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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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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쓰키 레이지로 | 이누카이 츠요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
犬養毅 (いぬかい つよし) 1855년 6월 4일 ~ 1932년 5월 15일 오후 5시 반.
재임기간 : 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16일
1 소개
일본의 정치인. 총리. 오카야마 출신으로 오자키 유키오와 함께 일본의 대표 민주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별명이 헌정의 신. 그렇기에 일본 민주화 세력의 큰 헛점과 일본 민주화 운동의 실패 원인을 가장 잘 드러낸다.
아호는 모쿠도(목당/木堂)이서 모쿠도 선생이라고 많이 불렸다고 한다.
사실 총리로 재직한 세월은 고작 5개월에 불과하지만, 오랜 세월 정치거물이었고 총리직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었기에 큰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장교들에게 피습당해 총리 재직 중 죽었다(5.15 사건). 1920년대만 해도 나름대로 민주적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이루어질 줄 알았던 일본이 막장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시기에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2 총리 이전
게이오 대학에 입학한 후 신문 견습기자로 취직하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대학 중퇴 후에는 신문사를 창간해(!) 보호무역론을 옹호했다. 견습기자 시절 알던 선배의 인연으로 통계청에 근무하기도 했었지만 곧 퇴직했다. 이때 오자키를 처음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거의 같이 붙어다니게 된다. 신문사, 정당, 잡지사 등등 같은 회사에 입사와 퇴사 시기가 비슷하다. 그리고 오자키가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에 문부상으로 입각하고 얼마 안 있어 공화연설로 사임하자 임시로 문부상을 맡기도 했다.
문부상 시절.
3 총리 시절
이후 총리로 선출될 때까지 오자키와 계속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헌정운동을 계속 해왔는데 중간에 아시아로 눈을 돌려 김옥균, 캉유웨이, 쑨원 등을 지지하고 지원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
민정당의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가 모아지지 않는 내각 의견에 빡쳐서 사임하자 입헌정우회에게로 다시 정권이 돌아왔고, 드디어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 의원들과 원로들이 당시 슬슬 폭주해가던 군부를 잡을 요량으로 이누카이를 선출한 것인데, 결과적으론 악수가 되어버렸다.
총리대신 취임 후
취임한 지 한달도 안 된 시점(21일째)에서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게 된다. 이 때 충격을 받은 이누카이는 사임하려 했으나 덴노의 만류와 사이온지 긴모치의 중재로 유임했다.[1] 이후 이누카이는 원로의원들의 바람대로 군부를 혹독하게 지배하려 들었고, 외교 면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온건주의 노선을 지향하려 노력했다.[2]
4 만주사변과 비극적 죽음
그러나 만주사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요구에 굴복해 만주사변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했고, 이게 이누카이 일생 최대의 오점이 되고 말았다. 중국과 만주, 조선에서 항일운동이 예상 외로 거세게 진행되자 총리가 강성인줄 알고 잠시 죽어지내던 군부는 폭주하고 말았다.
