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환(방송인)

1937년 12월 7일 ~ 2013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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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충청남도 아산 태생.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목소리는 그다지 늙어 보이지 않았다. '밤의 디스크 쇼' 때나 '지금은 라디오 시대' 때나 별 차이가 없다. ㅎㄷㄷ

대한민국의 유명 라디오 DJ. 덤으로 김기덕과 함께 MBC 라디오 골든마우스의 최초 수상자. 여성시대, 지금은 라디오시대,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디스크쇼 등등을 진행하면서 주가를 높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문화계의 가장 큰 어둠 중 하나였다. 왜 문제인지는 이 항목을 쭉 읽어보면 알게 된다.

2013년 5월 30일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1.1 리즈시절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후, 음악감상실[1][2]인 "디쉐네"의 DJ로 활동하다가 1964년 MBC의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당시 대학 물 먹은 사람이[3] DJ로 활동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연예인을 아주 천박한 직업으로 여겼던 당시에는 고학력 연예인이 드물었다. 대졸자 정도면 방송국 실세들과 어느 정도 대화가 통했기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계통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쉬웠다. 비슷한 예로 배우 오지명이 있는데, 역시 좋지 않은 소문이 많다.[4]

이후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프로듀서를 맡았고, 가끔은 동시에 DJ와 PD를 겸임하기도 했다. 당시 팝송을 소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는데, 이종환은 그래도 대졸자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이쪽 업계가 그렇듯이 1980년대에 그의 방송을 들었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자 그가 얼마나 구라를 떨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평이 많다. 즉 잘 알지도 못하는 어줍잖은 팝송 실력을 가지고 전문가인 양 했다는 점. 팝송에 대한 정보 접근이 미 8군에서 나오는 미국 잡지가 전부였던 시절이니 어쩔수 없었던 면도 있지만, 그나마 그시절 해외언론을 접할 수 있는 방송국에 있었기 때문에, 귄위자 행세를 하려면 좀더 공부가 필요했던건 사실인데, 이분은 전혀 그런게 없었음에도 자신이 전문가인양 한 것은 좋게 보기 힘들다. [5]

이 때부터 그는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노릇을 했는데, 여러 연예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키워 주거나, 혹은 죽이거나 했다. 소위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리는 연예인들이 나타난 게 이 무렵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바로 일명 "쎄시봉 트리오"로 불리는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 '쉘부르'라는 음악 다방을 직접 경영하는 등 사업적인 활동도 했는데, 명동에서 명품 구두가게를 하던 시절에는 자신들의 사단을 동원하여 홍보 활동을 했다. 문제는 이런 것이 거의 강압적이었고 무보수였다는 소문이 많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후 잠시 LA에 이민을 가서 자신의 사단의 일원인 이장희와 함께 교포대상 라디오 방송국을 세웠으나 대차게 말아먹고, 1980년대 중반에 귀국한 후 MBC에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진행한다. 이때도 팝에 관련된 구라는 여전했지만, 워낙에 그를 추종하던 팬들이 많았던지라 <밤의 디스크 쇼>가 진행하던 슬롯의 청취율이 꽤 높았다.[6][7] 그러면서 이문세, 이수만, 유열 등과 함께 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때 공개방송에서도 나이(당시 50대)에 걸맞지 않게 여러가지 저속한 표현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때도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노릇은 여전해서, 그의 휘하에서 큰 가수들이 좀 된다. 이때 이종환 사단으로 불린 사람은 최성수, 도시의 아이들[8] 등. [9] [10]

1.2 1990년대 이후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이미 나이가 환갑에 들어서 그런지 10~20대 취향의 방송은 당연히 그와 잘 안 맞았고[11], 어릴 때 그의 방송을 들었던 30~50대 아줌마 취향의 방송프로로 옮겨간다.(이미 <밤의 디스크쇼> 진행 당시 여성시대 진행을 병행한 바 있었다.) 이 때 연기자 최유라와 진행한 MBC 라디오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공전에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시절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LA 한인방송국과 전화연결로 대한민국 상황을 정기적으로 이야기해주기도 했는데, 나이대가 나이대인지라 지극히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내세워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진행하면서 숱한 구설수를 만들어 냈고, 최유라 씨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결국 2003년 이후 MBC FM4U에서 아침 9시~11시 슬롯에 방송한 <이종환의 음악살롱>을 진행하다가 다시 한 번 구설수에 휘말리는 바람에 하차하면서, 결국 MBC 라디오와 연이 끊어지게 된다. 이후 자숙의 시간을 갖다 서울교통방송으로 복귀해 밤 프로그램인 <이종환의 마이웨이>의 DJ를 맡았다. 방송시간은 초창기엔 저녁 8시~10시였고 2007년 이후에는 새벽 12시~2시로 옮겼으나 아무래도 연세 때문인지 2008년부터는 저녁 10시~12시로 고정. 헌데 간간히 욕설 방송을 해서 경고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국 <마이웨이>는 이상우(1번 항목)에게 DJ 자리를 넘겨주고 하차하였다.

