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장제스
1 개요
장제스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장제스 문서에서 분리되었다.
2 출생과 성장
어렸을 때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아명은 상서로운 시작이란 뜻의 뤼위안(서원 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삼국지의 그 주유평?, 학명[1]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 본명 지청(志淸). 그리고 존경의 의미로 선총통 장공(先總統 蔣公)[2] 그래서 대만에서 F-5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할 때 별명을 중정호라고 붙였다.
집안의 전승에 따르면 장제스는 주공단의 3자 백령(白齡)의 후손이며 저장성 펑화현으로 이주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17세기에 장제스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곳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는데 명청교체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원인이 된 듯하다. 그의 아버지는 장숙암(藏肅庵)[3]은 태평천국의 난 시기에 가산을 모두 소실했음에도 가업인 소금 도매업으로 몇년 만에 재기했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제스는 1894년 12월, 일찍 아버지를 잃은 후로 삼촌들의 농간으로 인해 유산을 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과부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10살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4] 그의 어머니 왕채옥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일찍 사별한 충격으로 잠시 비구니가 되기도 했던 여잔데 22세의 나이로 45세의 장제스의 아버지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았는데다가 남편을 잃고 나서는 생계를 위해서 다른 지방으로 떠났는데 이방인이란 이유로 백안시를 당했다. 관리들이 장제스를 감옥에 넣었던 것도 그의 일가가 타향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5]
이후 1899년 고향 계구진(溪口鎭)을 떠나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여러곳을 떠돌아다니며 각지의 스승들에게 고전을 강의받았다. 이후 1902년에 동자시에 응시하지만 무질서와 부패에 실망하고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을 끊고 만다. 이후 1905년에 쑨원에 대해서 최초로 인지하고 혁명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06년, 장제스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여 도일하지만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일본어만 공부하고 다시 귀국, 어머니를 설득한 후 바오딩(保定)육군속성군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며[6], 졸업 후[7] 좋은 학업 태도와 성적을 인정받아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한다.[8] 그 시기에 그는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는 혁명 사상을 접하여 혁명의 뜻을 품게 되었고 그 의지를 보이기 위해 변발을 잘라 집에 보내는 선전포고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이후 중국동맹회에 입회하며, 같은 저장성 출신인 중국동맹회 간부인 천치메이(진기미)로부터 호감을 얻고 그의 정치적 제자이자 심복이 되었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이미 귀국하여 상하이의 지배자가 된 천치메이는 장제스를 일본에서 불렀다. 장제스는 자신이 탈영병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군복과 군도를 학교에 소포로 부친 다음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천치메이를 돕게 되며 이 과정에서 항저우 봉기의 결사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이었던 천치메이는 장세스에게 황진룽(황금영), 두웨성(두월생), 장소림(장샤오린), 장징강(장정강), 다이촨셴=다이지타오(대계도), 천궈푸(진과부), 천리푸(진입부) 등을 소개해 준다.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모두 상하이 암흑계의 3대 대부이며, 특히 두웨성은 청방의 수장이자 그의 비밀 후원자였다. 장징강은 상하이의 거부이자 국민당의 원로로 그가 당 총재가 되게끔 만들어 주었다. 다이촨셴은 장제스와 의형제를 맺어 훗날 중화민국 고시원장직을 역임한다. 천궈푸와 천리푸는 천치메이의 조카들로 장제스의 충복이 되어 국민당 조직부, CC단, 중앙조사통계국(남의사(藍衣社)를 의미한다.) 등의 수장이 되며, 중화민국 4대가족인중 진씨(천씨) 일가를 이루게 된다.[9]
한편 1913년경에는 그 동안 사용하던 이름 지청(志淸)을 버리고 이름을 중정(中正)으로 개명한다. 또한 필명으로 사용하던 개석(介石)은 자(字)라고 사용한다.[10]
천치메이에 대한 장제스의 충성심은 대단히 높았고 천치메이의 정적인 타오청장(도성장)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병원에서 쏘아죽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측근들은 타오청장이 장제스를 죽이려고 해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상식적으로 병원에 혼자 있는 사람이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하겠는가... 여하튼 이후 장제스는 천치메이와 함께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해 여러차례나 봉기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얼마후 천치메이가 자금을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외출했다가 여섯명의 괴한에게 암살당하자 좌절하여 10년 가까이 상해 암흑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32세의 나이로 14세의 천제루를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한다.
