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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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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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42대 정홍원43대 이완구권한대행 최경환
44대 황교안
역대 대한민국 충청남도 도지사
.
32~34대 심대평
권한대행 유덕준
35대 이완구권한대행 이인화
36~37대 안희정

이완구(李完九)
(1950년 7월 16일 ~ )

1 개요

전직 충청남도 도지사, 국회의원, 국무총리
70일 총리

친박계의 거물이며, 친박계내의 충청도 지역 유력 인사.

2 생애

대한민국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원래는 무종교였으나, 후에 가톨릭교에 귀의해서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홍성의 덕명국민학교와 대전중학교 졸업후 서울로 올라가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으며[1], 재학중 행정고시 합격한다. 충청남도 홍성군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홍성군청에서 사무관으로 근무중 군생활을 하였다. 그 후 경찰로 옮겨 홍성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1986년 ~1989년 약 3년간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근무한적있으며, 충청북도지방경찰청장, 충청남도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3 정치 입문

1995년 경찰복을 벗고, 신한국당의 전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치권에 뛰어든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이 있는, 충남 청양군 - 홍성군 선거구로 출마했으며 자유민주연합 조부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시 충청도 일대 특히, 충청남도지방에 자유민주연합의 녹색돌풍이 거셌는데 충남 지방 유일한 신한국당 당선자여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권교체로 공동여당이 된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기고 대변인까지 맡게 된다. 게다가 2000년 재선에 성공한다. 2002년 자민련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복당했고, 후에 대표가 된 박근혜와 인연을 맺게 된다.

3.1 도지사 도정

2006년 시행한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강세에 힘입어 충남지사에 당선되었다. 참여정부세종특별자치시 출범에 박차를 가했지만, 뒤이은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계획안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완구는 격렬히 반발했고 지사직을 사퇴했다.[2][3]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로 컴백했고 새누리당 원내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3.2 국무총리

정홍원 총리의 사임 이후 성균관대학교 출신의 총리감을 찾던 청와대의 눈에 띄어 국무총리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4] 국무총리 청문회에선 평소의 인맥[5][6]을 동원하고, 자신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서 대질전에 해명하는 등의 강경한 모습을 앞세워 청문회를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일보 기자가 녹취한 발언 녹음파일이 공개되면서 언론외압의혹이 불거졌다.

국무총리가 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 강하게 정치인들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패 수사의 드라이브를 너무 강하게 걸어서, 언론이 "저러다가 부메랑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보도를 할 정도였다.

어쨌든 자원외교 관련 수사를 하면서 경남기업 전회장 성완종을 상당히 압박했다. 평소 막역한 사이였던 성완종을 그렇게까지 압박한 이유로는, 첫째 친이계의 자금줄인 성완종을 압박함으로써 친이계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둘째 이완구의 대선 전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충청권의 잠재적 맹주 반기문과 가까운 편이었던 성완종을 압박함으로써 반기문까지 견제할 수 있다는 것 등이 꼽혔다.....

3.2.1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

수사의 압박을 못 이기고 자살성완종 회장이 이완구에게 뇌물을 줬다는 인터뷰와 쪽지를 남긴 것. 당연히 정치계는 패닉 상태가 되었고, 이완구 총리에 대한 청문회도 이루어졌다. 결국 사건 이후 이완구는 식물총리로 전락해 버렸고, 부임 70일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직하며 정치생명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청문회 도중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충청도 말이 좀 그렇다'라는 발언을 해서 야권은 물론 지역구인[7] 부여군을 포함한 충청권에서도 안좋은 소리가 나왔다. 또한 같은 충청권 인사인 성완종 전 회장을 '알지도 못한다'는 발언도 문제가 되었다.[8]

참고로 리스트내 친박 인사들 중에서는 이 사람만 기소되었다.[9] 정치평론가들은 정치권에서 최대한 실드를 쳐줄려고 했는데 발언이 문제가 돼서 못 구해준듯 하다고 말하는 중.적극적이고 강인한 성격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총리가 됐는데 정작 그 때문에 총리를 관두게 됐으니 아이러니.