2012년 11월에 나온 보도에 의하면 폐암 투병 중이라고 한다. 결국 2013년 5월 30일 폐암으로 노원구 하계동 자택에서 사망. 향년 76세.

2 평가

구수한 중저음으로 사연을 읽어 줄 때는 영락없이 맘씨 좋은 아저씨같아서, 올드 팬들 중에는 학창 시절의 향수로 인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팬이 많다. 젊은 층에서도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보였던 최유라와의 절륜의 호흡을 기억하는 팬이 있긴 하다.

상술했듯, 198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독보적인 위치 때문에 '팝송 하면 이종환'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1990년대 이후 들어 밑천이 뻔히 드러난 팝 지식으로 인해 그 이상의 매력은 잃은 지 오래됐다. 1990년대 초 자신이 단독으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대차게 말아먹은 후 청취대상을 30~50대 장년층으로 잡아 전환해 성공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만 해도 이종환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향적이고 권위적이며, 성찰이 부족한 언행으로 인해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잦아지면서 안티가 많아졌다. <지금은 라디오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유라는 처음 진행할 때 그의 기세에 눌려서 거의 울 뻔했다는 이야기도 할 정도였다. 2013년 현재야 최유라는 방송인 중에서도 강인한 아줌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처음 진행하던 1990년대 중반 20대 후반의 새댁이었던 최유라가 환갑을 바라보는 시아버지같은 이종환한테 기가 눌린건 당연지사다. 이종환한테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지금은 남자 진행자 요리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조영남최유라 밥인것만 봐도...

3 흑역사

3.1 라디오 방송 중 물의

방송 내외적으로 흑역사참으로 많은 인물이다.

방송 중에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주장이나, 독선적인 의견을 상대가 받아 들이도록 강요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했다. 고민 상담 식의 코너에서 전화 연결을 통해 한 여성 청취자와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전후 사정도 잘 듣지 않고 대뜸 타박을 하며 훈계조로 짓누르는 걸 상대가 마뜩잖게 여기자 점점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 시작했고 이에 놀란 여성이 울먹이면서 전화를 끊은 일 조차있었다고 한다.

2001년 음주운전으로 인해 욕을 바가지로 듬뿍 떠 드시고 바로 이듬해인 2002년에는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를 디스하는 편향된 발언을 하는 것에 청취자들의 비판이 계속되던 중, 자신을 비판한 글을 올린 사람의 개인정보를 빼내 전화를 걸고 개새끼라고 쌍욕을 퍼부은 일이 드러나면서(...) 방송을 잠시 그만두기도 했다. 잠시다 잠시... 금방 다시 복귀했다. 으아니?!

2003년 7월에는 본인이 아침에 진행하던 <이종환의 음악살롱>이란 프로그램을 술에 취한 채 진행해서 혀가 꼬부라진 건 둘째치고 말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갈라지는 목소리로(...) 이로서 청취자들의 분노를 사고 결국 하차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가량 지난 9월 말에 슬그머니 복귀 움직임이 있었지만 극심한 반대 여론에 부딪혀 실패했다. 하지만 2005년에 누군가 리셋 버튼을 눌러 줬다.

물의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방송계에서 영구 퇴출을 시키라는 청취자들의 요구는 오래 전부터 계속 됐고 물러난 일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느새 다시 방송을 하고 있는 그를 반복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물의를 일으킨거야 당연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문제는 이종환의 복귀 후 활동에 대해 단순한 '추억팔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2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위에서 여러번 언급됐지만, 이종환의 이면에는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연예계의 실력자 위치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게 좋은 말이 아니다. 실상 1970년대 쎄시봉 시절부터 그가 데뷔 시켜 스타가 된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그는 단순한 DJ가 아니라 연예계에 막강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부터 쌓인 인맥들은 아직도 방송가 꼭대기까지 첩첩이 쌓여 있을 거라는 점.

