐서 줄곧 죽이려 했던 종간조차도 왕건의 능력과 충성심, 인품은 신뢰하고 있었다. 결국 태조 왕건 내에서, 황위에 오른 뒤의 왕건에게는 숙적은 있었으되 정적은 사실상 없었다.
태조 왕건 곳곳에서 묘사된 왕건의 모습은 완성형 군주이자 한 왕조의 창업자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인품과 능력을 창작을 가미해 조화시키면 어느 정도까지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고, 결국 이런 능력에 기반한 후한 작중 평가는 왕건을 돋보이게 하며 삼한 통일로 이끌었다.
2.3 페이크 주인공?
태조 왕건이 방영된지 훨씬 지난 뒤에도 회자될 만큼 사랑을 받은 드라마이지만 임팩트 있는 장면들을 장식하는 것은 왕건보다 궁예와 견훤이 더 많다 보니 드라마는 태조 왕건인데 진 주인공은 궁예와 견훤이 아니냐는 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린다. 역사적으로 왕건이라는 인물은 원래 무장형 군주 보다는 성장형, 만능형 군주로 그려졌고 드라마에서도 큰 틀에서 이 기조를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에, 왕건 역을 맡은 최수종의 연기는 언뜻 보기엔 궁예와 견훤 역으로 열연한 김영철과 서인석의 포스에 약간 밀리는 감이 있어 보인다. 궁예나 견훤이 별도 항목이 생긴지 한창 지나서야 별도의 항목이 생긴걸 보면, 페이크 주인공이 맞긴 맞나보다
그러나 견훤, 궁예보다 강렬한 인상은 덜한 편이었어도, 극중의 대사나 배우 최수종의 연기는 이상적인 주인공이자 군주에 맞는 인덕을 갖춘 '왕건'이라는 선량하고 결백하면서도, 나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한 시대의 영웅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해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근래 몇몇 사극이 자주 일으키는 문제처럼 견훤과 궁예가 그저 막무가내로 악마화 되거나 미화가 지나친 것도 아니었고, 왕건 역시 어떤 이들이든 끝까지 인덕으로 대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적당히 주인공 보정을 넣어 준 셈이라 드라마 전체적으로 보면 왕건의 결백하고 인덕을 갖춘 영웅다움이 설득력을 갖추면서도 빛날 수 있었다.
따져 보면 도드라지지 않는다 뿐이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해도 왕건 역시 주인공으로서 주인공 보정의 수혜를 입은 인물이다. 왕건이 출사한 이후 호족간의 세력 다툼이나 왕건 주변 인물간의 관계[19]가 생략되다 보니 궁예를 섬길 때에는 혁명 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충성을 바쳤던 충신으로서의 의미가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고, 혁명으로 제위에 오른 뒤에는 폐주 궁예를 비롯해 임춘길 같이 자신을 몇 번이고 참소해 죽이려 했거나,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해서도 가급적 죽이지 않으려 하였으며,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기보다 자신 대신 죽어간 충신들을 애통해하거나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인덕에 대한 부분도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다.
또한 역성혁명 이후 정략결혼으로 인한 수난 및 그로 인해 있을 법한 궁중 암투는 초반에 맞은 세 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인들을 거의 모두 엑스트라 취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폭 축소되거나 거의 모두 제거되어, 결과적으로 왕건의 이미지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제 이전의 이미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왕건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주인공 보정을 넣어 주지 않은 것도 아닌 게, 부하 장수들 두세 명이 덤벼도 쩔쩔 매던 수달과 일기토를 벌여서 수달이 칼을 놓치게 하는 장면을 보여 줘 무력으로 띄워 주기도 했다.
물론 태조 왕건에서 단순히 왕건이 군주로서 덕이 있는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신하들을 책망하고 적장자 문제로 조정을 어지럽게 하는 장인들을 향리로 보내버리는 일도 있었고, 유금필을 편애하여 유금필이 신하들의 미움을 사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사서에 기록된 대로 삼년산성 전투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의 가족을 철퇴로 죽이라고 명령하는 냉정한 군주로서의 일벌백계 사례도 보여주었다. 현실보다 훨씬 미화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도 인간적인 허점이나 일부분 감정에 치우친 면모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태조 왕건에서 왕건의 연기가 뛰어난 연기력을 바탕으로 창작과 사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
2.4 기타
최수종은 야망의 전설에서 이정태 역할을 맡았는데, 이 드라마에서 이정태의 형 이정우 역할을 맡은 유동근은 정도전에서 이성계를 맡아 최강의 배우개그를 선보였다.