여담으로 본인은 이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듯 하다. 썰전에서 나온 강용석의 발언에 따르면, '(총리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려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그래서인지 현재까지 자택에서 칩거 중이다.

이완구는 이에 관하여 '정치 자금 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2016년 1월 29일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완구는 항소한 상황이다

그리고 2016년 9월 27일, 항소심에서 법원은 성완종 리스트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향후 거취에 대한 행보가 관심이 쏠리게 되었는데 이후 검찰에서 불복하여 재심이 청구될 수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내홍에 시달렸던 본인의 도덕성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보이며 차기 대선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핵심 인물로 화려한 복귀도 점쳐지며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3.3 진짜 친박의 거물 일까?

국무총리 낙마후 호사가들은 의문을 가진다. 이완구 전 총리가 진짜 거물이었다면 국무총리가 '거물'의 상징이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으로는 대통령 다음이지만 실상은 정권에서 뭔가 안좋은 일이 생겼을 때 최전방의 총알받이 역할을 했던 역사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완구가 총리 내정자가 된 이후, 책임총리가 되겠다는 발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박근혜의 성격상 국무총리가 자기 밥그릇 찾는거에 달가워하질 않을테고, 결과적으로 이 완구는 국무총리 내정이 자신의 정치적 내력에 크나큰 흠이 되었다. 다만 그간 사과총리, 대독총리들의 경력들을 보면 그에 걸맞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력이(주로 법조인, 전문 관료 출신) 근본적으로 대통령에 힘이 쏠리는 구도를 만들었고, 그럭저록 힘이 실리거나, 아예 책임총리급으로 분류되는 총리들의 경우 함부로 할 수 없는 경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완구가 거물급 인사가 맞다는 시각이 많다.

실제 정당 내 1~2인자를 논하는 자리인 원내대표를 지내다가 긴급 차출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친박계가 지독한 차기 권력 부재에 시달려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이완구에게 힘을 실어 주어 차기 대권 주자로 키우려고 했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4 패러디


이 과정에서 비타500 박스를 통해 뇌물을 받았다는 경향신문단독보도까지 나오면서 각종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등 엄청난 굴욕을 겪었다. 이 효과로 한동안 비타500의 매출이 급증하고 광동제약은 팔자에도 없던 주식상승의 호재를 맞았다. 회사원들이 비타500 박스를 가지고 있으면 돈이 들어온다하여 자기 자리에 놓거나 선배 및 상관에게 헌납하려 박스헌팅에 나서는 바람에 편의점마다 병은 진열되어있어도 박스는 없는 웃지못할 상황이 1주일쯤 지속되었을 정도.

그외에도 짱구는 못말려의 오프닝송을 개사한 댓글 등이 흥하는 등, 한동안 큰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이 사건이 터진 뒤 얼마 안 되어 방영된 KBS 드라마 어셈블리에서도 비타 500을 놓고 가는 듯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5 여담