1921년 쑨원(손문)이 국민혁명 운동을 이끌며 광동에 자리를 잡자 장제스는 쑨원을 따라 광동으로 가며, 곧바로 쑨원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쑨원을 이상론자라고 비웃는 천중밍과 노선 차이로 자주 마찰을 빚었고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23년 광동 군벌 천중밍(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총탄과 포화가 난무하던 시내를 뚫고 쑨원과 제2차 호법군 정부가 피신해 있던 군함 융펑[11]에 승선하여 쑨원을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이 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류전환, 리쭝런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도움으로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를 다시 정복하여 정처없이 떠돌던 국민당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 북벌과 반장전쟁
이후 장제스는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면서 혁명사업에 투신했고 쑨원의 명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 레프 트로츠키와 만나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쑨원이 자신을 절대로 신임해주지 않는다고 자주 불만을 표출하며 상하이나 고향인 시커우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자주 했고 이때마다 쑨원은 장제스를 달래야 했다. 이 시기 국민당의 3대 거물 중 한사람에 들어가는 보로딘이 쑨원의 고문으로 국민당에 합류하게 된다. 보로딘은 쑨원을 개명한 지방총독 정도로 낮게 평가했지만 어쨌거나 성심성의껏 국민당과 협조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1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다.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 개교일. 쑨원 등과 함께)
한편 쑨원의 총애를 받던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국민당의 자체적 군사력을 양성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제스는 점차 국민당군의 실력자가 된다. 이 시기 그의 아들인 장징궈가 소련 유학을 떠났다.
1925년, 쑨원이 죽었다. 한국에선 장제스가 쑨원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쑨원은 장제스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일이 없고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쑨원의 후계자 자리를 쟁취했다. 쑨원에게 장제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측근 심복 정도의 위치였다. 장제스는 광저우를 탈환하려는 군벌 천중밍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장군으로써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쑨커의 태자파, 왕징웨이와 후한민의 당권파, 국민당 원로들의 노동파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지지하며 당권파에 몸을 담고 있었다. 장제스는 류전환을 비롯한 쓸모없어진 군벌들을 청소하여 국민당의 병력을 통일시켰다. 이 시기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매우 심하였고 특히 소련의 지원을 입은 좌파가 강성하여 당내 우파는 물론, 주변의 군벌들과 열강 세력의 우려를 사고 있었다. 놀랍게도 장제스는 이 시기에 좌파에 속했다. 장제스는 자신을 싫어하던 우파의 수장 후한민과 쉬충즈가 쑨원의 비서 출신이자 좌파의 거두인 랴오중카이를 암살하자 왕징웨이의 명령을 받고 이들을 숙청했다. 또한 최후의 발악을 가하던 천중밍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왕징웨이, 보로딘을 이은 국민당의 3대 거물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정'을 통한 하이난 섬과 광둥 지역의 확보로 군사적인 업적도 드높아졌다. 이 시기 중국의 여러 청년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의 좌우 대립은 사그라들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 끓고 있었다.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밀월관계이던 왕징웨이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의 커넥션을 의심했고 국민당 우파는 장제스를 좌파 똘마니로 보았다. 게다가 새 소련 고문인 쿠이비셰프가 장제스보다 왕징웨이를 지지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다. 그는 다시금 소련을 방문하여 이 위기를 타개하려다가 소련에 간 사이에 실각할 점을 두려워하여 취소하기도 했다. 장제스를 지지하던 보로딘이 펑위샹과 회동하러 자리를 뜨자 장제스는 보로딘이 자신이 아니라 펑위샹과 연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즉각 자신의 권력기반인 황푸군관학교를 정비하며 선제적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3월 18일, 중산호 사건에서 국민당 좌파의 장제스 납치 음모(?)를 뒤엎으면서 국민당의 정부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후한민, 왕징웨이(왕정위)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쑨원의 후계자이자 국민당군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다. 사실 이 중산함 사건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정말로 장제스 납치 시도가 있었단 말, 장제스가 있지도 않은 납치 시도를 조작하여 일으킨 사건이란 말, 그리고 당시 반국민당 언론이었던 자림서보가 내놓은 장제스의 국민당 좌파 토사구팽설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소련, 친좌익 성향이었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저우언라이의 귀뜸도 무시하고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었다. 중산함 사건 전날까지 장제스의 집에는 긴장한 공산당원들이 들락였는데 자림서보는 국민당 좌파들이 국민당 우파를 없애기 위해 장제스의 힘을 빌리려고 했고 장제스는 수락한 척하면서 거꾸로 국민당 좌파를 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민족이 아니라 소련에 충성한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소련고문들을 추방했다. 장제스는 아직까지 자신의 좌파 성향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으나 돈독했던 보로딘 등과의 관계가 훼손되었고 이로써 국민당 우익은 크게 약진했다.