유달리 의형제 관계가 많은 인물이다. 궁예의 의제이자 유금필, 신숭겸과 박술희의 의형이며, 견훤도 그를 사사로이는 아우로 부른다.
3 주요 대사
왕건의 캐릭터가 캐릭터이다 보니 왕건의 대사들은 보통 군자의 도를 말하거나, 충성을 논하거나, 앞서 유명을 달리한 충신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등의 대사들이 많다. 아래는 그 대사들 중 일부.
(왕건) 나와 폐하는 결의를 한 사이일세. 형이 잠시 고단하고 병들었다고 해서 아우보고 버리라. 이 말인가? 그건 어디서 배운 논리인가?(능산) 주군, 폐하께서는 이미 망녕이 든 사람이옵니다.
(왕건) 그러니까 버리라...? 허허. 큰일날 사람들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아프고 병들었을 때 자네들도 날 버리겠네그려. 정신 차리게, 이 사람들아!! 사람이 정도를 걷지 못하고 다른 길로 빠진다면 멀리 가지 못하는 것이야. 끝까지 충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의리를 다할 때 또 다른 진리가 보이는 것이야! 폐하께서는 나를 의지하고 계시네. 모름지기 사내란,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사내야. 알겠는가?(94화)[20]
태평이 답지 않은 소리! 세간의 눈이 무섭고 폐하의 의심이 두려워서 이 왕건이가 해야 할 일을 못 한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눈치만 보며 숨어다니며 살았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 이 왕건이는 왕건이가 사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야. 알겠는가! 군자는 대로라 하였어. 가야할 길을 돌아간다면 이미 군자가 아니야.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야. 알겠는가? 나대로 말이야! (110화)
((독백)그렇사옵니다. 폐하. 일이 있사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형제의 마지막이옵니다. 폐하. 어찌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있겠사옵니까. 형님 폐하.) 그렇사옵니다. 형님 폐하.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사옵니까... 폐하. 하늘이 원망스럽사옵니다/ 하늘이 원망스럽사옵니다... 형님, 이 아우를 용서하시옵소서. 이 아우를 용서하시옵소서... 형님. (118화)
그대들이 모두 하늘의 뜻이라 하고 백성들의 여망을 앞세우니 계속 마다하는 것도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될 것이오. 이제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를 위해 그들의 청을 아니 받을 수가 없구려. 그러나. 기왕에 혁명의 대열에 총사로 나서는 이상. 나도 장군들에게 청이 있소이다. 사사로이 폐하께서는 나의 의형이시오. 또한 수십년 이 나라를 통치한 군주이시오. 그 분의 목숨만은 보장해 드리고 싶소이다. 신료였던 사람으로서 그 주인의 목을 벤다는 것은, 차마 나로서는 하지 못할 짓이오. 어찌 하겠소이까? 들어 주시겠소이까, 마시겠소이까? (119화)
이럴 수는 없다. 내 목숨 하나 살자고 아우와 제장들을 다 죽이다니. 이럴 수는 없다. 난 아니 갈 것이다. 난 아니 갈 것이야!! 놔라. 이것들 놓지 못할까.. 난 아니 간다. 난 아니 가!! 아니 돼. 아니 돼. 아니 돼.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된다!!!!! (160화)
틀림이 없다. 내 아우가 틀림이 없어!! 얼굴이 없어도 나는 아느니라. 내 아우이니라!! 내 아우야...!! 이렇게 돌아왔구나. 이렇게 왔어. 형을 대신해서 나가더니 이렇게 왔어, 이렇게... 이렇게... 으흐흐흑... 모두들 보시오!! 여기 목이 없이 돌아온 이 시신은 신숭겸 장군이 아니라 바로 짐이올시다!! 짐이 목이 잘려서 돌아온 것이올시다!! 짐이 말이오......!! (162화)
누가 칼을 쓰라 하였는가!! 나라를 배신한 역적들의 가족들이다!! 철퇴를 쓰도록 하라. 칼을 쓰는 것은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해 주는 처형법이다. 역적에게는 아니된다!! 철퇴를 쓰라!! (165화)