사망기사
5.15 사건이 터진 뒤 우유부단한 총리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젊은 해군 장교(와 육군 사관생도)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총을 쏜 이는 구로이와 이사무). 향년 77세. 일설에 따르면 이 사람의 유언은 "기다려, 말로 하면 알아듣네!"였다고 한다. 쳐들어온 군인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장교들이 문답무용으로 쏴버렸다는 듯 하다. 안습. 차라리 이봉창 의거때 사임했다면 조금 더 살 수 있었을지도...[3]
5 트리비아
5.1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
"일본인은 남의 노복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까닭에 노동자에 적합하지 않다. 때문에 하늘은 조선인과 같은 순종적인 인민을 만들어 이웃끼리 각자 역할을 다하게 했다. 조선인은 정신은 퇴락했으나 신체는 강건하다." (1896년에 쓴 글)
1896년의 글. 얼핏 보면 서로 장단점이 분명하니 공존하며 살아가는게 좋다는 식의 내용인 것 같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확 보이듯이 '그러니 힘만 좋고 우둔한 조선인은 일본인 밑에서 일해라'는 말(...).일본의 민주주의자도 별수 없구만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안좋게 들리겠지만 이누카이가 골수적인 식민주의자, 제국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이게 그 당시의 일본인이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글은 일본인은 고오급 인간이라서 일을 하기 안 적합하니 조선인을 노예로 부려 먹어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이누카이는 이토 히로부미더러 세계에서 가장 비천한 조선에서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 하겠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누카이가 특이한 게 아니라 이것이 일본인이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5.2 사망 당시의 비화
츠요시는 놀랍게도 당일 그 시각 일본을 방문한 찰리 채플린을 만나려고 했고, 이에 그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비서격인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를 찰리 채플린에게 보낸 상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암살 당일에 츠요시와 다케루, 찰리 채플린은 한 자리에서 만났어야 했고, 쿠데타 주동자들은 이 사실을 이용하여 츠요시뿐만 아니라 다케루와 찰리 채플린도 세트로 제거할 예정이였다. 하지만 채플린은 마침 그 날 사전에 잡아둔 스모 경기 관람과 덴뿌라 시식 일정 때문에 그 약속을 미뤘고, 그 사이 계획과 달리 총리만이 암살 당했다. 아들로서는 아버지를 잃은 것은 불행이지만 그나마 그 중 다행으로 찰리 채플린 덕에 목숨은 건진셈. # 안습. 하지만 아들이 살았다고 해도 결국 츠요시는 죽었고 일본은 이에 예정된 파멸의 수순을 밟게 된다.
이후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는 소설가였다가 그가 총리가 되기 직전에 정계에 입문해 태평양 전쟁 이후 전후 의회에서 일본 민주당 총재와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법무대신을 지냈다[4]. 전후 일본 민주당이 정우회와는 대립각을 세우던 일본 민정당의 후예격이라는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고[5], 과연 일본 민주당은 다케루 시기 일본 자유당에 합당되고 만다(다만 합당에 동의하지 않은 잔류파들이 1955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자민당 결성하며 55년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 때문에 아들 다케루가 채플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란 가정이 떡밥거리처럼 다뤄진다고 한다. 부자가 둘다 끔살…/ 혹은 운 좋게 츠요시가 살아난다든가 여러 가정이 가능하다.- ↑ 만약 이렇게 됐으면 그야말로 한달도 안되는 역대 최단 임기 내각이 되었을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1월 8일에 있었고, 이누카이는 이 의거 당일인 1월 8일에 사임을 주청했으나 덴노가 다음날 만류했다.
- ↑ 하지만 정우회는 민정당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참전여론이 강했다. 여하간 이누카이 개인은 국제연맹등의 여론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만주국 설립을 막고 일본과 중화민국이 모두 합의하는 선에서 만주에 자치정부를 두어 양국이 함께 관리하고 일본은 경제권만을 취하는 방식의 합의를 보려는 주장을 했다고. 여하간 이 시점은 일본이 전쟁에 휩쓸리냐 마냐를 결정하는 마지막 분기가 되었고, 결국 헌정 최후의 보루였던 이누카이의 죽음과 함께 일본은 그대로 파시즘의 나락으로 들어가고 만다.
- ↑ 이후 주모자 11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
- ↑ 다만 자유당과의 합당 추진과정에서 탈당파들이 발생하고 요시다 수상이 강화협상 이후 전범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전면 해제하면서 실세했다. 법무대신은 소수당이나마 연립내각의 총재가 받기엔 그렇게 실권있는 자리는 아니었다고.
- ↑ 근데 그렇게 따지면 또 일본 민정당은 일본 정우회에서 와카자키 레이지로 등의 탈당파들이 외부의 호헌회와 연합하여 세운 정당이다. 전후와 전전 정당정치 일본에서도 인물, 계파 중심의 정당 운용은 한국 정당사를 연상케할 만큼 숱하다.
하긴 누가 누구에게서 배웠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