(1926년 6월, 북벌 출정을 선포하며 군을 사열하는 장제스의 모습)
1926년 7월 장제스와 국민당은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바이충시, 리쭝런, 탕셩즈, 탄옌카이, 리지선 등을 국민당에 끌어들였고 우페이푸, 장쭤린 등을 잇달아 격파하고 우한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자세한 것은 장제스의 북벌 참조.
하지만 중산함 사건으로 싹수를 보인 그가 북벌로 힘을 얻어 소련 고문 보로딘 해임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이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직후인 1927년 4월 12일 "상해 사건"[12]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동년 2월에 우한(武漢) 국민정부를 공격해 국민당 내 공산당 세력을 거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후 그는 갓 스물이 된 아내 천제루를 갖다버리고 쑨원의 처제이자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쑹메이링(송미령)과 결혼하였다. 이때 장제스는 천제루에게 쑹메이링과의 결혼은 오로지 중국 통일을 위한 정략결혼일 뿐이니 5년 후에 그녀와 재결합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자신의 난징 정부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미 천제루는 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후였다. 그나저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긴 했다. 부처님의 대리인, 닛뽄군과 마오쩌둥 유학이라는 빌미로 미국에 갖다버려진 천제루는 중국 외교관들의 감시 속에서 결국 수차례 자살기도를 했고 1933년에 귀국하였다가 이후 1960년대에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자신과 장제스의 혼인증명서를 첨부한 회고록을 1971년에 내놓은 다음에 사망했다. 장제스는 이 회고록이 출판되지 못하도록 로비를 하였고 실제로 회고록은 장제스도 죽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28년, 그는 드디어 난징정부의 수뇌로 취임한다. 그러나 왕징웨이의 우한 좌파 정부와 광시성 파벌들이 반항하고 있었고 국민당에 저항하는 군벌들도 많았기에 같은 해 2차 북벌 뒤에도 그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결국 장제스는 북벌 뒤에도 여전히 큰 세력을 자랑하던 펑위샹(풍옥상), 옌시산(염석산), 리쭝런(이종인) 등의 군벌 실력자들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한다. 사전에 국민당원으로 가입했으면서도 3년 동안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며 주판을 튕겨보던 장쉐량(장학량)이 펑위샹 등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봉천군을 이끌고 장제스 편에 가담함으로 장제스의 우세를 확고히 해주었다.