이런 영향력이 절정이던 1970~1980년대에는 갖가지 흉흉한 연예비리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으나, 연예계에서 매장 당할 것을 우려한 당사자들이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아 겉으로 드러난 일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많다. 이 분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근데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그 중 아래의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당연히 여기 나오는 내용들은 포털에서 거의 검색되지 않는다. 그나마 찾을 수 있다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정도?플래시로 나오는지라 스마트폰으로는 뉴스 라이브러리 못 본다

이 분에게 밉보인 연예인은 거의 망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타짜로도 유명한 피터 야마구치라는 한일혼혈 미국인 가수는 1980년대 중반 한국 데뷔를 모색했으나, 이분에게 모종의 이유로 밉보여서 수억원을 방송가에 뿌렸는데도 방송에 나올 기회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연예계 진출은 접게 되었다. 지금은 그래서 카지노(갬블러) 관련 쪽으로 돌아갔는데, 그 쪽에서라도 성공했으니 다행이다.

스캔들로 인해 촉망 받던 젊은 여가수의 앞길을 망친 단초를 제공한 일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 여가수가 자해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강력 범죄급의 테러로 인한 것 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것이 바로 이수미 면도칼 자해 사건. 응? 자기 책임 이라는데? 대인배 코스프레 쩝니다.

하지만 그의 일면을 제대로 드러낸 흑역사 중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박성원 자살 사건'이다. 이종환이 프로듀서 겸 DJ로 일하던 1974년 11월, 개그맨 박성원[12]이 이종환 자신을 뒷담화했다는 이유로 이종환이 운영하던 음악감상실에 감금하고 집단폭행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일이 있다. 그리고 피해자인 박성원은 그 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5년 3월 자택에서 자살했다. 향년 23세.[13]

근데 대표적으로 진보적인 가수 신형원은 1980년대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 나와서 "개똥벌레"를 불러서 유명해졌다. 이종환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보수-진보 갈등이 그다지 심한 때가 아니였다. 좌우합작?! 오히려 민주화를 열망했던 시기였던지라 가능한 얘기.

아주 드물게 월간조선에서 빤한 주례사 비평으로 심층 인터뷰를 하였는데, 당시 인터뷰를 하던 기자가 위에 나와 있는 여러 흑역사들을 꼼꼼히 물었는데 이에 대한 이종환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 일품. 이를테면 박성원도 그냥 자기가 무서워서 갑자기 자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썰을 풀었다.

그런데 숱한 흑역사를 만들어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예계에서 이종환을 존경하는 이들이 꽤 된다. MBC 라디오에서 이종환과 오랜동안 인연을 맺었던 가수 이문세의 경우, 이종환을 이영훈과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최고의 인기방송 진행자 때 자신을 고정으로 써 줘서 유명해지고, 히트곡도 많이 쓰게 됐다고. 사실 이문세는 무명 시절 "달리는 중계차"등의 아역 프로그램의 MC를 전전했으나, 이종환의 영향력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를 맡아 1980년대 중반에 탑 스타의 반열에 올라 오늘의 위치까지 왔으므로,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례식에 조문을 온 조용필이 "이종환 씨가 들려 주는 음악을 통해 꿈을 키우고 무대를 그릴 수 있었다. 나에겐 영웅이었다. 방송국에서 뵐 때마다 저나 동료,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거짓말은 안 돼요 아직도 고인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종환 씨는 196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분같다.[14] 대중들에게 좋은 음악들을 많이 들려 주셨다."라고 말할 정도(...) 답이 없다 망했어요 좋은 음악은 선생님이 만든 거잖아요. Y스타에 의하면 이수만도 다녀갔다고 하니... 현재 대한민국 연예계를 지배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대한민국 대중음악사 초기의 공과를 얘기하며 이종환이 어떤 일을 벌이든지간에 계속 강력히 옹호해왔기 때문에 저렇게 구렁이 담넘듯이 지나갈 수 있었다.

