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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기사 "外相會議에 論議된 朝鮮獨立問題蘇聯은 信託統治主張 蘇聯의 口實은 三八線 分割占領 米國[1]은 卽時 獨立主張"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
한국판 엠스 전보 사건.[2]
다된 밥에 재를 뿌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사건.
기레기의 끝판왕
동아일보의 주도로 사전 오보되고, 조선일보에 의해서도 보도된 초특급 대형 사건.[3][4]
그리고 한반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만들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이자 분기점[5]
해방 이후 한반도의 모든 비극적인 역사는 이 오보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한반도의 분단이 외부적인 이유와 내부적인 이유가 뒤섞인 것도 이 오보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 오보사건이 한국의 현대사를 뒤바꿀 정도로 너무나도 기가 막힌 사건이라 누군가 배후에서 고의적으로 오보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도 나돌아다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후술할 '남한 우파/미군정 배후설'과 '북한 좌파/소군정 배후설'이 있다.(북한 좌파/소군정 배후설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요약하자면 1945년 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뒤바뀌어 일을 제대로 꼬이게 만들어준 만악의 근원[6][7]
2 배경
때는 광복을 맞은 지 고작 4개월이 지난 해방 직후의 한반도. 미국(제임스 F. 번즈)과 소련(뱌체슬라프 몰로토프[8]), 그리고 영국(어니스트 베빈)의 외상은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한반도 문제를 협상하고 있었다.(모스크바 3상회의) 이때 회담에 참여한 미, 소, 영과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포함하는 4개국의 신탁통치의 아이디어가 구상되기 시작했다.
이 때 동아일보의 오보가 1945년 12월 27일에 발표된다. 기레기는 이미 이 때 부터 존재한 것이다. 과연 동아... 보도 내용인즉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협상 결과가 나왔으며, 소련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미국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전오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스크바 3상회의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결과가 보도되었다.[9]
막사과(莫斯科)에서 삼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져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 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 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 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상상력 창의력 대장. 이렇게 기사를 쓰면 망합니다. 원조 기레기 닥쳐 제발 닥치라고!!
이는 기본적인 사실부터 왜곡한 오보였는데, 애초부터 신탁통치안은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전후처리를 위해 미국에서 만든 정책이었다. 본래 해방된 식민지국가 전반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조선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만 적용된 것. 게다가 처음에는 미국 측에서 신탁통치기간 50년을 주장할 정도였다. 35년 일제 통치가 끝나고 50년 미국 통치라니 이게 실현되었으면 1990년대 중반까지 신탁통치를 받을 뻔했다[10] 통치의 주체를 임시정부로 둘 것이나, 4대국의 협의체로 둘 것이냐에 대한 논의에서도 역시 소련의 논리가 승리해 임시정부가 통치 주체로 정해졌다.[11] 즉, 3상회의의 본질은 신탁통치의 여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 한마디로 그 회의에서 신탁통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었다. [12]
3 원인
일단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터진 오보이므로 동아일보 기자가 직접 취재를 잘못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또 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정책은 국제적으로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었고 따라서 해외에서도 이런 내용의 기사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즉, 뉴스통신사[13]에서 기사를 사온다 하더라도 이런 오보가 날 수는 없었다.