4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군벌의 세를 꺾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이를 갈아오던 공산당 토벌을 위해 "초공작전"을 시작하지만 국민혁명군의 한계와 군벌들의 비협조로 오히려 공산당에게 막대한 무기 지원만 해주는 꼴이 되었다. 결국 열받은 장제스는 중앙군을 대거 동원하고 독일인 고문들의 협조와 미국의 자금원조를 얻어 매우 체계적인 초공 작전을 실시함으로서 공산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근거지에 쫓겨난 공산당은 유명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고 한때 수십만에 달했던 홍군이 옌안에 겨우 새 근거지를 마련했을 때는 3만 명이 조금 넘는 수로 몰락한 후였다. 이 과정에서 독일 고문 오토 브라운, 28인의 볼셰비키, 장궈타오 등이 몰락하고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1인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이 '붉은 심장병'이라 불렀던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해 최후의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투입되었던 것이 만주사변으로 본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과 토비 출신의 북방 군벌인 양후청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초공 작전은 공산당과 토벌과 더불어 군벌 세력 약화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앞세우는 한편 중앙군을 군벌 영지에 보내서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군벌들이 이를 좋아할 리가 없었고 쓰촨 군벌 룽윈을 비롯한 많은 지방군벌이 공산당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 태업행위를 한 바가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인해 자신의 근거지에서 쫓겨나면서도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했던 장쉐량은 아예 초공 임무를 띠고 왔기 때문에 태업을 할 수도 없었고 태업을 하면 자신의 근거지와 더 먼 푸젠으로 쫓겨날 처지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위기에 처 해있었다. 결국 장쉐량 등은 "빈대를 잡으려다가 군벌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날려먹는" 초공작전에 반발하여, 비밀리에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다. [13]
마침내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점검하러 시안으로 온 장제스를 장쉐량이 연금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한다.[14] 결국 그는 장쉐량의 "공산당과 화해하고 일본을 물리치라"는 요구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풀려난다.[15] 이렇게 내키지는 않지만 2차 국공합작은 실행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 독일인 고문들을 초빙하는 한편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강력한 독일식 중앙군을 양성하고 이탈리아와 미국의 협조로 공군을 양성했으며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 난징 등을 공업화하여 비행기를 자체생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중국이 건실한 국가가 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장제스의 권력도 약했다.[16]
1931년 만주사변을 획책하여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강탈한 일본은 러허 사변으로 만리장성 쪽으로 자꾸 영토를 확장하며 중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장제스는 힘이 부족하니 힘을 길러 나중에 맞서겠다는 방침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양측의 긴장은 노구교에서 폭발,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일본의 주전파들이 폭주하면서 중일전쟁을 발발시키고야 만다. 결국 장제스는 기존의 방침을 포기하고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초반의 전략적인 실수로 화북과 동해안의 핵심 공업지역을 모두 잃고 충칭(중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물자 부족과 왕징웨이를 비롯한 거물들의 배신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의 정신적 지주로 군림하면서 8년에 걸친 기나긴 항일 전쟁을 지도하여 마침내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이 대륙에서 붙잡아둔 일본군은 관동군을 합쳐 총합 410만으로, 필리핀, 뉴기니나 그밖의 섬에 전개한 일본군 전체의 몇배에 달했다. 이 병력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로 동원되었다면 미국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했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장제스는 처형이자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송경령)과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장제스는 쑹칭링이 소련에 가 있는 도중에 소련에서 새 애인"들"을 만났다고 하는 등의 날조 기사를 퍼트리고 쑹칭링은 장제스가 5천만달러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로 대응할 정도였다. 이유는 국공합작을 지지한 쑨원의 노선에 대한 장제스의 반감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장제스를 푸른 수염같은 자라고 부르며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결혼하려 할때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쑹아이링, 쑹메이링의 뜻이 확고했다. 더구나 쑹칭링은 그 당시 국민당의 독재정책과 공산당 탄압에 반기를 들고 국민당을 탈당해 버렸으며, 쑨원의 아내라는 이유로 국모 대우를 받았다. 이후 1935년 쑹칭링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 신청을 하는등 친공적 행동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5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8년 간의 전쟁 끝에 장제스는 3500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침략자인 일본군을 물리치고 중일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얻었으며,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의 점령지는 물론 그 전에 빼앗긴 만주, 내몽골, 대만을 반환받았다.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어차면서 그야말로 아시아에서 일본을 대신한 "지도 국가"가 되었다.[17]
그랬기에 여러 삽질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 시점까지의 상황은 장제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는 미국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나치 독일 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게 전술 지원을 받고, 항공기까지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와 국민당 내부의 시기상조란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국공내전을 재개하여 만주 깊숙히 진군하여 하얼빈까지 공산당을 몰아붙이면서 통일에 성공하는 듯 하지만,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이 그에게 화를 불러왔다.
