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국무총리
1 개관
2011년까지 대한민국에는 국무총리 41명과 임시 총리 1명, 총리 서리[1] 5명(이윤영 4회), 내각 수반 4명, 권한대행 5명(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 포함)이 있었지만 임기가 1년을 넘긴 사람은 19명 뿐이었다. (평균 재임일 수는 공식 총리는 450일, 서리로 인준받는 기간을 더하면 469일.)
제6공화국에 들어오면 정확히 평균 366일=1년의 재임기간, 서리로 인준 기간을 더하면 380일이 된다. 지난 5개 정부 24년의 기간 동안 22명의 총리가 있었다. 이 가운데 1년을 넘긴 인물은 8명이고, 이홍구 총리는 정확히 1년만에 사임했다.
이 가운데 대통령이 된 인물은 권한대행으로서 바로 계승한 최규하 한 명뿐. 대통령 후보가 된 인물은 허정, 김종필, 이수성, 이회창, 이한동이며,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인물은 박태준, 이해찬, 한명숙,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인물은 장면, 노신영, 고건, 정운찬이다.
장상 서리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였으나 경선에서 탈락.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은 2000~01, 04~05로서 2차례의 권한대행과 부총리 등으로 여러 차례 총리로 거론되었으나 부인의 위장전입 의혹으로 끝내 총리가 되지 못했다. 이윤영 총리서리는 무려 네 번에 걸쳐서 한국민주당에 의해 총리 인준이 부결되었다.
역대 총리는 백두진, 김종필, 고건 총리가 2회 했기 때문에 38명의 총리가 있었다. 출신은 관료, 그 가운데서도 경제관료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외 법관, 장군, 대학 총장 출신이 있다. 출신대학은 현재의 명칭 기준으로 서울대(전신 포함)가 19명으로 압도적으로 많고[2], 육군사관학교 5명[3], 와세다대학 3명, 연세대 2명[4], 이화여대[5], 국민대, 고려대[6], 성균관대, 도쿄대학[7], 히토쓰바시대학[8], 쓰쿠바대학[9], 구 만주건국대학 등 1명이다.
2 제1 ~ 5공화국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재임기간 | 비고 |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 | |||||
서리 | 이윤영(李允榮) | 1948.7.22 | 1948.7.31 | 9일 | 독립운동가. |
1대 | 이범석(李範奭)[10] | 1948.7.31 | 1950.4.20 | 1년 263일 | 독립운동가. |
서리 | 이윤영(李允榮) | 1950.4.3 | 1950.4.6 | 3일 | |
서리 | 신성모(申性模)[11] | 1950.4.21 | 1950.11.22 | 215일 | 독립운동가.[12] |
서리 | 백낙준(白樂濬) | 1950.11.3 | 1950.11.15 | 12일 | |
2대 | 장면(張勉) | 1950.11.23 | 1952.4.23 | 1년 152일 | |
서리 | 허정(許政) | 1951.11.6 | 1952.4.9 | 155일 | |
서리 | 이윤영(李允榮) | 1952.4.24 | 1952.5.5 | 11일 | |
3대 | 장택상(張澤相) | 1952.5.6 | 1952.10.5 | 152일 | 독립운동가. |
서리 | 이윤영(李允榮) | 1952.10.5 | 1952.10.17 | 12일[13] | |
서리 | 백두진(白斗鎭) | 1952.10.9 | 1953.4.23 | 196일 | |
임시 | 이갑성(李甲成) | 1952.10.9 | 1953.7.27 | 291일 | 전시내각의 임시 총리. |
4대 | 백두진(白斗鎭) | 1953.4.24 | 1954.6.17 | 1년 54일 | |
5대 | 변영태(卞榮泰) | 1954.6.27 | 1954.11.28 | 154일 | 수주 변영로의 형. 외무부 장관 역임. |
임시서리 | 백한성(白漢成) | 1954.11.18 | 1954.11.29 | 11일 | |
헌법 개정으로 직제 일시 폐지 (1954.11.30 ~ 1960.4.26, 5년 150일) | |||||
제2공화국(윤보선 정부) | |||||
내각수반 | 허정(許政) | 1960.4.27 | 1960.6.15 | 49일 | 대통령 권한대행[14], 4.19 혁명 후 선거무효로 인한 내각수반. |
6대 | 1960.6.15 | 1960.8.18 | 64일 | 대한민국 역대 국무총리 최단 재임 기간[15] | |
서리 | 김도연(金度演) | 1960.8.16 | 1960.8.17 | 1일[16] | |
7대 | 장면(張勉) | 1960.8.19 | 1961.5.18 | 272일[17] | |
