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위서』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 |||||
서막 | 호질 | 왕창 | 왕기 |
王基
(190 ~ 261)
젊어서 고아가 되어 숙부인 왕옹과 살았는데, 효자에다 학문과 품행이 곧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으며, 17세에 군리에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학문에 힘썼다. 황초 연간에 효렴에 천거되어 낭중 벼슬을 하다가 청주자사인 왕릉의 상주가 되어 주의 별가가 되었으며, 왕릉에게 조언하여 선정을 베풀도록 했다. 사도 왕랑이 중앙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왕릉이 저지했다고 하며, 사마의에게 인정받아 초빙에 응하여 중서시랑이 되었다.
위명제의 궁전 조영에 간언하거나 유학자로서 왕숙과 논쟁했다고 하며, 안평태수로 승진했다가[1] 대장군 조상의 초빙을 받아 종사중랑이 되었다가 안풍태수가 되어 오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오의 침공에 대해 양주자사 제갈탄에게 조언을 구해 제갈탄을 보좌했다.
240년대에 대장군 조상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왕기는 '시요론'이라는 논문을 지어 충고했고 조상이 태부 사마의에게 죽은 뒤 면직되었다가 복귀해 상서, 형주 지사, 양렬장군이 되었으며, 250년에[2] 왕창이 오나라를 공격하자 그 밑에서 주태와 함께 별장으로 참가해 이릉에서 보협을 공격했지만, 보협이 싸우려고 하지 않자 별동대를 편성했다. 별동대로 30만 석의 군량을 탈취해 오의 안북장군 담정을 사로잡았으며, 이릉현을 설치하여 항복자들을 이주시켜 이 공으로 관내후가 되었다. 즉, 이릉 성은 공략도 안하고 이릉을 얻었다.
상창에서 강하로 옮겨 하구를 견제하여 오나라가 침공하기 힘들게 했으며, 치적을 쌓아 남방에서 그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사마사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인 255년에 행감군, 가절이 되어 사마사가 이끄는 군의 선두가 되어 관구검의 반란 때에는 식량이 있는 남돈을 공격하는 계책을 진언해 남돈을 점령했으며, 문흠을 악가로 보내면서 관구검의 전력이 둘로 나뉘자 관구검이 있는 항성을 공격해 함락시켜 이 공으로 진남장군, 도독예주제군사가 되면서 예주자사를 겸임했다.
안악향후의 작위를 얻었다가 숙부에게 받은 양육의 은혜가 있어 숙부의 아들 왕교에게 관내후와 영지의 일부를 주는 것을 상주해 인정받았으며, 257년에 진동장군, 도독양예제군사를 겸임하면서 제갈탄의 반란 때 사마소를 따라 나서서 오의 장군인 주이의 원군 때문에 군대를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해 수춘에 포위하는 것을 유지하도록 주장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워 오의 무장 우전을 죽였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우전을 일기토로 죽였다.
이후 정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와 동무후가 되었다가 부하에게 공적을 양보하여 부하 중에서 장사, 사마 7명이 후가 되었으며, 258년에는 어머니를 잃었다가 259년에 정남장군,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어 신야에 주둔했다가 261년에 오나라의 장수인 등유의 거짓 투항을 간파했다.
같은 해에 사망해 사공에 추증되었고 경후란 시호를 받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로 이야기에 나오고 후한 말 사람으로 나오다가 역사대로 관구검, 제갈탄을 진압하는 것으로 나온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70대이지만 능력치 총합이 높은 편이라 촉한의 장억, 위의 무장인 이전과 같은 급이다. 게다가 아이템 시요론을 장착하고 있어서 지력 또는 정치에서 부가 능력치를 받는다. 전형적인 문무겸비형 장수의 모습을 보이는 타입. 또한 12편에서부터 지력, 정치가 80대로 상향되면서 문관으로도 장수로도 좋은 효율을 보인다.
삼국지 3에서는 장군이 될 수가 있다. 이상하게 수명이 8[3]인데 0으로 취급되어 있어서 수명이 미칠 듯이 짧다. 거의 60대인 장수가 죽는 것마냥 왕기는 40살의 나이로 죽는다. 게다가 리메이크판에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삼국지 6에서의 일러스트는 극강의 베이비 페이스(...)이다. 진짜로 갓난아기(...)에게 투구만 쓰게 한 모습이다. 문제는 이 인물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는 60세가 넘어서이다. 전술 시뮬레이션 모드에 한 번 등장하는데 이 때가 68세(...).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5/지력 75/정치력 76에 시요론의 정치 +4 보정을 받고 시작한다. 분투, 돌파, 제사를 가진 준수한 장수. 특히 후반기에 등장하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가치가 높은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75/지력 74/정치력 76/매력 75. 시요론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질 지력은 +2가 되어 76이다. 총합 능력치 378로 전체 41위. 전투, 내정 어느 쪽으로 돌려도 후기 시나리오에선 쓸 만하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8/지력 76/정치력 75/매력 75로 총합 381에 전체 35위. 참고로 삼국지 11에서 전 능력 75 이상인 장수는 곽회, 왕기, 여몽 3명뿐이다. 적성도 창, 병기S로 준수하고 특기도 좋은 창장이라서 후반기 무장치고 매우 쓸 만하다. 게다가 모든 능력치가 적당히 높기때문에 영웅집결같은 시나리오에서 작정하고 육성하면 전 능력치 100을 찍을 수 있으며, 모든 일을 시켜도 적당히 잘 하는 올라운더 A급 무장. 특히 225년 이후 후반기 시나리오에서 빛을 발하는 장수.