그가 미국의 마셜 장군의 사실상 강압적인 정전권고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계속하려 했던 것은 만주는 당시 중국 최고의 공업지대이었기에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장제스는 공산당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어쩌면 유방을 살려두어 화를 부른 초한지를 교훈으로 삼았을지도) 그가 자신들의 중재를 깨고 전쟁을 재개한 것에 분노한 마셜과 트루먼은 만약 장제스가 진군을 멈추지 않으면 중국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5억 달러의 차관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물주의 압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46년 6월 7일 마셜의 개입으로 장제스가 진격을 정지하고 정전 명령을 내린 사건은, 그로서의 자신 일생의 최대 실수라고 회고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바로 전날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의 포기를 건의할 정도로 중공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하얼빈을 잃는다면 중화민국군이 당시 중국 전체 산업생산력의 90%를 차지하던 동북지역의 산업 기반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정전으로 인해 중화민국군 내부의 전력 이동 정지[18]까지 겹치고...OTL
하지만 애초에 국민당군은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는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중일전쟁 당시의 전투 의지는 사라진 상태였고 보급선과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고 너무 마구잡이로 진군하던 참이라 반격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붕괴되기 딱 좋은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탄탄히 해둬야할 후방 정리가 전혀 안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군벌들을 때려잡기 시작하면서 장제스의 중앙군을 제외한 군벌군의 대오들이 잇달아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시기를 피크로 하여 국민당은 기울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렸다가 오히려 소련군이 넘겨준 일본군 무기로 무장을 대거 강화한 공산당은 린뱌오군이 만주에서부터 반격을 개시했고, 이어 패퇴하면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던 펑더화이, 천이가 지휘하던 다른 방면군들도 일제히 반격을 하면서 전세를 뒤집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심양, 요양 등지에서 국민당군은 참패했고 쉬저우 전역에서는 정면대결에서도 완전히 패주하고 말았고 이에 고립된 부작의가 베이핑에서 항복하면서 공산군에게 막대한 인력과 무기를 안겨주어 공산군 숫자를 4백만명으로 늘리고 말았다.
이에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장강(양쯔강)을 경계로 천하를 반분하자"고 제의하면서, 이를 위해 1949년 1월 21일 총통직을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을 총통 대리로서 시간을 끌게 했으나, 진짜 목적은 서남부 일대에서 대규모 징병을 할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은 평화협상을 하면서도, "전범 장제스를 넘겨야 협상에 응하겠다"고 요구했는데, 이는 국민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공산당은 4월 20일 장강 이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만약 국민당군이 장강을 중심으로 철통같은 방어를 고수했다면 해군, 공군이 압도적인 국민당에게 승산이 높았겠지만 문제는 화북의 처참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전력의 손실이 너무 컸으며 장제스의 군벌 약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홍군이 진격을 재개하자 장강의 방어병력들이 집단으로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허망하게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장강을 건너 오자마자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국민당의 주요도시는 모두 공산당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국민정부는 임시수도인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2일 내륙의 옛 임시수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11월 29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청두로 다시 이동했으며, 12월 7일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장제스는 쓰창(西昌) 대본영을 순시하고 돌아온 후 12월 10일 타이베이로 떠났고, 이후 두번 다시 대륙 본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6 국부천대와 대만 시절
결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대만 계엄령과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기반으로 본토 수복을 위한 철권통치에 들어간다. 이 시기 타이완은 타이완의 기적(혹은 경험)이라고 불릴 정도의 고도성장을 누렸으나 그와 동시에 타이완 독립, 본토 수복노선 중지, 민주화 요구등의 주장을 모두 강경하게 탄압하였다.[19]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시도했으나 결국 죽는 그 순간까지 타이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민국 정부가 UN에서 축출된 이듬해인 1972년 5월, 마지막으로 총통 취임식을 거행했다. 당시 취임식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는데, 장제스가 부총통 옌자간이 마주보는 장면에서 "형님, 안됐습니다(大哥, 不好了)!"라는 자막이 등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방영되고 있던 대만의 TV 드라마에 나온 대사였고, 당연히 방송 사고였지만, 생방송 중에 나온 것이어서 불길한 장면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5년,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유언으로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중국을 구하라' 로 말했다는 설이 있다.[20]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보고 굉장히 착잡했나보다. 공식적인 유언은 장제스가 타계하기 약 1개월 전인 3월 29일 구술하고, 타계 직후에 발표된 "나는 상투를 자른 이래, 총리(쑨원)의 혁명을 쫓아 살아왔으며, 총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도로서 있지 않은 적이 한시도 없었다", "삼민주의를 실천하고 대륙의 국토를 수복하라" 등의 내용인데,[21] 이 유언은 오늘날 중정기념당의 대형 장제스 동상 아래에도 조각되어 있다.