내각수반 | 장도영(張都暎) | 1961.5.20 | 1961.7.2 | 43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쫓겨남. |
내각수반 | 송요찬(宋堯讚) | 1961.7.3 | 1962.6.15 | 347일 | 군인 출신. [18] |
내각수반 | 박정희(朴正熙) | 1962.6.18 | 1962.7.9 | 21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내각수반 | 김현철(金顯哲) | 1962.7.10 | 1963.12.16 | 1년 159일 | 관료출신. |
제3공화국(박정희 정부) | |||||
8대 | 최두선(崔斗善) | 1963.12.17 | 1964.5.9 | 144일 | 육당 최남선의 동생. 동아일보 사장 |
9대 | 정일권(丁一權) | 1964.5.10 | 1970.12.20 | 6년 225일 | 역대 최장 재임 국무총리[19] 군인 출신. 6.25 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선배 |
10대 | 백두진(白斗鎭) | 1970.12.21 | 1971.6.3 | 164일 | 경제관료 출신.[20] |
11대 | 김종필(金鍾泌) | 1971.6.4 | 1975.12.18 | 4년 198일 | 前 국회의원[21] |
제4공화국(박정희 정권 → 최규하 정권 → 전두환 정권) | |||||
11대 | 김종필(金鍾泌) | 1971.6.4 | 1975.12.18 | 4년 198일 | 前 국회의원 |
서리 | 최규하(崔圭夏) | 1975.12.19 | 1976.3.12 | 84일 | |
12대 | 1976.3.13 | 1979.12.12 | 3년 274일 | 외교 관료 출신. 10.26 사건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 (1979.10.26~1979.12.8)[22] | |
13대 | 신현확(申鉉碻) | 1979.12.13 | 1980.5.21 | 160일 | 경제관료 출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이 되면서 부총리였다가 승진.[23] |
서리 | 박충훈(朴忠勳) | 1980.5.22 | 1980.9.1 | 102일 | 8월 22일 이후 일시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임.[24] |
서리 | 남덕우(南悳祐) | 1980.9.2 | 1980.9.21 | 19일 | 경제관료 출신.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
14대 | 1980.9.22 | 1982.1.3 | 1년 103일 | ||
제5공화국(전두환 정권) | |||||
14대 | 남덕우(南悳祐) | 1980.9.22 | 1982.1.3 | 1년 103일 | |
서리 | 유창순(劉彰順) | 1982.1.4 | 1982.1.22 | 18일 | 한은 총재 지낸 경제관료 출신. |
15대 | 1982.1.23 | 1982.6.24 | 152일 | ||
서리 | 김상협(金相浹) | 1982.6.25 | 1982.9.20 | 87일 | |
16대 | 1982.9.21 | 1983.10.14 | 1년 23일 | 인촌 김성수의 조카. 동아일보 사장, 고려대학교 총장 출신 | |
서리 | 진의종(陳懿鍾) | 1983.10.15 | 1983.10.16 | 1일 | 국회의원 출신, 뇌일혈로 쓰러짐. |
17대 | 1983.10.17 | 1985.2.18 | 1년 125일 | ||
직무대행 | 신병현(申秉鉉) | 1984.11.7 | 1985.2.18 | 103일 |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서리 | 노신영(盧信永) | 1985.2.19 | 1985.5.15 | 85일 | 외무 관료 출신. 국가안전기획부장. |
18대 | 1985.5.16 | 1987.5.25 | 2년 9일 | [25] | |
서리 | 이한기(李漢基) | 1987.5.26 | 1987.7.13 | 48일 | 서울대 법대 학장출신. |
서리 | 김정렬(金貞烈) | 1987.7.14 | 1987.8.6 | 23일 | |
19대 | 1987.8.7 | 1988.2.24 | 201일 | 군인 출신. 공군 창건의 주역. 최규하의 하야를 설득한 인물.[26] |
3 제6공화국 이후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재임기간 | 비고 |
노태우 정부(제6공화국) | |||||
서리 | 이현재(李賢宰) | 1988.2.25 | 1988.3.1 | 5일 | 서울대 총장 역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
20대 | 1988.3.2 | 1988.12.4 | 277일 | ||
서리 | 강영훈(姜英勳) | 1988.12.5 | 1988.12.15 | 10일 | 군인 출신 |
21대 | 1988.12.16 | 1990.12.26 | 2년 10일 | ||