오늘날 현대사 연구자들은 대개 미군정을 오보의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 실제로도 그 당시에 미 군정은 기사 내용들을 매우 철저히 검열했으니, 최소한 이 '오보'를 용인한 것은 분명했다. 정확한 출처를 따지면 이 보도는 미국의 통신사인 AP가 워싱턴에서 발송한 기사를 받아적은 것이다. 또 일본에서 발행하는 미군 기관지인 성조 태평양판에서 AP와 UP를 출처로 하는 같은 내용의 기사가 동일한 날짜(27일)에 실렸는데, 그 기자를 작성한 사람은 '랄프 헤인젠'으로 이전부터 날조기사로 유명했다. AP와 UP통신에서 보도한 원문이 남아있지 않아 이 이상 추적하긴 어렵지만 랄프 헤인젠이 됐든, 미국의 어떤 세력이 되었든 간에 날조된 기사가 미국에서 전달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오보가 동아일보라는 한국민주당 송진우, 김성수의 정치세력의 근원지인 동아일보에서 최초 보도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미국이 한반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조성한다고 해도 이에 호응하는 조선인 정치세력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해방이후 미국과 국내의 친미정치세력 간 암묵적인 동의 하 오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엄청난 오보사건을 터뜨렸는가 라는 물음에는 (미군정과 국내 친미정치세력을 배후로 본다면)소련과 국내 공산주의자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장 유력하다. 즉, 신탁통치는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상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기에 미국과 친미세력의 입장에서는 신탁통치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발심을 소련과 공산주의자에 돌림으로써 그들을 견제하고자 했다는 것.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보계획은 잘 맞아떨어진 셈으로, 본래 일제 청산을 위한 민족운동이 주된 프레임이었던 정국은 신탁통치 오보 파동 후 해방 6개월만에 반공/반소를 내건 좌우 이념갈등으로 그 프레임이 바뀌어 버렸다. 더욱이 반탁 운동은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로까지 격화되지는 않으면서 충실한 반공/반소운동의 성격에 머무르며 남한내에 중소세력에 불과했던 친미세력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된 냉전시기에 38선 이남에서의 미국과 친미세력의 영향력은 매우 증가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는 행운이든 불행이든 해방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정도로 그 사후 영향력이 막대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뒤 이어 5년 후에 일어날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침공과 그로 인한 한반도 최대의 내전은 미국이 인과응보를 제대로 받은 셈이며 자기들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를 처리하기 위해 자국을 포함한 수 많은 나라들이 참전을 해야했던 셈이다.
4 진행
4.1 우파의 반탁운동
이 보도가 발표되자 남한 내부는 좌우익 할 것 없이 반탁 여론으로 들끓었으나, 좌익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좌익-찬탁, 우익-반탁으로 갈려 좌우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인터넷과 같은 매체가 없었고 신문이 정보력을 독점하고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그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한국은 해방 직후 민중들이 희망에 부풀어 있는 상태였으며[14] 일제강점기를 거친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제2의 식민지 지배'를 연상시킬 수 있는 신탁통치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컸다.
사실 당시 정세상 신탁통치는 곧 국제연맹 시절의 위임통치나 다름없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또 태평양과 아프리카 일대의 국가들과 같이 원래 식민지였기에 국제연합 창립 후 위임통치를 이름만 바꾼 신탁통치로 이전된 국가들은 존재했어도, 아시아는 물론이고 광복이나 독립을 맞은 직후 신탁통치에 맡겨진 국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왜곡보도가 있은 후에 전국적으로 극심한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한독당(김구계)과 이승만 세력 등은 반탁운동을 전개하여 열세였던 지지도를 극복하게 되었다.
4.2 조선공산당 등의 지지운동
반면 사회주의 계열은 보도를 듣는 순간 멍했고 그들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석해 본 결과 강대국들의 결정은 일제와 같은 식민통치가 아닌, 조선만의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되어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 운동을 전개한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신탁통치는 아직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한국을 안정시키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된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에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 조건이었지 일제와 같은 식민지 통치를 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연말까지는 좌익 쪽도 "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이라며 반탁을 주장했다.[15] 그러나 1946년 1월 1일 신년을 기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3상 회의 지지로 입장을 선회#, 일부 중도 좌파 민족주의세력이 좌파 노선을 이탈하게 된다. 한편 이는 우익 쪽에 의해 '찬탁'으로 치부되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장은 남한의 찬탁 운동이 소련의 지령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16] 하지만 김일성과 김두봉 같은 북조선 공산당 측은 러시아어 합의문에 'опека(후견(tutelage)/보호감독/신탁통치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음 사전)'이란 단어를 이용해서 신탁통치가 아닌 후견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영어문에서 'trusteeship(신탁통치)'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였다.] 이 때부터 사회주의 계열은 우익진영으로부터 '소련의 지령에 놀아난 매국노'라고 대차게 까이게 되었고 남한 내의 지지기반은 크게 위축되었다.