장제스의 장례식은 국부 쑨원을 모신 타이베이 국부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준비하던 미국은 장례식에 농업부 장관을 대표로 보내려다가 중화민국의 항의를 받고 부통령을 보냈으나 불과 4년 후에 미국은 단교하게 된다.
살아생전 장제스는 자신은 패배자이기 때문에 본토를 수복할때까지 타이완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22] 죽는 순간에도 중화민국이 대륙 본토를 수복할때 그때 본토의 고향에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탓에 장제스의 유해는 지하에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다.[23] 그의 유해가 안치된 타오위안(桃園) 현의 츠후(慈湖)는 장제스가 생전에도 고향과 비슷한 경치라며 종종 방문했다고 전해지며,[24] 현재 중화민국군 헌병대가 관리 중이다. 1988년 타계한 아들 장징궈 전 총통도 비슷한 형태로 안장되었고, 장제스의 유해와는 약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6.1 본토수복의 꿈과 무산
장제스는 대만으로 퇴각한 직후부터 줄곧 무력을 통한 본토수복을 포기하지 않았고,[25] 이는 대만에서 국민당 정권이 대만 본성인들의 민주화 요구를 계엄령과 권위주의 지배로 억누르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당시에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26]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정부가 1950년대의 대약진운동 실패,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적인 불안정, 소련과의 대립 등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던 점에서 나름 승산이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1960년대에는 이른바 '국광'(國光)이라는 이름의 보다 구체화된 본토수복 계획을 세우고, 중국 동남부 해상에서 다수의 비밀 군사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키피디아의 관련 항목 그러나 이들 작전의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고, 1970년대 미중관계 개선과 중화민국 정부의 UN 축출로 인한 외교적 고립이 가중되면서 더 이상 실행되지 못했다.
현재 중국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꿈꿨던 공산주의 중국보다는 장제스가 꿈꿨던 자본주의 강국 중국에 더 가까워졌단 점에선, 역설적으로 장제스가 중국 대륙에서 가졌던 비전은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잃었음에도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學名. 여기서는 학생 때 쓰는 이름. 중국의 문벌 있는 집안에서는 입학할 때가 되면 아버지나 스승이 학명을 지어준다.
- ↑ 그냥 스페이스 한 번(반각)으로 先總統 蔣公이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先總統"과 "蔣公"을 글자 하나가 들어갈 만큼(전각) 띄어 쓴다. 띄어쓰기가 없는 중국어에서 이렇게 특별히 띄어쓰기를 하는 것은 나태(挪抬)라고 해서, 해당 인물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용법이다. 줄여서 장공(蔣公)이라고 불린다.
- ↑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장지총(蔣肇聰)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어느쪽이 옳은지는 추가바람.
- ↑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고 저항하는 장제스 일가에 대한 부패한 관료들의 보복이었다. 장제스의 어머니가 세금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 돈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 ↑ 고생만 한 왕채옥, 즉 왕차이위였지만 죽어서나마 이름을 남겼다. 중화민국의 최고 훈장 이름이 장제스의 어머니 이름을 딴 차이위(采玉) 대훈장이며, 본국과 외국의 국가원수에게만 주어진다. 마잉주를 제외한 전직 중화민국 총통은 다 받았다.
- ↑ 이 떄 중국인을 흙 속에 세균에 비유한 일본인 강사에 맞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 당시 장제스는 매일 아침마다 새벽 운동을 하는 등 규칙적인 군대 생활이 체질적으로 몸에 맞았다고 한다. 그 걸과 저장성 전체에서 15명을 뽑는데 장제스는 3등이었다.
- ↑ 국민당 공식사료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 21기 졸업생이라고 나와있지만 육사 기록에는 장제스가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했다는 기록이 없다. 장제스가 군사적 기반이 없다는 약점을 보완하기위한 윤색일 것이다.
- ↑ 저 진과부는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데,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에 지원받을때도 저 CC단과 남의사 루트로 지원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항목의 '중국과의 관계'를 참조.
