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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建相
1882년 12월 19일 ~ 1974년 5월 14일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창랑 장택상이 그의 12촌 동생이다. 자는 찬성(贊成), 호는 소해(宵海)이다.
1882년 경상도 칠곡도호부에서 태어났다. 이후 집이 경상도 동래부로 이전하면서 동래부에서 자랐다. 좌천재에서 한문을, 육영재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공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민족차별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이후 미국 발프레이조 예비학교, 인디애나 주립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1920년 말 베이징 시로 건너가 국민 대표자 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 입각, 국무위원, 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 근로인민당 부위원장과 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인민당을 이끌었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기간 중 북한 측의 일방적 협상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 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서노디었다. 이후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사후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