서리 | 노재봉(盧在鳳) | 1990.12.27 | 1991.1.22 | 26일 | |
22대 | 1991.1.23 | 1991.5.23 | 120일 |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27] | |
서리 | 정원식(鄭元植) | 1991.5.24 | 1991.7.7 | 44일 | 교수 출신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28] 서울시장 후보, 브니엘학원 이사장 등 |
23대 | 1991.7.8 | 1992.10.7 | 1년 92일 | ||
24대 | 현승종(玄勝鍾) | 1992.10.8 | 1993.2.24 | 139일 | 교수 출신. 고려대 법대 교수, 성균관대 총장 역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중립내각의 총리 |
김영삼 정부(문민 정부) | |||||
25대 | 황인성(黃寅性) | 1993.2.25 | 1993.12.16 | 294일 | 前 국회의원 |
26대 | 이회창(李會昌) | 1993.12.17 | 1994.4.21 | 125일 |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사퇴. 법조인 출신. 대법관 역임, 97/02/07년 대선 출마 |
27대 | 이영덕(李榮德) | 1994.4.30 | 1994.12.16 | 230일 | 교수 출신.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
28대 | 이홍구(李洪九) | 1994.12.17 | 1995.12.17 | 1년 | 교수 출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
29대 | 이수성(李壽成) | 1995.12.18 | 1997.3.4 | 1년 77일 | 서울대 총장 역임. 서울대 법대 교수. 2007년 대선 출마 |
30대 | 고건(高建) | 1997.3.5 | 1998.3.2 | 362일 | 내무 관료 출신 |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 |||||
서리 | 김종필(金鍾泌) | 1998.3.3 | 1998.8.17 | 167일 | [29] |
제31대 | 1998.8.18 | 2000.1.12 | 1년 147일 | ||
제32대 | 박태준(朴泰俊) | 2000.1.13 | 2000.5.18 | 126일 | 前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출신. 포항제철 전 회장. 군 경력 |
직무대행 | 이헌재(李憲宰) | 2000.5.18 | 2000.5.23 | 5일 | |
서리 | 이한동(李漢東) | 2000.5.23 | 2000.6.28 | 36일 | 前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출신.[30] 2002년 대통령 출마.[31] |
제33대 | 2000.6.29 | 2002.7.10 | 2년 11일 | ||
서리 | 장상(張裳) | 2002.7.11 | 2002.7.31 | 20일 |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뻔했으나 국회 인준에 실패.[32] |
서리 | 장대환(張大煥) | 2002.8.9 | 2002.8.28 | 19일 | 청문회 두 번째 낙마자. 매일경제신문 회장. |
서리 | 김석수(金碩洙) | 2002.9.10 | 2002.10.4 | 24일 | 법조인(대법관) 출신. |
제34대 | 2002.10.5 | 2003.2.26 | 144일 | ||
노무현 정부(참여 정부) | |||||
제35대 | 고건(高建) | 2003.2.27 | 2004.5.24 | 1년 87일 | 내무 관료 출신. 임기 중 대통령 권한대행.[33] |
직무대행 | 이헌재(李憲宰) | 2004.5.24 | 2004.6.29 | 36일[34] | |
제36대 | 이해찬(李海瓚) | 2004.6.30 | 2006.3.15 | 1년 258일 | 현직 국회의원. 참여정부 최장 재임. |
직무대행 | 한덕수(韓悳洙) | 2006.3.16 | 2006.4.19 | 34일 | |
제37대 | 한명숙(韓明淑) | 2006.4.20 | 2007.3.7 | 321일 | 최초의 여성 총리 |
직무대행 | 권오규(權五奎) | 2007.3.7 | 2007.4.2 | 26일 | |
제38대 | 한덕수(韓悳洙) | 2007.4.3 | 2008.2.28 | 333일 | 경제 관료 출신 |
이명박 정부 | |||||
39대 | 한승수(韓昇洙)[35] | 2008.2.29 | 2009.9.28 | 1년 212일 | 외무 관료 출신.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역임 |
40대 | 정운찬(鄭雲燦) | 2009.9.29 | 2010.8.10 | 315일 | 서울대 총장 출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역임 |