- ↑ 중정이라는 표현은 역경의 예과 부분의 '상전에 말하기를, (의지함을) 그치는 날이 없으면 점괘가 길하다는 것은 중정하기 때문이니라.'(象曰 不終日 貞吉 以中正也)에서 따온 것으로 중정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곧고 올바름. 또는 그런 모양.'을 뜻하는 말이다. 개석이라는 단어는 역경의 그 바로 윗부분에 '돌에 의지하는 상이니 (의지함을) 그치는 날이 없으면 점괘가 길하리라'.( 介于石 不終日 貞吉)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 ↑ 1900년대 말에 일본에 주문해서 완성된 700t 대의 포함으로, 주로 장강유역의 초계를 목적으로 하는 전투함이다. 쑨원 사후에 쑨원의 호인 중산함으로 개명된 뒤 중산함 사건(공산당원이던 함장이 장제스의 지시를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중일전쟁 초반에 일본군의 공습으로 장강 중류에서 격침되었다가 21세기 초에 선체가 인양되어 복원작업을 받아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 ↑ 혹은 상해 쿠데타. 현재 중국에서는 상해정변이나 4.12반혁명정변이라 한다,
- ↑ 다만 이부분은 추측에 불과한데 장쉐량은 101세로 죽을떄까지 시안사변 직전에 공산당과 어떤 접촉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았기 떄문이다.
- ↑ 이 과정에서 쿠데타군 가운데 양호성의 제17로군은 서안 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군벌들은 말로는 항일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같은 중국인의 생명과 재산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 ↑ 시안사태는 일종의 쿠데타였으며, 장쉐량은 본래 장제스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그가 죽으면 중국의 대일 항전 능력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발빠른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자신의 요구조건에 동의하자마자 그를 풀어주었고, 난징으로 함께 돌아가 사태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장제스는 장쉐량의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훗날 대만으로 함께 도망간 장쉐량은 거의 죽을 때까지 연금신세를 당해야 했다. 그의 입장에서 장쉐량은 쿠데타 역적이었다는 걸 생각해볼 때, 그나마 시안사태에 이때 동참한 양호성이 1949년 중경에서 일가 모두가 살해당한 데 비하면 훨씬 양호한 대접이었다.
- ↑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후한민 체포에 반발한 국민당의 광둥 파벌, 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한 19로군이라거나 광시 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광둥군벌 천지탕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 ↑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국력에서도 일본은 중일전쟁 때 여러면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이걸 다 뒤집어 엎은 것.
- ↑ 정전 기간 동안 대부분의 병력은 여전히 서북지역과 사천, 운남에 머물러 있었다.
- ↑ 1950년대에 호적상에는 있는데 행방불명되거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 10만명이 넘었고 중화민국 실효통치지역 전역에서 10개의 정도의 강제수용소가 존재하였으며 시설은 매우 열약했다.
- ↑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이라 영파(지금의 저장 성 닝보 시) 사투리가 굉장히 심해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당직부관 웡위안(翁元)만이 그 말을 듣고 의사에게 이 말이라고 전했다. 진짜 그런지 진실은 그만이 안다고.
이 양반 2016년 기준 아직 살아 있으니 저 세상 가기 전에 진실을 이야기해 주길. - ↑ 이러한 유언 방식은 1925년 쑨원이 타계 직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분투하라"고 구술했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다만 유언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일부 주장도 남아있다.
- ↑ 다만 진먼다오 일대는 몇번 방문했다.
- ↑ 2005년도에 타이베이 국군 묘지에 안치할 계획이었으나 무산되었고 2007년도에는 저장성에 안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2008년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취소되었다.
- ↑ 장제스는 이곳에 본토수복을 위한 군사작전을 지휘할 비밀 지휘소까지 건설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훗날 공개된 정부문서에서 밝혀졌다.
- ↑ 대만에서는 주로 '반공대륙'(反攻大陸), '반공복국'(反共復國), '대륙광복'(大陸光復) 등의 용어로 쓰였다.
- ↑ 다만 미국은 6.25 전쟁 당시 중국과의 대결을 경험하면서 중국과의 직접 대결로 악화될 수 있는 대만의 본토 선제침공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대만과의 동맹에 따른 방위공약 대상도 대만과 인근 도서지역으로 한정시켰다.
왠지 비슷한 시기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노선에 신경쓰였던 것과 비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