저렇게 자기와 코드가 잘 맞는 사람은 철저히 챙기는 반면, 자기 눈밖에 난 사람은 거품 하나 남기지 않고 매장시켰으니, 사후 인물 평은 극과 극일 수밖에 없다. 완전히 뒤돌아서 버리는 건 기본에, 타협도 없었으니...... 문제는 흑역사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도 저렇게 챙기기와 죽이기 모두 자기와의 연줄이 있느냐의 여부에 따른 것이니 제3자 입장에서는 좋게 보기 힘들다.
  1. 레코드나 테이프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1960년대에 팝음악이나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방과 결합된 형태였으며, 고객이 신청곡을 내면 DJ가 구라를 떨면서 틀어주는 방식. 현재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형식이 비슷하다. 영화 위험한 상견례품행제로를 보면 알 수 있다.
  2. 당시에도 가요의 경우에는 그래도 국내에서 음반이 나왔지만, 팝이나 클래식은 라이센스반이 거의 없던 그 시절, 수입원판은 제대로 된 국내 유통경로도 없고 가격도 비싸 구하기가 어려웠다. 미8군 등을 통해서 나오는 음반 등으로 신보를 접하던 시기. 물론 당시 이른바 전축이라 불리우던 오디오의 보급율도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3. 1950년대는 대학진학률이 10%도 채 안되었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고졸조차도 흔치 않았으니..... 중앙대학교가 현재도 들어가기 쉬운 학교는 아니지만, 당시의 이종환은 현재 최고 명문대 출신 연예인들의 프리미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DJ를 연예인이 아닌 방송인으로 본다고 해도, 당시의 방송사 직원의 위상 역시 지금과는 다르다. 지금은 이른바 언론고시라 불릴 만큼 방송사 직원의 직업적 위상이 크지만, 80년대 초반 컬러TV 시대 이전까지는 기자 직종을 제외하면 - 기자는 언론인이라는 부심 - 다른 부문의 직종은 지금만큼의 인기직종은 아니었다. 이종환과 동시대 DJ로 활약한 황인용이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물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70년대 까지는 방송사 월급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5. 물론 한국은 당시 모든면이 그랬다. 방송계도 그랬지만 학계는 훨씬 더 심했다. 이런 면이 개선된 것은 역시 2000년대 들어와서이니 당시 시대의 한계로서 조금 실드는 쳐줄수 있을지도 모른다.
  6. 당시 밤 10시~12시까지의 프라임 타임에 MBC FM - 이종환, MBC 표준FM - 이문세 (별이 빛나는 밤에), KBS - 김미숙/김희애로 삼분 되었는데, 10대 소녀층에서는 별밤이 가장 인기였으나, 남성이나 2~30대 이상은 이종환이나 김미숙을 많이 들었다
  7. 일요일 밤의 공개방송은 별밤과 디스크쇼가 막상막하였는데, 많은 수의 청소년들이 둘 중 하나를 본방 청취하고, 다른 하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고는 했다
  8. "선녀와 나무꾼"으로 유명했던 가수 김창남이 이 그룹 출신이다.
  9. 물론 미국에서 돌아와 방송하던 80년대의 이종환의 위상은 당시 DJ중 POP의 제왕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의 공백기 동안 MBC의 김기덕 2시의 데이트와 KBS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등이 주간타임 팝전문 DJ를 양분하고 있었고, 저녁이 되면 8시~10시 사이에는 KBS 황인용의 영팝스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동 타임에 MBC의 왕년의 인기스타 백형두가 진행하는 팝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당사 음악세계등 음악잡지에 FM 음악 프로그램 인기순위에서는 황인용이 부동의 1위...심야에 전영혁이 진행하는 1시의 데이트(25시의 데이트)는 일반적인 팝이라기보단 록음악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 등을 많이 다루었기에 대중적인 인기는 적었다.
  10. 80년대 까지는 국내 FM라디오 프로그램 편성에서 팝음악이 가요 프로그램보다 많았다. 비율로 65:35 정도...이후 90년대 서태지 이후 가요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FM에서 팝의 비중이 급속히 줄어들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홀로 고군분투, 독야청청하는 시대가...
  11. 1990년대 초반에 MBC 표준FM 저녁 8시~9시 슬롯에서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했지만 이종환답지 않게 1년 만에 프로그램을 내렸다. 저녁 8시~10시 슬롯은 전통적으로 중고생이나 퇴근하는 직장인이 주 청취층인데, 결국 이들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청취율에서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12. 당시 귀여운 뚱보 기믹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 때 연예계에선 상당히 드물었던 현역 대학생(경희대학교 사학과) 개그맨이었다.
  13. 이 사건으로 당시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그의 대학교 친구는 충격을 받아 꿈을 접고 공부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경희대 교수를 거쳐 이찬진과 함께 한글과 컴퓨터 / 드림위즈 부사장을 지냈고,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인라인 스케이팅의 붐을 이끌었던 Dr. Spark's column (박순백칼럼) 운영자인 박순백이 그 사람.
  14. 이후 1986년부터 2007년 10월까지 KBS와 SBS(1996년~1999년)에서 DJ를 맡은 팝 전문 기자 출신의 전영혁도 심야 프로그램인 초보자들이 듣기에는 정말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했던 프로그램 "음악세계"를 진행하면서, 대중은 물론 몇몇 뮤지션들로부터 대중음악의 레벨을 올렸다는 평가를 듣는다. 몇몇 뮤지션들은 이거 들으면서 필을 잡았다고 말할 정도다.하지만 학력위조가 전영혁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