글쎄... 아직 믿기지가 않아.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옛날의 저도 나와 같았을 것이야. 저 공산에서 나처럼 이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야. 저들은 포위되었네. 나갈 곳이 없어. 잡아야 해... 이번엔 꼭 백제의 왕을 잡아야 해!! 꼭......!!(170화)
천 년의 사직인 신라국이올시다. 홀로 절을 받음은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이 사람의 절도 받아 주시오.(171화)
최응아...!! 이렇게 가다니... 아니된다. 어떻게 나를 두고 최응이 자네 혼자 가 버렸단 말이냐... 최응아... 최응아!! 황제가 왔느니라. 짐이 왔느니라. 말을 해 봐. 최응아. 최응아... 말을 해 봐. 말을 해 봐...!!! 어흐흐흐흑.... 이렇게 가 버리다니... 젊은 자네가 이렇게 가 버리다니!! 하늘이시여. 이를 어이 하오리까... 이를 어이 하오리까...... 최응아... 최응아....!! 최응아. 어서 말을 해. 짐이 왔느니라... 말을 해!!! 최응아...!! 아니된다... 아니된다 최응아... 어떻게 이렇게 혼자 가 버린단 말이냐... (180화)
어허, 그만 하지 못할까! 우리의 이웃이 힘이 없이 나약할 때 그 약함을 틈타 나라를 받는 것은 천하의 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가서 그리 전하시오. 열심히 나라를 살려 보라고 말이오. / 우리는 이웃이오. 서로가 도와가며 잘 해 보십시다. 암요. 그래야지요. 허허허허.... (187화)
상보 어른. 상보 어른!! 어찌 이리 하시옵니까. 왜 굳이 이리 하셔야 한다는 말이옵니까...? 이 아우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상보 어른을 매시고 싶었사옵니다. (199화)
고맙소이다. 모두 고맙소이다! 그렇소이다. 삼한은 통일되었소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대업을 이루었소이다!! 우리 고려가 이제 삼한의 주인이 되었소이다!! (마지막화)
"마음을 빼앗겼다... 박술희가 말이지? 아니 그 얼굴로 여자를 다 생각했단 말인가?!"(36화)[21]
4 기타
드라마 최후반부 신검이 쿠테타를 일으킬 당시에 견훤은 악몽을 꾸는데, 꿈에서 왕건이 견훤을 꾸짖고선 칼로 목을 베어버리려고 한다. 평소의 왕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꿈속의 왕건은 아주 포악한 모습을 보이는데, 꿈이라 그런지 여기서 견훤은 왕건 앞에서 살려달라고 데꿀멍을 한다. 왕건에게 베일때 깨어난 견훤은 밖의 시끄러운 소리는 군사들이 훈련하느냐고 내는 것이라는 거짓 보고를 받고선 도로 잠자리에 드는데, 이번엔 왕건이 자기 의형제들과 복지겸을 이끌고 나타나 견훤의 목을 베려고 덤벼드는 더욱 무시무시한 악몽을 꾼다.- ↑ 다만, 이 결의형제는 작중의 창작이며 결의형제의 분위기나 모습들은 삼국지연의에서 유관장 삼형제의 결의형제와 비슷한 면모를 풍긴다. 드라마 태조 왕건이 삼국지를 과도하게 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 장면들 중 하나.
- ↑ 강장자는 강비항목에서 보듯 가문을 부흥시킨다는 구실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천박한 인간이었고, 종간은 궁예의 황후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황권 강화 명목으로 채우는 것과 동시에 위험인물임을 첫눈에 알아본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려고 했다.
- ↑ 수많은 전함을 제작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나주의 호족들의 공감(작중 설정상 나주의 호족들은 자신들을 장보고 세력의 후예로 여기고 있었다)을 얻게 할 수 있도록 장보고가 심복 부하들에게 주었다가 비싸게 사서 가지고 있던 특별한 검을 왕건에게 내어주는 등, 결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 ↑ 훗날 세 번째 부인인 충주부인이자,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의 아버지가 되는 충주의 호족
- ↑ 다만 결혼식은 두 번째 부인과 먼저 올렸으며, 그 때문에 정혼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오해한 유장자의 딸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 ↑ 이것도 왕건 자신은 거절했지만, 유긍달이 황제에게 청하여 칙령으로 결혼을 명령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된 것.