4.3 중도, 비반탁 진영의 분위기
“신탁통치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 3상 회의 결정의 요점이다” 결의안에 임시정부의 협력이 조건으로 명시돼 있으므로, 일단 임시정부를 만들고 임시정부가 협력을 거부하면 신탁통치는 무산된다” |
송진우는 이를 알았기 때문에 우익이었어도 기본적으로 건전 민주주의에 찬동하는 쪽이었고 파시즘적 반동행위를 거부하였기에 신탁을 찬성했고, 중도파인 여운형과 안재홍은 즉각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다가 선임정수립, 후반탁을 주장하면서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발표했다. 한편 김규식은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했으나 후에 신중히 검토해 보니 반탁운동이 대국적으로 생각해 볼 때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신중한 입장을 보이게 된다.[17]
앞서 보듯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의 주된 요점은 조선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으며[18] 신탁통치는 임시정부가 충분히 뿌리내리기까지 시행될, 아직 민주주의가 미성숙했던 한국을 위해 행해질 부가적인 조치 내지는 옵션에 불과했다. 그 기한도 (최초 결정 당시) 5년. 물론 길다고 보면 긴 기간이지만, 이미 의회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을 충분히 거친 선진국의 협조와 지도를 받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었으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이성적 판단에 기반한 민주주의적 보도가 아니라, 대중의 피해의식과 분노의 감정을 부채질한 일종의 언론플레이'였다고 볼 수 있을까...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었고, 오보를 주도한 것은 맞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보도한 것을 알고 바로 잡으려 했었으나 이미 사태는 늦어버렸고, '반탁을 삼가고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주장한 바로 며칠 뒤에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갈등이 격화되자 설립된 한국민주당의 김성수, 국민당의 안재홍,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3상 협상안의 내용은 인정하나 신탁통치는 반대한다'는 것에 합의한 4당 코뮤니케를 도출하였다. 이런 점에서, 좌파와 중도파의 선택은 찬탁이라기보다는 반탁 열풍에 휩쓸리지 않은 합리적인 판단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4당 코뮤니케는 오래가지 못했고, 조선공산당은 점점 지하화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로 균형추를 잃은 남한의 정국은 찬탁과 반탁의 대립으로 점점 혼란과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4.4 북한의 경우
북한 민중들도 해방에 의해 희망에 부풀었던건 마찬가지였던지라, 북한의 분위기도 초기에는 김일성 등을 포함한 북조선로동당도 신탁통치를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반탁이 대세가 되지 않고 찬탁이 대세가 되었다.
이는 조만식 등의 우파, 기독교 세력 등의 반탁 운동을[19] 김일성이 연금 등의 강경책으로 불식시켰음은 물론, 소련과 김일성 등이 오히려 이러한 정국을 역이용해 먹었기 때문이다. 이는 찬반탁이 지극히 정략적인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5 결과
사실 모스크바의 3상회의의 선언문은 그것이 나오는 순간에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성격과 권한에 대한 지정이 포함되지 못했고,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제헌 의회와 제헌의회에서 만들어진 헌법에 대한 어떠한 초안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상태였다. 이는 뒤이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논의되기로 한 문제였으나, 정작 신탁통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미소공동위원위 결렬이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반탁운동을 하는 정치단체를 참여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1, 2차 결렬의 모든 원인이 이 문제였는데, 특히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던 1947년 제2차 미소공위 경우, 초창기 '先임정, 後신탁통치'이라는 합의까지 이끌어냈지만, 역시나 반탁운동 단체 참여 문제에서 원점으로 돌아가 결렬돼 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좌우합작운동 항목 참조. 소련은 반탁운동을 주장하는 우파세력을 빼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싶었으나[20], 미국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런 동상이몽 속에서, 두 나라는 이 와중에도 단독정부의 불가능을 사실상의 현실로 받아들이며 분단을 강화하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분단이 되었고, 1950년대 초반 6.25 전쟁이란 민족의 비극까지 부르고 말았다. 기레기 하나가 한 국가의 미래를 바꿔버렸다.
6 평가
6.1 신탁통치에 우호적 관점
어찌되었든, 4개국 신탁통치의 목표는 조선반도에 항구한 민주주의 독립정부의 이식이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궁극적으로는 분단마저 안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겨레 21의 기사 참고.#
오스트리아의 경우도 연합군과 소련군이 함께 진주해 동서로 분단되었으나, 좌우합작 하에 현명하게 분단을 극복한 사례가 있었다. 4당 코뮤니케가 국민 다수의 합리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면, 이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보사건은 이런 적은 가능성마저 날려버리는 결정타였다.