직무대행 | 윤증현(尹増鉉) | 2010.8.11 | 2010.9.30 | 50일 | 기획재정부 장관[36] |
41대 | 김황식(金滉植) | 2010.10.1 | 2013.2.26 | 2년 148일 | 직선제 이후 최장기간 총리 역임. 법조인 출신(대법관, 감사원장 역임) |
박근혜 정부 | |||||
42대 | 정홍원(鄭烘原) | 2013.2.26 | 2015.2.16 | 1년 356일 | 법조인 출신,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나 총리 지명 후보들의 사퇴로 유임 |
43대 | 이완구(李完九) | 2015.2.16 | 2015.4.27. | 70일 | 허정을 제외한 최단기간 재임 총리.[37] 관료 출신, 충청남도 도지사, 새누리당 원내대표 역임 |
직무대행 | 최경환(崔炅煥) | 2015.4.27 | 2015.6.18 | 53일 | 경제부총리 역임. |
44대 | 황교안(黃敎安) | 2015.6.18 | 현직 | 법무부장관 역임. |
- ↑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이전에 임명하는 총리. 최근에는 동의를 받은 후에야 임명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제도가 변화, 정착되는 과정의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장상, 장대환의 경우로 부결된 후에도 얼마든지 서리로 있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나오기도 했다.
맙소사사실 이 부결이 된 게 1960년 이래 42년 만인지라 그럴 만도 했다. - ↑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중퇴한 김종필 포함
- ↑ 전신인 군사영어학교 출신 포함
- ↑ 임시 총리를 지낸 이갑성 포함 시 3명
- ↑ 총리 서리 포함시 2명
- ↑ 전신교인 보성전문 출신만이 있다.
- ↑ 5공 때 서리를 지낸 이한기 포함시 2명. 김상협, 이한기 둘 다 전신교인 도쿄제국대학 출신.
- ↑ 백두진. 전신교인 도쿄상대 출신.
- ↑ 최규하. 전신교인 도쿄고등사범 출신.
- ↑ 국방부 장관 겸임.
- ↑ 국방부 장관 겸임
- ↑ ...이자 그 유명한 "우리 국군이 북진하면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 저녁은 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쳤다가 6.25 전쟁 때 개털리고는 이승만과 함께 다리 끊고 피난을 떠난 바로 그 인물.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고,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또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落淚長官) 혹은 눈물의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해방 전 임시 정부 시절엔 이승만의 불합리한 행태에 반기를 들던 비교적 개념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었는지는 미스터리. 그 외에도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각종 비리의 흑막으로 의혹을 받았다. 눈물의 장관 답게 가히 안습한 인물. 근데 이 인간이 최장기간 총리서리...(이갑성의 경우는 임시 총리였다) 웬만한 단임 총리보다도 오래 해먹은 셈이다.
- ↑ 4차례나 총리서리로 지목되었으나 한국민주당, 민주당의 부결로 총리가 되지 못한 비운의 인물. 제헌국회와 무임소 장관으로 복무. 제3,4대 부통령 선거 낙선자;; 여하간 그만큼 자주 서리가 되었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인데, 북한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으로 남북통합의 의미에서 지명되었다고 한다. 이기붕의 부통령 후보 사퇴 검은돈을 뿌리치기도 했던 인물. 여하튼 총리 서리로 있던 기간은 모두 더해보야 35일밖에 되지 않는다. 가히 콩라인의 전설급 인물.
- ↑ 1960년 4월 27일부터 6월 16일까지, 6월 22일부터 8월 12일까지.(대통령 권한대행이던 민의원 의장 곽상훈이 6일만에 사퇴하고 물려줌.)
- ↑ 3차 헌법개정과 제2공화국 출범(1960.06.15)부터 6대 국무총리 재임 시작.윤보선 대통령 당선(1960.08.12) 후 장면 국무총리 지명일(1960.08.18) 다음날 장면 국무총리 선출(1960.08.19)까지.
- ↑ 윤보선이 자신과 같은 민주당 구파라고 지명했으나, 바로 신파들의 대거 반대 몰표로 망했다. 역대 최단 총리서리.