  • 재임 기간이 상당히 짧은데, 70일밖에 안된다. 서리와 임시직을 제외하면 허정 총리(64일) 다음으로 재임기간이 짧다.[10]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사표 수리가 제때 이뤄졌다면[11] 타이기록 내지 1등을 할 수 있었다는 함정이 있다.(4월 21일 제출, 27일 수리)
  • 역대 국무총리 중에서 어린 연령대의 국민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다. 정치와 근현대사에 무관심해 장면, 김종필, 고건, 불멸의 총리를 모르는 사람도 비타500과 패러디 덕분에 이 사람은 안다.
  •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조사가 끝나야 알 수 있겠다만 인터뷰 중에 만약 뇌물을 받았다면 목숨을 내놓겠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근데 이 분이 낸 책이 하나 있는데 제목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1심 유죄 판결이 나왔다...이제 어떻게 목숨을 내어놓을 일만 남으셨다가...2심 무죄 판결로 목숨 안 내놔도 되게 되었다(?)
  • 병역비리 의혹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현역 1급을 받았건만, 행정고시 응시를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재검을 받아 방위병으로 복무했는데, 하필 서울이 아니라 자기 홈그라운드인 충남에서 받아 징병검사 과정에서 외압을 넣었냐 하는 의심을 샀다.
  • 케빈 스페이시와 닮았다는 말이 많다. 그런데 하필 케빈 스페이시의 출연작 중 하나인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각종 음모를 꾸미는 프랭크 언더우드의 모습과 이미지가 겹치는 바람에 더더욱..
  • 전 서울시 만리동 소재의 (현 서울 양천구 목동 소재)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올해의 양정인상을 받는 등 총리 이전까지의 행보는 학교에서도 높게 띄워주었다. 그러나 비타500사태이후 학교에서는 양송합니다.를 외치며 이완구 플랜카드 철거와 동시에 학생들은 모교비판을 하고 있다.
  • 총리가 되었을 당시에는 집안에서도 크게 환호했지만 불과 70일 만에 낙마+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으로 구속크리 등을 맞으면서 사실상 집안 망신 수준으로 추락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집안에서 초상을 치르게 되자 근조화환을 보낼 정도.[12]
  • 혈액암 투병중이다. 정확하게는 다발성골수종을 앓았으며, 이 때문에 충청남도지사 사퇴 후 약 2년넘게 투병생활을 보냈다. 한 때 위독하다고 했으나 본인의 의지와 지속적인 치료로 인하여 2013년 초 정계에 복귀하여 그 해 보궐선거에 당선되었다. 현재도 규칙적인 운동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한다고 하는데 2016년 4월 언론에 의하면 혈액암이 재발한 모양이다. 항암치료 때문에 검찰 출석과 공판도 연기되었었다. 그 간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재발하였다고 한다.

6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청양/홍성)
신한국당35,638 (47.5%)당선 (1위)1998년 자민련으로 당적변경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청양/홍성)
자유민주연합46,633 (69.4%)당선 (1위)2002년 한나라당으로 당적변경
2006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한나라당379,420 (46.3%)당선 (1위)2009년 12월 3일 사퇴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발)
2013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충남 부여/청양)[13]
새누리당30,342 (77.4%)당선 (1위)
  1. 여담으로 서울대를 가기 위해 4수를 했으나, 4번째 대입에서마저 서울대를 떨어지는 바람에
  2. 다만, 지사직 사퇴가 지방선거를 6개월 정도 남긴 시점이어서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3.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참여정부에서 내걸은 안에서 한참을 후퇴한 수준이었고 같은 여당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서 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안희정이 당선되는데 기여하였다.
  4. 이완구는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재학중이던 1974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5. 야당 의원들도 이완구 후보자를 압박하는 걸 꺼렸다. 이완구가 의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썩 괜찮은 편이었던 게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복 가능성, 이러나 저러나 자기들과 동류라는 의식 등이 영향을 미치는지, 역대 정부에서 현직 정치인이 총리 후보로 나왔을 때 낙마하는 일은 없었다.
  6. 한편에서는 정홍원 총리 사임 이후 차기 총리직을 맡을 내정자들이 몇몇 있었지만 내정 단계에서 죄다 낙마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여당 원내대표인 이완구까지 차출했다면 거의 마지막으로 나온 카드라고 봐야한다. 민주당에서도 인사 청문회시에 전에 있었던 후보자들의 낙마때문에 이완구에 대해서는 다소 무디게 압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 역시 많다.
  7. 지역구 의원 겸임. 2015년 현재도 의원직은 유지 중이다
  8. 아직 대한민국이 지역기반의 정치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9. 유일하게 같이 기소된 홍준표 경남도지사(새누리당)는 친박이 아니다.
  10. 정확한 정보 있으면 수정바람
  11. 당시 외교 문제로 해외에 있었다.
  12. 실제로 이 부분을 정리한 위키러가 이완구와 같은 여주 이씨 사람이다. 향렬로는 증조부뻘인 듯.
  13. 전임자 김근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