무엇보다도, 당장 신탁통치 보다도 더 직접적인 미군정만 3년간 실시되었다. 광복이 1945년 8월 15일인데, 남한 단독정부가 우여곡절 끝에 성립된 것이 1948년 8월 15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신탁통치 반대는 거의 도움이 안되었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6.2 신탁통치에 비판적 관점
다만 앞서 보듯이, 한정적인 정보가 주어진 상황에서 신탁통치는 이성적으로는 납득 가능한 판단이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들의 의지는 (비록 그것이 오도된 것이었더라도) 비교적 확고한 것이었다.
또 신탁통치안 자체가 실현되지 않았고, 분단을 막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유로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앞서 보듯이 신탁통치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위임통치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아직 미성숙한 조선 인민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은 엄연했다. 여전히 조선반도는 미소 두 나라의 결정에 운명이 달려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구나 이승만 등의 반탁운동 주도자들이 반드시 악의적 목적으로 반탁운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김구, 이승만 등을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바란 것은 조국의 빠른 독립이었으나, 정작 조선에는 3년이 지난 뒤에야 불안정한 두 개의 정부가 출현했다.
무엇보다 분단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란 가정에 대해서도 '오스트리아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차이를 무시했다'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또 4당 코뮤니케는 쉽게 무너졌고, 좌우합작시도 역시 우익세력을 견제하려는 미군정의 지원이 사라지고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으며, 남북협상 역시 실패로 돌아갔음을 고려했을 때 중도세력이 합리적 지지를 받을 가능성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6.3 남한 우파세력 결집의 시발점
하지만 한국의 반공주의, 냉전보수주의의 시작이 대개 반탁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탁통치 반대는 제2의 독립운동이며, 공산당은 여기에 반대한 매국노였다"라는 논리는, 이후 많은 보수정파들이 스스로의 정통성 기반을 임시정부와 반탁운동에서 찾는 논리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또 남한 내에서 친일파 세력들이 이를 악용해 자신들이 '반공투사', '애국자'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대표적으로 친일문학 소설가 김동인이나 일제 관동군 밀정으로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선 이종형, 친일경찰 김창룡과 노덕술 같은 경우였다.
6.4 총론
여하간, 이 사건은 '기사는 잘 써야 한다(…)'라는, 평범하면서도 그만큼 중요한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6.5 교과서의 평가
현재까지도 몇몇 역사교과서에는 "소련은 찬성, 미국은 반대"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금성출판사 교과서마저도. 이것은 남북한 대치 상황 등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지적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니, 정정되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으로 보인다. 70년 넘게 정정되지 않고 있는 오보
2010년 3월 1일에 나온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258페이지에 "...소련이 38선 분할을 구실로 신탁통치를 주장한 반면,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는 잘못된 보도였다"라고 설명한 구절이 첨가되었다. 독립된 박스로 다룰 정도로 오보사건이 나름대로 비중있게 나온다.
반면 8차 교육과정에서 바뀐 한국사 교과서의 경우(천재교육, 다른 교과서는 추가바람)엔 310페이지에 사진 하나와 '국내 언론의 잘못된 보도는 신탁 통치 논쟁을 격화시켰다'와 그 옆에 '이 결정은 공식 발표도 되기 전에 일부 언론을 통해 신탁 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국내에 알려졌고...하략'으로 다소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 예전에는 미국을 美國(아름다울 미 나라 국)이 아니라 米國(쌀 미 나라 국)이라고 적었다. 이는 일본의 영향으로, 나중에 美國으로 바뀐 한국이나 중화민국과는 달리 일본은 지금도 米國으로 표기한다.
- ↑ 두 사건 모두 왜곡된 소식 때문이라는 점과 이후의 역사에 대한 판도가 제대로 뒤바뀐 점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
- ↑ 여담이지만 한국사에 길이 남을 또다른 오보는 조선일보에서 있었다. 일제의 의도적인 만보산 사건 확대로 조선인들에 의해 수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관동 대지진과 동경대학살에 비할정도는 아니겠지만, 비뚤어지고 약자에게만 폭력적인 민족주의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 정확히 말하면 기사는 조간인 조선일보가 먼저 나왔다. 그러나 석간으로 이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서 1면에 위와 같이 주석을 달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것은 동아일보였다.