- ↑ 제103화 중. 왕건은 뒷자리에 머물러 있고 한참 종간만 말을 걸고 있었는데도 궁예는 아우부터 먼저 알아본다. 물론 종간도 왕건도 궁예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왕건에게 더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대목.
- ↑ 참고로 이 유배를 끝으로 이들 세 사람은 다시는 출연이 없어서, 유배지에서 죽은 걸로 처리되었다고 보아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 ↑ 당연히 태평이 그렇게 하면 죽을 거라고 말려서 궁예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다.
- ↑ 물론 최응의 기지가 왕건을
들었다 놓았던살린 일이기는 하지만 작중에서 궁예에 대한 왕건의 충성심은 혁명을 결심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 ↑ 하지만 왕건의 집안 문제는 셋째 부인까지 서술하는 데에서 그치고 그 이후의 황후 혹은 후궁들은 그저 엑스트라 선에서 그쳤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실제 일어난 문제들보다 상당히 많이 축소되어 그려졌다.
- ↑ 수렁에 빠진 고려의 상황을 타개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왕건의 의형제들이 최응에게 자문하고, 진호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유금필이 왕식렴을 설득한 끝에 독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 ↑ 삼국지의 고사를 차용하여 신숭겸과 김락 등이 왕건과 복지겸의 의관을 입고 전투에 나섰고, 그들이 전사함으로써 왕건과 복지겸 등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왕건은 의제가 자신 대신 죽음을 택한 것에 대해 한동안 한과 울분을 삭이지 못했고, 이것은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 ↑ 처형 명령을 내릴 때 칼을 쓰려는 병사들을 중지시키며 칼은 시체를 온전히 남겨주는 처형법이라고 하며 배신자에게 그러면 안된다며 철퇴를 쓰라고 한다.
- ↑ 작중 대사를 통해 이 모습이 예전의 폐주를 떠올린다고 말하고는 있으나. 분노한 것은 맞지만 사람을 마구 때려죽이던 궁예처럼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실성한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왕건도 맘이 편치만은 않은 듯 눈을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전술했다시피 풍전등화와 같은 그 즈음의 상황에서는 체제 결속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죄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죽이는 모습에서는 궁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애초에 배신자 가족들을 관노로 삼고 끝내도 됐을텐데..
- ↑ 이때 얼마나 공포스러웠냐면 왕건의 신하들과 장수들은 말할것도 없었고, 집행명령을 내린 박술희조차 끔찍해했다. 더 놀라운것은 천하의 그 유금필도 고개를 돌렸다. 이때 반역자가족들의 아이들중 한명이 살아남아 살려달라고 비는데 모두가(심지어 왕건도) 고개를 돌릴정도로 비참했다. 사형을 집행하던 무관조차 망설였다. 그러나 박술희가 끝까지 죽이라하여 결국 그 아이는 죽는다 정말 이때만큼은 왕건이 천하의 미친놈처럼 보이는 장면
- ↑ 아버지인 허월 대사의 명을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김순식의 세력이라면 전쟁에 져서 돌아오는 왕건의 뒤를 칠 수도 있었다. 황제 즉위 이후에도 다른 반란에 대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왕건이 유이하게 놀란 것이 바로 명주와 나주의 반란이었고, 명주를 큰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작중에서 일리천 전투에 무려 군사 2만을 보낸 것만 봐도 김순식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잡힌다.
- ↑ 최응은 종간과의 대화에서 나라를 보존하려면 "무리한 북벌 준비를 중지하시고 아직도 충성이 변치 않은 왕건 장군과 손을 잡으셔야 하옵니다"라고 말하고, 종간이 "왕건? 아지태가 아니라 왕건이라?"라고 반문하자 "백성이 신뢰하고, 폐하께서 신뢰하시고, 실은 내원 어른께서도 신뢰하고 계시옵니다. 다만 왕 장군께서 과분하게 지나친 기대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겠사옵니까."라고 말한다. 종간은 최응에 대해 아직 어린데 세상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대사로 그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 ↑ 대표적인 사례로 형미와 왕건의 관계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 ↑ 왕건이 의리와 충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그 대화 상대가 능산(신숭겸)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사. 먼 훗날 공산전투에서 능산은 왕건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기 때문.
- ↑ 대주도금에게 발리고 돌아온 박술희에게 한 말. 개그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진지한 상황에서 저런 대사가 나올정도면 작중 설정상 박술희가 정말로 추남이긴 한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