삼국지 11에서의 특기 때문에 이 문서 1번 왕기는 창장 왕기라고 불린다.
삼국지 12에서는 PS3판에서 새로 추가됐다. 능력치가 복귀 무장치고 매우 높다.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2/지력 86/정치력 85이며, 전작에 비해 지력과 정치력이 크게 오르면서 더 좋아졌다,[4], 심지어 전법은 전군병격이기 때문에 전장에서도 매우 쓸만하다. 전작보다 무력이 크게 너프가 되었지만 능력치가 정사 기준으로 상향되었기 때문에 위빠들은 환호한다. 만총 등 전군병격을 가진 무장이 또 있고, 안 그래도 창병이 약간 부실한 위나라에게 더욱 쓸 만하다.
별개이지만,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중년의 무관 이미지로 차용되었는데, 왕기가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이 250년, 즉 60살 쯤이다. 즉 왕릉과 비슷하게 일러스트의 이미지와 본격적으로 활약한 시기가 전혀 안 겹치는 사람들 중 한명.
삼국전투기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코다이 스스무로 패러디되어서 나왔다. 왕기가 이릉을 얻는 부분을 본 독자 중 하나는 "문관이기에 가능한 승리" 라는 감상을 남겼다. 확실히 단순 군사력이 아닌 행정 지역을 뺐어오는 방식으로 이겼으니 문관의 발상력의 승리다.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
王頎
생몰년도 미상[5]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 위 항목의 백여와는 동명이인이다. 자는 공여(孔璵) 또는 공석(孔碩)
238년에 공손연이 사망하자 현도군 태수가 되어 242년에 관구검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가 비류수 양구에서 동천왕에게 격파되었으며, 동부여에 찾아가 군량을 제공받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지형이 험하여 실패했다. 244년 10월에 관구검과 함께 고구려에게 반격하여 환도성을 함락하면서 귀환했다.
삼국사기에서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무찌르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임금을 추격케 했다는 부분 때문에 충신 유유의 자살 공격으로 246년에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밀우유유 열전에서는 죽은 장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그냥 '위나라 장수(魏將)'라고 나오며, 정사 삼국지에서는 왕기가 현도군 태수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행적이 보이는 것을 봐서는 왕기 본인이 아니라 왕기군의 선봉장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247년에는 대방군 태수로 지내면서 야마타국의 히미코가 구나국과 불화하자 화해할 것을 권유했으며, 이후 천수태수로 임지를 옮겨 재직하다 촉 정벌 시기인 263년에 등애 휘하에서 종군해 견홍과 함께 면죽관을 함락시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다만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에 대한 기록이 기록마다 연도가 달라 심히 애매모호하게 꼬여 있어 선후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왕기가 왜국과 교섭을 한게 유유에게 피습당한 이전의 일일 가능성도 열려 있고 왕기가 워낙 기록이 빈약한 인물이라 고구려 공격때 등장한 왕기와 촉한 공략때 나온 왕기가 동일인물인지도 불분명하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1 |
삼국지 13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문서 1번 항목의 왕기보다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낮다. 하지만 1번 왕기의 능력치가 높은 것이지, 이쪽도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7/71/61/74. 분전, 기사를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0/66/63/76/73에 특기는 5개.
삼국지 11의 특기는 답파로, 이 때문에 이 문서의 2번 왕기는 답파 왕기로 불린다.
삼국전투기에서도 등장. 당연히 1의 인물과는 동명이인. 이쪽은 킹덤의 부저로 등장한다. 이름따라 왕기로 등장하지는 않았다[6] 아무래도 옛 상관 관구검이 방난으로 나온 것에 대한 영향일 듯.
비류 전투 편에서 관구검의 부장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고구려의 동천왕을 추격하다가 유유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러나 간신히 죽음은 면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실제 정사에서도 왕기가 이 때 죽지 않고 나중에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기록과 충돌하지 않도록 적당히 끼워 맞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정사에서처럼 검각 전투 편에서 등애의 휘하로 들어가 촉 정벌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그런데 정작 면죽관 공격에 참여하지는 않고 음평에 남게되는 것으로 나왔다. 결국 그대로 공기화.
여담이지만 촉 멸망에 기여했던 등애, 종회, 위관, 호열, 견홍, 양흔, 등충, 사찬 모두 이후 말년에 전란에 휘말리거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일부는 댓글로 반 농담식으로 유비(혹은 강유, 촉한)의 저주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들 중 유일히 죽는 씬이 없다. 그야 이후에 등장이 없으니까 그렇지 사실 얘 뿐만 아니라 꽤 많다. 단지 듣보 내지 공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