- ↑ 북한과 대한민국으로 분단되게 한 큰 사건이며, 미군정이 집권하게 된 계기.
- ↑ 이 엄청난 오보 사건으로 인해서 그간 지지기반이 매우 약했던 한민당과 한독당(임정) 세력들이 한순간 분위기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 ↑ 나비효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오보의 여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만약에 오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과장을 보태서 한반도의 모든게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다.
- ↑ 칵테일 잘 만들기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 ↑ 정확히 말하면 12월 27일에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신문은 26일날 만들어져 27일에 나왔다.
시간을 달리는 보도공동선언문의 내용은 여기# 참조. 실제 내용은 12월 30일에야 작은 박스 기사로은근슬쩍보도되었으나, 연말이었고 이미 반탁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는 시점인지라 묻혔다. - ↑ 이건 얄타 회담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이디어로, 3상회담에서는 10년으로 줄어들었으며, 소련의 강한 반대로 논리에서 밀려 5년에 합의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그렇고 신탁통치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그렇고 루즈벨트들은 한민족에게 재앙이 되는게 전통인가보다 - ↑ 물론 소련이 천사(…)라서 그랬던 건 아니고, 4대국 협의체로 하면 미·소·영·중 4개국이 한반도를 4분할하여 통치하게 되니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 세력이 셋인데 반해 사회주의 세력은 소련 혼자가 되기 때문에 남북 분할 상태와 임시정부 체제를 유지코자 했던 것이다.
- ↑ 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 문서에선 신탁통치가 임시정부 수립의 전제 조건으로 언급되고 있다.
물론 고작 위키에 언급 되었다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좀 뭐하지만... - ↑ AP통신이나 로이터통신처럼 뉴스를 방송사나 신문사에 파는 회사. 우리나라에도 연합뉴스, 뉴시스, 뉴스1등이 있다.
- ↑ 비록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의 토지가 신한공사로 그대로 넘어가 토지개혁이 이뤄지지 못했고, 소작농이 소작농 그대로라 불평불만이 누적되고 있는 상태기는 했지만.
- ↑ 초창기 조선공산당에서도 이 신탁통치안 놓고 반대성명을 내놓을 정도였다.
- ↑ 단, 박헌영의 경우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게 그가 찬탁으로 선회하게 되었다고 처음 알려진 시기인 1946년 1월초 뉴욕타임즈의 존스턴 기자와의 기자회견에서 '조선이 소련연방에 편입되길 바란다'라고 발언한 보도에서 문제되었다.# 이 기사는 사실관계를 잘못전달한 왜곡편집으로 매도당한 측면이 있다.#
- ↑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운형과 안재홍, 김규식은 좌익용공세력 취급을 받게 되었고, 우익 소속의 정치깡패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했다.
- ↑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다르다. 말년의 임정은 거의 반공-친국민당 세력의 성격을 띠었다.
- ↑ 조만식의 정치 성향을 보면 반공주의까지는 아니고 중도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끝까지 신탁통치 반대를 주창한 것은 신탁통치를 일제하에 제기된 자치론과 비슷하게 생각한 것 때문으로 해석된다. 또 동아일보의 오보도 조만식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조만식은 자치론에 대해 그랬듯이 신탁통치 주장을 '독립을 유보하자'는 당치않은 주장으로 받아들였고, 일제강점기의 신간회 결성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 무저항의 시민불복종 노선을 걸었던 듯하다.
- ↑ 실제로 소련과 공산당은 민주정부가 수립되면 얼마든지 자신들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그에 따른 마스터 플랜을 가동시키는 중이었다.
소련이라고 한국이 평화롭게 독립하길 바랐겠는가(베트남의 사례가 그러했다.) 이미 북조선 지역은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함께했다. 반면 미국 등의 자본진영은 이를 거부하는 형편이었다. 국공내전과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원인도 이러한 총선거 구상이 붕괴되면서 일어났다. 반대로 UN주도로 1948년에 남한에서 5.31 총선거가 실시될때는 이미 분단이 확실화된 상황이었기에 북한은 총선거를 반대했고, 그리하여 200석의 남한지역에서만 총선거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