- ↑ 합산 2년 58일로 역대 여섯 번째 장기재임 총리이자 내각책임제 하의 정부 수반.
- ↑ 4.19 혁명에서 군의 중립을 지켜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며, 김종필의 주도로 시작된 용퇴운동에 잠시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났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축출된 장도영의 뒤를 이어 다시 내각 수반으로 복귀. 통화개혁에 반대하여 사퇴.
- ↑ 현재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인 지금은 물론이고, 더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정일권의 재임 기록을 경신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넘사벽(...)
- ↑ 제4대 총리이기도 했다. 경제관료 출신. 총합 재임 2년 49일로 역대 일곱 번째 장기재임 총리이자 총리가 된 인물 중 역대 최장 총리서리. 원인은 전쟁 때문;;
- ↑ 1960년대 중반과 후반 박정희에게 숙청되었으나 이 때 다시 돌아왔다. 이것만으로도 역대 두 번째로 길게 재임한 총리. 김대중 정부 때의 1년 214일을 더하면 6년 47일. 서리기간 167일 더하면 6년 214일. 정일권의 최장기간 재임 기록에 딱 11일 모자랐다.
- ↑ 역대 세 번째 장기 재임 총리.
- ↑ 경제부 인물로 꼬장꼬장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고 12.12 이후 전두환에게 호통도 쳤지만 정작 5.17 내란에서는 무력화.
- ↑ 9월 1일 전두환 취임.
- ↑ 한때 전두환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안기부 항목 참조. 총선에서 대패하여 안기부장에서 사의를 표했더니 도리어 총리가 되어버린 기묘한 케이스. 전두환 정부 최장 재임 총리이자 역대 네 번째 장기 재임 총리.
- ↑ 5.17 내란 항목 참조.
- ↑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서 국무총리가 되었다. 사실 듣보잡이었지만, "광주 사태는 김대중 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라는 정치성 발언 및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등의 배경으로 노태우 정부에 발탁되었다. 위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강경 우익 성향으로 그가 비서실장에서 국무총리가 되자 야당에서 '싸우자!'는 거냐면서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야당의 반대로 비밀회동 후 사임한다. 최근에도 극우 성향 단체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 ↑ 문교부 장관 재임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당시는 불법조직)을 탄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총리서리로 내정된 이후인 1991년 6월 3일 한국외대에서 진행한 마지막 강의(당시 외대 대학원 강사) 직후 외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와 날계란 테러를 당했다. 사건 피해자인 정 총리는 가해자들에 대해 선처 의사를 밝혔지만 학교 측과 공안당국은 가해 학생에게 징계와 형사처벌을 단행했다. 이 사건 이후 운동권 학생들의 도덕성 문제가 이슈화됐고 5년 뒤 한총련 사태 이후 학생 운동권 세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
- ↑ 총리 인준에 성공한 인물 중 서리로 있었던 기간이 두 번째로 긴 인물. (최장은 백두진인데 원인은 전시내각.)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공동정권의 두 번째 주주. 의원 내각제 개헌 시 초대 총리가 된다는 공약을 내세운 상황이었다.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표가 원인. 여하간 서리기간 포함하면 679일로 그것만으로도 역대 7번째 긴 임기고, 서리기간을 빼도 10위권;;
- ↑ 역대 총리 재임기간 5위.
- ↑ 74,027표, 0.3% 득표.
- ↑ 2000년 6월 인사청문회법 이후 최초의 낙마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출신.
- ↑ 제30대 총리이기도 했기에, 성격이 다른 두 정부에서 모두 총리를 지낸 전형적인 성공한 관료로 인정받았다. 두 재임을 합치면 2년 84일이나 되어 역대 다섯 번째 장기 재임 총리.
- ↑ 경제부총리로 두 번이나 직무대행을 맡았던 인물.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사위이다. 직무대행 완료 이후 처조카의 땅문제로 사임한다.
- ↑ 한명숙, 한덕수, 한승수는 모두 청주 한씨로, 한 가문에서 연달아 세 명의 총리가 나왔다.
- ↑ 여담으로 8월 8일 내정되었다가 29일 자진 사퇴한 김태호 총리 후보는 서리가 아니다.
- ↑ 사의 표명은 4월 21일에 했지만, 대통령의 사표 수리는 4월 27일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